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儒敎的 名分과 士林 敍事의 해체를 중심으로 - 沈 勝 求**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가문적 배경 3. 생애와 정치활동 4. 학문과 김종직과의 관계 5.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16세기 이후 조선의 정치를 흔히 ‘士林政治’라고 말한다.1) 그 시대의 문턱을 살다간 유자광(1439~1512)은 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2) 그에게 쏟아진 많은 부정적인 평가와 오명 때 문인지,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그에 대한 외면은 거의 당연한 것으로 여 겨 왔다. 굳이 비난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역
* 이 글은 2014년 10월 10일 남원시에서 발표한 「유자광의 생애와 정치활동」 ?“유 자광을 재조명한다” 학술심포지움 발표집?을 수정·보완한 글임을 밝혀둔다. ** 한국체육대학교 교양교직과정부 한국사 교수. 1) 宋贊植, 「조선조 士林政治의 권력구조—銓郞과 三司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사회 경제사의 연구?, 일조각, 1997(?경제사학? 2, 1978). 2) 유자광에 대한 평가는 南袞(1471~1527)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柳子光傳」?海 東野言? 2). 그 내용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관찬사서는 물론이고, 조선후기에 편찬된 ?國朝記事?와 ?東閣雜記?의 두 문헌을 인용한 ?燃藜室記述? (1776년 이전) 등 다양한 야사에 그대로 인용되어 유자광 평가에 근간이 되어 왔다. 246 … 한국학논총 (46)
사적 증오의 대상에 새로이 도전해야 할 이유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은 유자광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게 만든 배경이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근대의 역사학은 이념을 시대의 내적 필연성을 부여하는 구조로 보고 그것을 이해하거나 그것에 의거해서 개체의 역사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 을 목표로 삼는데 반해, 탈근대의 역사학은 그 같은 이념이 당대의 지배 권력을 합리화하고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관념으로 이해가 아닌 해체의 대상으로 파악한다.3) 전자가 과거의 실재를 구성하거나 재구성함으로써 역사를 쓸 수 있다고 한다면, 후자는 그러한 실재의 해체를 전제로 해서 성립한다. 조선왕조의 개창 이후 상하·존비·귀천을 정당화한 유교적 명분론은 천 첩의 아들인 孽子 유자광의 관직 진출과 정치 활동을 철저히 부정하고 거부하는 배타적 논리로 기능하였다. 더구나 16세기이후 조선 정국을 주 도한 뒤 이데올로기로 작동한 사림의 정치이념은 훈구세력인 유자광을 도덕적 죄인으로 낙인찍어 역사의 감옥에 수감시킨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유자광에 대하여 근대 이후의 역사는 물론이고,4) 현재도 여전히 부정적인 評價와 敍事들만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5) 영웅과 간신, 역적과 충신은 역사적 평가의 결과이자 시대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역사에서 조선의 사림만큼 적극적으로 ‘정의’의 위치에서 강조되고 평가된 사례는 흔치 않다.6) 사림은 조선의 역사 속에서 늘 ‘善’
3) 김기봉, 「우리시대 역사주의란 무엇인가」 ?한국사학사학보? 23, 2011. 394쪽. 4) 1908년 유자광의 정치적 사면과 복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죄인 내지 간흉(奸凶)으 로 보는 인식은 그뒤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論說, 敎育의 缺陷을 奈何 德育方 面에 就하야”, ?每日申報?, 1926년 5월 31일. 趙奎洙, 「歷代陰險人物討罪錄, 朝鮮 의 士禍를 츠음으로 이르킨 大凶孽·大奸物 柳子光」 ?별건곤? 제8호, 1927). 5) 유자광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역사는 물론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대중매체를 통 해 꾸준히 재생산되어 왔다. 관련한 근래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이이화, 「김종직과 유자광:사화의 불씨 당긴 20년 숙적」 ?이야기 인물한국사 5-역사상의 라이벌과 동반자-?, 한길사, 1993; 오종록, 「유자광, 으뜸가는 공신에서 간악한 소인으로 전 락한 사나이」 ?내일을 여는 역사? 11, 2003; 진상원, 「김종직과 유자광―군자와 소인」, ?동아시아사의 인물과 라이벌?, 조동원교수정년기념논총간행위원회, 아 세아문화사, 2008; 김용철, 「유자광평전 : 전투적 정치인 유자광」 ?미리보는 ‘한 계례역사인물평전’ 100?, 2012.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47
을 담보하는 정치세력이며, 그들의 정치적 논리나 주장은 ‘公論’ 또는 ‘淸 議’로 대변된다. 반면에 세조 정권 이후 등장한 이른바 勳舊는 무조건 부 패와 탐욕으로 물든 척결의 대상이었고 부도덕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경 향이 강하다. 그 결과 사림과 훈구의 갈등 과정에서 수많은 역적과 충신, 군자와 소인이 만들어지고 또 갈려 나갔다. 그러므로 훈구나 서얼의 입장에서 반론이나 재검토를 시도해 보는 것 은 15~16세기 조선 사회를 종합적이고도 균형적으로 판단하는데 기여하 리라 여겨진다.7) 더구나 관찬사료나 문집에서 유자광에 대한 역사적 평가 나 해석이 상당히 부정적인데 반해, 민간에서 전승되는 설화나 민담에서 는 그를 오히려 긍정적 태도로 인식하는 사실도 유자광에 대한 평가를 재고하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8) 유자광은 활발한 저술 활동에도 불구하고
6) 박병련, 「조선 전기 사림-훈구 갈등과 사림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정당화 –광원 군 이극돈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선중기 훈구·사림정치와 광주이씨?, 지식산업 사, 2011. 180~181쪽. 이 연구는 사림의 시각에 문제를 제기한 글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7) 유자광이 평가는 정조 연간에 편찬된 ?國朝人物考?에 실려있다. 이 책에 실린 인 물은 크게 相臣, 國戚, 儒學, 卿宰, 學者, 名流, 文官, 武弁, 休逸, 蔭仕, 士子 등 23 가지로 분류하는데 반역이나 奸凶 항목은 없다(민현구, 「국조인물고 해제」 ?國朝 人物考?,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그러면서도 유자광의 경우는 ‘卿宰’에 속해 있는데, 卿宰는 相臣(삼정승) 바로 다음의 고위 관직자를 말한다. 다만, ?국조인물 고?에 실린 유자광의 기록 가운데는 南袞의 「柳子光傳」이 실려있다. 이러한 사실 은 정조 년간에 유자광에 대한 인식이 유자광의 행적을 교훈으로 삼게 하면서 도, 아직 복권되지 않은 유자광을 고위 관직자로 평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유자광의 복원은 1907年 11月 18日의 순종의 大赦 詔勅을 받들어 죄명을 蕩滌하 라는 恩典에 의해 官爵追復의 案을 會議에 제출한다는 請議書 第115號에 의해 추 진되었다. 이어 1908년 7월에 유자광의 죄명을 씻고 그 관작을 회복하라는 지시 가 내려졌고(?官報? 第四千百廿四 / 隆熙二年七月十三日), 그 해 10월에 13대 후 손 柳時春이 무령부원군 유자광의 관작을 복구해 달라는 청원서가 제출되었고, 최종적으로 그 해 12월 15일(火)에 무령부원군이 추복되었다(?고종시대사? 6집, 隆熙 2年, 戊申(1908년, 淸 德宗 光緖 8年, 日本 明治 15年) 12月 15日(火) 참조). 8) 민간에 전해지는 유자광에 대한 연구는 고전문학적인 관점에 접근한 유영대의 글 이 선구적이다. 劉永大, 「說話와 身分의 문제-柳子光傳承을 중심으로」 ?民族文化 硏究? 16, 1982; 유영대, 「柳子光 實史의 변이양상과 그 의미」 ?又石語文? 2, 1985; 김귀자, 「남원지역의 인물전설 연구-이성계와 유자광 전설을 중심으로」 ?전북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7; 박대복 외, 「?혼불?에 수용된 유자광 설화 와 민중의식」 ?동아시아고대학? 20집, 2009. 248 … 한국학논총 (46)
사림들로부터 배척의 대상이 된 탓인지, 현재 그의 저술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9) 다행히 세조, 예종, 성종, 연산, 중종 등 5대에 걸쳐 장기간 정치 활동을 한 탓에 그와 관련한 글과 행적이 실록과 당대인의 문집에 남아 있어 그의 생애와 행적을 추적하는데 도움을 준다.10) 이 글은 그 같은 문제의식 아래 유교적 명분과 사림의 정치이념이 갖 는 일방적이고도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훈구와 사 림의 관계를 바라보기 위해 유자광의 삶과 행적을 구체적으로 재검토해 보려고 한다.11) 그 이유는 지금까지 유자광에 대한 연구가 기록에 대한 충실한 검토와 분석을 결여한 채, 종래의 시각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거나 서둘러 새로운 평가를 시도해 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12) 모쪼록 유자 광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와 평가에 작은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2. 가문적 배경 유자광의 본관은 전라도 靈光(陸昌, 六昌)이고 호는 于復이다.13) 그의 9) 이 글을 쓰는 도중에 유자광이 쓴 서체가 발견되었다. 도굴문화재 가운데 光山金 氏 金克忸(1436∼1496)의 誌石이 5점 나왔는데, 그 글을 쓴 인물이 유자광으로 밝 혀졌다(「세계일보」 2014.9.28.). 이 지석은 유자광의 서체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서, 향후 광산김씨 일가와 유자광의 관계를 추적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10) 설화와 구비전승 자료에 대해서는 유영대의 「앞의 글」이 참고된다. 한편, 그의 무덤과 관련하여 다음의 연구도 확인된다(김이석 외 8인, 「조선시대 유자광 묘 여부 논란이 있는 남원 영광류씨의 선산 내 灰槨墓 출토 인골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 ?대한체질인류학회지? 제24권 제2호, 2011). 11) 鄭杜熙, 「朝鮮 成宗9年 “戊戌之獄”의 정치적 성격」 ?서강인문논총? 제29집, 2010. 이 글이 주목되는 점은 실록의 사평이 지닌 사료의 진실성에 대한 문제를 처음으 로 제기한데 있다. 12) 다만, 최근 유자광에 대한 재평가를 위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으나,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한, 「유자광-서얼들의 다크히어로」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 청아출판사, 2010; 유정수, ?조선왕조실록에 의한 무령군 유자광?, 비전북하우스, 2014; 윤영근, ?유자광전?, 장편소설, 미간행 복사본, 2014. 13) 영광유씨가 언제부터 영광에 거주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전라도 나주목 영광군에 영광유씨는 확인되지 않는다(土姓六 金田曺宋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49
고조 柳資澤은 靈光柳氏의 시조로 공민왕 때 軍簿正郎을 지내다가 辛旽 의 徒黨으로 몰려 귀양 간다.14) 그래서인지 증조 柳漹(?~1407)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15) 그의 가문이 중앙 정계에 다시 등장 한 것은 조부 柳斗明(?~1408)이 조선 건국과정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16) 유두명은 고려 말 밀직부사를 지낸 南乙番의 사위가 된다.17) 남을번의 尹丁, 續姓二 朴(珍原來) 李(洪州來 皆鄕吏), 森溪姓六 周崔孫成公田。六昌姓五 曺安葛丁賓。臨淄姓四 李金黃朴, 陳良姓一 宋。 弘農亡姓三 丁金兪。 貢牙亡姓 一 陳). 그 이유는 아마도 유씨가 고려 말에 영광에서 남원으로 이주해 간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러다가 1481년(성종 12)에 편찬한 ?東國 輿地勝覽? 전라도 영광군의 성씨조에는 陸昌 柳氏가 등장한다. 육창은 영광의 屬縣으로 현 영광군 郡南面이다. 陸昌은 원래 ?世宗實錄? 地理志에는 六昌으로 나온다. 어떻든 ?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영광군 본조 인물조에는 유자광의 조부 유두명, 부 유규와 이복형 유자환이 등장한다. 이 사실은 15세기말 육창유씨가 곧 유자광의 가계인 영광유씨를 달리 부르는 명칭이었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이 들 성씨는 지역에서는 육창유씨로 쓰다가, 중앙의 과거나 관직에 진출할 때는 영광으로 쓴 것으로 이해된다.
