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고구려 황조가 소리는 아리랑에 그대로 남아있다

도심안 2008. 7. 5. 22:15
 

고구려 황조가 소리는 아리랑에 남아있다

 "아리랑 아라리요.."는 고구려,  "나를 버리고..".는 신라국 종묘제례악 소리였다

고구려 유리왕이 부른 황조가가 백제의 서동과 신라의 선화공주가 부른 삼국시대  한국민요 모두를 삼국시대 토탬소리로 아리랑 그 시대 원음을 복원하였다

                                                                    

                         

아리랑 가사                          삼국시대동물신앙소리                    백제가요 가사 소리비교

 

아라랑아리랑                              1 비들기소리                                   달아노피곰돋으샤                  

아라리                                        2 숫꾀꼬리                                      어기야

요- -                                           3 암꾀꼬리                                      머리곰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가사는 앞가사 동물소리로 반복한다

나를                                             4 닭소리                                          비치오

버리고                                          5 말소리                                         시라-

가시는 님은                                   6 까치소리                                     어기야 어강도리
 

십리도못가서                              1 비들기소리                                    달아노피곰돋으샤                  

발병 난                                       2 숫꾀꼬리                                       어기야

다- -                                           3 암꾀꼬리                                       머리곰

 

 

그 후에 신라가 통일신라시대는 후렴을 앞에 붙여   “물렀거라-   휘-- 상감마마 행차시다”의 권마성소리(닭, 말 ,까치소리)로 정착되어 신라국 애국가로 사용하여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민요의 작곡공식으로 되어있다

 반면에 고구려와 동족 토탬신앙의 연방국 백제는 후백제시대에는  부여국시대  유화와 금와왕 시조신을  찬양하고  제사에 불러내는 신앙소리로  비들기와 꾀꼬리 암수소리를 내어 종묘제사를 지냈다

후백제 견훤이 태산(정읍)태수 허사문 유금필의 인도로 항복하여  궁중악이 촌음악 “정읍”으로 격하시키고

고려시대에 정읍 태인 허씨 허사문의 후손인  이자상 이자의 이자겸이 세력을  통치하면서 정읍시 삼산동 음성향 마을에서  송나라 사신과 사신맞이에서 흥겹게 가무로 사용하다가  몰락하여 "정읍" "수제천"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처용무. 춘앵무 왕세자찬양음악 등에  사용된다

 

신라국 궁중음악 역시 김알지 탄생의 '계림'이란 이름이 "동경"으로 바뀌더니 비슷한 천한소리  "동동"이란 천박한 이름으로 버려�다

이성계는 여진의 세력 퉁두란과 형제국으로 출발하였으나 태종왕이 명나라 세력의 도움으로 조사의 난을 평정하고 명나라의 청을 모두 받아들여 세종시대 아악이 대거 완성되고 고구려 황조가등 한민족 음악은  버려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명나라 식민지로서 간섭을 받아 명나라 배경세력  음악작곡가 박연의 반대로  세종때에 우리소리가   무산되고 세조임금시대에 들어서   세조왕의 "제갈양"이라는 유자광과 양영대군 건의로 우리음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 황비가 대대로 한확의 누이로 책봉되어  인수대비 한명회 친족의 궁중장악으로 명나라 충성의 홍수 같은 물결 파도에  유자광이 악학괘범 책에 동동과 정읍사를 한글로 올리는 공을 세웠다

유자광은 자기 유자광을 죽이라는  원수 성현, 신말평을 끌어 안고 악학괘범에 정읍, 동동을 우리 한글로   삼국시대소리를 간신히 건져냈다

 

신말평은 남이, 한명회와 똑 같이 권람의 사위로서 박연처럼 우리국악을 버리라는 명나라 유교와  음악분야 집필자이다  민속악은  가무악 출신 어머니를 둔 유자광의 강력한 힘으로  악학괘범과 궁중악으로 살아 남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말기에 미국의 노예해방과 새문화가 연무공원(미국식군사훈련소)이 일본 북해도와 서울에 설치되어 조선의 노예해방 계급타파의 소식유포와 소망이 물결첬다

