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동학혁명 인물사--1994년 한겨례 신문 연재물
동학혁명 인물사--한겨례 신문 연재물
1.서병학 2.서장옥 3.손화중 4.김덕명 5.김개남 6.최경선 7.김인배
8.최달곤 9.민준호 10.오권선 11.김학진 12.정백현 13.이상옥 14차치구.
15.홍낙관 16.이희인 17.최맹순 18.편보언 19.황하일 20.손천민 21.차기석
22.김창수 23.박인호 24.이유상 25.손병희 26.전봉준 27.백낙희
***** 출처 : 오암동학사상연구소 http://cafe.daum.net/oamdonghak/YDD/42 [24이유상]기록 없음
***** 본래 이글은 1994년 동학혁명 백년기념 한겨레신문 연재물
**** 글 끝부분에 전봉준 관련 자료는 출처 모름 ****
1. 서병학
-- 강경 지도자에서 변절자로의 두 얼굴(보은 집회 상소 운동 주도 / 전쟁 땐 토벌군의 길 잡이로)
동학은 1890년대에 들어전국적으로 번져 나갔고 그 조직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벼슬아치들은 포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고, 동학 교도들은 잡아 가두거나 재산을 갈취하였다. 동학과 함께 사교 집단으로 몰리던 천주교와 기독교(신교)가 이미 공인을 받던 때였다.
군복 갈아입고 싸우자
이에 동학 교도들은 이단으로 몰려 죽은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동학교도 탄압을 중지하라는 요구를 들고 나왔다. 1892년 공주와 삼례에서 동학 교도들이 집회를 열어 충청 감사와 전라 감사에게 위 두 가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개 지방 장관에게 그런 권한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듬해 봄 이들 40여명이 강경한 상소문을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렸다. 임금은 내심 당황하면서 조용히 물러가 있으면 다른 조처가 있을 것이라고 회유했고 이들은 이에 따라 해산하였다. 이런 일련의 운동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서병학이었다.
그는 강경파였다. 공주와 삼례 집회,광화문 상소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교도들이 군복으로 갈아입고 병대와 협동하여 정부 간당을 소탕하고 조정을 크게 개혁하자." 고 주장하였다. 광화문 상소가 실패로 돌아가자 동학교도 1만여 명이 상경하여 은밀히 활동하면서 외국 공사관과 교회나 성당 벽에 "이 땅에서 물러가라." 는 내용의 글을 붙였는데 이 일도 서병학과 같은 강경파나 호남의 농민군 지도자들이 주도하였다. 1893년 봄, 드디어 큰 일이 벌어졌다. 교주 최시형은 강경파 교도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3월 11일 보은 장내리로 자리를 옮기고 교도들에게 이곳으로 모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최시형의 명령이 있던 바로 그 날 보은 관아 거리에는 벌써 " 지금 홰와 서양의 도둑들이 나라의 심장부에 들어와 큰 난리가 극도에 이르렀다. 진실로 오늘의 서울을 보니 오랑캐의 소굴이 되었도다 ... 우리들 수만 명이 힘을 합해 죽음을 맹세코 왜와 서양 세력을 깨뜨려 큰공을 세우려 한다." 는 통고의 글이 여기저기에 나붙었다. 교도들은 연일 충청도를 중심으로 경상도,전라도 경기도와 멀리 강원도,황해도에서도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이들 교도 수만 명은 장내리 뒷산 옥녀봉 아래에 돌성을 쌓고 그 아래 흐르는 냇가에 진지를 만들었다. 이들은 민가에서 잠을 자기도 하면서 장기전의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도소(사령부)에는 오색 깃발이 나부끼며 옥녀봉을 중앙으로 남산과 북산에서 망기(척후의 기)로 신호를 보내는 민활한 행동을 보였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어윤중을 선무사로 임명하여 군대를 딸려 파견하였다. 어윤중은 이곳에 당도해 우선 그 규모에 놀랐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무엇보다 교조 신원이 아니라 "왜와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깃발이었다.. "겉으로 오랑캐를 배척한다고 핑계 대지만 내심으로는 난리를 일으킬 생각."이라고 그는 생각했고 또 보고했다. 어윤중은 한쪽으로는 대포를 걸어 놓고 위협하기도 하고 한쪽으로는 지도자들을 만나 회유하기도 했다. 그 대상이 교주 다음의 책임자인 '차좌'라는 소임을 띤 서병학이었다.
"제가 불행하게도 여기에 와 사람들의 지목을 받은지가 오래되었소이다. 마땅히 이곳에 모인 내력을 상세히 말씀드리지요. 호남에 모인 무리들 (이시기 전라도 원평에서도 남접 주도로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은 예사로 보면 같으나 종류가 다르옵니다. 통문을 내고 방문을 붙인 것은 모두 그들이 한 짓이니 실정이 매우 수상합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자세히 살피시어 결단하되 이들 무리와 혼동하지 말고 옥석을 구분해 주십시오."
어윤중의 징계에서 서병학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서병학은 최시형 등 지도자들과 함께 밤을 틈타 도주하였다. 이곳에 모인 지 20여일 만이었다. 이렇게 되자 의기가 충천하던 수만 명의 교도들도 어쩔 수 없이 해산하였다.