14) 1778년 첫 족보인 戊戌譜에는 전라감사로 적혀있으나, ?고려사?에는 군부정랑으 로 확인된다(?高麗史? 권132, 열전 제45, 반역 6, 신돈). 한편, 영광유씨는 문화유 씨에서 갈려나온 11세손 자택을 中祖이자, 영광유씨의 시조로 보고 있다(?靈光 柳氏族譜?, 家藏 複寫本, 戊戌譜(1778). 그 뒤 1857년 두 번째 정사보에는 유자택 이 남원 乫峙黃竹里에 처음 거주한 것으로 기록된다(?靈光柳氏族譜?乾坤, 국립 중앙도서관, 古 2518, 59-52, 1, 2, 丁巳譜). 15) 1778년에 편찬된 ?靈光柳氏族譜?에 따르면, 柳沔으로 기록된 반면, 문과방목에는 자황의 증조가 柳漹으로 기록되어 있다(?國朝文科榜目? 辛未元年增廣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奎106 참조). 그런데 반계 유형원(1622∼1673)이 남긴 것으로 알려 진 ?聚星錄?(일명 聚物譜)에는 柳漹으로 그를 영광유씨의 시조로 언급하고 있다. 이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유자광의 증조의 이름 이 유언이라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그가 영광유씨의 시조라는 점이다. 족보에는 유언의 관직을 좌찬성, 묘는 남원 백파증산으로 적고있다(?靈光柳氏族譜?, 戊戌 譜(1778). 좌찬성은 후일 증손 柳子煥 또는 柳子光이 각각 靖難功臣과 敵愾功臣 이 되면서 추증된 것으로 보인다. 유언은 태종 7년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태종실록? 권14, 7년 12월 27일(병오). 16) ?靈光柳氏族譜?(2007)는 柳資澤, 柳漹, 柳斗明의 이력에 역사적 사실과 다른 많 은 오류가 확인된다. 17) 유두명이 검교시중 남을번(1320~1395)의 딸과 혼인하는 배경은 남을번의 선친 남천로가 靈光郡事를 엮임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檢校侍中南乙蕃卒。乙蕃 晋州宜寧人, 靈光郡事天老之子, 性醇謹。仕前朝, 歷官至密直副使。有四子在誾實 贄。至國初 以在誾爲開國功臣, 拜檢校侍中。卒年七十六諡敬烈, 官庇葬事(?태조실 록? 권7, 4년(1395 을해/명 홍무(洪武) 28년) 2월 13일(정축). 원래 고려말 유두 250 … 한국학논총 (46)
그림 1. 靈光柳氏 柳子光의 家系圖
(출전 : ?영광유씨족보?(戊戌譜, 丁巳譜) 및 실록 참조) 네 아들 중 南在와 南誾은 신왕조 개창에 참여하여 개국 1등 공신으로 책봉된다.18) 남재와 남은의 처남인 유두명도 이들과 함께 이성계를 적극 도운 공으로 건국 후 나주목사를 거쳐 代言(정3품)에 오른다.19) 유두명의 부친 柳焉이 죽자, 부의를 내릴 정도로 태종의 신뢰가 컸다.20) 그러나 이 듬해인 1408년(태종 8)에 유두명도 사망한다.21) 유두명과 의령남씨와의 명의 조부 유자택 또는 부친 유언이 영광(현 군남면 남창리)에 살던 중에 남천 로가 영광에 지군사로 부임해 오면서 영광유씨 집안과 사돈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18) 남을번(1320~1395)은 네 아들과 함께 조선 건국에 적극 참여한다. 다만, 네 아 들 가운데 남재와 남은이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 1등공신이 된다. 그러나 남 은은 정도전과 뜻을 같이 하다가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주살된다. 반면 남재 는 태종을 도와 대사헌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다. 남재의 高孫이 南怡이다. 19) ?太宗實錄? 권14, 7년 12월 8일(정해). 20) 賜賻左副代言柳斗明父喪米豆三十石、紙二百卷(?太宗實錄? 권14, 7년 12월 27일 병오).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51
사이에 아들 柳規와 딸 다섯을 두었다. 우선, 유두명의 첫째 사위는 세종 때 代言을 지낸 여산송씨 宋仁山(?~1432)이고, 둘째 사위는 남양홍씨 正 郎 洪齡이며,22) 셋째 사위는 고령신씨 監察 申梯(1392~1443)로서 신숙주 의 삼촌이다.23) 넷째 사위는 연안이씨 李補民이고, 다섯째 사위는 안동권 씨 權近의 조카인 직제학 權採(1399∼1438)로 ?鄕藥集成方?을 집필한 인 물이다.24) 그러한 가문적 배경아래 부친 柳規(1401~1473)는 태종 때 음서로 나간 뒤 무과를 거쳐 형조참의,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세조 즉위를 도와 좌익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된다.25) 1457년(세조 3)에 경주부윤을 역임하다 가 파직되어 남원으로 낙향했다.26) 그 뒤 유자광이 익대공신이 되자 지중 추부사를 제수받고 73세에 사망하였다.27) 유규는 청렴하고 엄숙하여 집에 서 자제를 대할 때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었고, 子煥과 子光이 귀하게 되었음에도 말이나 안색에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28) 또한 遺命 으로 장례를 ?朱子家禮?에 따라 지내게 할 정도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21) ?太宗實錄? 권16, 8년 7월 28일(갑술). 22)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홍령은 정읍 산내면 장금산 출신으로 단종 폐위시 정순왕후를 모시다가 임실 갈담에 은신하여 살았다고 전한다. 23) 신제는 남원에 살았다고 전한다. 24) 권채는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에 살았다고 전한다. 25) ?世祖實錄? 권2, 1년 12월 27일(무진). 26) 유규는 경주부윤 재임시절에 訟者 중에 뇌물을 쓴 자가 있으므로 노하여 형장을 치다가 죽인 일이 있어 드디어 坐罪되어 파직되니, 남원에서 살면서 오랫동안 벼슬하지 않았다. 27) 知中樞府事柳規卒, 輟朝賜賻 弔祭如例 規字景正 靈光人 代言斗明之子也 蔭補啓 聖殿直 宣德丙午 中武擧 例屬權知訓鍊錄事 歷軍器錄事 繕工直長 晋州判官 司憲 監察 黃海道經歷 原平府使 平壤少尹 漢城少尹 景泰癸酉 拜司憲府掌令 言事忤權 貴 左遷軍器副正 甲戌陞司憲府執義 轉司僕寺尹 尋遷軍器監正 又陞判司僕寺事 乙亥陞僉知中樞院事 遷刑曹參議 出爲黃海道觀察使 丙子遞拜戶曹參議 丁丑陞嘉 善慶州府尹 有訟者行賂 怒杖之死 遂坐罷 家居南原 久不仕 及其子子光爲翊戴功 臣 睿宗特授嘉靖行僉知中樞府事 規來謝恩月餘 以老求還 又特加資憲知中樞府事 命還田里 以遂其志 仍命所在官給祿 至是卒 年七十三諡貞肅 固節幹事貞 執心決 斷肅 子子煥 側室子子光 規居家嚴肅 待子弟 必冠帶見之 子煥子光雖至貴顯 未嘗 假以辭色 所至以淸嚴著稱 遺命喪事一依?朱子家禮?(?성종실록? 권27, 성종 4년 2 월 10일 (신미)). 28)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6, 全羅道, 靈光郡, 人物. 柳規. 252 … 한국학논총 (46)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29) 유규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모두 6명의 자녀가 있었다. 첫 부인은 礪山宋氏로서 유자환을 낳고 일찍 사망한다.30) 첫 부 인이 오랜 투병생활을 했는지, 여산송씨의 시녀였던 保寧崔氏가 첩이 되 어 子光, 子炯, 子晶 등 3형제를 낳는다. 보령최씨는 뒷날 자광의 공으로 貞夫人에 봉해진다.31) 하지만 보령최씨는 정식 부인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유규는 다시 두 번째 부인 竹山朴氏를 맞이하여 子晳과 딸 1명을 낳는다.32) 유규의 적자 柳子煥(?~1467)은 자광의 이복형이다.33) 1447년(세종 29) 생원시에 합격하여,34) 陵直에 나갔다가 문종 1년(1451) 문과에 급제한 뒤 주서에 오른다.35)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36) 수양대군이 중외병마도통사가 되자 그의 종사관이 되 었다.37) 세조가 말하기를, “유자환이 정난할 때에 나에게 이르기를, ‘마음 대로 군사를 소집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가히 松栢과 같은 절조가 있는
29) ?成宗實錄? 권27, 4년 2월 10일(신미). 30) 여산송씨는 유자환이 微時(한미한 시절)에 죽었다(?世祖實錄?권41, 13년 2월 25 일 신유). 이로 미루어 자환이 1447년(세종 29) 생원시에 합격하기 훨씬 전이었 던 것으로 추정된다. 31) 현재 ?靈光柳氏族譜?에는 자광의 아우인 子炯(?~1473), 子晶(?~1479)이 아예 없다. 32) 족보에는 유자석의 벼슬을 奮順校尉, 生進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유규의 사위 중에 申潭이 확인되는데, 여산송씨, 보령최씨, 죽산박씨 가운데 누구의 딸에게 장가간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마도 죽산박씨가 아닌가 추정된다. 33) 호가 箕山이고 시호 文襄으로, 원래 이름은 柳子晃이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 睿 宗이 즉위하자, 임금의 諱를 피해 자환으로 고쳤다. 34) ?司馬榜目(正統12年我世宗大王二十九年丁卯式?(Harvard-YenchingLibrary,K 2291.7.1746,1447). 이 방목에 따르면, 유자황은 생원 3등 12위(200명중 142위)를 차지했다. 이때 방목에는 본관 靈光, 거주지 南原, 父 柳奎, 妻父 尹炯, 雁行 庶 弟 柳子光로 확인된다. 35) 丁科 (21位) 陵直 柳子(作煥)晃 資憲 吏參功臣寧城君文襄公殿試講居首 靈光人, 世宗 庚子榜 (?國朝文科榜目?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 106). 이에 따르면 유자황 은 문과 40명 가운데 31위를 차지했으나, 殿試 講書에서는 1등을 차지했다(?端 宗實錄? 권5, 1년 3월 2일(기미). 36) ?端宗實錄? 권8, 1년 10월 15일(무술). 37) ?端宗實錄? 권8, 1년 10월 26일(기유).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53
자라 이를 만하다”라 할 정도로 세조의 신임을 받는다.38) 여러 벼슬을 거 쳐 도승지, 이조참판에 제수되고 筽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대사헌, 전라 감사를 거쳐 자헌대부에 승격되었는데, 1467년(세조 13) 2월 병으로 죽었 다.39) 유자환의 부인은 좌익공신 尹炯(본 파평)의 딸이다.40) 자환이 자식 이 없자 아우 유자광의 큰 아들인 房으로 잇게 하였다. 그런데 유자광이 관직에 나가기 바로 직전에 형 자환이 죽자, 갑사 유자광은 혼자 힘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유자광의 아우는 子炯, 子晶, 이복동생 子晳은 생원시에 두 차례 응시 했다는 기록은 보이나, 별다른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누이동생은 신담에 게 시집간다. 유자광은 함양 호장 朴致仁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房, 珍, 角과 딸 1명을 낳는다. 방은 세종의 8남 영응대군 琰의 아들인 淸風君 源 祖의 딸과 혼인하고 문과를 거쳐 참판에 올랐다. 진은 무과를 거쳐 병마 절도사, 각은 무과를 거쳐 선전관에 진출하였다. 사위 孫同과 손자 乘乾은 유자광과 함께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에 올랐다.41)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유자광의 가문인 영광유씨는 조부 두 명이 조선 건국과정에 참여한 뒤 태종대에 크게 활약하면서 의령남씨, 여산송 씨, 남양홍씨, 고령신씨, 안동권씨, 전주이씨 등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명문 가와 혼맥을 유지하며 가세를 확장해 나갔다. 이를 배경으로 부친 규가
38) ?世祖實錄? 권41, 13년 2월 25일(신유). 39) 유자환은 일찍이 어미 여산송씨의 喪을 당하여 장사지내는 것을 뜻과 같이 못하 여 매양 말이 이에 미치면 눈물을 흘리며 울었는데, 臨終할 때에 그 庶弟 유자 광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改葬하려고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 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 내가 죽은 뒤에 나를 先祖의 무덤 곁에 장사지 내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移安하면 내가 죽어서 눈을 감을 것이다.”하고, 말을 마치고 죽었다(상동). 40) 자환의 처 尹氏는 宰相 尹炯의 딸인데, 성품이 질투가 심하고 사나우며 放蕩하 여, 유자환이 살아 있을 때부터 尼僧과 몰래 交結하고, 유자환이 卒함에 미쳐서 도 슬픈 빛이 조금도 없었으며, 親屬들이 柩을 받들고 고향으로 내려가는데 윤 씨는 몸차림을 마치 따라가려는 것처럼 하였으나, 發引하는 날 저녁에 몰래 도 망하여 가지 아니하고, 마침내 머리를 깎고 尼僧이 되어 여러 산을 두루 돌아다 니며 여러 僧을 面對하여 經을 받거나 留宿하여 聲言하기를, “죽은 남편을 위하 여 福을 드리는 것이다.”하였으나, 실은 마음을 快樂하게 하려고 橫行한 것이었 다(상동). 41) ?中宗實錄? 권1, 1년 9월 8일(갑신). 254 … 한국학논총 (46)
세종·문종·단종·세조대에 종사하였고, 적형 자환이 생원시와 문과를 통해 고위직에 올라 정란공신으로 세조대 寵臣으로 활약하는 등 조선전기의 世族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1481년(성종 12)에 편찬 된 ?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영광군의 성씨조에는 유자광의 陸昌柳氏가 등 장하는가 하면, 인물조에 따르면, 유자광의 선대가 나타난다. 柳斗明 (벼슬이 代言에 이르렀다) 柳規 (斗明의 아들인데, 관리로서의 뛰어난 재간이 있었다. 여러 번 이름난 고을을 맡아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성품이 방정하고 엄격해서, 아들 子煥이 귀하게 되어서도 오히려 종아리를 때렸다. 벼슬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貞肅이 다). 柳子煥 (規의 아들인데, 과거에 급제하였다. 靖難功臣으로서 筽城君에 봉하고, 시호는 文襄이다) 42) 일반적으로 ?동국여지승람?의 인물조에는 지역의 대표 인물만 기록되 는 데에 비해, 영광군에는 유자광의 조부 柳斗明, 부친 柳規, 이복형 子煥 이 本朝의 인물로 연이어 나타난다. 아울러 그들의 기록도 타 인물조에 비해서는 상세한 편에 속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1481년(성종 12)에 ?동 국여지승람?이 편찬되는 무렵이 유자광의 지위가 정1품 숭정대부 무령군 이자 도총관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더구 나 후술하듯이, 이 시기까지만 해도 유자광이 서거정, 노사신은 물론 김종 직을 비롯한 인물들과 비교적 가까이 지냈던 점도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3. 생애와 정치활동 1) 성장과정 유자광은 1439년(세종 21)에 부윤 유규의 孽子로 태어났다.43) 侍女였던 42) ?新增東國輿地勝覽?卷36, 全羅道, 靈光郡, 人物. 43) 유규는 세종 24년에 황해도경력을 맡는다(?世宗實錄? 권97, 24년 7월 25일 계 미). 따라서 유자광을 낳을 당시 유규는 진주판관 내지 사헌감찰이었을 것으로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55 保寧崔氏(1410~1494)가 30세의 나이로 자광을 낳았다.44) 당시 천인에게 난 자식은 양인에게서 난 庶子와 달리 孽子로 불리며 노비가 되는 경우 가 많았다.45) 그런데 자광, 자형, 자정 3형제는 얼자임에도 嫡子와 같은 항렬의 돌림자를 썼고, 선친 유규에게서 家學을 배운 것으로 확인된다. 유자광은 감사 유규의 첩이 낳은 아들이다. 남원에서 살았는데 어려서 부터 재기가 넘쳤다. 깎아 세운 듯한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시 를 짓게 하자 즉시 “뿌리는 땅속에 기반을 두고 형세는 삼한을 누르네” 라는 시를 지었다. 유규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훗날 그가 크게 성취할 것 을 알았다. 그래서 유자광에게 매일 ?漢書?의 列傳 하나씩을 외우게 하고 銀魚 1백 마리를 낚게 했는데, 암송에 막힘이 없었고 고기도 그 숫자를 늘 채웠다.46)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재기가 넘쳤고, 詩와 史를 비롯한 유교적 소양을 꾸준히 쌓은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매일 은어를 백 마리나 잡게 한 까닭 은 아마도 그에게 침착성과 인내심을 기르게 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 런데 뒷날 남곤이 쓴 「유자광전」에 따르면, 그의 어린 시절을 다르게 묘 사하고 있다. 유자광은 府尹 柳規의 庶子인데,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같이 높 은 곳을 잘 타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무뢰가 되어 바둑과 장기로 재물을 다투고, 새벽이나 밤까지 길에서 놀다가 여자를 만나면 붙잡고 강간하였 다. 유규가 그 소생이 미천하고 狂悖하므로 여러 차례 매를 때리고 자식 으로 여기지 않았다.47) 보인다(?成宗實錄? 권27, 4년 2월 10일 신미). 44) 보령최씨의 나이는 1480년에 71세라는 사실에서 확인하였다(?成宗實錄? 권122, 11년 10월 28일 갑술). 이에 의거하여 유자광을 낳을 때 유규는 39세, 보령최씨 30세였다. 45) 심승구, 「어느 신발장수 이야기-李陽生」 ?장서각아카데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46) 柳夢寅, ?於于野談? 卷4. (?大東野乘? 2) 47) 南袞, 「柳子光傳」, (許篈, ?