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바라보면 온몸에 물이 든다 장민정 시집 1.

도심안 2019. 8. 29. 04:52

바라보면 온몸에 물이 든다 장민정 시집 1.

2008. 11. 25. 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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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처녀성 선언’ 地를 굴착한 그, 그녀

조 정 ( 시인 )

1. 수없이 되물으며 혈거 복원하기

참다 참다 ‘뼈가 긁히는’ 소리를 냄직한 여자들이 북부 알바니아에 살고 있다. 관습법 <카눈>이 규정하는 시시콜콜한 행동강령 중 하나인 ‘처녀성 선언’을 따른 사람들이다. 남자가 가지는 사회적 권리를 누리는 대신 평생 결혼과 자녀와 성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그’이자 ‘그녀’들은 요즘 회자되는 트랜스젠더나 레즈비언과는 다르다. 생물학적으로나 성정체성에 있어서 명백히 여자이면서 사회적으로만 남자이기 때문이다.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여자로서 순결을 지켜야 남자로서 권리를 득할 수 있다는 기이한 풍습이란 ‘자꾸 시큰’ 거리는 잊었던 ‘젖니 두 개 같은 생각’들의 중첩이자 제 자신을 ‘뼈째 먹는 생선처럼 야금야금 뜯어먹는’ 자가 식인의 총합이며 ‘돌부처 하나 엉덩이에 깔고 앉’아 눈 딱 감고 남성형 가부좌 틀게 하는 사기극의 모형이다.

가장 혹은 가장을 승계할 남자가 전쟁이나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재산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아비나 오라비가 입던 옷을 입고 남자의 노동을 하며 5, 60년을 살아온 그, 그녀들이 자기 생에 “만족하다.”고 말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없던 이명이 와락 몰려들기도 한다.

‘정작 할 말은 아랫배 밑에 뭉개버리고/ 묵직한 상처 혼자 조금씩 몰래 핥는’ (「내장탕집」) 여자들 머리카락 다발이 북부 알바니아의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며 만족하다, 만족하다, 웅얼거리는 소리들이라니.

가장인 남자가 유실된 집의 동혈을 메우기 위해 자의반타의반 남장을 갖춘 채 남측(男側)으로 떠난 여자들은 동서고금에 부지기수이다. 그렇다면 ‘헉,헉,헉,헉 / 우글우글 끝도 없’ 다. ‘저 여자들 속에/ 나는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도리질하는/ 저 많은’(「나는 아니다」) 여자들이 남긴 구멍은 누가 와서 메울 것인가.

여리나 실은 질긴 시적 촉수를 뻗어서 자신이 남기고 떠났던 구멍을 끊임없이 더듬고 오르며 그 구멍에 뿌리를 내리며 장민정은 오래 걸어온 자기 길, 과거 혹은 가족력을 상대로 굴착기를 가동한다.

왜 허기가 지는지

몸이 뒤틀리는지

수없이 되묻고 되묻다가도

무심코

구멍 파는 여자

구멍 속에 자신을 비벼 넣는 여자

-「담쟁이」일부

2. 그, 그녀의 경사굴착은 제 발바닥을 향한다.

그, 그녀 장민정이 가동하는 경사굴착은 상처보다 묵묵히 자기 상처를 비집고 들어가 ‘천연스레’ 자기를 ‘뒤적이’거나 ‘요동을 치며 꼬리를 흔들다가 금세 풀이 죽’은 계집아이로 환원되기도 한다.

먼 그늘. 2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아랫목에 기약 없이 묻어두던 녹물이 퍼렇게 배어난 밥을 비우기 보름만의 일이다

마당귀 늙은 살구나무에 가오리연이 걸려있다

요동을 치며 꼬리를 흔들다가 금세 풀이 죽어 늘어지곤 하는 가오리 연

나는 퀴퀴한 니쿠샤꾸를 뒤져

한 뭉텅이 사진을 주루룩 방바닥에 깔았다

“이게 뭐야, 일산옥 그 여자야, 엄마.......”

말라깽이 여우가 여기저기서 히히거리고 있다고 소리치지만

어머니는 그림자마냥 조용히 싱가 재봉틀 돌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후유증이 왔다

엎딘 아버지 엉덩이에서 고름을 짜내는 어머니

배다른 자식 하나 안 만들어 온 애비니라

굵은 소금을 상처에 비벼 넣는 할머니의 괭이눈

바람이 일었다

바지랑대를 고쳐놓아도 자꾸 넘어지는 날

가오리연은 몸부림칠수록 꽁꽁 묶이기만 했다

모처럼 할머니가 작은 집에 가신 날

으슥한 초등학교 진입로에서

두 분이 한바탕 술래잡기 한 일은 아무도 모른다

때 아닌 소나기가 지나간 일도,

어머니, 가오리연 어디 갔어?

