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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사(하) 제8편 전라남북도의 운동 제1장 전북 중부지방
도심안
2018. 12. 24. 02:49
삼일운동사(하) 제8편 전라남북도의 운동 제1장 전북 중부지방 독립운동사 2
제1장 전북 중부지방 1 읍내(邑內) 3월 1일 오전, 전주군 천도교 교구실에는 서울에서 온 인종익(印宗益)에 의하여 독립선언서 1천 수백 장과 함께 독립운동의 행동방법 등이 전달되었으며, 천도교구의 직원 배상근(裵祥根)·김진옥(金振玉) 등은 여기에 의하여 곧 임실군(任實郡) 천도교 교구실 및 익산(益山)·이리(裡里)·함열(咸悅)·김제(金堤)·옥구(沃溝)·무주(茂朱)·정읍(井邑)·태인(泰仁)·순창(淳昌)·고창(高敞)·금산(錦山)·부안(扶安) 등 각 지방으로 전송하는 한편, 교인 민영진(閔泳鎭)·김태경(金太京)·서호순(徐鎬淳)·유선태(柳先泰)·유원(柳謜) 등 일부를 전주읍내의 도로 기타 요소 및 각면에 배포하고, 또 미리부터 거사에 대비하여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예수교회측과도 연락하여 거사를 계획하였으며, 천도교와 예수교측에서는 각기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며 교회 조직을 통하여 거사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선언서가 전주 및 도내 각지에서 발견됨과 함께 적측에서는 이들 종교단체 관계자들에 대한 감시가 어중하였다. 일부 인사의 검속도 있고 운동의 미연방지를 위한 사전조치도 취해졌기 때문에 일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애국지사들의 의기는 꺾이지 않았으며, 3월 13일[음 2월 12일]의 전주읍 장날을 기하여 거사할 것을 확정하였다. 한편 적측에서는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전개됨에 따라 각급 학교에 대하여 임시 방학조치를 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도 예수교측에서는 그 계통의 신흥(新興)·기전(紀全) 2남녀 학교 학생들에 대한 동원계획을 세웠던 것인데, 방학과 함께 학생들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운동의 전개와 큰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이때 예수교측에서 일을 주동하던 최종삼(崔宗三)·김가전 - 495 - (金嘉全)·윤건중(尹建重)·이수연(李守淵)·김종곤(金鍾坤) 등은 크게 당황하였다. 의사를 통할 수 있는 학생들에게 긴급 연락하여 귀향을 보류하게 하며, 한편으론 최종삼·박태련(朴泰鍊)·유병민(柳秉敏)·김한순(金漢淳)·함의선(咸義善) 등은 신흥 학교와 기전 학교의 일부 학생들과 침식을 같이 하며 신흥 학교 지하실 등 호롱불 밑에서 태극기 및 선언서 등을 준비하기에 바빴다. 또 천도교에서도 배상근·김진옥 등이 교구실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선언서 수천 장을 비밀히 등사해 내고, 교인들을 통하여 각 지방에 비밀 연락을 취해서 3월 13일 만세시위에 참가하게 하였다. 거사 예정일인 3월 13일 전주 장날은 당도하였다. 며칠 전부터 전주 시내에는 이날 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난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에 적측 헌병 경찰은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모여드는 장꾼들의 일거일동을 예민하게 주시하였다. 그러나 채소 가마니로 가장된 태극기의 포장은 남문 장터까지 무사히 운반되었다. 최경애(崔敬愛)·최금수(崔金洙)·함연춘(咸然春)·정복수(鄭福壽)·송순이(宋順怡)·김신희(金信熙)·최요한나(崔堯漢羅)·임영신(任永信)·강정순(姜貞順)·김순실(金淳實)·김나현(金羅賢)·김공순(金恭順) 등의 여학생과 고형진(高衡鎭)·남궁현(南宮鉉)·김병학(金炳學) 등 신흥학교 학생들도 나섰다. 정오경, 남문에서 울려나오는 인경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행동이 개시되었다. 천도교·예수교인 및 신흥·기전 학교 남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약1백 50명의 집단이 남문 시장에서부터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하였던 태극기를 기전여학교 학생들이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흥학교와 전주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또 김정희(金錠熙)는 아래와 같은 격문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아(我) 삼천만 동포에 경고함] 희(噫)라, 오인 동포여! 눈을 들어 대세를 보라. 평화의 신과 자유의 신은 이제야 장대(長大)한 손을 들어 제 국가의 비인도적 침략주의를 타파하고, 무도 강국의 압력하에서 신음하는 각 민족의 기반(羈絆)을 풀어 세계 수평선상에 평화의 낙원을 축조(築造)하며 자유의 무대를 건설하려 한다. - 496 - 오호라, 오 동포여! 호매(豪邁)한 힘으로써 속박 줄을 끊어 버리고, 최대의 결심과 성심으로써 독립기를 세우고 가자. 오호라, 오 동포여! 기회는 2번 다시 아니 온다. 이 때를 향하여 맹연(猛然)히 일어나서 멸망의 구렁에서 자유를 향하여 약진하자. 희라 아 동포여! 자유에 죽는 것은 속박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 희라, 오 동포! 맹연히 분기하자. 각성하자, 난포의 음모는 절대적으로 피할 사. 시장에 모여든 장꾼들도 여기에 호응하였다. 만세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대열이 증가되었다. 김봉추(金鳳樞)는 앞에 서서 인도하고, 이운영(李云泳)은 태극기를 두 손에 나누어 들고 휘두르며 군중들을 격려하였다. 이명수(李明洙)는, “대한 사람으로서 만세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반역자!” 라고 외치며 독려하였다. 만세의 대열은 기운차게 달렸다. 