보은서 야반도주
이것이 보은 집회다.. 이 집회에서 그들은 반봉건-반외세의 저항을 분명히 드러냈고, 이런 지향을 지니고 전면적 항쟁에 나서려 했던 것이다. 이 집회는 바로 본격적인 농민 전쟁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최시형과 서병학은 왜 달아났던가 ? 최시형은 끊임없이 잠행하여 이루어 놓은 교단의 와해를 무엇보다 염려했을 것이다. 서병학은 달랐다. 초기에는 서양과 일본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척사위정파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본질적으로는 출세를 꿈꾸는 엽관파였던 것이다.
서병학은 어떠한 내력을 지닌 인물인가? 그는 출생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다만 선비 출신으로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과거를 보았으나 실패했다는 말이 전해질뿐이다.. 그 뒤 유랑 생활을 하다가 어찌어찌 동학에 들었고, 동학 교단에서 의식을 제정할 적에 유교식 예교를 많이 수용한 탓에 글줄깨나 읽은 그는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나이와 관련해서는 일본의 깡패 무리인 천수 협회의 한 단원이 보은 집회 직전 황해도 지방에서 정보를 수집할 적에 백발이 성성한 60살쯤 되어 보이는 서병학을 만났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학농민운동과 2인의 흑막)
보은 집회때 달아난 뒤 서병학의 행적은 한때 묘연했다.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적에 그의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해 8월에 그는 보은에서 잡혔다(시문기)고 하는데 제발로 잡혀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1894년 가을에 접어들어서도 계속 동학 농민군이 활동하자, 9월에 조정에서는 장위영(서울 수비병)의 영관 이두황을 죽산 부사로 임명하고 경리청(북한산성 수비병) 영관 서하영을 안성군수로 삼아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서게 하였다.
최시형 체포에 앞장서
이런 기록이 있다.
"이때 서병학이 잡히게 되어 포도대장 겸 도순찰사(군대의 총 책임자) 신정희에게 빌붙어서 남부도사 한자리를 얻어 가지고 비밀히 돌아다니며 동학 교인들을 정찰했다. "<천도교 교회사 초고>
남부도사는 한성의 5부 중 남부 지역의 총 책임을 맡은, 이를테면 오늘날의 서울시 구청장 격이다. 이두영과 성하영은 경기, 충청도 일대에서 전투와 관계없이 무수한 양민을 학살했다. 특히 텅텅 비어 있는 장내리에 들어가서 양민 3명을 처단하고 초막 4백여 채를 태우기도 했다. 이런 일에 서병학은 길잡이 노릇을 했던 것이다. 공주 전투에서 농민군이 패전하자 한패는 남쪽으로, 또 다른 한패는 동북쪽으로 달아났다. 손병희는 최시형을 보호하며 전라도 지방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북상해 영동 지방을 거쳐 보은 땅까지 들어갔다. 이때 경리청의 구상조는 영남쪽의 일본군과 합동작전을 펴며 이들의 추격에 나섰다. 이때도 서병학은 경리청 참모관이라는 직책을 띠고 청산 옥천 영동 지방에서 길잡이 질을 했다. 서병학은 예전에 목숨을 걸고 모시던 최시형과, 죽음을 걸고 맹세하면서 뜻을 같이했던 손병희를 잡기 위해 앞잡이 노릇을 했던 것이다. 전쟁 뒤 서병학은 병고에 시달리다가 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고 전해진다. 일신의 안위를 위해 대의를 저버린 삶이 결국 어디를 향하는지 그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 이이화, 역사문제 연구소 소장 )
역사의 현장
보은 집회의 현장 장안 마을 /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 장안마을.
속리산 국립공원 어귀의 이 40여 호의 마을은 여느 시골처럼 평온하고 아늑하다. 5백 4십여 미터의 높이 옥녀봉에서 흘러내린 뒷산을 베개삼아 꽤 널찍한 삼가천을 앞에 둔 마을 들녘에서는 나락들이 막바지 여름 햇살을 머금으며 익어 가고 있다. 이 들녘이 바로 꼭 1백년 전인 1893년 봄 각처에서 모인 수만 명(기록에 따라 3만 명에서 8만 명까지 다양하다.)의 동학 교도들이 함성을 올렸던 보은 집회의 마당으로, 그 역사의 현장이 이제 복원 작업을 통해 하나 둘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장안 마을에서 옛날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당시 대추나무가 무성한 밭이었다던 집결터는 50년대 중반 농수로가 생기면서 모두 논으로 변해 있었다.그나마 찾을 수 있은 흔적은 동학도들이 쌓았다는 돌성의 일부 성벽 정도이다. 1백 80여 미터, 높이 1.5미터 규모의 성벽의 남쪽에 해당하는 이 흔적은 지금은 논둑으로 옹사용되고 있었다. 무성한 수풀에 싸여 그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이 마을 이장 심학(52)씨는
"가을걷이가 끝난 무렵이면 성벽이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성벽에서 바로 뒷산 쪽의 논이 도소(동학 교주가 교단 조직을 총괄하던 본부)자리이다. 마을 주민 사이에서 아직도 대단히 큰 기와집으로 불려 내려오는 도소가 설치되었던 기와집은 토벌군이 불태워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다. 또 뒷산 기슭을 둘러싸듯 자리한 옛 장안 마을도 논밭을 일굴 때 가끔 발견되는 깨진 기왓장이나 사금파리로 과거를 이야기할 뿐이다. 현재 이 지역의 복원 작업은 보은군청과 보은 동학 집회 1백년 기념 사업을 추진 중인 천도교 중앙 본부가 맡고 있다. 복원 작업의 우선 목표는 남아 있는 성벽 흔적을 중심으로 당시의 집결지를 다시 만들고 상징탑을 세우는 일이다. 이를 위해 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가 복원을 위한 정밀한 고증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와 함께 도소 자리에 기념관을 짓고 당시 도소에서 교도를 지휘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동상을 세우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동행한 신영우 충북대 교수(사학)는 , "복원 작업이 완성되면 장안 마을 일대가 훌륭한 동학 농민 전쟁의 교육장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
