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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_5천년역사의 향기를 품은 진주강씨

도심안 2021. 1. 2. 01:21

진주_5천년역사의 향기를 품은 진주강씨

 풍수에디터  2018. 6. 5. 1:02

 

 

 

월간사람과산 2015년 9월호_김규순의 풍수이야기

글 사진 :: 김 규 순

 

남강南江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濫溪川)이 산청군 삼장면의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과 진양호에서 합류하여 창녕군 남지읍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진주는 남강과 비봉산이 만들어낸 고을이다. 비봉산이 땅을 만들고 남강이 기운을 공급하고 있는 형국이다.

진주라고하면 진주성과 남강의 촉석루 그리고 논개가 떠오른다.
진주성은 벼랑위에 살짝 솟은 언덕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새이다. 진주성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중의 하나이다. 1592년10월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로 3,800여명의 인원으로 왜의 2만 대군을 격퇴시킨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로 왜군은 호남을 공략할 예봉이 부러져버렸던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무호남무국가’라고 했듯이, 곡창지대인 호남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적군들이 전쟁터에서 충분한 자급자족이 가능해진다. 이 경우 왜군을 물리치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에 진주성대첩은 그 의미가 중했다.
진주대첩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진주를 기반으로 한 강씨 집성촌의 희생정신에 있다고 본다. 이순신 장군의 승리 뒤에는 장보고 때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해양세력의 뒷받침이 있었다고 본다. 해양세력은 장보고가 활동했고 삼별초가 활동했던 서남해안에 주로 포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의 후손이 이순신장군의 휘하로 들어가면서 막강해군을 만들었을 것이다. 진주대첩에서도 3,800명의 인원 중에 진주 사람이 많았을 것이고, 진주사람 중에는 강씨 또한 많았을 것이고, 군량미 또한 진주에서 조달했을 것이다. 진주가 전쟁터가 된다는 것은 초토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김시민 장군을 믿고 지원한 무인 유전자를 간직한 강씨 집성촌의 단합된 힘이 아니었으면 불가했으리라 짐작된다. 지금은 그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진주성晉州城     임진왜란 때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대첩을 거둔 곳으로 사적 제118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김시민 장군이 3,800명의 병력으로 2만의 왜군을 7일간의 전투로 격퇴하여 호남으로 진격하려는 왜군의 예봉을 꺾었다. 이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은 이마에 총탄을 맞고 며칠 후에 돌아가셨다. 진주성은 강물이 들이치는 공격사면위에 만들어져 있다. 성은 공격형이 아니라 수비형 진지이므로, 강의 공격사면으로 절벽이 만들어진 곳에 세우는 것이 유리하다. 풍수적으로 강의 공격사면에서는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하지만 진주성이 마을의 안산으로써 강의 흉을 막아주고 있어서 진주읍내는 안전한 땅이다.

 

진주성 안의 김시민 장군 동상    김시민(1554-1592) 장군은 고려시대 김방경장군의 후손으로 1578(선조11)에 무과에 급제했다. 1591년 진주판관으로 부임하였고, 1592년 목사 이경은 병사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체제를 갖추어 고성, 창원, 거창, 진해 등지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이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왜적은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에 진주가 있음을 간파하고 1592 106 2만의 군사로 진주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였다. 진주성대첩은 김시민장군의 영도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호. 진주성 안에 있는 장군의 지휘소이다. 고려시대 김지대(1190-1266)이 1241년(고종28)에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것을 광해군(1618년)때 남이홍(157601627)이 중수하였다.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0년에 재건했다.

이곳의 촉석루는 평화시기에는 사대부들의 놀이터에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전국의 유명한 대형 누각은 대부분 고려시대와 그 이전에 신축되었다. 우리 조상들의 건축술과 건축미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형 누각으로는 이외에도 삼척의 죽서루, 밀양의 영남루, 남원의 광한루, 평양의 부벽루 등이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울산의 태화루는 복원 중이고, 청풍의 한벽루는 자기 자리를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 서 있다.

