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내성·춘양·재산 양반가..."안동 士族들이 터 잡은 길지…'혼반 1순위' 명문가 품격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봉화 내성·춘양·재산 양반가..."안동 士族들이 터 잡은 길지…'혼반 1순위' 명문가 품격 느껴져"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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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11-12 | 발행일 2021-11-12 제35면 | 수정 2021-11-1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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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봉화의 내성·춘양·재산은 안동의 속현으로 안동 사족들이 터를 잡고 문호를 열었다. 영남 명문가로 성장했고 혼반 1순위 집안으로 위세가 대단했다. 전국 600여개 정자 중 103개가 봉화에 있다. 수려한 산세에 역사의 옷을 입힌 곳, 그곳이 봉화다. 충재 권벌의 종가 닭실마을 청암정. 〈봉화군청 제공〉 |
조선 시대 봉화의 내성·춘양·재산은 안동의 속현으로 안동 사족들이 터를 잡고 문호를 열었다. 영남 명문가로 성장했고 혼반 1순위 집안으로 위세가 대단했다. 지금은 그 흔한 고속도로도 통과하지 않는 한촌이지만 봉화를 가로지르는 36번 국도변에는 한때 찬란했던 반촌 고택들이 금가루처럼 빛나고 태백·소백 산록에는 선비 정자가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다. 전국 600여 정자 중 103개가 봉화에 있다. 수려한 산세에 역사의 옷을 입힌 곳, 그곳이 봉화다.
◆닭실마을
닭실은 조선 명종 때 우찬성을 지낸 충재 권벌이 문호를 연 마을이다. 안동권씨 오백년 세거지로 금닭이 학의 알을 품고 있는 형세라 '유곡(酉谷)'인데 우리말로 닭실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을 경주 양동, 안동 내앞·하회와 함께 삼남의 4대 길지라 했다.
충재는 회재 이언적과 여러 모로 비슷하다. 동시대에 같은 조정의 신료였고 충재가 13세 많으나 둘 다 실직이 종1품 찬성에 올랐고 증직 벼슬이 영의정이다.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충재는 평안도 삭주로, 회재는 강계로 유배돼 모두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연로한 충재는 이듬해 71세로 별세했고 회재는 7년 귀양살이하면서 수많은 저술을 남겨 대학자로 추앙되고 문묘에 배향됐다.
닭실에는 충재가 세운 청암정과 아들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사가 고즈넉하게 남아 있는데 조선 사대부의 미학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곳으로 봉화 정자의 시작점이다. 충재를 배향하는 삼계서원이 바로 이웃에 있는데 이곳에서 정조 말엽 제1차 영남 만인소 때 통문을 보내 영남 유림대회를 열었고 대원군이 안동의 병호시비를 충역(忠逆)으로 엄단하려 할 때 병파와 호파의 화해를 주도했다.
닭실마을
금닭이 학의 알을 품고 있는 형세
충재 권벌이 문호 연 손꼽히는 길지
을미년 안동의진 의병비 천냥 쾌척
청암정·석천정사, 조선 미학 느껴져
닭실의 위세를 말해 주는 이야기는 많다. 명성황후 시해로 일어난 을미의병에 안동 봉기가 가장 치열했다. 이때 안동의진 의병자금을 각 문중으로 할당했는데 닭실은 하회(풍산류씨), 무실(전주류씨)과 함께 천 냥을 냈고 닭실의 권세연이 의병장을 맡았다. 충재 손자 권래가 지은 춘양의 한수정은 은둔과 한사(寒士) 정자의 전범으로 보물이 됐고 5세손 권두경은 퇴계종택 사랑채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지었다.
동래정씨 영의정 정광필은 충재의 의(義)는 추상과 같아 죽음으로도 뺏을 수 없는 절의가 있다고 했고, 규암 송인수는 충재를 재상 중에서도 진정한 재상이라고 했다. 퇴계는 충재 행장을 지었는데 '충재와 내외종 간으로 오랫동안 이끌어주고 깨우쳐준 은덕을 입었고 조정에 계실 때 크게 빛나는 절개를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어 공의 충의와 풍절을 후세에 전할 군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칭송했다. 종가 옆에 위치한 충재유물관에는 권벌 종가 고문서, 유묵, 전적, 충재일기, 근사록 등 수백 점이 보관돼 있으며 5점이 보물 문화재다.
