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음주의 신학 이 글은 「박형룡 박사 저작전집 IX권 현대신학선평 하권」에 수록되어 있는 신복음주의편을 요약한 것이다.
20세기 상반에 칼 바르트의 새로운 자유주의 신학이 신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선전되더니 지금 20세기 후반에는 다른 하나의 자유주의 신학사상 운동이 신복음주의라는 허울 좋은 탈을 쓰고 움직인다. 이 위험한 새 신학사상 운동이 우리 한국 보수교계에도 말과 글로 선전되어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신복음주의란 미국에서 20세기 초에 자유주의가 득세하고 정통신학이 실세한데 대한 반발로 어떤 보수주의 신학교육을 받은 소장 신학자들이 신학의 새 노선을 밟아 행진하기로 발족한 새 신학운동이다. 신복음주의 신학의 교육기관으로는 1947년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에 풀러 신학교(FTS)가 설립되고 초대 교장 하롤드 존 아켄가, 차기 교장 에드워드 존 카넬, 교수 중에 칼 헨리, 에버렡 해리슨등이 신복음주의를 유력하게 주창했다. 후에 칼 헨리는 풀러 신학교를 떠나 와싱톤에 Christianity Today라는 기독교잡지를 간행하여 신복음주의 확포에 크게 활동하여 왔다.
1948년 풀러 신학교 개학식에서 교장 아켄가 박사는 신학계에 신복음주의라는 새 말을 도입했다. 10년 후 1957년 12월 8일에 아켄가의 지상발표를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상이를 정확히 정의해 신복음주의의 강령을 제시했다. 그는 사회문제에 관해 근본주의는 사회적 영역에서 지도격과 책임을 포기했다고 보았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사회적 문제들을 취급하여 개인구원과 함께 그의 사회적 철학을 포함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신복음주의 그룹은 오류를 포옹하는 인물들을 깊이 탐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그리스도인은 창조, 사람의 연대, 홍수의 보편성, 기타 변론될 만한 성경적 문제들에 과한 과학적 문제들에 있어 몽매주의자가 되지 말 것이라고 하였다. 또 신복음주의자들은 역적 교회의 정통적 지파에 사회적 강조가 주입된 것으로 확인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켄가에게 매우 명백한 점은 신복음주의 전력은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며 분리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 그는 신복음주의 세력 기구로 NAE, 풀러신학교, Billy Graham, Christianity Today를 지명했다. 또 새 변증문서들의 입장을 제시함으로 자랑했다. 그들은 칼 헨리, 에드워드 카넬, 조지 래드와 그 자신의 저서들이었다.
근본주의에 대한 혹평
신복음주의는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를 끊고 정통적 교리체계를 받아들인다고 자천한다. 1958년 아켄가는 “신복음주의가 성경의 궈위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하므로 신정통주의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있으며...신복음주의는 현대주의자들이 받아들인 교리체계에 반대하여 전적으로 정통적 교리체계를 수락하여 자유주의자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신복음주의는 철저한 정통주의적 근본주의에 대해 가혹히 비평했다. 이는 그들이 전적으로 정통적 교리체계를 수락한 것이 아니며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를 향해 움직이는 자임을 스스로 나타낸다.
이 운동의 창시자이며 Christianity Today의 전 편집자인 칼 헨리는 신학으로서의 고전적 근본주의가 부정적이고 반동적인 정신으로 미묘하게 변천하여 신학의 위치에서 실격했다고 한다. 신근본주의는 신학적 역사적 전망이 결여, 교리표현의 모호성, 학자성 자질의 결여, 적절한 문서 운동의 결여, 반교파주의, 시대주의 입장에서 사는 일, 문화나 사회와의 관련 결여, 반동적 부정주의 및 쟁투, 복음을 개인적 종교 체험으로 축소함등의 특징을 가진다고 비난했다.
미국 신근본주의는 본래 근본주의의 약화된 체계로서 결점들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정통적 교리들을 철저히 수호하려는 그 열정을 본받아야 한다. 근본주의에 대한 가혹한 비평은 비평자의 정통성을 의문케 한다.
신정통과 타협하는 새기독교 운동
미국 칼빈신학교 교수 클로스터 박사는 신이라는 말에는 옛것에 대한 불만의 뜻이 다분히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고 했다. 만약 새 기독교 운동이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리고 그들의 역점은 신정통주의와의 타협이었던 것이라고 하여 신복음주의란 신정통과 타협하는 새 기독교 운동임을 표시했다.
