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백의한사 전명숙2
도심안
2023. 3. 15. 04:48
2. 스스로 모래밭을 고향인 양 마음껏 노닐 적에
흰 날개와 가는 다리로 맑은 가을날 홀로 섰네 쓸쓸히 내리는 찬 비는 꿈결 같은데 때때로 고기 잡는 이 돌아간 후 언덕에 오르네 허다한 수석들은 낯설지 아니하고 얼마나 많은 풍상을 격었는지 머리는 이제 모두 희었도다 마시고 쪼는 것이 비록 번거로우나 분수를 아니 강호의 고기떼들아 너무 근심하지 말아라. 전봉준이 열 세 살 적에 백구(白鷗)를 두고 지은 시이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고고한 기상과 절도를 이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손화중의 집을 가끔씩 드나드는 도인들 중에서도 유독 키가 작고 샛별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이러한 외모는 그의 기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위와 같은 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글줄이나 하는 선비였기 때문이다. 전봉준의 아버지는 천안 전씨, 이름은 형호로 고부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적어도 평민 이하의 신분이 아니었지만, 그의 집은 무척 가난하였다. 그가 순창군 피노리에서 잡혀왔을 적에도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고는 논 세 마지기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농사를 짓지 않았고 또 농사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생계를 유지하려고 여러가지 일을 했다. 그는 공초에서 직업이 무었이냐고 물었더니 “선비로 업을 삼았다(以士爲業).”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그가 글을 읽으며 훈장 노릇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봉준은 또 약 장사를 했다. 그는 조소리의 자기 집에서 한 오 리 떨어진 두지리에 방을 얻었다. 여기에 단(壇)을 마련하고 주머니를 천정에 걸어 넣고 약을 주어 병을 고쳐주곤 했다. 특이한 것은 약을 먹일 때 주문을 외웠다는 점이다. 어쩌면 동학의 주문을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한편 그는 지술에도 밝아 풍수쟁이 노릇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생계를 근근히 꾸려 나갔지만, 여전히 생활은 어려웠다. 일찍이 지사(地師)를 맞아서 장지를 골랐는데 전봉준이 말하기를, “크게 성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망해서 후손이 끊어지길 바란다.” 지사가 이상하게 생각하기에 봉준이 탄식하며, “오래 남의 밑에서 살았으니, 구차하게 자손을 잇느니보다 자손이 끊어지는 것이 더 흔쾌할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전봉준이 유명한 인물이라면 흔히 있기 쉬운 헐뜯음의 말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그가 훈장 노릇을 하며 지낼 때에 고을 사람들과 별로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다만 고을에 기쁜 일 슬픈 일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축하와 조의를 표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봉준을 심상치 않게 보고 존경했다. 또 1894년 이후 농민군 지도자로 있을 때에도 사람들을 폭넓은 아량으로 포용했다. 더하여 그를 헐뜯을 수 없는 까닭에는 그의 죽음이 너무나도 깨끗한 데에도 있다. 전봉준 부대는, 재봉기에 실패하고 1894년 11월 29일경에 태인 싸움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해산되었다. 이때에 봉준은 중앙의 동정을 살피러 상인의 복장을 하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에, 옛 동지 김경천의 집에 잠시 들렀는데 그만 김경천이 밀고해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에 일본군은 전봉준을 끌어들여 조선 침략의 하수인으로 써먹으려고 했다. 그래서 한 때 전봉준의 군사(軍師)였던 다케다가 보낸 장문의 회유 편지에도 굴하지 않고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전봉준이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동학을 몹시 좋아했다.”고 했고, “동학에 든 지도 수 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난한 글쟁이였던 그가 동학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을까? 그는 손화중의 소개로 입도했다고 한다. 이때는 최시형이 전주 등지에 와서 마당 포교를 벌이던 때였고, 당시 손화중이 무장(茂長)의 접주였다. 