고구려의 후손 징기스칸
>> 징기스칸이 항상 병사들에게 전쟁에 앞서 하던 말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나는 몽골의 푸른늑대다. 너희는 신의 군대다. 우리의 신인 탱그리와 시조 불테치노는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너희에겐 패배란 없다. 나를 따르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
>>몽골족은 혈통을 중시하는 유목 기마민족이다. 그들은 따라서 협동심과 조직적인 전투역량을 가중 중요시한다. 푸른늑대는 동방의 늑대로 늑대들의 우두머리를 지칭한다. 늑대들은 군집생활을 하며 사냥을 할 때도 조직적인 역할 분담이 있다. 따라서 그들은 늑대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여기며 토템신앙을 가졌다. 그리고 탱그리는 바로 단군의 몽골식 발음이다. 탱그리는 곧 하느님을 뜻하고 그들은 비록 몽골초원에 살았지만 여전히 단군조선의 영광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부여족의 일파가 고주몽을 선두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
>>그런데 남아있던 부여족의 적장자인 부여본부족은 항상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부족 명칭이 부여를 뜻하는 부리얏트족이다.
>>
>>이 부리얏트족은 광개토대왕의 고조선 고토회복인 다물정책으로 정복되는데 광개토대왕은 이 부리얏트족을 비록 형제의 부족이나 적장자로 고구려보다 우위부족임을 주장하는 그들을 몽골초원으로 이주시켰는데 이 부족이 바로 징기스칸의 조상이 된다. 아버지 예수게이는 이 부족의 추장이었는데 징기스칸이 태어날 무렵 가장 힘이 약한 부족이 되어있었다. 징기스칸의 본명은 태무진이다.
>>
>>아버지는 그가 9세 때, 아버지가 동쪽 이웃에 있는 타타르 부족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테무진과 그의 가족과 부족은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부족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
>>어머니 호에륜의 슬하에는 네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마음이 굳센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하여 열매를 따고 풀뿌리를 캤고, 자식들도 좀 자라자 물고기와 짐승을 잡았다.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옛날의 고조선의 영화와 전설을 얘기해 주고, 또한 가문을 빛내라고 늘 타일렀다. 징기스칸은 이런 훌륭한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점차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 큰그릇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징기스칸은 아버지가 정해 주었던 처녀와 결혼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웃에 있는 메르킷 부족에 의해 아내를 납치당하고 간신히 그만 도망쳐 나오게 되었다.
>>
>>후에 징기스칸이 그 부족에게서 아내를 되찾아 왔으나 이미 그의 아내는 메르킷 부족들에게 강간을 당하여 애를 밴 상태였다.
>>
>>메르킷 부족의 아이가 자신의 아내에게서 태어나자 질투심과 분노로 그 아이와 아내를 죽이려고 태무진이 시도하자 그의 어머니가 말리며 자신의 아내와 적군을 포용할 줄 모르는 자가 어찌 단군 즉 탱그리의 자손일 수 있느냐며 세상을 평정할려면 세상을 뒤덮을 포용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교훈을 주어 그 후 징기스칸은 그에게 항복한 어떤 적들도 관용을 베풀고 용서할 수 있었다.
>>
>>뜻이 올곧은 한 어머니의 가르침은 한인간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가 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
>> 징기스칸의 부족인 몽골은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북부여 즉 부리얏트족 후손이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시조 볼테치노는 탱그리의 천명을 받아 태어났으며 10대를 지나 아란고아란 모계로 이어지고 아란고아에서 다시 12대가 지나 징기스칸이 태어났다. 1대를 30년이라 보면 약 700년 전이 바로 볼테치노 시대이다.
>
>징기스칸이 1155년에 태어났으므로 징기스칸의 시조 볼테치노가 4세기 후반의 인물이고 이때가 바로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군주인 광개토대왕의 통치시기이다.
>바이칼 호수는 밝알호수이며 부르칸산 혹은 불칸산은 밝은산 이므로 태양사상즉 밝음의 광명사상과 통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이 되어 전해지고 지금도 몽골인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 속에도 이것이 잘 나타나 있다.