- 「먼 그늘. 2」전문

가장이 자리를 비우는 까닭이 전쟁이나 기아 때문만은 아니다. 집에 정을 못 붙이고 밖으로 도는 아버지, 순명의 업을 받은 듯 밖으로 돌다 온 남편 엉덩이에서 고름을 짜내는 어머니, 행여 어쩔세라 아드님 역성들며 괭이눈 치뜨는 할머니 사이에 ‘풀 죽은 가오리연처럼’ 끼여 앉아 ‘몸부림칠수록 꽁꽁 묶이기만’ 하는 생의 수심을 단박에 눈치 챈 조숙한 소녀가 있는 풍경은 뒤돌아서 반 세기만 걸어가면 도처에 편만하였다.

장민정 시가 가지는 대표적 미덕은 순한 사람들 속에 일렁이는 아픔을 육화하여 악 쓰지 않고 전해주는 것이다. 여러 시편들에서 맛볼 수 있는 전근대적 혹은 현대화이전 정서와 풍속들이 잔 꽃무늬 포플린 치마저고리처럼 담박하다. 그래 그 때는 다들 그랬지라고 회고할 때 그 회고가 확보해주는 시적 감응은, 인내하고 받아들이고 이를 악물고 기다리는 노역으로 제 속에 좋은 우물 하나 가지던 돌 같고 별 같은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녀 어디로 갔나. 할머니와 아이들을 피해 밤길로 나가 싸우는 부모를 훔쳐보며 ‘어머니, 가오리연 어디 갔어?’라고 마음 안쪽이 사무치게 금 가는 소리를 외치던 밤 이후로 소녀는 영영 바지랑대처럼 넘어져 다시는 소녀로 돌아오지 못한다.

일찌감치 어머니의 지지대 역할을 떠맡지 않을 수 없는 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묵묵히 어머니가 내뱉는 한숨과 푸념에 귀를(사실은 영혼과 삶을) 내주는 선량함이며 아버지가 유기한 정서의 간극을 전신으로 메워내는 바리데기식 헌신뿐이다. 그럴 것도 없는데, .

그러니 함께 ‘코 빠뜨리고 앉아’ 들여다보는 장민정의 발바닥도 역시 ‘한 숟가락 떠낸 수박 속처럼 벌’ 건 구멍이 얼기설기 꿰매어져 아프다. 티눈 파낸 자리다. 하늘의 별이 삶의 지도가 되어야 하는 시기에 일찌감치 멍들어버린 쪽 마음부터 익어간 과실 닮은 ‘구순한’ 강박, 용을 쓰며 뻗어간 ‘고구마 줄기’ 같이 푸르고 질긴 모성애의 자리다.

3. 불구를 가로막던 억압을 풀고

장민정은 오랫동안 시적 능력을 제어 당하고 있었다. 「시적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불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적 능력을 가진 자는 불구다.」라는 풍문을 옳다고 받아들일 때 그렇다.

‘도대체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살고 있는 것이냐’라고 비명을 지르듯 물으며 날 것 그대로인 자존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버티어 온 그의 노정에서 가장 오래 된 자기 확인은 슬프게도 아버지의 ‘혹’이다.

‘아무리 울어도/단 한 번 안아주지 않았다는 아버지’(「혹」), 말 띠 딸년이니 싸돌지 말라고 불 인두로 도장 찍듯 ‘고요할 정(靜)字를 눌러 써’ 서 이름 지어주었던 아버지, ‘말소리 담 넘지 말그라’ 로 억압했던 아버지, 지금도 바라보면 목마름이 마음 끝을 건드려서 멀거니 바라보지만 여전히 ‘다정한 한 말씀 없으신’ 아버지의 ‘혹’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살으래이’(「먼 그늘. 1」) 라고 방에 밀어 넣던 할머니, 일곱 동생을 어미처럼 보살필 수밖에 없도록 만든 고단한 어머니까지 자신을 전근대적 규율로 얽매고 훈련시키는 가족들에 순응하며 그는 ‘사당패는 이미 떠나고 없다’라고 중얼거린다. 그렇지만 풍물소리 웅덩이진「내 안의 여름밤」은 새로 든 사당패 계집애보다 아름답다.