2. 서장옥(?-1900)
-봉기의 불길 당긴 남접의 대부, 변혁 지향 강경 독자노선 실천 ... 전봉준 등 키워
동학 교도들은 1893년 3월 최시형 서병학을 중심으로 충청도 보은에서 집회를 하고 있을 때 ,전라도 땅 금구현 원평에서도 대대적인 농민군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농민군들은 목화송이 같은 방울이 달린 모자를 쓰고 목검을 휘두르며 원평천 냇가에서 군사 연습도 하였다.. 농민군만 모인 것이 아니었다. 그 가족들까지 남부여대하고 합류하여 법석을 이루었다. 피폐한 살림에 쪼들리다가 큰 솥 걸어 짓는 밥을 얻어먹기 위해 몰려든 사람이었다.
여러 이름 신출귀몰
원평 집회에서는 보은 집회의 귀추를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보은에서 일어서면 때맞춰 함께 행동할 양이었다. 이 집회를 주도한 인물이 서장옥을 비롯하여 전봉준, 김덕명 등이었다.. 서장옥은 농민전쟁사에 서인주나 서일해(호)로 이름을 바꿔가며 출몰하는 신비의 인물이다 .자세한 내력은 장막에 가려져 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처음 동학에서는 그 무리를 포(포)라고 불렀는데 법포와 서포가 있었다. 법포는 최시형을 받드는데 법헌이라는 최시형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포는 서장옥을 받든다. 서장옥은 수원 사람으로 최시형과 함께 교조 최제우를 따라 배웠다. 최제우가 죽자 각기 도당을 세워 서로 전수하면서 이를 '포덕'이라고 이름하였다. 이들은 (동학이 궐기할 때) 서포가 먼저 일어나고 법포가 뒤에 일어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서포는 또 기포(起布)라 불렀다. 전봉준이 주동하여 일어날 적에는 모두 서포였다."(오하기문)
이 기록은 짧고 불확실하나, 서장옥의 행동 노선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서장옥은 1884년 충청도 일대에서 한창 포덕에 열중하던 최시형을 황하일과 함께 찾아온다. 그리고 교단의 지도자로 떠오른다. 당시 서장옥은 청주에서 살고 있었다. 동학이 의식을 제정할 적에 유교 예식 도입을 주도한 서병학과 달리 서장옥은 불교 의식을 많이 수용하였다. 그는 30여 년 불도를 닦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1889년 가을 서울로 올라왔다가 관가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이때 벌써 동학의 중요한 지도자로 관가에 포착되었던 것이다. 그는 온갖 닥달을 받은 끝에 급갑도로 유배되었다. 최시형은 많은 돈을 들여 그를 풀어 주게 하고, 밥 먹을 때마다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하면서 그의 목숨을 빌었다. 그는 이때까지는 이처럼 동학 교단에서 소중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서장옥은 유배에서 풀려 나오자 서병학과 함께 공주와 삼례 집회 등을 주도하면서, 강경 노선을 추구했고 이예 따라 최시형 등 온건한 교단 지도부와 마찰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황하일과 함께 독자적 행동 노선을 뚜렷이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전라도의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전봉준을 제자로 거느리고 새로이 '남접'이라는 세력을 구축했다.
광하문 상소 운동에 즈음하여 서울로 진출해 외국 공사관과 성당 등에 "물러가라."는 방문을 붙이고 집회가 열리는 보은 거리에 "왜를 물리치기 위해 협력하자."라는 글을 내건 것도 이 남접의 농민군의 지도자들이었다. 원평집회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금구의 원평은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미륵 신앙의 본거지요, 백제 부흥을 위해 저항운동을 벌인 근거지인 금산사 들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아래로는 태인, 부안, 위로는 전주, 금구 관아와 통하는 교통의 요지요, 큰 시장이 서는 상업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을 향해 몰려든 농민군에는 불갑사 백양사 선운사의 승려들까지 합류해 왔다. 보은 집회와 달리 불교 세력까지 가담한 것이다. 농민 세력의 일부는 보은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금엽이라는 승려는 보은의 동정을 엿보기 위해서 파견되기도 하였다.
보은 집회 지도자들이 끝내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 집회도 해산되었다. 그러나 이곳 지도자들은 해산 뒤에도 동학 교도들을 독려하기도 하고 이곳 저곳에서 무리를 거느리고 몰려다니며 봉기의 기세를 보였다. 실로 다음해 동학농민전쟁은 바로 이곳 농민 세력과 지도자들이 주도해 터진 것이다. 그러므로 원평 집회의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다.
