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서원, 유자광이 유배중 정극인 서당을 고려학당으로 복귀 -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 보다 먼저
무성서원, 유자광이 유배중 정극인 서당을 고려학당으로 복귀
한국음악의 발상지 무성서원 최치원 유자광 정극인 이일제
756년 허기(許琦 태인허씨 시조)성왕은 당현종의 황제복위를 위한 군사양성으로 사용햇고, 887년 최치원은 박씨로 넘어가는 진성여왕 김씨
왕조를 지키기 위해 군사양성과 음악으로 탈춤 농악등 5개 최치원이 가르친 음악이 향악잡영오수 (鄕樂雜詠五首) 詩시로 남아있는 데
이곳에서 교육내용을 알게한다
율수현위 (溧水縣衛) 최치원 생사당이 이두문자 율수(聿修)제로 사용하여오다가 음악 전투 의술 웅변을 가르치는 훈련 기관으로 肄修齊 肄習會 私習 士習 月練臺 風月 花郞골 무성서원 지명이 '화랑고지' 라고 불리워 왔다
조선최초 주자학 서원이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 세운 백운동서원을 효시로 삼는다
그런데 이 보다 먼저 조선 성종 15년(1483)에 최치원 학당을 유자광이 고향 유배지에서 정극인에게 무성(武城)이라는 중국음악(音樂)고을 이름으로 창건 무려 140 년전에 서원이 이룩되었다
로마제국과 토번 당나라 촉지방 방위군관 허기장군이 신라국 정읍 칠보에 정착하여 후백제 학교제도로 사용한 국방 의술 음악 웅변 4과목 교육이 왕건태조의 사위 허사문(태산태수) 호족으로 사병교육학교로 이어왔다
당이 망해가는 시기 글안국과 후량국 후당국과 동맹 막강한 군사력이 견훤과 신검의 불화로 망해 고려국이 되었으나 글안군의 남침시에 태인에 당도하자 금산사 에 양성한 허사문 족 이허겸 사병들이 고려현종의 왕비를 이허겸 손녀로 교체하여 버린다
금산사 이씨 이의방이 무신정권으로 허승 이의민에서 부하 최충헌시대로 삼벌초군까지 모두 무술과 음악 경쟁으로 벼슬을 시키고 의학이 발달된다
최충헌의 송씨부인 그 외척 송군비장군의 7차 침입 입암산성 몽고군을 격퇴하여 포로를 통하여 몽고와 화친하고 쿠빌라이의 몽고황제 구테타 군부세력으로 원나라 세조를 만든 세력이 된다
그래서 송송래 송인이 득세하고 그 친구 허공의 최씨부인 딸이 원종의 며느리, 그리고 충선왕비로 이어서 원나라 기황후 원나라 태자비로 권겸의 딸이 들어간다
기황후가 세운 공민왕은 노국공주 가문이 원나라 실세에서 밀려나자 원나라 호북성 반란군 홍건적을 고려로 입국시켜 그 세력과 기황후 세력을 누르려 하엿다
그러나 안우 이방실 권희장군등이 홍건적을 격퇴하였다
그래서 공민왕은 안우 이방실을 죽인다
이방실 친족 이성계가 왜구 지리산 아지발도를 정읍의 호족과 함께 격퇴하여 그 힘으로 조선이 건국된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 왕자의 난에 정읍 개국공신 이화 사병의 힘으로 왕이되고 나서는 태산군의 군사력을 두려워 해서 사병페지를 시키고 그 로마교육 '학당' 군사교육 중심지 태산군을 없애 버린다
고려국 학당이 조선시대 유일한 향학당 (鄕學堂)으로 유배된 은인 유자광에게 특별사사한 곳으로 세조 유자광과 정극인. 이일제. 양사언 .정철. 윤선도 등 이곳의 연고자. 영향자만이 한글과 음악을 사용하고 백제가요 정읍사 멜로디를 그대로 묘사한 정읍농악의 2000년 교육역사 현장이다
즉 정읍칠보 태산군청 건물을 모두 헐고 인의(신태인)현과 합하고 현재의 태인면으로 현청을 이전 건축 태인현청을 짓는다
이를 보고 자란 손자 수양대군이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려고 누나 정의공주 안우 후손 안맹담 집으로 시집가고 따라 정읍 칠보 송인수 집으로 간다
정읍호족 송인수의 딸을 단종왕비로 지명하여 궁중권력을 장악하고 그 비장한 태산 사병으로 김종서 세력을 거세한다
수양대군은 여기서 유자광과 악공 허오 음악 배우고 가무에 능숙한 여자 혼전에 접하여 근빈 박씨로 봉하고 연산군 왕이 최초의 '가무인간문화재' 격으로 모든 행사에 근빈박씨 후백제 전통 가무를 궁중 궁 안.밖에 공연을 하여 보인다
세조가 서출 유자광을 중히 여기는 이유가 무술 음악에 뒤어난 재능이다
정극인(丁克仁, 1401년~1481년)이 죽은 2년뒤 해 1483년에는 柳子光의 조선왕조성종실록 기록이 없는 그 이유는 정읍 칠보면 성왕산(盛王산) 화랑곷 터에 최치원 율수학당을 크게 확장하여 짓는 해로서 유자광 기록문기사 숫자가 | 성종(275) | 연산군(139) | 중종(366) | 이처럼 많은데 1484년에 유배되어 서울에 없어서 비어 있는 그 이유를 알아 본다
부산 기장군에 유배된 유자광은 최치원과 후백제 고려에서 학당을 이어 정극인이 겨우 이어가는 실학교육이 정극인 마저 죽어 단절되는 위기에 성종왕의 비밀스런
지원으로 유자광이 유배중에 음악 웅변 의학 전투 4학문을 4부학당으로 확충하였다
조선 중종이후 유자광 연좌죄로 들씨워 죽이는 시대 연속으로 유자광 기록 말살해야만 무연고로 살아나는 조선역사 이다
동국여지승람 유일한 전투 음악 의술 웅변교육 실학교육 학당 정극인 손자 정걸장군이 임진난에 이순신의 제갈공명으로 대승한 이유다
성종임금은 자기 생명의 은인 유자광을 한명회와 인수대비가 명나라 법을 내세워 서출이라는 이유로 숙청시키려 하여 막지 못하고 부산에 유배시켰다
그러다가 다시 고향 전라도에 유배 되자
최치원이 태산태수로 재직중에 세운 생사당이였던 율수학당(聿修學堂)이 협소한 월연대(향두골;학당골)에서 성왕산 성지에 크게 확장하여 이전하였다