신복음주의의 옹호자 휘튼 대학의 에릭슨 교수도 신복음주의는 신정통의 일반적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왔다고 했다. 칼 메킨타이어나 밥 존스대학과 관계된 인사들에게는 신복음주의가 현대주의와 신정통주의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지탄 받는다.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감행한다
신복음주의 운동은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출발한다. 신정통주의자들과 기타 자유주의자들이 하듯 신복음주의자들도 성경을 파괴하여 그 권수를 죽이는 자가 종종 있다. 어떤 신복음주의 신학교의 구약 교수는 에스더를 구약정경에서 지외하기를 의욕한다고 표시했고, 다니엘서의 저작 연대를 주전 2세기 마카비 시대로 물려 구약 정경에 들지 못하도록 양보했다. 동신학교의 신약 교수는 베드로후서의 정경성에 반대하는 증거가 늘어가기를 계속하는 때에 어찌할 것인가라고 했다.
성경의 내용에 대한 신복음주의자들의 파괴적 태도도 점점 드러나고 있다. 신복음주의 과학자는 창 1-11장의 진정성의 의문하며 창세기 첫 장들의 해석에 진화론을 적용해 창조의 본래의 의미를 포기한다. 어떤 신복음주의 신학교의 구약학자도 여호수아의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쳤다는 이야기는 단지 본래의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노아 홍수의 보편성에 대해서도 자주 의문한다.
정통신학은 성경의 파괴적 비평에 대해 가능한 답변을 가지고 반박하지만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 노선을 취해 성경을 파괴한다.
성경 무오의 부정
1. 영감과 무오의 구별
신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는 서로 다른 사건이고 성경이 영감되었으나 무오하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다른 말로 성경유오설이다. 풀러신학교의 해리슨 교수는 성경은 그 자체의 영감을 가르치며, 그것은 하나님의 책이나 그것은 우리에게 무오를 주장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성경은 영감되었으나 무오하지 않다는 것을 교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롤랜드 H, 내쉬도 이에 동의하고, 랄프 어얼, 다니엘 풀러도 이에 동의한다.
2. 솔직한 부정
신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성경의 무오를 부정함에 매우 솔직하다. 버나드 램과 카넬은 과학과 성경의 관계를 많이 취급했다. 과학을 성경의 빛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과학의 빛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카넬은 자기가 성경의 무오성을 믿어 왔다고 주장했으니 B.B. 워필드와 고전적 보수신학의 여러 견해에 대해 비평하여 구약사에 부조화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하였다.
오랫동안 타협 없는 정통주의와 경건으로 알려진 노드팍 신학교 NPTS의 성경학 교수 렘크 박사는 성경이 과학적 이론이나 사실의 사건들에 올 때 무오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릇 인도하는 듯하다고 했다. 그는 비록 성경이 전통적 의미로 무오하지 않을지라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3. 약평
신복음주의자들의 성경 영감과 무오의 상이를 역설하며 성경이 무오하지 않아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꼬리를 감추는 변론들은 다 성경이 영감은 되었으나 무오하지 않고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자는 성경유오설이다.
근본주의자 R.P. Lightner는 신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을 과학의 광명에 비추어 해석하기를 의욕한다는 것, 영감에 관해 축자라는 명사를 사용하기를 주저한다는 것, 성경의 다양 부분들에 상이한 정도들의 권위를 돌린다는 것을 포함한다고 했다. 이는 신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축자영감을 믿지 않고 완전영감도 믿지 않는다는 진술이다. 신복음주의자 옹호자는 신복음주의들 중에 성경 무오를 믿는 이들도 있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성경 무오를 열심히 변호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WCC 운동에 가담한 자들 중에도 성경 무오를 믿는 자들이 있다고 변명하는 것과 같다.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신복음주의의 다수 또는 유력한 지도자들의 성경관이 성경유오설이라면 그 운동 전체의 성경관은 결국 유오설로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이 과학의 빛 아래서 성경을 해석하는 한 그렇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WCC 사회복음 운동에 따라간다
1. 사회복음과 복음의 지평선적 차원
신복음주의 아버지 아켄가는 신복음주의는 신근본주의가 회피한 사회적 난제들을 취급하기를 의욕함에서 근본주의와 다르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철학과 사회복음이란 말은 복음에 무엇을 더한다는 말로 들린다. 복음에 추가되는 그 무엇은 오래 전에 사도 바울이 경고한 다른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사신들인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 새로운 사회철학을 만들기 위해 임재한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도 교회는 세계로 더불어 하는 것을 가장 적게 가진 때에 세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라고 하였다.
