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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의 현장
가. 선사유적
고인돌 - 유실된 유물 : 산양면 존도리 고인돌은 산양면 반곡리 국도변에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 유실되었으며 현재 복원해 놓았다. 문경읍 갈평리 고인돌은 문경읍 갈평리 입구에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 유실되었다. 동로면 인곡리 고인돌은 동로면 인곡리에 있었으나 경천댐 수몰지역으로 매몰되었다.
고 분 - 호계면 호계리 고분 : 호계면 호계리에 있는 석곽고분군이 전부 도굴되고 지금은 그곳을 개간하여 뽕밭이 되어 있다. 지금도 도굴된 석곽고분의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 산양면 존도리 고분 : 산양면 존도리에도 고분이 있었다. 1973년도에 산양면 존도리 산 7번지와 11번지에서 적색토기호, 토기편 등과 완(盌), 방추차가 출토되므로서 이곳에 고분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가은읍 성저·성유 고분 : 가은읍 성저·성유의 고분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1980년 12월 10일 성저리 831번지에서 10여점의 토기가 출토되기도 했다. 그밖에도 청동제품도 다수 출토되었다.
※ 현재 고분은 대부분이 도굴되고 완형고분은 없다. 고분이 있던 곳은 신라 때 현이 있던 곳이다. 호계리 고분군(호계현), 하초리 고분(관산현, 고사갈이성), 성저리·성유고분(가은현), 현리,존도리고분(산양현)
나. 호국유적
산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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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은 민족슬기의 집약이다. 우리 고장에는 고대로부터 고려, 조선시대까지 시대마다 축성한 산성들이 있다. 성은 그 민족의 슬기를 집약하여 지나온 수천년 동안 우리 고장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 성들은 자위의 상징인 군사적 가치 이외에도 당시의 사회구조풍속경제력 등을 반영하고 있어 문화사적 의의 또한 매우 큰 것이라 하겠다. |
고모산성(姑母山城) :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산성으로 약 1,500년전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2m, 폭 17m, 주위 약 1.6㎞의 웅장한 성이었으나 오랜 세월 비바람에 대부분이 도괴되었으나 아직도 옛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고모산성은 좌우 통로가 아래로 내려다 보이고 영강이 그 밑을 흘러 천험의 요새이다. 무신년 이인좌의 난에 신사일의병의 주둔지요, 운강 이강년이 왜병과 격전한 곳이다.
조령산성(鳥嶺山城) : 문경읍 상초리에 있으며 조선 숙종 때 축성, 남북으로 18리이고 주위는 18,509보이다. 제1성은 주흘관, 제2성은 조곡관, 제3성은 조령관이며 성마다 홍하문이 있다.
마고산성(麻姑山城) : 문경읍 마원리에 있으며 1500년전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대부분이 파괴되고 지금은 성지만 남아 있다.
근품산성(近品山城) : 산양면 현리 근암산에 있으며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대부분은 파괴되고 치마단(馳馬壇)의 유지만 있다.
작 성(鵲城) : 동로면 명전리 황장산에 있으며 고려시대에 축성된 성이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 난을 피하기 위하여 머무를 때 작(鵲)장군이 쌓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거의 파괴되었다.
천마산성(天馬山城) : 가은읍 민지리에 있으며 후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견훤이 산성을 쌓았다고 하며 병력을 증강하여 근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희양산성(曦陽山城) :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 정상부에 있으며 삼국시대 축성으로 추정된다. 신라 말에 경순왕이 견훤군과 이곳에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퇴락하여 없어졌다. 성터에는 바위에서 솟아나는 약수가 있다.
할미성(할미城) : 동로면 간송리에 있으며 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에는 수비병이 상주하였으며 부근에는 병사들의 조련장 터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과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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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때 의병활동 : 1592년(임진) 4월에 왜적이 침입하여 옴에 부산,동래,상주 등이 10여일 만에 함락되고 왜적은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군을 파하고 한양으로 진격하니 임금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고 국토가 유린 당하고 있을 때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의병활동을 한분들은 다음과 같다.
채유부, 고상안(창의간은척황령사), 채득호, 채득강, 여춘(화왕산성, 망우당 곽재우의진), 신경일(중봉 조헌 문인, 전망(戰亡) 금산, 칠백의총에 묻힘) |
당교전투 : 삼국통일 직후 이곳에 주둔한 당군이 철수하지 않음으로 신라군이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당군의 주둔지라 하여 당교라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상주에 주둔하고 있던 모리휘원(毛利輝元)의 군사와 경상좌도 감사 한효순과 경상좌병사 박보의 군사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상주판관인 정기룡의 원병이 와서 적을 대파시킨 전투가 있었다. (참고:선조중흥지 권3)
임란과 문경전투 : 1592년(임진) 왜병의 선봉이 문경에 쳐들어 오자 문경 관병들과 주민들은 모두 흩어지고 현감 신길원은 수십명의 관병만 거느린 채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조총 앞에는 저항할 수 없어 신립장군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고 신길원현감 등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참고:징비록 권1)
신길원현감의 순절 : 임진왜란시 문경을 사수하던 신길원현감은 왜적에게 잡혔으나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관인을 주지 않으니 왜적이 신현감의 두 팔을 쳤으나 입으로 관인을 물고 내 주지 않음에 목을 쳐 관인을 뺐고는 적장도 공의 충절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신현감의 순절을 기리기 위하여 충렬비를 세웠다. (참고:삼강록)
의병활동과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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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항쟁 : 일본의 침략에 대한 의병 항쟁은 을미사변(1895) 때부터 양반계급인 유림이 중심이 된 충군애국으로 일으켰으나 다음 을사(1905)보호조약 후에는 각계 각층이 참가하여 전민족적인 항쟁이 되었다. 우리 문경에서는 이강년대장, 신태식대장 휘하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의진에 참가하여 친일매국노들을 색출하여 죽이고 일본군을 습격하여 파괴섬멸하는 항쟁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우리 문경이 배출한 위대한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선생의 일생을 소개한다. 이강년선생의 관은 전주로 효령대군의 후손이며 자는 낙인, 호는 운강이다. 철종 무오년(1858) 12월 30일 가은읍 상괴리 도태에서 아버지 기태, 어머니 의령남씨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장성함에 따라 천품이 영특하고 총명하였으며 용력이 절륜하여 신장이 8척2촌의 늠름한 풍채는 일찍부터 장수제목이라 칭했다. 유학과 병서에 조예가 깊고 뒤에 무과에 올라 부사과를 지냈다. 1895년 을미사변 후에 재산을 풀어 의병을 일으켜 고종 병신(1896)에 충북,강원에서 거의한 유인석과 합세하니 전세가 크게 떨쳤으나 다음 해인 정유(1897)에 패하고 만주로 가서 유인석을 사사하기 3년만에 귀향하였다. 1907년 적이 황제를 협박하여 강제선위를 시킴에 의분을 참지 못하여 다시 거의하였다. 단양,�춘,제천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고 원주 의병장 민긍호와 연합하여 충주의 적을 공략하다가 민긍호가 패하자 문경으로 후퇴하여 갈평에서 왜군 1개 중대를 섬멸하였다. 군을 정돈하여 단양의 적을 토벌하려고 출동하여 적의 대부대와 조우하여 격전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패하여 가평의 광악산으로 들어가 적의 추병을 파하였으나 이로부터 군세가 부진하였다. 청풍의 금수산 사막재에서 적의 복병을 만나 발꿈치에 탄환을 맞아 적에게 잡히는 바 되니「彈子太無情 上踝足不行 若中心腹裏 母辱到瑤京」이란 시를 읊었다. “윗 복사뼈만 상하게 하여 걷지 못하게 하는가? 만약에 내 가슴을 뚫었더라면 저승에 가도 욕됨이 없을 것을.” 선생의 뜻이 죽지 못하였음을 한탄한 시이다. 충주를 지나며 시민들과 결별을 고하니 듣는 사람 모두가 통곡하였다. 서울로 잡혀 오던 날 온 장안이 철시 통곡하였으며 옥중에서도 늠름하게 적을 꾸짖다가 그해 가을에 처형되어 순국의 의열이 되었다. |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선생 휘하 종군자 명단 : 장임록 - 이강년, 신태식, 천보락. 참모부 - 신숙,신경희, 김필운. 종사부 - 강병수, 이승재, 이원규, 변용만, 강병욱, 신기, 이긍재, 장치문, 장복흥, 장해진, 장경한, 황부주, 이규해, 김덕용, 신병희, 박돈양, 박봉양. 좌종사부 - 권응청, 심홍당, 고윤환, 황찬, 강병유, 김상욱, 이봉재, 이정의, 이강건, 김상설, 유로, 고유훈, 주시혁, 이성재, 채형주, 변인규, 강래영, 민순호, 이기량, 오국환, 강병수, 이강문, 이진영, 이상협, 장익환, 이경재, 한용국, 유원승, 신명교, 신상희, 여규락, 여규원, 김규암, 남로구
의병대장 운강진 본시 출신 전사자 명단 : 이원규, 변용만(원주), 신 기(평산), 장치문(인동), 장복흥(인동), 장해진(인동), 장경한(인동), 신병희(평산), 강병욱(진주), 황부주(평해), 박돈양(반남), 박봉양(반남) ※ ( ) 안은 본관.
항일의병항쟁 - 친일밀정 총살 : 1896. 1. 10 농암시장에서 왜적의 밀정인 안동관찰사 김석중, 순검 이호원,김인담 등 3명을 총살 효수하여 의기를 높이 세웠다. - 고모산성 전투 : 1896년 마성면 고모산성에서 왜병과 하루종일 전투하여 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 갈평승첩 : 1907년 영춘·제천 등지에서의 왜적을 대파하고 갈평에서 왜적 1개 중대를 섬멸하였다.
운강 이강년선생비 : 비문은 한양 조지훈 짓고, 안동 김충현 쓰고, 여흥 민순호 찬명하고, 우봉 이동녕과 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 가은읍 왕릉리 가은역 앞에 있던 것을 현재는 가은읍 완장리 운강기념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 놓았다.
이강년(李康秊) : 관은 전주(全州)요, 자는 낙인(樂仁)이며 호는 운강(雲崗)이니 효령대군 보(補)의 후손이다. 의암 유인석의 문인(門人)이다. 철종 무오(1858) 12월 30일 가은읍 도태리에서 나시어 51세에 순국하시기까지 일생 행적이 구국의 대의로 시종하신 분이다. 왜적의 침략에 항거하여 처음 의병을 일으킨 것은 고종 병신(1896) 1월 11일이요, 무너지는 나라를 붙들고 조국의 마지막 명맥을 지키다가 마침내 순의하신 것은 순종 무신(1908) 9월 19일이니 13년간의 그 자취는 장렬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을사조약 후에 우리의 외교 군사권이 일본에게 뺐기게 되자 한몸 국권회복의 제단에 바칠 것을 맹세하고 다시 창의의 횃불을 드니 정미(1907) 7월에 원주의 민긍호, 김상태, 편강열, 천보락 등 40여진이 제천에 모여 선생을 도창의대장에 추대하고 그 휘하에 뭉치니 탁월한 통솔과 군략으로 갈평,청풍,제천,단양,풍기,영주의 적을 무수히 쳐부셨다. 국민들은 선생의 손으로 국난이 극복되고 국권이 회복될 것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순종 무신 6월 4일 청풍전투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적에게 잡히니 서울로 압송되던 날 장안은 모두 철시하였다. 옥중에서도 적을 꾸짖다가 그해 가을에 순의하시니 온 나라가 눈물을 흘렸다.(한국독립운동사)
의병대장 도암 신태식선생비 : 1968년 정휘창이 글을 짓고 앞면은 철기 이범석이, 비문은 송석희가 쓰고 도암선생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 점촌동 시민운동장 옆에 있다.
신태식(申泰植) : 관은 평산(平山)이요, 자는 열경(悅卿)이며 호는 도암(島菴)이니 문희공 개의 후손이다. 1864년 11월 22일 가은읍 민지리 섬안에서 출생하였다. 일찍부터 곧은 성품과 풍부한 문장으로 통정대부 중추원의관이 되었다. 1907년 8월 3일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로운 횃불을 향리 농암에서 높이 올려 25년을 오직 나라를 되찾는 싸움에 앞장섰다. 운강 이강년과 합진하여 갈평에서 적을 치고 단양에서 깃발을 정돈하여 남으로 울진에서 북으로 희천까지 전국을 누비며 무수한 적을 무찌르니 선봉에 김세영, 좌선봉 강창근, 중군에 엄해윤, 영솔에 조수안이었다. 1908년 양평전투에서 흉탄을 맞고 적에게 잡히는 바 되니 고을 사람들이 애석하여 진정을 하였다. 10년의 옥살이 끝에 나와서는 독립의용단을 조직하여 해외 독립군을 지원하다가 1922년에 다시 잡혀 5년의 옥고 끝에 왜적의 모진 고문으로 1932년 1월 15일에 잠드셨다. 창의가,답산가가 전한다.(한국독립운동사 경북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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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푸르던 동해 물결 임의 뜻이요. / 유유한 낙동 가람 임의 넋이니 / 받들고 우러러 겨레 위해 빛날 이름 / 천추 만대 아들 딸이 등불 삼아 모시리니. / 임은 길이 여기 계시어 / 백성을 이끄시고 바른 길을 밝히어 / 한결같이 이 나라를 지켜 오리라. / 서라벌 푸른 별을 가슴에 안고 / 태백의 메운 기상 등에 업어서 / 이곳에 임의 뜻을 높이 새긴다. / 붓을 들어 선비요 칼을 드니 장군이라 / 기우는 큰 기둥 피흘려 잡으시고 / 잃어버린 산과 들 몸바쳐 찾았으니 / 겨레의 스승이요, 나라의 한별이다. |
의병장 신숙비 : 상주시 공검면 남율곡에 있다. 신숙(申橚) : 관은 평산(平山)이요, 자는 ? 이며 호는 죽암(竹岩)이니 한천처사 숙빈의 후손이다. 가은에서 출생하여 성품이 강직하고 문예가 출중하였으며 특히 병법에 조예가 깊었다. 운강 이강년 의병진의 참모관 및 총독장으로 1896년부터 1907년까지 마고성,갈평,청풍,단양 등지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아우 기(棋)와 아들 병희(秉熙)도 청풍전투에서 전사하였다.(운강 창의록)
의병장 신경희 묘비 : 가은읍 하괴리 도리실에 있다. 신경희(申景熙) : 관은 평산(平山)이요, 자는 ? 이며 호는 옥로(玉魯)이니 문희공 개의 후손이다. 운강 이강년 의병진의 참모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77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운강 창의록 및 보훈처기록)
의병장 천보락기 : 기적비가 문경읍 관음리 도로변에 세우져 있다. 천보락(千普洛) : 관은 영양(穎陽)이니 화산군 만리의 11대손이다. 1852년 임자 9월 15일 문경읍 관음리에서 출생하여 용력과 학문을 겸비하였다. 순종조에 장릉참봉이 되었다가 1895년 을미에 운강 이강년선생과 의거의 깃발을 높이 들고 그 선봉좌익장이 되어 가는 곳마다 전공을 세우고 1896년에는 제천에서 의암 유인석 휘하에서 유격장으로 수안보와 조령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나 세력이 불리하여 의암이 만주 요동으로 떠나자 운강과 함께 영남, 호서를 근거로 의군을 취합하여 1905년 을사 후에 운강진에서 김상태, 백남규 등과 청풍, 단양에서 항전하였고, 1907년에 40여진의 의병이 제천에 모여 운강을 총대장에 추대하니 그 선봉장으로 갈평, 죽령에서 전공을 세우고 1908년에는 강릉,양양,안동,내성에서 역전하다가 6월 4일 청풍전투에서 운강이 부상피체되어 순사하니 만주로 망명하여 그 생사를 모른다.(운강 창의록)
의병장 이인영기 이인영(李麟榮) : 관은 경주(慶州)이다. 가은읍 갈전리 아개동에서 출생하여 고종 병신(1896)에 기의하였다. 여주에서 적에게 패한 바 되어 소백산에 대피하여 때를 기다리던 중 정미년(1907)에 여주의려 이영미가 옹립하여 대장이 되니 이를 관동진이라 한다. 제천 충주에서 적과 싸워 승리하고 적에게 잡혀 교수대에서 사망 순국하였다.(한국독립운동사 의병편)
의병 민순호 묘비 : 가은읍 완장리 법흥산 후록 민순호(閔舜鎬) : 관은 여흥(驪興)이요 자는 봉래(鳳來)이며 호는 우초(愚樵)이니 정언 회은 조영(祖榮)의 후손이다. 고종 을유(1885)에 문경읍 평천리에서 출생하여 미목이 수려하고 총명이 뛰어나 7세에 입학하여 15세에 경학에 능통하고 향내테 문명을 떨치어 영남에 수재로 촉망되었다. 국운의 위급함을 보고 운강 이강년 휘하에 약관의 나이로 문관 종사로 피선되어 비밀리에 총참모로 지사를 규합하여 대사를 도모하는 대의를 설파하고 운강과 의암 유인석선생을 찾아 사제의 의를 맺고 가재를 풀어 소의신편을 간행해서 후학을 모아 병서를 교육하였다. 운강을 도와 정미(1907) 의려 때는 원주대장 민긍호와의 내왕책임을 맡아 이를 성공시켜 배양산 석굴에 많은 무기를 갈무려 대승하는데 공이 크셨다. 무신 운강 피해 후에는 난시일기와 비밀문건을 분산 보관하고 임자년부터 가은 완장에 은거하여 초부로 자족하며 애국입도를 후손에게 교육하고 친환에는 단지헌혈하고 을사에 졸하였다.(운강 창의록 및 보훈처기록)
의사 심거벽 묘 : 가은읍 상괴리에 있다. 심거벽(沈巨璧) : 관은 청송(靑松)이니 청원군 대의 후손이다. 호를 홍당(洪黨)이라고도 하였다. 운강의진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이 있었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의사 김병수 묘비 : 마성면 남호리 봉명초등학교 옆산에 있다. 김병수(金炳秀) : 관은 안동(安東)이요 자는 덕진(德眞)이며 호는 해선(海仙)이니 임진란에 봉화 의병장으로 순국한 경호의 10대손이다. 고종 15년에 출생하여 국사가 위태함을 보고 울분을 달래던 중 1908년 4월에 운강 이강년 휘하의 권용윤과 왜적토벌차 봉화에 올 때 내성,영주의 적정을 염탐하여 제보하고 가산을 던져 의병의 군비를 도왔다. 운강 의병대장의 옥사소식을 듣고 나라가 무너진 다음해 1911년에 문경읍 용연리로 옮겨 숨어 살았다. 1919년 3.1 만세운동 때는 동지 신태인, 전중연, 이은화 등과 4월 15일에 도로부역을 나온 주민들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고 다음날 갈평헌병분견대를 향해 돌진하다가 헌병에게 체포되어 8월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왜놈들의 모진 고문으로 발병하여 1944년에 졸하였다. 임종에 맏아들 익규에게 왜적토벌을 위해 전력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익규 또한 유훈을 받들고 일제에 협력을 거부하고 감시속에서 생활하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한국독립운동사 3.1운동편)
열사 유수년 묘비 : 문경읍 평천리에 있다. 유수년(柳壽年) : 관은 진주(晋州)요, 통정 하(霞)의 손이다. 고종 정해(1887)에 단양 영춘에서 출생하여 지모가 과인하였다. 운강 이강년선생이 병오(1906)에 만주에서 귀국하여 재거의를 할 때 영춘장사에 잠입하여 심야에 각처로 격문을 보내는데 간적이 이를 왜병에게 밀고하니 일군 2명이 운강을 암습해 왔다. 운강이 칼로 대적타가 그 얼굴에 중상을 입으니 치료할 방도가 없어 고생하는데 공이 자기집 묘실에 숨기고 백방으로 치료하니 3개월 후에야 의병을 지휘케 되었다. 공도 그 의진의 막료로 참가해 싸우다가 적에게 잡혀 강릉옥중에서 순국했으니 그때가 정미(1907) 4월 20일이었다.(보훈처기록)
독립지사 유성우 묘비 : 산양면 존도리에 있다. 유성우(柳晟佑) : 관은 풍산(豊山)이니 서애 유성룡의 12대손이다. 1890년 1월 14일 산양면 존도리에서 출생하여 3.1운동시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수사망을 피하여 상해로 망명하여 임정요인들과 신명을 같이하고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임정의 지령에 의하여 군자금모집의 사명을 띄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60만원을 모집해 임정에 보낸 후 계속 활동하다가 왜경에게 잡혀 6월형을 선고 받았으나 동지의 배신으로 또 다른 모금사건이 발각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혹독한 고문끝에 욕되게 생명을 부지하는 것보다는 떳떳하게 죽겠다는 결심하에 단식끝에 대구감옥에서 자진순국하니 1922년 11월 26일이요, 나이 33세였다.(보훈처 기록)
독립지사 엄주연 묘비 엄주연(嚴柱璉) : 관은 영월(寧越)이니 충의공 흥도의 후손이다. 1865년에 산양면 위만리에서 출생하여 의협심과 애국심이 누구보다 강하여 항일독립운동의 투사가 되었다. 1922년에는 의용단 경북재무국 내무주임에 취임하여 도암 신태식과 가은 죽문의 한양이, 산북 서중의 장세명 등과 군자금 모집에 전력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당하여 1년여를 취조받고 모진 고문으로 사경을 겪었으나 끝내 함구하였다. 풍부한 자산을 독립운동자금에 희사하고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1934년에 별세하였다.(한국독립운동사 의용단편)
3.1 독립운동과 고장의 민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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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토) 일제의 무단정치에 대한 우리 민족의 분노는 마침내 정오를 기해 터지고 말았다. 축적된 민족의 울분과 항일의식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인민과 영토는 주권과 주권 사이에 거래물로 전전할 것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민족자결론에 힘을 얻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을 진동했다. 이 때 문경시의 민중운동은 여타 지역보다 좀 늦은 4월 중순경에 김룡사 지방학림 학생 18명이 산북면 우곡리에 온 것을 경찰이 탐지하고 헌병에게 연락하여 이들 전원이 검거되어 의거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4월 15일 김병수외 2명은 도로보수를 위해 동원된 인부 40명과 더불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마침 장날인 갈평시장으로 들어가 시위를 하자 많은 군중들이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를 함께 불렀다. 이때 일본 헌병 3명이 달려와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군중은 계속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국 일본헌병의 야만적인 탄압과 군중은 흩어지고 김병수 등 3명의 주동인물은 검거되고 말았다. |
본 시 출신 독립운동 유공자
이은영(李殷榮) : 민단조합원인 이은영은 의병장 이인영의 형이다. 민단조합은 1915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인 바 1916년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조합원이 체포되어 조합의 전모가 드러나자 체포되었다. 유시하(柳時夏) : 풍산인으로 산양면 존도리에서 태어나 대학을 나온 그는 남북통일촉진회장으로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적도 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3.1운동에 가담하다 체포되었고 옥고를 치른 후 중국 등지로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광복을 위한 일생을 가졌다. 황 옥(黃 鈺) : 1922년 7월, 경기도경찰국 고등계 한인경부로 근무중 김시현에게 포섭되어 김시현 등과 1923. 3. 7 중국으로부터 폭탄 36개 권총 등 다량의 무기를 밀반입, 자신의 직분을 이용하여 신의주를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밀고자가 있어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니 세칭 의열단 폭탄암살음모사건(황옥사건)의 주인공이다. 황직연(黃稷淵) : 황옥 등과 함께(황옥사건)에 가담하여 조국광복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대부분의 의열단원들은 체포되었으나 황직연은 김지섭, 권정필, 김사용 등은 체포되지 않았다. 신철균(申喆均) : 이종필과 함께 광복회 회원으로 활약했다. 만주지방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의병, 해산군인, 만주이주민 등 애국청년을 훈련하여 군대를 편성한 후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조직된 광복회는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특히 1917. 12. 13 농암면 지동리의 부호 조시영으로부터 70원의 군자금을 모금했다. 김병수(金炳秀) : 문경에서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이다. 1919. 4. 15 도로보수를 위해 동원된 인부 4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어 마침 갈평장날이라 시장안 군중들 틈으로 뛰어들어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다. 노한구(盧漢九) : 3.1운동 직후 상주의 강훈, 문경의 이현구 등과 함께 항일결사를 조직하여 그 이듬해 봄에 동지를 시켜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 500원을 보냈는데 이듬해 그 일이 탄로가 나 대전 일경에 체포 1년 6월의 형기를 마쳤으나 고문 등으로 인한 병으로 광복 이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종필(李鍾必) : 광복회 회원으로 1913년 채기중 등이 풍기에서 조국광복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인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1918. 11 권영묵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다가 영주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어 광복회 조직과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현구(李現求) : 3.1운동 직후 노한구, 강훈 등과 함께 항일결사를 조직하여 그 이듬해 강훈으로 하여금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 500원을 보냈는데 그 이듬해 그 일이 탄로되어 대전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김낙문(金洛文) : 1908년 국운을 비탄하여 음독자살을 한 김제흠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별세한 후 상복을 벗지 않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고 1911년 이동하와 함께 노병식, 김동연, 강병수 등 수십명이 1914년 말까지 자기집을 근거로 배일운동을 하면서 독립의 군부에도 가맹하였다. 이식재(李湜宰) : 운강 이강년의 생질로서 1914년 11월 운강 막하의 군자장 최욱영으로부터 의병 참가 권유를 받고 강병수 등과 원주 백양산에서 모여 1914. 12. 1 충북 제천군 근북면사무소를 습격하였고 김낙문의 권유로 이동하의 민단조합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동하(李東夏) : 운강 이강년 막하의 참모장이자 군자장인 그는 1911년 이후 풍기의 노병식과 군자금 모금에 종사하였으며 간도 등지로 망명하였다. 1915년 제천 이은영, 청양 이세영과 함께 민단조합을 결성,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김낙문과 이식재를 가맹시켰다. 유성우(柳晟佑) : 유성룡의 12대손으로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활동하던 중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잠입, 60만원을 모금하여 상해에 보냈으나 일경에게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자진 순국하였다. 김병우(金炳祐) : 1916년 이증연의 권유로 동지들과 우수식지를 절단, 배일을 단지로 결의하고 한일합방 찬성 대신 암살과 조선독립을 결의하였다. 1917. 2. 15 이증연, 황재철의 문서를 교부하다가 왜관 헌병에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자진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1918년 서천경찰에 체포되었다. 엄주연(嚴柱璉) : 대한독립의용단(단장:신태식)의 내무주임으로 활약했다. 1920. 9 김천에서 그곳 부호 이명균, 신태식, 이응수 등과 조직한 비밀결사단체인 의용단은 군자금 모금을 위해 활약하다가 1822. 11. 28 이태기, 김사묵 등 4명이 체포되므로써 의용단의 조직과 김찬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한양복(韓良復) : 엄주연과 함께 대한독립후원의용단에서 내무집사로 활약했다. 의용단에는 한양이, 정원영 등도 함께 일을 했으며 경북인이 주축이 된 의용단은 아주 방대한 조직으로서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대한 활동을 하였다. 박 열(朴 烈, 朴準植) : 서울 경성제2고보 재학중 독립운동에 관련되어 퇴학을 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 및 흑우회(黑友會)를 조직, 불령선인(不逞鮮人)을 발간하였고, 1922. 7 일본의 신사현 탄광에서 한국인 100여명이 살상된 일을 폭로하는 한편 관동대지진 후에는 황실에 대한 음모를 기획하기도 하였다가 체포되어 1926년 3월 대심원에서 대역죄로 사형이 언도되었으며 그해 4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였다.
