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단종왕비 부친 송현수의 친구였다
정순왕후의 생가가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 복원된다고 하니 그곳에서는 세조왕을 비방하는 장소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세조의 친한 친구 송현수의 딸이기에 세조의 왕권 찬탈에 유리하게 하기위해서 지명되었고 세명의 뽑힌 처녀 중에서도 1등으로 칠보사람 송씨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결정하였다
세조의 명령대로 척척 들어줄 수 있는 친구의 딸을 의도적으로 신숙주를 시켜서 간택을 한 다
단종왕비는 많은 사람의 인기가 있음은 미모와 학식이 있었기에 단종페위 후에 야인이 되고 비구니 여승이 되었어도 무속신으로 “송씨부인”이라는 종교신으로 신봉되고 있다
조선 단종왕조실록 기록에서도 세조가 신숙주를 시켜서 행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학문가라서 왕자는 모두 학문에 열중했고 세조는 집현전에서 산 선비의 세력이다
단종왕조의 내각이 집현전 계통 신숙주 유규 홍일동 등등 정읍인맥으로 보아 송현수와 세조는 일찍부터 수교한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 학문과 음악의 바탕에서 자란 인재이기에 어디서나 인기 있고 무속적 음악이 있는 종교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단종왕비 정순왕후의 확실한 기록을 보고 역사인물을 올바른 평가하고 지방문화의 보탬이 되는 자료를 올린다
단종 2년 ,1월, 세조가 효령 대군 이보․ 임영 대군 이구 등과 창덕궁에서 처녀를 간택하다 라는 아래의 자세한 기록이 있다
“ 세조(世祖)가 이구(李?)․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화의군(和義君) ․좌의정 정인지(鄭麟趾)․․좌승지 신숙주(申叔舟)․우승지 박팽년(朴彭年)․좌부승지 박원형(朴元亨)․우부승지 권자신(權自愼)․동부승지 권남(權擥) 등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서 처녀를 간택하였다. 숙빈(肅嬪)․혜빈(惠嬪)도 또한 가서 보았는데, 풍저창 부사(豊儲倉副使) 송현수(宋玹壽)․예원 군사(預原郡事) 김사우(金師禹)․전 사정(司正) 권완(權完)의 딸을 취(娶)하였다”.
그리고 단종 2년, 10월, 19일 송현수․ 우효강․ 민건 등에게 관직을 아래와 같이 제수하였다
“송현수(宋玹壽)를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삼고, 홍일동(洪逸童)을 좌헌납(左獻納)으로, 윤흠(尹欽)을 사헌 지평(司憲持平)으로 삼았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8째 아들로서 세조와 절친한 동생 영응대군에게 단종왕비 송씨 고모(송현수 여동생)를 후처로 결혼시켰다
그래서 단종왕비 송씨는 단종 2년, 23일 단종왕비가 영응 대군집으로 헌수하러 갔다
“송씨(宋氏;단종비)가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집에 가서 또 남족(男族)들은 외청(外廳)에서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세조(世祖)와 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화천위(花川尉) 권공(權恭)은 동쪽에 앉고, 송복원(宋復元)․송현수(宋玹壽) 이하의 족친(族親)은 서쪽에 앉았으며, 남녀 족친(男女族親)은 모두 사촌(四寸)에 한(限)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모든 일을 감독하게 하고 제사(諸司)에서 1원(員)씩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여기서 세조의 가족과 단종왕비 송씨 가족잔치를 신숙주가 중심적인 중매적인 주관을 하였다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집현전에서 신숙주 정인지와 가까운 사이라서 세조의 세력형성에 주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단종 2년,5월,21일 세조가 정권찬탈의 걸림돌 김종서를 제거하고 경회루에서 구테타 성공 후 축하연을 아래와 같은 인물로 올렸다
“세조(世祖)가 4공신(功臣) 등을 거느리고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풍정(豊呈)을 올렸다.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익녕군(益寧君) 이치(李?)․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계양군(桂陽君) 이증(李增)․대제학(大提學) 박연(朴堧)․여량군(礪良君) 송현수(宋玹壽)․의평군(義平君) 심안의(沈安義)․반성위(班城尉) 강자순(姜子順)․좌승지(左承旨) 박팽년(朴彭年)․우승지(右承旨) 박원형(朴元亨)․좌부승지(左副承旨) 권자신(權自愼)․(延山君) ․견성군(甄城君) 이사철(李思哲)․ 이계전(李季甸)․이조 참판(吏曹參判) 최항(崔恒)․병조 참판(兵曹參判) 홍달손(洪達孫)․중추원 ․도승지(都承旨) 신숙주(申叔舟)․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흥상(李興商)․전 동부승지(同副承旨) 함우치(咸禹治)․호조 참의(戶曹參議) 홍원용(洪元用)․우부승지(右副承旨) 권남(權擥)․병조 참의(兵曹參議) 양정(楊汀)․지병조사(知兵曹事) 이예장(李禮長)이 시연(侍宴)하였다.”
. 세조(世祖)에게는 칼․활․화살 각각 2사(事), 비단 2필을, 한확(韓確)․박종우(朴從愚)․김효성(金孝誠)․이사철(李思哲) 등 1품 이상에게는 비단 1필을, 또 시연(侍宴)한 자에게는 부채 각각 하나씩을 주었다.
여기서 살펴보면 한명회 족친 한확과 이사철이 중심공신으로 되어있고 그들이
단종왕비 의 부친 송현수를 제거하자고 제촉하기 시작했다
즉 사륙신 구테타 사건에 단종왕비 부친 송현수를 연루시키고 그 죄를 만들어 제거하려는
모함으로 보여진다
사륙신 생육신등은 송현수와 원래부터 가까운 인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조 2년,6월,13일 역모에 참여했을 것으로 의심받던 판돈영부사 송현수를 불러 반대 이래와 같이 단종비 의 부친 송현수를 제거하자고 하는 계유정난의 공신들과 화의하려는 의도로 일부러 불러 모아 아래 글과 같이 위로하였다
“주안상 상참(常參)을 받았다.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계양군(桂陽君) 이증(李?)․의창군(義昌君) 이공(李?)․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과 우의정 이사철(李思哲)․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송현수(宋玹壽), 도진무(都鎭撫) 황치신(黃致身)과 봉석주(奉石柱), 병조 참판 홍달손(洪達孫)과 승지(承旨)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부터 역신(逆臣)은 간혹 있었으나, 오늘과 같이 그 근거(根據)가 매우 번성한 적은 없었다. 생각하니, 한심하다. 그러나, 그 흉계가 미수에 그쳤으니, 어찌 하늘이 그러함이 아니겠느냐?”
하고, “이어서 명하기를, 술자리를 마련하라”.
하고, 나인(內人)을 불러내어 풍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임금이 송현수(宋玹壽)1012) 에게 술을 부어 올리게 하고 그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근일에 경의 마음의 움직임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 모두 경이 참여하여 들었으리라고 의심하였으나, 내 굳게 고집하여 듣지 아니한 것은 경이 나의 옛 친구인 까닭이다.
하니, 송현수가 머리를 조아려서 사례하였다.
그러나 세조의 사위 윤사로 세종대왕의 형 양영대군, 대사헌의 김연지 김종순등이 끈질기게 처형하자고 하여 아래와 같이 재촉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김연지(金連枝)·좌사간(左司諫) 김종순(金從舜) 등이
“송현수(宋玹壽)의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의 벌(罰)은 죄에 합당하지 않으니, 청컨대 법대로 처치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