>
>可汗如太陽 高高坐東方 거룩한 한은 밝님(태양)과 똑같고 동방에 높이 계셔
>威德之所被 滉如天下光 거룩한 그의 덕은 천하에 빛이 나네
>部民如草木 小醜如氷霜 백성은 초목 같고 원수는 어름과 서리 같아
>草木日以長 氷霜日消亡 초목은 밝님 때문에 자라지만 어름과 서리는 밝님 때문에 없어지네
>太陽有出沒 可汗壽無量 밝님이 뜨고 지고 유구하듯이 거룩한 한도 만수무강하소서 징기스칸이 결혼한 직후 메르킷 부족과 전투에서 아내와 같이 테무진 자신도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간신히 도망쳐서 부르칸 산의 밀림 속에 숨어 죽음을 면했다.
>
>그 때, 테무진은 문득 어머님이 말씀하신 <영원한 하늘> 탱그리 즉 광명의 신 단군이 자기를 도와준다고 느꼈다.
>그후 그는 그의 후손들에게, “부르칸 산을 아침마다 섬겨라. 날마다 섬겨라. 내 자손의 자손들아, 이것을 잊지 말아라.” 하고 유훈을 남긴 것이다. 징기스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각 제도를 야율초재의 건의를 받아 정비하여 명실공히 대제국의 틀을 마련했다. 징기스칸은 서하를 토벌하다가 1227년 진중에서 병사하기까지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정복하였고 그 영토를 광명의 나라 한국이라 명명하고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분할 통치하게 하였다.
>
>그는 먼저 고조선의 삼한관경을 본받아 자신의 통치영역을 넷째아들에게 물려주고 원수 메르킷 부족의 피를 받은 첫째 아들 주치에게도 다른 아들과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유럽의 카스피해와 아랄해 북방의 영토 분할하여 통치하게 하였는데 이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킵차크 한국이다. 둘째아들 차가타이에게는 중앙아시아를 나누어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차가타이 한국이며 셋째아들 오고타이에게는 일리강 유역과 천산산맥 부근의 몽골고원 분할하여 주었고 이것이 일한국 혹은 오고타이 한국이다.
>
>나중에 한국은 다시 네개의 한국으로 나뉘어 지고 중국은 쿠빌라이칸이 나라중에 나라라는 뜻으로로 국호를 원(元)이라 명하고 통치하였다. 징기스칸은 질서를 잡고 치안유지와 균등한 징세(徵稅)제도를 중시하여 오히려 점령국 국민들을 차별하지 않고 신앙의 자유를 허용함으므로써 어떤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홍익인간의 이념에 충실했다고도 할 수 있다.
>
1.몽골이란
몽골은 현재 독립국가인 몽골인민공화국과 중국에 속해 있는 내몽고자치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번 학술답사는 내몽고지역을 가기로 하였다. 몽골인들은 몽고라고 부르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몽고(蒙古)의 몽자가 \\\"우매할 몽\\\"이며 이것은 중국인들이 그들을 오랑캐로 낮추어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골(Monggol)이란 \\\"용감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몽골족은 원래 몽홀실위에서 나왔는데 현재 징기스칸의 고향인 동몽골에서 고구려의 성과 고분이 나타나고 있고 징기스칸의 외가가 발해족의 후예라는 학설이 있어 이들이 고대의 우리민족과 매우 관련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1992년 9월 16일, 종교신문]
\\\"上古代 단 하나였던 神市는 한국(汗國)이었다\\\"
고구려의 彊域은 실크로드에서 蒙古·日本까지
神市는 敦煌에 있는 黑水三危山에서 建國됐다
\\\"1910년부터 한民族史는 왜곡되기 시작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사관 정립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우리들의 얼굴이 비추어진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옛 역사에서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똑똑히 알아야할 의무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선조들로부터 이어받은 민족사관을 후손들에게 바르게 전해줘야 할 시대적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세태는 참으로 한심할 정도이다.
1905년 乙巳 보호조약은 고종황제가 모르는 사이에 1907년 丁未年에 조약이 발효되었다는 사실을, 일본은 공포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강제로 식민사관을 왜곡 날조하기 시작했다.
1935년 1월 20일에 발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 輿勝覽)이란 책이 이병연(李秉延)에 의해 출간됐다. 이 책에 의하면 1910년 일본은 역사를 날조 왜곡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대륙사관(大陸史觀)인 것처럼 해두었지만, 그의 모두라 할 정도로 조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친일파의 검은손에 의해 한民族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사상까지 강탈당하고 말았다.