대원군시대에 아리랑으로 부르고  함경도와 만주에 진출한 미국선교사들이 “예수사랑하심이” 라는 찬송가로  한글 인쇄까지 한국문화 비약의 단게로 올렸다 

 이 소리는 1894년  갑오 동학군 까지도  애국가로 부르고 패전하자

전봉준의 재림과  재봉기를 기원하며

“새야새야 파랑새야”

“영감(전봉준)아 땡감아 죽지를 말어라”

라는 노래로 기원하고  전국동학군 의병대에서는 군가로 진동했다

그러나 민비 최익현 계통의 복권으로 양반계급을 고수하려는  세력이 동학군 가담자 처벌로 이어저 원망의 소리가

높아지고 대원군이 철페한 서원도 모두 민비등장으로 복원되어 양반천국이 환원되어 버렸다 

한일합방 전후에 이러한 민심을  알고 일본총독 이등박문이 단발령과 계급페지하고  무당 천인들을 명창들의 명예 계급특진으로  협율사등 군악 선전대등에서 노예해방의 길이 트여서 정읍의 재봉기하는 동학군토벌대로 몰리게 되었다 

아악은 궁중귀족의소리 백성은 엄금된 계급소리가  군사령부 건물을 원각사 극장으로 만들어 1년 반만 공연하고  동학군 페군의 의병활동 토벌대 위안 공연하는 협율사 장기간 정읍공연으로 가무공연이 거창했다 

500년 무속인 무당, 가문대대로 학대에서 양반이되자 고구려황조가 파랑새 등등 무속가요가 명나라 귀족아악소리로 변질되었다

  여기서 특진된 광대들이 본래의 무속굿 신앙가요를 느리고 낮게부르게 되고  명나라 아악인 귀족가요  가곡 시가로  늘여 부른 것이 전라도 소리 판소리 시조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대사습대회"는  오로지 서울에서 "원사습"이란이름으로 궁궐방위 오직 군사훈련제도이다

국악 판소리는 한일합방 군사해산으로 전국이 모두 금지되고 판소리로  전주사습회로 군사훈련 금지로 인심을 위안잔치로 유도하는 대회였다

정읍지역  중심의 호남 동학군 토벌지역의 군사동요 방지를 위한  음악인 특진과 항일세력 방지를 위한제도였다

 여기서 전날에 전봉준의 재림과  재봉기를 기원하며

“새야새야 파랑새야”

“영감(전봉준)아 땡감아 죽지를 말어라”

라는 노래로 기원하고  전국동학군 의병대에서는 군가 삼국시대 애국가는 명나라 아악소리 천둥소리 늙은소리로 양반귀족 모양내기로 변질되었다

자기 양반임을 과시하기 위하여 심미안보다 품위향상의  소리가  전라도에서 창조었다 

이런 100년 전통전주를 천년전주소리 라고 외치고  이런 자료를 당국에 제시하면 관변학자와 합세 묵살로 일관 한다

천년전주 라면 후백제소리다 후백제시대는 아악이 이땅에 없었다

아악은 조선시대 궁중 밖에서는 부를 수도 없는 귀족의 계급장소리이다

궁중 서울이 아니고 느린소리 충청도 보다도  더 느린소리가 전라도 토속소리라고 할수 없다

백제의 서울이라면 부여 공주지역인데 그 곳에서는 대사습도 판소리도 없다

우리소리는 삼국시대 신앙음악으로 바꿀 수도 없는 불변의 소리로 이제는 아악소리로

고정되어버렸다

이승만이 인간 친일파는 중용하면서 홍난파가 수집한 동요 가요 우리소리를  왜색가요라고

버려진 소리이다

이 소리는 모두 꾀꼬리소리로 고구려 황조가소리로 고구려족 계보인  여진족 청나라의 경극소리,  북한민요,그리고 일본가요처럼 요염하게 아름다운 소리가 우리소리다

 조선 중종시대 유자광을 모함한 충신   김세필이 조선음악을 “염려지곡(艶麗之曲)”이라고 페지를 주장했다 

여기 아리랑의 동영상을 고구려시대 황조가 소리 원음을 공개 한다

                                   