원평 집회 이끌어
보은 집회에 이어 이들의 해산을 권고하려고 원평으로 오던 어윤중은 "효서의 서병학과 호남의 김봉집(전봉준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음), 서장옥을 그 도의 감사에게 잡아가두게 해 엄하게 조사하여 알리겠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들 지도자는 잡히지 않고 끊임없이 조직을 확대하며 봉기 준비를 서둘렀다.
이듬해 1894년 3월 농민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때까지 서장옥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의 본거지인 충청도 일대에 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때까지 남접의 봉기를 억누르며 관망하던 동학 교단,곧 북접의 호흥을 얻어내기 위해 활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6월께 서장옥은 관가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고문으로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른 몸으로 좌포도청에 옮겨 갇혔다가 석방된다.(조경달의 <동학농민운동과 2인의 흑막>).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으면 문책이 따르므로 석방해 준 듯하다. 아무튼 그후 그의 활동은 다시 전개된다.
이해 9월 장위영 영관 이두황 등이 변절한 동학 지도자 서병학을 앞세우고 경기도로, 충청도로 동학 농민군 토벌을 다닐 적에 받은 다음과 같은 정탐 보고에도 그의 행보는 나타난다. "유학당을 표방하는 허문숙 서장옥 등 5-6만 명이 충주 용수포에 모여 있고 동학당 신재련 등 4만 - 5만 명이 진천 광혜원에 모여 있는데 곧 접전에 들어갈 작정"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이른바 호남, 호서의 도유(道儒)라는 자들이 남접이라고 이름하고 창의를 일컬으면서 무리를 모으고 말과 병기를 거두어 평민을 노략질하고 교도를 살해하는 짓이 끝이 없다."는 신재련의 글이 이두황 등에게 전해진다. 여기서 신재련은 자신들과 이들을 구분해 달라고 하소연하고 있었다.(이두황의 <양호초토등록>)
이때 서장옥은 북접이 남접에 호흥하지 않고 도리어 남접을 압박하는 지경에 이르자 신재련 등 북접 내부의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별도의 농민군을 규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시형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통유문을 내린다. "무릇 우리 도는 남접 북접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용담(최제우)의 연원이나,도를 지키고 스승을 높이는 자는 오직 북접 뿐이라. 지금 들으니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인주가 문호를 별도로 세워서 남접이라 이름하고 창의함을 빙자하여 평민을 침해하고 도인을 해침에 끝이 없다 하니 이를 일찍 끊지 아니하면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을지니 원컨대 우리 나라 각 포에 우리 북접을 신앙하는 자는 이 글이 도착하는 대로 … 사문난적을 일제히 토벌함이 옳을 것이다."
북접과 극심한 마찰
자신을 남접과 구별하려는 북접의 이러한 시도가 있었으나 정부는 남,북접을 가리지 않고 반역으로 함께 다룬다. 북접과 남접은 남접이 제 2차 봉기를 일으킬 적에 어렵게 연합 전선을 이룬다. 농민전쟁의 성격은 이제 조선의 심장부로 파고든 일본을 축출하기 위한 전면적 대일 항쟁으로 바뀌어 있었다.
남접 징벌론을 접고, 적 앞의 분열을 끝내기로 한 북접이 논산,공주로 움직일 때 서장옥은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는 대신 청주 병영의 공격에 나선다. 서장옥이 이끄는 농민군은 청주 병영을 포위 공격하였는데, 이 무렵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도 이곳 병영의 공격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두 세력이 실질적으로 연합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청주 병영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전쟁 뒤 교수형 당해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직후에도 서장옥은 잡히지 않았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00년, 잡히는 몸이 되어 기록에 등장한다. 그는 동지 손사문과 함께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수많은 남접의 지도자를 키워 가며 철저한 반봉건 반외세 항쟁에 나섰던 서장옥은 이렇게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행적은 뒷날 교단에서 여러 사실을 기록하면서 소홀히 다룬 탓으로 분명히 밝혀지지 못한 채 세월의 어둠 속으로 묻혀 버렸다. (이이화 : 역사문제 연구소장)
향토사 학자 최순식씨가 말하는 '원평집회'
"1893년 봄 대규모 농민 집회가 원평에서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원평 고을에는 멀리는 백제의 멸망에서 시작해 미륵신앙,정여립의 도참사상으로 이어지는 저항과 해방의 질긴 기운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원평 집회 터인 전북 김제군 금산면 원평리의 향토사학자 최순식(61, 모악향토문화 연구회 회장)씨는 이 고장의 오랜 신앙 세계에서 농민전쟁의 한 뿌리를 찾는다. 70년대에 교직을 그만둔 뒤 향토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그는 87년 이 지역 출신의 농민군 지도자 김덕명의 비문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전쟁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원평은 미륵신앙의 본령인 금산사에서 10여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또 금산면 청도리 제비산 일대에는 16세기 말 참위설을 부르짖으며 새 세상을 꿈꿨던 정여립이 세력을 키웠던 곳이다.