海東野言? 2). 256 … 한국학논총 (46) 그가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무인적 기질이 있었다. 또한 그가 어린 시 절에 행실이 나빠 그 부친이 자식으로 인정치 않았다고 할 정도로 부정 적인 묘사가 주류를 이룬다. 위의 두 기록 중 어느 것이 얼마만큼 진실인 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다만, 남곤이 쓴 두 번째 기록은 ?중종실록?의 史評에 그대로 실려 있다.48) 이 점은 김종직의 제자였던 남곤의 「유자광 전」을 근거로 사평이 쓰여진 사실과 함께 무오사화 이후 유자광에 대한 사림의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위의 두 기록을 통해 보면, 어려서부터 그의 성격이 활발하고 매우 민첩했으며 문무를 겸비하 며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9세가 되던 해인 1447년(세종 29)에 적형 유자환이 생원시에 합격 한 데 이어 13세가 되는 해인 문종 1년(1451)에는 문과에 합격하여 注書 에 오른다. 자환보다 10살 정도 아래인 자광은 그러한 집안 분위기에서 詩史를 비롯해 학문을 상당히 닦았던 모양이다. 그가 장성하여 문장에 능 하자 고을 사람들이 비웃어 말하길, “네가 비록 문장에 능하다 해도 서얼 에게는 벼슬길이 허락되지 않으니 어찌하겠느냐”49) 라고한 점은 그의 학 문이 지역 내에서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세조실 록?에는 그를 두고 “효용하고 민첩하여 騎射를 잘하고, 書史를 알며 文章 을 잘 하였고, 大言하고 氣槪를 숭상하였다.”50) 고 평가하였다. 그가 어려 서부터 오랫동안 학문적 소양과 무예를 쌓아 문장에 능했으며, 호방한 성 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서얼이라는 이유로 文科나 武科에 응시할 수 없었다.51) 그 러자 그는 일찍이 당시 中央軍이던 甲士로 진출하였다.52) 갑사는 신체와 家産이 충실한 자를 뽑았는데,53) 軍職이지만 大夫(4품)까지 오를 수 있어 48) ?中宗實錄? 권2, 2년 4월 23일(병신) 49) 그러한 사실은 “그가 장성하여 문장에 능하자 고을 사람들이 비웃어 말하길, 네 가 비록 문장에 능하다해도 서얼에게는 벼슬길이 허락되지 않으니 어찌하겠느 냐”라고 했다고 전한다(柳夢寅, ?於于野談?, 신익철 외 옮김, 돌베개, 622~623, 2006) 50) ?世祖實錄? 권42, 13년 6월 14일(정미). 51) 兵曹啓 各品妾産赴武擧則不可, 只許春秋都試 從之(?世宗實錄? 권28, 7년 5월 9일 (무인)). 52) ?成宗實錄? 권77, 8년 윤2월 24일(임술).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57 양반자제가 많이 들어갔다.54) 갑사에 진출한 그는 景福宮의 建春門에서 파수를 담당하였다.55) 갑사는 그가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하나의 배경 으로 작용하였다. 2) 이시애의 난과 관직 진출 유자광이 29세가 되던 1467년(세조 13)에는 함길도에서 이시애가 반란 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록 반란이 진압되지 않은 채 대치 상 황만 계속되자, 세조는 從征할 자는 良賤을 불문하고 포상한다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때마침 갑사의 당번 근무를 마치고 남원에 내려가 있던 유자 광은 뒤늦게 전 회령절제사 이시애가 반역을 일으킨 사실을 알고 서울로 올라와 上書를 올렸다.56) 이시애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4차례나 파견했음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으니, 더욱 서둘러 공격할 것과 자신도 참전하여 이시애를 잡을 수 있 기를 바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세조는 유자광의 글을 보고 경탄하며 도승 지 윤필상에게 글을 읽게 할 정도였다. 연이어 유자광을 부른 세조는 이 시애를 토벌할 전략을 아뢰게 한 뒤,57) 곧바로 兼司僕에 충원하였다.58) 세조는 그에게 함경도에 있던 강순과 어유소 장군에 보낼 諭書의 초안 을 작성한다.59) 원래 신숙주에게 작성하게 할 초안을 유자광에게 먼저 맡 53) 兵曹啓: “甲士試取之法, 擇當身及家産有實人充差, 已有定制, 然取才時, 但考保擧 單子取之, 故家産不實者, 容或有之。 請今後甲士有闕, 充補取才時, 京中則各其所 居部納保擧及年甲、四祖單子, 詳覈家産實不實, 傳報漢城府, 漢城府更加磨勘, 移文 本曹, 方許試取, 外方則守令依京中例, 報其道監司、節制使, 監司、節制使一同試 才, 分其等第錄名, 送于本曹, 覆試敍用。 其家産不實人保擧者及不用心覈實京外官 吏, 移文憲司論罪。” 從之。 54) 千寬宇, 「朝鮮初期 五衛의 兵種」, ?史學硏究? 18, 1964; ?近世朝鮮史硏究? 95~96 쪽, 1979. 55) 初屬甲士 把直建春門 上疏自薦 世祖壯其爲人 擢用之(?燕山君日記? 권30, 4년 7 월 29일(계해)). 56) ?世祖實錄? 권42, 13년 6월 14일(정미). 57) ?世祖實錄? 권42, 13년 6월 15일(무신). 58) ?世祖實錄? 권42, 13년 6월 16일(기유). 겸사복은 국왕을 신변을 호위하는 50명 내외의 최정예 금군으로서, 내금위와 쌍벽을 이루는 기병 중심의 친위병이다. 59) ?世祖實錄? 권42, 13년 6월 28일(신유). 258 … 한국학논총 (46) 긴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유자광의 兵法과 文章이 상당한 수준이었 음을 암시한다. 유자광을 신뢰한 세조는 그를 장수로 보내고 싶었지만, 서 얼인데다가 직책이 낮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세조는 그를 발탁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우선 그에게 ?兵要?를 강독시킨 뒤에 품계를 올려 주고,60) 아울러 무예 능력을 검증하여 남다른 능력이 있음을 드러내게 한 다.61) 그런 뒤에 세조는 그에게 총사령관인 도총사 龜城君에게 御札을 전 하는 임무를 맡긴다.62) 그가 다시 돌아와 함경도 적의 형세를 보고하 자,63) 세조는 그와 구체적인 작전을 논의하고, 특별히 宣略將軍 副護軍(종 4품)에 제수한다.64) 세조는 그를 다시 함경도로 보내 유자광의 口傳으로 왕명을 전하도록 지시한다. 都摠使 李浚에게 유자광의 전략을 듣고 작전을 수행케 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세조는 겸사복인 그를 보내면서 許通 시켜 東班에 진출할 수 있게 만들었다.65) 공을 세우고 돌아올 경우 요직 에 발탁하려는 뜻이었다. 실제로 유자광은 도총사 귀성군 준 휘하에서 이 시애를 토벌하되, 破敵衛를 직접 거느리고 적을 격파하였다.66) 1467년(세조 13) 8월에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敵愾功臣을 책 봉한다. 하지만, 공을 세운 유자광은 포함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당시 귀 성군, 남이를 비롯한 참전한 젊은 장수들의 반발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추 정된다.67) 그 대신 세조는 특별히 얼자인 유자광을 병조정랑(정5품직)에 제수하였다.68) 이 역시 대간의 반발이 뒤따랐다.69) 원래 郞官은 벌열가문 가운데 재주와 행실이 있고 文武科 出身이 아니면 임명치 않는 것이 관 60) ?世祖實錄? 권42, 13년 6월 29일(임술). 61) ?世祖實錄? 권42, 13년 6월 30일(계해). 62) ?世祖實錄? 권43, 13년 7월 2일(을축). 63) ?世祖實錄? 권43, 13년 7월 13일(병자). 64) ?世祖實錄? 권43, 13년 7월 14일(정축). 65) 命禮曹, 許通兼司僕柳子光仕路(?世祖實錄? 권43, 13년 7월 14일(정축)). 66) ?世祖實錄? 권13, 7월 17일(경진). 67) 후술하듯이, 그러한 사실은 예종이 즉위한 직후 南怡獄事이 일어나자 마자, 유자 광을 敵愾功臣으로 追錄한 사실에서 뒷받침된다(?睿宗實錄? 권1, 즉위년 10월 27일 (계축)). 68) ?世祖實錄? 권43, 13년 9월 22일(갑신). 69) ?世祖實錄? 권43, 13년 9월 23일(을유), 25일(정해), 38일(경인).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59 례였다. 그런데 얼자인 유자광을 정랑에 제수한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자 세조는 “너희들 가운데 유자광 같은 자가 몇 사람이냐? 나는 ‘絶世의 재주’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다시 말하지 말라.”70) 라고 거부 하였다. 조선 건국 이래 서얼로 육조의 낭관에 임명된 것은 유자광이 처음이었 다. 갑사애서 上書를 올린지 불과 3개월 만에 겸사복, 부호군을 거쳐 병조 정랑에 올랐다. 그야말로 최고속 승진이었다. 세조가 그를 병조의 요직에 파격적으로 발탁한 배경은 문무의 탁월한 능력과 함께 이시애 난을 평정 하고, 건주위 여진족을 소탕한 공로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 세조대 말기 정국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세조 13년을 전후한 시기는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소외된 武人들이 처 형되고, 공신집단 내의 알력으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이때 한명회, 신숙 주를 비롯한 重臣들이 이시애 난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정국 은 더 혼란한 상태였다. 세조가 이시애 난에 군대를 보낼 때 중신들을 제 외하고, 당시 18세의 종친 龜城君을 大將으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었 다.71) 더구나 이시애의 난이 한 달 넘게 진전이 없자, 세조의 속은 타들 어갔고 속히 진압할 인재가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유자 광이 세조의 의중에 꼭 맞는 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여기에 嫡兄 유자황 이 정란공신3등에 도승지·대사헌·감사를 지냈고 부친 유규도 원종공신 2등 에 호조참의·경주부윤까지 오른 가문적 배경도 그를 믿는 배경이 되었다. 세조 13년 8월 이시애 난이 넉달만에 진압되자마자, 그 해 9월 유자광 은 곧바로 강순을 따라 평안도로 이동하였다. 명나라가 건주위 여진족 李 滿住를 토벌하고자 조선에 합세해 줄 것을 요청한데 따른 것이다. 세조는 총사령관 윤필상, 주장 강순, 대장 어유소·남이 등에게 압록강을 건너 明 軍과 협공하여 건주위 본거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함경도 定平에서 평안 도로 떠나기 전에 상서를 올려 이시애 토벌 상황을 설명하고, 아울러 함 경도의 민심수습책을 제시한다.72) 그의 남다른 정치적 감각이 엿 보이는 70) 상동. 71) 鄭斗熙, ?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硏究?, 일조각, 1983. 222~231쪽 참조. 72) 유자광은 함길도 백성이 이시애 난에 동조하게 된 배경이 武士로 수령을 삼아 260 … 한국학논총 (46) 부분이다. 같은 해 10월 강순의 휘하에서 陷陣將 유자광은 건주위 동북쪽 파저강(현 동가강) 올미부의 여러 곳을 토벌하고 추장 이만주를 참살하는 데 공을 세웠다.73) 아울러 그는 本陣에 돌아오기 전에 건주위에서 얻은 전리품을 국왕께 보고하는 한편,74) 다시 평안도로 파견되어 포획한 중국 인을 대접하는 임무를 맡고 돌아왔다.75) 그해 12월 병조정랑 유자광은 휴 가를 얻어 병든 어미를 근친하는데, 약초와 역마를 내려 그의 공을 치하 한다.76) 1468년(세조 14) 1월에 세조는 온양행차 때 그를 총통장(銃筒將)으로 임명한다.77) 이때 세조는 호종하는 신하들을 대상으로 文武科 重試를 볼 예정이었다. 그러자 호종 신하 가운데 과거에 오르지 못한 유자광을 비롯 한 관료들이 상소를 올려 온양별시가 시행되었다. 그런데 시관 신숙주가 최종 선발한 3명에 유자광은 빠져 있었다. 세조는 직접 유자광의 對策을 뽑아 오게 하여 이를 장원으로 삼아 兵曹參知(정3품직)에 제수하였다.78) 당시 “조정의 의논이 자못 놀랐다.”79)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유자광에 대한 인사 조치는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그만큼 세조가 유자광에게 거 는 기대가 컸음을 반영한다. 유자광 역시 세조와의 만남은 千載一遇의 기회였다. 국왕만이 얼자라는 신분과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고 정계 진출을 가능케 하는 백성을 刑政으로 다룬 데에 있다고 보고하고, 교화를 펼칠 수 있는 문무를 겸비 한 수령을 임명할 것과 銃筒軍의 선발과 중요성을 건의하였다(?世祖實錄? 권13, 7월 17일(경진)). 73) ?國朝征討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참조. 74) ?世祖實錄? 권44, 13년 10월 11일(계묘). 75) ?世祖實錄? 권44, 13년 10월 22일(갑인). 76) ?世祖實錄? 권44, 13년 12월 14일(병오). 77) ?世祖實錄? 권45, 14년 1월 27일(무자). 78) 당시 시관 신숙주가 문과 초시에 합격한 對策 3道를 올렸는데, 병조 정랑 유자 광의 對策이 낙방한 試幅속에 있는 것을, 임금이 명하여 뽑아 오게 하여 보고 말하기를, “유자광의 대책이 좋은 것 같은데, 어찌하여 합격시키지 않았느냐?”하 니, 신숙주가, “대책 속에 古語를 全用한데다 文法도 또한 소홀하여, 이 때문에 합격시키지 않았습니다.”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古語를 썼다 하더라도 묻는 本意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지 않겠는가?”하고, 이 에 유자광을 1등으로 삼았다(?世祖實錄? 권45, 14년 2월 15일(병오)). 79) 상동.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61 유일한 돌파구였던 것이다. 그가 평생 세조의 의리를 그토록 강조하고 충 성을 되뇌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3) 南怡獄事와 공신 책봉 세조대 말 이래 지속된 구 공신세력과 신 공신세력간의 알력은 여전히 지속되는 형국이었다. 1468년 8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申叔舟, 韓明澮, 具致寬, 朴元亨, 崔恒, 洪允成, 曺錫文, 金礩, 金國光을 더해 9명의 구 공신으로 구성된 院相制를 시행하였다.80) 이어서 예종은 세조의 총애 를 받았던 병조판서 南怡를 兼司僕將으로 교체하였다.81) 아울러 왕실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먼저 궁궐의 수비체제를 재정비하고, 숙위 업무를 튼 튼히 하였다.82)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1468년(예종 즉위) 10월에는 남이 옥사가 벌어져 康純, 南怡, 曺敬治, 卞永壽 등을 처단하였다.83) 남이옥사 는 유자광의 고변에 의해 시작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세조대 말이래 지 속된 구 공신세력과 신 공신세력간의 알력 속에서 벌어진 정치 사건이었 다. 여기에 즉위 초기에 예종의 정치적 불안감이 깊이 반영되어 있었다. 예종의 입장에서는 훈신세력의 권력도 의식했으나, 남이나 龜城君 浚 등 의 젊은 신진 공신이나 종친세력의 급속한 성장을 더 위협적이라고 판단 하였다. 그런데 남이를 처단하는 날 예종은 유자광을 敵愾功臣 2등에 追錄한 다.84) 적개공신은 이미 세조 13년에 論功行賞이 모두 끝난 일이었다. 그 런데 2년이 지난 뒤 적개공신에 추가 책봉한 까닭은 유자광의 공을 보상 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85) 이어서 그는 남이역모를 다스린 공에 따라 80) 김갑주, 「院相制의 성립과 그 기능」 ?동국사학? 12, 1973. 81) ?睿宗實錄? 권1, 즉위년 9월 7일(계해). 82) ?睿宗實錄? 권1, 즉위년 10월 11일(정유). 18일(갑진). 83) ?睿宗實錄? 권1, 즉위년 10월 24일(경술). 27일(계축). 84) 兵曹曰 兵曹參知柳子光 可追錄敵愾功臣二等(?睿宗實錄? 권1, 즉위년 10월 27일 (계축)). 85) 남이를 처단하는 날에 유자광은 적개공신에 추록한다. 이 사실은 기본적으로 유 자광의 공을 인정하는 조치에서 비롯한 것이다. 적개공신에 임명되지 못한 까닭 이 남이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닌 가 의심된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천착이 262 … 한국학논총 (46) 30세의 나이로 翊戴功臣 1등에 책봉되고 武靈君에 제수된다. 남이옥사 이후 예종은 유자광을 더욱 신뢰하였다. 익대공신 1등에 봉하 면서 내린 교서에는 그 같은 예종의 인식을 잘 엿볼 수 있다. “경의 형 筽城君이 이미 皇考(세조)를 도와 능히 靖難의 공을 이루었고, 경이 이제 또 寡躬(예종)을 도와 翊戴의 공적을 세웠다. 우리 부자가 서로 계승함을 생각건대, 오직 경의 형제를 이에 의지하였으니, 막대한 공을 갚 고자 하는데, 어찌 비상한 恩典을 거행치 않겠는가”86) 예종은 선대에 이어 유자환, 유자광 형제의 공에 의지해 왔다는 사실을 밝혀 그 공을 높이 치하였다. 하지만 유자광의 신분적 하자로 인한 관료 들의 배척은 예종대의 왕권을 뒷받침하는데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예종은 그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87) 1469년(예종 1) 1월에는 建州衛 정벌을 위해 구치관을 대장, 어유소와 선 형을 좌·우장으로 삼고 건주의 지형을 잘 아는 유자광을 파견하였다.88) 이때 유자광에게 장수의 호칭이 없자, 예종은 대장 구치관에게 “유자광은 내가 정중하게 대하는 사람이니, 경이 도성 밖에서도 또한 마땅히 신임해 야 한다.”89) 고 당부하며, 鷹揚將軍을 삼아 파견하게 하였다. 