남문에서 공립 제2보통학교, 대화정(大和町)을 지나 대정정(大正町) 우편국 앞까지 행진하였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거리는 태극기와 독립만세의 물결로 넘쳤다. 읍내의 강준구(姜俊求)·이영식(李英植)·이승유(李承裕)·유완진(柳完鎭)·박덕주(朴德柱)와 상관면(上關面)의 서병규(徐丙珪), 용진면(龍進面)의 김재흥(金在興), 우림면(雨林面)의 서봉운(徐奉雲), 이동면(伊東面)의 김진영(金鎭永) 및 임실군(任實郡) 성수면(聖壽面)의 강선칠(姜善七) 등 청년들은 모두 군중들의 앞장에 서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우편국 앞에서는 적 헌병·경찰의 저지선에 부딪혔다. 총검을 휘두르는 적측과 밀고 밀리는 승강이가 벌어졌다. 그러나 군중은 좀처럼 해산하지 않으니 야만적인 적은 평화의 대열을 향해 총을 발사하기도 하였다. 얼마 후에는 이운영·김봉추·배상근 등 10여명이 검속당하고 대열은 일시 해산되었다. 그러나 오후 3시경, 군중들은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다. 남문시장에 약 1백 명이 집합하여 다시 만세를 부르며 본정(本町)쪽으로 행진을 하였다. 본정 우편국까지 이르는 동안 인원수는 다시 증가하여 약 5백 명에 이르렀다. 최종삼 등이 주동이 되어 기세를 올리며 큰 거리로 행진하였다. 여기서는 적 헌병과 소방대원 약 50명이 소방도구를 가지고 대기하다가 군중들을 향하여 - 497 - 물을 끼얹고 또 소방을 갈구리로 전진하는 대열을 향하여 마구 찍기도 하였다. 여기서도 수10명의 부상자가 생기고 일부의 주동 인물들은 검속당하기도 하였다. 만세의 대열은 이제는 산병작전(散兵作戰)으로 들어가 이 골목 저 골목으로 흩어지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해가 서산에 넘어갈 무렵에는 적들의 무차별 검속이 시작되었다. 큰 거리나 골목에서 어름어름하는 사람이면 모두 붙들게 되니 형세는 달라졌다. 더구나 적 경찰은 낮에 만세운동이 진행될 때에 미리 소방차를 끌고 다니며 빨간 잉크로 본인도 모르게 옷에 표시하였는데, 이 잉크 점만 묻은 사람이면 모조리 붙들어 유치장으로 몰아넣었다. 겨레의 수난이요 불행이었다. 그러나 애국시민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밤을 타서 다시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날 밤 9시경, 기전여학교의 김순실(金淳實)·김나현(金羅賢) 등 여학생도 섞인 230명씩의 집단으로 혹은 도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북쪽으로 향하여 나가고, 혹은 남문 및 남문 밖 시장 부근에서 내를 향하여 들어오며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적 경찰이 검속한 애국동포들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학생과 시민이 호응하였다. 이날 밤 2시경까지 계속되었으며 많은 시민들이 도 검속되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하여 저주 읍내에서 검속된 인원은 무려 3백여 명에 이르렀다. 14일에도 계속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도 전일에 계속하여 적측에서는 아침부터 수비대·경찰 등을 동원하여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오후 3시경에는 다시 완산정(完山停) 김제가도(金堤街道)에서부터 약 3백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본정(本町) 2정목까지 진출하였다. 이날 특히 정주면의 청년 박상선(朴尙鮮)·백남두(白南斗)·김인철(金仁喆)·이판쇠(李判釗)·배윤명(裵允明)·김봉호(金鳳昊)·최갑쇠(崔甲釗)·김점쇠(金占釗)와 완전면(薍田面)의 배순길(裵順吉)·용진면(龍進面)의 권봉화(權奉和), 우림면(雨林面)의 박찬문(朴贊文), 이동면(伊東面)의 노성용(盧成用) 및 임실군(任實郡) 신평면(新平面)의 최병태(崔炳台), 김제군(金堤郡) 백구면(白鷗面)의 김대희(金大熙) 등은, “애국지사들을 석방하라!” 고 외치면서 기세를 올렸다. 또 많은 예수교계통의 남녀학생들과 예수교·천교도인들이 - 498 - 참가하여 더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결국은 적측의 무력에 의하여 박상선·백남두 등 16명이 검속당하였다. 그러나 밤에는 다시 소집단·소부대로 시내 각처에 나타나 독립만세를 외쳐 적측의 신경을 교란하였다. 전주에서의 만세운동에는 특히 신흥학교의 교사 유병민(劉秉敏)·문병무(文秉武)와 기전여학교의 교사 함의선(咸義善)·김지순(金漬淳) 등의 활동이 컸으며, 또 박태련(朴泰鍊)은 읍내 부호의 아들로서 일본에 유학 중이었는데 이때 귀향하여 선두에 서서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여 민중들을 감격하게 하였다. 이때 전주의 제1차 운동에서 검속당한 많은 애국 동포들은 적의 모진 고문을 당하였지만, 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법정투쟁을 전재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도 여학생 임영신·정복수·김공순·최경애·김인애(金仁愛)·최요한나·강정순·함연순·최금수·송순의·길순실(吉順實)·김신희·정월초(鄭月初) 등은 4일간의 단식투쟁을 하며, 위압(威壓)하는 적 검사의 심문에 대하여도 화평한 기상과 담대한 언사로, “우리가 어찌 너희들의 판결에 복종할 사람이냐? 너희들은 우리의 강토를 강탈하였고 우리의 부형을 학살한 강도이거늘 도리어 3천리 이강산에 주인이 되려는 우리를 비법(非法)이라 하니 이는 비법의 판결이다.” 고 하였고, 이 얼마나 담대하고 정확한 항변이었더냐! 그러나 말이 막히고 무력만을 믿는 적의 무리는 한 학생의 왼쪽 귀를 베어서 위협하고, 여러 여학생들을 모두 옷을 벗기고 갖은 모욕적인 언사를 가하였는데, 그래도 여학생들은 굽히지 않고, “섬 오랑캐의 야만적인 버릇을 감히 예의지국(禮儀之國) 사람들에게 행하느냐?” 고 호령호령하였다. 그리고 적 검사가, “누가 너희들을 시켜 이런 일을 하였느냐?” 고 질문하자, “하느님의 감동으로 전국이 거의하여 일제히 만세를 부른 것이거늘, 누가 시켰다 말은 무슨 말이냐. 너희들은 진실로 세계정세에 암매(暗昧)한 섬사람이로다.” 고 일침을 가하는 데에는 적 검사로도 더 입이 열려지지 않아 그만 심문을 중지 - 499 - 두어 버렸다는 것이다. 