내 안의 여름밤

울타리마다 호박 넝쿨 우북해서 어둠첩첩 밤

모깃불 숨넘어가듯 가느랗게 소리 없이 피어오르는 밤

콩밭 메고 돌아오신 어머니와 과년한 딸이 이슬 젖은 빨래를 마주 잡고 다림질하는 밤

처마 끝 백열등에 부나비들 머리 부딪는 밤

모깃불 연기가 슬그머니 삽짝을 빠져 나가는 깊은 밤

약속 없이도 대각다리 아래 가면 만나는 밤

처녀 총각들 끼리끼리 도래미산으로 숨어드는 밤

불침번 아버지가 담배 연기를 모깃불에 보태는 밤

유난히 예쁜 박꽃이 하얗게 떨고 있는 밤

- 「내 안의 여름밤」 전문

장민정은 많은 여자가 욱시글거리는 자기 몸에 정좌하고 남한산성, 그 실패한 왕조의 바람소리 같은 혼잣말을 풀어낸다.

마디마디 설움 많은 여자들은 ‘가뭄도 길어질 것’ 같은 조숙한 눈을 감춘 채 박꽃 같은 딸로 살았고, ‘개기월식’처럼 다가온 인연을 따라 한 생을 견딘다. ‘밉다, 밉다 원망하면서 고작/ 미운 사람 닮은 아이 낳아 기르’는 집을 ‘뼛골로 남을망정’(「갈대 속에 바람의 유전자 있다」) 떠나지 못 한다. ‘밭아버린 젖을 물고 늘어지던 어린 것들’을 끌어안은 채 ‘하루에도 수만 번 넘어졌다 샛노랗게 일어’ 서며 ‘사네, 못 사네/......침 튀기며’ 비루한 생에 매달리고 만다. ‘문턱 낮은 일산옥’으로 부는 바람인 아버지를 움 묻은 무 다루듯 조심스레 대접하던 어머니가 간 길을 벗지 못 하는 것이다.

이 힘겨운 유전에 대해 그는 수굿하고 탐스러운 수국의 입을 빌어 ‘워쩌것쏘/ 텀턱시럽기라도 히야 살재’(「수국」) 라고 자기 아닌 자기를 변명한다. 그 텀턱시러움이 비루한 생과 몸 대(對) 몸으로 현장 격돌을 했다고 풀어야 옳겠다. 그는 수국일 뿐 아니라 ‘허리 빳빳하게 힘써야 하는’(「멸치」) 소이고, ‘넘어져도 쓰러지지 않아’ 라고 되뇌이면서 ‘벌떡거리는 바다를 지그시 억’(「그 섬, 유채꽃들은」)눌러버리는 유채꽃이다.

꽃이면서 소가 된 힘으로, ‘바라보면 온몸에 물이 들’ 도록 붉은 바다와 같은, ‘망망한 진공에서 깨어나’ ‘한계선에 닿아 수런거리는’(「석양, 바닷가」) 시들을 꺼내 놓는다. 시편 도처에, 그의 몸 도처에 흉터가 성하다. 그러나 바람에 맞은 상처가 난 채 살풋 단풍이 든 백두산 어린 철쭉처럼 그는 이제 물들기 시작했으므로, 싱싱한 흉터들은 모두 잃어버린 소녀, 억압되었던 춤사위, 옭매어졌던 시적 능력을 지시하는 길이 되었다.

아, 밥알만 한 이파리 서너 개

단풍까지 든

내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조그만 철쭉들이

바위이끼 사이에서 떨고 있는 것을

그대는 수교되기 전이어서

아무나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저릿저릿 물에 손도 담그고

심호흡으로 백두산을 내 속에 다 집어넣어 돌아오고 싶어 했지만

지나는 동안 문득문득

그 어린 철쭉이

궁금하네

- 「백두산 철쭉」 일부

4. 허공에 맞서는 연싸움

‘소금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폐염전」)이라고? 그렇게 오신 소금은 조금만 주변이 소란해도 소금으로 결정되지 못 하고 유산되어 버린다는 말을 몇 해 전 다도해 섬 여행을 다녀와서 그가 전해주었다.

‘왼쪽 발바닥 아래‘ 로 언제나 고향 정읍에 있던 ’소금정 샘‘을 감촉하는 그로서는 살아 숨 쉬고 능동적으로 제 운명을 결정짓는 소금의 까탈스러운 생멸이 남달리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소금 오시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사는 섬마을에서 그는 분명 시를 생각했을 터이다. 시도 저 새침한 소금처럼 오시는가.