6.25 동란과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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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괴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동란은 우리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인적.물적 피해를 가져다 준 동족상잔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괴 괴수 김일성의 적화야욕이 빚어낸 6.25는 평화롭던 이 고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으며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고장은 1950년 7월 13일부터 31일까지 20여일간 계속된 전투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재산은 초토화되었고 북괴군의 많은 애국지사와 비 전투원인 양민을 학살하며 재산을 약탈하여 갔다. 북괴군의 강점 기간 중 우리 고장에서 학살된 민주인사의 숫자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확인된 인사만도 42명이며, 9.28 후퇴시 북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지방 애국인사 72명을 이화령에서 학살하고 도주했었다. 그리고 양곡·가축 등을 있는 그대로 약탈해가고 점촌에서 문경에 이르는 국도변의 가옥들은 거의 소실 되었다. 수복후 고장 주민들은 폐허가 된 이 고장을 재건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데 혼신의 열과 성을 쏟았던 것이다. |
이화령 전투 : 1950. 7. 13 10:00 적의 공격으로 거의 하루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전투는 계속되어 14일 11시경 연풍삼거리를 탈환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 800명을 사살, 7명을 생포하였으며, 탱크 10대, 70㎜유탄포 3문을 파괴 또는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조령 전투 : 1950. 7. 14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와 울창한 산림속에서 1개 대대의 병력으로 적 1개연대와 대전, 전원옥쇄의 굳은 결의로 응전하였으나 동일 오후 1관문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35연대 전투 : 1950. 7. 16 15:00 미35연대의 1개 대대가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당도했으나 그때의 전황은 이미 기울어져서 철수단계이었으므로 F중대가 155야포를 봉명산 서쪽에, 전차소대는 불정에서 대기하는 등 주로 3번국도에서 철 수 엄호태세만 취하였다. UN공군 오폭 : 1950. 7. 16 하오 문경전선이 위기에 처하자 F-86 1개 편대가 지원 출격, 1차는 이화령 북쪽 적진을 강타하였으나 19:00시경 2차에는 피아를 분간치 못하고 남호리에 집결중인 아군 진지를 4차례나 기총소사하여 아군 차량이 10여대가 파손되는 등 작전에 큰 혼선을 야기했었다. 옥녀봉 전투 : 1950. 7. 19 아군 7연대는 은성광업소가 있는 왕릉리의 양편 고지에서 괴산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저지키로 하였던 바, 새벽 6시를 기하여 적은 집중공격을 해 왔다. 아군 제3대대는 옥녀봉에 배치, 적과 2시간동안의 격전을 치뤘으나 중과부족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봉 전투 : 1950.7. 19~28 사이 새봉에서 치뤄진 전투로서 7.21 02:00부터 시작된 전투는 8주야에 걸친 처절한 육탄전으로서 고지의 주인이 4번이나 바뀌는 대혈전장이었다. 7.23 전투에서는 적사살 300, 생포 1, 기관총 1,836, 소총 12,836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원동(院洞) 틀모산 유곡(幽谷) : 1950.7.19~28일 사이 유곡~원동간의 전투로써 7.23 07:00경 적은 보·전·포의 협동부대를 원동에서 유곡에 이르는 축선을 공격해 왔다. 아군 2연대는 틀모산 서편에 대전차 특공대를 배치하고 육탄으로 적 전차를 폭파하기 위해 육탄용사 7명을 자원 선발하여 적 전차 4대를 일시에 폭파한 무용담은 전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오정산 전투: 1950.7.19~28일 사이의 전투로써 7.19 07:00부터 시작된 적과 아군 3연대와의 혈전은 무려 10일간이 계속되었으며 고지의 주인이 4번이나 바뀌는 대접전이었다. 숫적으로 열세인 아군은 숫적으로 우위에 있는 적의 공격을 최대한으로 저지하였다. 유곡·틀모산 전투 : 1950.7.19~28일까지의 전투로써 7.21~23일 사이 3주야에 걸쳐 적을 원동·유곡 축선을 돌파하고자 발악을 했으나 아군의 선방으로 전차 8대를 폭파 당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23일 07:00~28일 19:00까지 1주일간을 뺏고 뺏기는 접전을 벌인 전투였다. 적성리 전추 : 1951.1.13~16일까지 4일간에 걸쳐 적과 싸워 대승한 전투이다. 1.4후퇴 후 제천,단양까지 진출한 적은 동로 방면으로 침공하여 아군은 1개 대대와, 미10군단의 특별공격대 만으로 전투하여 적 사살 1,057, 부상 900 외에도 수많은 무기를 노획하였으며 적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 전투에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한청단원 24명이 용전,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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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피학사유적 - 이화령> 북괴군이 우리 고장을 강점하고 있는 1950년 7월 30일부터 동년 9월 28일까지의 3개월간 그들은 우리 고장의 애국인사를 내무서에 구속했다. 이 중에는 경찰관,군인,공무원과 그 가족, 그리고 민간인들이 미처 피난치 못한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9월 27일 구금 중이던 100여명의 애국인사들을 철사줄로 묶어서 후퇴하다가 이화령 정상 못미친 계곡에서 전원을 학살하였다. 학살된 인사들은 문경,괴산,상주 등지의 인사들이었고 전원이 학살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들을 확인할 수도 없음이 애석하다. 그 중에서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단 한 사람이 현재 문경에 거주하고 있는 김일현씨이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아는 사람은 농암에 사는 전 경찰관 정인석씨 한사람이다. 북괴가 저지른 천인공로할 그 만행이 사라진 지금 현장에는 위령비 하나 없다. 그날로부터 35년, 산하는 말이 없고 이름모를 산새들만이 지저귀는 그곳에 어느 뜻있는 이들이 표식이라도 해놓는다면 고장을 지키다 간 넋들의 위령이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북괴는 우리 문경시를 강점하고 있던 기간(1950.7.30~1950.9.28) 중에 후퇴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시내 군인,경찰과 공무원과 그 가족,대한민국에 충성하고 있던 한청 간부,족청 광복청년단 간부, 심지어 동리 구장, 그밖에 인사들도 반동분자로 규정하여 즉결 총살 혹은 인민재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총살하였다. 그 중에서 확인이 된 인사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점촌> 김용술,신정희 <문경> 손해관,김태호,양문불,장춘섭 <가은> 이강달,이인흠,강봉희,박규덕,신장백,신구식,이덕신 <동로> 박보익,김자헌,김택진 <산북> 김진수,박종서,김환규,김원한,변종구 <마성> 이희석,김정인,이용득,박성규,이응준 <농암> 정인석,장덕수,장인석,채순령,김광진 |
다. 교통·통신 유적
역,원(驛,院)
어제의 교통과 역
교통이란 사람과 재화의 수송과 통신을 의미한다. 사람의 생활은 육,해,공의 생활 공간속에서 영위되고 그 발달은 생활공간의 극복, 즉 교통의 진보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교통의 진보는 우리의 생활 발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앙집권적인 양반관료국가로 지향한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새로운 수도의 건설 뿐만 아니라 전국의 도로망과 역원제 및 봉수제까지도 모두 한성부 중심으로 개편 함으로써 정치,군사,경제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역제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천은 있었으나 도로의 거리 표시는 주척(周尺,營造尺) 6척(尺)을 1보(步), 360보(步)를 1리(里), 30리(里)를 1식(息)으로 한다 하였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그렇게 정확하지 못하였고, 경복궁 앞의 원표(元標)를 기점으로 도로를 따라 매 10리에 소후(小堠), 매 30리에 대후(大堠)를 두되 후에는 리수(里數)와 지명을 새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밖에도 5리마다 정자를 세우거나 30리마다 유유(楡柳)를 심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도로의 폭은 외방(外方)은 따로 규정이 없으나 대체적으로 협소하였고 도성내는 대로 광(廣) 56척, 중로 16척, 소로 11척으로 하고 양방(兩傍)의 한광(漢廣)을 각 2척으로 하였다. 우리나라는 고래로 사람은 보행, 기마, 교자를 주로 사용하고 화물의 수송에는 인력, 우마에 주로 의존했고 중국처럼 차량 이용은 거의 없었다. 먼저「경국대전(經國大典)」공전(工典) 원우조(院宇條)에 의하면 대로는 서울을 중심하여 서울→개성, 서울→죽산, 서울→직산, 서울→포천간 4개로가 대로이며, 이 4대로와 연결된 개성→중화, 죽산→상주, 진주, 직산→공주,전주, 포천→회양, 서울→양근간의 중로가 되었고 이들과 연결된 외방의 각종 도로가 소로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9개 간선도로 가운데 경상도에 관한 것은 제4로 서울→동래 계(系)와 제5,6로 서울→고성 계이다. 제4로는 남대문을 나와 한강진을 건너 동남쪽으로 과천,충주를 거쳐 문경 초점, 상주, 대구, 밀양, 동래, 부산진에 이르는 길이다. 제5,6로는 다같이 남쪽으로 고성 통제사영으로 가는 길인데 두 길이 모두 남대문(숭례문)으로 나간다. 그 중 제5로는 제4로를 따라 판교와 용인을 거쳐 문경의 유곡역까지 가서 그곳에서 함창,상주,성주를 지나 통영으로 나가는 길이다. 제6로는 동작진 또는 노량진을 건너 과천,수원을 거쳐 통영에 이르는 길이다. 한편 평해와 울진을 거치는 도로는 제3로로서 동대문(흥인문)을 나와 양근,원주,강릉,삼척을 거쳐 울진과 평해에 이르는 도로이다. 이러한 국가의 기간도로 외에 시대의 진전에 따라 새로운 도로가 생기기 마련이다. 인구의 증가에 따라 신생촌이 생기게 되고 농업생산성의 향상과 상공업의 발전에 따라 지역간에 물산의 수송이 활발해지는 동시에 이에 따라 도로망은 자꾸 복잡해 갔던 것이다. 경북지방은 조령에서 상주를 거쳐 동래로 나가는 간선도로, 낙동강을 따라 전개된 도로, 해산물의 공급을 위한 영해,영덕에서 진보,청송을 거쳐 안동으로 연결된 도로, 경주에서 영천을 거쳐 하양,대구,성주로 연결된 도로, 영천에서 신령을 거쳐 청송으로 나가는 도로, 도내의 중앙인 대구에서 추풍령,조령,죽령으로 통하는 도로, 기타 중소로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경상도역 편성표에 따르면 경상도에는 역승도(驛丞道)가 사근도(沙斤道), 성현도(省峴道), 김천도(金泉道), 창정도(昌鼎道), 장수도(長水道), 황산도(黃山道), 유곡도(幽谷道), 소촌도(召村道), 안기도(安奇道), 자여도(自如道)로 나누어져 있었고 또한 경국대전 소재 경북지방역 편성표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1.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 2.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 3.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 4.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 5.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6. 송라도역승(松羅道驛丞) 7. 창락도역승(昌樂道驛丞) 8. 황산도역승(黃山道驛丞) 유곡역은 지금의 점촌동 유곡리에 있었으며 옛날 현소재지였던 문경구읍에서는 남으로 40리되는 곳이다. 유곡도찰방은 종6품 직계로 유곡에 상주하면서 유곡로에 속한 19개역을 관장하였는 바 18개 역이름은 다음과 같다. 1. 문경 유곡(聞慶 幽谷-中) 2. 문경 요성(聞慶 요城-中) 3. 함창 덕통(咸昌 德通-中) 4. 예천 수산(醴泉 守山-小) 5. 상주 낙양(尙州 洛陽-中) 6. 상주 낙동(尙州 洛東-小) 7. 선산 구미(善山 九彌-小) 8. 비안 쌍계(比安 雙溪-小) 9. 비안 안계(比安 安溪-小) 10. 용궁 대은(龍宮 大隱-小) 11. 용궁 지보(龍宮 知保-小) 12. 군위 소계(軍威 召溪-小) 13. 선산 연향(善山 延香-小) 14. 상주 낙원(尙州 洛源-中) 15. 선산 상림(善山 上林-小) 16. 상주 낙서(尙州 洛西-小) 17. 상주 장림(尙州 長林-小) 18. 상주 낙평(尙州 洛平-小) 19. 선산 안곡(善山 安谷-小) 당시 경북지방에는 37읍에 86개 역으로서 장수역(長水譯-在新寧縣), 송라역(松羅驛-在淸河縣), 안기역(安奇驛-在安東府), 창락역(昌樂驛-在豊基郡), 성현역(省峴驛-在淸道郡), 김천역(金泉驛-在金山郡), 유곡역(幽谷驛-在聞慶縣) 등 7개 본역이 있었다. 역을 관할하는 중앙의 최고기관은 병조였고 그 안에서 우역사무를 맡은 곳은 승여사(乘輿司)였다. 본역에는 찰방의 집무실인 아사(衙舍), 중외사객(中外使客)의 숙박처인 관사 기타 통인방(通引房), 책방(冊房) 등도 있었다. 일반 역에는 사람을 수용할 역관(驛館)과 말을 수용하는 마구(馬廐)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중심으로 역촌이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그 역과 관련이 있는 역리(驛吏), 역졸(驛卒), 역노비(驛奴婢), 일수(日守) 등이 거주하였고, 일반 양민들도 거주하였다. 역촌에 거주하는 양민들은 주로 역리(驛吏), 역졸역(驛卒役)을 조역(助役)하면서 생활하였고 그 대신에 군역을 면제 받기도 하였다. 이들은 입마(立馬)의 역(役)을 지는 대신에 마위전(馬位田)을 받아 경식(耕食)하였다. 역의 시설에는 아사(衙舍), 관사(館舍), 구사(廐舍) 외에 마신당(馬神堂)이 있고 큰 역에는 누정(樓亭)이 있었다. 이러한 곳에는 중외사객이 왕래하면서 시를 지어 현판한 것이 많았다. 역은 교통운수를 맡은 기관인 동시에 하나의 특수촌락을 형성하여 일반촌락과 구분되었다. 역의 행정 실무를 맡고 있던 역리는 군현의 향리보다 한 단계 낮게 천시되어 원악향리(元惡鄕吏) 또는 기타 범죄향리에서 예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노비신분에 준하는 역졸, 역민들은 일반 양민보다 훨씬 천시되었기 때문에 일반 상민촌보다 한단계 낮은 이른 바 역촌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역은 국가적으로 볼 때 교통 운수상 매우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막대한 역전이 배정되었고, 큰 역에는 역졸이 4,500명이나 되었고 역노비도 40~50명은 보통이었다. 역이 통신과 운수의 기능을 겸유한데 대하여 선조 30년(1597)부터는 통신만을 위주로 한 파발의 제도가 생겼다. 이는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대전란을 겪으면서 군사정보나 변정(邊情)의 신속한 전달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기발(騎撥)은 25리마다, 보발(步撥)은 30리마다 각각 1참(站)을 두고 매참에 발장(撥將) 1인, 군정(軍丁) 수인 그리고 기발에는 말 5필을 두었다. 전국의 파발은 남발(南撥)인 보발로써 경기도 광주, 신천참에서 충주 임마참을 거쳐 동래 초량참에 이르는 34참이 있었다. <참고문헌:세종실록지리지,경국대전,신증동국여지승람권29 경상도 문경현역원조,문경군지 증보판,경상북도사 상권>
어제의 원관(院館)
조선시대 여행의 편의를 제공하던 시설로는 원(院)과 관(館)의 제도가 있었다. 공,사 여행자의 숙식을 위해서 각요로에 원을 두고 중외사객을 접대하기 위해 각 군현에는 객사인 관(館)을 두었다. 권근이 지은 문경현 견탄원 기문에「국가가 역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달하고 원을 두어 상고(商賈)와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니 이 양자는 공사와 상하의 분(分)이 명백하다. 역에는 각기 역리가 있어 역무를 관장하지만 원에는 단지 원전만 지급하고 사람을 모집하여 원주로 삼아 운영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문경현역원조)하였으니 국가적인 입장에서 볼 때 역과 원의 관계는 공사와 상하의 차이가 있어 원보다 역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태조 3년(1394)에 착공, 동왕 6년에 준공한 경주의「덕방원(德方院)」기문을 쓴 권근은 역시 원에 대하여 “역관의 설치는 여행자를 접대하는 곳으로 노자(勞者)로 하여금 쉬게 하고 유숙자로 하여금 우숙케 하며 비가 올 때는 그늘지게 하며 도적과 맹수의 피해가 없게 하니 상인과 여행자들에게 이익을 줌이 실로 크다. 그러므로 역관은 왕정의 소중이며 또한 불교에서 권장하는 바다. 우리나라 법전에 원리를 특히 우대하여 사전(賜田) 면역하고 그들로 하여금 원사(院舍)를 수축 운영케 하였는데 때로는 불교의 자선행위를 흠모하는 무리들이 원우를 짓고 또 원포(園圃)를 마련 채소를 가꾸어 사람에게 제공하고 초료(草料)를 준비하여 우마를 사육하니 위선(爲善)의 보답이 어찌 적겠는가”(동문선 권79 덕방원기 참조) 하여 불교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지적하였다. 원은 원래 사원(寺院)의 원우(院宇)에서 유래한 것 같으며 고려시대의 불우(佛宇) 가운데는 교통의 요지에 있는 것은 불사(佛寺)로서 뿐만 아니라 여행자의 숙식소로서의 역할도 했던 것이다. 원의 명칭이 불교식이 많은데다가 원우도 종전의 사원에서 유래한 것이 많고 또 원의 설립자나 원주 가운데 승려가 많았는데 이는 불교의 ‘복전(福田)’사상에 그 사상적 배경을 두면서 불교의 적극적인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던 것이다. 상기 태조 6년(1397) 천왕사당두연상인(天王寺堂頭然上人)이 설립한 혜리원(惠利院 경주,德方院)이나 15세기초 화엄대사(華嚴大師) 진공(眞公)이 중수한 문경현의 견탄원 등이 바로 그 예이다. 승려들은 원의 계속적인 운영을 위해 기본재산 이식을 불려가는 방법(寶)를 취하기도 하고 전지(田地)를 개간하여 채소를 가꾸고 꼴(草料)을 준비하여 여행자에게 시혜하기도 했던 것이다. 원은 반관반민적 성격으로 고려시대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교통기관으로 제도화된 것은 조선왕조부터였다. 집권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왕조는 역과 함께 수도를 중심으로 전국 군현에 확대정비 하였다. 15세기 초부터 국가가 주동이 되어 종전에 개별적으로 설립 운영해 오던 원을 수령의 관할 하에 두었고, 수령의 책임하에 원우를 수축하고 원주를 선정한다든지 원에 위전(位田)을 지급하는 등 원제(院制)를 정비하여 대소사객(大小使客) 등의 공용여행은 물론 일반 상인이나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시책은 현물경제체제하에 있던 조선전기에 있어서 더구나 교통과 운수수단이 극도로 불편한 상황하에서는 원제의 정비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승려를 원주에 임명하고 혹은 승려로 하여금 원우를 설립 수리케 한다든지 원주(院主) 대신 원주지(院住持)란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 조선시대의 원이 종래의 사원에서 유래한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여말선초에 걸쳐 유불교체는 결과적으로 각지의 혁파대상 불사가 많아졌고 정령외의 승려들은 종전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이러한 혁파 대상 불사나 폐사직전에 놓인 사원의 유휴시설을 활용하고 한유(閑遊)한 처지에 놓인 승려들을 활용한데서 마침내 원의 전국적인 발달을 보게 되었다. 조선왕조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원이 종전의 역참제와 같이 공적인 성격의 기관으로 개편되어 갔다. 태조 6년에 편찬한 경국대전에「원관수보고찰문법(院館修補考察文法)」과「원주차임(院主差任)」「원우유지법(院宇維持法)」등 원에 관한 제규정이 기재되었고 태종조를 거쳐 세종조에 이르러 원주에게도 역리(驛吏), 진척(津尺) 등과 함께 봉족(奉足)을 지급하였고, 동왕 27년(1445)에는 대,중,소로의 원에 따라 대로원은 1결50부, 중로는 1결, 소로는 50부로 하되 원의 부근에 있는 토지를 절급(折給)하였다. 이는 경국대전에 와서 다음과 같이 개정되었다. 원우는 지방의 원은 수령이 부근 주민으로 하여금 원주로 삼아 원우를 수리하며, 원위전(院位田)은 ‘자경무세(自耕無稅)’의 지목으로 원주전(院主田)은 대로 1결35부, 중로 90부, 소로 45부로 하며 급보(給保)는 원주에게 급보를 3인으로 하되 이들에게는 타역(他役)을 부과하지 않았다. 위의 규정은 국초 이래 여러번 개정끝에 마침내 영세준수할 법전에 실린 것이다. 따라서 세종초에 편찬되었던「경상도지리지」와「세종실록지리지」에 부재(不載)되었던 원이 예종 원년(1469)에 편찬한「경상도속찬지리지」에 비로서 원우조(院宇條)가 있어 각읍마다 원의 명칭과 그 소재지가 명시되었던 것이며 성종조에 편찬한「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각읍마다 역원조가 있어 역을 기재한 다음에 원명과 그 소재지 및 원에 관한 기문 등이 실려있다. 「동국여지승람」소재 1,263 원이 중종 25년(1530)에 증보한「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1,309원으로서 그 사이에 46원이 신설되었으나 16세기 말부터 급격히 감소되어 갔다. 8도 가운데 경상도가 468원으로서 가장 많으며 문경현의 원은 다음과 같다. 조령(鳥嶺), 요광(要光), 관음(觀音), 관갑(串岬), 회연(回淵), 문경(聞慶), 불정(佛井), 보통(普通), 동화(桐華), 견탄(犬灘), 화봉(華封) 등 11개 원이다. (이상 경상북도사 상권 원제와 경북지방 원의 분포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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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데 자리한 관갑(串岬), 견탄원(犬灘院), 영남의 목구멍에 자리한 유곡관사(幽谷館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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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갑(串岬) 견탄원(犬灘院)
권근의 기문에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가 있는데 그 재를 넘어서 약 백리 길은 모두 큰 산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떨어지를 따라 사다릿길로 길을 열어서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로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내를 건너는데 그것이 견탄이다.” |
유곡관사(幽谷館舍)
홍귀달의 중수기에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의 길로 모여 들어서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울로부터 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이곳을 지나야 그 갈 곳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고로 이곳을 사람에게 비긴다면 곧 영남의 목구멍이라 하겠다. 목구멍에 병이나면 음식을 통과시킬 수 없고 음식이 통과하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 이것이 우후(禹候)가 급히 전사(傳舍)를 수리하되 유곡을 먼저한 까닭이리라. 홍치 5년에 우웅(禹雄)이 나와서 이 역로의 찰방이 되어 유곡관사를 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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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앙의 발자취