예종대에 들어와 적개공신과 익대공신에 책봉된 유자광은 급속히 權臣 으로 부상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1469년(예종 1) 4월에 발생한 閔粹의 史 獄에서 확인된다. 민수의 사옥은 세조때 민수가 쓴 사초에 한명회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을 기록했는데, 예종 때에 와서 불법으로 고쳤다가 밝혀 요구된다. 86) ?睿宗實錄? 권1, 즉위년 11월 7일(계해). 87) 그 배려는 본인은 물론 아비와 어미, 처가, 아우들까지 미친다. 예종이 그의 부 친 유규에게 두 가정대부(종2푸)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했으나 사양하자, 다시 자 헌대부(정2품) 중추부지사를 초수하자 또 사양하니, 아예 남원에서 녹을 받도록 하였다(?睿宗實錄? 권7, 1년 9월 22일(임인)). 천인출신 자광의 어미는 봉부인(奉 夫人: 2품 이상 관리의 부인)에 봉해지고, 그의 두 아우들은 과거에 응시를 허락 받는다(?睿宗實錄? 권6, 1년 7월 22일 계묘). 또한 장인 함양 호장 박치인과 처 형 순년의 향역을 면해 준다(?睿宗實錄? 권4, 1년 3월 10일(갑오)). 88) ?睿宗實錄? 권3, 1년 1월 8일(계해). 11일(병인). 89) ?睿宗實錄? 권3, 1년 1월 16일(신미).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63 져 처형된 사건이다. 왕이 민수에게 사초를 고친 이유를 묻자, 그는 대신 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민수가 대신으로 거론한 30여명의 인물 가운데 유자광도 포함되어 있었다.90) 민수의 사옥은 한명회가 영의정에 복귀한 지 불과 3개월 뒤에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훈신세력들이 얼마나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엿보 게 한다. 예종은 관련 인사 몇 명의 처벌로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 정권 유지를 위해 훈신세력 보다 종친세력의 견제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종대 유자광은 求言에 상서를 올려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가 하 면,91) 국왕의 궐 밖 행차 시에 위장(衛將)을 담당하고,92) 殿講의 試官을 맡기도 하였다.93) 이때 자신의 同母弟 子炯, 子晶을 국왕의 특지를 얻어 생원시에 나가게 하였다.94) 그러자 당시 사관은 “유자광은 본래 好男으로 서 지위가 1품에 이르렀으나, 경박하고 狂妄하기가 옛날과 같았다.”95) 라 고 평한다. 사관이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이 다름 아닌 서얼이라 는 이유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예종의 신뢰 는 두터 웠다.96) 하지만, 그를 신뢰하던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만인 20세 의 나이로 요절한다. 4) 한명회의 탄핵과 公論 주도 예종이 죽고 13세의 어린 성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 이 원상제와 함께 이루어졌다. 1472년(성종 2)에는 성종의 즉위를 도운 90) ?睿宗實錄? 권5, 1년 4월 25일(무인). 91) 殿最의 법을 밝혀 요행을 줄일 것과 도적의 엄벌하여 양민을 보호할 것을 건의 하였다(?睿宗實錄? 권2, 즉위년 12월 10일(병신)). 92) ?睿宗實錄? 권2, 즉위년 12월 19일(을사). 93) ?睿宗實錄? 권6, 1년 6월 11일(계해). 94) ?睿宗實錄? 권7, 1년 8월 3일(갑인). 95) ?睿宗實錄? 권6, 1년 7월 22일(계묘). 96) 유자광의 공으로 그 아비 前府尹 柳規에게 특별히 嘉靖大夫(종2품 上階) 行僉知 中樞府事에 제수했으나 사양하자 다시 資憲大夫(정2품 下階) 中樞府知事로 超授 하자, 유규가 또 사양하니 임금이 특별히 남원 所在邑으로 하여금 같은 등급의 祿을 주게 하였다(?睿宗實錄? 권7, 1년 9월 22일(임인)). 264 … 한국학논총 (46) 佐理功臣 75명이 봉해졌다. 그 가운데에는 정란공신(7명), 좌익공신(13명), 적개공신(12명), 익대공신(21명) 등 모두 51명이나 된다. 과거 4차례 공신 책봉에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는 인물은 36명이고, 나머지 39명은 적어 도 한번 이상은 공신에 책봉된 인물이다. 특히 좌리공신 가운데 부자 형 제로서 공신이 된 수는 모두 28명으로 전체 37.3%에 달한다. 이는 세조대 이후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공신책봉이 몇몇 가문에 쏠린 증거이다.97) 유자광은 좌리공신에는 포함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대왕대비의 신임을 받았다. 궁궐의 숙위의 衛將을 맡기는가 하면, 유자광이 반란을 도모했다 는 무고가 제기되어 옥에 갇혔을 때도 원상들에게 그를 석방하도록 한 다.98) 1472년(성종 3)에는 숭정대부(종1품) 武靈君을 제수받는다.99) 이듬 해인 1473년(성종 4)에는 부친 유규가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100) 원상제 아래에서 각종 정치 현안에 참여하던 그는 성종의 親政을 위한 조치를 취한다. 즉 1476년(성종 7) 2월에 원상이자 좌의정 한명회를 탄핵 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101) 그해 1월 13일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 고 정사를 돌려주려 하자, 한명회가 아직 때가 아니니 권력을 돌려주지 말라고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다. 대간 이 즉시 한명회를 탄핵했으나, 본격적인 비판은 유자광에 의해 이루어졌 다. 그의 상소에는 한명회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대간을 지적하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102) 이로 인하여 처음에는 대간이 避 嫌을 청했다가, 곧바로 입장을 바꿔 유자광의 말을 지지하고 한명회의 죄 를 주청하기에 이른다. (대사헌 尹繼謙이 아뢰기를) 柳子光의 말은 유자광의 혼자 말이 아니 라, 곧 조정의 만세의 공론입니다. 신 등은 유자광의 이른바 指鹿爲馬 등 이 말이 단지 한명회의 邪惡한 마음만을 논하였을 뿐이요, 世代의 불행과 97) 정두희, 앞의 책, 240~251쪽 참조. 98) ?成宗實錄? 권4, 1년 4월 4일(임자). 99) ?成宗實錄? 권23, 3년 10월 2일(을축). 100) ?成宗實錄? 권27, 4년 2월 10일(신미). 101) ?成宗實錄? 권64, 7년 2월 19일(계사). 102) ?成宗實錄? 권64, 7년 2월 23일(정유).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65 행운을 논하지는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유자광의 말을 신 등은 그 불가한 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한명회를 아끼신다고 하더 라도 公論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그 죄를 다스리도록 명하여 신민들의 분함을 풀어 주소서.”라고 했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 다.103) 대사헌 윤계겸은 한명회를 탄핵한 상소가 유자광 개인의 말이 아니라 곧 조정의 公論이라고 밝히고 있다. 유자광의 발언이 당시 조정의 뜻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명회는 거듭 사직을 요청하였고, 대간은 한명 회를 두둔하고 오히려 유자광을 공격하는 도승지 柳輊까지 탄핵하였다. 이때 성종은 유자광의 말이 지나쳤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史臣은 “한명회 의 失言이 심하였는데도 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기에 이르니, 時議가 더 욱 그를 그르게 여겼다.”고 하였다. 결국 한명회의 탄핵 사건은 유자광을 파직하는 것으로 두 달 만에 마무리되었다.104) 그러나 유자광의 상소는 한명회를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을 뿐 아 니라 세조대 후반 이래 최고의 권력기구로 기능했던 원상제를 혁파하는 계기가 되었다.105) 물론 유자광이 한 직언은 성종의 의중을 정확히 읽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일이 있은 지 1년 반 뒤에 성종이 “경은 지난 번에 한명회를 탄핵하고 지금 또 대신의 일을 極言했으니, 내가 심히 아 름답게 여긴다.”106)고 한 점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1477년(성종 8) 윤2월 유자광은 오위도총부의 都摠管에 제수된다. 도총 관은 금군을 지휘 감독하며 임금을 좌우에서 모시는 무관의 최고 관직이 었다. 대사헌 金永濡는 “유자광이 서얼이므로 공이 있어도 불가하다.”는 의견에 이어 “조선은 사람을 쓰는데 반드시 門地를 택한다.”는 근거를 들 어 반대하였다.107) 계속되는 대간의 불가 이유는 서얼이 금병을 거느리면 사졸들이 복종치 않을 것이고, 동료 도총관이 부끄럽게 여길 것이며, 존비 103) ?成宗實錄? 권65, 7년 3월 1일(갑진). 104) ?成宗實錄? 권66, 7년 4월 27일(경자). 105) ?成宗實錄? 권67, 7년 5월 19일(신유). 106) ?成宗實錄? 권84, 8년 9월 6일(경오). 107) ?成宗實錄? 권77, 8년 윤2월 24일(임술). 266 … 한국학논총 (46) 의 분별이 없으면 조정의 기강이 서지 않고, 명분이 흐려지면 서자가 적 자를 능멸할 것이며, 유자광 스스로 기가 꺽이고 부끄러워 편치 못할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10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도총관 임무는 성종대를 넘어 연산군대까지 이어졌다. 5) 무술옥사와 유배 1478년(성종 9)에는 戊戌獄事가 일어났다. 이 일은 한해 전인 1477년 (성종 8) 8월 승지 洪貴達이 도승지 玄碩圭를 뺀 나머지 승지와 함께 왕 에게 보고한 일에서 비롯되었다.109) 당시 계속되는 승지들 사이의 논란 속에서, 武靈君 유자광은 상소를 올려 홍귀달에게도 죄가 있지만 화가 난 현석규가 임금 앞에서 무례하게 욕한 죄를 물어 홍귀달과 현석규를 모두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나아가 성종이 도승지 현석규를 비호한다고 비판 하였다.110) 성종은 “현석규와 任士洪은 모두 宗親의 사위이고 나와 韓僩은 4촌인 데, 어찌 유독 현석규만 비호하겠는가. 현석규의 실수는 다만 분노한데 있 는 것이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대간들의 논란이 계속되자, 왕은 홍귀달 의 고신을 박탈하고 孫舜孝를 그만두게 한 반면에 현석규는 대사헌에 임 명하였다. 그러나 대간의 반대로 하루 만에 대사헌 임명을 취소하고 말았 다. 성종은 親政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료들의 반발에 부딪혀 자 신이 신임하는 인물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111) 그런 상황 속에서 유자광은 다시 상소를 올려, 도승지 현석규를 小人이 108) ?成宗實錄? 권77, 8년 윤2월 27일(을축). 109) 이 사건은 종친 李諶의 처였던 과부 조씨가 전 현감 金澍와의 재혼에 대하여 조씨 부인의 형제 趙軾과 그의 매부 宋瑚가 김주의 강간이라고 주장한데에서 시작되었다. 승지 홍귀달은 강간이라는 주장을 도승지 현석규만을 뺀 나머지 승지와 의논하여 왕께 아뢰었다.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홍귀달을 조정 내 에서 상스럽게 욕하고 나선 현석규를 비판하는 여론이 더 컸다. 특히 대간을 위시한 젊은 관료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를 더 크게 바라보았다. 이 문제에 관 한 유자광의 입장은 젊은 대간들과 같았다. 110) ?成宗實錄? 권83, 8년 8월 23일(정사). 111) 정두희, 앞의 글, 386~392쪽 참조.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67 라 하며 당나라 德宗 때의 盧杞, 송나라 神宗 때의 王安石과 같다고 주장 하였다.112) 유자광은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형제·족친의 세력이 없고 홀 로 외롭게 세상에 나와 일을 만나면 과감하게 말하는 성격이었다. 지금까 지 유자광은 항상 왕의 뜻에 맞는 주장을 먼저 제기함으로써 조정 내에 서 높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현석규의 탄핵은 성종의 뜻에 맞서 는 것이었다. 당시 유자광의 상소는 그에 앞서 지평 김언신이 현석규를 탄핵한 상소와 같은 내용으로 확인되었다. 왕에게 상소할 때, 서로 의논하 여 사전에 입을 맞추는 일은 큰 죄에 해당하였다. 더구나 현석규를 盧杞 와 王安石에 비교한 것은 성종의 정치가 마치 나라를 그르친 당의 덕종 과 송의 신종에 비유하는 것으로 국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 나 성종은 말이 지나치지만 대신 무령군은 놔두고 金彦辛만 하옥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인 1478년(성종 9) 4월 1일 흙비 가 내리자 성종은 정책이 잘못되어 일어난 災異로 보고, 이를 그치게 할 求言을 하였다. 朱溪副正 李深源은 성리학을 깊이 터득한 鄭汝昌, 丁克仁, 姜應貞 등 遺賢을 등용할 것과 세조대 이래의 공신들을 그대로 중용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주장을 하였다.113) 이어서 유생 南孝源은 문종의 妃 顯德王后의 능인 昭陵복원을 주장하였다.114) 세조 2년에 단종복위 운 동이 일어나자 단종을 魯山君으로, 顯德王后의 소릉을 평민의 묘로 만들 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도승지 임사홍은 “소릉을 복원하는 것은 신하로서 감 히 논할 수 없는 일” 이라고 강조하면서 李深源의 상소와 연결지어 이들 112) ?成宗實錄? 권83, 8년 9월 5일(기사). 한편, 盧杞는 당나라 德宗때 간신으로 알 려진 인물이고, 王安石은 北宋때 신법을 추진한 인물로서 송대이후 성리학이 주류 학문이 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이근명, 「전통시대 중국의 지식인들 은 왜 왕안석에 반대하였는가?」 ?全北史學」 38, 2011). 특히 왕안석은 유교경전 의 실용적인 응용을 통한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성리학적 도통론의 관점 과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자 주자는 왕안석을 비판하였고 이는 주자학을 받아 들인 고려말 이래 조선사회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도현철, 「고려말 사대 부의 왕안석 인식」 ?역사와 현실? 42, 2001). 113) ?成宗實錄? 권91, 9년 4월 8일(기해). 114) 이현진, 「朝鮮前期 昭陵復位論의 推移와 그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23, 2002. 268 … 한국학논총 (46) 을 모두 세조대를 겨냥한 붕당으로 몰아 붙였다.115) 즉 小學의 도를 실행 하고 성리학적 이상을 지향하는 이들이 현재 실권을 잡고 있는 원로대신 들을 교체하기를 주장한다는 점을 들어 탄핵한 것이다. 서거정을 비롯한 세조의 찬탈과 그를 도운 훈구대신들은 자칫 漢의 黨錮, 宋의 朋黨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크게 반발하였다.116) 세조대의 훈신들이 정치의 중 심에서 활동하는 상황에서 훈구대신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은 겨우 친 정체제에 들어간 성종의 치세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원래 유자광은 이 같은 정국 흐름과는 크게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 이 심원과 南孝溫을 붕당이라 몰아갔던 임사홍이 공격을 받으면서 일어난 소용돌이에 유자광도 휩쓸려갔다. 과거 과부 조씨의 재혼문제를 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당시 승지들이 반목했을 때, 현석규와 홍귀달이 다투 는 과정을 외부로 발설한 사람이 승지 임사홍으로 지목받은 터였다. 이심 원과 남효온은 임사홍이 자신들을 비판하자, 과거에 임사홍이 도승지 현 석규를 비판한 때의 일을 다시 들춰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승정원 내부의 일에 대해서 임사홍이 대간 박효원을 부추겼다 는 의혹이 일자, 홍문관이 임사홍을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대사헌 유지가 당시 사헌부 지평이던 김언신이 현석규를 당나라의 노기와 송나 라의 왕안석에 비유했는데 이 모두를 임사홍이 시킨 것이라는 점을 상기 시키면서 그때 유자광도 이들과 입을 맞추어 현석규를 탄핵했다는 사실 을 거론하였다. 왕이 국문을 받아들이자, 김언신이 임사홍과 가깝고 또 유 자광과도 서로 가까운 사이이므로 이들이 결탁한 사실이 어느 정도 밝혀 졌다.117) 유자광은 言官이 아닌데도 대간을 부추겨 현석규를 탄핵했다는 잘못이 지적되었다. 