그 뒤 이 지역은 반역향으로 불리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관직에 중용되지 못했다. 최씨는 "정치적인 불평등 속에 수백년 동안 미륵님과 상제님의 하강을 기다리며 쌓여온 저항 의식이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결합해 원평 장터와 모악산, 제비산에서 성황을 이룬 것은 당연한 귀결" 이라고 말했다.
원평 일대에서는 지금도 미륵 신앙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금산사가 자리잡은 금산리 용화동의 행정지명은 용화 세상에서 따온 것이며, 금산리와 청도리 가운데 절반 가량이 미륵 신앙을 따르는 신자들이라고 했다.
3. 손화중
-- 녹두장군도 감탄한 뛰어난조직력(김개남과 함께 3대 지도자…황토현 전투 연합전선 성사 시켜
고부 봉기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여느 민란과 그 질이 다름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새로이 군수로 박원명을 임명하고 그 조사관으로 이용태를 보냈다. 고부 군민들은 신임 군수의 회유에 일단 원한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각기 흩어졌다. 그러나 뒤늦게 온 이용태는 골골을 누비며 주동자를 잡아 족치기도 하고 무고한 양민에게 약탈을 일삼았다. 고부의 민중은 다시 분노로 치를 떨었다.
전봉준 최경선 등 지도자들은 고부의 농민만으로는 운동의 단계를 고양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재빨리 몸을 날려 이웃 고을 무장으로 내달았다.그리고 새로운 계획을 추진했다. 무장은 전봉준의 고향인 당촌과 가까운 곳에 있기도 했거니와 절친한 동지 손화중이 활동하면서 기반을 다진 곳이었다.
전봉준은 손화중에게 즉각 봉기할 것을 설득했으나 손화중은 신중하게 대처하자는 제의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끝내 전봉준과 손화중은 손을 잡았고 여기에 김개남의 합류까지 이룩했다. 이렇게 해서 농민전쟁의 3대 지도자가 탄생을 보게 된다.
인상 성격 부드러워
이들 지도자는 밀사를 보내 충청도와 금산 지역에 격문을 보내 호응할 것을 요구하는 등 연합 전선 형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정식 선전포고 (포고문)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조정에는 간신들이 모여 온갖 부정을 일삼으면서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외방에는 수령들이 갖은 수탈을 일삼아 백성들이 살 수가 없으며, 나라에는 국비로 쓸 재물이 없고 탐관오리들은 호사롭게 살고 있어서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선다는 것이었다. 그 끝에는 창의소의 이름 아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의 서명이 있었다.
이들은 다시 고부로 진출하여 백산에서 더욱 큰 규모로 모였고 이어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의 무남영 군대를 여지없이 깨부쉈다. 이 연합 전선의 형성에 절대적 공로자가 손화중이다.
손화중은 정읍 꾀다리(지금의 정주시 과교동)에서 대대로 지주 행세를 하는 밀양 손씨집 큰아들로 태어나서 어릴 적 이웃마을인 음성골(지금의 정주시 상평동)로 이사를 했다. 지금 음성골에는 그의 고택 터가 있다.
부유한 환경에서 글을 익히던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기대가 자못 컸다고 전해진다. 그가 몇살에 결혼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보다 여섯살 위인 고흥 유씨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20대 때 처남 유용수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으로 승지(피난처)를 찾아 나섰다가 동학에 입도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본명인 정식보다 자인 화중으로 널리 통한 것으로 보인다. (밀양손씨 세보 참고)
손화중은 관헌의 눈을 피해 부안 정읍 무장 등지로 돌아다니며 동학 포교에 열중한다. 그는 키는 9척 장신이요, 인상은 부드럽고 설득력이 아주 뛰어났다 한다. 이런 그였으니 그의 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어느 때인지 그는 무장현 성송면 괴치리 사천 마을로 옮겨 본격적인 포교에 나섰다. 그는 1892년에 선운사 뒤 도솔암의 비결을 캐낸 것으로 유명해진다. 그 석불은 검당선사라는 중의 모습이라 한다. 석불의 배꼽에는 비결이 하나 들어 있는데 이 비결이 세상에 들어나는 날에는 서울이 망한다는 전설이 끈질기게 전해졌다.. 전라감사 이서구가 이를 꺼내 보다가 벼락이 쳐서 얼른 뚜껑을 닫았다는 일화까지 보태져 돌았다.
나주서의 최후 항전
손화중이 바로 이 비결을 자기 주도 아래 꺼내서 어디론가 가지고 가벼렸다고 한다. 이 사실이 관가에 고발되어 손화중포의 여러 사람이 잡혀갔으나 손화중만은 몸을 숨겨 잡히지 않았다 한다. 이 사건은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고 손화중은 더욱 유명해졌던 것이다. 더욱이 민중은 이 석불을 미륵 출현과 같은 의미를 붙여 신앙하고 있었다..(프랑스인 뮈텔 주교가 수집한 <뷔텔문서>에는 석불의 배꼽에서 비결이 아닌 금덩이를 꺼내 갔다고 기록돼 있다. )
아무튼 손화중은 무장 고창 부안 일대에서 조직을 넓혔고 명성도 높았다. 뒷날 일본군 쪽에서 각지의 유명한 접주를 정탐하여 보고하면서 무장에는 손화중이란 '대접주 거괴'가 있고 성동면 양실에 거주하는 한학삼과 엄동이나 호동에 거주하는 김경도를 우두머리로 꼽고 있다. (일본공사관 기록)
전봉준은 이런 손화중의 조직과 세력을 이용했다. 전봉준은 손화중이나 김개남 보다 훨씬 늦게 동학에 입도했고 포교 활동은 하지 않았으니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려면 손화중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손을 잡아 황토현 전투에 이어 잔성 전투, 전주 점령에 주도적 구실을 했다. 그는 집강소 기간에 김개남보다 전봉준과 노선을 같이하면서 장성 광주 등지에서 활동을 벌였다.