가. 민간신앙
서 낭(城隍) 길가는 나그네들이 돌을 던지고 침�거나 가지고 있던 물건을 두고 가는데 이는 토지의 부락(富樂)을 수호하는 신에게 재난을 없애고 소원 성취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렇게 서낭(城隍)에 대한 지금까지 우리의 지식은 우상숭배나 샤머니즘(무속)의 잔존형태로서 이해돼 왔으나, ‘고대인들의 돌싸움(石戰)에 있어 하나의 병참기지였다’는 새로운 학설이 나왔다. 이 학설에 의하면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서낭은 원시 부족국가시대 부락전의 경우 돌싸움의 주요무기였으며 따라서 돌무더기는 방어진지의 주요한 요충인 고개마루나 강나루에 구축됐었다는 것이다. 문헌상으로 본다면 이미 신라 자비대왕(458~478)에 왜구가 반월성을 침략했을 때 돌로써 이들을 격퇴 했다는 최초의 기록이 나오며 삼국시대 때엔 더 많은 기록이 나온다. 우선 고구려의 기록에 의하면 나당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 당군에게 3백보의 거리까지 돌을 날릴 수 있는 포차(砲車)가 있었고 성을 공격할 땐 성안으로 돌을 날려보내는 포석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또 신라군의 공격부대 중에는 석투당(石投憧)이 있었는데 석투장을 이끄는 부대장이 때로는 12~18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고구려에서는 석전의 이 같은 유용성을 고려 평화시에도 왕이 임석한 자리에서 돌싸움의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민간 전승놀이가 되는 기틀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이같은 석전은 고려시대에도 중요한 무기로 사용했는데 고려에는 석투반(石投班)과 석투군(石投軍)이라는 특수부대가 있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왕실에서 이를 장려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특히 태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후 전승놀이로서 석전을 친히 관람, 석전은 놀이가 아니라 곧 무예라고 칭송했다. 뿐만 아니라 중종 때는 민간의 석전부대를 동원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으며 한국의 전쟁사에 있어 마지막 석전은 행주산성 싸움이었으며 따라서 행주산성은 진정한 의미에서 마지막 서낭이다. 그런데 서낭의 어원은 중국의「성황(城隍)」에서 비롯된다. 중국적 개념으로서의 성황은 마을의 성벽과 그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물길」(隍二垓字)인데 바로 부락의 수호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돌무더기로 부락방어의 의미가 있었던 관계로 그 의미상의 유사성으로 인하여「성황(城隍)」이「서낭」으로 변음되어 돌무더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서낭에 대한 지형적인 조건을 보면 모두 서낭은 부락이나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그 부락의 목(후두부)에 위치해 있다. 또한 서낭에 쌓여있는 돌이 큰돌이 아니라 던지기에 알맞는 정도의 크기이다. 만약 서낭이 기존 학설처럼 제신(祭神)이나 제천(祭天) 또는 제산(祭山)의 대상물이었다면 제천의식의 성격상 그것은 좀 더 아늑하고 깊숙한 또는 좀더 높은 곳에 위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적이 번잡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병참기지설을 증명하는 것이다. <건국대 신복룡교수,서낭의 정치적의미 논문에서 일부전재>
기우단(祈雨壇) 우리고장에서는 1950년대까지 기우제를 지내왔다. 그러나 현대과학과 전천후 영농방식에 밀려나고야 말았다. 기우는 분명 미신이다. 하지만 이 기우라는 신앙에서 우리 한국인에게 소중했던 초자아사상(超自我思想)을 가려 볼 수가 있고 또 그 사상이 우리 한국인을 얼마나 선량하게 하는 압력구실을 했는가 가늠해 볼 수도 있게 하였다. 기우단은 나라와 민간에서 비오기를 기원하는 제단이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3, 4년에 한번씩 한재를 당했으므로 삼국시대 이래 조정,지방청,민간을 막론하고 가뭄에 대처하여 기우제가 성했다. 나라에서는 왕이 정치를 잘못한 천벌이라 하여 왕 스스로가 몸을 정결히 하고 하늘에 제사하였으며 식음을 전폐하고 거처를 초가로 옮기며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민간에서는 산상 또는 냇가 등에 제단을 만들고 신역(神域)으로 정하여 정결히 하고 마을 전체의 공동행사로 제사를 지냈다. 제주는 마을의 장이나 지방관원의 장이 맡았으며 제물로는 돼지,닭,술,과일,떡,밥,포 등을 올리고 때로는 무녀의 가무가 있었다. 용재총화에 보면 서울에서는 기우지례(祈雨之禮)로 종묘사직과 흥인,숭례,돈의,숭정의 사대문에서 제사하고 오룡제(五龍祭)를 동,서,남,북 사교(四郊)와 중앙 종각 앞에서 거행했으며, 또한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모화관,경회루,춘당대,선농단,한강변 등에서 기우제를 거행한 기록이 있다. 우리고장엔 문경읍 당포리 등지에 기우제의 유습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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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제(祈雨祭)의 종류
봉화(烽火) / 방뇨(放尿) / 용사(龍蛇) / 자학(自虐) / 주술(呪術) / 이시(移市) / 폭일(曝日) |
산신당(山神堂) 한국인의 성산관(聖山觀)은 곧 산의 여신(女神)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온통 성체(聖體)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러기에 옛날 우리 조상들이 영산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대소변을 받을 그릇을 들고 갔다. 행여나 신성한 산몸둥이를 오염시킬까 조심해서이며 큰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또한 산에 든다고 하지 오만하게 오른다는 부손한 말도 결코 쓰지 않았다. 그래서 산신당,산령각 등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자연을 숭배하던 애니미즘(animism)의 우주관으로 자연물도 신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백제는「먼저 천신과 지신을 제사 지내고 산골짜기의 신에까지 미친다고 하였으며, 당회요(唐會要)에「신라는 즐겨 산신제를 지낸다.고 하였는데 고려 경종(976~981) 때에는 삼산오악신(三山五岳神)을 제사하였다. 삼산에는 중국식으로 봉래산,방장산,영주산으로 정하고 오악에는 동은 토함산, 남은 지리산, 서는 계룡산, 북은 태백산, 중은 부악으로 정하여 나라에서 제사하고 나라와 백성의 행복을 빌었다. 국조보감(國朝寶監)에 의하면 고려는 덕적산,백악,송악,목멱산의 산신을 매년 춘추에 무당과 여악으로 제사하였다 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산신제의 풍속은 여전히 계속되어 사악신(四岳神)으로 지리산,삼각산,송악산,태백산을 정하였다. 나라에서 제사한 치악산,죽령산,주흘산,금성산,우이산,마니산,한라산,감악산,백두산,의관령 등에 단을 만들고 삼칸에 사당을 짓고 신위를 두어 신좌는 북남향으로 하고 중춘(仲春),중추(仲秋) 두 번 나라에서 백성의 한재,수재,병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사하였다. 민간에서는 각 주읍에 진산을 정하고 산신당을 지어 진호신(鎭護神)을 모시고 춘추와 정초에 제사하는 풍속이 있었다. 조선총독부 간(刊) 부락제(部落祭)에 의하면 전국의 부락제 522개소 중 산신제에 해당되는 것이 176개소나 되면 우리고장에서는 산북면 소야리 등지에서 지금도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문경신단 : 문경읍 상리 주흘산 밑에 있다. 주흘산신단 : 문경읍 상초리 주흘산에 있다. 상초리 동민이 매년 정월 대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옛날부터의 축문이 전해오고 있다. 신기산신당 : 점촌동 신기리 기제동 기제사지에 있다. 옆에는 기제굴이 있어 맑은 물이 항시 흘러 나오고 있다. 정월 보름, 삼월 삼진,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칠월 칠석, 11월 동지에 고사한다. 월방산산신당 : 산양면 봉정리 마을 뒤에 있는 월방산 꼭대기에 조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있고 그 방안에는 큰 호랑이를 타고 있는 백발노인의 화상이 걸려 있는데 이가 곧 월방산 산신령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쌀을 모아 음식을 차려 제사를 드려 제액초복의 축원을 드리고 있다.
동제단(洞祭壇) 정월 대보름날 동민들의 연중무병과 평온무사 및 풍년을 위하여 행하는 제사다. 제주는 제삿날 3일전에 제단에 와서 부근일대를 청결히 하고 황토를 펴며 솔가지를 꺾어 새끼에 매달아 금승(禁繩)을 쳐놓는다. 그리고 일주일 전부터는 목욕재계하고 육류를 먹지 않으며 상인(喪人)과 병자를 만나지 않으며, 음력 정월 14일 저녁에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제단 앞에 나아가 기름불 또는 촛불을 켜놓고 제물을 차려 놓은 다음에 대보름날 영시, 즉 초각경이 되면 동신제문을 읽으면서 제사를 지낸다. 이날 오전중에 제주는 역원(役員)으로 하여금 동민회를 열게하며 제비(祭費)의 지출 및 동신제의 상황을 보고하고 이듬해 제비 및 기타를 협정한 뒤에 동회 신임유사(有司-役員)을 선출한다. 이것이 끝나면 제찬과 주식을 나누어 먹는다. 우리 고장에는 점촌읍 흥덕리를 비롯하여 여러 마을에서 지금도 동제를 지내고 있다.
신기동제단 : 점촌동 신기에 있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동리에서 제사를 지내고 동리의 안태를 기원한다. 내화리신당 : 산북면 내화리에 있다. 내화리 동민이 매년 정월 대보름에 제사한다. 종곡리동제단 : 농암면 종곡리 동민이 매년 정월 보름에 제사를 올린다. 소야리동신당 : 산북면 소야리에 있다.
나. 불교유적
불교의 전래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여름에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순도화상(順道和尙)을 시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한 것이 한국에 불교가 전해진 시초라 하겠다. 2년 후인 소수림왕 4년에 진(秦)나라의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고구려에 온 것을 계기로 고구려에서는 이듬해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의 두 절을 세워 순도와 아도로 하여금 그 절에 머물러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다.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384)에 불교가 들어왔고 신라에는 그 설이 다양하나 대개 제19대 눌지왕 때(417~458)에 고구려로부터 묵호자(墨胡子)가 들어와서 제23대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되었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395년에는 진(晋)의 담시(曇始)가 요동의 교화를 위해 고구려에 오면서 경률(經律) 수 십부를 가져왔고 또한 평원왕 18년(576)에 의연(義淵)이 전제로 가서 <십지경론(十地經論)><대지도론(大智度論)><보살지지론(菩薩地持論)><금강반야론(金剛般若論)> 등 논장(論藏)에 대한 연구를 하고 돌아옴으로서 대승불교의 논장도 우리나라에 유통되게 되었다. 한편 신라 진지왕 초년에 수(隨)나라에 유학갔던 안홍은 <능가경(능伽經)><승만경(勝만經)> 등 신라불교의 기본경전이 될 경전을 가지고 왔으며 진(陳)에 유학하였던 지명(智明)은 계본(戒本)인 사분율(四分律)에 밝아 수행에 있어 귀감이 되었고 양(梁)에 유학했던 원광은 성실론(成實論), 섭대승론(攝大乘論)에 밝았고 화랑들에게 세속오계를 주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이밖에 신라의 대표적인 거승인 자장,원효,의상 등은 세계적인 학승으로서 불교사상의 기초인 대승불교의 중요한 경전들을 처음으로 체계화시켰고, 고구려 불교는 반야공(般若空) 사상을 중시했고, 백제불교는 율(律) 사상을 극히 소승적으로 이해했으며, 신라불교는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보살계사상(菩薩戒思想), 화엄사상(華嚴思想)이 도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학계, 교육계, 사상계에는 기라성 같은 고승대덕이 배출되어 선진중국의 불교를 능가할 정도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더욱이 원효는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주체인 진여(眞如)의 불교사상을 제창하여 이것이 바로 화엄철학에 입각하여 보살로서의 인간의 참다운 수행의 길을 밝힌 여래장(如來藏) 불교를 내용으로 하는 통불교(通佛敎)사상으로서 후에 삼국을 통일한 호국불교로 연결되었다. 그후 고려시대에 와서는 원융회통사상을 이어받은 의천(義天)은 호국기원과 교학진흥의 뜻으로 대장경의 수집·간행에 진력하였고 고종때 몽고침략을 받아 그 유명한 <고려대장경>을 전국력을 쏟아 간행함으로써 세계 불교사에 길이 남을 공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배불숭유의 법난을 당하게 되므로써 불교는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극심한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신라, 고려의 불교전통을 오늘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는 것은 명종때의 섭정 문정왕후의 노력에 힘입은 바 겄다. 왕후는 보우(普雨)의 의견을 쫓아 선교양과(禪敎兩科)를 1546년에 부활시켜 불교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임진왜란을 맞았을 때 서산(西山)은 선교도총섭(禪敎都總攝)이 되어 사명(泗溟), 처영(處英), 영규(靈圭) 등 여러 제자와 더불어 승병을 일으켜 크게 공헌함으로써 호국전통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불교는 옛날처럼 찬란한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을 망정 일반 서민대중들에게 있어서는 미래의 유일한 신앙적 위안과 삶의 안식처로서 활력소가 되어 주었으며 국가가 누란의 위기를 당하였을 때에는 언제나 그 강인한 저력을 발휘하여 나라를 지킴으로서 한국불교의 호국전통과 그 사상적, 신앙적, 전통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사 찰(寺刹)
혜국사(惠國寺) 문경읍 상초리에 소재하며 신라 문성왕(文聖王) 8년(846)에 보조국사가 주흘산 중턱에 창건하고 법흥사(法興寺)라 불렀다. 그후 고려 말엽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법흥사에 행재(行在)해 계실 때 국은(國恩)을 많이 입었다 하여 혜국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3동 93평의 규모가 작은 사찰이나 고대건물로서 역사의 가치가 있으며, 100여년전의 송장,지성 두 선사가 일부 중수하였다. 1984년부터 사우 대중수 공사를 시작하여 마무리 했다. 봉암사(鳳岩寺)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 기슭에 자리한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8)에 지증대사가 창건하였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증대사는 부패한 사회개혁과 중생을 건지기 위해 절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신라의 서울 경주를 떠나 유랑 중 지금의 원북리에 위치한 지금의 봉암사 자리에 절을 짓기로 결정하고 그 자리에 있는 큰 못을 매립할려고 하니 큰 용이 서식하고 있는지라 지증대사는 도력으로 용을 구룡봉(九龍峰)으로 내쫓고 그 자리에 봉암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지증대사의 제자 문손(文孫)이 대사의 뒤를 이어 사찰을 중수하였는데 웅장하고 예술의 극치를 다한 건물이 중수한 80년 후에 극락전 한 채만 남기고 전소한 것을 고려 정진대사가 다시 중건하였다.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할 때의 원당(願堂)으로 유서깊은 건물이며 다른 건물은 임란 때 병화로 전소되었으나 극락전만이 그대로 남았다. 보물 5점 등 많은 문화재와 함께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서 오늘에도 선맥을 이어오고 있다. 김룡사(金龍寺) 산북면 김룡리 운달산(雲達山) 기슭에 자리한 김룡사는 신라 진평왕 10년(588)에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했다. 창건 당시에는 운봉사(雲峯寺)라 칭했으나 그 뒤 김장자라는 사람이 득죄하여 이곳 운봉사 입구의 용초 부근에 살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불전에 참회한 결과 이 용초에 살던 용왕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용이라 지었으며 그후로부터 김장자는 가운이 크게 부유해졌다. 이로 말미암아 동명을 김룡리라 하였으며 운봉사를 김룡사라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조선 인조 3년(1625)에 혜총선사(慧總禪師)에 의하여 크게 중창되었으나 30년 뒤에 소실되어 의윤대사와 무진대사, 대휴대사 등 3대사가 협력하여 3년간의 공사로 원상 복구하였다. 또한 인조 27년(1649)에 설잠대사가 건립한 대웅전의 불상은 그 규모가 웅장하며 기예 또한 현묘하다. 사천왕문은 정조 11년(1787)에 지국대사가 건립한 웅대한 신장상을 이루고 있다. 또한 괘불탱은 고종 26년(1889)에 사증대사가 건립했으며 대방과 종각은 1940년에 이병호 화상이 개축하였다. 김룡사는 건평 1,188평에 48동의 건물로 광활한 거찰로서 한일합방 후에는 한때 31본사 중의 하나로 45개의 말사를 관장해 온 대사찰이다. 김룡사가 한창 번창할 때는 14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화장암(華藏庵), 양진암(養眞庵), 대성암(大成庵), 금선대(金仙臺) 등 만이 남아있고 나머지는 유지만이 있을 뿐이다. 또 김룡사 입구에는 부도 3기가 있으며 경내에는 석불이 있다. 서기 1918년 김룡사에는 석불이 있다. 서기 1918년 김룡사에서는 중등과정의 학교 교수를 목표로 사립 김룡지방학림을 설립하여 오다가 중등과정을 초등과정으로 변경하고 산북면 거산리로 교사를 이전하여 1940년 김룡학교로 개칭하였는데 그후 공립이 되어 지금의 김룡초등학교가 되었다. 원적사(圓寂寺) 농암면 내서리에 있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원효대사 진영이 보관되어 있다. 심원사(深源寺)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이 사찰은 고승인 윤필(潤弼), 의상(義湘) 두 대사가 있었던 사찰로서 1958년대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64년에 새로 중창했다. 대승사(大乘寺) 사불산(四佛山) 중턱에 자리한 대승사는 신라 진평왕 9년(587) 이름이 전하지 않는 한 비구니가 창건하였다.사불산의 주봉은 공덕봉(功德峯)으로 산정에는 사면에 불상이 조각된 사불암(四佛岩)이 있는데 이 불상은 진평왕 9년 붉은 포장에 가리워서 공덕봉 중턱 큰 반석위에 하늘로부터 하강하였는데 진평왕의 명을 받아 망명비구가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산 이름을 사불산이라고 했다. 또한 이 비구는 대승경전(大乘經典)인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을 즐겨 애송하였으므로 절 이름을 대승사라 하였다. 대승사의 중간사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며 의현대사, 종수대사가 1644년에서 1722년 사이에 웅장한 전당과 누각을 중건하였으며 서기 1831년 구담선사가 또 다시 중창하여 영남에서 이름높은 거찰이었으나 1922년 여름 화재로 명부전, 응진전만을 남기고 애석하게도 다 타 버려 의운대사, 취월대사, 덕산대사 등이 정재를 모아 1927년에 옛 모습으로 복구했으나 또 다시 1956년 1월에 큰 화재를 입어 명부전, 극락전, 산신각, 행랑만을 남기고 다 타 버렸다. 그 뒤 남인, 대휴, 설월, 정암 등 화상의 성력을 다한 보람으로 대웅전과 응진전 그리고 대방과 계문 등을 중창하였다. 대승사에 속하는 암자로는 우왕 6년(1380)에 창건한 윤필암(潤筆庵)이 있는데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이 각각 1기씩 있으며 신라 진평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왕대에서 사불암을 보고 향배하였다는 곳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묘적암(妙寂庵)에는 부도를 비롯한 많은 유적이 있으며 함허대사가 초창한 반야암도 있다. (문경시 발행 ‘내고장전통가꾸기’에서 전재) 운암사(雲岩寺) 점촌동에서 6㎞ 지점인 불정의 약수산(藥水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운암사는 신라 문무왕 7년(667)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그 이후 1670년 해특, 임경, 극간 등 세 스님이 극락전을 중창하였고 또한 1972년에서 1975년 사이 3년동안 크게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미타불상, 관세음보살상, 대세지보살상 등은 극락전에 있다. 이 사찰의 규모는 극락전과 산신각, 요사 등 3동과 근간에 신축한 안양문과 삼성각이 있다. 또한 이곳 약수산에 솟아나는 많은 양의 맑고 찬물은 한여름에도 얼음같이 차가워서 땀띠를 말끔히 가시게 하며 안질, 위장병, 피부병 등에 많은 효력이 있어 약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여름에는 멀리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며 점촌동 내에 가까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로도 많은 신자들이 찾고 있다. 천주사지(天柱寺址) 동로면 간송리 천주봉 중턱에 있다. 1390여년 전인 신라 진평왕 시대에 창건한 고찰이었다고 하나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1906년 을사조약 후에 상주에 주둔한 일본헌병들이 주지 황창교가 의병을 절안에 유숙시키고 비호하고 있다는 구실로 천주사를 불태워 없앤 뒤에 주지 황창교를 총살하였다. 천주사에 있던 석가모니불상은 동로면 적성리에 있는 칠성암(七星庵)으로 옮기고 절터에는 대웅전 자리에 장수황씨 소산거사 범주의 묘가 있고 그 옆에는 천산정을 세워 보는 사람으로 감구지회를 갖게 한다. 도천사지(道泉寺址) 산북면 서중리에 있다. 절은 없어지고 남아있던 석탑은 1970년경 직지사에서 반출해 가서 복원하여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봉덕사지(鳳德寺址) 호계면 봉서리에 있다. 폐탑만 남아 있던 것을 현재 복원해 놓았다. 화장사지 산북면 내화리에 있었다. 사찰은 없어지고 삼층석탑만 남아 있다. 금학사지(金鶴寺址) 문경읍 마원리 봉명산하 마고산성 부근에 있었다. 창건년대는 신라시대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절은 없어지고 사지에 있던 삼층석탑은 문경서중학교 교정에 옮겼다가 현재 새재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세워 놓았으며 나머지 허물어진 탑 1기도 옮겨와서 복원을 해 놓았다. 기제사지(機堤寺址) 점촌동 신기에 있다. 사지에 석불좌상이 있었으나 1957년경 그 자리에 최보살이란 여인이 약수암을 짓고 석불에 석고를 입혀 보고불을 만들어 현재도 보관하고 있다.