동학의 마당 포교가 있는 날에는 전라도 각 고을에서 짚신 다섯 켤레와 쌀 서너 되를 차고 새벽에 나서서 백 리 길을 달려 아침에 당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무로 임시단을 높이 쌓아놓고 한 바탕 꽹과리와 징, 또는 북을 울려 흥을 돋구면 주위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러면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시켰다. 큰 솥을 걸어 넣고 각자 가져온 쌀을 부어 밥을 짓는다. 각자가 두르고 온 머리 수건을 풀면 거기에 밥을 한 주걱 퍼놓는다. 밥을 받은 사람은 가져온 양념 소금과 함께 핥아먹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전봉준은 동학에 입도했을 것이다. ■ 고부민란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해 왔을 때도 온갖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는 여러 번 고을 원을 지냈는데 흉악하게 훑어 먹는 것이 습성이 되어 있었다. 계사년(1893년) 호남의 우도(右道)가 가물어서 흉년이 들어 징세를 할 수가 없었다. 고부 땅은 산과 바다가 서로 섞여 있는 데 북쪽은 농사를 아주 버렸고 남쪽은 곡식을 조금 거두어 들였다. 조병갑이 이재(罹災)를 전라 감영에 보고하여 북쪽 네 면(面)의 토지 결세(結稅)를 감해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라감영에서 이재의 몫을 감해주지 않는다고 떠벌리며 곧 북쪽의 결세를 남쪽에 씌운 공을 뽐내면서 백성들에게 결세를 탕감해준 대가로 수전(水田) 1경마다 벼 1백두를 거두어들였도다. 실로 국가에서 정해준 세율의 세배나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 예일뿐 그의 만행은 수도 없이 많았다. 처음에 전봉준은 고부인들의 등소를 주도하였으나 오히려 관정(官庭)에서 몽둥이 찜질만 받고 쫓겨났다. 그후에 각 마을의 집강들이 모여 1894년 1월 10일로 봉기를 결의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체포한다. 둘째,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한다. 셋째, 군수에게 빌붙어 인민을 침어한 탐관오리를 징벌한다. 넷째,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향한다. 전봉준은 고부의인 수천명을 모아 조병갑의 학정을 낱낱이 들고 봉기하여 “제폭구민 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자 한동안 숙원했던 원민들이 함성을 질렀다. 어쨌든 그들은 미리 예동 김진사 집에서 만들어 두었던 칼과 창을 들기도 했고, 급작스레 깍은 죽창을 들기도 했는데 죽창이 없는 사람들은 행진하는 중에 군데군데 널려 있는 주위의 대나무를 잘라 죽창을 만들어 가졌다. 전봉준이 직접 이끄는 부대는 영원면 운학동 마을 뒷산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잠시 대오를 쉬게 하면서 관의 동정을 엿보기도 했다. 아무튼 이들은 거의 같은 시각에 고부의 성 안으로 물밀 듯 들어갔다. 군중의 합성은 고부의 새벽 공기를 찢었다. 그러나 조병갑은 영원면의 부호 조모의 연통으로 미리 달아나고 없었다. 군중들은 관아로 들어가 무기고를 부수어 무기를 꺼내고 벼슬아치 몇 명을 잡아 목을 베고 옥사를 헐어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곡식 창고를 헐어 빈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전봉준은 고부에서 봉기한 지 약 보름 만에 백산에서 군을 일단 해산시켰다. 왜냐하면 이 지방의 많은 세력을 거느린 손화중 ∙ 김개남이 아직 호응하지 않고 있고 추운 겨울철이라 농민의 호응이 적으며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보릿고개를 앞두었음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관의 횡포가 다시 심해질 무렵 전봉준은 마침내 손화중 ∙ 김개남 등과 손을 잡게 되고 선전 포고문을 띄웠다. 그리하여 고부 ∙ 태인 ∙ 금구 ∙ 원평 ∙ 부안 등을 연속적으로 습격하였다. ■ 황토현 싸움 전명숙, 즉 전봉준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하여 봉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반해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체를 통틀어 전략자인 동시에 지휘자 역할을 했음은 쉽게 머리에 박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는 이미 고부민란 전에 김봉집이라는 가명을 쓴 금구 원평 집회의 중심 지도자였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이 크게 일어날 기미가 보이자 전라 감영에서는 각 읍의 포군(砲軍) 1천여 명과 보부상패 80여 명 및 백정 ∙ 기름 장수를 모아서 영병을 구성했다. 영병들이 양총을 쏘며 백산 쪽으로 달려들어 많은 동학농민군들은 도망쳤다. 다시 영병들이 도망가는 동학군을 쫓자 동학군은 맞서 싸우는 척 하다가 갑자기 패하여 대오를 두 길로 나누어 도망쳤다. 한 패는 대장기 고부 쪽 큰 길로, 다른 한 패는 부안 쪽 들판 작은 길로 도망치고 있었다. 영병들이 고부쪽 패를 따라가며 공격하니 동학군은 흩어졌다. 