그는 집강소 기간에 농민 또는 하층민들이 불법을 저지르거나 약탈을 하는 경우를 목격하고 대사를 그르치겠다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바로 이 점이 김개남의 행동과는 다른 점일 것이다.
전봉준이 9월 대일 전면전을 펼칠 적에 그는 광주 일대를 지키며 군수전(軍需錢)이나 군량미의 조달에 앞장섰고 또 일본군이 남쪽 바다로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남쪽 방어의 의무를 맡고 있었다.
전봉준의 주력 농민군이 공주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어 원평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해산하자,그는 잔여 농민군을 이끌고 광주 나주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또다시 패배를 거듭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옛 연고지인 흥덕현 안현리(지금 고창군 부안면 검산리 창내마을) 이씨 재실에 부하 두 명과 함께 몸을 숨겼다. 그런데 일을 그르쳤음을 깨닫고 재실지기인 이봉우에게 "그동안 너에게 진 빚을 갚겠으니 네가 나를 고발해서 큰 상을 받아라." 하고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아들 응수의 증언. 최현식의 <갑오동학혁명사>참고). 이봉우는 뒷날 손화중을 잡은 공로로 황해도 증산 현령이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 우선 이봉우는 재실지기가 아니라 '유학'이라는 양반 신분이었다. 또 손화중을 잡는 데에 다른 고을인 고부 순창의 민병 10여 명이 동원되었고 이들은 그를 잡은 공로로 포상을 받았으며 잡힐 적에 그의 부하 두 명이 포살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손화중은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의 초토영 감옥에 갇혔다.이보다 먼저 잡혀온 전봉준과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때의 전경을 두고 이런 기록이 전해진다.
"처음 전봉준이 잡혔을 적에 손화중과 함께 나주에 갇혔다. 손화중이 목사 민종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이라 자신을 낮추었다. 이에 전봉준이 꾸짖어 '어떻게 소인이냐? 민종열 앞에서 소인이라고 일컬으니 참으로 축생과 같구나. 내가 사람을 몰라보고 함께 일을 도모했으니 실패할 수밖에' 라고 했다."(황현의 <오하기문>)
전봉준과 함께 처형
이 일화는 뒤집어 말하면 손화중의 성격이 부드러움을 보여준다. 어쨌든 두 사람은 서울로 끌려와 함께 재판을 받고 한날 처형당했다. 손화중은 전봉준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태어난 시기는 달랐으나 뜻을 같이하다 죽음에까지 동반한 것이다.
손화중의 동생 익중과 처남 유공선도 잡혀 처형당했고 조카뻘인 손여옥 등 많은 손씨들이 처형당하거나 체포령이 내려져 정읍의 손씨들은 풍비 박산이 나 버렸다.
후손들은 손화중의 주검을 찾지 못해 혼장(魂葬)으로 살던 마을 뒷동산에 뫼를 써 놓았다. 그러나 의인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시신 수습 못해 늘 죄송-일가친척 풍비 박산…어렵게 생계 꾸려
( 인터뷰 : 손화중의 손자 손횽열씨)
"할아버지께서 서울서만 처형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시신이라도 수습했을 텐데. 모두들 피해 다니시느라…"
농민전쟁의 3대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손화중의 손자 홍열(58/청주시 농협 조합장)씨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주검을 모시지 못한 죄송함을 먼저 표시한다. 그는 손화중의 셋째 아들인 성태(62년 74살로 작고)씨의 여덟 자녀 가운데 막내다. 농민전쟁 당시 6살에 불과했던 아버지가 뒷날 자신에게 알려준 이야기 가운데 가장 가슴아픈 대목은 천석군의 딸로 곱게 자란 할머니 고흥 유씨가 아버지와 두살배기 고모를 데리고 겪은 고생담이다. 관군의 토벌을 피해 옥구 땅으로 피난한 할머니는 식모살이를 하며 근근이 삶을 꾸려 나갔다고 한다. 물론 손씨 집안 사람이라는 얘기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고 한다.
"누군가 성씨를 물으면 김가라고 대답하도록 교육받은 아버지가 얼떨결에 손씨라고 대답했다가 호되게 회초리를 맞은 척아 많았답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전쟁 6년 뒤에야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손씨 종족촌인 정주읍 삼산리 음성마을(지금의 정주시 삼평동)은 이미 쑥대밭이 돼 있었다. 마을에서 손씨만 21명이 죽었고 그 많던 재산도 흔적조차 없어졌다.그 뒤로도 물론 살림이 피기는 어려웠다. 살아남은 일가친척 대부분이 머슴살이를 하거나 공사판을 전전했다고 한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농협에 들어와 조합장까지 된 홍열씨 자신은 어떤 의미에서 출세한 셈이다. 그는 요즈음 마을 뒷산의 할아버지의 가묘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추진하느라 분주하다. 80여 년전 할아버지의 혼백을 불러 만든 가묘에는 나중에 숨진 할머니가 합장됐다. 홍열씨는 "농민전쟁이 역사적으로 재평가된 만큼 어렵게 살아가는 많은 희생자 후손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말했다.