불 상(佛像)
불상을 조성하여 전당에 모시는 것은 부처님이 살아 계실 적에 예배하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공경예배하기 위한 것이며 부처님이 멸도하실 때에 교법과 계율로써 스승으로 삼아 수행하여 숭배할 것을 가르쳤으나 어떤 제자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형상을 조성하여 당탑(堂塔)에 모시고 살아계실 때의 큰 은혜를 보답하기도 하고 복덕을 희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상을 조성하게 된 유래는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 가시어 아직 내려오시지 않으실 적에 우전왕이 앙모하는 정성을 금할길 없어 전단 향나무로써 높이 5척되는 부처님 형상을 조성하였고 또 비사닉왕은 자마금으로 5척의 불상을 조성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불상에는 조상(彫像), 화상(畵像), 수상(繡像)이 있는데 보편적으로 조상을 가리킨다. 화상은 석가의 재세시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기원정사(인도에 있는 절이름)의 석가초상, 열반때에 그린 일대전기화 등이 있었다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조상은 알렉산더대왕 동정(東征) 후의 간다라미술에서 시작되고 1세기경 카니시카왕이 화폐에 불상을 조각하고 석불을 제작한 것이 처음이다. 한국에서는 7세기경 중국(前秦)으로부터 고구려에 전래되어 조각되기 시작하여 신라,백제에 전파되어 불교의 흥륭과 더불어 불상조각도 발달하였다. 재료에 따라 주상,목상,석상,토상으로, 또 위의(威儀)에 따라 입상,좌상으로, 크기에 따라 장육상,마애상 등으로 각각 구별한다. 또 대상에 따라 여래상,보살상,신장상,제자상,비천상,악사상,무녀상 등으로 구별되나 보통은 여래상과 보살상만을 불상이라 하고 있다. 불상은 시대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신라불상은 육괴가 크고 입도 약간 크며 등은 똑바로 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조선불상은 육괴가 작고 입도 작으며 등은 약간 구부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육괴는 맨 처음에는 두상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었는데 차츰 작아져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와서는 아주 조그마한 꼭지를 얹어 놓은 것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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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상(磨崖佛像)
바위에 직접 조각한 불상을 말한다. 마애불은 인도,중국,우리나라,일본 등 불교가 전파된 지역에서는 어디에서나 흔히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마애불은 백제시대의 작품인 서산의 마애석불을 비롯하여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28개소나 된다. 특히 경주 남산에 있는 마애불은 유명하다. 국보 538호인 충남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소재의 마애불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높이 4m, 재료는 화강석이며 연화대 위에 반입체적으로 섰고 두상에는 육계가 있으며 왼손은 수무외인을 하였다. 배후의 암벽이 깊숙히 패여져 감실모양으로 되었고 입상에 접하여 광배와 화염문이 조각 되어 있다. 신라통일시대의 목상과 비슷하다. |
대승사 목각탱(大乘寺木刻幀) 산북면 전두리 대승사에 있으며 보물 제575호이다. 대승사 대웅전에 안치되어 있는 목조,불,탱으로 관계문서 4점과 함께 1973년 12월 31일 보물 제57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길이가 12자(약 4m)이고 폭은 9자(약 3m)이다. 관계문서에 의하면 목각탱의 제작년대는 조선조로 보며 작자미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관계문서는 본 목각탱에 대하여 당초 보존하던 영주 부석사와 현재 보존하고 있는 대승사가 시비하던 소송문서로 1870년 부석사에 안치되어 있던 목각탱을 대승사로 가져옴으로써 부석사에서는 도난을 당하였다고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판결은 어느 사찰에서 봉안하여도 좋으며 그 보상으로 대승사에서 부석사에 250냥을 보수비조로 보상하기로 합의하였다는 완문 등 4점이다. 대승사는 신라 진평왕 9년(587)에 망명 비구니가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이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鳳岩寺 磨崖菩薩座像)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백운대에 있으며 지방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돼 있다. 봉암사 계곡을 따라 700m쯤 올라가면 백운대(白雲臺)라 불리는 곳으로 맑은 물이 넓다란 암반위를 흘러내리는 천하절경이 있다. 이곳 백운대에 동북을 향한 큰 화강석 바위면에 보살좌상 일구가 양각되어 있다. 이 불상의 높이는 450㎝이고 폭은 440㎝정도이며 조각년대는 고려시대로 보고 있다. 이 불상은 두부 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처럼 만들어 광배를 겸하는 동시에 두부의 각을 두드러지게 하였으나 아래로 내려오면서 선각을 얇게 처리했다. 보관의 중앙에 화문이 있고 미간백호가 뚜렷하고 반달형 눈썹 아래 눈을 반쯤 뜨고 코는 끝이 손상된 것을 시멘트로 보수하였고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의 긴 귀를 가졌으며 턱은 주걱턱이고 목에는 삼도가 있다.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두 손으로 연꽃을 들고 있으며 오른발이 위로 올라가게 결가부좌한 무릎은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관음리 석불입상(觀音里 石佛立像) 문경읍 관음리에 있으며 문화재자료 제136호이다. 관음리와 갈평리 중간쯤 되는 관음리 186번지에 화강석에 조각하였다. 전고는 3.33m로 남향하고, 두부는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접착시켰으며, 비단을 또한 시멘트로 보수하고 안면은 마손되었으며 육계 또한 똑똑하지 않다. 통견은 법의가 무릎 위에서 굵은 선을 보이면서 좌우로 갈라졌고 그 밑에 군의가 쳐졌다. 우수는 좌측에 육장하여 느러트렸고 좌수는 칠전에서 보주를 받치고 있다. 배변에도 의문이 보이나 매우 희미하고 발밑은 시멘트로 보수하여 보이지 않는다. 불상은 풍화작용으로 마멸이 심하며 1978년 8월 현지답사때 주위에서 많은 기와조각이 발견됐으며 두고 60㎝로 자백호 자국이 있고 이장(耳長)이 33㎝, 불상폭이 1m, 둘레 2.5m이다.
대승사 미륵암지 마애여래좌상(大乘寺 彌勒庵址 磨崖如來坐像) 산북면 전두리 대승사에 있으며 대승사 윤필암에서 묘적암을 가는 길옆 병풍같은 암석이 직립한 동쪽편에 거대한 마애석불 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곳에 미륵암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흔적만이 전하고 있는데 이 불상의 암석은 약간 앞으로 숙여져 있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고 또 갓바위가 설치돼 있어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보기드문 걸작으로 높이가 약 6m, 폭이 약 3.7m인 여래상으로 고려시대 마애불이다. 머리 상부에 화염문을 간략하게 변형시킨 2개의 연꽃형 뿔모양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이같은 모양의 마애불은 불교미술양식 변천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우람한 형태의 전체적 조형이라든지 각부의 조각 수법이 고려의 체취를 강하게 풍기는 우수한 걸작품이다. 갸름한 면상에 귀는 길며 눈은 감다시피하고 세장하며 입술은 두텁다. 삼도는 이조의 음각선으로 통식을 벗어났고 법의는 통견이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었고 왼손은 팔을 수평으로 했으며 결가부좌한 아래에 7엽연화좌가 조각되었고 두광과 신광이 있고 육계가 크다.
봉서리 마애불상(鳳棲里 磨崖佛像) 호계면 봉서리 산 100번지에 있다. 봉서리에서 산양으로 가는 산 길가에 있는 바위에 석불좌상이 조각되고 그 오른쪽의 다른 바위에 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좌상은 높이 3m, 폭 3m의 바위에 높이 153㎝, 폭 116㎝의 약사여래좌상을 새겼으며 또 약 2m의 높이의 바위엔 높이 187㎝, 폭 54.5㎝의 마애입상을 조각하였는데 조각술이 뛰어난 8세기 경의 작품이다. 약사여래좌상은 결가부좌하여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으며 통견으로 두광과 신광을 갖추었으나 조각술은 옆의 마애보살입상에 미치지 못한다. 마애불상은 왼손은 가슴에 얹고 오른손은 내렸으며 의문은 화려하고 통견으로 두 불상의 조성연대에는 다를 것으로 보인다.
갈평리 석불좌상(葛坪里 石佛立像) 문경읍 갈평리에 있다. 갈평리에서 관음1리로 가는 도로변 왼쪽 밭에 철근콘크리트 건물 속에 화강석 약사여래좌상이 있다. 가까이에 삼층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 부근이 사지인 것 같다. 중대석이나 하대석 없이 상대석인 방형의 앙련좌 위에 있는데 전체 높이가 109㎝로 두부의 뒷면이 파괴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고 얼굴은 마멸되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상의 규모가 작으나 균형이 잡힌 약사여래좌상으로 연대는 조선조로 추정된다. 납의 우견편단이고 간소하게 선각되었으며 결가부좌 하였다. 오른손은 항마촉지이고 왼손은 무릎 위에서 보주를 받치고 있다. 앙련대좌는 가로 106㎝, 세로 82㎝이고, 두고는 32㎝이다.
봉덕사지 석불좌상(鳳德寺址 石佛座像) 호계면 봉서리에 있다. 봉서리 봉덕사지 삼층석탑과 조금 떨어진 밭둑에 고색 짙은 석불좌상 2구가 있다. 이곳은 봉덕사가 있었다는 사지로 석불주위에는 돌담이 둘러져 있다. 두부가 떨어져 시멘트로 보수하였고 불신과 얼굴은 훼손이 심하다. 석불좌상의 높이는 135㎝와 86㎝이고 폭은 104㎝와 50㎝로 건립유래는 알 수 없다. 석불 납의의 의문은 선각되었으나 협시보살은 의문이 분명하지 못하며 2구가 모두 결가부좌했으며 석불은 곱슬머리이다.
생달리 석불입상(生達里 石佛立像) 동로면 생달리에 있다. 속칭 약사재이 산비탈 밭 가운데 약산사라는 절있던 터에 두부가 훼손된 높이 70㎝의 좌불이 있다. 이 불상은 하대석과 상대석의 연화문이 정교하나 마멸이 심한 신라시대 불상이다. 하대서은 방형을 이루고 한돌을 이룬 위에 복련을 조각하고 그 위에 팔각형의 중대고임이 있고 중대석은 없고 팔각형 앙련석 상대가 일부 훼손돼었다. 그 위에 결가부좌한 불상이 있으며 의문은 알기 어렵고, 불상 배면에 광배를 달았던 구멍이 있으며 불두와 광배는 훼손되고 없다. 석불을 중심으로 사각에 방형의 주초석이 2개 있다.
관음리 마애반가사유상(觀音里 磨崖半伽思惟像) 문경읍 관음리에 있다. 갈평리 오층석탑의 원위치인 관음리의 금당지에서 동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있는 반가상이다. 암석은 높이가 2.1m, 너비가 1m, 두께가 43㎝의 화강석으로 뒤는 평평하다. 이 표면에 반가사유상을 양각하였는데 높이가 109㎝, 폭이 89㎝로 마멸이 심하여 대체의 형체만을 알아볼 수 있는 신라시대 작품이다. 머리에는 삼면화관을 썼고 양협은 살이 적고 세안 후순인데 고졸한 미소가 확연하다. 오른손은 올느 무릎위에서 구부러져 외장하여 턱을 받치고 왼손은 왼쪽 무릎위에 얹힌 오른발을 잡고 있다. 슬부 이하는 군벽이 있기는 하나 마멸로 인해 명료하지 않고 따라서 대좌도 확실하지 않다. 원형 두광에서는 화불이 있는 듯하나 마멸로 희미하다. 형태는 반가의 상을 하고 있으나 삼국시대의 반가상에 비하면 조형이 둔하다. 상체나 두 팔의 비대함과 지체의 균형이 불안전함은 자연시대의 하강을 의미하게 된다.
반암리 마애불좌상(盤岩里 磨崖佛座像) 반암리 뒷산의 거대한 바위에 조각된 이 좌불상은 경사가 완만한 바위를 파내서 불상을 조각한 관계로 마멸이 극히 심한 고려시대 작품이다. 이곳에 반암사가 있었다고 전하며 고려 때 장수가 지팡이로 그렸다는 전설도 전하고 있는데 불상의 높이가 340㎝, 폭이 210㎝이다.
김룡사 약사여래석상(金龍寺 藥師如來石像) 이 석상의 제작연대는 미상이며 높이 2.56m, 둘레 1.97m로 원래 이 석불은 김룡사 북편 산속에서 발굴되어 1979년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 왔는데 목동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약사여래는 신라시대의 민간신앙으로 널리 보급되었는데 대의 왕불이라고도 하여 12가지 큰 원을 세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질병치료, 수명,장수,재난소멸과 의식 등을 만족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무상정각을 증득토록 하였다고 전한다. 이 석불은 약사여래라 볼 수도 있겠으나 이수(里數)를 표시하고 길과 사찰을 수호하는 신으로 세운 장승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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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塔, 범어:Stupa, 파리어:Thupa>
탑파(塔婆)라고 음역한다. 본래는 부처님 사리를 묻고 그 위에 돌이나 흙을 높이 쌓은 무덤 또는 묘(廟)를 말한 것이다. 유골을 묻지 않고 다만 특별한 영지(靈地)임을 표시하기 위하거나 또는 그 덕을 앙모하여 은혜를 갚고 공양하는 뜻으로 세워진 것을 제저(制底), 지제(支提), 질저(質底)라 하여 탑파와는 판연히 구별되었으나 후세에는 두 가지를 혼동하게 되었다. 탑을 만드는 것은 옛적부터 있었던 일로써 석존이 가섭불의 사리를 위하여 흙을 쌓아 탑을 만들었다하며 또 석존의 사리를 여덟 곳에 나누어 탑을 쌓았고 2~3세기 무렵에는 아육왕이 8만4천의 탑을 쌓았다고 한다. 이 때의 탑은 반구형으로 쌓았고 꼭대기에는 수직으로 구멍을 뚫어 지평선에 이르게 하고 그 밑바닥에 사리 등의 유물을 장치하고 주위에는 예배하여 만들어 바깥에는 돌로 난간을 둘렀으나 후세에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천하게 되었다. 사리는 항상 가람(절)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사리숭배 공덕이 설교되는 한편 민속적 신앙과 혼융으로 말미암아 조탑사업은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의 탑은 양식과 변천과정이 항상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독특한 계통을 형성하였다. 이는 건축재료와 기술, 재정과 민족성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건축재료상으로 분류해보면 목탑,석탑,철탑,전석혼융탑,석심회피탑,전탑 등이다. 목탑은 비교적 초기에 건립된 것 같으나 거의 없어지고 전석혼융탑, 석심회피탑과 전탑은 그 예로 들기가 근소하며 대부분 남아있는 것은 석탑이다. 구조상으로 분류해 보면 복발탑, 옥탑, 노탑, 주탑, 상륜탑, 무봉탑, 안탑, 삼중탑, 칠중탑, 오륜탑, 감탑 등으로 발달하였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전을 구하기 어렵고 고대로부터 석공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작은 규모인 석탑건립이 성행했을 것이다. 요동성의 육왕탑과 평양성 서쪽 대보산록의 영탑사의 석탑이 설화적으로 전한다.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조탑(造塔)은 불교사업으로서 뿐만 아니라 국가적, 정치적 의의가 가중되었다. 이웃나라의 조복(調伏)과 국가의 진호(鎭護)를 위하여 건립된 신라 3보의 하나인 황룡사 9층탑과 삼국통일을 경축한 개성의 7층탑과 서경의 9층탑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모두 목조탑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다층석탑과 정림사지오층탑은 백제의 석탑으로 남아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목석전(木石塼)의 탑들이 무수히 건립되었으나 목조는 모두 없어졌고 현존하는 것은 거의가 석탑이며 전탑과 전석혼융탑은 몇 개가, 그리고 석심회피탑은 상주 상오리 다층탑 뿐이다. 층수는 3, 5층이 대부분이고 7~13층도 있다. 그 중에서도 분황사는 통일전인 634년(선덕여왕 3년)에 건조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며 모두가 전 모양의 안산암(安山岩材)를 써서 쌓았다. 지금은 3층이 남아있으나 그 형태로 보아 5층 아니면 7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의성군 산운면 영니산록의 오층모전석탑과 함께 신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초기의 것은 신라의 양식을 계승했으나 점차 고유한 양식으로 발달하여 신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8각탑, 6각탑이 나타난다. 또 몽고의 공장(工匠)에 의하여 조성되었다는 원나라 식의 경천사탑은 고려시대에는 조탑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으나 조선때에 들어와서는 다소 감화를 받은 듯하다. 또 조선의 불교는 세계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수난기를 맞아 쇠퇴일로였으나, 세조때를 제외하고는 조탑은 거의 볼 수 없었고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매우 조잡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1467(세조 13년)에 조성된 원각사 13층탑은 고려말의 경천사탑을 모방한 것으로 모두 대리석재를 썼으며 그 균형미는 극에 달하여 조선때의 첫째가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또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은 목조의 5층탑으로 안정감과 장중한 위용을 떨치고 있다. 대체로 중국에는 전탑, 일본은 목조탑, 우리나라에는 석탑이 특수하게 발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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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리(舍利, Sarira)
설리라(設利羅), 실리라(室利羅)로 음역되고 신골(身骨), 유신(遺身), 영골(靈骨)로 의역되어 있다. 한량없는 6바라밀의 공덕으로 생기며 계(戒),정(定),혜(慧)로써 훈수(勳修)하여 생기는 것으로 매우 얻기 어렵고 제일 가는 복전(福田)이 된다고 한다.(금강명경) 이에는 전신사리, 쇄신사리, 법신사리의 구별이 있다. 전신사리는 다보불(多寶佛)과 같이 온몸이 그대로 사리인 것이고, 쇄신사리는 석가불의 사리와 같이 몸에서 나온 알로 된 것이며, 생신사리는 여래가 멸도한 뒤에 전신사리나 쇄신사리를 남겨두어 인(人)과 천(天)이 공양케 하는 것이며 법신사리는 대승,소승의 일체경전을 일컫는다. 본래는 신골이나 주검을 모두 사리라하였는데 후세에 와서 화장한 뒤에 나온 작은 구슬모양으로 된 것만을 사리라고 한다. 이와같이 불상과 사리는 신앙과 경배의 대상이 되어 있다. |
탑 비(塔碑)
지증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 寂照塔碑) 보물 제138호로 봉암사 경내에 있다. 봉암사의 창설자인 지증대사의 입적후 대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신라 경덕왕 8년(749)에 세운 탑비이다. 최고운선생의 찬문에 분황사의 석혜법사가 80세의 고령으로 쓴 필적으로 부착한 조각은 극히 우려(優麗)한 것이다. 비신 표면에 균열이 생겼고 비음(碑陰)에는 다소의 결실이 있으나 대체로 완전하다. 총 4.92m, 비신높이는 2.73m로서 이수,귀부로 만들어져 있다.
정진대사 원오탑비(靜眞大師 圓悟塔碑) 보물 제171호이며 봉암사 경내에 있다. 정진대사는 신라말엽부터 고려초기의 승려로 속성은 왕씨이며 79세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정진대사라 하고 탑을 원오라 명명하여 국왕이 유사에게 명명하여 진영으로 만든 것인데 이 탑은 용수(龍首)와 귀부(龜趺)가 있으며 탑신은 9척5촌, 넓이는 5척이다. 팔각원당식에 속하며 그 구조 및 세부조각에 있어 지증대사 부도를 모방하였으나 고준중후함이 지증대사 원오탑에서 미급하다 하겠다. 고려 광종 16년(965) 건립으로 추정된다.
상봉대선사비(霜峰大禪師碑) 봉암사의 봉황문(일주문) 부근 맞은편 논둑에 비신이 반파된 채 있다. 비대에 복련이 새겨져 있고 비의 앞뒤면에 비문이 있는데 비개는 기와형 지붕 모양이고 비문은 대제학을 지낸 이덕수가 썼다. 상봉(1621~1707)은 정원(淨源)의 법호이고 봉암사에서「도서질요」를 지었다. 현재 이 비를 복원해 놓았다. 내화리 삼층석탑(內化里三層石塔) 산북면 내화리에 소재하며 보물 제51호로 지정돼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9세기경)의 화강석 탑으로 건립되었으며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엔 신라시대 창건한 화장사(華藏寺)가 있었는데 100여년 전 불타 없어진 후 불상 및 기타문화재는 대승사로 옮겼다고 하며 또 이 근처에서 금동불상이 발견된 적도 있다고 전한다. 이 탑은 일제시대에 사리도굴단에 의해 도괴된 것을 1960년 복원하였다. 이 탑은 단층 기단위에 삼층석탑으로 특이한 양식에 속하는 탑으로서 높이 4.26m, 지대석은 폭 1.97m이며 상부는 옥개 윗면에 붙어 한 개의 돌로 노반이 각출되었을 뿐 전실(全失)되었다. 지대석은 크기가 같지 않은 석재 4개로 구성하였으나 상층을 받치기 위한 괴임은 생략되었다. 갑석은 4매로 덮었고 밑에는 부연이 있고 상면에는 괴임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석으로 탑신에는 각 층에 넓직한 우주형이 모각되었다. 1층 옥신은 매우 높아 조화를 잃었고 2층 이상은 차례로 체감되었는데 우주의 폭도 따라서 좁아졌다. 특수한 기단 구조에서 석탑양식의 변천을 연구하는데 주목되는 예라 하겠다.
봉암사 지증국사적조탑(鳳岩寺 智證國師寂照塔)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으며 보물 제137호로 지정돼 있다. 봉암사 대웅전 옆에 있다. 봉암사 창건조인 지증대사의 입적 후에 제도중생의 빛나는 공과를 길이 남기기 위하여 신라 헌강왕 8년(882)에 세운 팔각원당을 기본으로 한 부도탑으로서 하대·중대·상대로 구분되어 기단 밑에는 네모진 지대석이 있고 상면 중간에 연꽃을 조각한 3단의 몰딩이 있다. 하대석은 2단으로 되었는데 하단은 각면에 안상 일좌식을 두고 그 안에 사자를 양각하였고 그 위에 갑석을 얹고 상면에는 얕은 몰딩 위에 구름모양으로 돌려 있고 위에 상단이 있으며 구름모양으로 조각된 입주형이 모퉁이마다 있고 각 면에는 날개를 편 가릉빈가를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갑석을 얹어 중대석을 받치고 중대석 즉 기단신부에는 각면에 안상을 조각하고 정면에는 탁상연좌 위에 사리함을 안치하고 보개,보주,영락으로 장식하였으며 다른 7명에는 연엽 위에서 무릎을 꿇고 공양하고 혹은 비파를 타는 상을 양각하였다. 높이가 3.41m, 지대석 폭 2.28m이다.
봉암사 삼층석탑(鳳岩寺 三層石塔)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으며 보물 제169호로 지정돼 있다. 봉암사 선방 뒤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기단이 이형인 삼층석탑이다. 건립연대는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한 헌강왕 때인 879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탑의 기단 구조에서 특이함이 있을 뿐 상륜부가 완존함으로써 주목되는 탑이다. 기단은 2중으로 축조함이 일반적인데도 밑에 1변 3.24m의 방형 지대석이 있으며 위에는 높직한 괴임돌이 있어 상층 기단중석을 받치고 있다. 중석에는 우주와 탱주 일주가 있어 각 면을 이구로 구분한다. 갑석에는 밑에 받침이 있고 상면에 탑신을 받치기 위한 괴임이 있다.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일석으로 옥신에는 각층 우주형이 있고 옥개석은 추녀 밑이 직선으로 전각에 이르러 낙수면에 반전을 보이며 받침수는 각층 5단이다. 그 위에도 한국 석탑에서 실로 귀중한 일례라고 할 상륜부가 완전히 남아 있어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다. 화강암 전체높이 6.31m, 상륜부높이 2.38m, 지대석 폭 3.24m 특히 비례균형이 아름답다.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鳳岩寺 靜眞大師圓悟塔)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으며 보물 제171호로 지정돼 있다. 이 탑은 봉암사를 중창한 정진대사가 고려 광종 7년(956)에 봉암사에서 입적한 후 965년에 세운 탑비가 있으므로 해서 고려시대 탑으로 건립연대를 알 수가 있다. 재료는 화강석으로 높이가 5m, 지대석 높이 2.9m인 팔각원당형을 따른 탑으로 이보다 앞서 건립된 지증대사적조탑의 각부를 모방하였다. 방형 지대석 위에 3단의 기단을 구성하였는 바 일부 지대석은 산란 이동되었다. 이 지대석 상면에 3단의 몰딩이 있어 하대의 하단 면석을 얹고 각면에는 안상을 조각하고 그 안에는 화형(花形)이 장식되었다. 위에 부연이 있는 갑석을 얹고 면석 각우에는 두르러진 원주형이 있고 그 표면에는 운문(雲紋)이 있고 원주와 원주사이 각면에는 운문과 쌍룡문이 있다. 그 위에 팔각 갑석을 덮었으나 평판적이며 이로써 기단 하대를 구성한 위에 낮은 중석을 얹었는데 각면에는 상하와 좌우에서 안으로 뻗은 화형(花形)이 강조된 인상이 있고 전면에만 탁상의 사리함과 보개, 보산, 보주를 조각한 일구(一區)가 있을 뿐 다른 7면에는 아무 조각이 없어 단조롭다.