아켄가는 대부흥사 빌리 그래햄을 신복음주의자로 소개한다. 신복음주의의 대변인 그는 복음은 수직선적 차원과 지평선적 차원을 아울러 가진다고 했다. 이들 중 하나만을 전파하는 복음은 불완전한 복음이라고 한다. 그는 적어도 그의 전도의 1/3을 사람들의 개인적 사회적 생활에 기독교의 우리를 적용할 것을 가르치는데 바친다고 했다.
2. WCC의 사회적 정치적 투쟁에 협력
아켄가가 말한 사회복음이나 빌리 그래햄의 복음 지평선적 차원은 WCC운동의 사회복음적 활동의 자극을 받은 결과이다. 즉 그 운동을 따라가려함이다. 신복음주의가 사회적 수요에 대한 확실한 반응과 성경적 사회윤리를 촉구하는 것을 사회복음주의에 돌아감이라고 강하게 규탄하는 자들은 신근본주의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신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민권투쟁, 빈민행진 같은 과격한 사회적 정치적 투쟁에 가담해 협력하는 것은 WCC, NCC의 사회복음 운동에 따라감이 분명하다. 신복음주의는 사회복음 운동이 결국 WCC, NCC에 휩쓸려 따라가고 만다는 것이 증명된다.
3. 성경적 국민의무
개혁파 장로교회는 모두 프로테스탄트 교회들과 함께 구령복음을 전하는 것을 본무로 삼는 동시에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인물들을 존경하고 세와 기타 줄 것을 주고 양심을 위해 그들의 합법적 명령에 순종하며 그들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은 백성의 의무라고 인정한다. 또 그리스도인이 위정자의 직분에 소명을 받으면 그것을 받아들여 수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치고 실행해왔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23장 2,4조).
신복음주의가 주장하는 복음주의적 사회윤리는 실로 상술 성경적 신조적 교훈 이상의 무엇, 사회개량에 맹렬한 활동을 뜻하는 것이다. WCC식 정치적 사회적 투쟁을 지향하는 것이다. 성경적 정통신앙을 지키는 교회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다.
세속화 운동
신복음주의가 사회운동에 따라간다는 것은 기독교의 세속화에 향한 운동이다. 신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민권투쟁, 빈민행진 같은 사회적 정치적 험악한 운동에 가담하여 신학생들, 대학생들을 가두 시위행진에 세우는 것은 세속화 운동이다. 이런 세속화 운동에는 또 윤리사상의 세속화와 타락이 내포된다.
휘튼 대학은 미국에서 근본주의 기독교대학으로 명성을 높였다. 그러나 근년에 신복음주의의 미혹을 받았다. 전교장 어드만과 현 교장 허드슨 에메딩은 신복음주의 활동 기관 NAE의 열렬한 지도자들이고 에릭슨 교수는 신복음주의를 옹호하는 저서를 간행했다. 그런데 이 대학 교수진에서 혼전 동거를 허용하는 언론이 나오고 구내에서 세속지도자들을 괴히 높이는 기념예배가 거행되었다.
과학의 빛에 성경해석
1957년 아켄가의 신복음주의 강령의 한 부분에서 그는 성경을 과학의 빛에서 해석하라고 하였다. 신복음주의는 과연 이 원칙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여 자유주의 견해를 산출하게 되었다.
특히 램의 조화작업은 성경을 과학에 예속하려는 노력이라고 비평을 받았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진리에 대한 두 가지 계시로 성경과 자연을 주셨다는 것이다. 우주 인류 및 거대한 홍수의 근원과 같은 문제는 신학자에게가 아니라 과학자에게 맡겨 풀도록 하자는 식의 방법을 제시한다.
