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글들을 보면, 부정적으로 다루던지 긍정적으로 다루던 지에 상관없이 그가 ‘믿는 바’대로 살아간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가 ‘정통 신학’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 행동들은 -어떤 이들의 판단에 의하면- 분열을 야기했다. 그러나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한 분열은 그의 믿는 바에 따르면 정당한 것이었고, 최선의 방향이었다. 박형룡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다는 데에서 그 개인의 순수한 신앙적 동기까지 부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사 그의 믿음에 ‘오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해도, 그 믿음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옮겨진 데에는 진정성이 보인다. ‘믿는 바’와 ‘행동’ 사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이음새에 유일한 ‘돌출’이 발견된다. 이른 바 3000만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의 ‘믿는 바’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 글은 그 지점을 다룬다. 관련된 선행 연구들을 통해서, 사건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박형룡에게 있었던 3000만환 사건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표현’과 ‘의미부여’의 차이를 살필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wcc 사건을 첨예하게 부각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더불어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음이 아님을 밝혀둔다. 한 사람의 개인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다가 좌절한 단 한번의 ‘유일한’ 경험을 살핌으로써,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믿는 바’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이른바 3000만환 사건 박형룡에 대한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 이른바 3000만환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그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적인 평가를 하려는 이들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 3』은 이 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시 교장이던 박형룡은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부지 불하를 위한 교섭,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교섭비 명분으로 이사회의 재가도 받지 않고 3천만 환의 거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부지는 불하받지 못했다.(92쪽) 3000만환은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하면, 약 3억원에 달한다. 한 학교의 교장이 이사회와의 논의 없이 3억 원을 ‘교섭비 명분’으로 지불한 것이다. 결국 박형룡은 이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58년 신학교 이사회는 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역사신학자 박용규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 교사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인가를 받기 위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당시 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숭의여자중학교 교장 이신덕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 박호근이었다. 박호근은 자신이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기지 불하를 의뢰하고 총회신학교 총무과장 박래승이 박교장의 결재를 받아 30,162,172환을 이사회의 승낙 없이 지불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박호근이 사기를 친 것이었고, 그것은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 박용규는 3000만환 사건을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평가하고 있다. 오히려 ‘사기’를 친 박호근이라는 사람과, 그를 소개한 박래승과 이신덕의 실명을 거론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순수함’은 이 사건에서 객체로 남고, ‘사기꾼’ 박호근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이 들었을 그 ‘말’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사회도 모르게, ‘3억원’을 지불하도록 결재권자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 말이다.
이에 대해 『장로회신학대학교 100년사』는 더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장로 직함을 가진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이재학 국회 부의장과 인태식 재무장관을 잘 알고 있다고 허풍을 떨면서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노라고 호언하였다. 교장 박형룡 박사는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숭의학교 터를 불하받을 때 힘을 써준 실력 있는 사람이라는 숭의학교 교장 이신덕 여사의 말을 믿고 그에게 부지 불하, 건축허가, 학교의 대학인가 등의 일을 위임하였다.(364쪽) ‘허풍을 떨면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숭의학교 교장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실제로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1953년 4월 22일 설립인가를 받은 그녀에게 ‘사기꾼’ 박호근은 실력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박형룡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은 “학교 부지를 불하받도록 해주겠”는 말이었다. 이 말을 ‘믿은’ 그는 박호근에게 교통비, 통신비, 접대비, 교섭비 등의 명목으로 불과 두달 만에 3000만환을 지불했다. 오늘 날 3억에 달하는 이 돈이 두 달만에 사라졌다.
물론 결과는 대지 불하, 건축 허가, 대학 인가 그 어떤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박호근은 그 돈을 접대비, 교섭비 등으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받았다. 그 당시에 그가 대지 불하 등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었다. 사용목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 방법은 분명 불법적인 경로였다. 정부요인들을 뇌물로 매수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김인서,『한국교회는 왜 싸우는가』23-25쪽)
결과적으로 ‘사기’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박호근 자신도 그가 으레 해오던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 방식을 박형룡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기’를 진행하는 데에 돈을 지불한 그 자신도 공범이 되어야 맞다. 아니면 불법적 방법은 그렇다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니 ‘사기’라는 말인가?
그런데 박호근의 반응이 흥미롭다. 보통의 다른 사기꾼들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형룡 박사를 고소하겠다고 맞섰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을 문제 삼았다. 결국 김인수의 기록에 의하면 “박 교장은 자기가 법정에 불려 나가 심문 당하고 망신당할 것이 두려워 박호근에 대한 문제는 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
‘미국에서 온 돈 1만 달러를 암시장에서 교환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으면, 이 문제를 3억원대 ‘사기’와 맞바꾸어야 했을까? 1만 달러는 우리가 본 ‘3000만환’에 포함된 돈으로 보인다(3000만환중에서, 미국에서 온 ‘1만불’(8,800,000환)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북장로교 측 3,000불(2,500,000환), 특별비(868,430환), 1957년도 경상비 예산액중 13,807,042환, 1958년도 경상비 예산액 중 4,816,700환 합 30,162,172환이었다).