갈평리 오층석탑(葛坪里五層石塔) 문경읍 갈평리 갈평출장소내에 있으며 지방유형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돼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관음사와 같이 축조되었다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높이가 2.9m이며 지대석 폭 1.5m로 복발까지 남아 있다. 기단의 하대지석 이하는 땅에 묻혀 있으며 그 외는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단지 1층 기단 갑석의 일부 모서리가 깨어져 나갔으며 상륜부가 남아있을 뿐이다. 노반과 복발은 한돌로 되어 있다. 또한 5층 옥개석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있고 하대 하대 갑석도 두 조각으로 크게 갈라져 있다. 2층 기단의 5층석탑으로 매우 세련된 기법으로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탑신부는 목신부의 형태가 특이한데 곧 그 형태가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1층에서부터 5층까지가 전체적으로 사다리꼴로 이루어져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 탑은 원래 자리가 관음리 불당골이라 하는데 1936년경 관음리 구장 이광호가 일본인에게 팔았으나 갈평동민들이 찾아와 가장 안전한 곳에 안치한 곳이 현재 위치이다.
함허당 득통지탑(涵虛堂 得通之塔) 가은읍 원북리에 있으며 지방문화재자료 제134호이다. 봉암사 동록 뒷산 기슭에 석종형부도 1기와 환적당지경지탑과 함께 상륜부 일부가 결실된 팔각원당형 부도탑이다. 기단,탑신,옥개석 모두가 팔각으로 하대석에 복련을 새기고 옥개석 지붕 위에 기와골이 있는데 총 높이는 275㎝이다. 옆의 환적당지경지탑과 같은 양식이나 함허당득통지탑이라 종으로 양각한 둘레에 장방형의 액자를 만들고 그 위와 그 아래에 장식조각을 가한 것, 옥개석에 기와골이 있는 것, 낙수면의 반전이 심하지 않은 것 등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함허당(1376~1433)은 조선때 승려로 호는 득통, 이름은 우이(宇伊), 속성은 유(劉), 21세에 출가하였으며 1431년에 봉암사를 중수하였고 봉암사에서 금강석의를 지었다.
환적당지경지탑(幻寂堂智鏡之塔) 봉암사의 동록뒤산 기슭에 함허당득통지탑과 석종형부도 1기와 함께 있는 팔각원당형의 환적당 부도탑으로 지방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돼 있다. 기단,탑신,옥개석 모두가 팔각으로 기단엔 연꽃을 새겼으며 함허당득통지탑과 비슷한 양식으로 옥개석 지붕위에 기와골이 없는 것이 다르고 높이 3.5m의 부도탑이다. 조선시대 작품이다. 환적당(1603~1690)을 조선시대때 승려로 자는 지경, 속성은 문(文)으로 16세에 중이 되어 21세에는 청량산에 들어가 31년간 벽곡하였는데 봉암사 등 4곳에 환적암이 있다.
대승사 윤필암 삼층석탑(大乘寺 潤筆庵 三層石塔) 1,2층 옥개의 일부가 훼손되고 3층 옥개 부분은 반파되었으며 2층 옥신이 없다. 하대 갑석의 복련과 탱석이 특이하며 높이 180㎝, 지대석 폭이 127㎝이다. 하대 갑석의 복련이 쌍옆으로 3조씩 사면에 새겨져 있고 중석 받침이 있으며 상대 갑석은 높이 39㎝, 폭 58㎝이고 우석이 7㎝이며 탱석이 1개 있다. 15㎝를 각 5㎝마다 구획되었으며 옥신 괴임이 옥신에 누 우주가 있다.
상리 삼층석탑(上里 三層石塔) 이 탑은 화강석탑으로 금학사지에서 옮겨왔다고 전하며 현재 새재박물관에 있다. 높이는 1.8m로 상대중석 및 1층 옥신은 완전하나 나머지 탑제는 훼손되고 2,3층 옥신과 상륜부가 없는데 1층 옥석 받침이 4단이라 다른 탑재로 보이며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된다. 하대 갑석은 폭 96㎝, 높이 10㎝이고 상대중석은 폭 60㎝, 높이 33㎝로 하대중석에 우주와 탱주가 있으며, 1층 탑신은 폭 28㎝, 높이 30㎝이다.
관음리 삼층석탑(觀音里 三層石塔) 신라통일 후 불교 전승기에 어떤 고승이 관음사 경내에 축조하였다는 탑으로 문경읍 관음리 동구밖에 석불좌상과 함께 있다. 기단이 이형인 것이 내화리 3층석탑과 비슷한 것으로 지대석 177㎝, 1층 옥신 56㎝, 2층 옥신 53㎝이다. 3층 옥개석은 노반이 있고 찰주공이 있으며 3층 옥신은 시멘트로 만들어 넣었으며, 탑 옆의 석불좌상 대좌 앞에 옥신석이 있으나 이 탑의 탑제인지 알 수 없다. 현재는 도난당하여 없다.
봉덕사지 삼층석탑(鳳德寺址 三層石塔) 이 탑은 바위위에 세운 약 4.5m의 3층으로 1,2,3층 옥개 및 1층 탑신과 상대갑석, 옥신 괴임이 부근에 산재되어 있으나 상대중석 및 2,3층 옥신과 상륜부가 없다. 상대갑석의 폭이 206㎝이고 높이가 19㎝이며, 1층 옥신의 폭이 95㎝, 높이가 86㎝이다. 이 탑은 현재 복원이 되어 있다. 도굴된 부장품은 한일 회담시 일본에서 반환받아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천주사지 석탑(天柱寺址 石塔) 이 탑은 본래 동로면 간송리에 있던 신라 진평왕때에 창건되었다는 천주사에 있던 탑이다. 지금부터 80년 전인 1906년에 의승(義僧) 황창교가 의병을 절에 유숙시켰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대가 불을 질러 폐사가 되었다. 이 때에 석가모니불은 적성리에 있는 칠성암으로 옮기고 기타 불상은 대승사로 옮겼다고 하며 이 때에 3층석탑도 적성리로 이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탑은 현재 천주산 중턱에 있는 천주사에 복원해 놓았다.
부 도(浮屠)·노주대(爐柱臺)
봉암사 석종형부도(鳳岩寺 石鍾形浮屠) 봉암사 대웅전 앞에 있던 이 부도는 현재 정진대사원오탑비 지나서 부근으로 옮겨져 있으며 지방문화재자료 제135호로 지정돼 있다. 이 부도는 일반적인 석종형부도로 보주와 탑신은 2개의 돌로 지대석을 방형으로 조성되었다. 탑신 높이1.02m, 보주높이 41㎝이며 지대석은 151×157㎝로 보존상태는 경내에 있는 관계로 매우 양호하다. 봉암사 사적기에 목우자 즉 지눌의 부도로 전하고 있기도 하고 또 이 절의 구전에 의하면 태고 보우의 부도라 전하고 있다. 그러나 둘 다 확실치 않아 믿기 어렵다.
대승사 부도 / 혜국사 부도 / 윤필암 부도 / 봉암사 노주대 / 대승사 노주대 / 김룡사 노주대
다. 유교유적
불교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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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조선시대의 교육제도 유교의 종조(宗祖)인 공자는 주나라 영왕 21년 즉 노양공 22년 경술 10월 27일 신시에 태어나 73세 되던해 즉 노극공 16년 임술 4월 기축에 사망했다. 유교란 어떤 것인가? 주례(周禮) 태재지직(太宰之職)에「유(儒)는 도로서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하였다. 고 설문(說文)에 이르기를「天,地,人을 통달한 것을 유라고 한다」하였다. 또한 예기유행(禮記儒行)에 공자가 애공(哀公)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박학하여 궁하지 않고 독실하게 행하여 게을리 아니하며 유심한데 있어서도 음란하지 않고 상통하여 막히지 않으며 어진이를 존모(尊慕)하고 무리를 용납하여 모를 다듬어 화합한다”하였다. 그런데 이 유교는 기자가 이미 무왕에게 전수하여 주고 나서 몸소 조선에 행차하여 팔조의교(八條之敎)로 기자가 조선을 다스릴 때 우리민족 고유의 불문율을 토대로 만든 8조목의 법을 베풀어 우리 겨레를 교화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의 교육을 보면 고려의 교육제도를 이어 받고 영군현신(英君賢臣)의 출현으로 장족의 발전을 이룬 시기라 하는 바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참고문헌:장지연저, 조선유교 연원)
향 교 향교는 고려때부터 국내에 보급 되었다. 이태조가 즉위하던 해부터 적극적으로 개선과 보급에 노력하였으며 각도 감사에게 명하여 향교의 흥폐로 수령의 치적을 평가토록 하였다. 원래 향교는 지금의 공립학교 성격을 띤 중등정도의 교육기관으로서 중앙에 있는 사학과 대등한 것이었으며 지방재정에 의하여 설치되고 기본재산의 수익으로 유지된 학교였다. 당시 향교의 기능은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한편으로는 선성선현(先聖先賢)을 향사하는 임무와 지방 유생을 모아 강학도 하였는데 학생수는 30~90명이고 소학,사서,오경을 배웠다.
서 원 서원은 사학과 향교가 관학이었음에 반하여 민간인의 힘에 의하여 설치 운영되었던 사학기관으로서 「선현존경(先賢尊敬)과 후진장학(後進奬學)」이라는 지표 아래 명유(名儒) 공신(功臣)을 숭배하고 청년제자를 모아 학문과 덕행을 연마하는 수도장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 기원은 중종 36년(1543)에 풍기군수 주세붕의 고려조의 명유 안향의 구기(舊基)에 사당을 세워 백운서원이라 이름을 붙인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점차 파벌을 조장하고 당쟁을 격화하게 되니 대원군은 고종 8년(1871)에 전국 679개처 중 문묘종형인(文廟從亨人) 47개 서원 이외는 모두 철폐하였다.
서 당 구 교육제도에는 공비(公費)에 의한 초등교육기관이 없었고 사학으로서 서당이 있었다. 기원을 고려조에 둔 서당은 순수한 민간의 힘에 의해 유지 운영되던 초등교육기관으로 신교육이 들어올 무렵까지 이 지방에는 거의 촌락마다 설립되어 국민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서당의 종류는 크게 넷으로 나누었는데 ① 훈장 자신이 자기의 생계를 위하거나 교육취미로 자설한 훈장 자영서당이었고 ② 부호나 유지가 혼자서 자가의 자질(子姪)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훈장 급비를 부담하는 유지독영의 서당이 있었으며 ③ 마을의 몇몇 유지들이 조합하여 훈장을 초청하고 조합원이 자질만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하는 유지 조합서당과 ④ 마을 전체가 조합하여 훈장을 초청하고 그들의 자질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한 촌조합서당이 있었다.
서당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수학하는 학도로 하여금 당시의 상급학교인 향교나 사학으로 진학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 유교에 대한 초보적 지식을 보급시키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서당의 교육내용은 강독,제술,학자의 세가지였다. |
문경향교(聞慶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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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1. 392년(태조 1년)에 부,목,현에 1교씩 설립, 관립 중등교육기관으로 하고 문묘에는 5성과 송조 4현, 우리나라 18현을 배향하고 훈도를 두어 사서오경을 교육하였다. 교생수는 현에는 30인이었다. 2. 임진왜란으로 향교가 불탄 후에 신축하였고 병자호란 이후 점차 유교양성이 목적이었던 향교가 지방,정치,경제,행정의 문제까지 주도하였다. 3. 1905년(고종 2년) 이후에는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문묘 봉사에만 주력하였다. 4. 토지개혁때와 성균관대학 설립때 향교의 위토가 없어지고 현재는 춘추예전 비용도 곤란을 겪는다.
배향인물 - 오성(五聖) : 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 - 송조사현(宋朝四賢) : 정호,정이,장재,주희 - 신라(新羅) : 설총,최치원 - 고려(高麗) : 안유,정몽주 - 조선(朝鮮) :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 |
문묘향사 18유현
홍유후(弘儒候) 설총(薛聰)선생 : 자(字)는 총지(聰智)요, 호(號)는 영설헌(泳雪軒)으로 경주인이니 원효대사의 아들이다. 신라 신문왕 때에 한림이 되고 방언으로 구경(九經)을 해석하니 이두문자이다. 고려 현종 13년에 홍유후를 봉하고 문묘에 종사함.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선생 : 자(字)는 고운(孤雲)이요 호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해부(海夫)라 하였다. 년 12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18세에 과거에 장원하여 표수현위승무대랑 어사내공봉(漂水縣尉承務待郞 御史內供奉)이 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고 황소(黃巢)를 토벌하는 격문으로 천하에 문명을 떨쳤다. 신라 헌강왕 11년에 당이 국서를 가지고 귀국하여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가 되었으며 진평왕 8년에 아손(阿飡)이 되었다. 그후에 대산 부성태수로 시무10여조를 상소하여 특폐를 바로 잡으려 하였으나 뜻을 못 이루어 벼슬을 버리고 문경의 봉암사, 선유동 일대와 청량산, 지리산, 가야산 등지에서 소요하고 일생을 마쳤다. 계원필경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선생 : 초휘(初諱)는 향(珦)이요, 자는 상온(上蘊)이며 호는 회헌(晦軒)이니 순흥인이다. 고려 고종 계묘(1243)에 순흥부 죽계상평촌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에 유교를 진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충열왕 때에 명신으로 태학사를 역임하면서 최초의 주자학을 수입하여 국학 대성전을 낙성하고 육경제자서를 갖추었으며 주자신서를 비치하였다. 충숙왕 무오 5월에 명도형문묘하고 동 기미 6월에 종사문묘하였다. 회헌실기가 전한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선생 : 자는 달가(達可)요, 호는 포은(圃隱)이니 연일인이다. 고려 충숙왕 무자(1337)에 영천시 동우항리에서 났다. 려말 충신이요 학자로서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며 공민왕 임자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고려와 국교회복에 큰 공을 세웠다. 불교의 폐혜를 없애기 위해 유학 보급에 전력하고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추앙되었다. 조선창업에 반대하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조선 태종 원년에 명증(命贈)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하고 중종 12년(정축)에 종사문묘하다. 포은집이 있다.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선생 : 자는 대유(大猷)요, 호는 한훤당(寒喧堂)이니 서흥인이다. 단종 2년 갑술(1445) 한양 정릉동에서 났다. 성종 5년(갑오) 봄에 점필제 김종직선생 문에 입학하여 성리학에 통달하였으며 연산조 때에 감찰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갑자사화(1504)에 귀양지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선조 8년 을해에 우의정에 증직되고 광해 2년에 종사문묘하였다.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선생 : 자는 백욱(伯勖)이요, 호는 일두(壹蠹)이니 하동인이다. 세종 경오(1450)에 함양 덕곡리에 개평촌에서 났다. 점필제 김종직선생에게서 성리학을 탐구하고 한훤당 김굉필선생과 도의로 사귀었다. 성종 21년(경술)에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설서를 지냈다. 당시 성리학의 대가로서 역사에 통달하고 역행실천하였다. 갑자사화(1504)에 사사(賜死)되었고, 중종 12년(정축)에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광해 2년(경술) 9월에 종사문묘하였다. 일두집이 전한다.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선생 : 자는 효직(孝直)이요, 호는 정암(靜菴)이니 한양인이다. 성종 13년(임인 1482)에 한성부에서 났다. 일찍이 성리학을 연구하여 점필제 김종직선생의 학통을 이은 유학파의 영수로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밝히고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지치주의를 역설했다. 중종조에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묘사화(1519)에 유배 사사되었다. 선조 원년(무진)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광해 2년(경술)에 종사문묘하였다. 정암집이 전한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선생 : 자는 복고(復古)요, 호는 회재(晦齋)이니 여흥인이다. 성종 신해(1491)에 경주 양좌촌에서 났다. 연산 8년(임술)에 외숙인 사재 손중돈에게 수학하고 동 10년에 성현지학에 깊은 뜻을 두고 산사에 들어가 독서주공에 열중하였다. 대사성, 대사헌, 이·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대학장구보귀, 중용구경연의를 수하였다. 선조 2년(무진)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광해 2년(경술)에 종사문묘하다.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선생 : 자는 경조(景造)요, 호는 퇴계(退溪)이니 진보인이다. 연산(신유,1501)에 예안현 온계리에서 났다. 중종 7년(임신)에 숙부 사제선생에게 종학하고 중종 28년(계사)에 모재 김안국선생을 찾았으며, 명종조에 양관 대제학, 선조조에 이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하고, 동방유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로서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켜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였으며, 도산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였다. 광해 기유에 종사문묘하고 을묘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퇴계집, 삼경석의, 이학통록, 주서기의, 주서절요서, 계몽집전, 사서석의, 심경석의, 성학십도를 저술하였다.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선생 : 자는 후지(厚之)요, 호는 하서(河西)이니 울산인이다. 중종 경오(1510)에 장성현 대맥동에서 났다. 중종 기묘에 모재 김안국선생을 찾아 수학하였으며, 동 계사에 반궁에서 강학하였다. 명종조에 여러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퇴계의 이기일물설을 반대하고 이기혼합설을 주장하였다. 또 기고봉과 더불어 태극도설과 사단칠정을 강론하였으며, 천문지리,의약,율력에도 조예가 깊었다. 정조 20년(병진)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동년에 종사문묘되었다. 주역관상편,하서집을 저술하였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선생 : 자는 숙헌(叔獻)이요, 호는 율곡이니 덕수인이다. 중종 병신(1536)에 강릉부 북평촌 오죽헌에서 태어나니 ,부는 감찰 원수요 모는 사임당에게 수학하였다. 명종 19년(갑자)에 명경과에 장원급제하였으니 아홉번 과거에 모두 장원하니 왕이 제관누징(除官累徵)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선조 8년(을해)에 사서언해를 펴냈다. 선조 14년(신사)부터 벼슬에 나아가 대사헌, 대사간, 대제학, 호·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퇴계선생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을 근본사상으로 이기통국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외적을 막기 위하여 십만양병을 주장하기도 했다. 인조 원년(계축)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숙종 8년(정묘)에 종사문묘하였다. 저술로는 율곡전서, 성학집요, 격몽요결, 사서언해, 소학집주, 진복창전, 경연일기 등이다.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선생 : 자는 호원(浩源)이요, 호는 우계(牛溪)이니 창녕인이다. 중종 을미(1535) 청송 수□의 자로 한양부 순화방에서 났다. 중종 39년(갑진)에 청송이 판주우계촌으로 이거하여 아버지로부터 수학하니 년보 10세에 학업이 대진하여 불시수교하고 율곡과 더불어 도의지교를 정하고 휴암 백인걸 문하에서 경학을 연구하였다. 선조 4년(신미)에 주자서위학지방을 초하고 선조 25년(임진)에 우참찬에 특제되고 계사에 대사헌을 배하였으나 사퇴하였다. 이기논쟁에서는 퇴계설을지지하고 율곡설을 반박하여 유학계의 화제가 되었다. 인조 7년(기사) 4월에 좌의정에 증직되고, 숙종 8년(정묘)에 종사문묘하니라. 우계집을 저술하였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선생 : 자는 희원(希元)이요, 호는 사계(沙溪)이니 광산인이다. 명종 무신(1548)에 한성 황화방 정동에서 났다. 명종 15년(경신)에 구봉 송익필 문에서 예학을 전수하고 동 22년(정묘)에 율곡선생 문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을 전수하고 성학지오를 비문(備聞)하였다. 선조조에 참봉, 검정을 거쳐 정산, 안성, 익산의 군수를 역임하고 인조가 여러차례 관직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무인에 가례집람을 펴냈다. 율곡선생의 학문의 정통을 이어 문인과 더불어 강론에 전력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니 송우암, 송동춘, 신독제 제(諸)선생이 학통의 종을 득하였다. 효종 8년(정유)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숙종 정유에 종사문묘하였다. 사계집, 의례문해, 가례집람, 근사석의, 경서변의 등을 저술하였다.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선생 : 자는 여식(汝式)이요, 호는 중봉(重峰)이니 백천인이다. 중종 갑진(1544)에 김포현 서전정리에서 났다. 선조 4년(신미)에 이사정의 천으로 율곡, 우계 두 선생을 사사하고 성학을 배웠다. 선조 8년(을해)에 호·예조좌랑,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고, 선조 25년(임진) 4월에 홀문천제유성(忽聞天際有聲)하고 크게 놀나며 말하기를 이는 천고라 적이 반드시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하고 어머니와 청주로 피하였다. 5월에 의병을 모집하여 보은 차령을 막아 적을 물리치고 또 호남 의병장 고경명과 형강을 건너 적을 칠 때 고경명은 이미 금산에서 패하고 선생은 사력을 다해 감전타가 칠백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선조 37년(갑진)에 선무원종공신일등에 록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인조가 계해정두에 성공한 후 즉명하여 의열성포충하고 고종 계미에 종사문묘하였다. 중봉집을 저술하였다.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선생 : 자는 사강(士剛)이요, 호는 신독재이니 광산인이다. 선조 갑술(1574)에 한성 황화방 정동에서 사계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 14년(신사)에 천곡 송상현 문에서 수학하고 다음으로 구봉 송익필 문에서 배웠으며, 율곡선생 문에서 성학을 전수하고 아버지 사계선생으로부터 예학을 배웠다. 인조조에 부여현감, 장령, 동부승지,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사계의 학문을 이어고 예학의 체계를 세웠다. 현종 2년에 효종 조정에 종형되고 고종 계미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종사문묘하다. 신독집을 저술하였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선생 : 자는 영보(英甫)요, 호는 우암(尤菴)이니 은율인이다. 선조 정미(1607)에 옥천군 구룡촌에서 났다. 광해 6년(갑인)에 동춘선생의 부친 청좌공에게 취학하여 동춘과 함께 수학하고, 인조 3년(을축)에 김천사에서 독서하다가 동 8년(경오)에 사계선생 문하에 취학하고 동 10년에 회덕송촌으로 이거하여 동춘으로 더불어 신석상취하여 강마불철하였다. 인조 13년(을해)에 대군(효종) 사부가 되어 축일강마하였다. 효종조에 문신으로 이조판서, 좌·우의정을 역임하였으며 그 뒤에 후배양성에 전력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고 율곡 사계선생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당쟁으로 유배 사사당하고 영조 병자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송자대전, 문의통고, 주서답의, 정서분류, 어류소분, 심경석의 등을 저술하였다.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선생 : 자는 명보(明甫)요, 호는 동춘(同春)이니 은율인이다. 선조 병오(1606)에 한성 정릉동 우사에서 났다. 광해 6년(갑인)에 우암과 더불어 선고 청좌공에게 수학하고 인조 원년(계해)에 사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14년(병자)에 대군사부가 제수되고 또 때때로 입시서강하였다. 효종 9년(무술)에 성균관 제주가 되어 수명교화급집양배위지절(修明敎化及輯讓拜□之節)하다.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현종 신축에 좌참찬을 지냈다. 현종 계축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영종 병자에 종사문묘하니라, 저술에는 동춘집급어록해가 있다.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선생 : 자는 화숙(和叔)이요, 호는 현석(玄石), 우호(又號)는 남계(南溪)이니 반남인이다. 인조 9년(신미,1631)에 한성 창동 우사에서 났다. 인조 신사에 중봉공에게 격몽요결을 배울 때 이미 위학방향을 알고 청음 김상헌 문에 수학하면서 시사전기를 무불편람하였다. 효종 기해에 세마가 되고, 숙종 계해에 승패입대하여 심경을 강론하고 그 후 때때로 입대시강하였다. 숙종 14년(무진)에 대사헌,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갑술에 좌의정에 올랐다. 몰후에 문인대복이 200여인이었다. 영조 갑신에 종사문묘하다. 남계집, 절학전편, 춘추보편, 심학지결, 육례의집 등을 저술하였다.(참고:유림편람)
라. 서원·서당
근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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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혁
- 중종 갑진(1544) 상주목사 영천자 신잠이 근암서당 설립 - 현종 을사(1665) 향현사로 우암 홍언충 배향 - 현종 기유(1669) 한음 이덕형 추배, 서원으로 선액됨 - 숙종 임오(1702) 사담 김홍민, 목재 홍여하 추배 - 정종 병오(1786) 활재 이구, 식산 이만부, 청대 권상일 추배 - 고종 무진(1868) 조령철훼, 그후 설단 봉사 (1974) 부터 부설공사 착수 (1984) 부설공사 준공 - 현재 유림에서 모현계가 조직되어 있음 |
근암서원은 중종 갑진(1544)에 상주목사이던 영천자 신잠선생이 건립한 근암서당이 그 처음이다. 그 뒤 현종 을사(1665)에 우암 홍언충선생을 봉안하여 원이 되었으며, 현종 기유(1669)에 한음 이덕형선생을 추배하여 서원이라 선액되었다. 그 뒤로 숙종 임오(1702)에 사담 김홍민선생, 목재 홍여하선생, 정종 병오(1786)에 활재 이거선생, 식산 이만부선생, 청대 권상일선생을 추배하여 칠현서원이 되었다가 고종 무진(1868)에 조정의 영에 의하여 훼철되었으나 갑인(1974)년부터 부설공사를 시작하여 갑자(1984) 10월에 준공되었다.