이어 부안 쪽 동학농민군들을 10리쯤 추적해가다 보니 동학군들은 황토현 중봉에 올라 진을 치고 있었다. 관군은 드디어 황토현과 5리쯤 떨어진 손소략 등에 진을 쳤다. 밤이 깊어지자 동학농민군이 습격할까 두려워서 진영 곳곳에 불을 환하게 밝혀 놓았다. 때마침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4월 7일(양력 5월11일) 새벽, 갑자기 포 소리가 나며 동학농민군은 남쪽을 제외한 세면을 포위해 쳐들어갔다. 영병 1천여 명과 보부상들은 엎어지고 자빠졌다. 영병들은 유일하게 트인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들판의 논물에 빠져 칼을 받아 죽기도 했다. 전날 부안으로 도망치던 농민군패가 돌아와 관군을 여지 없이 무너뜨린 까닭이었다. 당시 동학군은 양총 200여 자루와 칼 ∙ 죽창 따위의 무기밖에 없었는데 전봉준의 전술에 의해 잘 훈련된 관군을 모조리 섬멸 시키게 한 것이다. ■ 월평전투 이날 이미 초토사(招討使)로 임명된 홍계훈 부대가 군산에 상륙하여 전주에 입성하였다. 이들 부대는 수원 ∙ 용인 등지의 경군(京軍)과 뒤에 합류한 강화도를 지키던 심병(沁兵)을 주축으로 한 2천여 명의 부대는 조선에서 가장 정예로운 부대였다. 이러한 부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 것도 전봉준의 지략 덕분이었다. 홍계훈은 전주에 온 지 10여 일이 지난 4월 18일에 와서야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전봉준은 이미(남쪽의 각 고을을 접수하면서) 주력부대의 행방을 감추기 위해 농민군 수백 명씩 빠져나가게 했다. 홍계훈이 뒤를 쫓아다니면 전라도 남쪽 영광 깊숙히 들어갔으나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사잇길로 빠져나와 북상해서 장성에 이른 것이 4월 22일이었다. 이들은 장성 월평 장터 뒤의 삼봉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영광에서 홍계훈이 선발대로 보낸 이학승의 경군 270여 명이 이르러 월평 장터에서 점심을 먹던 농민군에게 대포를 쏘아댔다. 삼봉의 농민군 쪽에서 갑자기 큰 대나무로 만든 둥근 장태 수십개가 굴러 내려왔다. 장태 바깥에는 칼을 고슴도치처럼 꽂았고 아래에 바퀴 두개를 달아 굴렸다. 관군은 급히 총과 활을 쏘았지만, 탄환과 화살은 모두 장태에 박혀버렸다. 농민군은 장태 뒤에 몸을 숨기고 따라내려오면서 포를 쏘고, 삼면을 포위해 돌격하였다. 관군이 패했음은 말할 여지도 없다. 홍계훈이 뒤에 쳐져 뒷북만 치고 있을 때 농민군은 드디어 전주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전봉준이 학정에 분개하여 동학도를 모아 의병을 일으킨 후 더욱 세태는 훙동하여져 그들의 분노가 충천하여 그 기세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도다. 이때에 상제께서 그 동학군들의 전도가 불리함을 알으시고 여름 어느 날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月黑雁飛高單于夜遁逃) 욕장경기축 대설만궁도(欲將輕騎逐大雪滿弓刀)」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외워 주시며 동학군이 눈이 내릴 시기에 이르러 실패할 것을 밝히시고 여러 사람에게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셨느니라. 과연 이해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멸되고 상제의 말씀을 좇은 사람은 화를 면하였도다.(『전경』, 행록 1장 23절) ■ 재봉기와 동학 혁명의 실패 동학군은 전주성을 차지한 뒤에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오자 전주화약을 맺고 집강소를 통한 농민자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재봉기를 결심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계속 봉기하는 모습을 보았고, 또 북접과의 교섭도 순조로왔다. 더 이상 자중해봐야 일본군은 물러가지 않을 것이 확실했고, 홍선대원군이 재등장하여 척화정책을 펴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또 추수절이기에 양곡 확보에도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전봉준은 원래 공주성을 함략해 북상의 전진 기지로 삼으려고 남북접의 연합군으로 하여금 공주를 사면으로 포위해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부대는 공주성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인 ∙ 우금치 등의 전략적 요지에 먼저 들어와 있었다. 그리하여 전봉준은 남은 몇백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주 ∙ 원평 등지로 밀려내려 왔으며, 11월 27일 경 태인 싸움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해산되었다. 그후에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었다. 4. 【1855 ~ 1895, 철종 6 ~ 고종 32】 조선말기 동학운동 지도자. 호는 해몽(海夢). 본관은 천안(天安). 