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읍인문학 강좌 제13강 태인의 역사 문화/ 강사 서혁기
[스크랩] 정읍인문학 강좌 제13강 태인의 역사 문화/ 강사 서혁기 고향 소식
태 인 의 역 사 문 화 -문화재를 중심으로-
서 혁 기
태인의 역사문화 - 문화재를 중심으로
태인은 호남제일정인 피향정이 있고, 주위에는 도로를 이설했다는 이로비와 연이 가득한 하연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또한 외동헌인 청령헌, 만화루가 있는 향교가 있고, 항가산 자락에는 사람들에게 문학을 권장하는 취지에서 시사를 조직하고 창건한 읍원정이 있고, 신잠현감선정비, 일재이항선생유허비등 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저자거리, 하마천 거리, 사창거리, 양반골 등 옛 지명이 그대로 살아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이처럼 현존하는 문화 유적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고장의 역사 문화를 조명해 보고, 사라진 문화유적을 조사 발굴하여 복원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자 한다.
태인은 정읍시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이다. 북서부는 구릉성 산지가, 남서부에는 동진강 연안의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현재는 태흥리, 태성리, 태창리 등 14개 리를 관장하고 있다. “태인” 지명은 1409년(태종 9) 고려시대 태산군(泰山郡, 太山郡)과 인의현(仁義縣)을 합치면서 각각의 이름을 딴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세종실록지리지”(태인)에 “본조 태종 9년(1409) 기축에 두 현(태산군, 인의현)을 합하여 태인으로 고쳤고”라고 하는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보물 제 289호, 태인면 태창리 101 피향정은 호남 제일의 정자다. 원래 이 정자의 앞뒤로 상·하연지가 있어 아름다운 경승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하연지만 남아 있다. 신라시대에 최치원선생이 태산군수로 재임 중에 이곳 연지 주위를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정자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의 정자는 조선중기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집이다. 공포는 간결한 초익공 건물로 천장은 연등천장인데 합각 밑에는 작은 우물 천장이 특이하게 설치되어 있다.
연혁 886- 887 고운 최치원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정확한 자료없음 1615-1618 태인현감 이지굉 중건 1661-1664 태인현감 박숭고 중건 1715 태인현감 유근 중건 1750-1753 태인현감 오언부 하연지 축조 1855 태인현감 이승경 중수 1905년 전후 상연지 메운 것으로 추정 1953-1957 태인면사무소로 사용 1958 국보 제443호로 지정 1963 국보 취소후 보물제289호로 재지정 1990 피향정 영역내 비석 정비 2004 피향정 전면 해체 보수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75호, 태인면 태성리 434-1 현재 있는 동헌은 태인현의 외동헌으로 순조 16년(1816,內子) 4월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후기의 팔작집으로 한국에 지금 남아있는 동헌 가운데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건물중 하나이다. 정면에 청령헌 이라는 현판은 고을을 맑고 편안하게 다스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 현판 글씨는 조선후기 문신인 풍고 김조순의 글씨이다. 1914 객사자리에 태인초등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사로 사용 1975 전라북도 교육위원회에 의하여 헐리게 될 위기에 있었으나 주민들의 건의로 위기를 벗어남. 1976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 1976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공사 2004 외삼문, 협문, 담장을 설치하는 등 주변정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75호, 태인면 태성리 182-1 조선조 세종 3년(1421년) 현감 안기가 대성전과 양사재 를 세우면서 소설위 규모로 건립되었다. 태인향교의 특징은 외삼문 대신 만화루(萬化樓)가 세워져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태인면 태성리 182-1 이 건물은 향교의 문루(門樓)이다. 만화루란 말은 “공자지도 만물화생” (孔子之道 萬物化生)에서 따온 것으로, 문묘(文廟)의 문루(門樓)이다. 그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왕비나 영상이 출생한 고장에 세우는 것이라 한다. 태인은 단종비 정순왕후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탄생지라 하여 만화루가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건물 연대는 알수 없다. 다만 만화루란 현판은 조선 정조 18년(1794년) 태인 현감으로 부임한 조항진의 글씨로 보아, 현판에 쓰여있는 丁巳年(1797년)으로 추정한다.