또 고형진·남궁현·박태연 등 남학생들도 적 법정에서 굽히지 않고 항쟁하였는데 그 중에도 고형진은 도도한 웅변으로, “금번 조선독립운동은 조선민족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동양의 영구 평화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한국의 역적 이완용(李完用)과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일진회(一進會) 송병준(宋秉畯)이가 한국민족이 일본과 합방을 원한다고 기만적 행동을 하여 경술치욕(庚戌恥辱)을 당한 후, 신성한 우리 민족은 울분을 참지 못하던 중 의병운동이 일어나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런데도 일본은 일호 반성 없이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도 저열하게 하고 교육도 차별하였다. 또 관청에서도, 조선 사람이라고 탄압이 심하고, 일본 사람은 이민(移民)으로 나올적에는 빈손으로 와서 지금 부호가 되었는데, 이것은 갖은 방법으로 순결한 우리 민족을 착취한 것으로서 그 증거가 충분하다. 장곡천(長谷川好道)·사내(寺內正毅) 등 역대 총독으로 와서 말로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고 하지만 압박은 더욱 심하다. 조선 독립운동은 조선 사람으로서 정당한 운동인데 보안법 위반·출판법 위반 운하면서 구속 감금하고, 무죄한 백성을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하여 헌병과 경찰이 살해하니, 이러고서도 조선민족의 감정을 안 살 수 있느냐?” 항변하여 적 판사의 말문을 막히게도 하였다.
2 운동의 계속 전주 읍내에서 있은 대 만세시위의 뒤를 이어, 군내의 만세운동은 집중적이요 급진적 운동에서 차츰 분산적이요 장기적인 운동으로 들어갔다. 읍내 만세시위에 뒤이어 3월 17일에는 초포면(草浦面) 송전리(松田里) 들판에서 동민들의 만세운동이 있었다. 이때 동리 청년 최우선(崔禹先)은 ‘어느 곳에서나 모두 독립 부르는데 우리만이 잠잠히 있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태극기를 준비해 가지고 동리 앞 들판으로 나가 20여 명의 동민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적 경찰에 검속당 다. 또 봉동면(鳳東面)의 청년 노순석(魯順錫)은 학생 정기동(鄭基東)과 함께 - 500 - 낙평리(洛平里)에 있는 예수교계 영흥(永興) 학교 교정에서 만나 의논하고, 3월 21일[음 2월 20일] 봉동면 장기리(場基里)의 장날을 기하여 일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선언서를 배포하며 활동하였다. 그리고 24일[음 2월 23일]에는 삼례면(參禮面) 삼례리 삼례장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에는 수백 명 군중이 대열을 지어 만세행진을 전개하다가 나가서 삼례역을 습격하여 적측을 당황하게도 하였다. 한편 평소부터도 배일·항일의 정신이 특별하여 민가에서 일본 국기를 게양한 것을 보면 이것을 집어치우고 주인을 나무라던 읍내의 청년 김봉근(金奉根)은, 봉동면의 노순석·정기동 등과 함께 읍내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적측에 의하여 감금된 사람들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면서 가족들을 위로하고, 또 동지들을 찾아, 뒤를 이어 만세운동을 계획하다 구속당했다. 그리고 이미 3월 14일의 만세시위에도 앞장선 바 있던 학생 김경신(金敬信)은 다시 신흥학교 학생 10여 명과 함께 각 예배당을 순회하면서, “독립운동은 종교단체에서 주동하였으니, 예수교인들은 예배 시간에 독립의 성취와 구금된 애국 동포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원(祈願)하여야 한다.” 고 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또 전주읍에서 3월 23일[음 2월 22일]의 전주 장날에도 만세운동이 일어나서 장꾼들을 포함한 수천의 군중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청·경찰서·재판소 등 적 기관 앞 큰 거리를 지나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적 무력에 의하여 해산되고 20여 명이 검속당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도 읍내 기타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또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과 함께 박완(朴浣)·이양호(李養浩) 등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활동하였는데, 그 중에도 청년 이병두(李秉斗)는 그 해 10월에 서재록(徐在祿)·김기곤(金璂坤)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문을 배포하며 민중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적 경찰에 검속되기도 하였다. _______________ 고등법원 관할재판소 지정결정서, 대정 8년 특예(特豫), 제1호, 제5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형사재판서, 원본 대정 8년 형공(刑公) 제361호 외 6건. 그 해 3월 15일자 전라북도 도장관의 ‘소요에 관한 건’ 보고서. 이병헌(李炳憲), ≪3·1운동 비사≫ 전라북도편. 최종삼(崔宗三), 전주 3·1운동 회고록 ≪신동아≫ 1965년 3월호). 애국동지원호회, ≪한국독립운동사≫ 제7장 제7절 제11절 제8장 제2절. - 501 -
제2절 임실군(任實郡)