고부군(古阜郡; 지금의 井邑市) 향교의 장의(掌議)였던 아버지가 학정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사회개혁의 뜻을 품고 1890년(고종 27) 무렵 동학에 입교, 고부접주(古阜接主)가 되었다. 92년 조병갑(趙秉甲)이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탐학(貪虐)을 일삼고 만석보(萬石洑)의 개수로 수세를 터무니 없이 징수하므로 농민대표로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94년 1월 농민과 동학교도 1000여 명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습격,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농민들에게 돌려주고 부패한 이속(吏屬)들을 감금하였다. 정부에서는 조병갑을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보내어 선처를 확약하였으나, 이용태가 이를 지키지 않자 전봉준은 재봉기하여 사회제도를 전면개혁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사상을 펼 것을 결심하였다. 94년 3월, 백산(白山)에 1만 명이 넘는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자 동도대장(東徒大將)이 되어, 척왜(斥倭) ∙ 척양(斥洋)과 부패한 지배계급의 타파 등 4대강령을 내세우며 각지에 호소문을 보내어 농민들의 호응을 구함으로써 민란은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해 4월, 동학농민군은 부안(扶安) ∙ 정읍 ∙ 고창(高敞) ∙ 무장(茂長) 등지를 차례로 장악하고 이어 전주(全州)를 점령하였다. 이렇게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막강해지자 정부는 혁명운동의 진압을 위해 청(淸)나라에 원병을 요청, 청국군이 인천(仁川)에 상륙하고 이에 따라 일본군도 들어와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졌다. 사태가 뜻하지 않은 쪽으로 기울자 동학농민군은 탐관오리의 응징, 시정(施政)의 개혁, 노비의 해방 등 폐정개혁 12개안을 정부에 제의, 정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5월 7일 전주화약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청 ∙ 일 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점차 한국에 대한 침략의도를 드러내자 9월 중순에 항일구국의 가치 아래 동학농민군은 충청남도 논산(論山)에 집결, 그의 휘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손병희(孫秉熙) 휘하의 북접농민군 10만여 명이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 아래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어 일본군 및 정부군과 이천(利川) ∙ 목천(木川) ∙ 공주(公州) 등지에서 혈전을 벌였으나, 우수한 무기와 조직적 훈련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번번이 패배, 11월의 우금치(牛金峙) 전투에서 대패한 뒤 금구(金溝)전투를 끝으로 진압되었다. 이에 그는 정읍으로 피신하였으나 순창(淳昌)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사형에 처해졌다. (『세계대백과 사전』, 고정일, 동서문화, 2002, p. 13755) 5.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의 총대장으로 활약한 혁명가. 전명숙은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동시에 한국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다. 비록 그의 변혁 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좌절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영도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밀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 • 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출신 및 배경>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서 전창혁(全彰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바 있는 향반(鄕班)이었던 점으로 보아서 몰락양반, 즉 잔반(殘班) 출신으로 보인다. 아버지도 의협심이 강하여 군수의 학정에 항거, 민소(民訴)를 제기했다가 구속되어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장독(杖毒)으로 죽었다고 한다. 5세 때에 한문 공부를 시작하여 13세 때에는 <백구시(白驅詩)> 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그의 20, 30대에 조선사회는 극히 어수선했다. 