신잠비(申潛碑)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5호, 태인면 태창리 92 신잠 선생은 중종 38년(1543년) 태인 현감으로 부임하여 6년간 동.서.남.북의 4학당을 세워 유학을 진흥 시키는 등 많은 치적과 선정을 베풀고 이임하니, 명종 4년(1549년)에 지방 유림인 김 원, 백삼귀 등의 발의로 이 비가 세워진 것이다. 비문은 양곡 소세양(陽谷 蘇世讓)이 지은 것이다.
신잠영상(申潛影像)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 4호, 태인면사무소 소장 조각상은 언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조선 중종때의 명관 영천(靈川)신잠(1491-1554)선생의 영상이라 믿어 오고 있다. 신잠 선생은 중종 38년(1543년) 태인 현감으로 부임하여 6년간 동·서·남·북의 4학당을 세워 유학을 진흥 시키는 등 많은 치적과 선정을 베풀고 이임하니, 백성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성황산에 당우(1950년 붕괴)를 짓고 선생의 조각상과 부인, 큰아들의 상, 시녀상, 호상까지 함께 봉안하였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 48호, 태인면 태서리 909 여기는 박문효의 사우(祠宇)가 있던 곳이다. 박문효는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박원종의 손으로 선조 원년(1568년)에 태어나, 선조 23년에 종묘서직장(宗廟署直長)에 제수되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행재소에서 충성을 다하고 다음해 한양으로 돌아오다 송악산에서 왜병의 기습으로 향년 28세로 순절하였다. 순조 17년(1817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명정(命㫌)이 내려져, 순조 19년(1819년)에 사우를 창건하여 향사하여 왔다.
태인면 태서리 분동 일재 이항(一齋 李恒)선생이 살았던 유적(遺蹟)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인 성주이씨문중(星州李氏門中)에서 만든 비각이다. 그 비각 앞에 이항선생이 공부할 때, 보림사까지 가면서 물을 건너가기 위해 가지고 갔다는 바위가 우뚝 서 있다.
태인면 태창리 103-2 피향정 하연지 노변에 있으며, 조선 고종 8년(1871년) 현감 김인근이 현재의 길을 이설(移設)하고 세운 비이다. 피향정 연지는 원래 이 정자의 앞, 뒤로 상, 하연지가 있어 아름다운 경승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하연지만 남아있다. 상연지는 80여 년 전에 메워져 도로와 민가가 들어섰으며, 현재 남아있는 하연지는 1740년(영조20년) 현감 오언부가 새로 축조한 것이다.
태인면 태흥리 152-2
조선 철종 6년(1855년)에 당시 태인 현감 이승경이 선비들에게 문학을 권장하는 뜻에서 유림 49인과 시사(詩社)를 조직하고 세운 정자이다.
旌門, 旌閭정려)은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여자)에 내리는 표창이다. 나라에서 명정이 내리면 그 고을에서는『○○○○○旌閭』라는 현판(정판)을 마을 앞에 세워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호세와 부역을 면해 주었다. 태인면 거산리 원거산 태인면 낙양리 외이 태인면 태서리 서재 태인면 태창리 태산 태인면 태서리
박산리 고비군 박산리 박동마을 앞 노변에 3기의 고비(古碑)가 있다. 이 길은 옛날 전주, 태산에서 인의현(仁義縣, 현 백산)으로 통하는 길이다. 고천리 고비군 태인, 전주간 국도변인 고천리 녹동마을 앞 도로변 기슭 암대위에 3기의 고비(古碑)와 암각 거사대(岩刻去思坮)가 있다.(최근에 2기를 복원하였다) 이곳은 예로부터 금구에서 솟튼재를 넘어 태인현으로 들어오는 길목이다.