1 읍내(邑內) 서울에서 보낸 독립선언서와 3·1운동에 관한 연락이 천도교 전주교구실을 통하여 임실군 천도교 교구실에 도착한 것은 3월 2일이었는데, 교구장 한영태(韓榮泰)는 동교 교인 강계대(姜啓大)·박판덕(朴判德)·한준석(韓俊錫)·최양옥(崔養玉)·우성오(禹成五)·황성진(黃成瑱) 및 김영원(金榮遠)·박성근(朴成根) 등을 통하여 그 날로 임실면은 물론 둔남면(屯南面)·운암면(雲岩面)·청웅면(靑雄面)·오천면(烏川面)·성수면(聖壽面) 등 각지에 배포케 하였다. 따라서 강계대는 그날 밤으로 읍내의 시장·학교·경찰서·면사무소 앞 게시판 등에 이를 붙이고, 한준석은 운암면의 입석리(立石里)·선거리(仙居里)·학산리(鶴山里) 등 여러 곳에 붙이며, 박판덕 등 여러 사람도 모두 자기의 거주 면내 및 가까운 이웃 면내에 혹은 붙이고 혹은 전포하게 되니,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의 소식은 이어 군내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또 만세운동의 움직임도 진행되었다. 특히 임실군에는 천도교인의 전파가 많았고, 또 본군 청웅면이 원적인 천도교 도사(道師) 박준승(朴準承)은 벌써부터 천도교 중앙총부의 손병희(孫秉熙) 등과 독립운동에 대하여 긴밀한 모의를 가져 왔으며, 독립선언 33인 대표 중의 1인이기도 하였던 만큼, 독립선언의 발표가 임실군민(任實郡民)에게 미친 영향은 다른 곳보다도 특히 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종 황제의 승하 후에는 또 일부의 인사가 조곡(吊哭) 또는 인산(因山) 참여차로 서울을 왕복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왕복편을 통하여 일부에서는 서울의 움직임도 미리부터 짐작하고 여기에 대한 대비책도 구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도 임실군청에 소사로 있던 16세의 소년 문명근(文明根)은 다년간 군청에 있으면서 일본인들의 우리 민족에 대한 차별대우에 대하여 불쾌감을 가지고 있던 중, 인산에 참례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3월 1일 서울에서 시민·학생들의 만세시위를 보고는 깊이 - 502 - 깨달은 바 있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오는 즉시로 조선 사람 관공리는 동맹 퇴직하고 조선 독립운동에 결연 진력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여, 일일이 모필로 써서 당시 일인이 군수이던 전주·익산(益山)·옥구(沃溝)군을 제외한 11개군 군수에게 3월 5일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그런데 부안(扶安)·진안(鎭安)·순창(淳昌) 3개군 군수에게서 문서가 회송되어 옴과 함께 사실이 알려져서 결국 적 경찰에 구속, 6개월의 형을 강요당하게도 되었다. 군청의 일개 소사로서 각국 군수에게 동맹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권고한다는 것은 독립운동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하여 주는 일로서 후세에도 경각을 줄 만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3월 12일에는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날은 마침 임실읍 장날이었는데, 오전 10시경 시장 한복판에서 대한 독립만세의 함성이 올려지자 모여든 장꾼이 모두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니, 온 시장 온·읍내는 만세의 물결, 만세의 함성으로 넘치고 진동하였다. 태극기가 나부끼고 선언서와 ≪독립신문≫이 배포되며 약 2천의 민중이 만세대열에 참가였는데, 결국은 헌병과 경찰의 출동으로 하여 군중은 흩어지고 시중은 일시 조용하여졌다. 그러나 밤이 들자 다시 독립만세의 함성은 터져 나왔다. 9시경에는 태극기를 선두로 여기저기서 모여든 군중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읍내는 다시 만세의 대열로 누벼지고 저지 해산시키려는 헌병대와의 승강이로 부산하였다. 그런데 이때 읍 뒷산에서는 봉화(烽火)가 높이 올려짐과 함께 독립만세의 우렁찬 소리가 산곡간을 울리며 퍼져 나갔다. 높이 올려지는 봉화와 우렁차게 울리는 만세소리는 적치하(敵治下)의 암흑천지를 환하게 비추고, 혼미하여졌던 이 겨레의 정신을 깨우치는 것 같기도 하였다. 당황한 헌병대가 횃불이 오르고 만세 소리가 울려 나오는 산상을 향하여 치달리면 시가지에서 만세 소리가 크게 울려 나오고, 헌병대가 읍내로 내려오면 산상에서 다시 봉화가 오르고 만세 소리가 진동하니, 무력 폭력을 뽐내는 적 헌병·경찰로도 어찌할 길이 없었다. 갈팡질팡 헤매이는 동안 한 밤은 다 가고 평화를 상징하는 아치 해가 동녘 산마루에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 503 -
2 오수리(獒樹里) 둔남면(屯南面) 오수리는 임실군의 동남부에 위치하여 남원군(南原郡)과 인접하여 있으며, 철도 전라선(全羅線)의 오수역이 있기도 한 곳이다. 지명 오수의 오(獒)는 큰 개를 의미하는 말로서 이 오수의 지명은 유명한 의견(義犬)의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라 한다. 즉 주인 김개인(金蓋仁)이 술 취해 누운 곳에 들불이 붙어 와서 타 죽게 되는 것을, 기르던 개가 몸에 물을 묻혀다 구원하고 기진맥진하여 죽었다. 김 개인이 깨어서 알고 개 무덤 위에 지팽이를 세워 표하고 갔는데, 그 지팽이가 나무로 살아나서, 원명 거령(居寧)을 오수로 고쳤다 한다. 지금도 그 의견의 무덤 앞에는 의견비(義犬碑)가 서 있어, 다시금 의(義)에 대한 감명을 자아내게도 하는 곳이다. 이러한 오수리에서는 임실군내에서 제일 먼저 만세의 함성이 울려나왔으며, 또 그것도 10대의 보통학교 생도들에 의하여서였다는 점에서 다시금 감명을 가지게도 된다. 즉 3월 10일 오전 10시경에 오수 공립보통학교의 제 1, 2학년 생도와 3, 4학년 생도의 약반수가 운동장의 전라선 철도쪽으로 모여서 일제히 ‘대한 독립만세’를 불렀다. 어린 생도들이지만, 인편을 통하여 서울에서 많은 학생들이 이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하여 만세를 부르고 나섰다는 말을 듣고는 같이 참여하는 의미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이야말로 이 나라의 어린 국민으로서의 자연발생적인 함성이었던 것이다. 