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국교회교단의 특징과 신학교
1.장신
예장 통합측.
광나루 라고 알려진 장신은 칼빈주의+칼발트+자유주의=혼합주의 입니다.
장로교의 대표적 중도교단으로 예장 통합측이라고도 한다. 성경를 하느님의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고, 이를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삼으며, 칼빈주의에 입각한 장로회헌법과 12신조 및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기본신조로 한다.
1884년 미국 북 장로교 의료선교사 앨런(H.Allen)이 고종의 지시에 따라 광혜원을 운영하고,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소속 로스(J.Ross)가 신약성서를 번역하여《예수셩교젼서》를 출간하면서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1893년 선교사들이 장로회선교공의회를 조직하였고 이것은 1901년 한국교회 대표들이 함께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로 발전하였다. 1907년 9월 17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가 조직되어 독로회(獨老會)라 불리었으며, 같은 해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이 최초의 한국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1912년 9월 1일 독로회시대를 청산하고 7개 노회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였으며, 1922년에는 헌법을 제정하여 장로교의 신앙노선과 교리체계를 확립하였다.
1938년 9월 10일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50여 명의 목사들이 순교하고 평양신학교는 폐쇄 당하였다. 1943년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된 뒤 1945년 7월 18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통합되었다. 광복 후 1947년 총회를 재건하고 1949년 4월 22일 교단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꾸었다. 1952년 9월 11일 고려신학교측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여 분리해나가고,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측이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조직하여 분리해나갔다. 1959년 9월 28일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 분리해나갔으며, 그 이후 50개가 넘는 교단이 생겼다.
2.총신
예장 합동측(주류격).
사당동(전철 총신대역) 주재.
칼빈주의만 수용함.
1884년 미국 북 장로교 의료선교사 앨런(H.Allen)이 고종의 지시에 따라 광혜원을 운영하고,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소속 로스(J.Ross)가 신약성서를 번역하여《예수셩교젼서》를 출간하면서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1893년 선교사들이 장로회선교공의회를 조직하였고 이것은 1901년 한국교회 대표들이 함께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로 발전하였다. 1907년 9월 17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가 조직되어 독로회(獨老會)라 불리었으며, 같은 해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이 최초의 한국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1912년 9월 1일 독로회시대를 청산하고 7개 노회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였으며, 1922년에는 헌법을 제정하여 장로교의 신앙노선과 교리체계를 확립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1901년 시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를 모체로 1912년 창립되었는데, 창립 당시의 명칭은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였다. 1949년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꾼 뒤,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머니즘 신학에 대한 이견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분리되면서 WCC를 영구히 탈퇴하였다.
1963년 문교부(현, 교육인적자원부)에 총회를 사회단체로 등록하고, 1965년부터 《기독신보》(지금의 기독신문)를 발행하였다. 1977년 주교교사통신대학을 설립하고, 1982년 총회유지재단 설립 인가를 받았다.
개혁주의 신학을 근본 이념으로 하여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교리문답)을 교리의 표준으로 삼는다. 또 장로교 헌법의 정치원리를 가지며, 교회의 성례전적 전통과 권위·질서의 준수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함께 예수교장로교단를 대표하는 교단으로, 2002년 현재 전국에 86개의 노회와 6,795개의 교회가 있다. 목사 전도사 등 교역자는 1만 8038명, 평신도는 230만 명이며, 그 밖에 총신대학교·총신대학원·신학대학원·교육대학원·선교대학원 등 5개의 직영 총회신학원과 10개의 총회 인준 신학교가 있다.
3.합신
예장 합동측 에서 분리(비 주류격).
칼빈의 신학만 수용.
수원주재.
총신에 있던 박아론, 신복윤 교수가 이동.
1980년 11월 11일 서울 남서울교회당에서 합동신학교로 문을 열었다. 이듬해 1회 졸업생 48명을 배출하였고, 1982년 4월 신학교 설립승인을 받았다. 1983년 4월 신학연구지 《신학정론》 창간호를 발행하고, 같은 해 9월 교육부로부터 학교법인 설립인가를 받아 자유학원으로 법원등기를 마쳤다. 1996년 12월 11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 승격을 거쳐, 1997년 11월 10일 지금의 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교육이념은 개혁주의적 신학에 바탕을 둔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다. 설립목적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교역자와 지도자 양성이다. 이를 위해 개혁주의적 신학과 경건을 겸비한 목회자와 신학자, 세계 복음화의 열정을 가지고 헌신하는 선교사 양성을 교육목표로 삼고 있다.
기구는 총장을 정점으로 6개 위원회와 기획실·대학위원회·교무처(1과)·학생처·실천처. 총무처로 이루어져 있다. 학과는 신학과와 목회학과로 나뉜다. 수업 연한은 신학과 석사과정 2년, 목회학과 석사과정 3년이다.