봉화 해저리에 있는 만회고택. 3·1운동 직후 심산 김창숙이 이곳 사랑채에서 독립운동 청원서인 파리장서를 만들었다. 〈봉화군청 제공〉 |
◆바래미마을
일제강점기 독립지사 14인을 배출한 봉화읍 해저리(海底)는 의성김씨 동성마을이다. 바다 밑이라는 바래미는 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 하상이 마을보다 높은 데에서 유래했다. 안동 내앞마을과 일족이지만 세계(世系)가 오래전에 갈라졌고 성주의 동강 김우옹과 같은 집안이다. 조선 중기 동강 김우옹과 개암 김우광 형제가 나란히 대과 급제해 벼슬살이를 마치고 동강은 성주로, 개암은 상주로 낙향하고 개암의 현손인 팔오헌 김성구가 숙종 때 대사성을 마치고 이곳에 문호를 열었다.
영남 선비의 중앙 진출이 어려웠던 조선 후기에 대과 14장, 소과 66장이라는 과거급제 인물을 배출했고 정조의 영남 인재 발탁 시 영남 인재로 가장 고위직에 올랐다. 이곳 김한동·김희주는 승정원 승지와 대사간을 지냈는데 정조의 치세가 좀 더 지속되었더라면 영남 판서·영남 정승이 되었을 인물이다. 정약용과 친교를 나누었고 채제공이 아꼈다.
바래미마을
내성천이 마을보다 높아 생긴 이름
독립운동 청원서 쓴 만회고택 유명
독립지사 14명 배출 '독립운동 성지'
전재산 임시정부 군자금 댄 인물도
바래미는 을미년 안동의진 거병비로 학봉의 검제마을, 그리고 임청각과 함께 오백 냥을 냈다. 영남 혼반 1순위 집안으로 개암종택·팔오헌종택·만회고택·남호구택·해와고택·김건영가옥이 문화재로 등록됐다.
바래미 독립운동에는 심산 김창숙과 관련이 있다. 심산 부친은 바래미 출신으로 일족인 성주의 동강 종가로 입양을 가서 심산을 낳았고 심산은 뜻을 같이하는 생가 일족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3·1운동 직후 심산이 주도해 만든 독립운동 청원서 파리장서는 이곳 만회고택 사랑채에서 만들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석판에는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바래미 출신 열네 분 지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안동의 내앞, 하계, 임청각, 부포, 무섬, 하회 등과 더불어 한마을에서 10명 이상 우국지사를 배출한 독립운동 성지 같은 곳이다. 전 재산을 상하이 임정의 군자금으로 낸 인물이 있고 두 차례 유림단 의거에 모두 적극 참여해 마을 전체가 일제 감시 대상이 됐다. 누군들 배움이 없고 뜻이 없었겠느냐만 나라 잃었던 시절에 내 한 몸 던진 선비의 기개는 갸륵하다. 그러기에 바래미는 자랑스러운 반촌이다.
오록마을 장암정. 오록은 '오동나무 숲'이라는 뜻으로 마을 뒤 봉황산과 의미가 연결돼 있다. 〈봉화군청 제공〉 |
◆오록마을
물야면 오록리 오록마을은 풍산김씨 동성마을이다. 서애 류성룡이 낙향한 후 가르친 풍산김씨 팔 형제 중 차남 망와 김영조, 셋째 장암 김창조, 여섯째 학사 김응조 후손이 터를 잡았다. 오록은 '오동나무 숲'이라는 뜻으로 뒷산 봉황산과 의미가 연결돼 있다. 전설의 새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는다고 했다.
망와고택의 김영조는 이조참판까지 올랐던 인물로 형 김봉조, 우복 정경세와 함께 병산서원 건립을 주도해 오늘날 유교건축의 백미인 병산서원과 만대루를 있게 한 당대의 안목이고 노봉정사 주인인 입향조 노봉 김정은 김응조의 증손으로 영조 때 제주목사를 지냈다. 제주목사 시절 치적을 남겨 조선 오백년 제주목사 중 최고의 선정관으로 꼽혔다. 수년 전 40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자기 고장을 잘 다스려준 옛 목민관의 유적을 찾아 이 마을을 방문해 노봉정사에 절을 올렸고 후손은 현조(顯祖)의 치적이 30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빛나고 있음에 자랑스러웠다.
오록마을
풍산김씨 터 잡은 '오동나무 숲' 마을
마을입구 老松비보림·돌담 아름다워
망와고택 김영조, 병산서원 건립 주도
노봉 김정 '제주목사 중 최고' 전해와
내성천을 따라 마을 길은 이어졌고 마을 입구에 아름다운 숲, 생명의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비보림이 있다. 수백 년 된 노송이 120m 이어진 솔밭으로 영양 주실마을과 함께 반촌 비보림으로 유명하다. 비보림은 풍수상 마을의 허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해 조성했다.
