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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쌍화점, 충열왕의 애인 태인 시씨의 고향산천

도심안 2018. 12. 24. 02:37

 

쌍화점, 충열왕의 애인 태인 시씨의 고향산천 

 

쌍화점 고려가요의 고향 이야기를 찾아서

 

 정읍 옹동면 능향마을 가는 입구에 장승이 있다 

 

쌍화점은 충열왕24년에 고려사에 기록된 삼장. 사룡, 두개의 고려노래이다

고려 무신정권부터 최충헌 3대의 군사통치로 빼앗긴 고려왕권을   송군비 장군의 입암산 전투에서  몽고군 지휘 고위관리 4명을 생포하는 대승으로  몽고와의 전쟁에서 화친의 계기가 되어 고려왕씨 왕권을 되찾아준 세력이 정읍지역 송씨 세력이였다

송인의 고향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 태인 시씨 궁녀가  궁중에 들어가서 충열왕의 총애를 받고 무비의 칭호를 받고 개성의 도라산으로 자주 사냥 나가서 동거를 하였다

 

장사훈 국악대사전에 '도라산'녀로 나오는 태인시씨의 태어난 고향 땅은 정읍시 옹동면 성철리 능향 마을 이다

시무비. 백야단. 백야진. 시거. 등 충열왕국내파를 몽고파  충선왕이 모두 숙청하고 충열왕을 페위시킨후 다시 복권하여  유행된 노래이다

능향마을은 앞 뒤에   성철마을, 시우정( 詩友亭 ) 마을, 시목동  잔시내(유상곡수)등  시씨와 유사한 이름과 중국사신과 술잔을 냇물위에 띠우는 이름의 잔시내 마을이 있다

기자는 1949 어릴때  이웃집에 이 태인시씨 본향지  옹동면 능향마을에서 시집온  '능향댁'이라는 그당시 90세 할머니가 살았고 그 증손자 권혁부와 같은 나이여서 자주 그 집에서 그  시씨 할머니 옛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옛날에 능향에서 딸을 낳았는데 손을 펴지 않고 태어났다

그래서 오래 걱정하다가  뒤에 손을 억지로 폈더니 임금왕(王)자가 쓰여 있었다

손을 펴보지 않해야 하는데 억지로 펴 보아서 그 때문에 왕비가 되지 못햇다고 했다

충열왕은 미녀 애첩 시씨를 유배시켰는데 훗날에 이곳  근처에서 충열왕을 그리며 여생을 마첬다고도 했다

백제가요 정읍사는 장사꾼의 아내가 아니라  당나라 안록산의 난에 신라국 지원군으로 참전한 태인허씨 허이기가 중국 장사현에서 당현종의 악공을 데리고 온 가수들이 부른노래다

 

정읍사 노래 주인공은   '장사꾼'이 아니고 중국 '장사현'(장가계근처)에 간것 당현종을 사모하는 왕유의 시 '상사'가 국내에 와전되어 유행된 것이다

안록산의 난에 지원군으로 참전한 태인허씨 허이기. 이후에도 참전한 장보고 .최치원등의 당나라 참전군사들이 백제가요 정읍사, 신라가요 동동곡에 붙여 노래한 소리로 '쌍화점' 곡은 현재 농부가와 성주푸리 새타령과 유사한 음악소리다 

같은 노래로서  지리산가.  반등산가. 선운산가도 모두 안록산 황제 치하에서도  장사현에 도망간 당현종을 그리워하는  안록산의 포로가 된  왕유가 충성의 노래로서 유명하여 훗날 중국 송나라 사신에게 정읍 '음성향'에서 이자겸이 가사를 개작한 가사로 추정된다

 허이기. 최치원. 장보고등이 당나라에 가서 참전하고 데려온 사람이거나, 태인허씨 후손 이자연부터 이자겸 통치시대 전 후에  송나라 사신이 원나라에 망하고  대거 망명하여 이곳에 정착한 성씨, 시씨의 성씨는 이곳 옹동면 능향이 본관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 고려사 충열왕의 애인 시씨 무비의 이야기라고 판단 된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 기록으로  478년 백제의  '대산성 반란' 사건의 그 산성으로 한일 학자들이 지목하는 대산성(帶山城)은  ‘능성골’이라는 이름으로  능향마을 앞의 능성골이라고 부르는 골자기 이름의 산성이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은 이런 역사를 알고 이곳 땅을 사들여  문화 유적으로 기념하려 하였으나