온다, 안 온다

바람이 거문고를 탄다

아이가 선잠 든

헐거운 창문을 스미다 온 바람들

둘러앉아

이잉 위이잉

- 「풍경. 1」 일부

시가 헤엄쳐 오시며 지느러미 번득이는 소리를 들었음직 하다. ‘할아버지의 싸리비질 무늬’ 속에서 ‘고추가 몸 말리는 소리 / 참깨 쏟아지는 잘디잔 소리/ 검은 콩 뒹구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꽃 시절도/ 꽃눈 흔적도 없이’ 살아서 제가 꽃인 줄도 모르고 핀 고구마꽃 같이 산 세월이 하세월이지만 손에 꼭 쥔 ‘아이’(「고구마 밭에서」)가 목줄기 가느다란 ‘시’가 그에게 찾아왔을 것이다. ‘더 못 참고’ 그에게로 ‘뛰어내’렸을 것이다. ‘막대기 구멍을 고추 위에 덧씌우느라’ 눈물 찔끔거리는 고놈들!

시인의 마을

팥죽색 피부의 벌거벗은 사내들은

허리를 띠풀로 칭칭 서너 바퀴씩 감았다

무릎께까지 오는 긴 막대기를 사타구니에 고정하기 위한 것이다

성기를 보호하려는 것인지

가두어 두려는 것인지

댓살쯤 되는 조무래기 아이도

새끼막대기를 성기에 씌워 띠풀로 한 두 바퀴씩 감았다

코흘리개 아이는

어쩌다 잘못 빗겨나간 막대기 구멍을

고추 위에 덧씌우느라 고개를 쳐 박고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다

긴 막대기를 덜렁덜렁거리며

엉기적엉기적 수풀을 건너고

긴 칼을 내려놓듯 앞에 늘어뜨려 놓은 채 쪼그려 앉아

새나 가두어 잡으려고 머리를 맞대어 궁리하는,

산토끼 한 마리 때려잡을 야성은 씨눈도 보이지 않는

맑은 눈빛이다

조심스럽게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방금 뜯어먹은 푸성귀의 영혼들이 평안하기를 기도하는

스치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처럼

풀잎에 깃든 영혼의 소리를 듣는 자들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 살 수 없는 시인들이 모인 곳 같다

- 「시인의 마을」전문

흉터투성이가 된, 온몸이 길이 된 그는 ‘밤을 지새며 한 발짝씩 멀리멀리 돌고 돌아/ 기어이 기어’ 올라, 그 옛날 늙은 살구나무에 걸려 축 늘어졌던 가오리연보다 훨씬 힘찬 ‘별박이 연’을 띄울 뿐 아니라 연싸움에 참여할 생각이다.

눈물하고 함께 지겹게 먹어본 맨밥을 짓이겨 풀붙인 연에 ‘부레를 끓이고 사기가루를 발라/ 쇳소리 나는 튼튼한 연’(「온몸이 길이다」) 으로 만든 여자는 ‘산도 길도 나무도 없’ (「양수리 모텔」)는 허공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거북하게 앉아있는 머리 위로

날아오는

협.의.했.습.니.까?

결혼식 날처럼 나란히 서서

둘 사이에 끝점 하나 끼워 넣는 의식은 지극히 간단하다

타앙 타앙 내려치는 망치소리가 밴 저 피

- 「넝쿨장미」일부

파기는 대부분 계약보다 불편하다. 남성 중심 사회가 정한 여성용 규범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태생이 제공한 불평등 계약일 경우가 많다. 전근대적 이상적 여성상은 헌신된 존재, 소녀이면서 속이 깊거나 어린 여자이면서 실수가 없거나 젊은 여자이면서 절제되거나 여자 몸을 가지고 남자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는 현모양처를 요구하였다. 강요된 ‘처녀성 선언’에 다름 아니다. 생기발랄한 처녀를 한껏 전족해버리고 살아온 많은 여자들이 북부 알바니아에 사는 그, 그녀들처럼 자기 생을 ‘만족하다’고 회고한다. 이에 반해 장민정은 “불만족하다.”고 시를 통해 발언함으로써 모종의 파기를 선택한다.