가슴 속 깊이 느껴지는 의무감에서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쉬는 시간을 통하여 기차가 지나가고 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는 다시 들어가서 전과 다름없이 수업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일본인 교장은 당황하여 교사들과 함께 전교생도들에게 훈계와 당부를 하고, 한편으로는 학부형들에게도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와 요망을 하였기 때문에 본교 생도들만의 만세운동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10여 일이 지난 그 달 23일[음 2월 22일]에는 이 오수리에서 일반 민중의 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은 마침 오수 장날인데, 임실군의 군수·서정과 면내 중진인물들이 일반민중을 설유하기 위하여 오수에 오기도 하였다. 이 지방의 유지 이기송(李起松)·오병용(吳秉鎔)·이만의(李萬儀) 등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 504 - 중 서울을 위시하여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가며 거사준비를 하다가 이날 오후 2시를 기하여 드디어 ‘대한 독립만세’의 함성을 올리게 된 것이다. 사전에 천도교 및 예수교회측과도 연락이 있었던 만큼, 이기송이 시장 앞에 나서서 항일 독립에 관한 일장연설을 하고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고 앞을 다투어 나섰다. 7~8명이 20~30명으로 되고, 시장을 순회함과 함께 만세의 대열은 점점 커졌다. 당황한 적 주재소에서는 이기송(李起松)을 끌고 주재소로 갔다. 그러나 대열은 해산되지 않았다. 오병용·이병렬(李秉烈)·이만의·김일봉(金一奉) 등의 뒤를 따라 만세 부르는 군중은 점점 증가되어 8백여 명의 대열이 주재소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며 나가고, 약 80명이 주재소 안으로 밀려들어가며 애국자를 내 놓으라고 고함치니 당황한 일본인 순사 촌상(村上)은 그만 이기송을 내놓게 되었다. 여기서 시위대열은 다시 이기송을 얼싸안고 환호성을 올리며 시장으로 돌아와서 만세를 부르니 군중들은 점점 증가하여 그 수가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시장은 완전히 철거되고 일본인 상점은 파괴되었다. 만세의 대열은 다시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일부는 면사무소를 포위하고, “너희들도 조선 사람인데 어찌하여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고 호령하였다. 그러나 반응이 없자 군중은 면사무소로 밀려들어가서, 면장·면서기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 주재소를 향하였다. 이만의 등 일부 지사들은 문을 밀치고 주재소로 들어가서 ‘대한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주재소 유치장을 부소고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한 옆에 있던 순사보 고택기(高宅基)가 무지하게도 총을 겨누며 위협하였는데, 이만의 등 수명은 달려들어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鍾臺) 아래로 끌고 나와서 훈계하며 함께 만세대열에 참가하라고 하니 일제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던 그로서도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오수 시가는 완전히 만세대열에 의하여 지배되었으며, 순사의 무리는 어디론가 쥐구멍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날 저녁때에는 남원헌병분대와 임실 경찰서의 적 무장대가 대거 출동하여 - 505 - 서로 대치, 승강이하다가 결국은 발포에 의하여 사상자를 내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3백~4백 명이 여기저기로 이동하며 만세시위를 하였기 때문에 적측은 철야 경계에 임하였으며 이튿날 아침에야 거의 진정되었다. 한편 오수 시장의 만세운동이 지나간 다음 적측은 무력을 행사하여, 둔남면의 이기송·이윤의(李倫儀)·이주의(李注儀)·이회열(李會烈)·오병용·이병렬(李秉烈)·이용의(李容儀)·이만의·이기우(李起嵎)·김용식(金容湜)·하용봉(河容鳳), 삼계면(三溪面)의 허섭(許燮), 영광군(靈光郡) 법성면(法聖面)의 양태환(梁太煥) 등은 검속당하였으며, 그중 이기송·오병용·이윤의·이주의·이만의 등은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2년 내지 7년의 형을 강요당하고 대구복심·서울고등법원에까지 상고하여 만세운동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특히 전주 이씨의 명망가로서 일찍부터 배일가로 지목되던 이기송은 고등법원에서도, “조선은 고래로 예의지방(禮儀之邦)이다. 한일 병합이 있은 후 조선인으로서는 누구나 독립에 뜻을 두고 있다. 조선 독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범죄냐? 무엇 때문에 창검과 총포를 가지고 수백 명 동포를 잡아 죽이는 것이냐? 조선민족에 대하여 강포한 행동을 하는 것이냐?… 우리 2천만 동포를 감옥에서 고생시키는 것은 우리 동포의 결심을 더욱 강고하게 하는 것인 줄을 모르느냐? 이 내 몸이 죽으면 우리 자손이 있다. 자손의 독립정신은 날로 진보할 것이니 천만년이 가더라도 없이 하지 못할 것이다.” 고 강경하게 대들며, 유림계의 중진이던 오병용은, “우리 조선은 원래 예의를 존중히 하여 왔다. 그러므로 애국사상이 유일한 신조(信條)이고 경장애유(敬長愛幼)로 질서를 유지하면서 조금이라도 예의에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소위 합병이란 굴욕을 당하게 된 우리 국민은 국권 회복을 주야로 염원하여 왔다. 그런데 천운이 다시 돌아와서 3월 1일의 독립선언으로 독립을 선포하게 된 것이요, 이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어났다. 우리가 우리 나라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는 것이 무슨 죄이냐?” 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이유와 변론이 침략자의 무력 앞에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들 - 506 - 애국지사들은 1년 내지 7년의 옥고(獄苦)를 치르게 되었다.