 고구려 황조가를 부르던 졸본천 고분분포지역 사진

 

 

 고구려 황조가를 부르며 지킨 고구려 오녀산성

 


통일신라시대 당나라 사신을 최치원이 그리고 고려시대  이자의 이자겸이 중국송나라 사신을  접견하며

가무를 공연하는 음성향  정읍시 삼산동 음성마을에 고려시대 풍경복원도

 

한민족 음악을 연구하는 학도들의   미래한민족의 문화강국의 새로운 자료와 기회가 되기바란다 

  고구려 천신은 머리 상모에 꾀꼬리 옥정자를 달아 꾀꼬리를 이처럼 천신이미지로 표시했다

참고자료- 처음보는 독자를 위한 고구려의 토탬신앙가요 황조가의 역사를  첨부허여 둔다 


고구려의 본국 부여와 마한시대 금와왕과 소서노의 결혼으로 천신을 꾀꼬리와 비들기로 알고 그 새소리로

하늘님(환웅.환인)으로  부르는 토탬신앙으로 살아왔다
그 소리가 고구려 유리왕시대 왕비 치희를 잃고 솟대(짐대.)위에 모셔진 꾀꼬리 비들기상을 보고 왕비가 돌아오기를 빌었다
삼국사기 유학자 김부식이 유교적 무신론으로 해석하여 기록하였기에 몰랐다
그러나 꾀꼬리 암 수소리가 다르고 교대로 화성합창처럼 들린다
그 소리를 꼭 같이 내기위해 꽹가리 암수(상쇠부쇠)로 나누어 암깽과리 숫꽹과리로
불렀다
그 소리 이름도 호남농악 영산굿 영산다드레기 소쩍새굿으로 불리며 앵새(鶯鳥)소리로 불렸으나

 중국 아악 수입으로 불교국가가 되면서 영산회상으로 편곡되어 “땅지지 징지땅”으로 느리게 소리 내지만

잘 살펴보면 비들기와 꾀꼬리소리의 반복이 보인다
고려시대 이전 국악기 농악기 모두가   꾀꼬리 비들기 소리내기 사용 목적이였다

           가야금 거문고 대금의 농현소리(강약;“애앵-”하는 긴액센트)는 한국만의 소리 꾀꼬리 암컷의 소리다
이소리는 백제가요 정읍사 신라가요 동동(계림 동경)의 해령(끝알리는소리) 소리에 꾀꼬리 암컷의 소리다  
징소리가  외국 심벌즈나 종소리 자바라와 다른 이유가  꾀꼬리 소리 내는 종교음악이기 때문이다
높은 암 꽹과리 소리로 해령(끝알리는소리)소리를 냈으나 고려이후 중국의 아악이 궁중악으로 사용되면서 아주낮고 느리게 소리나는 징소리 악기가 농현소리를 내는 특성의 타악기이다

 

 제주도타령과 상여소리는 고구려와 백제 신앙의 비들기 꾀꼬리소리로 구성되었다
신라의 토탬소리는 닭, 말, 까치소리로  경상도민요 성주푸리 첫 부분이며 현 경상도 사투리로 구성되어 있다
신라가 통일하여 닭 말 까치소리를  앞에 붙여 성주푸리로 애국가로 사용하였고 후백제 견훤이 후백제궁중악으로 비들기소리를 앞에 붙이고 닭 말 까치소리를  뒤에 붙여 현재의 아리랑으로 만들엇다

  그러다가 고려 불교국가가 되면서 아리랑 앞에 나미아비타불소리 “보렴”을 붙여 진도아리랑모양으로 남아 있다
무당의 기도소리와 선비의 독서소리, 의병의 창의사 성토소리가 개화 시기에 들어와서  대원군과 갑오경장이후 재인, 무당의 노예해방과 특채된  판소리 명창으로 계급의 혁명이였다

 

조선 500년 서민 천인 무당 재인,그리고  유자광, 홍길동, 허균이 이루지 못한 신분차별의  한맺힌  소원이  대원군과 이등박문의 혁명적 판소리 고관대우 특채등으로 계급해방되었다