개항을 계기로 하여 외세는 물밀듯이 밀려들어왔고, 봉건 말기의 위기적 상황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명숙 역시 나라의 장래에 대해 고민했으며, 그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1888년(고종 25) 무렵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 1890년 무렵에는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그는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1892년 무렵에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고부지방의 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1893년 2월 무렵 서울로 올라가 대원군을 방문하여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명숙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금구취당과 고부민란> 서울에서 내려온 전명숙은 동지를 규합했다. 그 결과 1893년 3월 무렵 전라도 금수현 수류면 원평리에서 한 무리의 동학 농민세력을 형성 • 영도하게 되었다. <동도문변(東徒問辨)>에 의하면 그 세력은 1만여 명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민란의 주체로서,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 사상을 일단 수용하여 실천적인 사회사상으로 승화시킨 농민적 반대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들은 1893년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던 동학의 보은취회에 참가하여 그 집회를 반봉건 • 반침략의 정치운동으로 기울게 하려고, 3월말경에 보은으로 향했으나, 보은취회가 4월 3일 해산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명숙은 1893년 11월초 고부 고을 농민 40여 명과 함께 군수인 조병갑(趙秉甲)에게 나아가 그의 학정을 시행할 것을 등소(等訴)했으나, 전명숙은 일시 구속되고 등소는 거부되었다. 전명숙은 1893년 11월 하순에 최경선(崔景善) • 김도삼(金道三) 등 20여 명과 함께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고부성의 점령, 조병갑의 처형, 탐관오리의 처단, 전주성의 점령, 서울로의 진격 등을 내용으로 하는 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때마침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이동 발령되어 이 계획은 보류되었다. 1893년 12월 전명숙은 고부 농민 60여 명과 함께 전주의 감영에 가서 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고부의 폐정을 시정해달라고 등소했으나,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데 익산군수로 이동 발령되었던 조병갑이 1894년 1월 9일에 고부군수로 잉임(仍任)되었고, 2일 뒤인 1월 11일에 고부민란이 일어났다. 이 민란은 앞의 사발통문 서명자 20명중 전명숙 • 최경선 • 김도삼 • 정익서(鄭益西)등의 사전계획과 준비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전명숙 등이 지도한 민란 중민(衆民)은 조병갑의 일련의 악정을 시정하고 읍내에 진을 치고 있다가 1월 17일에는 마항(馬項) 장터로, 2월 25일에는 백산(白山)으로 진을 옮겼다. 한편 조정에는 고부민란 발생의 책임을 물어 조병갑을 체포 • 국문하라는 처벌을 내리고, 용안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고부군안핵사로 임명햇다. 박원명은 부임 후 회유와 설득에 주력하여 난민은 대부분 해산했는데, 3월 2일 역졸(驛卒) 800여 명을 데리고 고부에 들이닥친 이용태는 갖은 야만적인 노략질을 자행하여 난민을 완전히 해산시켰다. 고부민란은 조병갑의 가렴주구로 인해 소생산자로서의 생활을 위협받게 된 소농 • 빈농, 농민적인 장시의 확보와 화폐경제의 발전이 흐려지자 위기를 느낀 소상품생산자적 농민이 자발적으로 지방행정을 시정하기 위하여 봉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부민란의 지도자인 전명숙에게는 보다 확대된 차원에서 문제가 의식되고 있었다. 전명숙은 일신상으로는 조병갑으로부터 별 피해가 없었지만, ‘백성’과 ‘세상’이라는 보다 넓은 지평(地平) 위에서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제1차 농민경쟁> 고부민란은 해산되었으나 이용태의 야만적 진압으로 전라도 일대의 농민들과 동학 신도들이 크게 분개하자, 전명숙은 국면 전환을 꾀했다. 전명숙은 2월 29일경 금구 원평에서 약 3,000여 명의 농민군을 다시 결집하여 3월 11일경 금구 원평을 출발, 부안을 거쳐 무장으로 나아가 3월 20일 손화중부대 • 최경선부대와 합세하여 무장에서 재봉기했다. 이것이 제1차 농민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날 탐학 수령을 처벌함으로써 보국안민하겠다는 포고문을 전라도 일대에 배포하고 일제히 봉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하여 주로 전라도 서해안 지역의 10여 읍에서 많은 농민군이 봉기했다. 