성종대왕이 죄없이 유배된 유자광을 위안하는 의미로 자금을 지원 정극인의 사설학당으로 사사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전라도 남원산성등 성곽개축을 하였다
서원 이름은 조선중종 1543년(중종 38)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 세운 백운동서원 처음 생긴다
그런데도 이보다도 140년 전의 학당은 유자광의 업적이라는 이유로 조선 중종반정. 인조시대부터 서인 노론이 삭제하여 버렸다
중종 때 죽이려는 조광조(趙光祖, 1482년 ~ 1519년를 살리려는 안향의 정읍후손 안처겸 이정숙 신잠등을 몰살시켜 안씨 친척이 풍기군에 살고 잇어서 그곳에
군수로 간 이퇴게 주세붕이 그 안당 안처겸 서적을 입수하여 배워서 그것을 기원으로 서원 이라고 햇다
여기서 태인현감 '신잠'만은 중국사신 접대 유일한 능력 문학 음악 미술 기능자로 죽이지 않아 서 그의 후손 설장구 신기남이 정읍 재인농악단으로 옹동면 농악을
가르처 미군정청에서 선발 1948 제주도 4.3사건전투에 위문단으로 순회공연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풍기 백운동서원은 국방. 웅변. 음악. 의학교육이 없는 곳이다
정읍의 무성서원은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음악 군사 의학 웅변을 가르키는곳 서원이 아닌 학당으로 존속하다가 유자광 사후 태인 여자 숙빈이 숙종의 후궁으로
숙종대왕이 태인여자 숙빈최씨로부터 왕자(영조)를 1691년에 출산하자 숙빈의 고향에 무성서원 무성은 공자가 세운 음악현 지명으로 음악을 주로교육했다는
의미가 들어잇다
무성서원 음악을 가르치는 강당 현가루
용비어천가를 지은 최항의 후손 태인여자 궁녀로 들어간 숙빈 최씨가 숙종 왕자를 난 숙종22년(1696)에 무성서원으로 음악 군사 의학 웅변을 가르키는 학당이 아니라 주자교육, 대명률, 공자. 맹자 선비를 추모하는 유교 서원으로 세운다
백제가요 토탬 정읍노래 반주 악단 정읍(수제천)농악은 이때부터 쇠퇴하고 유교적 계급표현 맹종하는 의식교육으로 변질되었다
중국 무성현은 공자의 제자 자유가 음악을 가르치는 고을 이름으로 음악의 교육을 의미 한다
성종 129권, 12년(1481 신축 / 명 성화(成化) 17년) 5월 21일(을미) 3번째기사
이조에 유자광에게 공신 녹권을 돌려주라고 전지하다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유자광(柳子光)은 사직(社稷)에 공(功)이 있으니, 공신 녹권(功臣錄券)을 특별히 돌려주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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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권, 13년(1482 임인 / 명 성화(成化) 18년) 7월 22일(기축) 1번째기사
유자광의 직첩을 돌려 주는 문제와 이인석의 어미 배씨의 적첩 문제를 논의하다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좌의정(左議政) 윤필상(尹弼商)·우의정(右議政) 홍응(洪應)이 와서 아뢰기를,
“ 유자광(柳子光)은 죄는 비록 중할지라도, 공(功)이 또한 크니, 이도 쓸 만합니다. 전일에 직첩(職牒)을 줄 때에 죄가 비록 중하지 않으나 결죄(決罪)한 연월(年月)이 오래 되지 아니한 까닭으로 은혜를 받지 못한 자가 또한 많았습니다. 지금 이미 유사(宥赦)를 베푸셨으니, 이 사람들도 분간(分揀)하여 시행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유자광은 공이 진실로 크다. 나도 이미 그것을 생각하고 경 등을 불러 의논하려고 하였다. 요즈음 내가 《무정보감(武定寶鑑)》을 보았는데, 만약 유자광이 아니었다면 예종(睿宗)께서 어찌 살 수 있었겠는가? 경들의 말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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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73권, 15년(1484 갑진 / 명 성화(成化) 20년) 12월 7일(경신) 5번째기사
의빈 임광재가 그 아비 임사홍의 직첩을 되돌려 주도록 상소하다
의빈(義賓) 임광재(任光載임사홍 아들)가 상언(上言)하기를,
“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신의 아비(임사홍)의 죄는 현석규(玄碩圭)를 음험한 소인(小人)이라고 하도록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사주(使嗾)하게 한 것이니, 이는 국가의 강상과 간도(奸盜)에 관계되지 아니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상달(上達)합니다.”
하였는데,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임사홍(任士洪)의 죄는 내가 이미 아는 것이고 직첩을 되돌려주는 은혜는 그대가 마땅히 바랄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조(吏曹)의 의도는 무엇이 마음에 걸린단 말인가?
이같은 일은 위(대비마마)에 달려 있는 것이지 아래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개과 천선하는 마음은 직첩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방촌(方寸)대명률 마음) 사이에 달려 있을 뿐이다.”