 판소리는 원각사 2년 공연후에는  곧 바로 갑오동학군 재봉기를 막으려고 전라도 정읍 지역에 판소리 협율사 공연단으로 대량 공연하여 동학교도 강증산과 차경석을 교주로 순종황제 처럼  황제 칭호인 "차천자"로 부르게 묵인하였으나 

 600만신도에 러시아인 신도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독립군에게 자금이 전달됨이 발각되어 일제가 강제 말살하고 그 건물이 서울 조계사로 경복궁을 모방했다
 
일본통치의  민심회유의 수단으로 그리고 군사해산 목적으로 서울 원각사 2년하고 정읍 동학군의 독립군 활동 방지 협율사의 장기간 공연하였다여기서 판소리 가왕 격인 이동백과 박만순 박유전 이기곤 박동실  장기간 공연하엿다
동학군 토벌대 병참관출신인  김상태가 초대 예기원장으로 활동하였고 이어 박홍규가  원장으로

가곡 시조 판소리를 교육시켰다
1957년 필자는 고등학생으로  이 박홍규 집에서 하숙하였고 많이 보고 듣고  그 국악원에서 악기를 배웠다
그때 그곳에서 시조를 배우시든 유종구 시조명인이 영남지방으로 가서 영남 시조가 새로 생겼다
아악형  국악 판소리는 명창이 대부분 정읍의 무속 재인과 서울등 각지에서 모여든 군악대 출신등이  차천자 황제궁에서

수제천 동동곡을 태평소로 불면서 우도농악이 생겼다

무형문화제 심사의 현실은   국가문화보전에  관심이 적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힘 있는 정치가  지역을 주로 지정하고  비리의 이러한 자료를 알거나 연구경험도 전무한자가  탈락의 칼만 휘두르고   탐관오리를 연상시킨다 

그들의 눈밖에 나면 영원한 탈락으로 상고 상소도 없는 무법 천민노예 수용소 같다

 
 전통음악은 조선 천인무당의 기능이라서 법에 고소하면 무당의 신분이 드러나고 무당후손으로 오인되거나, 이길 승산도 재력도 없어고망신 만당하는   심사는 황제의 권한으로 오늘도 장악되어  아까운 유산이 수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무형문화재는 농민의 “고시파스”라 누구나 다들 안 된다고 했고  정읍 차천자 황제궁의 농악수 신기남 , 영산굿의 김봉열 등등 수십명의 신청자가  고령으로  기다리다가 무조건 탈락으로 타게 했다

고령으로 사라지는 무형문화제에 전혀 애착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일부 심사자들  그들에 태도에서 사라진 유산이 많다 

 

숭례문은  설계도 도면도 사진도 건축기능자도 있는데도  이 처럼 한민족이 우는데 문화 행정과 문화재

심사비리로사라진   무형문화유산 내용은 전혀 모르고 있다
문화재 심사 목적은  현재 사라저 없는 문화를 찾아서 계승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런 내용을 저서 등 300면이

 넘게 구비하기 힘든 어려운 추천서등 첨부하여 힘들게 올리면 내용도 경력도 안보는지 무관심으로 단시간에 마치고

 내용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종신 심사위원의 철밥통 권좌에서 국비만 매년 탕진했다“

조선시대 명나라 식민지 충신양성기관  성균관, 향교, 서원이 통치하여 명나라음악 아악 모방으로 느리고

낮은 소리로 중국 음악이 되었다  고구려, 신라의 문화유산 살아날 길이  어디에도 없다

일본통치에서 일본인 학교에서만 가르친 예술이기에  국민 대다수가  예술과 전통문화를 거의 모른다

그러기에 정치인 보다도 더 암흑으로  비리에 막혀 단절 되어 사라진 문화유산은 숭례문 화제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원나라, 명나라, 일본식민지 전통으로 중국의 충성으로 세력을 가진자의 명령으로 살아왔다 

미래시대는 문화관광이 국가소득의 최고의 분야인데 철밥통의 사리사욕으로 죽어 갔다

문화제심사위원의  무능, 비리로 복원도 참고도 할수 없는  금옥 같은 예술이 사라지고 있다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출처 : 고구려 백제 신라가요 소리찾기
글쓴이 : notany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