홍언충(洪彦忠) : 자는 직경이요, 호는 우암이며 관은 부림이다. 대제학과 좌참찬을 지낸 연산조 직신 문광공 허백당 홍귀달의 아들이다. 성종 계사(1473)에 태어났고, 연산 을묘(1495)에 사마시 동년별시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홍문관 정자를 거쳐 교서교리로 계셨고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갑자사화(1504)에 거제도에 유배되었는데 하루는 섬안에 사사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모두들 피하려 창황했으나 우암선생 형제는 태연자약하며 말하기를『군명은 하늘이다. 하늘을 가히 도망칠 수 있느냐. 죽음이 있을 뿐이다.』 라 했다 한다. 중종반정 후에 풀려났으나 그 뒤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후진을 양성하다가 불행히도 36세에 졸하였다. 선생은 도학이 높고 엄정충직하여 후학들의 사표로 추앙을 받았다.
이덕형(李德馨) : 호는 한음이요 관은 광주이다. 중종 신축(1541)에 나서 선조 경진(1580)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부터 벼슬을 하여 경인(1590)년에 직제학이 되고 임진(1592)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해 4월에 왜란이 일어났으며 평양 대동강에서 일본사증 현소 등과 담판, 침략의 불의함을 통매하고 왕명으로 요동에 가서 제병에 노력하고 명병이 내원하였을 때는 접반사가 되어 나라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무술(1598)년에 우의정, 신축(1601)년에 도체찰사, 임인(1602)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조에 영창대군옥사가 간신들의 농간으로 야기됨에 직언으로 극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지 수일에 병을 얻어 졸하니 나이 53세였다. 시는 문익공이다.
김홍민(金弘敏) : 자는 임부요, 호는 사담이며 관은 상산이다. 집현전부제학 상직의 6대손이며, 옥과현감 범의 아들이다. 중종 경자(1540)년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하였다. 선조 경오(157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론을 시작으로 수찬,응교,집의,청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보은에서 창의하여 6백여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충보군이라 이름하여 상주의 적이 호서로 오는 길을 막았다. 벼슬길에 있을 때는 도리로 행하고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와 화목으로 일생을 지냈으며, 주서절요와 근사록, 소학 등을 깊이 연구하였고, 갑오(1594)년에 졸하였다.
홍여하(洪汝何) : 자는 백원이요, 호는 목재이며 관은 부림이니 문광공 홍귀달의 5세손이요, 대사간 호의 아들로 1620년에 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우복 정경세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효종 갑오(1954)에 등과하여 검열,전적,정언,좌랑,사간을 지냈다. 정언으로서 왕의 언동을 간하니 효종이 가납하였다. 그 뒤로 당로자들의 꺼림을 받아 고유찰방에서 파직되었다가 무술(1658)년에 경성판관으로 부임하여 어진 정사를 폈으며, 을해년에 성학치도의 요를 상소하고 병마사 권우의 무고로 황간에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방면되어 고향에 돌아와 15년을 후진교육에 몰두하였다. 사서에 통하고 주서에 전심하여 그 식견을 따를 이가 없었다. 숙종이 병조정랑에 특제하였으나 병이 중하여 나가지 않고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저서로 사서발범구역, 주역구역, 휘찬려사, 동사제강 등 많이 있다.
이 거(李 榘) : 자는 대방이요, 호는 활재요, 관은 전주이다. 효령대군의 8세손이며 정랑 광흡의 아들이다. 광해 계축(1613)년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제자백가서를 탐독하다가 외조부 칠봉 황시간의 권유를 받고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게 되었다. 정주학과 퇴도학에 전념하여 과거를 버리고 산간에서 후진에게 이기의 진수를 논강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갑오(1654)년에 졸하니 42세였다.
이만부(李萬敷) : 자는 중서요, 호는 식산이며 관은 연안이니 가은 심의 증손이요 박천 옥의 아들이다. 현종 갑진(1664)에 출생하였다. 정주학을 탐구하고 혁혁한 집안이면서도 분화를 멀리하고 오직 성학에만 몰두하여 저술에 힘쓰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남긴 저서는 지금까지 자손이 보관 전수하고 있다. 계축(1733)에 졸하셨다.
권상일(權相一) : 자는 태중이요, 호는 청대며 관은 안동이니 구학재 구의 증손이요, 증이판(贈吏判) 심(深)의 아들이다. 숙종 기미(1679)년에 출생하였다. 숙종 경인(1710)에 등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로부터 이의(吏議)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지중추에 이르고 기사(耆社)에 입(入)하여 찬수당상이 되어 국사를 수찬하였다. 영조가 어필 16자를 하사 격려했다. 영조 정미(1727)에 만경현령이었을 때 다음 해에 무신(1728) 란이 일어났는데 미리 민정을 살펴 적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상부에 보고하고 성지를 수축하며 유비무환의 대비를 하였으므로 경내가 무사하였다. 고향에서는 퇴계선생을 사법(師法)으로 하여 이기호발(理氣互發)을 논하고 경연에도 첨하였다. 저술로서 근사록집해 등 여러권을 남겼으며 영조 기묘(1759)에 졸하니 수가 80이었고 희정공(僖靖公)이라 시(諡)하였다.
한천서원(寒泉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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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농암면 농암리
연 혁
- 숙종 정축(1697)에 초건되어 사직 안귀손, 처사 신숙빈을 열향(列享)함. - 정종 정미(1787)에 추담 성만징을 추배함. - 고종 무진(1868)에 조령 훼철됨 (1946)부터 설단 매 3월중정(中丁)에 봉사 |
한천서원은 농암면 농암리에 있으며 숙종 정축(1697)에 창건되고, 사직 안귀손, 처사 신숙빈, 추담 성만징선생을 배향하였다.
안귀손(安貴孫) : 관은 순흥이요, 회헌 문성공 유(裕)의 후손이다. 사간 모의 아들이다. 관은 사직으로 연산조에 국정이 어지러움을 보고 가은 소양으로 낙향하여 정성으로 후학을 교수하였다.
신숙빈(申叔彬) : 관은 평산이요, 문희공 개의 손이다. 거창현감으로 있다가 연산 무오(1498)년에 국정이 어지럽고 어진 선비들이 주륙됨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가은 소양동에 은거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자기의 뜻을 보였으니「有山有水處 無榮無慾身 畊田消白日 採藥送靑春(산있고 물있는 곳 영화도 없고 욕심도 없는 내 몸이로다. 밭갈아 날을 보내고 약을 캐며 청춘을 보냈구나)」이란 시이다. 힘써 후학을 가르치니 원근에서 많은 인재가 모였다. 유언에 내가 교목세가(喬木世家)의 후예로 어진 이들을 구하지 못했으니 구천에서도 그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하며 내 죽은 뒤에 묘 앞에는 작은 돌로 처사신모(處士申某)의 묘라고만 쓰고 절대로 관작과 지상(志狀)을 새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만징(成晩徵) : 관은 창녕이요, 호는 추담이니 동허재 헌징의 동생이다. 유일(遺逸)로 관(官)은 왕자사전(王子師傳)에 이르렀다. 일찍 우암 송시열문과 수암 권상하문에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 연수하고 이를 실천궁행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소양서원(瀟陽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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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가은읍 전곡리 소양
연 혁
- 숙종 임진(1712)에 초건 - 영조 을축(1745)에 조령으로 훼철 - 영조 신유(1801)에 나암 정언신, 인백당 김락춘, 가은 심대부, 가은 이심을 열향, 그후에 고 산 남영을 추배 - 고종 무진(1868)에 조령으로 훼철됨, 그후에 설단봉사, 1985년 부설공사 |
소양서원은 가은읍 소양동에 있으며 숙종 임진(1712)에 창건되었으나 영조 을축(1745)에 나라의 명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신유(1801)에 부설 선액되어 나암 정언신, 인백당 김락춘, 가은 심대부, 가은 이구 등 4현을 배향하고 그 뒤에 고산 남영을 추배하여 5현의 서원이 되었다. 고종 무진(1868)에 훼철되었는데, 1985년부터 부설공사를 시작하여 묘우의 완공을 보았다.
정언신(鄭彦信) : 자는 입부요, 호는 나암이며, 관은 동래로써 좌랑 진의 아들이며 호군 신예의 사위이다. 명종 병인(1566)에 등제하여 이국(吏局)에 있을 때에 명망이 높았다. 동고 이준경이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더니 하루는 통천서각을 주면서『장래에 나를 대신할 것이다』라 하였다. 선조 12년(1579)에 우승지로 함길도절도사가 되어 주군을 순찰하니 치정이 엄정하여 북관주민들이 자식을 낳으면 공의 명자를 사모하여 사용하였으며 계미(1583)에 여진족 니탕개의 난에 함길도도순찰사가 되어 북관에 임명되니 호령이 엄숙하고 용병이 특출함에 적도들이 싸움 한 번 못하고 도망갔다. 공이 사람을 알아보는 지감이 뛰어나 그 막료 중에는 이순신, 신립, 이억기, 김시민 등 훗일 임란에 국운을 짊어질 명장들이 모였었다. 병조판서로 소환되어 기축(1589)에 우의정이 되었으나 아깝게도 정여립이 옥사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적소에서 졸하였다. 출장입상에 모두가 흠모하였으며 임진시에 이제독이 조령에서『정나암이 살아있었다면 적이 어찌 이 영을 넘었겠는가?』라고 차탄하였다.
김락춘(金樂春) : 자는 태화요, 호는 인백당이며, 관은 순천이다. 평양부원군 양경공 승주의 6세손으로 중종 을유(1525)에 출생하여 21세 때에 사마시에서 생원이 되었으나 나라에서 파방이 되어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고 퇴도문인으로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에 여묘 3년을 하고 일찍이 말하기를 향당은 부형종족이 있는 곳이라 하여 필히 말을 내렸다고 한다. 선조 을유(1585)에 졸하였다.
남 영(南 嶸) : 자는 사수요, 호는 고산이며, 관은 의령이니 선성부원군 강무공 암의 5대손이다. 하괴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성효가 출천하였다. 6세에 이미 효경에 통하고 부모를 공경하니 모두가 효자로 칭송하였다. 18세에 친상을 당하여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주야로 호곡하며 몇 숟갈의 죽만을 마시고 소금,간장,약과 등을 먹지 않으니 마침내 두 눈이 실명하게 되어 사물을 볼 수 없게 되었다가 치료한지 여러 달 만에 사물을 보게 되었다. 오직 학문탐구에만 힘쓰고 명리를 세상에 구하지 않더니 50세가 넘어서 유상국성룡(柳相國成龍)이 한 번 만나보고 그 후덕하고 재국(才國)이 겸비함을 알고 조정에 천거하여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가 되었다. 선조가 환두풍(患頭風)하여 밤중에 잠을 못이루는지라 공이 천류지기지리(川流地氣之理)로 사람들이 월맥지소하니 선조가 크게 기뻐하여 달리(達理)한 선비라 칭찬하고 당상관을 제수하였다. 진천,양성,마전,음죽 등 여러군현을 출재하여서는 선치(善治)를 하였다.
심대부(沈大孚) : 자는 신숙(信叔)이요, 호는 가은(嘉隱)이며 관은 청송(靑松)이니 청원부원군 대(岱)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임진왜란에 전사하니 공의 나이 7세임에도 거상(居喪)에 예를 다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광해 5년에 진사가 되어 그 뒤에 찰방이 되었다. 경오(1630)에 사부(師傅)가 되고 사화현감을 지냈다. 삼남에 흉년이 들어 크게 주릴 때에 경상도사겸진휼사가 되어 사의균세사 누백언(累百言)을 상소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뒤에 사간이 되었으며 병신에 졸하니 수가 71세였다.
이 심(李 심) : 자는 자첨(子瞻)이요, 호는 가은(稼隱)이며 관은 연안(延安)이니 감사 창정의 아들이다. 광해조 때 세상이 크게 어지러움을 보고 몸을 깨끗이 지키며 과거보기를 피하고 가족을 이끌고 가서내촌(加西內村)으로 이사하여 농사하며 자급하니 군내 자제들이 날마다 모여서 수업함에 사는 집이 학교가 되었다. 형제 6인이 분산 각거하지 않으며 모든 아우들이 높은 지위에 있으나 매양 귀가할 때에는 동구밖에서 말을 내려 한집에 모여서 공경하며 엄부와 같이 대하였다. 공은 스스로 은거하며 진고한 곳에만 왕래하니 이른바 청사였다. 아들 관징은 판중추에 이조판서요, 손자 옥은 예조참판 부제학이요 증손은 식산 만부이다.
웅연서원(熊淵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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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산북면 서중리 웅연
연 혁
- 정종 을묘(1795)에 인천채씨 사현을 배향한 세덕사로 초건, 다의당 채귀하, 나재 채수, 출 재 채소권, 우담 채득소 - 정종 무오(1798)에 서원으로 선액됨, 그후에 웅연서원유허비를 그 자리에 세웠다. |
웅연서원은 산북면 서중리 웅연동에 있으며, 정종 을묘(1795)에 인천채씨 4현을 모신 웅연세덕사로 창건되어 다의당 채귀하, 나재 채수, 출재 채소권, 우담 채득소의 4현을 봉안하고 4년후인 무오(1798)에 서원으로 선액되었다가 고종 무진(1868)에 조령(朝令)에 의하여 훼철되고 현재는 유허비만 있다.
채귀하(蔡貴河) : 자는 청일(淸一)이요, 호는 다의당(多義堂)이며 관은 인천이니 상서(尙書) 원길(元吉)의 아들이다. 여말에 포은 정몽주선생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호조전서를 지내셨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에 들어가 스스로 맹서하기를 동비아사(東非我士)어니 수경재답(雖更再踏)이리오. 서망수양(西望首陽)하니 인망일심(忍忘一心)가 하고 날마다 채미도(採薇圖)를 바라보며 그 뜻을 굳게 하였다. 이태조가 호조판서로 여러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시(諡)는 정의(貞義)이며 평산의현(平山義峴), 대구서산(大邱西山), 개성숭양(開城崇陽) 등 제서원(諸書院)에 배향되었다.
채 수(蔡 壽) : 자는 기지(耆之)요, 호는 나재(懶齋)이며 관은 인천(仁川)이니 부사(府使) 신보(申保)의 아들이다. 세조 무자(1468)에 생원하고 다음 해에 갑과(甲科)에 장원, 전시(殿試)에 장원, 모두 삼장장원(三場壯元)을 함으로써 조선 이래 이석정과 함께 두 사람 뿐이었다. 수찬(修撰) 지제교(知製敎), 응교(應敎), 도승지, 관찰사, 한성좌윤, 대사성, 호·예·형조 참판 등 내외직을 역임하고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겨 산경지지(山經地誌) 패관인설(稗官人說)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으며, 시문과 명필로써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도승지로 입시하여 천변의 득실을 극언하며 병자의 원옥을 말하니 왕이 이에 감오하고 수백인을 방면하였다. 병자(1504)사화에는 단성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였고 67세에 졸하였다. 시는 양정이며 임호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채소권(蔡紹權) : 자는 효중(孝仲)이요, 호는 졸재(拙齋)며 관은 인천이니 나재 수의 둘째아들이다. 성종 경자(1480)에 출생하여 25세에 사마시에 오르고 중종 병인(1506)에 등과하여 갑술에 경상도사가 되니 그때 김안로가 어사가 되어 함께 용궁에 도착하여 망산성에 공음(共吟)할 때 공이 선음하기를 천임수면평여장(水面平如掌)이요 성재산요소약제(城在山腰小若臍)라 하니 안로가 뜻이 막혀 얼굴빛을 변하고 가더라. 무인에 성균관 사예가 되어서는 조정암, 이음애와 함께 동문선을 찬하였다. 계사(1533)에 대사헌이 되었다가 형조참판이 되었고 을미에 한성판윤, 7월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병신(1536)에 김안로가 용사하여 시사가 어지러움에 벼슬길에 무익함을 알고 남으로 고향에 돌아오니 57세였다. 인종 을사에 영상 윤인경, 찬성 이언적이 공을 재상의 그릇으로 추천하였으나 간상 이파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채득소(蔡得泝) : 자는 영이(詠而)요, 호는 우담(雩潭)이며 관은 인천이니 간사 유부의 종자이다. 선조 갑진(1604)에 출생하여 청음 김상헌 문인으로 유일로 별제에 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천대에 은거하였다. 인조 무인(1638)에 효종이 번양에 있을 때 서로 만나 지우가 되고 을유(1645)에 봉가동환(奉駕東還)하여 자천대 석면에 새기되 숭정일월(崇禎日月) 대명천지(大明天地)라 하여 채미의 굳은 뜻을 보였다. 세상에서는 대명처사라 칭하였다. 사후에 임금으로부터 치제문위조(致祭文慰弔)하고 정종조에 집의에 증직되었다. 삼강록, 존주록, 배신록 등에 기재되어 있다.
서 당(書堂)
옥봉서당(玉峰書堂) : 가은읍 작천리 옥녀봉에 있다. 예전에 있다가 없어진 자리에 중년에 와서 다시 세웠다. 력당 유해주가 상량문을 짓고 옥봉 안영옥의 시가 있다. 극산 김만진, 석하 김상보 등의 석학을 배출하였다.
영고서당(穎皐書堂) : 점촌 흥덕동 예동에 있다. 태촌 고상안의 자손을 위한 강학소였다. 후손 진사 언상이 중건하였다.
창구서당(蒼邱書堂) : 산북면 창구리에 있다. 창애 채규봉이 세웠다.(참고:유고편)
반곡서당(盤谷書堂) : 산양면 반곡리에 있다. 고성현감을 지낸 순천인 김두원과 참봉 김만성을 경모하는 곳으로 자손들이 세우고 강학지소로 삼았다.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영빈서당(영濱書堂) : 산양면 반곡리 영강변에 있다. 선조 갑술(1574)에 산양면 현촌에 있었다. 백담 구봉령이 여기를 지나다 몇날을 유숙하고 갈 때에 모든 선비들의 청으로 존성당이라 명명하였는데 임진란에 당사가 전소되었다. 계묘(1603)에 수계동에 중건하였다가 숙종 정묘(1687)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으며, 고종 경술(1910)에 양협실을 세우니 좌는 존성이요 우는 진수이다. 사림 18문중이 관리운영하여왔고 송조칠현의 유영을 봉안하였으며, 부훤당 김혜 및 청대 권상일이 찬시하다.
호계서당(虎溪書堂) : 호계면 견탄1리에 있다. 정언 민조영이 창건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던 곳이다.
