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119차답사] 정읍 답사 자료

도심안 2018. 12. 29. 04:33

[119차답사] 정읍 답사 자료 - 참고하세요.| 답사 신청

우일신 | 조회 165 |추천 0 | 2012.11.13. 15:41


필암서원

 

 

황룡면 필암리에 위치한 필암서원은 이 지역 선비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김인후를 따르던 제자들과 호남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하였으며, 이곳은 김인후 뿐만 아니라, 그의 수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을 같이 모시고 있다. 필암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살아남은 47개 중의 하나이다.

 

필암서원의 주인공인 김인후는 장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으며, 열 살 때는 김안국에게서 공부를 하였다. 후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황과 함께 공부를 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당시 세자이던 인종을 가르쳤다. 인종은 후에 김인후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그림(묵죽도-대나무 그림)를 내렸다. 조정이 어려워지자 옥과 현감으로 내려온 그는 곧 물러나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필암서원 - 신문기사

김인후는 인종이 세자일 때 스승이기도 했다. 인종은 스승이었던 김인후를 매우 존경해서 묵죽도를 내렸다. 그러나 불행이도 인종은 왕이 된 지 1년 만에 죽었고, 그와 맞물려 김인후도 고향으로 내려왔다.

 

서원건축은 후기로 올수록 장판각이나 장경각, 누각이 사라지고 19세기에 오면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되는 단순한 형태를 띠게 된다. 필암서원(筆巖書院)은 이러한 서원건축의 변화에 많은 추정을 가능하게 해 준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와 그의 사위인 고암 양자징을 모신 필암서원은 우여곡절을 여러 번 겪었다. 1590년 장성읍 기산리에 처음 지었는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려 1624년에 다시 지었고, 1662년에 필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그러다 1672년 지금 위치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된 전라남도 지역의 유일한 서원이 되었다.

 

필암서원은 다른 서원처럼 앞에는 강학공간이 있고 뒤에는 제향공간을 두었지만, 강학공간의 구성은 다른 서원과 다르다. 보통 서원의 강학공간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앞에 나오고 강학당이 다음에 있는데, 필암서원은 반대로 강학당이 앞에 있고 기숙사가 다음에 있다. 말하자면 보통은 정문-누마루-동재와 서재의 마당-강학당-사당 순으로 서원의 축이 형성되는데, 필암서원은 누마루-마당-강학당-동재와 서재의 마당-사당 순으로 이루어진다.

앞의 경우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강학당으로 둘러싸인 ‘ㅠ’자형(위에 ㅡ획이 강학당이다) 마당은 별다른 기능이 없이 작고 관념적이다. 그러나 필암서원의 경우 강학당과 동재와 서재로 둘러싸인 ‘ㅛ’자형(아래 ㅡ획이 강학당이다) 마당은 그 위쪽의 사당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갖는다. 제향의 기능이 강화된 17세기 서원건축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필암서원은 제향 중심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사당을 중심으로 강학공간의 마당을 놓으면서, 출입을 해결하기 위해 ‘ㅛ’자 아래 다시 ‘ㅁ’자로 마당을 두었고, 누마루인 확연루(廓然樓)를 세웠다. 그래서 확연루와 강학당인 청절당(淸節堂) 사이의 마당이 오히려 일반적인 서원의 마당처럼 별 기능 없이 관념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확연루를 들어서자마자 확연한 마당이 펼쳐지는 것이다.

 

확연루는 ‘군자의 가르침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다’는 정자(程子)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서원의 출입이 마치 살림집의 안채로 들어가듯 청절당의 옆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는 것도 특이하다. 이 특이함이 새롭지는 않은 것은 거기에서 조선 성리학의 쇠락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수량 백비

비석은 원래 무덤 주인공에 대한 행적을 적어 놓는다. 그러나 박수량의 백비(白碑)는 아무 글도 새겨져 있지 않다. 이는 박수량이 관직 생활을 하면서 보여준 청렴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조선조 오백년 동안 청백리가 3백명이 넘게 있었지만, 임금에게 백비를 하사받은 사람은 박수량이 유일하다고 한다.

 

박수량(1491~1554)은 성종 22년에 장성에서 태어나 판서에까지 오른 인물로 39년간을 벼슬에 있었다. 명종은 박수량이 지극히 청백하다는 말을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그의 생활을 알아보았는데, 생계를 겨우 연명할 정도이며 집은 낡아서 비가 샐 정도였다고 한다.