3 청웅면(靑雄面)·기타 둔남면과 동·서로 위치하고 있는 청웅면에서는 3월 15일경부터 만세운동이 각리에서 계속 일어났다. 즉 3월 15일 오후 9시경에는 구고리(九臯里)에서 이미 1백여 명이 모여 약 15분간에 걸쳐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는데, 뒤이어 16, 17일 및 11일에는 이강세(李康世)·박용식(朴庸植)·한도수(韓道洙)·한기수(韓淇洙)·이성의(李聖儀)·최종수(崔宗洙)·이기섭(李起燮) 등이 다시 주동이 되어, 구고리 중앙에 있는 큰 나무 아래 모여서 대열을 지어 만세를 부르며 이내를 순회하고, 독립선포를 경축하였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16일 오후 9시경에는 남산리(南山里)에서 유지 정필조(鄭弼朝)·박준창(朴準昌) 등의 지도로 주민 약 1백 50명이 남산리 뒷벌에 모여서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튿날도 계속하였다. 또, 한일봉(韓一鳳)·최세철(崔世哲)·최영섭(崔永燮)·최병태(崔炳泰)·성준섭(成俊燮)·최응삼(崔應三)·문성술(文聖述)·황성학(黃聖學) 등은 옥전리(玉田里)·석두리(石頭里) 일대를 왕래하며 만세운동을 지도하였는데, 16일 오후 9시경에는 옥전리에서 1백여 명의 주민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의 성취를 다짐하였으며, 17일 오후 10시경에는 다시 석두리에서 약1백 명의 주민들과 함께 30분간에 걸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독립운동 관계로 적측에 검속당하여 가는 동지들을 도중에서 구축할 것을 기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청웅면 면사무소와 일본인 주택을 파괴하여 울분을 풀기도 하였다. 그런데 21일에는 다시 구고리·남산리 주민 15명이 임실 경찰서에 쇄도하여 검속된 사람들의 석방을 강경히 요구하였다. 그리고 만일 검속된 사람들을 석방하지 아니한다면 자기들도 행동을 같이 하였은즉 함께 유치장에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11명은 귀가 요구도 불구하고 자진 유치장에 들어가서 고생을 같이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지방의 유지들로서 그 언행이 정중하였기 때문에 적 경찰들도 감히 무리하게 대하지 못하였다. 또 지사면(只沙面) 방계리(芳溪里)에서는 3월 20일 오후 10시경에 청년 최완호(崔沅鎬) - 507 - ·이영곤(李永坤) 등은 7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방계리 북방 산마루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최상학(崔相鶴)·김영필(金泳弼)·한인석(韓麟錫) 및 최영렬(崔永烈)·최기현(崔基鉉) 등은 방계리 언덕에서 주민 약 50명을 모아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이내를 1바퀴 돌고, 21일 오후 9시경에도 김영필·한인석은 역시 같은 장소에서 많은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둔남면 오수리에서 만세시위가 크게 전개되던 3월 23일에는 강진면(江津面) 갈담리(葛潭里)에서도 갈담 장날에 군중들이 집합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청년 이중혁(李重赫)·엄길영(嚴吉永) 등이 수백 명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4월 중에는 6일 밤에 신덕면(新德面)의 한정교(韓正敎)·나학용(羅學用) 등이 신흥리(新興里) 및 삼길리(三吉里) 노상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러서 주민들의 분기를 촉구하였으며, 7일에는 송귀남(宋貴男)·김제룡(金濟龍)·최극삼(崔極三)·송성학(宋性學)·문성술(文成述) 등이 성수면(聖壽面) 오봉리(五峰里) 후방 산림 중에서 다수 주민들과 함께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선언을 경축하였다. 이상과 같이 임실군내에서는 읍내와 오수리의 대 시위운동 외에도 청웅·지사·강진·신덕·성수 등 각면에서 계속 만세를 부르되, 그 시간을 대개 산간지대에서 활동이 곤란한 야간을 이용하여 충돌을 피하고 운동을 자유롭게 하였던 것도 특색이다. 그러나, 군내에서 운동의 회수와 참가 인원이 원래 많았기 때문에 적측에 검속당하여 강제 징역을 당한 인원수도 다른 고을보다 많았던 것으로서 6개월 내지 5개년의 옥고를 치른 인사가 80여 명에 달하며, 그 중에도 한영태(韓榮泰)·김영원(金榮遠) 등은 적의 야만적인 고문의 병독으로 하여 철천지한(徹天之恨)을 남기고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기도 하였다.1) _______________ 2)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형사재판서원본, 1919년분 22건. 서울고등법원 형사재판서원본, 1919년분 형상(刑上) 제994호. 그해 3월 15일, 18일, 4월 26일자 전라북도 도장관 보고서. 이병헌, ≪3·1운동 비사≫ 전라북도편. 진안군(鎭安郡) 거주 전종하(全鍾厦) 조사 자료, 그 해 4월 24일, 5월 13일자 ≪매일신보≫. - 508 -
제3절 정읍군(井邑郡)
1 태인면(泰仁面) 3월 16일[음 2월 15일] 정오를 기하여 태인면 태인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크게 전개되었다. 태인은 옛날 태인군이 있던 곳이요, 또 호남선 기차가 통과하기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인물의 왕래와 물화(物貨)의 집산(集散)이 많은 곳이다. 3·1운동 직전에 고종 황제 국상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던 태인면 청년 김현곤(金炫坤)·송수련(宋洙連)·박지선(朴址宣) 등은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등 전라도 출신 인사들을 만나서 3·1운동의 계획을 알고 곧 선언서 등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송한용(宋漢鏞)·송진상(宋鎭相)·오석흥(吳錫興)·송영근(宋榮根)·김진호(金鎭皓)·유치도(柳致道)·김순곤(金淳坤)·송덕봉(宋德奉)·김진근(金鎭根)·백복산(白福山)·김용안(金龍安)·최민식(崔民植)·김부곤(金富坤) 등과 독립운동에 대한 의논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3월 16일 즉 음력으로 보름날 태인장을 기회로 일제히 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인근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연락하며 당시 태인 면사무소 서기로 있던 김현곤은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내다가 송한용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등사했다. 정오경 장꾼이 많이 모여들기를 기다려 박지선·송한용·송진상 등 동지 청년들은 몇 명씩 1짝이 되어, 준비하였던 태극기와 선언서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며 5, 6명의 청년은 보통학교 생도·졸업생 기타 청년들 약 2백 명과 함께 일단이 되어, 면사무소 부근에서부터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여 나가니 시장에 모였던 수천 명의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모두 손을 들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부르니 온 시장은 만세 소리·태극기의 물결로 넘쳤다. 