생을 장악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권리가 거절될 뿐 아니라 보호 받고 격려 받는 특권도 꿈꾸지 말기를 요구 받은 여자들을 시 속에 품고 장민정은 스스로 눈물이 되는 자세를 가진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어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유전되어온 눈물을 대하여 온몸을 펴서 우산을 만든다. 몸으로 우산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숨을 조용히, 길게 들여 마십니다

항문을 힘껏 조이시고,

배를 끌어당겨 숨을 멈춥니다>

바람도 범접 못 한다

발가락이 발가락을 늘이고

등뼈가 등뼈를 조이고

옆구리가 옆구리를 비트는

부드럽게 부풀리고 접는

- 「나마스테」일부

그러므로 ‘낙엽이 굴러도 뼈가 긁히는’ ‘참다 참다 내뱉는 신음’은 이로써 끝이다. 부여된, 오래 익숙했던 규제를 벗고 그는 자신을 문질러 낯선 부싯돌이 될 것이다.(「낡은 집」) 타오르는 언어가 그의 부싯깃이 될 것이다.

일손을 놓고 한 없이 한 없이 게으르게 석 달 열흘 뒹굴어 손톱(「입동 무렵」)이 호랑이처럼 길어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가 어려우면 그는 포효하며 동굴을 뛰쳐나와 산맥을 한바탕 달리는 것으로 손톱을 무지를 것이다. 몸을 낮추고 웅크린 채 발톱을 다듬는 웅녀 되기는 이제 그만.

이 가을에 ‘종잇장 소리가 날 것 같은/ 하늘 속으로’ 내닫는 시인의 행보가 아무쪼록 강철처럼 굳고 처연하고 가벼우시길.

 

 

 

 

 

◆ 발문

둥근, 달팽이와 지구는 닮아 있다.

장정임 ( 시인 )

바라보면 온 몸에 물이 든다

넘치지 못하고

안에서만 오래 끓은 탓인가

품어 안아 스며든 빛살조각들이

한계선에 닿아 수런거리는

<중략>

그렁그렁 걸어 둔

눈물 빛 속 철없는

나의 애드벌룬

바라보면 온 몸에 물이 든다

< 석양, 바닷가>

석양을 바라보면 온 몸에 물이 드는 언니의 눈물 빛 속 철없는 애드벌룬은 바로 시(詩)다. 웬만한 사람에게는 일생을 걸어도 결코 돈이나 명예가 되지 못하는 詩를 버리지 못하고 동생인 나는 감성이 무디어져 짐짓 시를 떠나고 있을 즈음 언니는 시집을 낸다. 그런 의미에서 언니의 영혼은 아직 젊다. 밤을 새는 사색과 불면의 고뇌가 있기 때문이다.

내게 가장 쉬운 일은 과거 속으로 가는 일

풋내 나는 사랑, 채워지지 않은 허기, 고달픈 후회..... 얼마나 서성거렸는지

달팽이 무늬처럼 뱅글뱅글 돌고 돈 흔적이 내 詩의 범주다

<티눈>

언니의 시는 자신의 시 <티눈>에서 말하고 있듯이 대다수가 과거에서 풀려 나온다. 내가 이미 조금은 잊어버린 아버지의 한량 짓과 어머니의 한숨과 할머니의 따뜻함과 시대적 가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집의 온갖 풍경이 솔솔 풀려나온다.

이 시들은 내 동생 장진숙이와 오빠 장지홍의 시처럼 서사성과 서정성을 가지고 지난 시절을 한 컷 한 컷 충실한 사실성과 개관적인 거리감으로 잘 묘사해 두었다.

6,25의 기억, 그리고 산업화 초기와 중기의 고달픈 서민적 삶을 촘촘히 서사시로 그려 남긴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일찍 고향을 떠나 산전수전을 홀로 겪은 나와는 달리 (나는 그들처럼 많은 기대감도 빈곤감도 없었기에 우리 집안의 일이 그처럼 세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 나의 언니 동생 오빠는 유난히 가난에 엄살(?)을 떨고 있다. 도대체 대부분 점심을 굶던 시절에 대체 음식이라도 배불리 먹고 오빠는 대학 진학도 하고 언니는 도청 소제지 일류학교도 다니며 밥 굶는 친구들의 점심밥을 먹이는 사랑방도 갖고 문학도 했던 면 유지이던 교장선생집의 가난이 어떠했기에 언니와 동생과 오빠까지 시만 썼다 하면 가난타령만 하고 있는지 내겐 좀 이해가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다.