 

의암義岩     진주성 남쪽을 흐르는 남강에는 논개가 왜장을 수장시킨 순간을 목격한 의암이 422년의 세월을 물속에 몸을 담그고 논개를 기리고 있다. 의암은 1593년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28일만에 함락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가 패전장군으로 자결하였다. 최경회의 후처였던 논개는 원수를 갚기 위해 승전연회에서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에 빠져 함께 죽었다. 진주성 남쪽을 흐르는 남강에는 논개가 왜장을 수장시킨 현장을 목격한 의암이 422년의 세월을 물속에 몸을 담그고 여기에 오는 사람들에게 논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의기사   논개를 기리는 사당

진주는 봉황의 기운이 충만한 도시이다.
비봉산을 비롯하여 봉란대鳳卵臺, 비봉루飛鳳樓, 봉산사鳳山祠, 봉명루鳳鳴樓, 봉지鳳池, 鳳岩 등등 봉황과 관련된 명칭이 수두룩하다. 봉황은 제왕의 기운을 말한다. 봉황은 진주의 기운이기도 하지만 진주강씨의 수호신격이다. 강씨는 5천년전 삼황오제시대에 염제신농씨가 강수姜水에서 살았다고 해서 강씨를 득성하였으며 원조로 삼는다. 계집녀(女)자가 들어가는 성姓은 모계사회에 만들어진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씨氏는 부계사회인 주나라 때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강씨의 후손으로 강태공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강씨의 시조는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강씨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무인가문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지금도 많은 장군을 배출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제비帝妃강씨라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진주강씨라고 하는 데 단일본관의 성씨이다.

 

비봉산飛鳳山     비봉산(138m)은 고려시대에는 대봉산大鳳山이라 불렸다. 남덕유산에서 황매산 그리고 집현산에서 비봉산으로 이어지는 용맥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봉황은 왕을 상징하기도 했다. 진주의 진산으로 높지 않지만 집현산(572m)이 뒤에 버티고 있어서 그 내공은 짐작하기 힘들다. 진주에서 출중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것이 비봉산과 남강의 덕으로 알려져 있다. 충절의 고장 진주에는 진주강씨 외에도 진주하씨, 진주류씨, 진주소씨가 있다.

 

진주향교    지방의 인재를 발굴하고 길러내는 국립교육기관이다. 향교의 규모를 보면 그 지방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남강변의 대나무숲     진주시 남강변에 대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봉황이 날라 가지마라고 대나무로써 비보를 한 것이다. 봉황은 상상의 새로써 백년에 한 번 열리는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를 않는다고 했다.

강씨가 고구려의 강이식 장군을 시조로 하면서 본관이 진주로 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진주강씨 족보에 따르면, “신라 헌강왕 때 강진姜縉이 숭인전사운과에 장원급제하였고 후에 태중대부판의내령에 올라 정순공正順公 시호와 진양후晉陽候에 봉해져서 진주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가 망하자 유민이 되자 무인이 많은 강씨 문중을 감시 또는 포섭하는 과정에서 신라조정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이며, 남강을 염제신농씨의 강수姜水로 보아, 진주를 강씨의 관향으로 하사한 것이라 생각된다. 아마 백제의 유민을 의식하여 고구려 유민을 장벽으로 세운 전략으로 보이며, 변방이지만 다른 고구려의 유민들과 유리시켜 신라의 영향력 아래 두어서 반란을 획책하지 못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진주는 강씨의 집성촌으로 인재를 배출하는 근거지가 되어 고려시대에 명문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봉란대鳳卵臺    봉란대(鳳卵臺)는 삼국시대의 고총 위에 만들어 졌다는 설도 있다. 평지에 봉곳이 솟은 곳에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장군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 봉란석鳳卵石이 놓여져 있다. 옛날 어느 도승(道僧)이 봉곡촌을 지나가다 “날아간 봉황새는 알자리가 있으면 돌아오는 법이니 알자리를 만드소서”라는 말을 듣고 서기 1200-1300년경에 조성된 봉란대이다. 역풍수에 당하여 가문의 명운이 땅에 떨어지자, 천지신명의 기운을 받고자한 진주 강씨 문중의 간절한 풍수비보의 증거이다.


