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도동서원 답사
도심안
2022. 4. 20. 23:59
도동서원 답사
뜨겁고 무덥던 7월 끝자락에 낙동강변 도동서원을 찿았다.
영남학파는 영천의 포은 정몽주
부터 시작해 구미의 야은 길재로
맥을 이어간다.
길재와 태종, 정종은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한 도반이었고 밀양의
김숙자로 이어져 아들 김종직, 점필재의 제자가 김굉필이고 그의 밑에서 수학한 일파가 조광조다.
서원에 모셔져 있는 김굉필 인물을
보면 점필재 김종직이 그의 스승이
고, 벗으로는 일두 정여창과 남효온이 있으며, 제자가 정암 조광조, 김일손이 있으니 한마디로
우리나라 도학의 대종이다.
점필재는 뜻도 모르고 글을 읽는
사람이고, 일두는 나는 한마리 좀
벌래처럼 미약한 사람이다.
수현은 머리 수, 어질현. 기둥에
흰 띠를 둘렀다.
전국 234개 향교 중 유일하게 수현
을 한 곳은 도동서원뿐이다.
광해군때 문묘에서 제향할 유학자
로 동국오현이 결정될 때 한훤당은
오현 중에서도 수현이 되어, 그 순
서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의 순이였다.
김굉필은 본관이 황해도 서흥이지
만, 예조참의를 지낸 증조부가 현
풍 곽씨와 결혼해 처가인 현풍으로
내려오면서부터 현풍인이 됐다.
할아버지가 개국공신 조반의 사위
가 되어 서울 정동에 살게 되어 정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재력을 갖춘
중소지주았다.
19살에 순천박씨와 결혼해 합천군
야로현에 있는 처갓집 개울 거너편
에 서재를 짓고 한훤당이라는 당호
로 불리워졌다.
한훤당은 함양군수로 있던 점필재
를 찿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김종직의 무오사화때 제자라는 이
유만으로 곤장80대에 유배형을 받
고 평안북도 희천으로 귀양갔다.
그때 나이가 45세였다.
여기서 운명적으로 조광조를 만난
다. 조광조가 17살로 찰방인 아버
지를 따라 평안도 어천에 가 있었는
데, 인근에 유배왔다는 것을 듣고
찿아가 사제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47세 되던 해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되어 북문 밖에서 지낼때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무오사화
관련자들에게 죄를 추가하여 사약
을 받는다.
7년 귀양살이 끝에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니 향년 51세였다.
그의 저술은 문헌으로 알 길이 없다. 깡그리 사라졌다.
후환이 두려워 후손들이 모두 불살라 버렸기 때문이다.
호남 명문가 대부분이 김굉필 제자
들이다. 순천에 유배가 5년 살면서
하서 김인후와 조광조를 길러냈다.
호남 최초의 서원 '옥천서원'에
모셔져 있다.
뜨겁고 무덥던 7월 끝자락에 낙동강변 도동서원을 찿았다.
영남학파는 영천의 포은 정몽주
부터 시작해 구미의 야은 길재로
맥을 이어간다.
길재와 태종, 정종은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한 도반이었고 밀양의
김숙자로 이어져 아들 김종직, 점필재의 제자가 김굉필이고 그의 밑에서 수학한 일파가 조광조다.
서원에 모셔져 있는 김굉필 인물을
보면 점필재 김종직이 그의 스승이
고, 벗으로는 일두 정여창과 남효온이 있으며, 제자가 정암 조광조, 김일손이 있으니 한마디로
우리나라 도학의 대종이다.
점필재는 뜻도 모르고 글을 읽는
사람이고, 일두는 나는 한마리 좀
벌래처럼 미약한 사람이다.
수현은 머리 수, 어질현. 기둥에
흰 띠를 둘렀다.
전국 234개 향교 중 유일하게 수현
을 한 곳은 도동서원뿐이다.
광해군때 문묘에서 제향할 유학자
로 동국오현이 결정될 때 한훤당은
오현 중에서도 수현이 되어, 그 순
서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의 순이였다.
김굉필은 본관이 황해도 서흥이지
만, 예조참의를 지낸 증조부가 현
풍 곽씨와 결혼해 처가인 현풍으로
내려오면서부터 현풍인이 됐다.
할아버지가 개국공신 조반의 사위
가 되어 서울 정동에 살게 되어 정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재력을 갖춘
중소지주았다.
19살에 순천박씨와 결혼해 합천군
야로현에 있는 처갓집 개울 거너편
에 서재를 짓고 한훤당이라는 당호
로 불리워졌다.
한훤당은 함양군수로 있던 점필재
를 찿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김종직의 무오사화때 제자라는 이
유만으로 곤장80대에 유배형을 받
고 평안북도 희천으로 귀양갔다.
그때 나이가 45세였다.
여기서 운명적으로 조광조를 만난
다. 조광조가 17살로 찰방인 아버
지를 따라 평안도 어천에 가 있었는
데, 인근에 유배왔다는 것을 듣고
찿아가 사제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47세 되던 해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되어 북문 밖에서 지낼때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무오사화
관련자들에게 죄를 추가하여 사약
을 받는다.
7년 귀양살이 끝에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니 향년 51세였다.
그의 저술은 문헌으로 알 길이 없다. 깡그리 사라졌다.
후환이 두려워 후손들이 모두 불살라 버렸기 때문이다.
호남 명문가 대부분이 김굉필 제자
들이다. 순천에 유배가 5년 살면서
하서 김인후와 조광조를 길러냈다.
호남 최초의 서원 '옥천서원'에
모셔져 있다.


















도동서원-김굉필과 한강 정구를 모시고 있다. 서원 중 유일하게 수현 띠를 두르고 있다. 그러니 하마비가 없다.

다람재 언덕에서 내려다 보면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과 유서깊은 도동서원이 한눈에 그림 처럼 들어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