4. 김덕명
-금구 원평에서 막강한 세력, -- 농민군 총참모로 명성…후배 전봉준과 생사 고락
전라도 삼례에서는 1892년 수만 명의 동학 교도가 모여 교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 줄 것,탐관오리를 제거할 것, 따위의 요구를 내걸고 집회를 벌였다. 이것이 동학 교단이 성립된 뒤, 최초로 대규모로 일어난 집단행동이었다.이때 금구 지방(지금의 김제군 금산면)에선 1만여 명이 참여했다.
그 뒤 조정에서는 금구현 원평을 주목하여 이 지방이 동학 교도들이 가장 많은 곳임을 고종 임금까지도 알고 있으면서 그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어 금구 원평에서는 집강소의 대도소가 잇기도 했고 동학 전쟁 때는 태인 지방과 함께 농민군 주력 부대가 일본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원평은 농민 전쟁의 중심 지역이 되었는데 이곳에 터전을 잡고 있던 지도자가 바로 김덕명이다. 김덕명은 언양 김씨였는데 이들 김씨의 세거지는 금구현 두류면 거야마을 일대(지금의 김제군 금산면 심봉리)였다. 이들 김씨는 시골양반 행세를 하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김덕명이 태어난 곳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금산사 입구의 용계마을이었다 한다.
그의 본 이름은 준상이요, 자가 덕명이다.자를 이름처럼 써온 것은 다른 농민군 지도자와 같다. 호는 용계, 그가 잡힐 적에 살던 곳을 용계동이라 했으니 이 마을에서 태어나 이 마을에서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불의와 비리 못참아
그는 그리 가난하지 않은 중농 집안에 태어난 탓으로 어릴 때 글을 익혔는데 언제부터인지 고리타분한 경서보다 병법 책을 읽어 뜻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와 가까운 일족인 한참서가 대지주로 군림하면서 벼슬을 사서 세도 부리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들 김씨들의 재실이 있는 장흥리의 안정 절골에서 종중회의를 할 때 일족의 이런 짓거리에 분노를 느껴 재떨이와 목침 따위를 던지며 의기를 보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처럼 그는 젊은 시절부터 불의와 비리를 참지 못하는 의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전봉준이나 김개남과 언제부터 안면을 트게 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상두재라는 고개 하나를 넘으면 김개남의 집이 있었고 또 10리 안 거리엔 황새마을에서 전봉준이 살았다는 증언이 있으니 이들이 젊을 적부터 서로 알았을 개연성이 크다.김덕명은 두 지도자보다 10여년 쯤 연상이었다. 전봉준이 한때 그의 집 식객 노릇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오른 것은 고부 무장봉기에 이은 백산의 대집결 때부터이다. 백산에 각지의 농민군 수만 명이 모여들 적에 금구에서는 농민군 두령으로 끝까지 활약한 송태섭,유공만,김인배,김봉득 등이 참여했고, 김덕명은 총대장 전봉준과 총관령 손화중 김개남의 총참모가 되어 젊은 세 지도자를 도왔다.
아무튼 그는 참모의 직책을 가지고 황토재 전투와 장성 전투 그리고 전주 점령까지 행동을 같이 했다. 그는 철저하게 후배 전봉준의 협조자가 된다. 1차 봉기가 전주 화약으로 매듭되고 농민군이 전주에서 퇴각한 뒤 농민군의 자치, 즉 집강소 통치가 시작된다. 이때 대도소를 전주 삼례 원평 그리고 광주 남원 등지에 두었는데 원평도 농민통치가 아주 활발한 곳으로 전해졌다. 원평의 집강소 도접주는 김덕명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잡혔을 적에 기록은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이놈이 크게 도소를 원평점에 설치하고 사사로이 국가의 곡식과 국가의 돈을 거두어 들이면서 평민을 침학한 자이다."
집강소 통치의 주역
또 그의 판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김덕명이가 금구지방에서 무리를 모아 당을 이루고서 관고의 군대에 쓰는 물건을 마구 빼앗고 민간의 돈과 곡식을 약탈하면서 혹은 관가와 혹은 마을에서 멋대로 날뛰며 소요를 일으켜서 부수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것이 그 끝간 데가 없다 하기로……." 이런 기록에서 바로 그가 집강소의 핵심 지도자로서 많은 군수품을 거두어 들였고 탐학한지주를 응징하며 농민의 고통을 해결해 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김덕명은 예전 불만스레 대하던 문중의 토호들을 많이 구제해 주면서 한 사람도 다치지 않게 하였다 한다. 당시 수천석을 추수하던 참서집인 김부잣집에 농민군이 들이닥쳤을 때의 일이다.이들은 수많은 장독을 깨부수어 장물이 개울을타고 아랫마을까지 흘러 넘쳤다. 또 밧줄을 집기둥에 묶어 끌어당겨서 집을 허물기도 했다 한다.