아무튼 미래가 아닌 과거를 바라보는 유형의 이 세분 덕분에 당시 친구들에게는 부잣집으로 기억되는 우리 집은 천하에 가난뱅이 집안으로 미주알고주알 온갖 시가 되어 온 세상에 퍼지고 말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들은 그런 가난의 풍경을 아주 아름다운 골동품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인지 가난해야 천국으로 올라가는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때문인지 초등학교도 겨우 마치는 아이들이 많았던 당시로는 남보다 조금은 더 가졌던 자의 미안함이 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제 인지 알 수는 없다.

어쨌거나 언니가 과거를 기억하고 복원하려는 것은 그 과거가 그에게 소중한 가치를 가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회상의 시집을 낸 우리 집 형제자매들에게는 고향과 가족 공동체가 그처럼 가슴 깊이깊이 중요한 의미가 있기에 이를 기억하고 복원하는 것일 게다. (나의 눈은 과거가 아니라 늘 현재에 있다. 살기가 어려워서 견디기 힘들어서일 것이고 기억할 과거가 별로 아름답지도 자랑스럽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농경시대의 소박한 전통의 계승자이자 가난한 고향을 지키는 권한의 기득권(?) 자인 이들의 특성은 이들이 참으로 착하고 온 몸이 희생과 인내의 견인주의자라는 점이다.

“우리언니”장정자는 시인 장진숙의 큰언니이고 나의 언니이다.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취향이 엇비슷한 문학 동호인이자 혈연을 같이 한 자매로 못 만나면 정말 보고 싶고 그립다. 그중에서도 “우리언니” 장정자 (장민정으로 개명을 하셨는데 나는 왠지 장정자가 익숙해서 좋다) 이 비정한 생존의 거리에서 쓸쓸해질 때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고향 같이 푸근하고 속이 깊은 사람이다.

나는 겸손하고 속이 꽉 찬 사람, 따뜻하고 순수하되 지혜롭고, 가진 것이 적은데도 늘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며 희생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 언니가 떠오른다. (나도 물론 언니에게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다. 나는 언니가 어려울 때조차 언니 집에 갔다가 언니가 쌈지 돈을 꺼내 시장에서 사주는 옷도 덜컥 덜컥 받아 입었던 철없는 동생이다) 모두가 영악한 시대에 어수룩한 얼굴로 타인을 배려하며 고요히 살아가는 현자의 모습을 가진 우리 언니, 천만 가지를 잘 알고 있으되 주장도 편견도 없이 누구나 한없이 수용하는 수수하고 따뜻한 언니를 우리들은 존경하고 늘 고향처럼 느껴왔다.

그런데 만나기만 하면 꼬박 밤을 새우며 문학이니 인생사를 도란거릴 만큼 친한 세 자매 중에서 “우리 언니”가 가장 늦게 시집을 내게 되었다. 물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가장 덜 익은 내가 맨 먼저 정신대 문제를 다룬 서사시집< 그대 조선의 십자가여 >와 여성주의 시집 <마녀처럼>을 냈고 나보다는 더 익은 내 동생 장진숙이 아주 꼼꼼한 솜씨로 서정과 서사를 버무려 <겨울 삽화> <아름다운 경계>시집을 냈다. 물론 오빠도 얼마 전 <칠석날> 이란 시집을 내었는데 이번에는 “우리언니” 가 아주 잘 익어 향기로운 시집을 드디어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나는 이 “우리”라는 애매하고 불분명한 단어 속에 있는 진한 공동체의 중심인 우리 언니가 70이 가까워도 낙엽이 굴러도 뼈가 긁히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이날까지 시를 안고 살아서 마침내 시집을 내게 된 것에 대해 경외심과 감동을 느끼면서 “ 가장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속담의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나를 문질러 부싯돌이 될 수 없나요,

내가 품어 안았던 것들은 물 같아요

하늘도 품을 수 없는 메말라버린 샘을 품고 있어요

낙엽이 굴러도 뼈가 긁혀요

< 낡은 집 >

남들은 언니의 시를 그냥 읽을 수 있을지 몰라도 언니를 아는 우리로서는 글귀 한 줄 한 줄이 그냥 읽히지 않는다. 언니의 시는 관념적으로 보이는 시도 관념적인 것이 없다. 언니는 일찍이 미장원에서 우연히 만난 박노해 시인의 시 <이불을 꿰매며> 에 울었던 사람이다. 언니는 관념을 싫어한다. 이미 삶의 실천 속에서 모든 관념의 바닥을 보았던 사람이기에 어떤 관념의 세계도 언니 안에서 곰삭아야 나온다.