 

축령산 편백휴양림

장성 축령산은 하늘로 곧게 뻗은 아름드리 편백나무와 삼나무 250만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전국 최대 인공조림지 중 하나인 축령산의 편백나무 숲은 숲 가꾸기에 헌신한 춘원 임종국(1915∼1987) 선생이 21년을 가꾼 숲이다.

 

길에서 즐길 거리는 단연 숲이다. 길과 숲은 불가분의 관계다. 가장 좋은 숲길을 찾아 나서면 된다. 겨울엔 앙상한 가지만 남아 대부분 숲은 볼품없지만 한국 최고의 조림지로 유명한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숲길은 다르다. 그 길엔 상록의 숲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영화가 있다.

장성의 편백나무는 모두가 쭉쭉 뻗어 잘생겼다. 나무의 평균 높이가 18m다. 위를 보려면 한참 쳐다봐야 한다. 평균 18m가 되는 편백나무와 삼나무들이 수백만 그루 군락을 이루고 있다. 단일 군락지로 국내 최대 규모의 숲이다. 조림가 임종국씨가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축령산 일대 700여㏊에 280만여 그루를 심고서 자식 키우듯 가꿨다. 그는 고인이 됐지만 숲이 남아 그의 이름을 전하고 있다. 지난 2000년 산림청이 뽑은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쭉쭉 뻗은 편백나무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잘 빠진 미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아름드리나무가 군살 같은 곁가지 하나 없이 미끈한 몸통 줄기를 뽐낸다. 이들은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다. 상록수 숲은 푸름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국립산림과학원 연구팀에 따르면 편백숲의 공기는 천식 치료에 효과가 있으며, 심폐기능 강화와 폐결핵 치료에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왔다.

 

그 상록의 편백숲은 '홍길동의 이야기'까지 입고 있다. 길의 현상은 '상록과 순백의 만남'이지만 길의 이야기는 홍길동인 것이다. 걷는 길에 동행한 장성 향토사학자 공영갑(64)씨는 "이 숲길은 실존인물 홍길동이 숱하게 훈련하며 다니던 길"이라고 말했다.

 

장성은 지금 온통 홍길동판이다. 실존 여부에 대해 논란은 있지만 장성군이 직접 나서서 홍길동을 실존인물로 확인하더니, 모든 홍길동 캐릭터와 상표권을 소송과 등록을 통해 장성군이 확보했다. 홍길동 생가터를 복원했고, 지금은 대단위 홍길동 테마파크를 조성 중이다. 2012년까지 완공 예정이다.

 

축령산 편백숲길은 꽤 널찍한 임도로 계속 연결된다. 걷기에 정말 좋은 길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숲속에 삼삼오오 자리를 깔고 피톤치드를 마시며 즐기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산림청은 축령산 정상과 연결되는 편백나무숲길을 치유의 숲, 건강숲길로 단장했다. 명상쉼터와 전망대를 지난해 만들었다.

 

편백나무숲길이 끝날 즈음엔 금곡영화마을이 나온다. 전형적인 산촌이면서 눈이 왔을 땐 정말 영화 같은 마을이다. 서(西)에서 난 물이 동(東)으로 흐르는 서출동류의 약수로도 유명하다. 이 마을에서 영화 '태백산맥' '내 마음의 풍금' '침향' 등을 촬영했다.

 

편백숲을 지나며 홍길동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영화 같은 마을을 만나면 어찌 즐겁지 않겠나. 한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가 흐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정제된 산소를 듬뿍 마실 수 있는 길이 장성 편백나무숲길이다. 길은 사람을 사색하게 만든다. 사색하기 싫어도 걷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사색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뒤 해결이 된 듯한 생각이 번쩍하고 떠오른다. '나는 걷는다'를 쓴 베르나르 모리비에르는 "홀로 걸으며 생각을 하는 동안 근본적인 것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까지 했다.

 

한편, 지난 8월 전남도보건환경연구원이 흙길이 조성된 도내 휴양림 6곳의 토양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오 스민 함유량 조사 결과, 장성 축령산이 136.1㎍/㎏ 로 도내 휴양림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해 아토피, 우울증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입증된바 있다.