일제 때 만들어진 12세기에서 15세기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중국 천산(天山)에서부터 중북부 유럽 전역에 걸쳐 한국(汗國)으로 되어있는 것을, 일본 글씨로 한국(? ? 國)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특히 唐나라 때와 元나라 때의 강역(彊域)을 보면 유럽과 북유럽 전체가 한국(汗國)으로 되어있음을 본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몽고(蒙古)는 주몽 몽자이다. 즉 고대사를 보면 고구려 강역은 몽고뿐만 아니라 유럽 일부, 실크로드, 그리고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북부부터 한국땅, 일본 할것없이 모두 고구려 땅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필자의 저서「한民族史」본문 201쪽, 부록 528∼547쪽 참고).
특히 몽고(蒙古)는 주몽의 옛 땅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고대 한국(汗國)의 강역은 엄청나게 넓었을 뿐만 아니라 神市가 정해질 무렵에는 전세계적으로 한 나라 즉 하나의 나라밖에 없었다는 기록이 있어 여기 소개해 본다.
三聖紀全 下篇 본문을 적고 해설해 본다.
『古紀云波奈留之山下 有桓仁氏之國 天海印之地 亦稱波奈留之國 其他廣南北五萬里 東西二萬餘里 摠忽言桓國』
옛 기록에 의하면 파내유지산 아래 한인씨의 나라가 있었다. 파내유지산이란 지금의 중국 天山을 뜻한다. 천해의 동쪽 땅이다. 여기서 천해(天海)란 아랄해, 카스피해, 흑해, 지중해, 발트해를 뜻하는 것같다. 왜냐하면 중국 천산(天山) 너머에 있는 동부 유럽까지 한나라인 한국이었음을 지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천해의 동쪽 땅을 가리켜 파내유지국(波奈留之國)이라고 한다. 파내유지국이란 한없이 넓고 넓은 대륙을 뜻한다. 그러나 그곳의 중심지가 바로 天山 아래쪽이란 뜻이다. 그 땅의 넓이는 南北이 5만리이고, 東西로 2만여리이다. 이 땅의 총 넓이가 한국(桓國)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하고자 하는 것은 땅의 넓이이다. 南北이 5만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같다. 왜냐하면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북극해와 인도양 있는 육지를 연결한 거리는 南北 5만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5.6㎞가 10리였다. 그렇게 본다면 추운 북극지방에는 사람이 별로 살 수 없었던 것으로 감안한다면, 南北이 2만여리이고 東西가 5만리로, 문장이 바뀌어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고 싶다. 그것은 지도에도 나타나 있듯이 한국(汗國)은 동부 유럽과 만주, 일본, 한국땅, 중국 모두가 한국(汗國) 땅이었다는 사실을 지도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 유일무이하게 한국(汗國)을 건설한 사람은 한인씨(桓仁氏)였다. 그러기에 한인씨를 반고씨(盤古氏), 유신씨(有神氏), 혼돈씨(渾沌氏)라고 한다.
반고란 호칭은 험하고 험난한 천산(天山)에서 감숙성(甘肅省)까지 1만리의 산길을 찾아왔다는 뜻에서 나침반과 같으므로 후세 사가(史家)들이 붙인 이름이다. 혼돈이란 혼돈한 시대, 즉 암흑시대에 인간의 360여 가지의 가르침과 이화세계(理化世界),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을 조화(造化)·치화(治化)·교화(敎化)의 본뜻을 가르쳐 왔다는 뜻에서 붙여진 칭호이다.
유신씨(有神氏)란 암흑과 같은 인간 이하의 세계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중생들에게 신시(神市)를 정하고 밥하고 옷 입는 것은 물론 선악(善惡)과 형벌, 병마에 대하여 가르치고, 오곡을 심어 중생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호칭이다.
그러기에 한인씨, 반고씨, 혼돈씨, 유신씨하면 각각 다른 사람으로 알고 사서(史書)를 잘못 해설하거나 판독하는 사례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모르고 오역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반고씨(盤古氏)를 개로 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고씨(盤古氏)를 개라고 한 것은 사서에 백견(白犬) 또는 견이( 夷)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白犬이란 뜻은 흰 개가 아니라 흰 개를 상징한 것이다. 다시말해 하늘 개란 뜻이다. 이 말은 神과 같다는 뜻으로 고대 사람들이 비유적인 언어로 쓴 것임을 알아야한다. 사람을 개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인류의 시조를 개라고 할 수 없다. 견이( 夷)란 부족의 대명사이다. 개 부족이 아니라 神과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부족의 이름일 따름이다. 종교신문 6월 3일자에 기고한「東夷族의 뿌리는 苗族, 祖上은 桓因이다」를 참고하길 바란다. 거기에는 桓仁氏는 반고(盤古)이며, 반고씨는 桓因氏라고 발표하고 있다.