그래서 위의 시 한 줄을 읽어도 우리는 뼈가 저리다. 언니에게 물은 그냥 물이 아니다. 온갖 고통을 건너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회귀한 물과 언니의 타인에 대한 지나친 유연성은 맞닿아 있다. 세상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없는 언니는 못 담을 것이 없고 못 담길 그릇이 없다. 그래서 보기에 참 편하다. 나도 언니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니는 우리를 문학으로 인도한 사람이었다. 오빠와 더불어 우리 형제들이 문학을 좋아하고 이해하는 집으로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빠의 그늘에서 혹은 큰딸로 희생된 언니의 삶은 평생을 책을 읽고 생각하며 삶의 지혜를 가꾸었어도 늘 우리 뒷전에서 우리에게 박수치고 뒷바라지 하는 역할로 만족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언니의 조용한 움직임조차 긴 시간이 쌓이니 결국 한편의 시집으로 나올 수밖에 없이 되었다. 언니는 그 힘겨운 인생의 고비 고비를 견디며 달팽이처럼 아주 천천히 생각하고 생각하며 평생을 시를 쓰고 지우고 다시 쓰며 살아왔던 것이다.

내게 가장 쉬운 일은 과거 속으로 가는 일

풋내 나는 사랑, 채워지지 않은 허기, 고달픈 후회... 얼마나 서성거렸는지

달팽이 무늬처럼 뱅글뱅글 돌고 돈 흔적이 내 詩의 범주다

<티눈>

우리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언니는 참 많이 서성거렸다지만 언니는 한 길을 꾸준히 걸어온 것이다. 자녀를 키우며 자신의 억울하게 짧아진 가방끈을 잇고 대학을 나와 시 공부를 아주 오래 해왔다.

언니는 스스로의 욕망을 단 한 번도 맘껏 태워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번쩍- 하고 꺼지는 부싯돌이라도 되고 싶을까? 남보다 예민하고 남보다 따뜻하고 다정하기에 스스로 불타오를 수 없었던 자기억제와 희생의 대가(大家)답게 좋은 어머니 좋은 이웃, 좋은 자매로 남아 이제 좋은 시까지 쓰게 되었다.

그래서 언니가 그처럼 편하게 느껴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디든 스며들고 어디든 담기는 생명의 물처럼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의 허무함을 터득한 언니의 편안한 “놓아버림”은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깨달음이다.

그러나 하늘도 품을 수 없는 메마른 샘을 품고 있다는 언니의 갈증은 또 무엇일까? 언니는 목마른 자들 앞에 단 한 번도 자신의 갈증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래, 늘 퍼주어야 하는 생을 살아왔으니 무의식 속에서도 목이 마를 것이다. 그러나 언니는 내가 보기에 마르지 않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가득한 옹달샘이다.

언니는 머리가 좋았다. 지역이지만 도 단위의 우수한 학생들이 가는 일류여학교를 최고의 성적으로 다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언니가 공부 하느라고 자기 시간을 갖거나 공부를 한다고 잘난 척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니 , 우리는 언니가 공부를 잘하는 줄도 나중에야 알았다. 그만큼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감추는데 익숙한 언니였다. 그런 생활은 늦은 밤 숯불을 피워 다리미질을 하는 어머니와 빨래를 잡아주는 딸의 모습을 그린 시에서도 나타나 있다.

늘 동생을 등에 달고 살면서도 책을 읽고 사색을 하던 속 깊은 언니를 가족 누구도 챙겨주지 않았고 언니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야 했다. 당시는 오라고 부르던 지금의 일류 여대 장학생 자리도 아버지의 정치적 몰락으로 더욱 어려워진 가정경제를 돌보느라 가지 못했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공채1기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애를 하여 같은 공무원과 결혼을 하고 꿈 많은 이 부부는 얼마 가지 않아 신이 내린 직업 공무원을 박차고 나와 사업을 한답시고 고생만 하다가 산전수전을 겪게 되었다.