 

탐방가이드

축령산 편백나무숲길을 가려면 추암리 괴정마을에서 출발하는 게 일반적이다. 주차할 곳도 많고, 숙식을 해결할 시설도 갖추고 있다. 추암리 괴정마을에서 1㎞ 정도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널찍한 임도가 시작된다. 이 임도를 따라 끝까지 가면 된다. 능선 정상엔 임종국 조림 공적비가 있다. 이곳이 갈림길이다. 산림청에서 조성한 치유의 숲 건강숲길은 축령산 정상으로 연결되고, 총 길이가 2.9㎞가 된다. 나중 길이 다시 합쳐진다. 괴정마을에서 임종국 조림 공적비를 거쳐 금곡영화마을까지는 5.1킬로미터

 

백양사

 

백양사하면 내장사 자락에 있는 단풍이 가장 멋있는 절집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단풍의 절대 지존은 내장사의 단풍이 아니라 백양사에 와야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백양사는 단풍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백양사의 단풍을 잘 감상하려면 그 포인트가 있는데 가장 먼저 단풍나무와 소나무 굴참나무가 드리워진 초입 진입로이다. 또 쌍계 루를 중심으로 한 물과 어우러진 단풍의 모습은 말을 잃게 만들 지경이다. 마지막으로 대웅전 뒤로 산세와 조화 속에 물든 단풍 또한 압권이다. 백양사는 가을이 주는 자연의 선물 말고도 절의 격을 따지더라도 높은 사찰이다. 우리나라 조계종의 본산사찰은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와 더불어 5개 총림(叢林) 중에 하나이다. 수행하는 스님들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나무가 우거진 숲과 같다는 뜻과 함께 선원(禪院)과 강원(講院),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규모가 큰 절집을 뜻한다. 그 만큼 사격이 높고 유명한 고승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되었으나 그 당시 이름은 백암사 였다.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라는 분이 금강경을 설하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법회 3일 되던 날에는 하얀 양도 내려와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7일간이나 이어진 법회 마지막 날 선사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하늘나라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살았는데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윤회하여 극락에 가게 되었다고 인사했다. 다음 날 금강경을 설했던 영천암 아래 흰 양이 죽어있어 그 후 백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백양사는 대단한 문화재는 없지만 사시사철 절경을 자랑하는 쌍계루와 고암스님과 최근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옹스님 등 이름있는 선승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고창개관

 

 

전북 고창은 전북의 가장 서남쪽에 있어 전남과 경계를 이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남으로 인식할 정도로 서해바다를 앞에 두고 육지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오는 하천인 풍천이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창 아산면 매산리, 도산리 일대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지석묘군안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이 많았다는 것은 고창이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농경사회였던 고대국가는 곡식이 많이 나는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창군은 백제시대 때는 '모양부리'현이었고 통일신라 때에는 고창현으로 되었다가 그 뒤로 조선에 와서 다시 고창군이 되었다. 곡창지대로 나라 안에서 군사, 행정상으로 중요한 요충지로 왜구를 막기 위해 조선 초기에 축조된 고창읍성인 모양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읍성이며, 답성(踏城)놀이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모양성 앞에는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의 옛집과 판소리박물관이 있어 고창의 풍류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게 되었다. 고창하면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를 빼놓을 수 없다. 동백과 더불어 많은 문화재가 있는 선운사는 대웅전, 지장보살상, 만세루, 백파선사비문 등을 간직하고 있는 고찰이다. 또 숲길을 올라 도솔암 미륵불에 오르면 배꼽 속의 비결을 꺼낸 동학도들은 농민의 가슴 속에 혁명의 불길을 당기게 되었다. 고창하면 대표적인 먹을거리인 장어를 빼놓을 수 없다.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은 고창의 자랑이자 이곳에 다녀간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맛보고 가야만 하는 명물이 되었다.

 

고창읍성

 

 

고창읍에 있는 읍성으로 모양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량부리(牟良夫里)라는 지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축성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계유년에 해당하는 1453년, 1513년, 1573년, 1633년 중 어느 해인지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에 나온 것으로 보아 1453년에 세워지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고창읍성은 산을 반쯤 둘러싸고 있으며 성의 높이는 4-6미터이고 동서북문과 치(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기 위해 네모 또는 반달모양으로 성 밖으로 쌓은 곳)가 6개소, 물이 흘러가는 수구문 2곳과 옹성이 있다. 조선은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진성과 고창군의 고창읍성, 정읍군의 입암산성을 잇는 방어선을 만들어 호남 내륙을 왜구의 난동을 막아 왔다. 그래서 고창읍성은 읍성이면서도 읍을 둘러싸지 않고 산성처럼 되어 있으며 성 밖에는 해자를 팠다. 전쟁 때는 방어요새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을 이 성곽 안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 건물과 두 개의 못, 네 개의 샘이 있었다. 1976년부터 복원되기 시작하여 10여동이 복원되었다. 이 성에는 성밟기 풍속이 전하는데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바퀴 돌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인데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밟는 풍속이다. 이는 아마도 성을 쌓는 것이 복을 짓는 것이라는 조상의 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또한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척화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통해 쇄국을 결의하고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정읍개관

