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펌/흑석동의 유래

도심안 2019. 8. 16. 04:57
33일 오후 02:42
흑석동의 유래 
 
흑석동(黑石洞) 이라는 동명은 흑석 제1동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의 빛이 검은색을 띠므로 '검은돌(黑石)' 마을이라 한데서 유래하였으며
예전에..
흑석나루 (흑석진, 黑石津)
현재의 흑석동 강변(원불교 서울회관 부근)에 있던 나루였다. 조선 초기에 민간인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며, 태종 4년(1385)에는 세곡의 운송을 위해 용산에서 충주 간 7개소의 수참(水站)을 설치할 때 흑석나루에 수참이 설치되어 참선(站船)의 정박소로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참이 폐지되고 동작진이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으며, 광복 이후 조정경기훈련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효사정(孝思亭)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지금의 노량진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때때로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으며,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개성에 묘를 쓴 아버지를 추모했다 한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이었던 이조판서 강석덕(姜碩德)이 붙였고, 그의 아들 강희맹(姜希孟)은 효사정기(孝思亭記)를 남겼는데 강희맹의 이 기문(記文)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금천현 누정조에 기록되어 있다. 정인지(鄭麟趾), 서거정(徐居正), 신숙주(申叔舟), 김수온(金守溫) 등 조선 초기의 학자와 문신들도 효사정과 관련된 시문(詩文)을 남겼다. 
 
 
범바위
흑석2동 시민아파트가 있었던 아래쪽 한강변에 있었던 바위이다. 옛날 이곳에는 많은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고기잡이를 하였다 한다. 어느날 한 낚시꾼이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낚자 갑자기 눈보라와 모래가 휘날려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앞발을 내미는 것이었다. 낚시꾼이 질겁을 하고 도망을 치자 호랑이도 그 뒤를 쫓아왔다. 낚시꾼이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고 마침 그곳에 구멍이 뚫린 큰 바위 속으로 들어갔더니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 바위 속에 갇혀서 나오지도 못하고 결국 죽었다고 한다. 이 호랑이가 앞발짓을 한 것은 잉어를 달라는 뜻이었는데 낚시꾼은 자기를 잡아 먹으려고 하는 줄 알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시민아파트 
 
명수대
서달산 꼭대기에 있었던 건축물로, 1920년 일본인 부호 목하영(木下榮)이란 사람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든 다음,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이 건물은 철거되었다. 
 
 
 
할딱거리
동양중학교 왼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 이곳 주민들이 이 산을 오르려면 숨이 가빠 헐떡거렸다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마루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연날리기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달마사
종창건시기1931년창건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1931년 구성당 유심 스님이 창건하고, 만공 큰스님이 주석하여 근대불교의 장을 열었던 사찰로, 서달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방과 함께 요사채, 대웅전을 신축하였고,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로 등록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삼성각, 불로원, 다보탑, 영천, 석조관세음보살입상, 일주문 등을 조성하였고,
1987년 대웅전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