마. 사·묘(祠·廟)
부조묘(不조廟) : 평양부원군 김승주의 묘로 가은읍 작천리에 있다. 김승주(金承주) : 호(號)는 월담(月潭), 시호(諡號)는 양경(襄景)이며 관(官)은 대광보국숭록대부 (大匡補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이요 관(貫)은 순천(順天)이다. 태종조에 매번 대한(大旱)의 때를 당하여 공(公)이 헌관(獻官)으로 기우제를 지내면 몇 리를 못가서 비가 오는 고로 나라에서 승주(承霔)라 사명(賜名)하였다 한다. 태종을 도와 공이 크므로 신사년에 추충구의(推忠舊義) 익대공신호(翼戴功臣號)를 내리고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하고 시부조(施不조)하다.(출:공신록)
부림홍씨사묘(缶林洪氏祠廟) : 참조 문광공 신도비
숙청사(肅淸祠) : 원래는 산북면 대하리 영각에 있었다. 익성공(翼成公) 방촌(방村) 황희(黃喜)선생의 영정을 봉안하던 쌍연영각(雙淵影閣)이 있어 사림에서 받들던 곳이었으나 철폐되고 지금은 종재(宗齋) 곁에 숙청사를 세워 영정을 모시고 있다. 대상리 장수황씨 가문에 사보(四寶)가 있으니 첫째 옥연(玉硯), 둘째 옥서진(玉書鎭), 셋째 산호영(珊瑚纓), 넷째 서각대(犀角帶)이다. 이 네가지 물건은 방촌선생이 평시에 애용하시던 물건들이다. 중년에 참봉 황의민이 볼일로 상경하였다가 서각대가 독일인에게 전당되어 유실될 처지에 있음을 보고 급히 돌아와 종중에 통보 수의하여 찾기로 결정, 종답(宗畓) 11두락을 방매하여 돌려받은 사실이 있다. 황 희(黃 喜) : 자(字) 구부(懼夫)요, 호는 방촌(厖村)이며 관(貫)은 장수(長水)이다. 고려 공민왕 계묘(1363)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온순하더니 고려 우왕조에 등제하여 성균학관에 보하고 이태조가 개국하자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에서 청요(淸要)에 누진(累進)하였다. 태·정·태·세 4조를 섬겼고 24년을 정승으로 국가의 주석(柱石)으로 세종 30년 지치(至治)를 주도하였다. 청백리의 표본이기도 하다. 세종묘정과 상주 옥동서원에 배향되었다. (출:이조실록, 명신록, 전고인방)
용곡리사(龍谷里社) : 용곡리사는 영순면 오룡리에 있으며 진주강씨 세덕사로 숙종 을축(1685)에 창건되어 삼산 강응청, 백석 강재, 석봉 강우를 배항하였다. 고종 무진(1868)에 조령(朝令)에 의해 훼철되고 현재는 그 위치에 유허비만 있다. 강응청(姜應淸) : 자(字)는 경운(景運)이요, 호는 삼산(三山)이며 관은 진주이니 운계(雲溪) 세향(世鄕)의 아들이다. 통례원 인의를 지냈다. 유복자로 태어나 7세에 추복하고 평생 여묘하였다. 아들 아홉이 모두 현달하여 영남에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강 재(姜 霽) : 자(字)는 명원(明遠)이요, 호는 백석(白石)이며 관은 진주이고 삼산 응청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와 이조정랑을 역임하였으나 관영에 뜻을 버리고 백석정을 삼강 합류처에 짓고 후진계몽에 전력타가 그 정사를 사위인 종사랑 구선윤에게 전수하였다.(출:상산지,용궁지) 강 우(姜 우) : 자(字)는 대소(大蘇)요, 호는 석봉(石峰)이며 관은 진주이니 삼산 응청의 아들이다. 문경 보은현감을 지냈다. 부모님상에 6년을 여묘하니 묘곁에 채생(菜生)하여 사시(四時)로 푸르르니 조석존궤(朝夕尊饋)에 써도 다함이 없었다고 한다. 시묘를 마친 후 마침내 자고(自枯)하니 모두가 애석해 하였다. (출:상산지,승람지)
죽동리사(竹洞里祠) : 죽동리사는 원래 영순면 김룡리 죽동에 창건 되었으나 자손들이 산양면 녹문리로 이건하였으며, 개성고씨 세덕사이다. 삼계 고윤종, 계정 고흥운, 월봉 고인계, 추담 고유를 배향하였다. 고윤종(高胤宗) : 호는 삼계(三溪)이며, 관은 개성이다. 직제학 사원의 현손이다. 관은 주부를 하였다. 고흥운(高興雲) : 자는 천상(天祥)이요, 호는 계정(溪亭)이며 관은 개성이니 직제학 사원의 5대손이며 주부 윤종의 아들이다. 중종 계미(1523)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부조(父祖)의 정훈(庭訓)을 답습하고 힘써 독학하니 문장행의가 일대의 경중하는 바 되었다. 기유(1549)에 생원하고 경오(1570)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횡성현감으로 많은 치적을 남겨 백성들이 거사비를 세우고 아쉬어 했다. 형조좌랑으로 있을 때에 곧음으로 당로의 꺼림을 받아 임오(1582)에 고성군수로 부임하였다가 관에서 졸하였다. 통정대부승정원도승지지제교 겸 경연참찬관춘추관편수관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이 증직되었다. (출:상산지, 용궁지) 고인계(高仁繼) : 자는 선승(善承)이요, 호는 월봉(月峰)이며 관은 개성이니 군수 흥운의 아들이며 생부는 부위 경운이다. 명종 갑자(1564)에 출생하여 선조 병오(1606)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예를 역임하였으며 광해조에는 간신 이이첨의 마음을 받아 사퇴했다. 임란 때에는 창의하여 선무일등원종훈에 록하였으나 광해혼조에는 벼슬할 뜻이 없어 향제에 은퇴하였는데 인조가 개왕후에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독서로 일생을 자오하였다. 조정에서 통정대부용양위부호군에 승차시켰으나 정해(1587)에 졸하였다. (출:상산지, 용궁지) 상주효곡서원에 배향되었다. 고 유(高 裕) : 자는 순지(順之)요, 호는 추담이며 관은 개성이니 월봉 인계의 6대손이다. 경종 임인(1722)에 출생하여 21세인 영조 임술(1742)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부터 양사를 거쳐 필선, 승지에 이르렀다. 일찍 경상도사가 되니 관찰사 윤동도가 검전의 일을 전위하니 송첩이 많았으나 그 판결을 신과 같이 하니 관찰사가 크게 경탄하였다. 창녕에 출재하여서는 감사가 담창을 신설하려고 함에 민폐를 염려하여 말렸으나 듣지 않으니 부득이 조정에 서계하여 중지케 되니 읍면이 크게힘 입었다. 안동목사가 되어서는 밭뽕을 재배하여 잠업을 권장하니 안주항라의 명산물이 이래서 생겨났다. 다시 상보하여 허호팔천을 감하여 세금을 격감케 하니 백성들이 칭송하였다. 성리와 경학에 깊고 문집이 있다. (출:상산지)
송죽사(松竹祠:余氏別祠) : 송죽사는 산양면 송죽리에 있으며 의령여씨 세덕사이다. 여 춘(余 春) : 자는 수구요, 호는 죽헌이며 관은 의령이니 호판중 당의 후손이다. 선조 병오(1606)에 무과하여 관은 병조참의에 이르고 임진왜란 때는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창의하고 많은 공적을 남겼다. (출:상산지)
의산사(義山祠) : 의산사는 산양면 위만리에 있으니 충의공 엄흥도의 사당이다. 엄흥도(嚴興道) : 관은 영월이며, 조선조 제6대 왕인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쫓겨나 1457(세조 3) 12월에 사약을 내려 죽음을 당하니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그 시체를 거두는 이가 없었다. 이때 영월호장이던 공은 가족도 겁내어 만류하였으나 신하된 몸으로 그럴 수가 없다며 울면서 명주와 관을 사서 “나는 착한 일을 하고 화를 당해도 달게 받겠다”며 그날 밤 그는 남몰래 홀로 청령포 비탈길을 올라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뒤 안장할 곳을 찾아 나섰으나 12월이라 산과 들에서 눈이 뒤덮혀 어디가 어딘지 분간 할 수가 없어 이리 저리 헤메던 중 어느 양지바른 곳에 다다르니 갑자기 노루 한 마리가 달아나므로 그 곳에 가보니 눈이 녹아 있어 그 곳에 안장하고 이것이 탈로날까 두려워 아들을 데리고 도망하여 숨어살다가 죽으니 아들 호현이 고산에 장사 지냈다. 그후 세월이 흘러 하늘도 감동하여 단종의 능을 장능이라 불리워지고 제18대 현종 때에 우암 송시열의 건의로 공의 자손이 동용되고 육신사에 입향하였다. 영조 19년(1726)에 공조참의로 증직되었고 영조 26년(1750)에는 그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상절사 및 의산서원을 세웠으며 1791년에 충의단에 배향되고 1833년에 자헌대부 공조판서에 증직되고, 1877년에 충의공의 시호가 내렸다. 의산서원은 1876년에 조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출:장릉지,영월지)
영고사(穎皐祠) : 영고사는 점촌 흥덕리 예동에 있으며 태촌 고상안, 양옹 고세장을 배향한 개성고씨 세덕사이다. 고상안(高尙顔) : 자는 사물이요, 호는 태촌이며 관은 개성이니 통정 수연의 증손이다. 선조 계유(1573)에 사마에 오르고 병자에 문과에 올라 성환찰방을 시작으로 함창현감 등 5개읍에 출재하여 많은 치적을 남겼다. 문장이 뛰어나고 농사에 밝아 농가월령을 지어 농사를 권장하였다. 1582년에 좌랑을 거쳐 감찰로 있을 때 친상을 당하여 여묘 3년을 하고 다시 정랑으로 옮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는 대장에 추대되었으나 마침 예천군수가 결원이 생겨 그 군정을 섭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예천으로 떠났다. 1594년에는 삼가현감으로 통영의 충무공 이순신 영에서 주시로 있었으며, 1598년 정유재란 때는 왜적을 막을 8가지 방어책을 서애 유성룡에게 올렸다. 울산판관, 풍기군수를 거쳐 1609년에 벼슬을 벼리고 남석정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광해군의 탁정이 날로 심하여 산북면 초동으로 옮겼다가 1623년에 졸하였다.(출:함창지,용궁지,상산지) 고세장(高世章) : 자는 여사(汝舍)요, 호는 낭옹(浪翁)이며 관은 개성이나 직제학 사원의 후다. 1641년에 출생하여 총명함이 뛰어나 물리에 밝았다. 사서삼경, 제자백가의 군서(群書)를 많이 읽어 음양, 이기, 의약, 복서에도 무불통지하였다. 1673년(현종 1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숙종 2년에는 도남서원 청액소를 올려 사액을 받았고, 1681년에는 영남 유생들의 소두가 되어 율곡, 우계의 척향소를 올렸다가 벽동에 귀양을 갔었다. 1689년 선원전의 참봉이 되었다가 50세로 졸하였다. 집의 증직되고 문집이 가전한다.(출:상산지)
안동권씨별묘(安東權氏別廟) : 안동권씨별묘는 산북면 서중리 근암에 있으며 안동권씨 입향조인 구학재 권구의 별묘이다. 권 구(權 坵) : 자는 차산(次山)이요, 호는 구학재(溝壑齋)이니 금곡(琴谷) 익린(益隣)의 자(子)라. 국자생원으로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문장이 유려하고 행의가 단방하여 세상에서 중히 여겼다.(출:상산지)
도천사(道川祠) : 도천사는 산북면 대상리 비파산 아래 있으며, 연대미상에 창건되어 칠봉 황시간, 우곡 황상중, 만은헌 신빈을 배향하였다. 칠봉(七峰) 황시간(黃時幹) : 자는 공직(公直)이요, 호는 칠봉(七峰)이며 관은 장수이니 방촌 황희의 6세손이다. 관(官)은 삼가현감을 지냈다. 유서애, 정한강 문인으로 정우복, 전사서, 이창석과 도의로 교유하였는데 세칭 상산4노(尙山四老)라 하였다. 임진란을 당하여 왜적이 공을 해치려고 정도교하(挺刀交下)할 때 부인 권씨가 몸으로 대신 흉한 칼을 받으니 피가 흘러 몸으 �셔도 힘을 다하여 막아서니 그 의기에 눌려 왜적도 감동하여 버리고 갔다. 갑자(1624) 이조(李造)의 난에 어가가 남행(南幸)할 때 충의로 군중과 맹서하고 의병을 모아 행재소로 향하였다. 병신(1656) 봄에 마을사람들과 대상보를 축조하였다.(출:상산지) 황상중(黃尙中) : 자는 계통(季通)이요, 호는 우곡(愚谷)이며 관은 장수이니 칠봉 시간의 손이다. 일진 선백원 신석번 문인으로 여흥 민노봉 형제와 교유하였다. 성균관 진사로 향리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출:상산지) 신 빈(申 頻) : 호는 만은헌(晩隱軒)이며, 관은 평산(平山)이니 문희공 개의 구세손이며 백원석번의 종자(從子)이다. 학문이 탁월하여 노봉 민정중 천(薦)으로 감역, 도사, 현감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율곡, 우계의 학문을 연구하였다.(출:상산지,함창지)
노양역각(魯陽影閣) : 노양영각은 산양면 부암리에 있으며 충장공 천만리의 영정을 모신 영각이며 1890년에 창건되었다. 천만리(千萬里) : 자는 사지(思之)요, 호는 사약(思若)이며 중국 영양인이다. 궁마술에 뛰어나 무과에 장원하고 북로에 출전하여 진무사가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두 아들 상(祥)과 희(禧)와 함께 명장 이여송을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왜적을 파하고 동래에 이르러 여러번의 전승이 있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울산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다. 그뒤 우리나라에 영주하므로 조정에서는 충장공이라 시를 내리고 화산군에 봉하였다.(부조묘재고성, 남원 환봉사, 안동 동산서원, 고성 호암서원, 청도 황강서원에 향사되었다).
어필각(御筆閣) : 산북면 서중리 수개동에 있으니 영조께서 희정공 권상일이 찬수당상으로 있을 때에 알성찬수하니 공존천의(功存闡義)라 하고 이대철권(以代鐵卷)이라. 수서(手書)를 하사했다. 권상일(權相一) : 근암서원편 참조
화산사(華山祠) : 화산사는 예안김씨 세덕사로서 산북면 내화리 탑동에 있으며, 검암 김곤, 지남 김남일, 노주 김태일, 단계 김해일, 학고 김복만 등 삼세오인을 배향하였다. 김 곤(金 錕) : 자는 자진(子珍)이요, 호는 검암(劒岩)이며 문절공 담의 후라. 기절이 강직하고 유학을 부식하는데 힘썼다. 성균관의 생원으로 있을 때 병자난을 만나 대가가 남양산성으로 입성함에 성균관 선비들이 일시에 흩어져 가는지라, 공이 나(羅) 이후 금강으로 더불어 오성위판을 보호하여 남한에 이르러 개원사에 임시 봉안하고 고향에 돌아와 사친을 지성으로 하니 향리가 모두 그 효도에 감복하더라. 옥동사에 배향되었다.(출:예천지 인물편) 김남일(金南一) : 자는 중백(重伯)이요, 호는 지남(砥南)이며 관은 예안이니 문절공 담의 후라. 학행으로 천거되어 괴산군수를 지냈다. 관에 있을 때 청렴하여 치적이 있어 읍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문집이 있다.(출:예천지 관사조) 김태일(金兌一) : 자는 추백(秋伯)이요, 호는 노주(蘆洲)이며 관은 예안이니 검암 곤의 사자이다. 현종조에 문과에 등제하여 집의를 지냈다. 성품이 소박하고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나 학자들이 노주선생이라 칭하였다.(출:예천지 인물조) 김해일(金海一) : 자는 종백(宗伯)이요, 호는 단계(檀溪)이고 관은 예안이며 좌승지를 지냈다. 덕성이 있고 풍도가 준아하고 문장행의가 세상에서 우르러 보더라. 부사로 두 번이나 연경에 다녀왔고 뒤에 동도윤(東都尹(경주부윤)이 되어서는 치적이 많아 마애비가 있다. 숙종이 직접 제문을 내리고 그 형 노주가 묘갈을 지었다.(출:예천지 인물조)
김복만(金復萬) : 호는 학고(鶴皐)요, 관은 예안이니 단계 해일의 자라. 숙종조에 진문으로 사간원 사간을 지냈다. 거관(居官)에 청렴강직하였으며, 문학청명이 세상에 울렸다.(출:예천지)
어서각(御書閣) : 호계면 호계리에 있으며 선조께서 선천부사 홍인걸에게 하사한 어필을 봉안한 곳이다.
홍인걸(洪仁傑) : 자는 사호(士豪)이며, 관은 부림이니 문광공 홍귀달의 후이다. 무과로 웅천현감을 지내고 통정으로 선천도호부사겸병마절제사를 지냈다. 조천(朝天)에 유충효교(有忠孝敎)하니라. 병란(丙亂)에 호사입강화(扈社入江華) 하는데 유공하였다.(출:충민공입청일기) 선조의 어필은 다음과 같은 글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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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家各生子(양가각생자) 提孩巧相如(제해교상여) 少長聚嬉戱(소장취희희) 不殊同隊魚(불수동대어) 年至十二三(연지십이삼) 頭角稍相踈(두각초상소) 二十漸乖張(이십점괴장) 淸溝映汚渠(청구영오거) 三十骨骼成(삼십골격성) 乃一龍一猪(내일용일저) 飛黃騰踏去(비황등답거) 不能頤蟾蜍(불능이섬여) 一爲馬前卒鞭(일위마전졸편) |
영정각(影幀閣) : 영정각은 가은읍 완장리 학천장 경내에 있으며 도암 이재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이 재(李 縡) : 자는 희경(熙卿)이요, 호는 도암(陶菴)이며 관은 우봉이니 우상 숙의 손이요, 진사 만품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이 뛰어나 영조 때의 대학자이다. 숙종 임오(1702)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판, 한성판윤, 예조참판, 강화유수, 함경도관찰사,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다. 만년에 용인으로 퇴거하니 사방에서 제자가 운집하여 많ㅇ느 문인을 배출하였다. 병인에 졸하니 문정이라 시하였으며, 저서로는 사예편람, 어류초절, 근사심원 등 수다한 저서와 문집을 남겼다. 숙종비 인현왕후는 선생의 이모이며 용인 한천서원에 배향되었다.(출:유현연원록,문충록)
충열사(忠烈祠) : 충열사는 문경읍 교촌리에 있었으며 사우가 일정시에 훼철되었는데 충열사복원추진위원회를 관민합동으로 구성하여 문경향교 전(前)전교 이원영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고호림,신석후 등 제씨의 노력과 문경시의 보조로 1981년 11월에 복원공사를 완공하였으며, 매년 2월초정에 유림에서 향사하고 있다. 현재 이 충열사는 문경새재 제1관문 뒷편에 옮겨 놓았다. 신길원(申吉元) : 자는 경초(慶初)요, 관은 평산이니 지평 국량의 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자기 손가락을 자른 피를 약에 섞어 어머니를 연명케 하였고, 14세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슬피 울며 삼년상을 마치니 보는 이가 눈물을 흘리었다. 효행이 알려져 선조가 효자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병자(1576)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태학의 추천으로 참봉 벼슬 등을 거쳐 문경현감이 되어 백성을 정성으로 다스리며 항상 성리학의 책을 읽어 규범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문경으로 왜적이 다가오자 모두 형세 불리함을 들어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소리 높여 말하되 내가 맡은 고을이 곧 내가 죽을 곳인데 어찌 피하리오 하고 소수의 군사를 독려해도 적병이 이르자 달아나지 않는 이가 없어 홀로 종 하나만이 가지 않고 있거늘 의관을 바로 하고 관인을 차고 앉으니 적병이 칼을 빼어들고 속히 항복하여 길을 가르키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공은 손을 들어 목을 가르키며 내가 너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더럽히지 말라 하니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팔을 자르고 계속 협박하였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은 채 꾸짖기를 마지 않으니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때는 임진년 4월 27일이요 나이는 45세였다. 나라에서 좌승지를 증직하고 삼강록에 등재하고 대구, 표충사에 배향하였다. 충열비는 정언 채팽윤이 찬하고, 묘지명은 대제학 이재가 찬하였다.(출:문경구지, 속삼강록)
옥소영각(玉所影閣) : 문경읍 당포리에 있다. 권 섭(權 燮) : 관은 안동이요, 자는 조원(調元)이며 호는 옥소(玉所)이니 수암 영상 상하의 질이다. 청음 김상헌은 외증조요, 백사 이항복은 처고조이니 현종 12년(1671)에 출생하여 오직 성리경학연구에 정진하고 관직에 오르지 않고 사림에 은거하여 시로서 자오하였다. 38세때(1699)에 통덕랑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수(壽)로 가선대부의 교지가 내렸다. 89세로 영조 35년(기묘,1759)에 졸하였다. 영각은 1985년에 지방유림과 후손들이 건립하였으며 관내 유림에서 봉제한다.(출:청풍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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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순서는 창건년대 순서로 하고 창건연대 미상은 배향인물의 연대순으로 하였다. |
바. 재(齋)
율곡대재(栗谷大齋) : 영순면 율곡리에 있다. 허백당(虛白堂) : 홍귀달(참조 신도비)
충사재(忠思齋) : 산양면 부암리에 있다. (참조:노양영각)
존승재(尊承齋) : 가은읍 전곡리에 있다.(참조:소양서원)
청산재(靑山齋) : 영순면 의곡3리에 있다.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 (참조:근암서원)
구수재(龜壽齋) : 가은읍 전곡리 소양동에 있다. 처사 신숙빈의 장이지소(杖以之所)이다.
추모재(追慕齋) : 영순면 오룡리에 있다.
진목재(眞木齋) : 영순면 사근리 진목지 위에 있으며 판결사 고극공, 한성우윤 고천우의 향화지소(香火之所)이다. 고극공(高克恭) : 자는 숙부(肅夫)요, 관은 개성이니 부장 약회의 아들이다. 무인으로 관(官)은 충의교위(忠毅校尉)하고 손(孫) 상언의 귀(貴)로 증 판결사이다. 고천우(高天佑) : 자는 유길(有吉)이요, 관은 개성이니 판결사 극공의 아들이다. 중종 임오생으로 관(官)은 한성우윤을 지냈으며, 아들 상언의 귀(貴)로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첨소재(瞻掃齋) : 흥덕동 우지리 소곡에 있다. 증 종부사정 신대기, 증 좌승지 신계종의 존모지소이다. 신대기(申大器) : 관은 평산이요, 자는 여호(汝湖)이니 문희공 개의 후이며, 한천처사 숙빈의 5대손이다. 선조 기묘에 송호에서 태어나 폐거업하고 정심학구하고 인조 계유에 졸하니 증손 필방의 귀로 증 종부사정하다. 신계종(申繼宗) : 관은 평산이요, 자는 선술(善述)이며 호는 송연(宋淵)이니 문희공 개의 후이며 한천처사 숙빈의 6대손이요, 종부사정 대기의 아들이다. 광해 계축에 송호구제에서 태어나 삼종숙 백원 석번 문에서 수학하고 문장행의가 세상에서 높이 추중하였다. 오정산 구백결을 신당보에 증여하여 이자보비하고 숙종 무술에 졸하니 손 필방의 귀로 증 좌승지겸경연참찬관하다.
취규재(聚奎齋) : 산양면 신전리에 있으며 규재 고세충의 강마하던 곳이다. 고세충(高世忠) : 자는 의가(議可)요, 호는 규재(奎齋)이며 관은 개성이니 봉사(奉事) 이견(爾堅)의의 아들이다. 광해 임자생으로 의용이 뛰어나고 기도(器度)가 회묵(恢默)하며 청백염직(淸白廉直)하여 임천(林泉)에 은적(隱蹟)한 뒤에 거업(擧業)을 폐(廢)하고 전심으로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경모재(景慕齋) : 흥덕동 평산신씨 우지문중에서 세웠다.
상의재(尙義齋) : 산양면 위만리에 있으며 영조 병자(1756)에 상절사(尙節祠)로 인건(靭建)되었다가 순조 계사(1833)에 사론(士論)으로 서원이 되고, 충절(忠節)이라 하다가 고종 갑자(1864)에 철훼되었으며, 훗일 자손이 복원하여 상의재라 하였다.(참조:의산사)
흘모재(屹慕齋) : 산양면 진정리에 있으며 현감 김두원, 참봉 김만성 양대의 우모소이다. 김만성(金萬成) : 자는 국한(國翰)이요, 관은 순천이니 양경공 승주의 후며 현감 두원의 아들이다. 통덕랑으로 증 노능참봉하다. 일찍이 거업을 폐하고 임천에 은거하여 경독(耕讀)으로 평생을 지냈다.
영모재(永慕齋) : 산양면 현리에 있으며, 인천채씨 개기조(開基祖)인 참봉 양애 채득호의 우모소이다. 채득호(蔡得湖) : 인천인이니 자는 차원(次遠)이요, 호는 양애(陽崖)니 서재(西齋) 득강(得江)의 제이다. 선조 무인(1578)에 출생하여 참봉을 지내고 특별히 천작(天爵)을 몽(蒙)하여 통정계(通政階)를 받았다. 날마다 백중형들과 더불어 강마공초(講磨功礎)하니 세상 사람들이 금곤옥계(金昆玉季)라 칭하더라. 정유란에는 망우당 곽재우와 더불어 화왕산성에서 창의하다.
영모재(永慕齋) : 산북면 내화리에 있으며 참봉 권오상의 재(齋)로 아들 참의(參議) 지(祉)가 지었다. 아들 문해, 문연의 강학하던 곳이다.
권오상(權五常) : 관은 예천이며, 진사로 참봉하다. 권지 진사 오상의 자이다. 관은 참의하다.
권문해(權文海) : 자는 호원(灝元)이요, 호는 초간(草澗)이며 참의 지의 자라. 중종조에 문과에 등제하여 중시장원하고 관(官)은 좌부승지에 이르고 이조판서가 증직되었다. 가학(家學)을 이어서 퇴도(退陶)의 문에서 사사(師事)하고 학술이 정박(精博)하여 대동운옥(大東韻玉) 20권을 찬술하였으며 해동잡록 등 14권이 있다. 봉산서원에 배향되었다.
권문연(權文淵) : 참의 지의 자이다. 음사로 군자감정(軍資監正)하다.(이상출:예천지)
영모재(永慕齋) : 산북면 거산리 반계변에 있으니 부훤당 김해 우모소이다. 김 해(金 楷) : 자는 정칙(正則)이요, 호는 부훤당이며 관은 안동이다. 진사로 문장덕행이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역학계몽복석 4권, 두시주선 10권과 문집 4권이 가전한다.
영모재(永慕齋) : 호계면 견탄리에 있으며 찰방 정동윤의 우모소이다. 정동윤(鄭東潤) : 자는 윤향(潤鄕)이요, 호는 송재(松齋)이며 관은 경주이니, 양경공 희계의 후라. 영조 을묘 식년문과에 등과하여 예조정랑 황산도 찰방을 지내고 고향에 돌아와 회적자수(悔蹟自修)하니라. 수(壽)로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출:문경지)
영휴재(永休齋) : 점촌읍 불정리 동막골에 있으며 증 판돈녕 이세무 우모소이다. 이세무(李世茂) : 자는 여번(汝藩)이요, 호는 영휴(寧休)이며 관은 완산이니 태종 제4자인 선성군의 5세손이다. 임진왜란을 호계리 오정산중에서 피란하고 정랑 민숙의 문에서 수학하였다.
영모재(永慕齋) : 점촌 공평동에 있으며 절충 황명술의 우모소이다. 황명술(黃命述) : 관은 평해요, 관(官)은 절충장군이다.