 

 

 

 

정읍은 동진강변의 농경 문화와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불교문화가 이어지고 조선시대의 유교문화 등의 영향으로 다양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내장산을 중심으로 한 천혜의 절경은 가히 호남과 전국 제일의 단풍지로서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이와 함께 조계종의 5대 총림 중의 하나인 고불총림 백양사는 많은 고승과 신도들로 늘 붐빈다. 한편 내장산을 벗어나 칠보 쪽으로 가면 1914년 칠보산에서 칠보라는 이름을 따왔고 그 후 이 지역의 7가지 보물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정읍의 동북부의 위치하여 옹동면, 산내면, 산외면으로 통하는 곳 삼국시대부터 읍의 치소, 유상곡수 등 태산선비문화의 중심지로 남도풍류의 원류로 평가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선비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우리누리선비체험관이 있고 조선시대 99칸짜리 명당집인 김동수가옥과 무성마을 원촌리에는 태산태수를 지낸 최치원을 모시고 있는 무성서원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또 태산선비문학관에는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의 고현향악과 각종 탁본을 체험할 수 있는 선비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지극한 경치와 선비문화가 어우러진 정읍 이 가을에 찾아가면 더욱 좋지 않을까?

 

내장산

 

 

가을 단풍으로 손꼽히는 산은 설악산, 속리산과 더불어 내장산 단풍을 최고로 꼽고 있다. 내장산 단풍은 설악산 등 위 지방보다 늦어 11월 초에 절정을 이루며 이때 즈음해서 내장산단풍축제도 열린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내장사까지의 거리는 2.2킬로미터 정도 되는데 셔틀버스를 이용하기 보다는 단풍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좋다. 내장산의 주봉은 신선봉으로 서래봉과 연지봉 , 장군봉, 문필봉 등 6-700미터 정도의 봉오리들이 둘러싸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등산코스는 다양한데 백련암으로 올라 서래봉에서 시작하여 연지봉, 신선봉, 연자봉과 전망대를 거쳐 다시 내장사 일주문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종주코스인데 대략 5-6시간은 족히 걸리므로 본인의 체력에 맞게끔 등산코스를 정하는 것이 좋다. 또한 등산이 힘들다면 내장사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전망대에 오를 수 있는데 내장산 케이블카는 탐방안내소부터 연자봉 중턱 전망대까지 운행하며 소요시간은 5분정도 걸린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300m정도 거리에 전망대가 있으며 여기에서도 내장산 전체 산세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단풍과 내장산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내장산은 내장사가 있는 내장산지구와 그 반대쪽 백양사를 중심으로 한 백암산지구로 나뉘는데 두 지구 모두 단풍이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다. 접근 방법은 정읍까지 고속버스를 이용하거나 열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

 

김동수가옥

 

 

김동수 가옥은 김동수의 6대조인 김명관이 17세 때부터 짓기 시작하여 10년 만에 완성했다고 하며 옆집은 김명관의 둘째 아들이 본집을 완공한 후 30년 뒤에 착공해 10년 만에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상랑문의 명문과 다른 점이 있어 179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보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행랑채·사랑채·안행랑채·안채·별당으로 이루어진 매우 큰 집이다. 창하산(蒼霞山)이 둘러쳐져 있는 풍수 상 배산임수의 터에 조성된 택지에 동서 65M, 남북 73M의 장방형 담으로 둘러있다. 대지 중앙에 ㄷ자집 형태의 안채와 중문간채가 튼 ㅁ자집 형태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안채 남쪽에 일(一)자형 별당채 북쪽에 작은 사당이 있다. 사랑채는 이 집에서 가장 화려한데 부엌이 독립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좁은 마당이 나오고 중문을 거치면 바깥 행랑채가 나온다. 바깥행랑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사랑채가 보이응데 안행랑채의 안대문을 들어서면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배치된 방들이 있으며 좌우 앞쪽으로 돌출된 부분에 부엌을 날개처럼 배치한 특이한 평면의 안채가 있다. 안채의 서남쪽에 있는 안사랑채는 본채를 지을 때 김명관이 목수들과 임시로 거처하기 위한 건물로 지은 건물이다.