해방으로 압수 저절로 국유지가 되고  6.25전쟁 그리고 군부정치로 모르는 역사문화는   버려저 있었다   

그 땅에 70년대 옹동중학교를 지으려고 하다가 학교도 못세우고 선거운동하는 자  개인의 소유로 되어 버렸다

그리고 능향 마을은 '성책(城柵)'으로 사용한 이름인 옹동면 '성철리' 마을과 '칠석'마을이 붙어있다

이보다 앞서서 고려시대  글안군의 침공으로 고려 현종왕이 전남 나주성으로 피난하면서 이곳 서쪽 2키로 지점의 태인면 '왕림'마을에서 숙박하면서 태인허씨  두명의 후손이 현종왕비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후백제 견훤을 고려에 인도한 허사문 태인허씨 후손 혜덕왕사가 금산사를 소유하고  고려실권자 이자겸이 궁중음악과 부안. 강진의  두곳 고려자기까지 사유화하고 송나라 사신까지도 접대하여  후백제 악공음악은 사실상 정읍지역에서 집단  수용하고 이름도 '정읍사'로  변했다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이어서 중국 사신맞이 가무향연의 정읍시 삼산동 '음성향'으로 송나라 사신맞이 가무와 유상곡수 시짓기가 유행하고 가무악공을 양성하는 기관을 통치하는 군청소재지 여서 자색이 뚜어난 인물이 양성되어 중국이나 궁중으로 뽑혀간 사람이 많다

 

이곳출신 미녀 시씨는 충열왕의 왕비가 되어가는 마당에 몽고인 사위 이곤이 강간하여 시무비를   간통으로 몰아서 유배시키고  충선왕 측근여자 숙창원비를 충열왕 후비로 들여서   정읍의 송씨 세력을 철저하게 몽고세력 충선왕이 잘라버렸다

 

쌍화점은 충열왕과 고려궁중세력이 원나라 세력 회회아비 장순룡과 충선왕에게 짓밣힌 비련의 슬픈 유행가를 80년후에 공민왕의 신세 타령으로 쌍화점 노래를 부른것이 이번 힛트한 영화 쌍화점 내용이더라

영화 쌍화점은  공민왕이 주제가로  고려가요 쌍화점을 간접적으로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쌍화점(삼장) 고려가요는 천하일색 능향(태인) 시씨 무비가 몽고인 장순룡의 사위 이곤이 고의로 강간하여 장안에 퍼지고 미녀 시씨 위상을 추락시키려는 의도로 유행시키고 고려사에 기록했다

 

"삼장사에서 손목잡히고 그 고관을 따라 궁녀가 되어 몽고인 사위 이곤과  간통했다네 "

라는 노래를 퍼트려서 창녀 이미지로 선전하여  충열왕의 국내파세력을  숙청해버리는  작전, 위장방송이였다

충열왕 애인 시무비를 간통녀로 만들어 그 세력을 꺽고

충열왕까지 왕위에서 밀려나고  아들 충선왕이  정읍 호족 세력을  철저하게 숙청하게 된다

이런 비련의 사건으로 태인 시씨 무비는 궁에서 밀려나서 충열왕을 그리워하며 산에 올라서 서 '망부석' 노래를 하였으리라고도  생각한다

마구 버려진 농촌 옹동면에서 능향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워서 올해 보름날에 농악을 치고 당산굿을 하였다

충열왕때 원나라   그 <쌍화점>  회회아비는 장순룡이다 

회회인 삼가(三哥)는 1274년 고려 충열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와서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던 사람으로 충열왕으로부터 장순룡(張舜龍)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고 고려 여인과 결혼해서 한민족에 동화된 무슬림이었다.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와 대장군의 관직을 받기까지 했다

몽고 대사관 같은 세력으로 군림하고 충열왕의 애첩까지 강간한 것으로  그런 내용을 퍼뜨리는 노래가 삼장사 였는데 후에  쌍화점으로 공민왕대 까지 유행하고  이곳 옹동사람  유자광이 이노래를 악학괘범 국악책에 기록,  그리고 연산군시대  시용향악보에 한글로 정읍사 삼장사 노래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본다

삼장사(쌍화점) 정읍사 .동동가요는 천박해서 그 누구도  버린 노래이다

유씨족보에는 유자광의 큰 어머니가 여기 송씨로 되어있으나 송씨 족보등 중종 이후에  제작된  유자광 관련 친족기록을 모든 타 족보에는 유자광 명단을 삭제해야 만 살아나는 시대였다