성종이 이때부터 인수대비로부터 왕권을 되찾게 되자 유자광을 죽이려는 모든 신하가 살리자고 입을 모으는 글이 아래와 같다
성종 174권, 16년(1485 을사 / 명 성화(成化) 21년) 1월 27일(경술) 4번째기사
전 무령군 유자광과 전 주계 부정 이심원의 서용 문제를 대신들과 의논하다
전(前)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과 전 주계 부정(朱溪副正) 이심원(李深源)을 서용(敍用)하는 가부를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이조(吏曹)에 의논하도록 명하니, 정창손(鄭昌孫)은 의논하기를,
“유자광은 공(功)이 매우 큽니다.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산지(散地)에 오래 둘 수 없으며, 징계하기를 이미 오래 하였고, 그렇다고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죄를 범한 것도 아니니, 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의논하기를,
“유자광은 비록 죄가 중하나 공신이니 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심원의 죄는 신하로서 의논할 것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재량하소서.”
하고,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남이(南怡)의 역모(逆謀)에 유자광의 공이 컸었으나, 전자에 간신(奸臣) 김언신(金彦辛)과 더불어 부동(符同)하여 현석규(玄碩圭)를 모함하여 해치려고 하여서 기군 망상(欺君罔上) 하였으니, 그 죄가 큽니다. 만약 공(功)과 죄(罪)를 논한다면 간사한 죄가 공(功)보다 중합니다. 서둘러 서용하지 마소서.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유자광은 사직(社稷)에 공이 있으므로, 끝까지 버릴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산지(散地)에 둔 지 이미 오래이므로 반드시 마음을 고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유자광이 공신(功臣)이 된 것은 다른 사람이 일월(日月)15928) 의 빛에 의지하거나 반린 부익(攀鱗附翼)15929) 한 것과는 다릅니다. 사직(社稷)을 옹호(擁護)한 공(功)은 크고 현석규(玄碩圭)를 배척한 죄는 작으니, 공으로써 허물을 덮어서 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남이(南怡)의 역모를 만약 유자광이 적발하지 아니하였으면 그 화(禍)가 차마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가 비록 크다고 하더라도 그 공이 족히 죄를 덮을 수 있으니, 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심원은 그 조부에게 죄를 얻었으므로 강상(綱常)을 허물어뜨렸으니, 서용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유자광은 파직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징계되었을 만하고, 사직에 공이 있으니 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심원이 그 조부에게 죄를 얻은 것은 임사홍을 공격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니 그 죄를 용서할 만하며, 또 학문이 있으니 서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서거정(徐居正)은 의논하기를,
“익대(翊戴)의 공(功)) 을 논하면 유자광이 제일인데, 이제 비록 죄가 있을지라도 공으로 허물을 덮어서 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심원은 그 조부에게 죄를 지었으니, 명의(名義)15931) 의 죄인인데 가볍게 서용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고, 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남이가 난(亂)을 꾀할 때에 유자광이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면 털끝 하나 용납할 시간도 없이 위태로왔을 것이데, 그 공이 매우 커서 다른 보통 사람과 비할 것이 아닙니다. 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한치례(韓致禮)는 의논하기를,
“유자광은 익대(翊戴)한 공이 중대하니 끝까지 버릴 수 없습니다. 심원은 재주가 있는 사람이기는 하나 그 조부에게 죄를 지었으니, 죄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하고, 김겸광(金謙光)은 의논하기를,
“유자광의 익대한 공은 다른 공신(功臣)에 비할 것이 아닌데, 오래 산지(散地)에 불우하게 두고 서용하지 아니함은 대체에 어긋남이 있으니, 공과 죄를 서로 비교하여 마땅히 공으로 죄를 덮어야 할 것입니다. 유자광은 공이 크고 죄가 작으니, 성상께서 재량하소서.