옥천사 조계종, 태인면 태성리
옥천사소장범종 문화재자료 제187호 태인면 고천리 산 14 1728년 조성되었으며 조선종의 특징인 음통을 갖추고 있는 조선후기 범종으로서 유곽과 보살상의 모습이 생동감 있다.
다천사(茶泉寺) 전통사찰 제98호, 태인면 태흥리 163 이 절은 이름 그대로 약수가 유명한 사찰이다. 500년 넘는 느티나무가 있는 다천사는 옛날에 절이 있던 자리라고 하는데 벽산(碧山)스님이 1930년경에 이 절을 창건했다.
미륵불교 총본 태인면 태흥리 283 완주 소양출신 정인표가 1938년 창설한 교단.
태인면 낙양리 년례행사처럼 되풀이 되었던 한해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리사의 신기원을 이룩한 낙양취입수문 준공을 기념하여 일원종시백파(一源從是百派)라 새겨 비를 세웠다. 이는 한줄기 물이 백갈래로 갈라져 광활한 농토를 골고루 적셔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백파제는 매년 4월 중순경 낙양 취입수문의 통수식을 하면서 제를 올리고 있다.
태인면 태성리1 1919년 선열들의 3.1운동 봉기정신을 계승발전 시키고자, 1984년 성황산 자락에 주민의 성금과 예산으로 기념탑을 건립하고 매년 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나, 기념탑의 붕괴위험이 있어 2003년 12월 국비 3천만원과 시비 3천5백만원 포함 6천5백만원의 예산으로 기념탑 복원과 함께 위폐봉안소를 건립하여 25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태인에서는 야밤을 틈타서 송수연, 김현곤, 송한용, 세 사람이 태흥리 오리마을, 고목 밑에서 밀회하여 거사 방법을 토의하고, 7일부터는 읍원정에 근거를 두고 진행 준비를 모의 하였는데 이때부터 손문상, 김달곤이 함께 참가하여 거사를 꾸미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3월 16일 태인 장날 헌병분경소의 정오 타종을 신호로 궐기하기로 하고 김현곤은 독립선언서 인쇄와 태인 보통학교의 교원과 학생을 동원하고 송수현은 행사진행을 지휘 할 것이며 송한용은 태극기를 만들 것을 각각 정하였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3월 16일 정오에 종소리가 울리자 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고 송수연의 선봉으로 의혈청년들은 조국광복을 부르짖는 가두연설을 하고 대오를 지어 시위 행진을 가속하면서 성황산과 항가산에 모여 진두지휘를 벌이며 독립만세운동이 인근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태인면 태창리 518-8 영조 생모 숙빈 최씨가 설화가 깃든 대각교 근처에 소공원을 조성하였다.(2005년 준공) 설화 내용은 조선 숙종때 둔촌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발령을 받아 가던 중 이곳 대각교에서 어린 소녀(숙빈최씨)를 만나 동행하게 되고, 그 후 둔촌이 내직으로 승진되어 한양으로 가게 되었을 때에도 함께 데리고 갔으며, 딸이 왕비(인현왕후)로 간택되었을 때 함께 입궁하여 훗날 영조의 생모가 되었다.
태인면 태성리 산29-4 태인현의 주산이며 태인팔경으로 비정귀운(飛亭歸蕓)정자와 성황모종(城隍暮鐘) 종소리가 있던 곳임 태인의 유일한 등산공원에 위치하며 정자는 조선조 유학의 영향으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다는 생활 철학의 정신적 바탕으로 자연, 사회, 학문, 생활이 융화된 이상적인 건물이다.
호남평야의 젖줄 동진강 태인팔경(대각어화-大脚漁火, 대각교가 있는 남천(동진강)에서 밤에 불을 밝히고 고기잡는 모습)중에 하나인 동진강은 태인사람이면 누구나 어릴 적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는 마음의 고향이다. |
출처 :정읍통문 원문보기▶ 글쓴이 : 들길(이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