전명숙부대는 3월 23일 다시 고부를 점령했고, 25일에는 고창 • 흥덕 • 부안 • 정읍 • 태인 • 금구 •김제 등지에서 몰려온 약 5,000여명 의 농민군과 함께 백산에서 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농민군은 제세안민(濟世安民) • 축멸왜이(逐滅倭夷) • 진멸권귀(盡滅權貴) 등의 4대명의 (四大名義)를 발표하고, 대장 전명숙, 총관령 손화중 • 김개남(金開南), 총참모 김덕명(金德明) • 오시영(吳時泳), 영솔장 최경선의 진용을 짰다. 그러나 농민군 전체가 단일한 지휘체계에 의하여 움직여진 것은 아니었다. 몇 개의 지역적 농민군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개별 농민군부대로 나누어져서 각 부대장의 지휘에 따라 행동했다. 따라서 전명숙은 형식상으로는 농민군 전체의 총대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개별 농민군부대의 지도자였다. 3월 26일부터 개별 농민군부대는 전라도 각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다. 그 목적은 탐학한 수령을 징벌하고 각 고을의 폐정을 시정하는 것이었다. 전명숙부대는 4월 7일 고부의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했고, 4월 23일 장성의 월평촌에서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경군(京軍)을 격파했다. 이어 정읍을 거쳐 4월 27일에는 전주에 입성했다. 전주성 함락에 놀란 조정에서는 4월 28일 청(淸)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고, 이에 청병 3,000여 명이 5월 5일 아산에 상륙했다. 한편 어떻게 해서라도 청과 일전을 벌여 청을 압도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일본은 5월 6일 약 4,000여 명의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갑자기 조선이 국제분쟁의 무대가 되자 조정과 농민군은 화전(和戰)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교섭 끝에 5월 8일 27개 조목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 합의하고 휴전했다. 이 폐정개혁안은 보편적이고도 제도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폐정을 시정하려는 것으로서,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민씨척족정권의 퇴진과 대원군정권의 성립을 요구했고, 봉건 말기적 현상을 시정하려는 반봉건적의식, 외국상인의 침투로 말미암은 폐해를 시정하려는 반외세 • 반침략 의식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집강소의 개혁정치>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물러나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무장과 조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전명숙은 5월 11일경 ~ 18일 순변사 이원회(李元會)와 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원정(原情)을 제출하면서 폐경개혁의 실시를 촉구하고, 개혁이 실시되지 않으면 농민군의 무장과 조직을 풀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의 민씨척족정권은 그 정치적 기반이 극도로 취약해져서 폐정개혁을 단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이에 5월 중순경부터 농민군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농민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김학진은 농민군의 집강소를 사실상 인정하고 기존의 감사 – 수령의 행정질서와의 타협과 공존을 제의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집강소질서의 통일과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6월 15일경에 남원에서 농민군대회를 열고, 각 고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군 중에서 집강을 뽑아 수령의 일을 행하도록 하령했다. 이에 나주를 제외한 전라도의 52개 고을에 집강소가 설치되고 집강소질서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6월말 일본이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성환에서 청군을 격파한 후 공주로 남하할 태세를 보이자 김학진은 전명숙과 김개남에게 편지를 보내 관과 농민군이 타협하고, 함께 민족적 위기를 타개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전명숙은 7월 6일 전라도의 군정을 자신이 맡고 집강소질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대타협을 성립시켰다. 집강소는 형식상 김학진의 예하로 되었지만, 사실상 집강소가 행정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집강소질서가 설분(雪憤) 위주에서 벗어나서 폐정의 제도적 개혁 위주로 바뀌었다. 