1981년 2월 홍콩 굉업출판사에서 발행한「上古史」이당(李唐)의 저서를 소개해본다.
『混沌初開 天沒有荒 地沒有老 萬一這個 天地再合瀧起來 又成了混元一體的東西. 那豈不是白費了盤古一番心意 盤古旣要創造天地』
처음에는 혼돈함에서 열렸다. 하늘은 잠기고 거칠기만 했다. 물론 땅도 잠기고 쪼그라듬만 있었다. 만일 天地가 다시 찾아와 다스림이 오지 않았다면 혼돈한 그 상태로 이룩되지 않았을 것이다. 혼돈함이 가시자 東西는 본체가 하나가 되었다. 반고는 한번도 마음속으로 꾸짖지 아니하고 편안할 것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우주의 본체는 흰 것으로, 반고는 天地 창조를 열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흰 것에 대하여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야겠다.
三聖紀全 上篇 본문 앞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吾桓建國. 最古有一神. 在斯白力之. 天爲獨化之神. 光明照宇宙權化生. 萬物創生』
나의 한국이 세워질 때 최고 오래된 神이 하나 있었다. 그 神은 다름아닌 흰 힘이 서로 나누어짐을 뜻한다. 하늘은 홀로 화하여 神이 된 것이다. 광명이 우주를 비추니 생물이 권리를 얻게 된 셈이다. 그리하여 만물이 창생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앞에서 재사백력지(在斯白力之)를 임승국(林承國)씨는 시베리아라고 풀이했다. 우리나라가 처음 세워질 때 최고 오래된 神이 하나 있었는데 시베리아라고 풀었다.
재사백력지(在斯白力之)란, 흰 힘이 나누어지면서 萬物이 창생한다는 대자연의 氣哲學을 알아야 할 것이다.「한民族史」296쪽에 자세하게 설명해 두었다. 다시말해 흰 것이란 만유만물의 본체이며, 흰 힘이란 氣의 작용을 뜻한다.
한국(汗國)은 위와같이 세워졌다는 깊은 우주 철학사상에서 발원된 것이다. 이처럼 한民族은 위대한 사상관을 바탕삼아 한民族史가 정립된 것이다.
신단실기(神檀實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본문을 소개해 본다.
『桓因桓雄桓儉. 是爲三神. 上元甲子十月三日. 桓儉以神化人. 持天符三印. 降于太白山檀木下. 乃設神敎而敎民時. 人民被化歸者. 如市有神市氏之稱. 乃 三千團部開天』
한인·한웅·한검은 三神이라 했다. 上元甲子年 十月 三日에 한검은 神이 사람으로 화했다.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신의 교시에 의해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많은 인민들은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다. 신시(神市)를 열었으므로 유신시씨(有神市氏)라고 호칭했다. 天山 아래에 있는 곤륜산(崑崙山) 속 우전(于 )에서 3천 명의 부족이 몰려와 하늘을 열었다.
여기서 上元甲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甲子는 60년만에 돌아온다. 그러나 上元甲子는 180년만에 1차로 돌아오며, 中元甲子, 下元甲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上元甲子가 완전히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무려 3천6백 년이 지나야 한다. 이것이 대자연의 理法이다(필자의 저서「한民族宇宙哲學思想」「한民族史」307쪽 참고).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라고 하니, 백두산으로 말하는 일부 사학자들이 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낭설이다. 백두산은 분명히 말해 天山의 줄기이다.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곤륜산(崑崙山)의 맥을 이어받은 맥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백두산에서 단군(壇君)이 나라를 세웠다는 사서는 하나도 없다. 다만 일부 사학자가 마치 백두산에서 단군이 내려온 것처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사학자는 백두산(白頭山)을 백산(白山)인 것처럼 신문지상에 기고하고 있는 것도 보았다.