군중들은 이리저리 몰리며 환호성을 올렸다. 헌병 주재소 앞으로도 몰렸다. 의외로 일어난 큰 사태에 적 헌병들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노점은 모두 철수되고, 상점은 - 509 - 문을 닫았다. 일부러 대열이 주재소 앞으로 밀렸는데, 헌병 및 보조원이 나와서 제지하였다. 승강이 끝에 적의 무리는 총을 겨누고 위협하며 일부의 보조원은 애국 동포들을 구타하는 만행(蠻行)으로도 나왔다. 군중은 더욱 격분하였다. “너는 조선 사람이 아니냐?” “너는 조선 사람이 아니고 왜놈의 개야.” 하며 호통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군중의 위세에 눌리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보조원은 몸을 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측의 응원군이 계속 도착하고 무력 제지가 심해지니 평화의 대열은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송진상·김현곤 등 청년 5명이 적측에 의하여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면서는 다시 구태인읍을 가운데 두고 주위 사방 산마루에서 횃불이 오르고 ‘대한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나왔다. 산으로 마을로 메아리쳐 나갔다. 산상에 높이 올려지는 봉화와 밤의 정적을 깨고 울려 퍼지는 독립만세의 함성은 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층 더 감격시켰다. 동리마다 집마다 ‘대한 독립만세’ 소리가 크고 작게 울려나왔다. 또 집을 뛰쳐나와서 혹 4, 5명, 혹 수10명씩의 대열이 골목길을 누비며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야음(夜陰)을 이용한 산상 만세와 소집단의 만세는 10여 일간을 두고 계속되었다. 적측에서는 저들의 거류민(居留民)까지 동원하여 밤을 새워 가면서 경계하였으며, 또 80명에 달하는 애국 동포들을 강제 검속하여 정읍 헌병분대로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는 태인 보통학교 훈도 김승호(金昇鎬)·곽장렬(郭獎烈)과 옹동면(瓮東面) 면서기 송병옥(宋炳玉) 등도 있었다. 이 무렵 또 태인 우편국에서는 칠보면(七寶面) 유생 이희섭(李喜燮)이 창덕궁(昌德宮) 황제께 보내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서신이 발견되어 적측을 당황하게 하였다. “……각국의 승인이 만약 형편 좋게 안 된 때는 비록 약력(弱力)이지만 군병을 일으켜 강하게 경성을 쳐서 금번 거사(擧事)에 발각되어 체포 인치(引致) 중의 인명을 구출하고 이들을 지나출병(支那出兵)에 가담케 하며, 또 조선 20만 인을 군사로 일으켜 일본을 구축(驅逐)하고 독립을 성공해서 왕실을 복벽(復辟)하며, 또 옛날 정치로 회복케 하려 하오니 후일 군사를 일으킬 때에는 잊지 말으시고 남방 대원수(南方大元帥)에 - 510 - 하명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일본의 강병을 두려워하지 마시며, 정신을 송죽(松竹)과 같이 변치 마시고, 민심의 원한을 씻어 주려 하신다면, 유명한 참모와 유지(有智)의 장군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것이오니 부디 잊지 마시고 명심하여 주심을 천만 복망하나이다.” 한편 태인만세운동으로 하여 전후 적측에 검속당한 애국 동포들은 저들에게 갖은 고문과 곤욕을 받았지만, 끝내 기개를 굽히지 않고 적 헌병 및 법관들과 항쟁하였으며, 가족들도 온갖 곤욕과 학대를 당하면서도 적개심을 버리지 않았다. 또 김현곤·박지선·송한용 등 많은 애국지사들은 6개월 내지 1년 반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나와서도 상해임시정부의 파견원들과 연락하여 가며 군자금 모집에 종사하는 등 구국활동을 계속하였다.
2 읍내(邑內) 정읍 읍내에서도 천도교인 및 예수교인들에 의하여 진작부터 만세운동 계획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당시 정읍 읍내에는 헌병분대, 광주지방법원 정환 지청 등 적 기관이 많고, 미리 경계가 엄중하여 일이 여의하게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3월 16일에 태인에서의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뒤이어 밤마다 산상에서의 봉화에 호응하여 각 면에서도 야간에 만세성이 메아리치니 인심은 더욱 분발되었다. 읍내에 사는 지사 이익겸(李益謙)·박환규(朴桓奎) 등은 일찍부터 천도교·예수교인들과 의사를 통하여 오던 중, 3월 23일[음 2월 22일] 정읍 장날을 기하여 많은 사람들을 모아 만세 부를 것을 결정하고, 읍내 시기리(市基里) 김회근(金會根)의 집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였다. 천도교인들은 각 지구의 교인들을 통하고, 예수교인들은 전도부인들이 전도 형식으로 각처를 순방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만세대열에 참가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적측에게 탐지되어 거사 전날인 22일 밤에 적 헌병대의 급습(急襲)을 받아 선언서·태극기 및 ‘대한 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 10장이 발견되고 이익겸 등은 검속당하니 계획은 다시 어그러졌다. 장날이 되어 장꾼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가하려는 일부 지방 인사들이 모였지만, 주동 인물들이 검속 또는 - 511 - 도피 중이었기 때문에 1백여 명이 일시 만세를 부르고 뿔뿔이 흩어지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지사들의 움직임은 중단되지 않았다. 4월 2일 읍내 장날에는 덕천면(德川面)에 사는 송기룡(宋基龍) 및 박재구(朴在求)와 읍내의 도상철(都相喆)·박근수(朴根洙) 등이 앞장서서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부르며 나가니 시장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행동을 같이하여 장터는 일시 만세성으로 진동하였다. 그러나 적 헌병의 출동으로 송기룡 등 일부 주동 인물이 검속당하니 따르던 군중은 자연 해산되었다. 이를 전후하여서 정읍군내에서는 여기저기서 야간을 이용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원면(永元面)의 나용균(羅容均)은 중국으로 나가서 상해임시정부의 대의원으로 활약하는가 하면, 그의 형 나홍균(羅鴻均)은 많은 운동자금을 임시정부에 제공하고, 또 선만물산(鮮滿物産) 주식회사를 만들어 국내외 연락기구로 삼기도 하였다. 또 같은 영원면의 청년 백정기(白貞基)는 고향에서 3·1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일제(日帝)가 우리 나라를 강탈한 것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피를 뿌려 이긴 탓이다. 우리도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려면 먼저 피를 흘리자.” 고 외친 바 있었지만, 그는 그 후에도 국내에 계속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동경에서는 일본 천황, 상해에서는 일본의 주중 공사 유길명(有吉明)의 폭살(爆殺)을 계획하여 내외국인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3)