하고, 이숭원(李崇元)·김종직(金宗直)·이칙(李則)은 의논하기를,
“유자광은 처음에는 공신(功臣)에서 삭제되었다가 이제 돌려 주어서 이미 공신이 되었으니, 종신토록 서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김종직(金宗直)과 이칙(李則)은 의논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심원은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아니하고 유자(儒者)의 도(道)로 몸을 다스린다고 하니, 만약 그렇다면 반드시 조부를 능욕할 이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어서(성종)로 이르기를,
“과연 여러 의논과 같다. 유자광이 역모(逆謀)를 고한 공은 사직(社稷)에 있고 붕당(朋黨)을 비호(庇護)한 죄는 현석규(玄碩圭)에게 있으니, 이 두 일을 헤아리건대, 공(功)이 허물을 덮을 만하다. 만약 큰 공이 아니면 죄를 어찌 용서하겠는가? 오늘 정사(政事)에 서용할 것이다.
하였다.
세조(34) | 예종(36) | 성종(275) | 연산군(139) | 중종(366) | | 명종(2) | | 광해군일기(중초본)(1) | 광해군일기(정초본)(1) | 인조(1) | 효종(0) | 현종(1) || 숙종(13) | 숙종보궐정오(3) | 경종(2) | | 영조(10) | 정조(0) | 순조(2) | | 순종(1) |
안향이 죽자 충렬왕은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명으로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그 모사본이 현재 전하고 있다. 1319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 순흥에 그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그밖에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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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의 생애
안향은 정읍 칠보지역 허사문 송인 호족이 정치를 하여 원나라 황제를 만든 송씨세력 고려 원종에게 왕권을 돌려준 시대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안우 안당 안처겸 조상인 으로 보이는 안향 역시 원나라 세력 쌍화점 송씨 지역 정읍 산내 연고로 보인다
18세 때인 원종 1년(1260)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을 시작으로 벼슬이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에 이르렀다. 안향은 원종 11년(1270) 삼별초의 난 때에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고, 이를 계기로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된다. 그 후 충렬왕 1년(1275)에 상주판관으로 나간 일은 특히 유명한데, 그는 백성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민풍을 쇄신시켰으며, 유학을 장려하였다. 안향은 왕을 호종하여 여러 차례 원에 다녀왔다. 충렬왕 15년(1289) 11월에는 충렬왕과 공주를 호종(護從)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돌아왔다. 그 뒤 동왕 22년(1296) 12월에는 자신의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동왕 29년(1303)에는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및 문묘에 사용할 제기(祭器)와 육경(六經) 제자(諸子, 주자서(朱子書) 등을 구해 오게 했다.
그러므로 풍기 백운동은 송사련 밀고로 정읍사람 안당 안처겸 몰살로 피신한 집에 운이 좋아 군수로 가서 정읍 최치원 학당의 안향 선생을 이름만 모셔다가
서원의 시초로 만든것으로 유자광 말살에서 없어진 것이 영조 탄생으로 무성서원이 되살아난다
그러므로 풍기 백운동 서원은 주자학이고 정읍의 무성서원은 한국음악의 발상지로 그역사가 756년 허기장군이 당현종 양귀비 가무단장격인 당나라
음악의 대가이며 안금장 친족으로 신라국에 귀화한 것으로 이들 이웃사람 송인 송송레 세력이 원나라와 화친 쿠빌라이 황제 구테타 세력으로 원종 충열왕 충선왕 그리고 조선태조 수양대군 세조 에종 성종 연산군 광해군 영조 정조로 이를 정읍 동학군이 항거하다 정읍 칠보에서 항복 동학군 이용구가 1908년 30명의 장정을 회문산의병으로 들여보내려다 일본군에 사살된다
무성서원 정읍칠보중학교 농악단 학생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