결국 1478년(성종 9년) 5월에 유자광은 임사홍, 박효원, 김언신 등과 함 께 붕당을 맺어 조정을 문란케 한 죄로 모두 유배형을 받았다.118) 결국 무술옥사로 나이 42세에 유자광은 공신록에서 삭제된 채 동래로 유배되 115) ?成宗實錄? 권91, 9년 4월 15일(병오). 116) ?成宗實錄? 권91, 9년 4월 24일(을묘). 117) 정두희, 앞의 책, 402~405쪽 참조. 118) ?成宗實錄? 권92, 9년 5월 6일(정묘).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69 었다. 다만, 이듬해 4월 성종은 귀양간지 1년 만에 유자광의 공신녹권을 돌려주려 했으나, 연이은 대간들의 반대로 중단하였다.119) 3개월 뒤 이 사 실을 안 유자광은 귀양지에서 상소를 올려 동래 지역의 현안을 보고하였 다.120) 이는 성종이 자신의 공적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보답을 명 분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왕에게 인식시키려는 행동이었다. 한편, 1473년(성종 4)에 유자형이 죽고, 1480년(성종 10)에 노모를 모시 던 유자정이 죽었다. 그러자 1480년(성종 11)에는 동래부에 부처된 유자 광이 병든 노모가 있는 고향으로 옮겨 달라고 상소하여 허락을 받는 다.121) 그가 귀양간 지 3년 만에 특명으로 赦宥를 받고 남원으로 돌아가 노모를 모신다. 이때 역시 대간들은 사유 취소를 연이어 청했으나 받아들 여지지 않았다.122) 1481년(성종 12) 1월 남원으로 量移된 유자광은 箋文을 올려 감사를 표 하였다.123) 그해 5월에는 성종은 社稷에 공이 있으니 유자광에게 공신녹 권을 돌려주었다.124) 유자광이 아니었다면 예종께서 남이의 옥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125) 7월에는 대신들과의 논의에서 반대가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예종대의 공을 들어 유자광의 직첩(고신)을 돌려주었다.126) 양사가 부당함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27) 6) 정계 복귀와 정치 활동 1485년(성종 16) 1월에는 전 무령군 유자광의 서용문제를 논의하였다. 119) ?成宗實錄? 권103, 10년 4월 17일(계묘), 18일(갑진), 19일(을사), 20일(병오), 21 일(정미), 24일(경술). 120) ?成宗實錄? 권106, 10년 7월 13일(정묘). 121) ?成宗實錄? 권122, 11년 10월 28일(갑술). 122) ?成宗實錄? 권123, 11년 11월 12일(무자), 14일(경인), 20일(병신), 21일(정유), 24일(경자), 25일(신축), 26일(임인). 123) ?成宗實錄? 권125, 12년 1월 7일(임오). 124) ?成宗實錄? 권129, 12년 5월 21일(을미). 125) ?成宗實錄? 권143, 13년 7월 22일(기축). 126) ?成宗實錄? 권143, 13년 7월 22일(기축), 23일(경인). 127) ?成宗實錄? 권143, 13년 7월 23일(경인), 24일(신묘), 25일(임진), 26일(계사), 27 일(갑오). ?成宗實錄? 권144, 13년 8월 2일(무술). 270 … 한국학논총 (46) 정창손, 한명회, 윤필상, 홍응, 이극배, 윤호, 서거정, 허종, 한치례, 김경광, 이승원, 김종직, 이칙 등은 그의 서용을 찬성하여 서용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128) 여기서 사림파의 종장인 김종직이 그의 서용을 찬성한 것은 뜻 밖이다. 성종도 그의 유배가 7, 8년 되었으니,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간의 반대가 계속되자,129) 2월에 다시 대신들을 모아 서용문제 를 재논의 했으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자 성종은 유자광을 行副司勇(종9품 무관직) 말단직에 임명한 다.130) 귀양간지 7년 만의 복직된 유자광은 감사의 전문을 올린다. 그러자 사론은 이를 두고 따가운 시선을 던진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유자광은 약간의 재주가 있었으나 경박하고 조급하여 무릇 일을 만나면 바로 상소하였으니, 그 재주를 팔아 임금에게 총애를 구하려는 행위였던가? 그렇다면 비록 재주가 있다 한들 무슨 취할 점이 있겠는가?” 하였다.131) 1485년(성종 16) 4월 행부사용으로 복직한 그는 정계에 들어오자마자, 조정에 나가 재상들과 현안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132) 이어 그해 5 월에는 다시 崇政大夫 行知中樞府事를 제수받는다. 성종이 그를 본격적으 로 중용하려는 의도가 깔린 조치였다.133) 실제로 그는 1486년(성종 17) 10 월 정조사로 발탁되어 북경을 떠나, 이듬해 2월 귀국하여 중국 조정의 복 식에 따라 정비를 건의하였다.134) 1487년(성종 18) 3월부터는 경연에 참여 하는 特進官으로 기용된다.135) 6월에는 崇政大夫 漢城府 判尹을 제수하였 128) ?成宗實錄? 권174, 16년 1월 27일(경술). 129) ?成宗實錄? 권174, 16년 1월 28일(신해), 29일(임자). 130) ?成宗實錄? 권175, 16년 2월 29일(신사). 131) 상동. 132) ?成宗實錄? 권177, 16년 4월 13일(갑자). 133) 그 점은 성종이 한성판윤에 임명할 때, 그가 도총관을 거쳤고 정조사로 가서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말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미 그를 중용하려는 계획으 로 정조사로 보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134) ?成宗實錄? 권200, 18년 2월 28일(무술). 135) ?成宗實錄? 권201, 18년 3월 18일(무오).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71 다.136) 하지만, 의정부와 대간의 반대로 3일 만에 철회하고 만다.137) 한마 디로 얼자는 한성부의 장이 될 수 없다는 조정의 반대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성종은 그를 숭정대부 知中樞府事로 임명한다.138) 그해 10월에는 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賀登極使 右議政 盧思 愼과 함께 副使로 북경으로 다시 떠난다.139) 한성부판윤의 취소로 실의에 빠진 상태에서 또 먼 길을 떠나야하자, 서거정은 그를 위로하는 시를 보 낸다.140) 1489년(성종 19) 윤1월에 돌아온 그는 북경에서 사온 ?歷代名臣 法帖?을 받쳤다.141) 특히 중국 사행의 두 차례 경험은 그에게 다양한 정 책을 펼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488년(성종 19)에 경연특진관 유자광은 迎護送의 폐단, 의복·음식의 사치풍속, 邊將의 久任, 軍政의 해이에 따른 監軍御史 파견, 義州의 築城과 徙民, 軍戶의 完聚, 留鄕所 復位 등을 주장 하였다.142) 아울러 의주 및 동팔참, 요동, 광녕 등지의 산천 도로의 형세 가 그려진 지도를 바쳤다.143) 1489년(성종 20) 10월 유자광은 掌樂院 提調에 제수된다. 성종이 대신 들과 상의한 끝에 禮樂에 대한 그의 능력을 크게 인정한 탓이었다.144) 하 136) ?成宗實錄? 권204, 18년 6월 8일(병자). 137) ?成宗實錄? 권204, 18년 6월 9일(정축), 10일(무인), 11일(기묘). 138) ?成宗實錄? 권204, 18년 6월 13일(신사). 139) ?成宗實錄? 권20권, 18년 10월 16일(임오). 140) 서거정은 유자광과 시로 주고받을 정도에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 四佳集?에 따르면, 유자광과 차운한 시가 있다. 그 내용은 서거정은 유자광이 귀양을 가거나 북경을 두 차례 다녀올 때에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시로 확인 된다(?四佳集?, 詩集, 제44권, 詩類 送賀登極副使武靈柳公 子光 二首. 참조). 141) ?성종실록? 권212, 19년 윤1월 29일(갑오). 현재 국립도서관에는 ?歷代名臣法帖?(제2, 刊寫年未詳, 古 445-20)이 소장되어 있다. 이와 같은 책이 성암박물관에 도 소장중이다(歷代名臣法帖/王著(宋) 模勒, 拓本(中國), [中國] [刊寫者未詳], [南宋光宗(1190-1194)]頃刻, [拓印年未詳] 折帖裝1帖:無界, 6行字數不定, 無魚 尾; 30.8 x 23.5cm 刊記: 淳化貳年壬辰歲十[?]月六日奉聖旨模勒上石 綿紙). 유자 광이 성종에게 바쳤던 서책일 가능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142) ?成宗實錄? 권213, 19년 2월 2일(병신), ?成宗實錄? 권212, 19년 윤1월 29일(갑 오), ?成宗實錄? 권215, 19년 4월 23일(병진). 한편, 그의 주장 가운데 유향소 복위의 경우, 만일 호강하고 교활한 무리가 폐단을 끼친다면 죄를 주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입장은 곧 사신의 지탄을 받는다. 143) ?成宗實錄? 217권, 19년 6월 11일(계묘). 144) 유자광은 문무를 겸비했을 뿐 아니라 예악에도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272 … 한국학논총 (46) 지만 대간의 반대가 빗발쳤다. “문무의 재주는 있으나 俠客과 같은 그를 나라의 근본인 예악을 다루는 부서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조는 물론이고 경연특진관도 옳지 못하다는 주장이었다. 대간의 비방이 계속 뒤따르자 그는 스스로 제조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성현과 함께 장악원 제조로서 雙花曲, 履霜曲, 北殿歌 등에서 음란한 가사를 고치는 한편,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樂書의 전범인 ?樂學軌範?(1493)을 편찬하는 큰 업적을 남긴다. 1491년(성종 22)에 유자광은 황해도 體察使로 파견된데 이어,145) 1492 년(성종 23)에 司饔院 提調에 제수되었다.146) 이처럼 성종16년 정계 복귀 이후 그는 성종의 신뢰와 대신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지중추부사·경연특진 관·장악원제조·도총관·체찰사·사옹원제조를 거의 동시에 맡아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유자광을 비판하는 사관의 史評이 급 속히 늘어나는 까닭도 그의 활발한 정치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147) 그의 승승장구 만큼이나 요직 진출을 반대하는 여론도 커졌고 남원의 토호로 서 횡포를 부린다는 비난도 쏟아졌다. 세조대 이래 훈신이던 그는 당시 서울에서 남원 사이의 양성, 공주, 연산, 은진, 여산, 임실에 田莊을 둘 정 도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148) 성종은 당시 많은 정보를 유자광으로부터 입수하였다. “만일 유자광이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어떤 길로 알게 되었겠는가?”149)라고 할 정도였 사실은 조정의 대신들에게 의견을 묻자 대신 중 윤필상, 노사신, 이철견, 손순 효는 그의 지식과 재주가 충분하다고 밝힌 점에서 확인된다. 특히 손순효는 무 릇 악학, 지리, 의약 이 같은 유는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데, 유자 광은 지식이 해박하므로 모두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成宗實錄?권 234, 20년 11월 1일 을묘). 또한 서거정은 유자광이 왕을 독대하는 자리에서 예 악에 능통했음을 암시했다는 내용의 시를 남긴다(“생각건대 일찍이 대궐에서 독대할 적에 예악 글자가 종횡으로 삼천 자나 되었다네(想得丹墀曾獨對 縱橫禮 樂字三千)?四佳集?, 詩集 제44권, 詩類). 145) ?成宗實錄? 권260, 22년 12월 16일(무오). 146) ?成宗實錄? 권264, 23년 4월 6일(병오). 147) 유자광에 대한 사론은 성종 16년 2월 그가 복직되는 때부터 시작되어 성종대 말까지 국왕의 총애에 따른 각종 정치활동, 관직제수, 노모봉양, 고향에서의 작 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꾸준히 제기된다. 그리고 그 경향은 연산군대 이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더 격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148) ?燕山君日記? 권5, 1년 5월 3일 (을유).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73 다. 그는 아는 바를 임금께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권세있는 사람에 해당 되는 경우라도 예외가 없었다. 그를 두고 “사람됨이 감히 말하기를 좋아 함이 천성에서 나오는 것”150)이라는 표현처럼, 자신이 품고 있는 말을 숨 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직언은 임금에게 신뢰를 주기도 했지만, 과도한 언사는 늘 조정에 분란과 비판거리를 제공하는 빌 미가 되었다. 하지만 실직에 임명되지 못한 탓에 그는 잦은 상소와 전문을 올려 자 신의 주장과 입장을 피력하였다. 늘 경연의 자리에서 말을 많이 하였고, 그 수위는 갈수록 정도를 넘는 수준으로 발전했던 모양이다. 성종이 그의 발언을 두고 “시행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간사하게 의심을 일으켜서 매 양 들어와 아뢰니, 불가하지 않느냐.”151)고 불만을 터뜨릴 정도였다. 더구 나 그는 경연 특진관으로서 국왕의 자문 수준을 넘어 지방관의 인사문제 까지 거론하였다.152) 이는 임금의 권한을 침해할 소지가 큰 것이었다.153) 실제로 대간도 아니며 의정부도 아닌 상태에서 그의 발언은 정도를 벗어 난다는 반발을 피할 수 없었다.15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성종의 신뢰는 끝까지 바뀌지 않았다.155) 7) 戊午史禍의 실상 성종이 재위 24년 만에 죽자 1494년 12월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이때 유자광의 어머니의 상과 성종의 상이 겹쳐 어느 상을 따를 것인가를 묻 자, 조정에서는 모친상을 따르게 하였다.156) 유자광은 ?禮經?에 실린 바에 따라 임금의 상복을 입은 채 어미의 葬事를 지내고 돌아와 임금의 장사 를 따르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57) 유자광이 이러한 행동은 149) ?成宗實錄? 권234, 20년 11월 24일(무인). 150) ?成宗實錄? 권221, 19년 10월 19일(기유). 151) 상동. 152) ?成宗實錄? 권283, 24년 10월 24일(을유). 153) ?成宗實錄? 권284, 24년 11월 24일(을묘). 154) ?成宗實錄? 권284, 24년 11월 25일(병진). 155) ?成宗實錄? 권284, 24년 11월 28일(기미). 156) ?燕山君日記? 권1, 즉위년 12월 26일(을유), 27일(임오). 274 … 한국학논총 (46) 선왕의 의리를 잃지 않으면서 새 임금에게 충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풀 이된다. 하지만, 1495년(연산군 1) 4월 유자광의 모친상에 사치함을 국문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158) 1497년(연산 3)에 모친상을 마친 유자광이 기복 하자, 58세의 나이로 무령군에 이어 특진관에 임명된다. 하지만 성종대 이 래 꾸준히 성장해 온 三司(대간과 홍문관)의 발언권은 대신들에 대한 공 격을 넘어 국왕을 압박하는 수준까지 치닫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잘 못된 인사의 표본으로 제일 먼저 경연특진관 유자광이 지목되었다.159) 호 협한 賤孽이자 小人을 近侍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연산군 4년(1498) 7월에 일어난 戊午史禍는 삼사와 대신은 물론 왕권과 신권(언간권) 사이의 갈등에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160) 사건은 尹弼商, 盧思愼, 韓致亨, 柳子光이 왕에게 金馹孫의 사초를 보고하는 일로 시작되 었다. 문제의 사초에는 세조가 며느리 權貴人과 昭訓을 불렀으나 따르지 않았다는 내용과 김종직이 弔義帝文으로 세조를 비방한 내용이 들어 있 었다. 이 사초는 세조의 정통성을 겨냥하는 동시에 그 자손인 연산군의 귄위를 크게 훼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원래 이 일은 실록청당상 이극돈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다가, 김일손의 사초 속에 ‘자신의 비행’과 ‘세조의 일’이 쓰여진 것을 본 뒤 유자광에게 발설하여 일어났다.161) 실록에서 이극돈을 ‘무오사화의 首惡’이라고 평가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162) 하지만, 무오사화가 더 커진 까닭은 이극돈 157) ?燕山君日記? 권2, 1년 1월 1일(을유). ?燕山君日記? 권4, 1년 3월 28일(신해). 158) ?燕山君日記? 권4, 1년 4월 9일(임술). 159) ?燕山君日記? 권25, 3년 7월 30일(기사). 160) 심승구, 「朝鮮前期 政治史에 대한 試論-燕山君代를 중심으로」, ?북악논총? 11, 1993. 161) ?燕山君日記? 권48, 9년 2월 27일(갑자). 이극돈이 사초의 일을 유자광에게 넘 겨준 까닭은 김일손과 성준에 대한 앙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극돈이 병조판 서로 있을 때 성준을 북도절도사로 삼자 성준이 노하여 극돈의 아들 이세경을 억지로 평사로 데려간다. 그때 대간이 이 일을 논하지 않다가, 나중에 김일손과 이주(李胄)가 대간이 되어 차자(箚刺)를 올려 이극돈과 성준이 당을 이루려 한 다고 비판하였다. 