중종왕부터 조선패망때까지 국악의 선구자   유자광 죽이기 왕따 역사였다

즉 유자광의 부인과 처가집 누나 친척이되는 자는 자기 살기 위해서 유자광 처벌 상소를 올리고 그사실을 지금도 가문의 자랑으로 함양 남원대강의 친족들이 말한다 

 

세종과 박연의 아악발전에 노력하고,  오직 세조와 유자광은 한민족 소리 정읍과 동동곡을 악학괘범에  기록한  공로자이다

 

 

삼장사 주지, 우물속 용, 술집주인  그짓아비의 관계에서 보이듯,    쌍화점의 점주는 외인인 회회아비이고, 쌍화를 파는 점주 밑에는  쌍화점은 광대들의 노래다

송인의 집 앞에  냇물 흐르는 자연석에서 최고 수준의 가무향연 펼친곳으로 만들어저 있다    몽고사막 바람 유목민은 모두 햇빛에  얼굴이 타서  추한 얼굴이 단장한 고려여인을 보면  모두가 선녀로 보인다

그래서 회회아비 몽고 귀족장군은  고찰해보면 여기서 건너간 경우가 많다

기황후 역시 전북 익산 사람 이공로가  익산 금마 여산송씨 송인과  가까운 고향사람으로  미리 알려진  사이였다

충선왕이후 몽고 기황후. 기철, 권 황태자비 권씨 시대를  공민왕이  숙청하여였다

그리고 공민왕 3년에 이곳 태산현을 태산군으로 이곳 임씨 임몽고 불화가  몽고 사신으로와서 승격시켰다

공민왕의 모친 홍씨이며  우왕 창왕을  이성계가  죽이자  정읍의 불만세력 송씨 들이  이성계에 합세한다 

즉  충선왕이  이곳 호족  송씨세력 송인, 송영방, 시무비 등과  함께 죽인 왕족 서원후 후손 공양왕을 세우고 여산송씨 송인의 아들 송안과 합세하고  이성계의 여진족 퉁두란과 합세하여  왜적 아지발도를  막아낸다

쌍화점 노래로 울며 떠난 시무비 세력은 분산되고 송인의 아들 송안이 훗날에 이성계  군영에서 군악대장으로 함경도에서부터  합류하였고 그의 나팔소리와 군가를 서울장안에서  울리자 마자  호응하여 최영장군을 쉽게 누르고 이성계 승리의  조선창업이 되었다 

송인의 후손 송인수가 단종의 장인으로 되고  그리고  세조대왕 친구로서 득세하였으나 안평대군이 왕이 되려고  사륙신의 반란으로  송인수 세력이  죽었다

 성종, 연산군시대에 악학괘범 발행인 유자광의 노력으로 악학괘범에 민족음악  한글가사 정읍사 동동을 기록하였고  중종이후 민족음악은 금지말살 되었다

유자광의   큰어머니가  여산송씨이며 세조대왕이 가야금 계면조 대연주가로 유명하였고 그 세조의 충신 유자광이 죽음의 악조건에서도 악학괘범 음악책을 만든 민속악 자료가 여기서후백제음악을  수집한 것으로 본다

  

최초의 학교국악교육은 동학군 강증산계의 친족 강영구 교장과 그 딸이  1955 전주농고에서  한국최초로 이루어젔다

1973 전주대사습놀이 국악경연을 송인의 후손인 송광섭. 송영주(1961국회의원) 등이 창립하여 민족음악을 대를 이어서  계승하였다

 

60년대 태인 이발사 였던 가수 송대관에게 이발을 가르친 현재 옹동면 사람 이현선 씨도 보름날에 여기 능향마을에서 농악대 장구를메고 쌍화점이야기와 송대관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60년대 옹동초등학교 여학생이 서울 버스 차장으로 취업하였는데  그 회사 사장의 아들이 부인으로 입적하였을 정도로 미인이 많다고 1968 옹동초등 김신자 교사의 말을 내가   들은 적이있었다

 이곳 옹동면은 중학교가 없어도 외딴 산직이 집 딸이 사법고시를 합격한 판검사가 되는등 도내 면단위 지역의  사법고시 합격자 수가 가장은 면이다 

그리고 현제의 정읍시 현재 국회의원 유성엽과  현 법제처장관 이석연, 그리고 전 체신청장 강봉수등 정읍대표의 인물 출신  집성지 이다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출처 : 한민족소리 찾기. 아리랑은 애국가
글쓴이 : notan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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