유신진화론과 진보적 창조론
신복음주의자들은 과학과 우호하며 신학과 과학 사이에 조화를 노력하면서 진화론을 승인하고 유신진화론이라 칭했다. 그리고 그들은 진화론을 창조의 교리에 적용하여 진보적 창조라는 자유주의적 새교리를 가르쳤다. 1954년 버나드 램이 진보적 창조라는 술어를 만들었다. 진보적 창조론은 지질학적 역사의 수백만년 동안에 하나님은 생명의 보다 더 고등한 종류들을 창조하여 오셨다고 한다. 오랜 시간에 심어들인 법칙들이나 원리들을 통해 발전이 있어 새 종이 일어났다. 다음에 하나님은 다른 한 종류를 시작하시니 다시 발전이 있었다. 각 종류 안에 진화가 있었으나 다른 한 종류에서 다른 종류에의 진화는 없었다고 한다. 화석학적 기록의 과도적 종류들이 없는 몇 간극들을 제시한다. 진화론자들은 지금 영구히 잃어진 종류들이 있었거나 새종류들이 돌연변이에 의해 자연적으로 일어났으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 창조론자들은 이 간극들을 하나님이 새 무엇을 만드시는 일련의 행동들과 상관시킴으로 보다 더 상당히 설명한다. 버나드 램과 카넬은 유신진화론이 성경적 보도에 전적으로 배치하지 않는다고 표시했다.
사람의 진화적 창조
성경에 하나님은 사람을 직접 창조물로 묘사한다. 성경적 묘사는 하나님이 창조의 제 6일에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특별 창조하셨다고 한다(창 1:27, 2:7). 정통신학은 성경적 묘사에 따라 사람의 육신과 영혼이 다 하나님의 특별 직접 창조를 받았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신복음주의 신학은 유신진화론을 채택하여 가르쳐 사람의 육체적 조성은 진화의 과정에 의해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시점에서 하나님이 어떤 생존하는 고등한 영장류를 취해 그것에 영혼을 추가하여 그를 사람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신복음주의자들 중에는 인류의 시조의 연대에 관해 의견이 분열되어 어떤 이는 1백만년 전의 최초 화석인과 동일시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가 약 4만년 전의 인생 아닌 형태였거나 혹 어떤 아담 이전 인종에 속하였다고 한다.
카넬은 정통주의는 인생 진화의 증거가 압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증거는 생각해 보게 할 만큼은 충분하며 생물학의 판단은 경건한 조소로 물리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는 또 다른 사람과 함께 현재의 사람과 구조적으로 흡사하나 시간적으로 앞서고 천부의 재능에 있어 열등한 아담 이전의 종족을 가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L 벌코프는 유신진화론은 매우 위험한 잡종이다. 그 명칭은 언어상 모순이니 그것은 명사들의 수납된 의미의 유신론도 아니고 자연론도 아니고 창조론도 아니고 진화론도 아니라고 했다.
신복음주의자들이 과학과 우호하노라고 진화론을 승인하고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과학자들의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학자들 중에 반진화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왜 살피지 않는가? 많은 수의 과학자들은 진화론은 일종의 가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확히 기억시켜 준다. 그리고 금일에 진화론에 대한 반항 중에 어떤 유명한 과학자들은 진화론의 가설로서의 가치도 의문하여 마지않는다. 만근에 진화론에 반대하는 저명한 과학자들은 암브로스 플레밍, G. F. 브라이트, 물톤, 프라이스, D.H. 스카트, 플라이쉬만, B. 키드, 윌리암 도우손등이 있다.
이적 부인의 경향
정통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두 다 믿어 왔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편중하며 하나님이 자연 안에 임재하여 자연의 과정에 의해 자연 안으로부터 그의 목적을 수행하신다고 보았다. 진화는 특수적으로 하나님의 간접적 사역의 적당한 표현으로 인정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진화라 칭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하나님이라 칭한다. 지금 신복음주의자들도 근본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내재성을 등한히 보는 경향이 있다고 무리하게 비난하면서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즉 자연과정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에 치중한다. 이것은 점진적 창조의 개념에서 보여진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진화를 통해 사역하신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신복음주의는 여기서 자유주의와 악수한다.