퇴산재(退山齋) : 영순면 오룡리 분토골에 있으며 개성고씨 개기선조인 고사원의 조두소이다. 고사원(高士原) : 호는 퇴산(退山)이며, 관은 개성이니 판서 영의 자이다. 등제하여 관은 직제학이다.
추모재(追慕齋) : 영순면 포내리에 있으며 증 승지 최종벽의 우모소이다. 최종벽(崔宗璧) : 자는 득화요, 호는 계산(桂山)이며 관은 해주로 부제학 만리의 후라. 효종 경인에 출생하니 총명예지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에 여묘 3년 하였다. 포내에 은거하여 전심으로 탐구학문하고 세상의 영욕시비에는 일체 관여치 않았다. 현종 기해에 졸하니 수가 70이었다.
성계재(聖溪齋) : 영순면 말응리에 있으며 참봉 권성흥의 조두소이다. 권성흥(權聖興) : 관은 안동이며, 자는 대현(大賢)이며 호는 거암(居菴)이니 태사 행의 26세손이고 관(官) 참봉하다.
석산재(石山齋) : 영순면 백포에 있다. 사직 강자보 우모소이다. 강자보(姜子保) : 관은 진주이며, 호는 우룡재(寓龍齋)이니 정장 준백의 손이다. 임천에 은거하여 깊이 경사를 탐구하고 세상에 명리를 구하지 않았다. 세조조에 절충장군행용양위 사직이 제수되었다.
사목재(士牧齋) : 호계면 선암리에 있다. 고상안(高尙顔) : (참조:영고사)
원모재(遠慕齋) : 산양면 과곡리에 있으며 김만흥 존모지소이다.
추원재(追遠齋) : 영순면 말응리
수산재(水山齋) : 영순면 의곡(참조:수산정)
추모재(追慕齋) : 영순면 오룡리에 있다. 파평윤씨 재사이다. 윤 오(尹 墺) : 호는 수의(修義)이니 문숙공의 후이다.
퇴곡재(退谷齋) : 영순면 사근리에 있다.
추원재(追遠齋) : 산양면 위만리에 있다. 엄주신(嚴柱信) : 관은 영월이며, 충의공 엄흥도의 후이다. 고종 경오(1870)에 출생하여 1941년에 졸하였다. 삼형제 중에 백계(伯季)가 먼저 졸하고 독신으로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고아인 질들을 잘 돌보아 장성시켰다. 향리에서 그 효성과 우애를 기리기 위하여 재사를 세웠다.
활사재(活沙齋) : 산양면 송죽리에 있다.(참조:천연정)
병현재(幷峴齋) : 영순면 왕태리에 있다.(참조:묘비편)
사현재(沙峴齋) : 영순면 오룡리 분토에 있다. 전원발(全元發) : 관은 죽산이요, 호는 국파(菊坡)이니 용성부원군 방숙의 5세손이다. 영순 달지에서 출생하여 고려 충숙왕 2년(1315) 현량과에 장원하여 원나라에 유학하고 원나라에서도 과거에 장원하여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만년에 치사 환국할 때 원제(元帝)를 만나니 원제가 소원을 묻거늘 고려가 원나라에 상납하는 공물이 많아 민생이 피폐함을 지적하고 이를 탕감할 것을 상주하여 경감토록 한 충성심을 포상하여 죽산 부원군에 봉했다. 여말의 어지러움을 보고 영순 달지로 내려와 청원정을 세우고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 이익재, 김난계와 도의로서 사귀었다.(출:용궁지)
발음재(發蔭齋) : 산양면 과곡리에 있으며 김국소구(金國所構)라. 김 국(金 國) : 자는 만영(萬寧)이요, 호는 묵계(默溪)이며 관은 김녕이니 백촌 문기의 현손이다. 과곡은 오조정속지향(吾祖定屬之鄕)이라 하고 많은 뽕나무와 과일나무를 심어 이름을 과곡이라 하였다. 명리를 구하지 않고 산림에 은거하여 사우들과 함께 시서(詩書)를 강마하였다.
사효재(思孝齋) : 호계면 구산리에 있다. 변계흠(卞季欽) - (참조 : 지락헌)
사향재(思鄕齋) : 동로면 인곡리에 있다. 상산김씨 희경, 희문, 희범 등 7종형제가 1983년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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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대,정,재가 많은 배경
영남지방은 옛날부터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와 맹자가 나신 곳)이라 불리우는 문물이 융성한 고장이며,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의 요람지요, 고려가 보존하던 특정지역이다. 조선에 와서는 유교의 본산으로 상고로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고유문화 및 전통문화가 이곳에 발전되고 결정되어 독특한 향토문화가 형성된 지역이기에 우리 고장에는 마을마다 골골마다 누,대,정,재,사,묘가 있다. 우리 고장은 먼 옛날부터 수천년 사이에 장상, 공경, 문장, 덕행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리 만큼 인재가 배출된 보고라 하겠다. 산수가 아름답고 인심이 순박하니 인걸은 지령(地靈)이라는 말과 같이 후백제의 견훤이 여기서 낳고, 고운 최치원이 이곳에서 놀았으며, 효자 조형도 이곳 출신이다. 허백당 홍귀달, 우암 홍언충, 무주 홍호와 퇴산학의 진수를 전승한 목재 홍여하, 청대 권상일, 활재 이구 등 기라성 같은 학자와 산림에 은거하여 덕행과 학문으로 지고하던 사직 안귀손, 처사 신숙빈, 인백당 김락춘, 고산 남영, 가은 심대부, 가은 이심, 병옹 신필정, 칠봉 황시간, 부훤당 김해와 같은 훌륭한 선비와 관에 나아가 정사를 엄정히 하고 훌륭한 치적을 남긴 동고 이준경, 나암 정언신, 월포 강사상, 규정 신후재, 임하당 신후명, 태촌 고상안, 월봉 고인계, 추담 고유, 그리고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홍인조, 강신, 강인, 채득소, 채유부, 이강년, 이인영, 신태식, 박열과 같은 선인들이 이 고장을 빛내주신 선현들이다. 이와같이 인걸들이 많이 배출되었기에 우리 고장에는 사,대,정,재가 많이 건립되었고 선현들을 경모하여 그 유덕, 유풍을 계승하는 증표로 삼았다. 이 고장 방방곡곡 마을마다 문중마다 사,재,정,누를 가지고 있다. 먼 옛날에 세운 것도 있고 최근에 세운 것도 있는데 이를 하나도 빠짐없이 수록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시간과 자료의 불충분으로 누락된 곳이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점이다. |
사. 누대(樓臺)·정사(亭榭)
간산정(艮山亭) : 영순면 사근리 무림에 있다. 훈도 손문백, 반선지소(盤旋之所)에 후손이 세웠다. 손문백(孫文伯) : 관은 경주, 자는 덕중(德仲), 감찰 등의 증손임, 세조조 진사로 관은 현풍훈도이다.
갈은정(葛隱亭) : 문경읍 갈평리에 있다. 진성 이대호 유식지소(遊息之所)이며 자 낙철이 경모지구(景慕所構)라. 이대호(李大鎬) : 관은 진성이며, 학덕행의가 사람에서 추중되었다.
경송정(景松亭) : 문경읍 갈평리. 송안군 이수를 추모코자 자손들이 1958년에 세웠다. 이수(李修) : 관은 진성, 시조 석의 자, 고려말에 토홍건적(討紅巾敵) 유공으로 봉송안군(封松安君)하다.
경체정(景棣亭) : 산양면 현리. 인천채씨 성우,영우,약우,현우,장헌,장오,용우 등 7인의 정자다. 채성우(蔡性禹) : 자는 성구(聖九), 호는 양락(陽樂)
구봉정(九峰亭) : 영순면 금림리. 구봉 강재를 추모코자 그 후손들이 1975년에 세웠다. 강재(姜載) : 관은 진주, 호는 구봉(九峰), 삼산 응청의 후손이다. 학덕 문장으로 세상에 추앙받았다.
구원정 : 영순면 이목2리 백포. 종사랑 구선윤, 원지재, 구세영을 추모하여 후손이 세웠다. 구세영(具世英) : 관은 능성, 자는 대용, 호는 원지재, 인조 정묘생 을유졸
금주정사(금洲精舍) : 영순면 이목리 금포. 설월당 강주식이 세웠다. 강주식(姜周軾) : 관은 진주, 자는 석여(碩汝), 호는 설월당(雪月堂), 삼산 응청의 후손이다. 숙종 정축에 나서 통덕랑이 되었다.
금하정(金霞亭) : 가은읍 갈전리 금화동 석하(石下). 김상보의 유식처(遊息處)에 자 태영이 세웠다. 김상보(金商輔) : 관은 순천, 호는 석하(石下), 인백당 낙춘의 후손이다. 이시좌가 찬기(撰記)하다.
남고정(南皐亭) : 산양면 과하리. 임수량의 정자이다.
농산정(弄山亭) : 호계면 우로리 영강변. 농산 김세발을 위하여 후손 재운이 세웠다. 김세발(金世發) : 관은 김녕, 호는 농산(弄山)이다.
농암정(籠巖亭) : 산양면 진정리 추산. 부총관 김주를 추모하여 후손이 세웠다. 김주(金株) : 관은 경주, 계림군의 후손이다. 무예가 뛰어나 임진란에 거의순국(擧義殉國)하였다. 선무훈(宣武勳)에 오르고, 관은 한성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이다.
두은정(杜隱亭) : 산양면 형천리 두곡동. 석포 김기묵을 추앙하여 병오에 자손이 세웠다. 김기묵(金琦默) : 관은 안동, 호는 석포(石圃), 익원공의 후손이다. 불구명리(不求名利)하고, 경독자오(耕讀自娛)함. 가선대부에 증직되었다.
만수정(萬樹亭) : 영순면 왕태리. 만수옹 고명세의 유식처에 후손이 세웠다. 고명세(高命世) : 관은 개성, 호는 만수옹(萬樹翁)이니 퇴산 사원의 후손이다. 참의에 증직되었다.
만취정(晩翠亭) : 가은읍 전곡리 수산. 화천공을 위하여 후손 보연이 세웠다. 조즙(趙濈) : 관은 풍양, 선조 신묘에 별시문과, 관은 참판, 효우지극(孝友至極). 조보연(趙甫衍) : 화천공 즙의 후손이다. 박학하고 흉년에 많은 휼빈(恤貧)이 있었다.
망산정(望山亭) : 영순면 의곡리 망산동. 양응해를 추모, 후손이 세웠다. 양응해(梁應海) : 관은 남원, 자는 신지(信之), 호는 망산(望山), 임진란에 의진에 참가함. 관(官)은 동추(同樞)이다.
망월정(望越亭) : 산북면 내화리 금천변. 충의공 엄흥도를 우모하여 후손이 세웠다.(참조:의산사)
무림정사(茂林精舍) : 영순면 사근리 무림. 북헌 신섬의 장수지(藏修地)라. 1939년에 후손이 세웠다. 신섬(申暹) : 관은 아주, 자는 예개(詣個), 호는 북헌(北軒), 퇴도문인으로 관은 중훈대부, 사헌부 감찰, 행 용궁현감하다. 용궁에서는 흉년에 규휼을 잘하고 청백한 이름을 남겼다.
반석정(盤石亭) : 산양면 형천리.
백석정(白石亭) : 영순면 이목리 백포. 정랑 강재의 소구(所構)로 전수기서(傳授其婿)하였다. 강재(참조:용곡사)
봉산정(鳳山亭) : 산북면 석봉리 봉상. 이용운 소복지(所卜地)에 1963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이용운(李龍雲) : 관은 경주, 자는 운화(雲化), 호는 봉산(鳳山), 진사 중립의 후손이다. 효성이 극진하여 임종에 단지수혈(斷指垂血)하였다. 수(壽)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봉생정(鳳笙亭) : 마성면 신현리 봉생. 서애 류성룡의 소구정(所構亭)임. 1592년 임진란에 훼철되었다. 1804년 유림에서 복원을 추진 그 뒤에 중건함. 진성 이상행이 사적기를 찬하고 진사 이명호가 상량문을 찬했다. 류성룡은 선조조의 명신이다.
북파정(北坡亭) : 산양면 녹문리. 북파 고문겸의 소구이다. 고문겸(高文謙) : 관은 개성이니 진사 성겸의 제이다. 유계당 문에서 수학하고 학구에 전력하였다. 유고가 있다.
사가정(四佳亭) : 농암면 율수리. 1947년 농암 유림에서 유교진흥과 상호친목을 위하여 세웠다.
세진정(洗塵亭) : 산양면 과곡리. 통정 김철성의 서식처에 후손이 세웠다. 김철성(金哲成) : 관은 김녕이니 백촌 문기의 후손이다. 관은 삼품 통정이다.
산수정(山水亭) : 영순면 의곡2리. 고상천을 위하여 1925년 후손이 세웠다. 고상천(高象天) : 관은 개성, 자는 기언(璣彦), 퇴산 사원의 후손이다. 참의 용성이 자이다. 영조 정축에 나서 불락사진(不樂仕進)하고 궁리수신(窮理修身)하였다.
상강정(上江亭) : 가은읍 전곡리 소양동. 한천처사 신숙빈이 기거하던 곳에 후손이 세웠다.(참조:한천서원)
석계정(石溪亭) : 동로면 석항리. 전학문 장수지(藏修地)에 후손이 세웠다. 전학문(全鶴文) : 관은 정선, 호는 석계(石溪) 석릉군(石陵君) 용의 후손이다. 산수간에 은거하여 유유자적하였다.
석문정(石門亭) : 산북면 이곡리. 영조조의 근품재 채헌이 세웠다. 채헌(蔡瀗) : 관은 인천, 자는 계징(季澄), 호는 근품재, 공북헌 규하의 증손이다. 영조조에 중생원하고 만송, 청대 양문에서 수학하고 갑인에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다. 산수를 자오하여 수많은 명시와 시조를 남겨 우리 국문학상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을묘에 졸하니 수가 81세였다.
석정정사(石精精舍) 녹양정(綠陽亭) : 산양면 녹문리. 고보의 장수소(藏修所)이다. 고보(高補) : 관은 개성이니 월봉 인계의 6세손이다. 학문이 뛰어나고 착하고 의로운 일에 솔선하고 급한 이를 잘 도우니 세상에서 중히 여겼다.
소주정(蘇洲亭) : 영순면 왕태리. 소주 고미세 소점지(所占地)에 후손이 세웠다. 고휘세(高徽世) : 관은 개성, 호는 소주(蘇洲), 퇴산 사원의 후손이다. 문장 덕행으로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송간정(松澗亭) : 동로면 인곡리 사기막. 만회 손종수가 세웠다. 손종수(孫鍾壽) : 관은 경주, 자는 기일(箕一), 호는 만회(晩晦), 관(官)은 통덕랑이다.
송초정(松梢亭) : 호계면 우로리. 송초 정기규를 위하여 후손이 세웠다. 정기목(鄭琪逵) : 관은 청주, 자는 치수(致壽), 호는 송초(松梢), 감정 진의 자이다. 관은 감찰이다.
앙소정(仰巢亭) : 영순면 포내리 영강변. 춘해 최찬을 추모 1964년에 후손이 세웠다. 최찬(崔讚) : 관은 해주, 자는 진옥(振玉), 호는 춘해(春海), 부제학 만리의 후손이다. 철종 병진에 나서 추수 이규홍 문에서 수학하고 서사(筮仕)로 3품관이 되었으나 나라가 기울어짐을 보고 향리에 돌아와 70세에 졸하였다.
양파정(陽坡亭) : 산양면 현리. 근재 채연이 세웠으나 중년에 중수하였다. 채연(蔡演) : 관은 인천, 자는 숙징, 호는 정재, 후천 □의 제이다. 권졸수 문인으로 무신에 손 경석과 창의하여 공이 있었으며 매일 형제가 한자리에서 강론하였다.
여양정사(礪陽精舍) : 동로면 마광리. 진사 손영조의 서식지이다. 손영조(孫永祚) : 관은 경주, 자는 경승(景承), 호는 여양재(礪陽齋), 고종조에 진사하고 효행과 경학이 세상에서 추앙받았다.
연석정(然石亭) : 산양면 우본리. 1948년에 연석 임국필을 위하여 세웠다. 임국필(林國弼) : 관은 예천, 호는 연석(然石), 서하 춘의 후손이다. 산림에 은거하여 수덕하였다.
영락정(영樂亭) : 가은읍 성유리. 이기 우거시 세웠다가 중년에 퇴락한 것을 후손이 다시 세웠다. 이기(李琦) : 관은 우봉, 호는 퇴은(退隱)이니 병판 순의 증손이다. 이효삼 기의 자이다. 문과에 등제후에 관로에 나가지 않고 노모를 지성으로 봉야하였다.
영은정(穎隱亭) : 산양면 반곡리. 처사 김한철을 위하여 6세손 인배, 인기가 세웠다. 김한철(金漢哲) : 관은 순천, 자는 여흠(汝欽), 호는 영은(穎隱), 고성현감 두원의 후손이다. 은거 산수하여 어초자오(漁樵自娛)하였다.
체서당(棣書堂) : 영순면 율곡리. 부림홍씨 낙원 6형제가 세웠다.
오괴정(五槐亭) : 농암면 화산리. 연암 홍최식을 위하여 문인 68인이 1964년에 세웠다. 홍최식(洪最植) : 관은 남양, 호는 연암,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
옥연정(玉蓮亭) : 산북면 우곡리. 평해황씨 일문이 선조 양무공 부조묘 자리에 세우고 본래 부조묘가 개성 옥련방에 있었던 고로 옥련이라 이름하였다.
우암정(友巖亭) : 산분면 서중리 금천변. 처사 채덕동이 세웠다. 채덕동(蔡德東) : 관은 인천, 호는 우암(友岩), 다의당의 후손이다. 형제간에 우애하고 근검하고 부유하여 많은 선비와 사귀었다.
월고정(月皐亭) : 산양면 봉정리. 월고 노이명의 장수지에 후손 희동이 세웠다. 노복명(盧履命) : 관은 광주, 호는 월고, 소재수신의 증손이다. 광해 기미에 나서 관은 강릉참봉이다.
월봉정(月峰亭) : 영순명 김룡리 죽곡. 월봉 고인계의 장수소이다. 고인계(참조:죽곡사)
윤봉정(潤峰亭) : 산북면 창구리. 윤봉(潤峰) : 서정섭을 위하여 손승원이 세웠다. 서정섭(徐廷燮:1900~1967) : 관은 대구, 자는 장(章), 호는 윤봉(潤峰), 1984년 문인들이 세움. 한말 거유(巨儒) 의당 박세화에 수학하였다.
윤하정(允下亭) : 농암면 종곡리. 괴정 김성의를 위하여 후손 상건이 세웠다. 김성의(金性義) : 관은 순천, 호는 괴정이니 학행이 있었다.
전재정(전재亭) : 영순면 왕태리.
녹리정(甪里亭) : 산양면 녹문리. 진사 고성겸의 장수소(藏修所)이다. 고성겸(高聖謙) : 관은 개성, 자는 치희(穉希), 호는 녹리(甪里), 월봉 인계의 후손이다. 헌종조에 진사하고 문장 행의가 고결하였다.
주암정(舟巖亭) : 산북면 서중리 웅연. 채익하가 세웠다. 바위 모양이 배와 같다고 하여 주암이라 하였다. 채익하(蔡翊夏) : 관은 인천, 간송 유부의 후손이다. 현종조에 생원하였다.
죽림정(竹林亭) : 호계면 우로리. 정방시의 장이소(杖履所)에 후손이 세웠다. 정방시(鄭邦時) : 관은 청주, 호는 죽림재(竹林齋), 자는 후시(厚始)이다.
죽헌정(竹軒亭) : 산양면 송죽리. 죽헌 여춘을 위하여 후손들이 세웠다. 특히 송오 훈의 공이 많았다. 여춘(余春) : (참조:송죽사)
진향루(進鄕樓) : 농암면 종곡리 대정후산. 문경시 소유이던 기록루를 농암 유림에서 인수하여 친목을 도모하고 향리발전을 위하여 관리하고 있다.
천산정(天山亭) : 동로면 간송리 천주. 진사 황범주가 세웠다. 황범주(黃範周) : 관은 장수, 호는 소산거사, 칠봉 시간의 후손이다. 성균관 생원으로 학덕이 있었다.
침석정(枕石亭) : 점촌 흥덕 예동. 진사 고윤상, 진사 고식을 추모하여 세웠다. 고윤상(高允相) : 관은 개성, 자는 중가, 호는 창애(蒼崖), 태촌의 후손이다. 고식(高식) : 관은 개성, 자는 미로(嵋老)요, 호는 한서옹(寒棲翁), 진사 윤상의 자이다.
학천정(鶴泉亭) : 가은읍 완장리 옥류대. 도암 이재선생이 일찍이 둔산정사를 완장리 대야산 용추동에 세우고 강학하던 곳이었으나, 중년에 없어지고 1906년에 향내 사림에서 현위치에 세웠다.(참조:영정각)
양로정(鄕老亭) : 점촌동 남산위. 1978년에 군내 향노회에서 세웠다. 향내 노인, 유림 휴게소이다.
해운정(海雲亭) : 산양면 우본리. 해운 임병건을 위하여 세웠다. 임병권(林炳建) : 관은 예천, 자는 광숙(光淑), 호는 해운(海雲)이니 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화계정사(花溪精舍) : 산북면 내화리. 반남박씨 강학소이다.
천연정(天淵亭) : 산양면 송죽리. 천연재 권용중의 서식처에 후손이 세웠다. 권용중(權用中) : 관은 안동, 호는 천연재(天淵齋),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사우정(四友亭) : 농암면 내서리. 민병두가 세웠다.
암계정(巖溪亭) : 산북면 지내리.
석관정(石串亭) : 영순면 의곡리.
산수정(山水亭) : 산북면 내화리. 처음에는 구락정이라 하였으며 지남 김남일, 노주 김태일, 단계 김해일이 강학하던 곳이다.(참조:화산사)
영류정(映流亭) : 가은읍 전곡리 소양동. 인백당 김락춘이 세웠다. 김락춘(참조:소양서원).
옥하정(玉霞亭) : 가은읍 완장리 선유동. 손재 남한조의 강학소이다. 남한조(南漢朝) : 관은 의령, 호는 손재(損齋), 부사 □의 후손이다. 이대산 문인으로 지행이 일치하여 세상의 사표가 됨.
병천정(甁泉亭) : 농암면 내서리 용유동. 숙종 계미(1703)에 묵옹 송요좌가 세우고 영롱정이라 하였다. 그후 역천 송명흠이 퇴은하여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었으나 세월이 오래도어 퇴락한 것을 향내 유림에서 1958년에 중건하였다. 송명흠(宋明欽) :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泉), 동춘당 준길의 현손, 도암 이재 문인, 관은 이조판서, 영조가 세자를 살해코자 함을 간하고 이곳에 은거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출:경연록,도암문인록,명신록)
정우정(淨友亭) : 산북면 대하리. 칠봉 황시간의 유상(遊賞)하던 곳이다.(참조:도천사)
병암정(屛岩亭) : 호계면 봉서리. 병암 김현규가 세웠다. 김현규(金顯奎) : 관은 안동, 자는 태응(台應), 호는 병암(屛岩), 부훤당 개의 6세손이다. 영조 무오 진사하고 병암집 4권이 전한다.
칠우정(七愚亭) : 가은읍 완장리 선유동. 이 정자를 세운 7인이 나이도 비슷하고, 정리도 돈독하여 휴식하는 곳인데 한말의 의친왕 이강공이 칠우정이라 이름하였다. 7인의 호는 우(愚)자가 있다하여 명명된 것이다.
청화정(靑華亭) : 농암면 내서리. 화봉, 경주인 김정열이 세웠다.
농청대(弄淸臺) : 산양면 존도리. 청대 권상일의 유상(遊賞)하던 곳이다.(참조:근암서원)
모견당(慕鵑亭) : 산양면 과곡리. 처사 김의가 세웠다. 김의(金義) : 관은 김녕, 호는 동은(東隱), 백촌 문기의 증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