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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 최초의 예배당 전주서문교회 최초 당회장 테이트 선교사 | 
* 테이트(한국명: 최의덕)와 부인 잉골드 선교사 |
* 레이놀드 선교사(한국명: 이눌서) 서울, 전주, 평양에서 활동하였으며,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성경번역과 많은 논문을 남김. - 서문교회 2대 담임목사(당시 전주교회) | 
* 성경 번역 위원: 레이놀즈, 이승두, 김정상 |

* 김창국 목사 | * 1897년 한국인 5명(13세의 김창국, 김창국의 모친 진주 강씨, 김내윤, 임씨, 김성희)이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전주교회’가 한국인 세례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
* 김창국(金昶國) 1884-1950. 김창국은 전주에서 출생하였고, 조모와 모친이 매티 테이트(최구덕) 선교사의 전도로 전주에서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되자 그들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에 기독교 교인이 되었다. 소년 김창국은 테이트 선교사를 도와 장날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주는 등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적극 도와주었고, 1897년 7월 전주교회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는 5명에 포함되었다. 숭실중,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목사가 된 그는 전북 익산과 제주도에서 전도목사를 역임한 후 광주남문외교회(금정교회)를 거쳐 1924년부터 광주 양림교회를 설립하여 그곳에서 25년간 시무하였다. |

* 교세 확장으로 예배당을 ‘ㄱ’자 예배당으로 증축, 1911년 |  * 고패집 이전의 서문교회(1908년) |

* 인천에서 모인 호남지방 선교사 가족들(1899년) | 
* 매티 데이트 선교사 - 한국명 최구덕 (최의덕 선교사의 여동생) |

* 전킨 선교사 순직 기념 종 운반 | 
* 종 상량식 광경(1909년) |

* 이 한옥 종탑은 1908년 별세한 전킨(W.M. Junkin)을 기념하여 그 아내(M.L. Junkin)가 기증한 직경 90cm짜리 큰 종을 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웅장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20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일제 말기 공출 때‘전킨 목사 기념종’은 없어졌다. 당시의 종은 없지만, 지금도 종탑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한국에 남아 있는 교회 종탑 중 예배당 건물과 독립된 종탑으로는 최고라 할 수 있다. |

* 전주 선교 초기 선교사들 사택 |
* 1905년 남문교회 분립을 필두로 16개의 교회를 분립, 개척하며 호남 지역 모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발전하고 있다. 1905년 남문교회 분립 1907년 중인교회 분립 1926년 완산교회 분립 1926년 태평리교회(용흥리)분립 1930년 중앙교회 분립 1934년 동부교회 분립 1934년 서신교회 분립 1944년 금암교회 분립 1949년 화산교회 분립 1949년 중산교회 분립 1950년 태평교회 분립 1956년 남성교회 분립 1979년 남원중부교회 복구설립 1986년 세심교회 분립 1986년 섬진교회 개척 1993년 송산교회 개척 |

* 최의덕 선교사와 잉골드 부인의 전도여행 (1905년 전주) | 
* 서문교회 고패집 이전 모습(1909년) |

* 학생들과 젼킨 선교사 | 
* 선교사 내외와 부녀 및 아동들 |

* 제1회 전주 여섯 유년주일학교 연합예배대회 (1924년 서문외교회) | 
* 학생들과 랭킨 선교사 |

* 전주 서문교회 아동들과 교사들(1911년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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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전 목사 | 
* 김인전 목사의 상해 임시정부 활동, 1921 |

* 김인전 목사 장례식(1923년 중국 상해) - 서문교회 한국인 2대 담임목사로서 독립운동 중 상해에서 서거. - 전주 3.1 운동을 주도 한 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동함. |

* 배은희 목사 | 
* 전주서문외교회 아동성경학교 제1회 졸업생 기념(1929년) |
* 배은희(裴恩希, 1888년 1월 15일 ~ 1981년 9월) 목사는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로 1921-1936년까지 사역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 재학 중인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각 지방에서 모여든 신학생들과 더불어 평양신학교에서 열렬하게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주모자로 지목되어 경찰에 잡혀가 곤욕을 치르고 강제 휴학을 당한 후에도 고향 경북 대구지방으로 내려가 대구를 위시한 각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활동하였다. * 1921년 전주유치원 설립과 전주지역 여성계몽운동에도 공헌한 바가 크다. |

* 전주 서문외교회 경영의 전주유치원 졸업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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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외 교회 소녀 가극단(1926년, 전주) 뒷줄 좌: 이건직, 중: 배은희 목사, 우: 현제명 | * 1924년 7월 현제명 선생과 대원 14명으로 찬양대를 조직하다. |

* 전주 YWCA 초창기 인물들(1929년 전주) |

* 방애인 선생 | 
* 방애인 선생 묘소를 찾은 전주여자기독청년회원들, 1933년. |
* 방애인 선생은 황해도 황주 출신으로 1926년 4월 전주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서문밖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녀는 걸인, 고아와 빈민을 돌보며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데 힘썼으며 전주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가난한 자의 천사”, “거리의 성자”로 불리울 만큼 지성으로 봉사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봉사하다가 1933년 9월 16일 2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잣집 딸과 신여성 처녀로서 단장하던 값진 옷감도, 향수와 크림도 그의 소지품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단 한 벌의 옷뿐이었다. |

* 방애인 선생 묘소 | * 이 묘소는 전주시 완산구 효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전주시 도시계획 사업에 따라 이전되겠기에 전주서문교회 안식원에 1999년 9월 16일 전주서문교회에서 이장하였다. |

* 전주 주일학교 연합예배(1934년 전주신흥학교) | 
* 여자 야학회 제1회 졸업생 기념촬영(1923년) |

*창립 50주년 기념비 |
* 이 기념비는 화강암으로 4각 기둥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꼭대기에 십자가를 깍아 세웠다. 당대 ‘전주 명필’ 설송 최규상이 썼다는 예서체 비명(碑銘) 글씨가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럽다. * 비석 측면 글귀들은 일제 말기라 한글을 쓰지 못하게 해서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미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제는 반미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서기(西紀) 연호조차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다고 ‘明治’‘大正’같은 일본 연호를 대놓고 쓰기도 뭣해서 이 비석에는 ‘乙未’(1895) 같은 간지(干支) 연호를 쓰고 있다. 서기 연호를 쓸 경우엔 일본 연호를 같이 써서 일제의 신경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해방 후 ‘昭和’란 연호를 시멘트로 발라 읽을 수 없게 만든 것도 시대 따라 변하는 민심을 읽을 수 있다. |

* 전주서문외교회 제직회록, 1908-1934 서문교회 제직회록은 1908년 4월부터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 
* 전주서문외교회 당회록, 1909-1953 서문교회 당회가 조직된 것은 1908년이며, 당회록은 1909년부터 현재까지 비교적 출실하게 보존되어 있다. |

* 기전과 신흥학교 폐교기념 화분대 | * 1937년 선교사들이 신사참배 거부를 위해 학교 문을 닫고 돌아갈 때 기전과 신흥 학생들이 ‘폐교기념’으로 학교 이름을 새겨 서문교회에 기증한 목제 화분대 한 쌍이다. 그 위에 놓였던 청동 화병은 일제 말기 공출 때 ‘전킨 목사 기념종’과 함께 없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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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비 |
* 1990년에는 교회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교육시설의 확충과 사회봉사 사업전개를 위하여 평면 120평 연건평 705평 지하 1층 지상 5층의 [100주년 기념관]을 건축키로 하여 1992년에 완공한 후 1993년 교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고 선교 2세기에 진입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에 신령하고 능력 있게 발전하고자 힘을 기울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