처녀 성탄 부인의 경향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가 하듯 처녀성탄의 교리적 중요성을 의문한다. 그리스도의 처녀성탄의 사실을 부인하려는 준비공작에 착수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처녀성탄의 사실을 부인하면서 그 교리적 중요성을 부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처녀성탄을 믿거나 안 믿거나 그의 신성을 믿는 신앙에는 영향이 없다고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것은 물론 자신들의 처녀성탄 부인을 정당화하려는 궤변이다. 신복음주의는 그리스도의 처녀성탄의 교리적 중요성을 부인하려 함으로 자유주의와 동조한다. 카넬은 성경이 그리스도의 처녀에게서 나셨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상술하지 않았다고 보고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이미 제출한 어떤 설명을 그릇된 설명으로 보았다. 처녀성탄은 그리스도의 신성에도 그의 무죄성에도 중요하지 않기에 사도들이 전도와 저서들에 언급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지옥과 천당의 희미한 이해
신복음주의는 지옥과 천당의 이해에서 근본주의와 다르다고 한다. 근본주의는 흔히 천당과 지옥을 물리적 표현들로 사고하여 지옥은 현실적 물리적 화염이었고 천국은 여자적 지리적 면적과 황금을 편 거리들을 가진 처소였다. 신복음주의자들에게는 내세론이 보다 적게 여자적이고 보다 더 영적이다. 지옥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분리되어 생긴 수난, 물리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민을 포함하며 천당의 영광들은 값진 금속들과 보석들에 의해 상징된 것뿐이라고 한다. 천당은 순전히 지리적인 장소들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강력있는 로케트로 멀리 여행함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의 처소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다른 차원이니 통상으로 죽음에 의해서만 과도된다.
빌리 그래햄은 남침례교의 근본주의에서 자란 인물로 그의 사상적 변천은 그의 성경의 여자적 해석이 감해진 데서 나타난다. 그의 초기 설교에는 그가 물질적 불이 붙은 지옥을 믿은 증거가 있고 천국은 한 면이 1,600마일되는 입방체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는 지옥불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추방된 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열망일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천국은 울의 이해 건너편에 있는 곳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폭넓은 혼합주의
신복음주의는 폭 넓은 사상운동이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아울러 포섭하며 신앙적 요소와 불신앙적 요소를 함께 종합하는 일종의 혼합주의이다. 칼빈신학교의 클로스터 교수는 신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의 반지식주의의 역점을 알고 지식 추구의 영향으로 나아가다가 지나치게 되어 신앙적 요소와 불신앙적 요소를 종합하려 한데서 문제가 있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순전한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보수하는 교회로서는 이같은 혼합주의 신학인 신복음주의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자유주의와 대화로 타협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또는 신정통주의적 신학자들로 더불어 관념들의 교환을 행할 필요를 근본주의자들 보다 더 의식한다. 버논 그라운드는 복음주의자는 모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교제로부터 기관조직적으로 분리될 수 있으나 오히려 복음주의자들이 아닌 자들로 더불어 관념들의 교환에 유익하게 종사할 수 있다고 했다. 에쉬부룩은 신복음주의를 신중립주의라고 하였다. 이는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중가에 서는 운동이라는 의미이다. 신복음주의는 정통주의를 떠나 자유주의와 타협하는 새로운 이사상운동이다.
자유주의자들과의 우호
신복음주의가 보수주의 신학교를 하나 둘 점령해 자유주의자들과의 우호적 대화를 널리 전개하는 것은 매우 비참한 일이다. 아켄가가 풀러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사회적 치중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복음주의 학교들이 풀러신학교를 모범하리라는 신념을 표현했다. 그 후 이런 사상은 달라스 신학교, 베델신학교, 휘튼 대학, 웨스트몬트 신학교, 바링톤 신학교, 킹스 칼리지, 브라이얀 신학교, 무디 신학교, 휴톤 신학교, 고든 신학교, 바이올라 신학교, 필라델피아 신학교 등 많은 학교들이 신복음주의의 감화를 받아 자유주의자들과 우호하는 무대로 되었다.
타락한 교회에 머물러 있기를 주장
신복음주의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고수와 분리의 문제를 주목해 전자를 역설하고 후자에 반대한다. 1957년 말에 아켄가는 신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상이의 정의에서 선언한 대로 신복음주의 전략은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며 분리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신복음주의의 세력 기구인 NAE의 성원들은 신학적으로 타락한 옛 교파들 안에 머물며 자유주의자들의 교회정치 아래서 개인적으로 신앙을 보수하노라고 타협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칼빈은 변질된 교회는 점점 부유해가고 위세를 떨치며 반면 진정한 의미의 교회는 변질의 본거지에서 이탈해 특히 적은 수효라 하여도 참되게 복음을 증거하며 그 본래의 명맥을 고난 중에서도 이어가게 된다고 했다.