그결과 7월 하순에는 폐정개혁건 12개조가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봉건적 신분제도는 전면적으로 철폐되었고, 봉건적 토지제도는 생산력 발전을 주안점으로 경작능력에 따른 경작 균분(均分) 제도에 의하여 크게 개혁되었으며, 반일 • 반침략의 자세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집강소 개혁정치는 지방자치의 차원에 제한되어 있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의 권력문제에까지 확대되지는 못했다. <제2차 농민전쟁> 조선의 보호국화를 추진했던 일본은 8월 17일의 평양성전투에서 청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뒤, 개화파정권의 요청을 받아들여 농민군 토벌에 발벗고 나섰다. 전명숙은 9월 14일 삼례에서 각지에 반일기의를 호소하고, 항일전쟁을 위한 군비를 준비하여 10월 14일 삼례를 출발, 논산에 둔거(屯據)하면서 농민군을 널리 모집하여 2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전명숙은 여러 차례 경군(京軍)과 충청감영군 그리고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에게 항일을 위한 민족연합전선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10월 24일 공주로 진격하여 이후 11월 10일까지 약 2,500명의 정부군 및 약 200명의 일본군과 2차례에 걸쳐 처절한 공주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제2차 농민전쟁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 전명숙이 목적했던 것은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친일적인 개화파정권을 타도하며 나아가 ‘몇 사람의 명망가의 합의법’에 의한 권력기구를 수립함으로써 전국의 차원에서 폐정을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전명숙은 12월 2일 순창군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법무아문권설재판소에서 5차에 걸쳐 재판을 받은 후, 3월 29일 사형을 언도 받았고, 그날 손화중 • 최경선 • 김덕명 • 성두한(成斗漢)과 함께 처형당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장호상, 한국브리태니커회사, 2001) 6.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지도자. 초명 명숙(明叔), 별명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고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是正)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케 했으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윽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를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전주를 향해 진격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계속 정읍•고창•무장 등을 장악,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인천에 상륙하고 동시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군(日軍)도 입국하여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의 응징, 노비의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시정개혁(施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일본이 청일전쟁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이에 격분, 재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때는 중부•남부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 피신,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당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네이버 백과사전) ◈ 『전봉준 평전』, 신복룡, (주) 지식산업사, 1998, pp.315 ~ 354 【전명숙 공초(供草)】 : 체포 후 다섯 차례에 진행된 전명숙에 대한 심문 기록. 문 : 이름은 무엇인가? 답 : 전봉준이다. 문 : 나이는 몇 살인가? 답 : 마흔한 살이다. 문 : 어디에 사는가? 답 : 태인군 산외면 동곡리에 산다. 문 : 직업은 무엇인가? 답 : 선비로 업을 살고 있다. 문 : 너는 그 무렵에 수탈의 피해를 본 일이 없는가? 답 : 없다. 문 : 그 일대 백성들이 모두 수탈의 피해를 입었는데 어찌 너만 홀로 피해가 없었는가? 답 : 나는 선비의 몸으로 전답이라고는 3마지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문 : 식구는 몇 명인가? 답 : 모두 6명이다. 