미국에서 온 1만불의 불법적 환전을 지시(실행)할 정도로 박형룡은 이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체가 된 이 사건이 밝혀지는 두려움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 배경이 됐다.
이에 따르면, 앞서 박용규가 주장한 “실무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데다 단순히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박형룡 박사의 실수로 판명되었다”는 평가는 부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위대한 신학자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적확한 평가를 덮어서는 안 된다.
신학적 변화를 가져온, 세속적 사건 이러한 사건 정황에 빗대어 봤을 때, 박형룡의 사표 수리가 이루어진 1958년 3월 7일 대전에서 열린 이사회는 충격적이다. 사표 건에 대해서 이사 38명중 20명이 찬성을 하고, 17명이 반대를 한 것이다(1명 기권). 적어도 17명은 박형룡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이 계속 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이사회가 “그것이 고의가 아닌 사기”라는 점을 감안해 “교장사표는 반려하고 대신 불법 지출한 삼천만환을 변제하는 조건으로 그의 청파동 주택(당시 시가 800만환)을 내어 놓으라”고 제안했을 때 박형룡의 측근들은 “교장은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교장직 사임이나 사태의 매각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미스러운 실책을 범한 박형룡을 끌어안은 이유는, 그것이 3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입장이 있지만, 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보수주의 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형룡을 밀어내려고 하는 세력은 결국 보수, 정통을 밀어내는 것이고, 장로교의 자유, 진보 세력이 득세하는 것이라고 설득전을 펴면서 소위 에큐메니칼, 용공 문제를 들고 나왔다.(<기독공보>, 1959.10.5) ‘세속적’ 문제를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 올렸다. 이를 두고 이영헌은 『한국기독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면서도 박형룡 박사의 인책을 인정하는 경우 한국에서 보수 정통이 무너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박형룡의 인책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323쪽) 물론, 박용규는 이를 부정한다. 3천만원 사건이 있기 이전부터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칼측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갈등이 더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wcc와 에큐메니칼 외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박형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동민의 생각은 좀 다르다. 3천만환 사건 이전과 이후의 입장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사건 이전의 박형룡은 wcc에 대해서 부드러운 태도로 비판하고 있다며 ‘온건한 반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사기를 당한’ 이후에는 급격히 강경해졌다며, 신신학과 단일교회의 두 가지가 쟁점이었는데 ‘용공주의’ 하나가 더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글(『현대신학비평』제12장 “에큐메니칼 운동 신학”, 1972)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형룡의 입장은 3천만환 사건이 있기 전 1958년 3월에 썼던 글보다 훨씬 더 강경해졌다. 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통일에 향한 운동”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교리 무관심주의로 인하여 결국 “자유주의의 대광장”으로 변해가며, 심지어 이교도까지도 허용하는 단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의 글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계속되는 성명전을 통하여 발표하였던 wcc의 용공성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다.(장동민,『박형룡의 신학 연구』, 381쪽) 그의 신학적 변화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가 아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3천만환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일들이 그의 신학적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가 그렇게 경멸하던 세속적 행위가 그를 더 ‘거룩한 신학’으로 향하게 이끌어 주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wcc논쟁을 보다 사회학자 노치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세속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해방 후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사회사적 연구-세속화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한국의 장로교회 분열 현상은 세속화의 추세와 밀접하다는 주장이다. 즉 세속화의 추세에 대한 수용과 저항이 한국 장로교 분열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고 말이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에 대해서도, wcc를 지지하는 측은 세속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사람들이었고, 반대측은 세속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본다.(노치준은 wcc운동이 세속화의 성격이 강한 운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세속화에 대해서 피터버거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 요약하면, 제도적인 측면, 문화적인 측면, 인간 의식의 측면에서 이 영역들이 교회의 통제, 권위,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세속화’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박형룡은 1976년 wcc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는 그의 아들 박아론의 글이 총신대 학장과 교수진에 의하여 거절된 사실을 접하고 “총신대학의 좌경화의 뚜렷한 징조에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세속화를 거부했던 박형룡은, 박호근이 추진했던 세속적인-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거부했어야 했다. 이러한 세속적 판단은, 역으로 그의 ‘믿는 바’ 신학마저도 변질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이 사건은 신학의 믿는 바대로 밀고 나갔던, 큰 신학자 박형룡의 생애에 돌출 된 부분으로 남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또 다시 wcc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은 신학적 영역에서 보기 보다는, 지역적, 역사적, 당파적 영역에서 보아야 그 첨예하고 해묵은 갈등이 바로 보일 것이다. 해법은 물론, 그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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