입학 정원은 모두 90명이다. 부속기간으로는 도서관·생활관·신학정론사·합동신학보사·선교훈련원·목회대학원·출판부·정암신학연구소·칼빈(칼뱅)사상연구소·여자신학연구원·사이버신학교육연구소 등이 있다.
21세기 주요 비전은 개혁신학의 선구자,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의 요람, 북방선교와 세계선교의 견인차, 전문화된 종합 캠퍼스 건설이다. 1999년 8월 미국 앨라배마주(州) 버밍햄신학대학원과 공동 학위과정인 목회대학원을 개설하고, 2000년 11월에는 개교 20주년 기념 《합신 20년사》를 발간하였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遠川洞)에 있다.
4.고신
예장 고려파 (고신측).
칼빈의 신학만 수용.
옛부터 부산에 자리하여 부산지역에 교회가 많음.
다른 쪽은 반고신측으로 파주 파평면주재(경향교회 석원태목사 쪽).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 투옥되었다가 8·15 광복과 함께 출옥한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 초창기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1952년 9월 11일 경상남도 진주(晉州) 성남교회당에서 제1회 총노회를 개최하면서 출범하였다. 이들은 본래 다른 교파를 세우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 고신 측 총대들을 거부하고 총회로부터 축출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고신 교단을 출범시킨 것이다.
고신 교단의 역사는 고려신학교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데, 초기 지도자들은 1946년 6월진해(鎭海)에 하기 신학강좌를 개설하고, 이어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얼마 뒤 고려신학대학으로 인가받았으며, 다시 부산광역시 송도의 고신대학교와 천안의 고려신학대학원으로 발전 하였다. 교단 출범 이후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부르짖으며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있다. 또 웨스트민스트교리 표준서를 신조로 삼아 칼빈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견지하면서 한국 교계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02년 현재 34개 노회에 1,578개의 교회가 있으며, 교인은 43만 8283명, 목회자는 3,682명(목사 2,230명, 강도사 425명, 전도사 1,027명)이다.
5.한신
기독교장로회(기장측).
한국의 자유주의의 원조.
칼빈 혼합.
극단적 자유주의.
예수교장로회(약칭 예장)와 그 뿌리는 같다. 그러나 1947년 제33회 총회 이후 김재준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 문제를 둘러싸고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분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어 1952년 4월 제37회 총회에서 당시 한국신학대학 졸업생에 대한 목회자격 박탈, 김재준 목사의 교수직 파면과 아울러 소속 경기노회에서 목사직 박탈이 의결되면서 이듬해 6월 완전한 분립이 이루어졌다. 조선신학교는 17세기 정통주의 신학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중간노선인 신정통주의 입장을 취했으나, 성경의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을 신봉하는 박형룡(朴亨龍) 목사를 주축으로 한 보수진영에서 성서문자의 무오(無誤)를 주장하여 기독교장로교측을 극단적 자유주의로 혹평함으로써 완전 결별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54년 6월 10일 제39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개칭하고, 세계장로교회의 주류를 좇아 에큐머니컬운동(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섰다. 같은 해 목포노회의 동참을 필두로, 이듬해 전남·경남 두 노회가 가담한 데 이어 캐나다 연합교회가 예장과 결별을 선언하고, 선교사 21명을 파송해 줌으로써 활기를 띠어갔다. 1956년 제41회 총회에서는 한국교회사상 최초로 부목사 ·여자장로제 등을 채택하고, 이듬해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해 국내교회 연합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1960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도 가입하였다. 1961년 18개 노회를 9개 노회로 통합하고, 교단명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았다.
1969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유지재단 설립인가를 받고, 1971년 사회선언지침을 채택해 도시산업선교·반독재 투쟁에 가톨릭 지도자 등과 보조를 맞추어 사회참여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74년 여목사 제도를 채택하였고, 1979년에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실행위원회 및 신학협의회를 예장 측과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1993년 통일헌법특별연구위원회를 설치한 뒤, 1997년에는 북한선교복지회관 설립 추진운동을 결의하였다.
2000년 12월 현재 교회는 1,509개, 목사는 2,090명, 교인은 32만 2465명이다. 또 2002년 현재 전국에 24개의 노회가 있고, 총회 기관으로는 한신대학교와 영생고등학교를 비롯해 14개의 장애인 선교기관, 8개의 사회복지법인, 6개의 특수 선교기관이 있다.
6.감신
감신대
기독교 대한 감리회(기감측).
서울냉청동 주재.
한신과 같이 자유주의 수용.
웨슬레 신학과 알미니안 주의(교단 같음).
타 종교 구원 가능 말한 변선환학장 면직.
예수의 구속과 부활등 부인으로 홍교수 및 일부 교수 면직.