더구나 차자에는 보통사람으로 말하지 못할 일도 있기 때문 에 당시 사림은 그들을 칭찬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이극돈과 성준이 두 사람을 원망하며 “지난 일을 왜 들춰내서 논란을 일으키는가.” 라고 하며 앙심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中宗實錄? 권2, 2년 2월 2일(병자)). 162) ?中宗實錄? 권8, 중종 년 6월 17일(정축).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75 과 유자광 외에도 그동안 삼사의 공격을 받았던 대신 윤필상,163) 도승지 신수근 등의 원한들도 큰 영향을 미쳤다.164) 특히 유자광은 위관을 맡아 적극적이고도 삼엄하게 국문을 주도하였다. 무엇보다도 세조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기본적 으로 훈구 대신은 ‘세조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세조 를 비방한 김종직은 세조의 원수요, 그 자손인 제왕들에게는 대대의 원수 이며, 세조를 섬긴 公卿世家의 공동 원수라고 본 것이다.165) 이러한 인식 은 김종직 일파를 붕당으로 몰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좋은 논리적 근거 로 활용되었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을 剖棺斬屍하고, 김일손을 비롯한 상당수의 선비들 이 큰 화를 당하는 사건으로 끝이 났다. 아마도 옥사를 다스리면서, 그는 남이옥사를 떠올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옥사의 최종 판결에서는 처벌을 줄이자는 노사신의 입장과 달리 엄하게 처벌하려는 유자광의 입장이 채 택되었다.166) 더구나 옥사를 처리하는데 公議를 거쳐야 한다는 일부 주장 에도 불구하고, 유자광은 독단적으로 사건을 처리함에 따라 그에 대한 불 만과 원한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167) 大獄은 끝났지만, 김종직 일파의 여죄를 묻는 옥사는 그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 가운데는 홍유손을 비롯한 죽림7현이 시대를 비방한다는 죄 목으로 잡혔고,168) 생원·진사의 모임 장소인 전국의 司馬所를 모두 폐지 하였다.169) 시대를 비방하고 인물의 시비를 논하며 붕당을 이루어 폐단을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이를 적극 주도한 이는 유자광이었다. 그런 163) 후일 김시양은 “무오년의 화가 모두들 이극돈ㆍ유자광에게서 나온 것은 알지 만, 그것이 윤필상의 주장이라는 것은 모른다. 필상이 사소한 원한으로 李穆을 죽이고자 하여 드디어 무오년의 옥사를 일으키니, 당시의 사류들이 다 주륙 되 었다. 노사신에게 趙舜을 죽이라고 원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마음의 음흉함이 鏌鎁(보검)보다도 더하다. 연산이 포악한 것은 대체로 윤필상이 유도한 것이다 (金時讓, ?涪溪記聞?). 164) ?燕山君日記? 권30, 4년 7월 29일(계해). 165) ?中宗實錄? 권2, 2년 2월 2일(병자). 166) ?燕山君日記? 권30, 4년 7월 29일(계해). 167) ?燕山君日記? 권30, 4년 7월 18일(임자). 168) ?燕山君日記? 권31, 4년 8월 14일(정축). 169) ?燕山君日記? 권31, 4년 8월 10일(계유). 276 … 한국학논총 (46) 데 잡혀온 홍유손의 일파 가운데는 유자광의 큰 아들 柳房도 小學契에 포함되어 있었다.170) 유자광은 자신의 아들은 홍유손의 일에 간여치 않았 다고 하여 석방시켰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는다.171) 당시 처벌 과정이 공 정치 못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연산군 즉위 이래 대간의 탄핵으로 정치적 궁지에 몰렸던 그는 사초 사건을 이용하여 김종직 무리들을 제거함으로써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172) 그의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신속한 판단력이 돋보인다. 그 러나 유자광의 권세만큼이나 그를 향한 비난과 원성도 높아졌다. 옥사가 끝나자 당시 민간에서는 그를 두고 “南怡를 죽여 가산을 차지하고도 오히 려 부족해 또 어진 인재를 죽여 상을 타려고 한단 말이냐.”173) 라고 하면 서 증오심을 드러낸다. 선비들의 화로 인해 유자광에 대한 미움이 커지자, 남이 또한 억울하게 죽었을 것이라는 세간의 의심은 더욱 늘어갔다. 남이 를 반란자로 본 제왕들의 인식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다. 실록에는 사화가 일어난 뒤 세간의 상황을 “선비들은 기가 죽어 들어 앉아 탄식만하고 學堂은 한동안 글을 읽는 소리가 없었으며, 부형들이 자 제들에게 공부는 과거에만 응하고 그만두게 하였다.”174) 고 적고 있다. 결 국 무오사화는 연산군 폭정을 드러내는 사건이자 세간에서 유자광을 간 신이자 역적으로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8) 중종반정과 죽음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은 재위 12년 만에 쫓겨났 다. 연산군대에 권력을 누리던 유자광도 1504년(연산군 10)에는 폐비사건 170) ?燕山君日記? 권31, 4년 8월 20일(계미). 171) ?燕山君日記? 권31, 4년 8월 24일(정해). 172) 1499년(연산군 5)에 유자광은 사옹원제조 만을 제외하고 특진관, 도총관, 산릉 도감제조에서 모두 물러났다가, 2년 뒤 병조판서 이극돈의 천거로 도총관에 다 시 복직된다. 1502년(연산군 8)에는 翁主와 君이 避病을 위해 궁궐을 나와 유 자광의 집으로 머물 정도로 총애를 받는다(?燕山君日記? 권46, 8년 10월 26일 을축). 173) ?燕山君日記? 권31, 4년 11월 30일(임술). 174) ?燕山君日記? 권30, 4년 7월 29일(계해).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77 에 관련된 이극균과 사귀었다는 이유로 임사홍과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 고 경기도 군사로 充軍된다.175) 물론 이 조치는 다음날 곧바로 취소되었 다.176) 하지만, 갈수록 커져가는 연산군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위기감은 그가 중종반정에 적극 가담하게 되는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177) 유자 광은 68세의 나이로 반정에 적극 가담하여 靖國功臣 1등에 올라 武靈府 院君과 領經筵事에 오른다.178) 이어서 최고 품계인 大匡崇祿大夫(1품)으로 제수되고, 忠勳府 堂上이 되었다. 하지만, 반정공신으로서 유자광의 권력과 지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1507년(중종 2) 반란사건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그가 연산군 때 무오사화 의 원흉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179) 그러자 그는 김종직의 남은 무리가 자신을 죽이려는 시도가 계속되는 것을 알고 스스로 시골로 물러가겠다 는 의견을 밝혔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지방 수령이 파직된 것에 대하여 유 자광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대간은 정부의 당상이 아닌데 공론 을 저지하는 것이라고 탄핵을 시작하였다.180) 이 사건은 대간과 홍문관, 대신들과 성균관 유생까지 가세하는 사태로 확대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오사화에 대한 전모와 유자광의 죄상이 밝혀짐에 따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연이어 주장이 계속되었다. 대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504년(연산군 10) 甲子士禍도 그가 주도했다는 죄목까지 추가했다. 윤필상, 이세좌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도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 다.181) “사림이 통분하여 기회를 기다린 지 오래였다.”는 것이 당시의 공 론이었던 것이다. 중종은 “유자광은 여러 대 조정의 元勳이니, 파직도 너무 과한데 또 어 찌 죄를 더하겠는가.”182) 라고 두둔하였지만, 할 수 없이 그를 광양에, 그 175) ?燕山君日記? 권53, 10년 윤4월 28일(무자). 176) ?燕山君日記? 권53, 10년 윤4월 29일(기축). 177) 유자광이 중종반정에 가담하게 된 까닭은 성희안을 비롯한 반정세력들이 유자 광이 지모가 많고 경력이 많다고 하여 불러 함께 한 것으로 확인된다(?燕山君 日記? 권63, 12년 9월 2일 기묘). 178) ?中宗實錄? 권1, 12년 9월 8일 (갑신). 179) ?中宗實錄? 권2, 2년 윤1월 25일(기사), 26일(경오). 180) ?中宗實錄? 권2, 2년 4월 13일(병술). 181) ?中宗實錄? 권2, 2년 4월 16일(기축). 278 … 한국학논총 (46) 의 아들인 유진은 양산에, 유방은 산음에 각각 유배보냈다.183) 유자광은 戊午年의 獄事를 주창하고 다시 甲子年의 士禍를 일으켜 士 大夫가 다 죽고 宗社가 거의 뒤집어질 뻔했는데도 목숨을 보전해 천명대 로 살게 되었으니, 유배지에서 죽더라도 나라를 그르친 자의 경계가 될 수 있겠는가?184) 위의 기록처럼, 유자광은 중종대 이후 무오사화와 함께 갑사사화를 일 으킨 주범으로 인식되었다.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으로 그는 다시 전라도 광양에서 강원도 평해로 옮겨졌고 靖國功臣의 號를 삭제하며 그 자손도 먼 지방으로 유배보냈다.185) 아울러 유자광에게 상으로 내려주었던 집과 토지 등은 모두 환수하였다.186) 그러면서도 그는 유배지에서도 추가로 추 국을 당하다가, 1512년(중종 7) 6월 유배지에서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 났다.187) 종종은 그가 翊戴의 공이 크다 하여 勳券을 도로 주고 禮葬을 바랬으나, 대간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1514년(중종 9)에는 종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상소로 인 한 조정의 공론에 따라 그의 원훈을 삭제하였다.188)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자광에 대한 사림의 원망은 그가 죽은 뒤에도 한동안 좀처럼 식지 않 았고, 조선후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182) ?中宗實錄? 권2, 2년 4월 22일(을미). 183) ?中宗實錄? 권2, 2년 4월 23일(병신). 184) ?中宗實錄? 권3, 2년 5월 1일(계묘). 185) ?中宗實錄? 권4, 2년 9월 2일(임인). 186) ?中宗實錄? 권3, 2년 6월 18일(경인). 187) ?中宗實錄? 권16, 7년 6월 15일(정사). 188) ?中宗實錄? 권19, 9년 1월 16일(경진).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79 4. 학문과 김종직과의 관계 1) 유자광의 학문 유자광은 일찍이 부친 유규에게 家學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詩를 배우 고 매일 ?漢書?의 列傳을 하나씩 외웠다는 사실에 알 수 있듯이, 그는 도 통과 의리를 내세우기 위한 성리학의 유교경전 보다는 현실정치를 위한 詞章學과 經世學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의 저술이 남아있는 것은 없지만, 유자광은 꽤 많은 저술을 남긴 것 같다. 그러한 사실은 서거정이 登極副使로 사신가는 유자광에게 次韻한 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해 저문 호남 땅의 그대가 몹시 생각나서 / 歲暮湖南苦憶君 눈보라를 따라 생각이 산란하기 그지없네 / 思隨飛雪亂紛紛 한가로이 어조와 친함은 오늘의 흥취요 / 閑占魚鳥當年興 공신록에 책록된 건 예전의 공훈이로다 / 曾策麒麟舊日勳 몸 밖의 허명은 지나가는 새처럼 덧없고 / 身外虗名如過鳥 눈앞의 시사는 흡사 뜬구름만 같구려 / 眼中時事似浮雲 그대는 문장의 저술이 지금 하 많으니 / 文章著述今多少 응당 가문의 명성 있어 유문을 이을 걸세 / 應有家聲續柳文 대대로 전해온 별장은 봉군보다도 나은데 / 靑氊別墅勝封君 세상일 모르는 깊숙한 거처가 또한 좋네 / 更愛幽居遠世紛 이미 취할 때마다 주덕은 칭송했거니와 / 已向醉時頌酒德 또한 시가 교묘한 곳엔 시훈도 세우겠지 / 却於工處策詩勳 논설과 저술이 유향 같단 걸 진작 들었노니 / 曾聞著說同劉向 굳이 자운처럼 조롱을 해명할 것 없고말고 / 不必解嘲學子雲 오늘은 동문 나가 남해 가까이 가 있으니 / 當日東門近南海 그대는 또한 응당 악어문도 지어낼 테지 / 也應賦得鰐魚文 이 마음은 결코 천군을 저버리지 않건만 / 此心端不負天君 가소로운 건 지금껏 백분을 한탄함일세 / 自笑如今嘆白紛 280 … 한국학논총 (46) 조정의 빈자리 채움은 분에 넘쳐 부끄럽고 / 承乏巖廊慙不分 공신 책록도 입었지만 무슨 공이 있었으랴 / 叨參盟府復何勳 영운의 등산 나막신이나 한가히 생각하고 / 閑思靈運登山屐 도잠의 산 나온 구름이나 조용히 사랑하네 / 靜愛陶潛出峀雲 두보 노인은 으레 이백만 생각하거니 / 杜老尋常憶李白 한 동이 술로 언제나 조용히 글을 논할꼬 / 一樽何日細論文189) 위의 시는 성종 때 무술옥사로 남원으로 귀양간 유자광을 위로하기 위 해 서거정이 화답한 시이다.190) 서거정은 ‘文章著述今多少 應有家聲續柳文’ 라 하여, 유자광의 문장과 저술이 꽤 많고 그 능력이 柳文의 뒤를 이을 것 이라고 평가한다. 柳文은 당나라 때 최고의 문장가 중 한 사람인 柳宗元 (773~819)의 문장으로, 유자광의 성이 유종원과 같으므로 이른 말이다. 또한 서거정은 ‘曾聞著說同劉向’라 하여, 유자광의 저술과 논설을 前漢 의 학자인 劉向(BC 77년 추정 ~ BC 6년 추정)에 비견할 정도로 높이 평 가하고 있다. 실제로 유자광은 세조때 일선의 장수들에게 보낼 諭書의 초 안을 작성할 정도로 뛰어난 문장력을 지녔던 것으로 이해된다.191) 이처럼 유자광은 詩史와 諸子百家, 그리고 唐宋의 文章에 능통하여 당대인들 사 이에서도 문장으로 명성이 꽤 높았던 것 같다. 하지만, 현재 유자광의 문 장과 저술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유자광은 문장뿐만 아니라 시에도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시에서 서거정은 유자광이 고요한 곳에서 지은 시로 詩勳을 세울 수 있기를 기 대한다.192) 실제로 서거정은 다른 시에서 “武靈의 절묘한 시구는 柳州의 앞이로세” 라고 하여 유자광의 시를 유종원에 버금가는 시로 치켜 세웠 다.193) 유자광은 당시 서거정과 시와 글로 주고 받을 정도로 매우 가까운 189) 徐居正, ?四佳集?, 四佳詩集 卷50, 詩類, 送賀登極副使武靈柳公子光 二首. 190) ?四佳集?,에는 서거정이 무령군 유자광에게 쓴 시가 모두 6首가 확인된다. 2首 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길을 위로하는 시이고, 2首는 남원에 귀양갔을 때 위 로하는 시이며, 기타 2首가 있다. 191) ?世祖實錄? 권42, 13년 6월 28일(신유). 192) 詩勳은 詩歌를 창작하는 데에 대한 공훈을 말한다. 193) 武靈은 武靈君 柳子光이고, 柳州는 당나라때 柳州刺史를 지낸 유종원을 가리 킨다.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81 사이였다.194) 서거정이 유자광의 시와 문장을 唐宋八大家의 한사람인 유 종원에 비견한 사실은 그를 칭찬하기 위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시와 문장 이 꽤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의 학문은 고려말 이래 唐·宋代 古文의 영향을 받아 문장을 중시하 면서도, 국가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정치, 경제, 국방, 사회, 문화, 예술 등 의 경세학에 능했던 것 같다. 특히 그는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등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귀와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은 즉시 왕에게 말하 였다. “유자광이 上箚하기를 (중략) 역대 盛世에는 대간과 재상이 각각 소견을 가지고 서로 殿陛 아래에서 시비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지 弊風이 아닌 것입니다. 대간과 재상이 서로 시비하다가 끝내는 바른 공론 으로 돌아가는 것이 재상과 대간의 직책입니다. 재상과 대간이 서로 시비 하지 못하여 일체가 되지 못하고 피차의 구별이 있어서 서로 의심하고 두 려워하여 그 정리를 다하지 못한다면 조정의 복이 아닐 듯합니다."195) 그는 대간과 재상 간의 시비가 공론으로 가는 하나의 방도로 인식하였 다. 이러한 정국운영 방식은 三司를 중심으로 공론을 이끌어가는 사림의 인식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사림들이 유자광을 비판하는 기 저에는 바로 이러한 정국인식의 차이가 깔려있었던 것이라고 판단된다. 유자광은 세조대 이후 국왕을 중심으로 재상과 대간이 시비를 통해 공론 을 만들어 국정을 운영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2) 김종직과의 관계 그동안 학계에서는 김종직이 유자광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으로 만 이해해 왔다. 유자광이 써서 걸어놓은 함양군(함양읍 운림리) 學士樓 의 현판을 함양군수 김종직이 떼어 버린 사실은 그러한 인식을 뒷받침하 194) ?