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이념·나이 초월해 옳은 삶의 길 찾아 실천
의견 다르다고 편가르는 요즘 세태에 경종 울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봄이 완연하게 익어 간다. 겨우내 움츠렸던 만물이 깨어나는 이 계절에는 모든 것이 바삐 움직인다. 선현들의 일상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실내 공간이 드물던 시절이라 비교적 규모 있는 행사는 대부분 옥외에서 치러졌는데, 이 때문에 봄으로 접어들면 자연스레 크고 작은 유림의 행사가 잦았다. 향교와 서원에서 선현을 모시고 제사를의견 다르다고 편가르는 요즘 세태에 경종 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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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에 자리한 이흥서원에서도 전통에 따라 4월 초순 따스한 봄날에 향사가 치러졌다. 이곳은 명신이자 세종대왕과 동서 사이인 강석덕(姜碩德, 1395~1459)을 비롯하여 두 아들 강희안과 강희맹 그리고 두 손자 강귀손, 강학손 등 조선 초기에 활약한 진주 강씨 다섯 선현을 모신 서원이다.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을 모시고 있는 이흥서원의 올봄 향사에 필자는 초헌관(初獻官)으로 참석하였다. 멀리 안동에 있는 필자가 그런 영예를 누리게 된 데에는 몇 해 전 이 집안 정자인 팔룡정(八龍亭) 중건 기문을 쓴 것이 인연으로 작용하였다. 필자가 그 기문을 쓴 데에는 안동이 고향인 퇴계 이황 선생과 이 지역 출신인 고봉 기대승 선생의 인연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저 유명한 8년여에 걸친 사단칠정 논쟁을 통해 쌓은 두 분의 학문적 우의와 이를 계승한 후손들의 친척 못지않은 교분이 퇴계를 모신 도산서원의 원장과 고봉이 모셔진 월봉서원 원장을 함께 맡고 있는 필자로 하여금 고봉의 외가인 이곳 팔룡정의 중건 기문을 쓰게 만든 것이다.
모셔진 인물 가운데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은 세종대왕 때 집현전 학사로서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렸다. 훗날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죽을 고비를 맞았을 때 같은 처지에 있던 절친한 친구 성삼문이 도리어 나서서 ‘이러한 인물은 앞으로 나라를 위해 반드시 살려야 한다’며 구명운동을 했을 정도였으니, 그 재목됨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작품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에는 그때 살아남은 한 고결한 선비의 복잡한 심사가 잘 드러나 있다.
또 팔룡정 정자의 주인인 강학손(姜鶴孫, 1455~1523)은 영남 사림의 영수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다. 이런 연고로 그는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전남 영광으로 유배되었다. 훗날 연산군이 쫓겨난 뒤에 조정에서 다시 불렀지만 응하지 않고 유배지인 영광 팔룡촌에 터를 잡음으로써 명문가 입향조로 이 지역과 지금까지 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가 바로 고봉의 외할아버지이다.
이 가문과 퇴계와의 인연은 더욱 각별하게 이어진다. 팔룡정의 현손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은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 붙잡혀 갔다가 풀려 귀국한 선비이다. 수은은 일본에 있을 때 당시 그곳 최고의 승려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에게 퇴계학을 전수함으로써 일본 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후지와라는 그보다 몇 해 전 일본에 사신으로 왔던 퇴계의 제자 학봉 김성일로부터 퇴계학을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데 수은에게서 다시금 그 정수를 전해 듣고 더욱 감동받은 나머지 승복을 벗고 유학자가 되었다. 그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퇴계학은 도쿠가와 막부시대는 물론 메이지시대 이후까지도 활발히 연구되고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하니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우리 선현들은 지역과 이념과 나이 차이를 초월하여 무엇이 옳은 삶의 길인지를 늘 찾고 실천하였다.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자기만 옳다고 목소리 높이고 내 편 네 편 가르며 다투는 요즘 세태와 견주어 볼 때 선현들이 가셨던 그 길이 훨씬 고품격이라고 생각하며 귀로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