우리 형제 중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성실하며 공부를 잘했던 언니는 글씨도 너무나 예쁘게 썼다. 언니에게 원고정리를 부탁하던 오빠의 친구 하나는 언니 글씨만 보아도 좋았는지 언니를 좋아했다는 후문이다. 아무튼 얌전하고 따뜻한 언니는 오빠의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언니의 그 예쁜 글씨는 붓글씨를 오래 쓰지 않고도 국전에 나가 뽑힌 실력으로 증명이 된다. 오빠의 친구란 친구는 대부분 언니를 좋아했다는 이 인기 많은 아가씨가 좀처럼 둥둥 뜨지 않고 너무 무겁게 살았던 것은 철없는 아버지를 남편으로 두고 철없는 시누이 시동생을 키워야 했던 우리 어머니의 힘겨운 시집살이와 맏딸에 대한 과다한 희생요구 때문이다. 언니는 스스로를 어머니의 스트레스가 스며들던 스펀지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과연 그것을 알기나 할까?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던 이 여성 희생자들은 지금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

우리들은 언니가 학문을 했다면 그 머리와 성실성으로 정말 좋은 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쉽게 생각한다. 병치레만 하는 오빠보다 공부를 잘하고도 우리 집의 맏딸로 살림 밑천이 된 언니는 몇 해 정도 오빠의 학자금을 보태다 그만 시집을 가버렸다. 그리고 남편의 사업실패라는 커다란 암초를 만나 온갖 고행을 하며 두 아들을 의사로 만들고 딸 하나를 아주 훌륭한 교사로 만들고 지금은 학교와 복지회관 등에서 봉사생활을 하면서 의미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볶아 먹고 끓여먹고

국물까지 다 우려먹으며

허리 빳빳하게 힘쓰는 사람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소

< 멸치>

꽃시절도

꽃눈의 흔적도 없이

아이 손만 꼬옥 움켜쥐고

자기 생을 구걸하는

여자 아닌 질긴 어머니

<고구마 밭에서 >

뚜벅 뚜벅 걷는 <소>이자 아이 손만 꼬옥 잡고 생을 구걸하는 <여자 아닌 질긴 어머니>는 언니의 뇌리에 박힌 여자의 삶이자 바로 언니 자신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특히 <그 섬 유채 꽃들은 >시는 질긴 생명력으로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 지구를 끌어안고 비명도 끌어안고 모든 것 다 내놓으라며 빨판같이 눌어붙어 세상모르고 빨아대기만 하는 존재들에 대해 시퍼런 바다, 이 악물고 지그시 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강인한 생존력과 삶의 절실함을 노래함으로써 사막을 건너는 자의 힘이 보이는 시다.

대부분의 시들이 관념의 유희와 말장난으로 풍성한 현실에서 꽉 찬 생활인이자 네 아이를 키운 어머니로서 희생된 딸로서 온갖 체험을 가진 여성이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힘찬 여성사의 서사구조를 갖춘 시집을 남긴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변천사 속에서 그 나이의 연륜이 주는 지혜와 탄탄한 시공부의 긴장이 부족하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성취이다.

축제의 애드벌룬은 사람들을 흥분 시킨다. 그것이 단지 바람이 가득한 풍선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은 하늘에 떠서 바람에 날리며 축제를 알리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를 인생의 애드벌룬으로 생각해온 우리 언니의 정신성과 시사랑에 대해 존경을 표하면서 달팽이와ㅡ지구는 닮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지구는 늘 자전하지만 우리가 그 속도를 느낄 수 없는 것은 늘 같은 속도이기 때문이다. 언니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자신의 지금까지 생애를 끊임없이 시를 향해 걸어갔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언니는 스스로 달팽이의 모습을 선택한 지구이다.

둥글고 느리고 그래서 슬프고 아름다운 생명을 가진 자연 , 언니의 시는 오랫동안 생의 사막을 걸어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과 사물에 대한 이해와 허무함과 지혜로운 자만이 가진 겸손함이 있다. 그래서 참 아름답고 외롭고 슬프지만 혼자 있지 아니한다.

언니의 시는 알고 보면 간을 맞추는 일이 단순하기 짝이 없다(폐염전)는 깨달음이 있기에 또 < 온 몸이 길이다 > 에 도달한다.

초등학교 옆 담장 위에 나팔꽃 피었다

엄지와 검지로 슬쩍 비비기만 해도 으깨어지고 말

실같이 가느다란 몸으로

높은 담 위에 올라 앉아 해맑게 웃고 있다

< 온 몸이 길이다 >

언니의 시는 언니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인간의 진솔한 삶의 기록이자 여성의 역사와 삶을 그린 여성시이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느린 회향을 통해 자기완성과 인간에 도달하려는 언니의 시에서 나는 배우는 바가 참 많다. 빨리 앞으로 간다고 해서 잘 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형언할 수 없는 마음으로 언니의 시집을 축하한다.

2008년 7월 17일 김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