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삼국사기 신라편 - <황하,태산>이 백제 땅이었다는 증거

도심안 2019. 1. 12. 05:56

[[고구려,삼국,高,朝]] 삼국사기 신라편 - <황하,태산>이 백제 땅이었다는 증거| ………++.한 경.++………〃『고대사,역사의 쟁점』

흑진주001 | 조회 53 |추천 0 | 2004.03.19. 06:35


- 참고 : 과학으로 밝혀진 우리고대사 362~363페이지



(삼국사기 신라본기) 황하, 태산 일대가 백제땅이었다는 증언 아닌가 ?



(원문)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함형원년(670년) 7월(8.10~9.8)에
당나라에 갔던 사신 김흠순 등이 귀국하여,

장차 경계를 확정할 것인데,
지도에서 백제의 옛 국토를 조사하여,
백제의 국토로 돌려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하가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산이 아직 닳지 않았거늘,

3. 4년 사이에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모두 원래 바라던 바가 아니라고 실망하면서,

“신라와 백제는 누대에 걸친 철천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니,
백년 이후에는 우리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하여 멸망될 것이다.

신라는 원래 당나라의 한 지방이므로 두 나라로 나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원컨대,
이를 한 집안으로 만들어 영원히 후환을 없애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해설) 운영자 개인생각

위 기록은 신라 통일후의 내용이다

단문이지만 참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기록이다
부분 부분 보면



(1) 황하, 태산은 백제땅 ?


남제서를 보면 산동성 “황하, 태산” 유역은
당연히 입증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신라가 당나라와 힘을 합쳐 백제(산동성 유역의 대륙백제)를 멸하고도
백제 부흥운동의 힘을 두려워 하여
100년안에 신라가 백제에 또 다시 멸망당하리라는 두려움을 표시하고

스스로 당에 합쳐지길 주장하는 내용아닌가 ?

위 내용은 “황하, 태산”유역이 백제땅이었다는 증언이다


해석에 이견이 있겠지만
운영자 개인생각은 이러한 생각을 떨쳐 버릴수 없다



(2) 신라는 당나라 군정지배하에 있었나 ?

신라는 당나라의 한 지방이라 읍소하는 대목과
(백제의 위협의 대비하여) 당나라와 합병하여야 한다는 대목은
주시하여야 할 부분이다

→ 혹시 당의 힘을 빌어 통일을 한 대륙신라는 당 군정하에 놓여있다가
벡제를 멸한후 당군정하에 놓여 있다가
스스로 당에 흡수 당 한 것은 아닌가 ?

이미 이러한 정황은 오재성 선생님이 주장한바 있다

삼국사기는 재조명되어야 한다

(관련지도)









(태산(泰山)은 대산(岱山), 대산(大山), 태산(太山)으로 동시에 불리웠다 !)


"웅진(熊津)동쪽에 있는 대산(大山) : 동음이자(同音異字)와 유사형태(類似形態)의 혼합변경 법칙의 발견"


동일사건을 기록하는데 차이가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① 『구당서』권199상

건봉원년고장견기자입조배위어태산지하
(乾封元年高藏遣其子入朝陪位於太山之下)

② 『당서』 권220

건봉원년장견자남복종천자봉태산
(乾封元年藏遣子男福從天子封泰山)

③『삼국사기』보장왕25년

왕견태자복남입당 시사태산
(王遣太子福男入唐 侍祠泰山)


"666년 왕은 태자 복남을 당에 들여보내어 태산의 제사를 모시었다"



(1) 고구리 패망 지역이 "남북한"이라 가정할 때의 문제점

아시아에서 태산으로 불리는 산은 현재의 산동성 태산을 말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와 같이 남북한 지역에서 고구리가 패망하였다면
산동성 태산에서 제사를 모시는데
왜 고구리태자가 가서 지내야 했을까 ?

위 기록 이후에 해동(황해 동쪽)에서
산동성 태산(泰山)에 가서 제사를 봉행한 기록이 있는가 ?
없을 것이다.

당과 전쟁상태로 악화되어 있는데
그 땅에 가서 제사를 참여를 하다니 있을 수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을까 ?

제사 동시봉행은
자기 나라의 지역이던지 같은 동족의 땅일때 등
같은 목적을 가졌을 때만이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

(운영자 주)

대륙백제와 고구려는 동맹관계를 맺고 대륙신라를 괴롭히던 시절이었으므로
가능한 기록이라 본다


(2) 다음으로 태산이란 지명이 어떻게 변하였는가를 살펴보자  

후진(後晋 : 936-946)때 기록에서는 태산(太山)으로
송(1060년)때 기록에서는 태산(泰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태산(泰山)은 산동성에 있는데
대(岱) 또는 대산(岱山)이라 쓰였고 『사기』권6에는 태산(泰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漢 : 25-219)시대로 부터 송(1060)까지도 태산(泰山)으로 불리웠음을 뜻하고 있다.