극단적 자유주의이나 교단의 문제 보다 외국물먹고온 교수들 문제.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는 곧 한국 프로테스탄트계 교회의 시작이다. 한국 프로테스탄트계 교회의 시작은 한국의 본격적 개화운동과 근대적 민족운동의 시작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감리교회는 1884년 6월 23일 R.매클레이 박사를 통하여 한국에 처음 들어왔다. 그 무렵 그는 일본에서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업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고종(高宗)의 허락을 얻어 한국에서 감리교회 주관하에 교육과 의료사업을 개시하기로 하고, 그 실행을 미국 선교본부에 청원하였다.
한국에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맨 처음부터 주장한 볼티모어시(市) J.F.가우처 박사의 원조와 장려로 1885년 미국 감리회의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그들이 북감리회 소속 선교사들인 H.G.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W.B.스크랜드 의사 부부였으며, 스크랜턴의 어머니 M.F.스크랜턴 부인도 미국 감리회 여선교회 대표로 건너왔다.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을 거쳐 그 해 4월 5일 장로회선교사 H.G. 언드우드 박사와 함께 인천에 상륙하였고, 스크랜턴 가족은 5월에 입국하였다.
스크랜턴은 같은 해 9월 처음으로 서울 정동(貞洞)에 교회와 병원을 열고, 그의 부인은 단 1명의 여학생으로써 이화학당(梨花學堂)을 개설하였으며, 그 해 6월에는 아펜젤러가 학생 6명을 데리고 배재학당(培材學堂)을 개교하였다. 1887년 1월 정동교회에 처음 한국에서 주일학교(主日學校)를 열었고, 12월에는 북감리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남감리회도 독자적으로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중국 유학 중 교인이 된 윤치호(尹致昊)가 1885년 귀국하여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남감리회 선교본부에 청원하였다. 이에 따라 E.R. 헨드릭스 감독과 중국에서 선교하던 C.F.리드 박사를 따라 그 해 10월 한국에 와서 선교사업 개시를 결정하고 교회 부지를 샀다. 이듬해에는 리드가 가족을 데리고 남감리교회의 첫 선교사로 상하이[上海]에서 서울로 건너와 전도 및 교육사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주한 미국공사는 선교사 출신인 H,N.앨런(한국명 安連)이었다. 그의 주선으로 리드는 고종을 알현하고, 국왕으로부터 "한국에 좋은 교사를 파송하여 한국민의 문화발달에 공헌하여 달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에 선교본부를 마련하고, 중국 선교구역의 한 지역으로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해 5월에 분리하여 따로 한국선교부를 설립하고 리드가 초대 감리사(監理師)가 되었다.
7.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서울신대
부천 소사 주재.
감신대 같이 웨슬레 신학과 알미니안 주의.
통합측 같이 일부 자유주의 수용(교재 같이 사용한적도 있음).
우리 성결교회가 초창기부터 전파해 오던 전도표제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복음입니다.
'사중복음'은 성경의 진리이며, 성령세례는 성결신학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중생이란 거듭난다는 것이요 본래 의롭지 못한 사람이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으로 신학적인 용어로는 '칭의' 또는 '의인' 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이 중생을 '기독교의 입문이며 천국시민의 자격을 갖추는 유일한 도리'라고 헌법에 규정하여 중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되며,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우게 되는 것입니다.(요5:24)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이기고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성결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 헌법은 "성결은 성도가 받을 성령세례를 가리킴이니 .....우리도 모든 사람을 중생으로 인도하고 중생한 처지에 있는 신자들은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인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결이란 중생한 사람이라도 자기 힘으로는 거룩하게 될 수 없다는 전적무능을 깨닫고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이기고 살 수있는 능력 - 즉 성령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중생의 은혜'가 순간적으로 오는 것처럼 '성결의 은혜'도 순간적으로 옵니다.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하며 (행1:5)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기를 소원하기 때문에 언제나 성령께 순종하며 살게되고, 실패하면 즉시 자백하여 새힘을 받아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 몸을 경영하십니다. 우리 교회 헌법은 "신유는 신자가 하나님의 보호로 항상 건강하게 지내는 것과 또는 병들었을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음을 얻는 것을 가리킴이니 이 은사는 우리 육신을 안전케 하는 복음이다.... 그러나 의약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유란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유하심은 신유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 죄를 서로 고하며 기도하면 혹 죽을 병에서도 일으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약5:14~16) 또한 의약과 의원들도 하나님의 지혜로 병을 다스리는 능력을 받은 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치료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은 주님의 재림시에 완성됩니다. 우리교회의 헌법에는 "구약성경의 예언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수육탄생이라면 신약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 할 수 있나니 우리는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을 믿는다." 고 했습니다.
재림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심판주로 다시오심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다시 오실 때에 아무도 그앞에서 변명 할 사람이 없습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며 (계21:7)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둘째사망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계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