燕山君日記? 권41, 7년 9월 28일(계묘). 195) ?中宗實錄? 권2, 2년 4월 13일(병술). 282 … 한국학논총 (46) 는 단적인 예이다. 한번은 咸陽郡에 놀려 갔다가 시를 짓고, 그 시를 고을 원에게 부탁하 여 현판에 새겨 벽에 걸게 하였는데, 金宗直이 그 고을 원으로 가서, ‘자 광은 어떤 자인데 감히 현판을 걸었는가.’ 하며 곧 떼어내 불태우게 하니, 자광이 분개하여 이를 갈았다. 그러나 종직의 寵遇가 한창 높았으므로 도 리어 찾아가 교제하였으며, 종직이 죽자 挽辭를 지어 王通과 韓愈에 비하 기까지 하였다.196)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유자광이 지은 현판을 떼어 불태워 버 린 시기는 1471년(성종 2)이다.197) 그러니까 유자광이 학사루의 현판을 붙 인 것은 성종 2년 이전이다. 당시 적개공신으로 1품에 오른 유자광은 처 가인 함양을 찾았다. 그의 장인이 함양의 호장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지위 를 이용하여 글을 쓴 뒤 군수에게 부탁하여 현판을 붙였던 모양이다. 일설에 따르면, 학사루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창건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따라서 김종직은 유서깊은 학사루에 유자광이 글을 써 붙인 것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종직이 현판을 뗀 이유가 천한 인물이 쓴 것이라 그런 것인지, 쓴 시의 내용이 참람해서 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이 현판을 떼어 버 린 사실에 대해 유자광이 불만을 가질 가능성은 크다. 그런데 김종직이 생전에 유자광과 꽤 가까운 사이였을 것으로 짐작되 는 글이 발견되었다. 김종직의 ?佔畢齋集? 속에는 ‘장차 운봉을 가려고 하는데 柳 武靈이 요천의 언덕에서 문후를 하다’라는 제목의 시가 보인다. 요수 가의 운막 아래서 음식을 차리니 / 雲幕行廚蓼水傍 아영(운봉)가는 나그네가 잠시 배회하누나 / 阿英歸客蹔彷徨 새와 고기는 통천의 현기증을 놀라지 않고 / 禽魚不駭通天暈 196) ?中宗實錄? 권2, 2년 4월 23일(병신). 이와 같은 내용은 李廷馨, ?東閣雜記?. 上. 本朝璿源寶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197) 김종직이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유자광이 지은 현판을 떼어 불태워 버린 것은 1471년(성종 2)이다(?佔畢齋集?, 佔畢齋先生年譜 참조). 이때 유자광의 나이는 33세이고 김종직의 나이는 41세이다.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83 손과 종자는 함께 향기로운 술잔에 취했네 / 賓從俱霑藥玉香 그물에 든 생선은 전야의 미각을 제공하고 / 入網雪鱗供野味 숲 너머 화려한 집은 가을 경치 드러내누나 / 隔林華屋露秋光 한나절 동안 진솔하게 즐거운 놀이 하였으니 / 淸歡半日成眞率 후일 서울에서 어찌 이 일을 잊을 손가 / 輦轂他年豈可忘198) 김종직이 전라도 운봉으로 내려가는 길에 유자광이 남원의 요천가에서 문후를 하였다. 이때 유자광은 유배지를 남원으로 옮겨 귀양살이를 하던 중이었다.199) 김종직은 남원에서 반나절 정도를 쉬어 가는데, 그 시간이 꽤 즐거웠는지 서울에 돌아가서도 잊을 수 없다는 시를 써 소회를 남긴 다. 김종직이 남원에서 유자광과 만난 뒤 두 사람의 관계가 더 돈독해 진 것으로 짐작된다.200) 김종직이 원래부터 유자광과 가까이 지냈는지는 자 세하지 않다.201) 다만, 적어도 남원에서의 만남 이후 두 사람 사이가 좋아 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뒤 유자광은 자신의 고향 남원에서 잡은 미꾸라지를 천리나 되는 서울의 김종직에게 올려 보낸다.202) 그러자 김종직은 곧바로 ‘유 무령이 남원에서 미꾸라지 오십 마리를 보내니 走筆로 사례하다’라는 제목의 시 로 답하였다. 희고 가는 고기는 요천에 있어야 진짜 맛이 나는데 / 銀刀風味蓼川中 천 리나 되는데 진미를 보내니 상공에 짐이 되었구려 / 千里分珍荷相公 198) ?佔畢齋集? 詩集 第21卷, 詩. 將如雲峯柳武靈見候蓼川岸. 여기서 武靈은 유자광 의 공신호로서, 유자광의 본관인 靈光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199) 유자광은 무술옥사로 1478년(성종 9) 5월에 동래로 귀양갔다가 노모의 병환으 로 인해 1481년(성종 12) 1월 유배지를 남원의 고향집으로 옮긴 후 1485년(성 종 16) 2월에 이르러 7년여 만에 복직된다. 따라서 김종직이 남원에서 유자광 을 만난 시점은 성종 12년에서 성종 16년 사이가 된다. 200) 그것은 후술하듯이, 성종 16년 유자광을 복직을 논할 때 김종직이 찬성하는 것 을 통해 확인된다(?成宗實錄? 권174, 16년 1월 27일(경술)). 201) 유자광은 성종 7년 성종의 친정을 반대하는 한명회를 탄핵하여 조정의 공론이 라는 평가를 듣는다(?성종실록? 권65, 7년 3월 1일(갑진)). 아마도 이러한 유자 광의 행보가 김종직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는데 기여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202) 전라도 장수군 번암의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남원의 광한루를 지나는 요천의 추어탕은 지금도 유명하다. 284 … 한국학논총 (46) 이내 광한루에서 술 마신 때가 생각나오 / 仍憶廣寒樓上飮 금 쟁반에 젓가락 놓으매 뱃속 기름이 텅 비었네 / 金盤放筯腹腴空203) 위 시에 따르면, 김종직은 과거 남원에서 맛보았던 요천의 미꾸라지를 잊지 못했던 것 같다. 유자광과 술자리를 나눈 자리가 남원의 廣寒樓였음 도 밝히고 있다. 유자광이 보낸 미꾸라지를 선물로 받은 김종직은 走筆, 즉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른 붓놀림으로 시를 써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로써 보면, 김종직은 당시 유자광과 어느 정도 가까워졌던 것 같다. 1485년(성종 16) 2월 유자광은 6년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중앙정계로 복귀한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유자광을 서용하는 문제로 대신들의 의 견을 묻자, 이조참판 金宗直은 “유자광은 처음에는 功臣에서 삭제되었다 가 이제 돌려주어서 이미 공신이 되었으니, 종신토록 서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04) 라는 찬성의 입장을 제시하였다. 유자광은 복직된 뒤 경연특진관, 지중추부사, 장악원제조, 도총관, 사옹 원제조 등의 직책을 연이어 맡는 등 승승장구한다. 유자광이 복직한 뒤 두 사람의 사이는 더 돈독해진 것으로 보인다. ?佔畢齋集?에는 유자광이 김종직과 막역한 사이였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시가 확인된다. ‘유 무령 군이 鄭 司成 댁에서 밤에 취하여 나를 부름으로 시로써 장난삼아 답하 다’ 라는 제목의 시가 그것이다. 무령군이 가순의 집에서 취하였으니 / 武靈扶醉可純家 응당 가시 사립의 탱자 꽃을 감상했으리 / 應賞荊扉枳殼花 누가 알리오 사신은 송사에 고달픈데 / 誰識皇華勞雀鼠 옥인은 등잔 아래서 눈동자가 흐린 줄을 / 玉人燈下眼兒斜205) 위의 시에 따르면, 무령군 유자광은 당시 대사성 鄭孝恒(1432∼1481)과 도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유자광이 정효항의 집에서 밤에 술 을 마시다 기별을 보내 김종직을 부르자, 장난 섞인 시로 답을 대신하였 203) ?佔畢齋集? 詩集 卷23, 詩. 柳武靈在南原惠以秋魚五十尾走筆以謝. 204) ?成宗實錄? 권174, 16년 1월 27일(경술). 205) ?佔畢齋集? 詩集 第22卷, 詩. 柳武靈夜醉鄭司成宅招余以詩戲答之.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85 다. 김종직이 어떤 이는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데, 어떤 이는 등잔 불 아 래서 술잔을 기울인다고 하여 유자광의 모습을 은근히 기롱한 것이다. 위 의 시에서 보면, 유자광이 밤 늦게 술이 취해 김종직을 부를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가 꽤 막역한 사이였으리라 짐작된다. 이 같은 사실은 김종직과 유자광이 처음부터 훈구와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서로 상종하지 못할 원수였으리라는 기왕의 견해와 크게 다른 점이다. 1492년(성종 23)에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士林의 宗匠’206)으로 불 리는 김종직(1431~1492)이 죽자, 유자광은 輓章을 써 애도하고 수나라의 유학자 王通(584~617)과 당나라의 유학자 韓愈(768~824)에 비유한다. 현재 그의 輓詞가 남아있지 않아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 종직과 유자광과의 관계를 미루어 보면, 김종직이 죽은 뒤 유자광이 만장 을 써 애도한 점은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뒷날 사림의 평가는 유 자광이 “속으로는 그 전부터 김종직을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칭송하는 아 부의 글이다.” 라고 치부해 버린다.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의 죄를 묻 는 과정에서 그의 과거 행적까지 의심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살핀바와 같이 김종직이 남긴 행적과 시에 따르면, 적어 도 생전에 유자광과의 관계는 비교적 가까이 지낸 사이였을 가능성이 크 다. 따라서 김종직이 죽자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 유자 광이 애도하는 鞔詞를 썼다고 보는 것은 당대의 관점이라기보다는 오히 려 무오사화 이후의 관점에 가깝다. 아마도 무오사화로 인한 유자광에 대 한 사림의 증오는 김종직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부정적인 시각과 원한의 관계로 재설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추정된다. 5. 나오는 말 이상에서 유자광의 생애와 정치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연산군일기? 와 ?중종실록?을 편찬한 사관들은 서얼로서 관직에 진출해 간교한 꾀와 206) ?成宗實錄? 권169, 15년 8월 6일(경신). 286 … 한국학논총 (46) 모략을 써서 사림들을 일망타진한 유자광을 간신, 역신, 간흉, 난신적자 등으로 명명하였다. 이 같은 평가는 사림의 입장에 선 사관들이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을 처단한 매우 의미있는 정치적 사건으로 보 려는 관점에 기반하고 있다.207)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그동안 위축되었던 사림들은 종래 자신들을 역적 으로 몰아넣었던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였다. 그 출발은 1498 (연산군 4)의 무오사화에 앞서 20여 년 전에 일어난 1478년(성종 9)의 무 술옥사였다. 사림은 이 사건을 훈구(소인)와 사림(군자)의 두 적대적인 세 력이 대립한 첫 사건으로 보았다. 사림의 존경을 받는 이심원과 남효원이 세조대 공신을 중용치 말 것과 억울하게 폐위된 昭陵(문종 비 顯德王后) 을 복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208) 이를 비판한 임사홍과 유자광을 축출 한 무술옥사를 크게 강조하였다. 사림세력은 이 사건을 두고 “무술옥사에 서는 일시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무오사화에서는 패배했다.”고 해석하였다. 중종대 이후 사림들은 세조대의 霸道政治를 성리학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세력을 조선의 정치사에서 정통으로 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사림 의 관점은 조선후기 내내 정치사를 관통하는 인식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사림이 훈구와 사림이 대립하는 첫 사건이라고 평가한 무술옥 사는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무술옥사는 성종이 親政을 선언한 직후 인 성종 8년 승정원 승지들 사이의 반목에서 비롯되어 당대 정치의 정면 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이때 유자광과 임사홍은 같은 정치세력으로 봐 야 할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오히려 유자광은 세조대 이래의 훈신들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중종대 이후 사림들이 무술옥사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는 과정은 사실에 근거했다기보다는 그들 중심으로 왕조의 역사를 재해석하려는 소위 역사 만들기의 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무오사화 이전의 유자광에 대한 평가나 해석도 면 밀하게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207) 지면관계상 이 글은 무오사화 이전의 유자광 활동에 대한 평가에 한정하였다. 그 이후 유자광의 평가와 변화의 문제는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208) 이러한 논의는 성리학의 절의적이거나 도덕적 관점에서 타당한 주장이었으나, 현실적으로 세조의 손자인 성종의 정권이자 세조대 공신들이 여전히 국가를 이끄는 현실적 입장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이고 과격한 주장일 수 밖에 없었다.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87 유자광은 세조대 말 이시애의 난으로 龜城君 李浚, 南怡, 永順君 李溥 (1444~1470) 등과 함께 젊은 신 공신 그룹의 일원으로 급속하게 부상한 인물이다.209) 그는 정란공신과 좌익공신을 거쳐 출발한 세조대의 원로대 신인 구 공신 그룹과는 일정하게 구별된다. 하지만, 세조대 말기에 혼란한 정국 속에서 떠오른 신 공신세력인 남이와 종친 귀성군 등은 그들 내부 의 알력 뿐 아니라 한명회, 김국광, 노사신 등 구 공신세력들에게 위협적 인 존재로 부각되었다. 19세의 나이로 즉위한 예종에게 신 공신세력은 더 욱 더 큰 정치적 위협으로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210) 남이의 옥사는 바로 예종의 즉위 초 불안한 정국상황 속에서 벌어진 정치적 사건이었다. 신 공신세력이던 유자광은 남이의 모반을 왕에게 고변함으로써 세조에 이어 예종의 절대적 신뢰를 얻는다. 남이의 옥은 무오사화 직후 誣獄이라 는 평가가 제기된 것과 달리,211) 적어도 성종대까지는 逆謀으로 받아들여 졌고 유자광의 공적 또한 의심을 사지 않았다. 성종대의 사림들도 이점을 부정하지는 않았고,212) 왕실 또한 그의 공로를 줄곧 인정하는 중요한 업 적으로 평가하였다. 유자광은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발탁해 준 세 조와 그 이후 제왕들에게 충직한 심복으로서의 자세를 견지한다. 공신 유 자광이 성종대 초반 훈구대신에 의해 주도되는 원상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특히 성종 8년에 국왕의 親政을 209) 당시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한 龜城君과 永順君은 세조에게 “文에는 永順君이고, 武에는 龜城君이다.”라는 촉망을 받았다. 210) 예종은 남이를 싫어한 것으로 확인된다. 예종이 즉위한 뒤 곧바로 守門將 제도 와 같은 궁궐의 수비와 숙위체제를 정비하는 것은 당시 정치적 불안을 단적으 로 보여준다(?睿宗實錄? 권5, 1년 5월 18일 신축). 211) 남이의 옥에 대한 무고였다는 사실은 처음 언급한 것은 무오사화 끝난 직후 박원성의 고변에서이다(?燕山君日記? 권31, 4년 11월 30일(임술)), 다만, 종래 최영호는 임진왜란 전까지 남이를 난신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임란 이후 유 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억울하게 죽은 인물로 기술했다고 언급한다(최영호, 「南怡(1441~1468)의 獄 再考」 ?역사와 인간의 대응?, 1984). 212) 당시 사림들은 “유자광이 예종 때에 처음부터 남이의 반역하는 모의에 참여하 여 실상 역적에게 붙은 것인데, 그 역모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고변하여 공을 바라고 외람되게 철권을 받은 것이다.”(?中宗實錄? 권16, 7년 6월 22일(갑 자))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88 … 한국학논총 (46) 앞두고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반대하는 원상 한명회를 탄핵한 것은 그 의 정치적 입장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세조대 훈신들이 지나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아래 유자광의 한 명회 탄핵조치는 성종의 친정을 바라는 사림의 공론을 대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한명회는 물러났고 원상제도 폐지되었다. 