아울러 가문의 역사를 그림으로 남긴 풍산김씨 세전화첩이 자랑거리다. 문중 현조 19명의 주요 인생사를 47편의 그림으로 남겼는데 효도 이야기, 선비 풍류, 임란 전쟁사 등이 담겨 있다. 화첩 가운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는 1599년 2월 정유재란에 원병 왔던 명군이 철수할 때 훈련원에서 베푼 연회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명군 장군 형개가 접빈사로 수고한 풍산김씨 김대현에게 준 선물이다. 그림에는 서양 병사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왕조실록에 나오는 명군의 용병 포르투갈인이다.
마을 돌담은 시작과 끝이 없다. 군위 부계 한밤마을과 함께 돌담이 아름다운 경북 마을로 선정됐고 마을 어귀의 솟대 무리도 이채롭다. 문중 자손이 대과·소과에 급제해 교지를 받을 때마다 하나씩 세웠는데 한때 111개가 됐다고 한다. 오방 간색인 주황색 장대에 새 대신 푸른색 청룡을 올렸다. 망와고택, 노봉정사, 장암정, 오서고택, 화수정사 등 19개 고택과 정자가 돌담 안에 숨어 있는 소백 산록의 반촌마을이다.
춘양 와선정. 주변에 아름다운 정자 10여개가 숨어 있다. 〈봉화군청 제공〉 |
춘양에 있는 만산고택은 1878년 만산 강용이 춘양목으로 지은 조선 후기 사대부 고택의 전형으로 국가민속문화재다. 〈봉화군청 제공〉 |
◆만산고택과 음지·양지마을
봉화 동쪽 춘양과 법전에는 영남에서 보기 힘든 노·소론 집안 진주강씨 동성마을이 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구고두례 치욕을 당하자 세상을 등지고 이곳으로 은둔한 태백 오현 후손이다. 춘양에는 만산고택, 법전에는 양지·음지마을이 있는데 만산고택과 양지마을은 윤증 학풍을 계승한 소론계 반촌이고 음지마을은 신흠과 김장생 학맥을 이은 노론계 반촌이다. 법전을 '버저이'라 하여 '버저이 강씨'라 부르는데 중앙의 노·소론 싸움이 이곳까지 영향을 끼쳐 한때 법전천에 노론다리, 소론다리를 만들어 따로 다니기도 했다.
춘양과 법전
영남에서 보기 힘든 진주강씨 마을
편액 18개 만산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양지마을은 소론, 음지마을은 노론계
노론·소론다리 명해 따로 건너기도
만산고택에는 편액이 18개가 있다. 흥선대원군이 쓴 만산 현판(위)과 김규진이 쓴 백석산방 현판. <유교박물관 제공> |
춘양에 있는 만산고택은 1878년 만산 강용이 지은 조선 후기 사대부 건물로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다. 한때 경북 북부 여덟 고을의 최고 부자로 99칸을 춘양목으로 지었는데 80여 칸이 남아 있다. 편액이 18개 있는데 '만산'은 흥선대원군, '칠류헌'은 오세창이 썼고, 영친왕 글씨도 있고 김규진이 쓴 백석산방은 신선이 노니는 듯하다.
강운, 강하규, 강진규, 강용 등 누대에 걸쳐 당상관을 지냈고 안동사족과 교유하며 퇴계 집안과 대대로 혼반을 맺었다. 독립지사 향산 이만도는 이 집안의 외손이다. 강진규는 예조참판 시절 위정척사 만인소를 주도해 퇴계 후손 이만손과 함께 전라도 절도로 유배됐고, 강용은 낙향 후 도산서원장을 지냈으며 위당 정인보가 묘갈을 썼다. 주변에 와선정·태고정 등 아름다운 정자 10여 개가 숨어 있다.
음지마을에는 헌종의 스승이었던 강두환이 지은 기헌고택과 추사와 영의정 김병국이 쓴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경체정이 있고, 조선 왕손이 영남에 뿌리를 내린 송월재 종택이 이웃에 있다. 양지마을에는 강필효 종가인 해은구택과 법전강씨 종택이 고색창연하다.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
고려 때부터 봉화금씨와 봉화정씨의 향리였고 봉화읍 거촌리 쌍벽당, 도암정과 경암헌고택, 물야의 창녕성씨 계서당 종택, 의양리 권진사댁, 명호의 도천고택 등 봉화 땅에는 사족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는 고택과 정자가 오늘날에도 금가루처럼 빛나고 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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