上上古時代 때의 太白山을 이 기회를 통해 확실히 밝혀둔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본문 141쪽에는 태백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太白山卽水經注之白石山也. 在陝西 縣南. 接洋縣界. 亦曰太一(太壹). 太白山. 去長安三百里. 不知其高機何. 俗云武功太白. 去天三百. 山下軍行不得鼓角. 鼓角卽疾風雨至. 冬夏積雪. 望之晧然. 洞天記以此爲第十一洞天. 山有大太白. 二太白. 三太白三池. 海天旱. 秦人多禱雨於此. 太白者四方神名也. 參看太一山條. 在甘肅慶陽縣北一百五十里. 黑水原於此』
태백산은 수경주설에 의하면 白石山이다. 섬서성 미현 남쪽과 양현과의 접경지대이다. 太一이라 한다. 太一은 太白山이며, 長安 즉 西安에서 3백 리이다. 그 산 높이는 얼마인지 잘 알지 못한다.
속언에 의하면 무공을 세웠다는 뜻으로 太白山이라 했다. 태백산은 높이가 3백이다. 산 아래에서 군인이 행군한다면 언제 병을 얻을지 알 수 없다. 비바람 때문에 질병이 생기게 된다. 겨울 여름 할것없이 흰눈이 쌓여 있다.
산을 바라보면 정말 호연지기가 있는 기상이다. 깊은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깊고 깊은 제11 동굴에서 바라보는 하늘같다. 산이 커서 太白이다. 그곳은 세 곳의 못이 있어 하늘이 항상 가물다. 진(秦)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太白은 四方에 있으며, 神의 이름이다. 太一山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太白山은 감숙성(甘肅省) 경양현(慶陽縣) 북쪽 1백5십 리이다. 이곳은 흑수(黑水)가 처음으로 발원하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앞의 본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겨울 여름 할것없이 눈이 쌓여 있는 곳은 天山과 곤륜산, 그리고 기연산(祈連山)을 연결하는 남산(南山)밖에 없다. 특히 중국과 한국에서 사시사철 눈이 있는 곳은 天山과 곤륜산, 그리고 기연산, 南山 들이다. 진(秦)나라 사람들이 白頭山에 와서 기우제를 지낼 리 없다. 그리고 백두산에는 여름에 눈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본문에서 보면 분명히 중국 감숙성 경양현 150리, 흑수가 발원하는 흑수삼위태백산(黑水三危太白山)임을 똑똑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8쪽, 太一山을 찾아보았다. 곤륜산에서 연결하여 감숙성까지 南山을 총칭하는 이름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이 太一 太白山이라고 정확하게 적고 있다.
그렇다면 上古時代 太白山은 春夏秋冬 할것없이 눈이 쌓여 있는 南山을 뜻하는 것이다. 그중에서 유독 太白山이라고 하는 것은 黑水가 발원하는 三危太白을 뜻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바로 여기가 실크로드로 통하는 길목인 돈황(敦煌)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편(古朝鮮篇)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卽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한인을 제석이라 한다. 제석이란 우주만유만물(宇宙萬有萬物)의 깨달음을 얻은 道人의 칭호이다. 서자 한웅과 함께 천하에 뜻을 헤아리며 탐욕이 많은 중생의 뜻을 안 아버지와 함께 아래를 바라보며, 三危太伯山을 와보니 인간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할만한 곳이었다.
홍익인간화 이화세계(理化世界)를 건설하기 위해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3천 명의 무리와 함께 삼위태백(三危太白) 정상까지 왔다. 즉 그곳이 태백산(太伯山)이며,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새로운 神의 도시, 즉 인류 최초의 도시인 神市를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桓雄이 탐욕이 많은 중생을 구하겠다는 뜻을 桓仁氏가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三危太伯山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神壇樹 아래라는 제단 단자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박달나무 단(檀)자는 그 누군가의 사학도가, 아니면 알지 못하고 쓴 것이 명확해진다.
이상과 같이 上古代는 전세계적으로 단 하나밖에 없는 나라의 한국(汗國, 桓國, 韓國)이 있었다. 이곳은 桓仁氏가 인류의 이상세계를 열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다. 실크로드 길목으로 통하는 돈황(敦煌)은 삼묘족(三苗族)의 고향이자 동이(東夷)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인류사(人類史) 최초로 정통국(正統國)있었던 한국(汗國)의 신시(神市)가 세워졌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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