문 : 일대의 백성들이 모두 수탈의 피해를 입었는데 너만 홀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 은 지극히 의심스러운 일이다. 답 : 나는 아침밥 저녁죽으로 사는 터에 어찌 수탈당할 것이 있겠는가? 문 : 너는 피해가 없으면서 어찌하여 난을 일으켰는가? 답 : 일신의 피해를 면하려고 난을 일으키는 것을 어찌 남아의 할 일이라 하겠는가? 백성들 의 원한이 맺혀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하여 학정을 없애고자 했을 뿐이다. 문 : 난을 일으킬 때 어째서 네가 주모자가 되었는가? 답 : 백성들이 모두 나를 추대하여 주모자로 삼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말을 따랐을 뿐이다. 문 : 백성들이 너를 주모자로 뽑을 때 너의 집을 찾아왔던가? 답 : 백성들 수천 명이 나의 집 근처에 모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문 : 수천 명의 백성들이 어찌하여 너를 주모자로 추대했는가? 답 : 백성들이 비록 수천 명이었다고는 하나 대개가 어리석은 농민들이었고, 나는 다소나마 글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 : 너는 고부에 살 때 동학을 가르친 바가 없는가? 답 : 나는 훈장이어서 어린 아이들과는 관계했으나 동학을 가르친 바는 없다. 문 : 고부에서 거병할 당시 동학교도가 많았는가, 원민이 많았는가? 답 : 거병할 당시에 동학교도와 원민이 비록 함께 어울렸다고는 하나 동학교도는 적었고 원 민이 많았다. 문 : 다시 군대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답 : 그 후 듣자니 일본이 개화라 칭하면서 당초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백성들에게 이를 전 파했고, 또 격서도 없이 군대를 도성에 끌어들여 밤중에 왕궁을 격파하여 왕을 놀라게 했다 하므로 초야에 묻힌 사민 등 충군애국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분함을 견디지 모 하여 규합해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1차로 그 사실을 물어보고자 했다. 문 : 너는 고부 군수로부터 피해를 입은 바가 많지 않았는데 무슨 뜻으로 거병했는가? 답 : 세상살이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 고로 개연히 한번 세상을 건져볼 뜻이 있었다. 문 : 소위 동학이란 어떤 주의이며 어떤 도학인가? 답 : 마음을 지켜 충효를 근본으로 삼음으로써 보국안민코자 하는 것이다. 문 : 너 역시 동학을 몹시 좋아했는가? 답 : 동학은 마음을 지키고 하늘을 공경하는 도이므로 나도 몹시 좋아한다. 문 : 동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답 : 동학이 시작된 것은 30년 전의 일이다. 문 : 누가 시작했는가? 답 : 경주에 사는 최제우이다. 문 : 재차 거병한 것은 일본군이 대궐을 침범한 탓이라고 말했는데, 재차 기병한 후에는 일 본군에 대하여 어떤 일을 하려 했는가? 답 : 대궐을 침범한 연유를 따지려 했다. 문 : 그렇다면 일본군 과 서울에 있는 각 외국인을 모두 몰아내고자 했는가? 답 : 그렇지는 않다. 각 외국인은 단지 통상만을 할 뿐이지만 일본인 들은 경성에 군대를 머물게 했으므로 우리의 영토를 침략하려는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 김석천 곡 , 구전민요, 느린 중모리 새 야 새 야 1 새야새 야ㅡㅡ/파란새 야ㅡㅡ// 녹두밭 에ㅡㅡ/앉지마 라ㅡㅡ 녹두꽃 이ㅡㅡ/떨어지 면ㅡㅡ// 청포장 수ㅡㅡ/ 울고간 다ㅡㅡ 2 새야새야 파랑새야 깝죽깝죽 잘논다만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맞는다 3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아버지의 넋새보오 엄마죽은 넋새로다 4 새야새야 파랑새야 너는어이 찾아왔니 솔잎대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찾아왔지 5 강화바 다ㅡㅡ/너른바 다ㅡㅡ// 병자년 에ㅡㅡ/ 울던바 다ㅡㅡ 오랑캐 에ㅡㅡ/밟힌옥 토ㅡㅡ// 원통해 서ㅡㅡ/ 울던바 다ㅡㅡ 6 세상천 지ㅡㅡ/ 사람들 아ㅡㅡ// 하늘같 은ㅡㅡ/ 목숨인 가ㅡㅡ 녹두밭 에ㅡㅡ/ 주림더 미ㅡㅡ// 터럭같 은ㅡㅡ/ 목숨일 세ㅡㅡ 7 갈아보 세ㅡㅡ/ 갈아보 세ㅡㅡ// 온세상 을ㅡㅡ/ 갈아보 세ㅡㅡ 오백년 에ㅡㅡ/ 쌓인원 한ㅡㅡ// 괭이되 고ㅡㅡ/ 죽창되 고ㅡㅡ 8 이내육 신ㅡㅡ/ 썩어진 들ㅡㅡ// 도적놈 의ㅡㅡ/ 종이되 랴ㅡㅡ 만세만 세ㅡㅡ/ 만만세 가ㅡㅡ// 온천지 에ㅡㅡ/ 터지도 다ㅡㅡ 9 북간도 라ㅡㅡ/ 타향살 이ㅡㅡ// 서럽기 도ㅡㅡ/ 하건마 는ㅡㅡ 삭ㅡ풍 에ㅡㅡ/ 칼을갈 아ㅡㅡ// 망국왜 적ㅡㅡ/ 도륙치 세ㅡㅡ 10 해야해 야ㅡㅡ/ 빨간해 야ㅡㅡ// 이천만 의ㅡㅡ/ 핏덩이 야ㅡㅡ 일장기 에ㅡㅡ/ 노닐다 가ㅡㅡ// 피눈물 을ㅡㅡ/ 쏟을지 어ㅡㅡ 11 새야새 야ㅡㅡ/ 파랑새 야ㅡㅡ// 철조망 에ㅡㅡ/ 앉을새 야ㅡㅡ 누리누 리ㅡㅡ/ 녹두밭 이ㅡㅡ// 쑥대밭 이ㅡㅡ/ 되었구 나ㅡㅡ 12 새야새 야ㅡㅡ/ 파랑새 야ㅡㅡ// 죽지꺾 여ㅡㅡ/ 누운새 야ㅡㅡ 녹두꽃 이ㅡㅡ/ 다지도 록ㅡㅡ// 녹두밭 에ㅡㅡ/ 누운새 야ㅡㅡ 13 해야해 야ㅡㅡ/ 빨간해 야ㅡㅡ// 이천만 의ㅡㅡ/ 핏덩이 야ㅡㅡ 일장기 에ㅡㅡ/ 노닐다 가ㅡㅡ// 피눈물 을ㅡㅡ/ 쏟을지 어ㅡㅡ <연구위원 : 이승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