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배달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에 조선과 삼국이 그곳에서 건국했다 (17)
3) 축소된 회대, 해대. 그러나 중토는 급팽창했다 (6)
갈고(葛古) 한웅이 신농(神農)의 나라와 국경을 획정하여 공상(空桑)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葛古桓雄與神農之國劃定疆界空桑印屬我 太白逸史 神市本紀).
‘새롭게’ 空桑 동쪽을 얻었다는 의미다. 空桑이 神市氏가 개천할 당시의 배달의 영토 가장자리 즉 白山 근처에 있다면, 기록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영토 분쟁이 생겼고, 우리나라 영토가 더 늘어났다는 의미다. 배달나라 10 世 葛古 한웅은 배달의 통치자고, 神農은 배달의 제후이므로 실은 하사했던 封土의 일부를 환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神農의 나라란 神農의 여러 후손들이 다스리던 나라다.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洋水)를 건너 출진하여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空桑)은 지금의 진류(陳留)이며 유망(楡罔)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 해에 12 제후(諸侯)의 나라를 아울러 합병하니 죽인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 이에 西土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하여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整師躬率而出陳洋水殺至空桑空桑者今之陳留楡罔所都也時歲之中兼倂十二諸侯之國殺得伏尸滿野西土之民莫不喪膽奔竄 太白逸史 神市本紀)
공상(空桑)은 한자를 봐도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도움이 안된다. 空은 하늘; 비(우)다; 쓸쓸하다; 헛됨의 뜻이고, 桑은 뽕나무다. 그렇다면 空桑은 뽕나무가 없다는 뜻? 잠상(蠶桑)과 길삼(길쌈 績)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됐다. “처음 神市氏의 말기에 蚩尤氏의 형제가 비록 涿鹿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 왔으나 東方의 사람으로 淮垈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漢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初神市之末蚩尤氏兄弟 雖自涿鹿退歸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蚕織牧 資以爲業 揆園史話 檀君紀)." 慈烏支 한웅이 中土를 정복하기 전 까지는 中土는 누에치기는 커녕 길삼(織)조차 하지 못했다. 누에치고(蚕), 삼을 재배하는 것은 농사인데, 中土는 기원전 4300 년에야 后稷이 농사를 가르쳤다. 그 당시까지도 中土의 토착민은 짐승가죽이나 뒤집어쓰고 살았던 것이다.
軒轅의 아내 나조(螺祖)가 누에를 치고 실을 잣는 것을 가르쳐 의상의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고? 3 백년 뒤인 堯 때서야, 后稷이 온갖 곡식과 과일의 종자를 中土로 들여와 농사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后稷을 농사의 시조라고 부른다. 곡식재배 조차 못해서 일일이 가르침을 받은 처지에 양잠(養蠶)은 어떻게 하고, 길삼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양잠을 못하던 西洋도 농사만은 지었다.
軒轅이 內經을 지어 처음으로 의약 처방의 길을 열었다고? 그런데 中奴들은 軒轅이 아니라, 神農을 의약의 시조라고 떠받든다.
“神農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神農..嘗百草之滋味制藥).”는 太白逸史는 날조사(淮南子)를 그대로 읊조린 것에 불과하다. 혀로 맛본다고 약을 만들 수 있나. 임상실험 해야 약을 만들 수 있다. 아픈 사람에게 처방을 해봐야 약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맛보아서 만들 수 있는 건 음식 뿐이다. 이미 배달 개천 당시 병을 주관하는 저가(猪加)가 있었다. 한국(桓國) 시대에도 猪加가 있었다(三聖紀全 下篇). 神農은 배달의 의학지식을 中土로 가져갔을 뿐이다.
軒轅은 中奴의 상상 속에서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대요(大撓)에게 명하여 甲子를 짓게 하였으며, 창힐(倉頡)에게 명하여 六書를 짓게 하였으며, 영륜(伶倫)에게 명하여 율려(律呂)를 정하게 하였으며, 예수(隸首)에게 명하여 산수(算數)까지 정하게 하고, 기백(岐伯)에게 자문하여 내경(內經)을 지어 의학처방의 길을 열었다고 했다.