 

 

태산선비문화관

 

 

칠보는 산이 아름답고 물 또한 좋아 그 아름다운 풍광은 고현팔경(칠보 고현의 예날 아름다운 풍경 8가지 하나 예를 든다면 유상곡수<流觴曲水>인데 이는 최치원과 검단선사가 술잔을 띄우며 글을 읊었던 감운정 옛터인 유상대를 휘어 감도는 물길을 말한다)과 가사문학의 효시인 정극인의 상춘곡을 탄생시켰다. 또 이 고장의 예풍은 고현향약을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태산선비문화사료관은 고현향약과 무성서원을 비롯한 자료를 한데 모아 편리하게 관람 할 수 있도록 31종의 자료를 전시한 곳이 이 전시관이다. 탁본체험도 할 수 있으며 전문해설가의 해설도 곁들여 들을 수 있다.

 

무성서원

 

 

무성서원(武城書院)은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유학의 경전을 강론하고 연구 하며 선향을 배향하는 강학과 배향의 공간으로 근원은 태산사(泰山祠)에 둔다. 신라 최치원이 태산태수로 있을 때 그의 학문과 자취를 추모하고자 태산사를 세우고 그를 배향했다. 또 조선 중종 때 신잠이 태산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의 교화에 힘써 고현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그의 업적을 기리었다. 정극인(丁克仁)이 이 고장에 들어와 여씨(呂氏) 향약(鄕約)에 기대어 고현동약을 만들고 학당(學堂, 뒤에 남학당이 됨))을 세워 이곳 제자들을 교육시키니 여기에 벌써 서원 구실을 다 한 것이었다. 원래 태산사는 최치원 대에 있었는데 1483년 정극인(丁克仁)이 창설한 향학당이 있는 자리 즉 현 무성서원 자리로 옮겨왔다. 정극인에 이어 송세림과 정언충, 김약묵, 김관등 인물을 배출시켰다. 태산사와 생사당(生祠堂)이 서원으로 바뀐것은 광해 7년(1615)이고 그 뒤 정극인등 이곳 출신 사현을 추향오다가 숙종 22년에 무성서원으로 사액(賜額)하였다. 배향인물(配享人物)은 최치원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신잠·정극인·안세림·정언충·김약묵·김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피향정

 

연꽃이 만발하면 그 향기가 그윽하게 펼쳐가는 다고 하는 피향정(披香亭)은 신라시대 태산태수였던 최치원이 이곳을 거닐면서 풍월을 읊조렸다는 곳이다. 언제 세워졌는지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앞에는 피향정이라는 현판이 뒤에는 호남제일정이라고 쓰여 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광해군 때 현감 이지굉(李志宏)이 다시 짓고 현종 때 현감 박숭고(朴崇古)가 건물을 넓혔으며, 지금 크기로는 숙종 42년(1716) 현감 유근(柳近)이 넓혀 세웠다고 한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부분적으로 고쳤는데 단청은 1974년에 다시 칠한 것이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자 중의 하나인 피향정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규모 또한 큰 편이다. 정자로서 건물의 4면 모두 뚫려있어 어디서든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이 누정을 거쳐간 선비와 묵객들의 시가 현판에 걸려 있다.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고향 또한 태인이다. 또 벽초 홍명희선생의 아버지인 홍범식이 군수로 지냈으며 그의 선정비가 피향정 안에 있다.

 

백학정

 

여행을 하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바로 맛있는 먹을거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 중에도 전라도하면 먹을거리가 좋은 곳으로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도 기본은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총평이다. 시골 조그만 면소재지에 유명한 한식집이 있다면 모두 의아해 생각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피향정이 있어 신라 최치원이 이 정자에 올라 맑고 그윽한 향기에 취해 시를 읆었다는 태인에 유명한 한식집이 있다. 백학정이라는 집이다. 이 집에서 맛있는 음식은 참게장과 떡갈비이다. 물론 6,000원하는 백반만 먹어도 충분하다. 게장하면 흔히 서해안에서 잡히는 큰 바닷게로 만든 간장게장이나 양념게장을 머리에 떠올리는데 이 집은 참게장 만 취급한다. 과거에는 가까운 동진강에서 참게가 흔하게 잡혀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음식이었다. 물론 지금은 동진강에서 잡히지 않지만 백학정은 여전이 자연산 참게장을 대표메뉴로 내 놓는다. 참게는 10월에서 12월까지가 제철이라서 그때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담그는 방법이 남달라 참게장 고소한 맛 일품이고 역시 밥도둑이다. 다른 메뉴로는 떡갈비가 있는 데 담양 덕인관의 떡갈비와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고 육즙 또한 살아있다. 이 모든 것들이 부담이 된다면 백반을 드시라. 8,000원이면 상상도 못할 푸짐하고 행복한 밥상이 우리 앞에 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