유자광 의 한명회 탄핵은 사림의 뜻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김종직과도 가까워지 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일이 있은 지 1년 반 뒤에 성종이 “경(자광)이 지난번에 한명회를 탄핵한 일을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213)고 한 언급은 유자광에 대한 성종의 신뢰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사 실은 사림의 입장에서 유자광을 단순히 훈구세력의 일원으로 보는 관점 을 재고하게 만든다. 유자광은 무엇보다 왕권을 수호하는 훈구와 사림 사이에서 나름 왕당 파적인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 점은 조선 건국 이래 관학 자들이 부국강병의 논리 아래 철저히 국왕중심의 정치체제를 지향했던 입장과 일치한다. 그는 대간의 언간권이 커지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대간 과 대신 간의 시비과정을 통해 공론을 추구한다는 정치운영론을 제시하 였다. 그리고 시비의 최종 결정은 국왕이 한다고 보았다. 이는 오로지 삼 사만이 공론이 있다고 본 사림의 입장과는 차이가 난다. 유자광이 유독 국왕 중심의 정치체제를 강조한 까닭은 바로 그가 서얼 이라는 신분적 한계와 관련이 있다. 적서차별이라는 유교적 명분론이 지 배하는 정치현실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국왕권의 절대적 신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가 “역대를 섬기면 서 도왔던 효험은 없지만, 忠義 하나만은 맹세코 저버림이 없었다.”214)고 한 말은 1품 공신이면서도 늘 신분적 한계에 봉착했던 유자광의 현실적 처지를 잘 대변한다. 특히 유자광은 자신을 발탁해 중용한 세조에게 시종일관 강한 집착을 보인다. 여기에는 정치세력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무오사화 를 다스리는 자리에서 “세조를 비방한 김종직은 세조의 원수요, 그 자손 213) ?成宗實錄? 권84, 8년 9월 6일(경오). 214) ?中宗實錄? 권2, 2년 2월 2일(병자).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89 인 제왕들에게는 대대의 원수이며, 세조를 섬긴 公卿世家의 공동 원수”라 는 입장을 표명한 것도 바로 그 같은 인식에 따른 것이다.215) 김종직과 가까이 지냈으나, 부관참시와 같은 참혹한 처형을 내린 것도 그러한 맥락 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패도정치를 옹호하는 유자광의 정치적 인식은 16세기 이후 사 림을 중심으로한 왕도정치의 흐름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세조의 정 통성을 유지하면서 제왕들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반드 시 지켜나가야 할 길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곧 서얼로 정계에 진출한 자 신의 정치생명과 직결된다고 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유자광은 정국 흐 름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하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 다. 세조에서 중종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오로지 국왕에게만 충성을 다 하려는 그의 정치적 입장은 훈구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서얼이라는 신분 적 한계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한 나름대로 유일한 생존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그동안 조선시대의 실록이나 문집은 양반 내지 사림 권력 의 주도권을 옹호하는 기능을 담당한 측면이 강하다. 특히 성리학적 이념 에 근거한 사림 중심주의는 엄격한 신분제도와 적서 차별 등을 정당화하 고, 그동안 서얼을 적자의 타자로 설정하는 방식으로 정당하고도 우월한 인식을 강조해 왔다. 훈구의 경우도, 사림에 의한 후대의 일방적인 평가로 재규정됨으로써 사실의 왜곡과 함께 해석의 다양성을 위축시켜 왔다. 이 글에서 다룬 훈신이자 서얼이었던 간신 유자광은 사림 중심의 일방 적이고도 단선적인 인식을 수정하기 위한 하나의 대항서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고 사림 중심의 거대 서사를 이루는 권력담론의 해체를 통 해 훈구와 서얼 유자광의 이야기를 새롭게 중심 서사로 만들려는 시도는 아니다. 사림에 의해 만들어진 일방적인 서사의 흐름 속에서 권력의 논리 를 해체함으로써 다양하고도 균형잡힌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215) ?中宗實錄? 권2, 2년 2월 2일(병자). 290 … 한국학논총 (46) 참고문헌 ?高麗史?,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承政院日記?, ?東 閣雜記?, ?新增東國輿地勝覽?, ?國朝記事?,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國朝文科 榜目?, ?世宗實錄? 地理志, ?四佳集?, ?佔畢齋集?, ?大東野乘?, ?於于野談?, ?海東野 言?, ?涪溪記聞?, ?高宗時代史? ?歷代名臣法帖? (제2, 刊寫年未詳, 古 445-20). ?靈光柳氏族譜? (家藏 複寫本, 戊戌譜 1778). ?靈光柳氏族譜? 乾坤, 국립중앙도서관, 古 2518, 59-52, 1, 2, 丁巳譜). ?國朝征討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司馬榜目(正統12年我世宗大王二十九年丁卯式?(Harvard-Yenching Library, K 2291.7. 1746, 1447). ?官報?, ?每日申報?, 「세계일보」 2014.9.28. 趙奎洙, 「歷代陰險人物討罪錄, 朝鮮의 士禍를 츠음으로 이르킨 大凶孽·大奸物 柳子光」 ?별건 곤? 제8호, 1927. 김갑주, 「院相制의 성립과 그 기능」 ?동국사학? 12, 1973. 宋贊植, 「조선조 士林政治의 권력구조—銓郞과 三司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사회 경제사의 연구?, 일조각, 1997(?경제사학? 2, 1978). 천관우, 「조선초기 오위의 병종」 ?사학연구? 18, 1964, ?근세조선사연구? 95~96쪽, 1979). 劉永大, 「說話와 身分의 문제-柳子光傳承을 중심으로」 ?民族文化硏究? 16, 1982.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연구?, 일조각, 1983. 최영호, 「南怡(1441~1468)의 獄 再考」 ?역사와 인간의 대응?, 1984. 유영대, 「柳子光 實史의 변이양상과 그 의미」 ?又石語文? 2, 1985. 이이화, 「김종직과 유자광:사화의 불씨 당긴 20년 숙적」 ?이야기 인물한국사 5-역사상의 라 이벌과 동반자-?, 한길사, 1993. 심승구, 「朝鮮前期 政治史에 대한 試論-燕山君代를 중심으로」 ?북악논총? 11, 1993. 김귀자, 「남원지역의 인물전설 연구-이성계와 유자광 전설을 중심으로」 ?전북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7. 민현구, 「국조인물고 해제」 ?國朝人物考?,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도현철, 「고려말 사대부의 왕안석 인식」 ?역사와 현실? 42, 2001. 이현진, 「조선전기 소릉복위론의 추이와 그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23, 2002. 오종록, 「유자광, 으뜸가는 공신에서 간악한 소인으로 전락한 사나이」?내일을 여는 역사? 11, 2003. 진상원, 「김종직과 유자광―군자와 소인」, ?동아시아사의 인물과 라이벌?, 조동원교수정년기 념논총간행위원회, 아세아문화사, 2008. 박대복 외, 「?혼불?에 수용된 유자광 설화와 민중의식」 ?동아시아고대학? 20집, 2009.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91 鄭杜熙, 「朝鮮 成宗9年 “戊戌之獄”의 정치적 성격」 ?서강인문논총? 제29집, 2010. 이한, 「유자광-서얼들의 다크히어로」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 청아출판사, 2010. 김기봉, 「우리시대 역사주의란 무엇인가」?한국사학사학보?23, 2011. 이근명, 「전통시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왜 왕안석에 반대하였는가?」 ?全北史學」 38, 2011. 김이석 외 8인, 「조선시대 유자광 묘 여부 논란이 있는 남원 영광류씨의 선산 내 灰槨墓 출 토 인골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 ?대한체질인류학회지? 제24권 제2호, 2011. 박병련, 「조선 전기 사림-훈구 갈등과 사림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정당화 –광원군 이극돈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선중기 훈구·사림정치와 광주이씨?, 지식산업사, 2011. 김용철, 「유자광평전 : 전투적 정치인 유자광」 ?미리보는 ‘한계례역사인물평전’ 100?, 2012. 심승구, 「어느 신발장수 이야기-李陽生」 ?장서각아카데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유정수, ?조선왕조실록에 의한 무령군 유자광?, 비전북하우스, 2014. 윤영근, ?유자광전?, 장편소설, 미간행 복사본, 2014. 292 … 한국학논총 (46) 국문초록 16세기 이후 조선의 정치를 흔히 ‘사림정치(士林政治)’라고 말한다. 그 시대의 문턱을 살다간 유자광(1439~1512)은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한 간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조대로부터 중종까지 5대에 걸친 활동에도 불구하 고, 그에게 쏟아진 많은 부정적인 평가와 오명 때문인지,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그에 대한 외면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다. 굳이 비난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적 증오의 대 상에 새로이 도전해야 할 이유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은 유자광 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게 만든 배경이 된 것이 아닌가 짐 작된다. 조선왕조의 개창 이후 상하·존비·귀천을 정당화한 유교적 명분론은 천첩의 아 들인 서얼 유자광의 관직 진출과 정치 활동을 철저히 부정하고 거부하는 배타적 논리로 기능하였다. 더구나 16세기이후 조선 정국을 주도한 뒤 이데올로기로 작동 한 사림의 정치이념은 훈구세력인 유자광을 도덕적 죄인으로 낙인찍어 역사의 감 옥에 수감시킨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유자광에 대하여 근대 이후의 역사는 물론이고, 현재도 여전히 부정적인 평가와 서사들만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므로 훈구나 서얼의 입장에서 반론이나 재검토를 시도해 보는 것은 15~16 세기 역사를 성격을 입체적이고도 균형적으로 판단하는데 기여하리라 여겨진다. 더구나 관찬사료나 문집에서 유자광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해석이 상당히 부정적 인데 반해, 민간에서 전승되는 설화나 민담에서는 그를 오히려 긍정적 태도로 인 식하는 사실도 유자광에 대한 평가를 재고하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이 글은 그 같은 문제의식 아래 유교적 명분과 사림의 정치이념이 갖는 일방적 이고도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훈구와 사림의 관계를 바라보 고 서얼 유자광의 삶과 행적을 재검토하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주제어 : 간신, 유자광, 서얼, 사림정치, 훈구, 사림, 유교적 명분, 사림 서사, 무오사화, 김종직, 거대서사. 간신 유자광의 평가 再考 … 293 Abstract Reconsideration of the Evaluation on Treacherous Subject Ryu Jagwang - Focusing on Deconstruction of the Sarim's Narratives and Confucian Justification - Shim, Seung Koo Since the 16th century, the politics of the Joseon Dynasty are often termed ‘Politics by the Sarim (士林政治)’. Ryu Jagwang (1439-1512) who had lived at the beginning of that era is notorious for eliminating the Sarim by causing the Literati Purge of 1498 (Muosahwa 戊午士禍). Despite his political activities during five successive reigns from King Sejo to King Jungjong, the indifference toward him by the academia in history has been considered to be almost taken for granted until now due to a lot of negative evaluations and stigma regarding him. That was because many people did not feel any reason or need to make a new challenge to the subject of historical hatred that was shared by a lot of people. This illustrates the background that people have unconsciously refused objective research on Ryu Jagwang. Since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the Confucian cause which justified the high and low, the gentle and simple had functioned as the exclusive logic to deny thoroughly and refuse Ryu Jagwang to enter government office and engage in politics, as he was the son of a concubine of low birth. Moreover, after leading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Joseon Dynasty since the 16th century, the political belief of the Sarim functioned as an ideology which served as a background to put him into the prison of history stigmatized as a sinner in a moral aspect. In fact, the modern, as well as contemporary history on Ryu Jagwang has been constantly reproducing only negative descriptions and evaluations. To try to reconsider or make a counterargument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Hungu Faction or the son of a concubine will contribute to understanding the historic nature of the 15-16 century in balance and in three dimensions. Furthermore, in contrast to the significantly negative historical evaluation or interpretation on Ryu Jagwang in the historical records or collection of works, 294 … 한국학논총 (46) he was recognized in a positive light in the tales and folktales handed down among people. This fact supplies a reason for reconsidering the evaluations on him. With such awareness, this article focuses on reviewing the relationship Hungu and Sarim from various perspectives freed from a unilateral and narrow viewpoint possessed by the Confucian justification and political belief of the Sarim, as well as reconsidering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a son of a concubine, Ryu Jagwang. Key word : Politics by the Sarim(士林政治). Ryu Jagwang(柳子光), Treacherous Subject(奸臣), Confucian Justification(性理學 名分), the Sarim's Narratives(士林 敍事) 투고일 : 2016. 7. 10. 심사완료일 : 2016. 8. 3. 게재확정일 : 2016.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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