강씨의 융성을 시기하거나 견제를 당한 흔적이 시대별로 여기저기 보인다.
고려 인종 때에 강씨의 세도를 시기하여, ‘강씨의 기운이 봉암鳳岩에 기인한다’는 말을 ‘황제가 난다’는 말로 모함하여, 이자겸은 난을 일으키기 전에 충복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자겸의 아들인 이지원이가 나서서 봉암을 부수었으며, 이를 악용하여 이자겸의 오른팔이었던 척준경은 그 당시 조정의 막강한 권력자인 강홍과 형제들을 죽이고 강씨의 부활을 저지하고자 대봉산을 비봉산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좋은 방향이 아닌 나쁜 의미로 사용된 풍수를 역풍수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려에 강씨출신의 무인이 많았으므로, 조선을 건국하고자하는 신진세력들이 견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 <진양지>에 포착된다.
비봉산의 단맥 설화에서도 강씨가문을 견제하기 위한 역풍수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 진주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비봉산의 왼쪽으로 말티고개를 내도록 하였는데 이는 봉황의 날개를 꺾고자 한 역풍수였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강씨들의 세력이 부담스러워 무학대사로 하여금 비봉산을 맥을 끊게 하였고, 서봉지라는 둥지를 가마못(釜池)라고 부르도록 하였으니 강씨 가문에 대한 핍박이 얼마나 강하였는지 엿볼 수 있다.

강씨는 대대로 무인의 유전자를 타고난 가문이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인물의 등장에 기인한다. 특히 고구려와 고려시대에 출중한 영웅들이 강씨문중에서 배출되어 나라를 구하였다. 

 

강민첨장군 탄생지    강민첨(963-1021) 장군은 고려를 침입한 여진족(1012년)을 안찰사로 출정하여 격퇴하였고, 거란 소배압의 10만 대군을 강감찬 장군과 함께 흥화진에서 대파(1018)하였다. 이로 공신의 반열에 올라 ‘은열공(殷烈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강이식장군, 강감찬장군, 강민첨장군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영의정 강맹경, 좌의정 강사상 그리고 오도도원수 강홍립장군이 있다. 특히 고려대의 충신으로 두문불출한 대제학 강회중이 있는데, 강직한 유전자를 이어 받아 현손 삼형제와 5대손 삼형제가 연산군 갑자사화 때 참살 혹은 사형 당하였다. 그 후손이 강사상이고 강홍립장군이다. 조선의 왕에 의해 버림 받았으나 조선의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 충직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강홍립장군은 명나라와 협공으로 금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했지만, 몇 차례 교전을 하다가 패하고는 광해군의 밀명에 의해 금나라에 항복한다. 그 후 금나라에 억류되어 있다가 정묘호란 때에 귀국하여 강화를 주선하였다. 여러 사정을 알지 못하는 조정은 그를 역신으로 몰아 관직을 삭탈하였으나 사후 복관되었다.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강홍립 장군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강이식장군 영정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장군의 영정이 동판으로 제작되어 진주강씨대종회 사무실에 걸려 있다. 강이식의 묘는 만주 봉길선(奉吉線) 원수림역전(元帥林驛前)에 있다. 이곳이 강이식 장군의 생거지이자 활동영역으로 보인다.
()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복속시키려하자 (597,영양왕8) 강이식은 이러한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면서 주전론을 제창하였다. 강이식은 고구려의 최고 사령관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강이식이 진두지휘한 임유관(臨渝關)전투의 대승리로 인하여 수나라 문제 정권은 몰락하였다.

강씨의 시조 강이식 장군에 대한 진주강씨 대종회의 사랑은 대단하다. 
수문제가 일개장군을 보내 고구려 영양왕에게 항복을 권유하자, 이에 강이식장군은 ‘이같은 오만무례한 글에 붓으로 회답할 가치가 없으며 칼로 회답하자’고 개전을 주장하자, 영양왕은 강이식 장군을 병마원수로 삼아 정병 5만은 임유관으로 향하고, 왕은 예병 1만으로 요서를 공격하였고, 거란군사 수 천 명으로 산동을 공격하게 하여 수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전한다.
강씨의 인구수는 130만에 달하며 중국과 몽고 땅에 살고 있는 강씨를 합하면 13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강태공을 신격화시켜 숭모하고 있다. 강씨 유전자에서 대한민국통일의 주역이 나왔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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