개신교회는 모드 교회 분리의 정당성을 승인하며 이를 교회의 자유라는 말로 표현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그 시로부터 분리와 와해가 뒤 따랐다. 칼빈은 이러한 분규를 참신한 분쟁 fresh conflict이라고 하여 정당성을 인정했다.
교회통일에 향한 에큐메니칼 운동
신복음주의자 에릭슨은 신복음주의가 그리스도인 중에 크게 필요한 통일에 가는 길을 제시한다. NAE는 하나의 통일하는 요인이며, 1966년 베를린 전도대회도 그런 것이라고 하였다. 복음주의자들이 비복음주의자들과의 대화를 위해 NCC같은 단체들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을 찬성하며 근년에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대화가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신복음주의자들은 WCC의 포옹주의와 관용을 비평하는 동시에 ICCC의 배타주의와 협량을 비난한다. 그리고 신복음주의 여론은 자유주의자와의 신학적 대화, 성경적 에큐메니칼주의를 정의하려는 시도, 현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복음주의적 비평, 복음주의적 협동을 위한 깊은 계획등을 촉구한다. 이뿐 아니라 신복음주의자들은 실제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전진한다.
NAE를 통한 에큐메니칼 운동
NAE는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의 약자로 WEF 즉 World Evangelical Fellowship의 미국과 다른 각국의 지부의 명칭이다. 한국에서는 복음주의 연맹이라고 하나 한국 NAE가 더 잘 알려진 명칭이다. 이 단체는 신복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연합운동이다. WCC에 속한 교파들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바른 신앙을 지킨다는 국제적 연합이다.
신복음주의라는 명칭의 창시자 아켄가가 1942년에 조직한 NAE는 그가 초대회장이었고 그의 기조 연설에서 WCC와 NCC의 자유주의 사상은 묵인하여 두고 신복음주의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선포하였다. NAE는 WCC의 주요 인사들을 다 초대하여 함께 일하며 친선 우호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빌리 그래햄을 통한 연합운동
1. 이사상 단체들과의 전도적 협동
빌리 그래햄의 전도사역은 협동적 전도이다. 초기 그는 전도방법을 무디, 토리, 썬데이, 밥존스등 선임자들의 성경적 원리들을 따랐다. 그의 전도 집회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주최되고 자유주의자들의 협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후년에는 그의 전도 방법이 크게 바뀌고 자유주의자들과 협동하는 협동적 전도로 전환되었다. 빌리 그래햄은 도시 부흥전도 집회에 관해 보수주의교회들 만의 초청에는 응하지 않고 자유주의 교회들의 협동 주최하는데만 갔다. 그리고 부흥전도 집회의 강단에 자유주의자들을 올려 세우고 훌륭한 찬사로 소개했다.
2. WCC 운동과의 우호
빌리 그래햄은 신복음주의의 선도자로 그의 양떼를 WCC 우리로 몰아갔다. 그는 민권투기장에서 세계교회의 연합 강단까지 짧은 한 걸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1966년 영국 런던에서 모인 WCC 회의에서 그는 복음주의 메시지와 에큐메니칼 심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3회, 4회 총회에 다 참여했다. 그는 WCC의 광범한 포섭 정책을 본받아 자유주의자들과 우호하고 로마 가톨릭과 친선하며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호의를 표시했다.
3. 세계 전도대회
베를린 세계 전도대회(1966. 10. 26- 11. 4)이 전도대회는 신복음주의의 큰 회의로 신복음주의자 칼 헨리가 의장으로 빌리 그래햄이 명예의장으로 주최하고 1300여명의 신복음주의자들, WCC, NCC, 자유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제외되었다. 로잔 대회(1974)에서는 WCC 본부직원들, 옵저버로 로마 가톨릭, 공산국 대표들이 포함된 약 4000명 정도가 참여하였다.
잘못 아는 형제들이거나 열렬하지 않는 이단자들
신복음주의는 그 신학의 창시자 아켄가와 신봉자들의 자칭하는 허울 좋은 이름이나 실로는 신자유주의 운동이다.
성경적 정통신앙을 지키기에 천신만고를 무릅써온 한국보수주의 교회는 결코 이 신자유주의에게 자리를 내어 줄 수 없다. 우리교회의 모든 지도자들과 신도들은 우리의 신앙의 조상들이 눈물과 피로 지키고 전해준 바른 신앙의 노선을 버리고 이 새로 일어나 신사상의 노선에 한 걸음이라도 따라서는 안된다. http://www.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3014§ion=sc9§ion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