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국을 빛낸 10명의 위인들
- 안녕하세요
최근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박찬호나 조수미를 위인으로 보기엔 그렇고... 황우석 교수도 후에 일때문에 위인이라고 하기엔 좀 거리가 먼듯하군요.
현재 생존해 있는 위인을 말씀하신거라면 질문에 거리가 멀군요.
일단 올려드립니다.
김두한 - 항일기, 대한민국의 정치인 ■ 호 - 의송(義松) ■ 시대 - 항일기, 대한민국 ■ 생년월일 : 1918년 서울 출생, 1972년 11월 고혈압으로 사망 ■ 약력 - 광복 후 조선 건국청년회 창립위원 겸 별동대장, 반탁투쟁위원회 동원부장 겸 경비부장을 지냄 - 미군정 때 포고령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정부수립 후 석방 - 1954년 3대 민의원으로 정계 진출, 1965년 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선 - 1966년 국회 오물투척 사건으로 의원직 사퇴■ 활동분야 - 정치인 1918∼1972. 제3대 및 제6대 국회의원. 독립운동가 좌진의 아들이다. 서울 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하였으나 고아나 다름없는 부랑아생활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그러나 김좌진의 아들임을 긍지로 삼아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하거나 조선인 상인을 보호하는 등의 협객으로도 행동하였다. 광복 이후 이승만·김구·신익희 등이 주도하는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을 맡아 반공대열의 최선봉에서 활약하였다.그러나 반공투쟁과정에서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아 미군정청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오키나와 미군부대에 수감되었다. 사형집행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대한민국정부수립을 맞아 그 집행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최고위원, 대한학도의용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면서 반공·노동운동을 계속하였다.1954년 종로을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3대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5년에도 제6대국회의원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등 정치사에도 행적을 남기었다.용산구의 보궐선거로 제6대국회에 등단하자마자 한독당내란음모사건과 관련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으나 야당은 물론 공화당까지 석방결의안에 106표의 찬성표를 던져 석방되었다.그러나 국회에서 사카린밀수사건을 논란중일 때 국무위원에게 똥물을 뒤집어씌운, 이른바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의정사상 전대미문의 오점을 남기고 다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는 기이한 행적을 남기었다.결국 1966년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정치생활은 막을 내렸다. 정계은퇴 후 고혈압으로 1972년 11월 죽었다. 묘지는 서울 수유리에 있다.
김소월-시인 출생 : 1902년 8월 6일 사망 : 1934년 12월 24일 출생지 : 평북 구성 학력 : 오산 학교 - 배제 고보 - 도쿄 상과 대학 1. 시인의 삶
시인. 본관은 공주. 본명은 정식.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성도, 어머니는 장경숙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사립인 남산학교를 거쳐 오산학교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 교장으로 서춘·이돈화· 김억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2. 작품활동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에 시 〈낭인의 봄〉, 〈야(夜)의 우적〉, 〈오과의 읍〉, 〈그리워〉, 〈춘강〉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 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 〈첫치마〉,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제비〉, 〈강촌〉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삭주구성〉, 〈가는 길〉, 〈산 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의 〈왕십리〉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 〈꽃촉불 켜는 밤〉(1925), 〈무신〉(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 〈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에 〈물마름〉(1925)을, 《문명》에 〈지연〉(1925)을 발표하고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3. 작품경향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 〈첫치마〉, 〈금잔디〉, 〈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먼후일〉, 〈꽃촉불 켜는 밤〉, 〈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 〈건강한 잠〉(1934), 〈상쾌>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 〈팔벼개 노래〉(1927), 〈돈타령〉(1934), 〈삼수갑산)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3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1939), 하동호·백순재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안익태-한국의 작곡가·지휘자.애국가 작곡 안익태 [安益泰, 1906.12.5 ~ 1965.9.16] 활동분야 : 예술출생지 : 평양주요수상 : 문화포상(1957), 문화훈장 대통령장(1965)주요작품 : 《강천성악》 《한국환상곡》 《애국선열추도곡》
안익태 경력 1937 - 애국가 작곡 1939 - 부다페스트국립음악학교서 연구. 그후 스페인국적 획득. 마드리드마욜카교향악단 상임지휘자 1957 - 귀국 1961 - 1963 국제음악제 집행. 영국로열필하모니·로마교향악단 등 2백여 교향악단을 지휘, 세계적 명성을 떨침. 1961 - 1963 국립묘지에 안장
안익태(1905년~1965년)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애국가'를 먼저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우리 겨레가 부르는 우리 나라의 노래(국가)를 그가 작곡했기 때문이다. 제7차 교육 과정에 따라 새로 사용되고 있는 초등학교 교과서 '도덕'(3-2)의 4단원 '나라 사랑의 길'에 안익태 선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일생을 살펴본다.
안익태는 1906년 평양에서 여관 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지녔던 그는 6 세 때 동네 예배당에서 흘러 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려 식구들 몰래 교회에 나가 노래를 따라 불렀다.
7 세 때 처음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6 개월간 연습한 후 찬송가를 연주할 수 있게 됐다.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예회 때마다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연주하며 마음껏 재능을 뽐냈다.
그 무렵, 평양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신식 학교가 많았다. 안익태가 들어간 숭실중학교도 그랬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거의 모두 선교사였다. 소년 안익태는 교장 마오리 선교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또 방학 때는 서울까지 가서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첼로를 배웠다.
3ㆍ1 운동에도 앞장 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안익태는 마오리 교장의 도움을 받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커티스 음악 학교에 입학, 첼로와 작곡을 배우고 연주 활동을 펼쳤다.
1934년에는 헝가리로 건너가 당시 이름난 작곡가였던 도야니로부터 작곡을 공부하며, 민족주의 정신의 영향을 받았다. 또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처음 들은 것은 3ㆍ1 운동 때였다. 애국가 가사에 영국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을 붙여 노래하는 것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감동은 뒷날 그로 하여금 애국가를 작곡하게 했다.
애국가는 안익태가 1932년 미국에 있을 때 떠오른 악상을 그로부터 4 년 뒤에 완성한 것이다. 이 애국가는 안익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 안팎에서 널리 불려졌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 나라의 상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우리 나라가 광복을 맞은 1945년부터 안익태는 에스파냐 국적을 얻어, 마드리드 마욜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온 세계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1957년 고국에 돌아와 자신이 작곡한 '한국 환상곡'ㆍ'강천성악' 등을 지휘했으며, 1961년에는 국제 음악제를 개최했다.
1965년 9월 17일 에스파냐 바로셀로나 병원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에스파냐의 마욜카에는 음악가 안익태를 길이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안익태의 거리'라는 이름을 붙인 길이 있다.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을 기리려는 국민들의 바람에 따라, 그의 유해는 1977년 고국으로 모셔 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안익태의 어린 시절 이야기***** 안익태가 7 세 되던 해, 큰형이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사다 줬다. "형, 이 악기의 이름이 뭐예요?"
"바이올린이라고 하지."
큰형은 바이올린을 왼손으로 들고 왼쪽 턱 아래에 닿도록 어깨 위에 얹은 다음, 말총으...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씨야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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