만약 단일 이름으로 불리웠다면
태산(泰山)의 기록만이 있어야 옳을 것이지만 후진(後晋)때 태산(太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태산이 하나의 문자로 나타나지 않고 여러가지로 기록되었음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처음에 대(岱)로 불리웠다고 했으며 단자로 표현되었으나
두 문자로 만들어 현재까지 태산(泰山)으로 2천년동안 불리웠다면
그동안 아무것도 다른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산(太山)의 명칭이 후진(後晉)때 사용되었다는 것은
한(漢)나라 때부터 송(960-1126)때까지
대산(岱山), 태산(太山), 태산(泰山)이 동시에 사용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대산(岱山)이 태산(泰山)으로 바로 변경 표현된 것이 아니라  
여기서 보듯 때에 따라 “岱山, 太山, 泰山”으로 문자가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岱(대)가 太(태)로 되기전 大(대)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증이 가능하다.
실제로 大(대)는 "태"로 발음하기도 하였다.

사서에서는 맥제(百濟)의 패망에 대한 기록 중 하나의 지명이 대산(大山)이었다.

대산(大山)의 주위에는 맥제의 패망 지명이 있어야 하는데

현 태산(泰山) 주위에는

맥제의 패망 지명이
평원, 황산, 동명, 백마하, 제성, 양성, 치, 청, 래, 해, 주류성, 웅진, 대산
(平原 黃山 東明 白馬河 諸城 兩城 淄 靑 萊 海 周留城 熊津 大山)
등이 있으니

대산(大山)은 태산(泰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라고 할 수는 없다.  

대산(大山)의 서쪽에는 웅진이 있었다.


그런데

태산(泰山)의 서쪽에는 비성<肥城>이 있고
더 서쪽에는 황산(黃山)
그리고 동명(東明)이 있다.

대산(岱山)은 동음이자화(同音異字化)시키면 대산(大山)이된다.
대산(大山)을 유사형태화(類似形態化)시키면 태산(太山)이 된다.
태산(太山)을 동음이자화(同音異字化)시키면 태산(泰山)이 된다.

대(大)가 옛날에는 태(太) 또는 태(泰)와같이 쓰였다.


한(漢)나라때 대산(岱山)과 태산(泰山)이 같이 쓰여졌다면
당연히 대산(大山)과 (太山)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장안 중심의 지나족(支那族:한부족:漢部族)들은
태산(泰山)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록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태산(泰山)은 동이(東夷)의 땅이기 때문이다.
(태산은 기자(箕子)가 살던 조선땅 서화(西華)와 신라 항성(項城)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이의 땅이었다.)



(3) 태산(泰山)은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내(內)에 있었다.


① 구리의 치우천자의 묘가 있다

최초의 국호 구리(九黎)시대의 최고 통치자의 묘가 현존하고 있으니
태산(泰山)의 서쪽에는 14대 치우천자(蚩尤天子 : 속칭치우환웅)묘가
동평군수장현(東平郡壽長縣)에 있고 견비(부인) 묘가 거야현(鉅野縣)에 있다.

구리천자(九黎天子) 부부의 능이 태산의 서쪽에 있으니 태산은 구리(九黎)의 영내에 있다.

구리(九黎)가 동이(東夷)의 국가이니 바로 우리민족의 강역(彊域)안에 있는 것이다.


② 동이인 순이 활동한 강역이다

舜(순)은 동이인(東夷人)이었는데
살던 곳이 우(虞)의 요구(姚丘)인데
우(虞)의 동북쪽에 태산이 있으니 태산은 동이(東夷)의 영역내에 있다.


③ 동이의 위인 기자의 영역내에 있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살았는데
살던 땅이 서화(西華)이고 묻힌 곳은 몽성(蒙城)인데
서화(西華)의 동쪽에 태산(太山)이 있으니 조선의 영역내에 있었다.


④ 고구리의 평정지
북평(北平) 태원(太原)과 항성(項城)의 동쪽에 태산이 있다.