제4절 순창군(淳昌郡) 순창군에서는 3월 20일, 순창읍 뒷산에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올려졌다. 이보다 앞서 이웃 고을인 임실군(任實郡)에서는 이미 3월 10일부터 둔남면(屯南面)·청웅면(靑雄面)에서 만세운동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또 천도교 교구실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배포러나 _______________ 3) 박지선(朴址宣), 3·1운동 회고록 ≪신동아] 1965, 3월호. 서울고등법원 형사재판서 원본(1919년도분). 그 해 3월 25일자 전라북도 도장관의 소요에 관한 건 보고서. 오재식(吳在植), ≪항일순국의열사전≫, 20의사 백정기 선생편. - 512 - 이러한 주위의 사정과 함께 순창군내에서사 적측의 경계도 심하였던 만큼 운동의 거사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보다 앞서 3월 17일[음 2월 16일]에는 순창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 계획이 있었으며, 읍내의 애국 청년 박동진(朴東鎭)은 밤을 새워 가면서 ‘조선독립국만세(朝鮮獨立國萬歲)’ ‘조선독립국독립만세(朝鮮獨立國獨立萬歲)’등의 문귀를 종이에 크게 써서 17일 새벽에 순창군청·순창 헌병분견소·순창 학교조합 앞 게시판 등에 붙여서 항일운동의 전개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적 헌병대 등의 경비는 더욱 삼엄하였기 때문에 장날 거사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20일에도 밤이 되어 적의 경계가 좀 풀어진 틈을 타서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군민 약 2백 명이 비밀연락으로 순창읍 뒷산에 모였다. 그리고 준비했던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횃불을 들어 기세를 올리며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야간의 정적을 깨뜨리는 감격적인 환호성이었다. 만세성은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멀리멀리 메아리쳐 갔다. 눈을 크게 뜬 군민들의 가슴 속으로도 메아리쳤다. 그리고 헌병대의 수색작전에 의하여 구속당한 노병화(盧炳華) 등 10여 명의 천도교인들은 적측의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항변하여 독립 국민으로서의 기백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열흘을 지나 4월 11일[음 3월 11일] 장날 아침에는 순창을 시장 게시판에는 또, “독립 만만세! 금 11일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니 모두 모이라. 만약 헌병이 출동할 때에는 모두 죽여라!” 는 내용의 격문이 붙었다. 이야말로 적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내용이었다. 적측에서는 곧 남원헌병분대의 응원을 얻어 엄중 경비하여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적측은 이러한 격문과 심상치 않은 군민들의 동향에 겁내어, 4월초에 일본으로부터 증파되어 오는 보병대의 일부를 순창읍에 배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들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얼마 후에는 다시 4월 26일 - 513 - 의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이 때에도 애국청년 박 동진은 아래와 같은 격문들을 써서, 그 전날 새벽에 순창면 면사무소 게시판과 그 부근 도로변에 붙였다. “대정 8년 4월 26일 순창 장날에 순창군민은 20세부터 50세까지 전부 집합하여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독립만세를 부르자. 만일 만세를 부르다 죽는다면 금후 오등(吾等) 외에 독립을 계획하는 사람이 1만 명은 된다. 열심히 그리고 안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만세, 독립만세! 대정 8년 4월 26일은 독립만세를 부른다. 조선인을 죽이려면 죽여라. 독립만세를 부르는 사람은 51명이지만 이것을 죽이면 그 대신 1백 65명이 있으니 51명을 죽이더라도 지장 없다. 또 오등이 없더라도 끝내는 독립을 계획하는 사람이 5천만인이 된다. 죽이려면 죽여 보아라!.” 전자는 군민들에게 독립운동에 궐기(蹶起)할 것을 격려하는 내용이요, 후자는 적측의 폭력에 대한 우리의 독립항쟁 역량을 과시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날의 계획 역시 적측의 무력 경계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다만 격문을 작성하여 붙였었던 박동진(朴東鎭) 청년만이 적측에 검속되어 1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한편 박 동진 청년의 활동과 함께 순창군 만세운동과 관련하여서는, 정홍모(鄭鴻謨)·우치홍(禹致洪) 2청년의 활동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원적이 순창읍인 정홍모 청년은 남원(南原) 공립 보통학교에 부훈도로 있으면서 시민과 생도들에게 틈 있는 대로 독립운동을 격려하였으며, 아동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노래를 전파하다가 끝내는 적측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남원읍조 참조). 그리고 우치홍 역시 순창읍 출신으로서 당시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3월 1일에 이미 탑동 공원 3·1선언식에 참가하고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 514 - 3월 7일에는 천도교 총부(總部)에서 독립선언서 2백장과 ≪독립신문≫ 1백 50장을 가지고 귀향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리(裡里)역에 하차하여서부터는 도보로 전주(全州)·진산(珍山)·무주(茂朱)·진안(鎭安)·임실(任實) 등 군의 각지를 역방하면서 천도교구실 혹은 지사들의 집을 찾아 순창으로 들어오던 중 인계면(仁溪面) 쌍암리(雙岩里) 거릿집에서 미행하여 온 헌병에게 체포되어 역시 옥고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4) _______________ 4) 이병헌(李炳憲), ≪3·1운동 비사≫ 전라북도편. 그 해 4월 16일자 전라북도 도장관 보고소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 형사재판서 원본철(1~6월분). - 5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