甲子는 伏羲가 만들었다. 그래서 韓易(周易이 아니다)을 선천팔괘(先天八卦), 복희팔괘(伏羲八卦)라고 날조하지 않았나. 軒轅은 共工, 倉頡, 大撓와 함께 紫府 先生에게 가르침을 받던 무리다(紫府先生造七回諸神之曆進三皇內文於天陛天王嘉之使建三淸宮而居之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皆來學焉 馬韓世家). 軒轅은 大撓, 倉頡과 함께 中土 한 쪽을 삼분하던 자로 慈烏支 한웅과의 전투에서 매번 패하자, 大撓에게 기대려다가 거절당하고, 倉頡에 기대려고 했으나 역시 거절당한 비참한 인물이다(三聖紀全 下篇). 大撓는 甲子를 지은 게 아니라 배웠고, 倉頡도 六書를 지은 게 아니라 부도(符圖 : 天符經이 쓰여진 글)의 글(鹿圖文, 鹿書)을 배웠다. 이전에는 中土의 무리 중에 글을 아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軒轅이 백년을 왕위에 있었다고? 왕위에 있었다한들,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涿鹿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영위(營衛 : 막사를 지키게)하게 하였다(披山通路未嘗寧居邑于涿鹿之河遷徙往來無常定處以師兵爲營衛 太白逸史 神市本紀).”
그렇게 전전긍긍해 하며 살다가 慈烏支 한웅에게 정복 되었다. 慈烏支 한웅의 신하가 되고, 장수가 되어 살아야 했다. 그후에도 비참하긴 마찬가지였다. "蚩尤氏의 형제들이 모두 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軒轅은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撼, 黃帝氏亦不得自安 揆園史話).". 蚩尤氏 형제들 사이에 끼어 中土 한 줌을 封土로 받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洋水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空桑에 이르렀다. 空桑은 지금의 陳留이며 楡罔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 해에 12 諸侯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西土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하여 숨지않는 자가 없었다(整師躬率而出陳洋水殺至空桑空桑者今之陳留楡罔所都也時歲之中兼倂十二諸侯之國殺得伏尸滿野西土之民莫不喪膽奔竄 太白逸史 神市本紀)." 西土의 백성들이 간담이 서늘해져 도망하여 숨지않는 자가 없었던 이유는 자신들의 사는 땅에서 벌어진 전쟁이기 때문이다.

▲ 한민족의 이동경로
우리민족은 神市氏가 남하하기 전에 살던 한국(桓國) 땅(시베리아)으로 도로 진출했다. 녹색은 세부 진출경로
楡罔의 도읍 空桑은 西土, 즉 티벳고원 안에 있었던 것이다. “少昊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空桑으로 들어가더니 楡罔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涿鹿으로 들어갔다. 蚩尤氏는 이에 空桑에서 제위에 올랐다(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涿鹿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는 揆園史話 太始紀는 사실이 아니다. 慈烏支 한웅은 배달 14 世 天皇으로 즉위한 후 정복활동에 나섰다. 涿鹿으로 되돌아 들어갔다는 것도 거짓이다. 楡罔이 涿鹿으로 도망친 것은 涿鹿이 慈烏支 한웅의 군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회대(淮垈)와 기연(冀兗)의 땅을 모두 점거 하였으며, 탁록(涿鹿)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 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淮岱冀兗之地 盡爲所據乃城於涿鹿宅於淮岱遷徙往來號令天下 揆園史話 太始紀)
中土가 중국 대륙일 때나 가능한 얘기다. 동아시아의 통치자가 도읍할 곳이 없어서 고작 미개 땅 티벳고원 안에 皇城을 짓고 살았단 말인가.
우선 눈이 괴롭다.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은(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華夏가 사방의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는 꼴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아시아를 다스리는 대제국의 지배자가 번창한 도시를 다 팽개치고, 고작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는 땅에 들어가, 皇城만 번듯하게 지어놓고 살겠는가. 어느 나라 지배자가 화려한 도시를 팽개치고, 빈민굴에 皇城을 지어두고 산단 말인가.
慈烏支 한웅이 거처한 宮은 三淸宮이다.
자부선생(紫府先生)께서 칠회제신(七回諸神)의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폐(天陛 : 궁전의 층계)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慈烏支 한웅이) 三淸宮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紫府先生造七回諸神之曆進三皇內文於天陛天王嘉之使建三淸宮而居之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皆來學焉 馬韓世家)
中土를 정복한 후 동아시아의 통치자답게 웅장한 궁을 세우고, 거기서 살았다. 紫府先生에게 거처하라고 지어 주었다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해도 宮이 될 수 없다. 宮은 황제나 왕이 거처하는 건축물이다. 紫府先生은 제후조차 아니지 않는가. 慈烏支 한웅이 거처한 三淸宮에 紫府先生도 같이 살았던 것이다. 三淸宮에 慈烏支 한웅이 계시니까, 共工, 軒轅, 倉頡 , 大撓 등이 와서 알현하는 김에 紫府先生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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