⑤ 맥제의 강역이다

맥제(百濟)가 요서(遼西)의 진성(晉城)과 고평(高平 : 진평이군 : 산서성)과
요동(遼東)의 황산, 동명, 항성, 독산, 동성, 잠산, 덕안
(黃山 東明 項城 獨山 桐城 岑山 德安)의 동쪽에 태산(太山)이 있으며
청하(淸河), 평원(平原)의 남쪽에 태산(太山)이 있고,
박산(薄山), 제성(諸城)의 서쪽에 태산(太山)이 있고
백마하(白馬河)의 북쪽에 태산(太山)이 있으니

맥제(百濟)의 영역 내에 태산(太山)이 있었다.


⑥ 『삼국사기』 신라본기, 맥제본기에 의하면 태산(太山)의 이름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 452년(눌지)에 대산(大山)에서 가화을 진상하였다.
㉡ 662년(의자왕)에 웅진의 동쪽 대산(大山)에서 전투를 하였다.

대산의 주위에는
평원, 황산, 독산, 동성, 잠산, 덕안, 항성, 동명, 백마, 박산, 제성 등이 있어야 하는데

중화국

- 하북성에 평원이 있고,
- 산동성에 황산, 동명, 백마, 박산, 재성이 있으며,
- 하남성에 항성이 있고,
- 안휘성에 독산, 동성, 잠산, 석성이 있으며,
- 강서성에 덕안이 있으니 바로 유연제노와 오월지역이니

맥제의 대산은 태산(泰山)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신라당서(新羅唐書)와도 내용이 동일)

㉢ 668년(보장왕) 태산(泰山)에서 제사를 지냈다.
㉣ 866년(경문왕)반역자가 대산군(岱山郡)으로 도망을 하였다.
㉤ 885년(헌강)-894년(진성왕)사이에 태산군태수(太山郡太守)를 최치원이 하였다.
(致遠自以西學多所得及來將行己志而衰季多疑忌不能容出爲太山郡太守)
(치원자이서학다소득급래장행기지이쇠계다의기불능용출위태산군태수)

『구당서』가 후진(後晋 : 936-946)때 편찬되었는데 태산(太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최치원 시대에 태산(泰山)이 태산(太山)으로 불리웠음을 알 수 있으나
동이(東夷)의 땅이니 발음이 같은 문자를 사용하므로 혼돈이 있다.

※ 분명히 『삼국사기』에서는 산동성 태산이 岱山, 大山, 太山, 泰山으로 불리웠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태산(泰山)은
구리(九黎)시대에서 9세기까지 동이(東夷)민족의 영산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를 기록한 동이(東夷)의 기록에서
태산(太山)과 태산(泰山)이 같이 쓰여졌다는 것은 태산 뿐만 아니라
지명 변천 연구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遼東(요의 동쪽)에서 동이(東夷)로 인식하는 삼국 최후의 국가 신라가 망하고
守胡志(수호지)의 시대를 지나서
동이후예(東夷後裔)들은 중화민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말았다.

태산은 산동성에 있으며
옛 요동은 산서성의 요의 동쪽지역을 의미하며
요동땅에 태산(泰山, 大山)이 있었다.

遼東(요의 동쪽)에는 고구리와 맥제(百濟)가 있었다.


태산의 주위에
고구리, 맥제, 신라의 지명으로는

북쪽으로
석문, 청하, 평원, 창해, 신성, 고대인성, 용도, 북평(부평), 은산, 밀운, 역성, 석성 ,서안평
(石門 淸河 平原 滄海 新城 古大人城 甬道 北平(阜平) 銀山 密雲 力城 石城 西安平)
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황산, 동명, 진성, 고평, 숭산(黃山 東明 晉城 高平 崇山)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항성, 광주, 독산, 동성, 잠산, 덕안, 신안, 사, 연수
(項城 光州 獨山 桐城 岑山 德安 新案 泗 漣水)
등이 있으며

동쪽에서는 박산, 제성, 내(博山 諸城 萊)가 있으니

구리(九黎)→조선(朝鮮)→고구리(高句麗), 맥제(百濟), 신라(新羅)시대까지
우리 동이(東夷)의 영역내에 있었다.

이 태산(泰山) 명칭변경 연구는 우리 역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669년과 672년에 신라침반(新羅針盤)을 만들었던
자석(磁石)과 침(針)의 생산국가 사로신라(강회신라:江淮新羅)를 밝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그리고
태산(泰山)이 대산(大山)으로 불리웠음을
맥제(百濟) 수도 웅진(熊津)을 찾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유사형태화시키면 본래의 것을 찾는 것이 매우 힘들고 어려운 것이나
우리는 이 방법이 있었음을 알고 있는 이상 연구를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