그런 와중에도 그집 식구들이 몸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한다. 이런 점으로 보면 그는 잘못된 제도나 폐막을 고치려 했을 뿐 살상에는 신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농민군들은 청일전쟁이 끝난 뒤 전면적 대일항쟁에 나섰다. 이때에도 그의 관할 아래에 있는 금구현에서는 김봉득이 오천 명을 이끌고 합류했고 원평에서는송태섭이 7천 명을 이끌고 합류했다.(오지영의 동학사) 그 자신은 전주와 삼례에서 총지휘자가 되어 전봉준과 함께 북상했다.
공주 전투에서 패전하고 지도부는 남하하여 원평과 태인에서 일본군 관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특히 원평에서는 피나는 전투를 벌여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이 전투에 참여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원평 전투를 좀더 설명하면 이러하다. 농민군 지도부는 전주에서 나와 잔여 농민군 5백-6백여 명을 이끌고 원평의 뒷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12월 25일 새벽 일본군과 관군은 원평에까지 추격해왔다. 이때 농민군은 산의 3면을 지키며 품(品)자형을 이루어 방어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산 아래 들판에서 산을 향해 포를 쏘아댔다. 몇시간은 이렇게 전투를 벌였으나 승부가 지 않자 대관 최영학은 칼을 빼들고 산으로 올랐다. 이에 양쪽의 일본군과 관군은 산으로 뛰어올라 37명을 죽였다. 농민군은 완강한 저항을 풀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전투는 꼬박 하루 낮동안 계속됐다.( 순무선봉진등록)
이때 전투지역인 시장의 점포와 구미라는 마을의 집 40여 채가 불에 타고 나머지 집들도 파괴으며 농민군이 지니고 있던 곡식 2백여 석과 민가의 물건들도 깡그리 불에 탔다. 이곳 주민들은 모두 몸을 피했다.(순무사정보첩)
김덕명의 근거지는 폐허가 되었다. 김덕명은 이 광경을 보고 참담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을 것이다. 김덕명은 전봉준과 헤어져 몽을 숨긴다.
그는 안정 절골에 있는 산지기 집으로 몸을 피했다. 산지기는 폐사가 된 안정사에 부처를 모셔 놓고 무당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김씨 문중의 토호들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한다. 그러나 구명은 커녕 이들은 오히려 관가에 고발했다고 전해진다. 바로 설날 태인의 수성군이 산지기 집으로 들이닥쳤다.
원평 전투 뒤 붙잡혀
이들이 김덕명에게 짚둥우리를 씌우고 상투와 양쪽 팔을 묶어 끌고 가자 부녀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김덕명은 일본군에게 넘겨졌고 서울로 끌려와 전봉준 등 다섯 명의 지도자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덟살 난 그의 아들 재홍과 네살배기 재규는 용케 목숨을 부지했다. 뒷날 그의 묘는 안정 절공龁 산중턱에 쓰였고 원평전투가 있었던 산에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다른 농민군도 지도자들보다는 사후에 나은 대접을 받았다 하겠다.
인터뷰 / 김덕명의 장손 병일씨
30년 넘게 할아버지 자료 찾아
추모집 내고 비석 건립 " 큰 짐 던 느낌"
"글쎄 아는게 별로 많지 않아. 아버지께서 통 동학전쟁이나 할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안하셔서……"
김덕명의 장손인 병일(72. 서울 마포구 상암동 705)씨는 농민전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겸손함으로 말을뗐다.김제군 금산면 삼봉리의 거야마을에서 궁핍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 들었던 얘기는 남부럽지 않게 살던 할아버지가 동학난으로 잡혀 죽고 재산도 다 없어졌다는 것 정도였다. 뒷날 생각해 보니 할머니가 고향마을을 등지지 않고 열살도 채 안된 두 아들을 키울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되레 다행이었다.
어렵사리 공고를 졸업한 뒤 건축기사로 전국을 떠돌며 집안 살림 키우기에 바빴던 병일씨는 56년 서울에 정착하면서부터야 '뿌리찾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틈나는 대로 사학자나 고향의 촌로들을 찾아 관련자료나 증언을 수집하고 문헌을 뒤적이며 할아버지의 관련된 사실들을 하나하나 모아갔다. 그 결과 89년 <언양김씨 덕명장군 추모집>이라는 조그마한 자료집이 후손들의 손에 쥐어질 수 있었다.
"큰 짐을 던 느낌이었어. 그동안 후손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게 얼마나 죄송스러웠는지."
할아버지의 업적을 기념하는 일도 함께 진행이 되었다. 80년대 중반 안정 절골의 묘소 주변에 둘레석과 비석을 세웠고, 농민전쟁 희생자 추모각이 세워진 김제군 원평의 학수재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할아버지의 묘소는 가묘가 아니야. 서울에서 처형된 할아버지의 시신을 누군가 고향으로 모셔왔대. 그때만 해도 역도의 시신인데 정말 고마운 분이야."
병일씨는 해마다 봄, 가을 두차례씩 학수재에서 후손 지역 유지들과 추모제를 지내왔다. 그러나 올해는 고혈압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 1시간 가까이 옛 시절을 들려주는 중간중간에도 간간히 마른기침을 계속했다.
5. 김 개남
-봉건사회 심장 꿰뚫은 '불꽃 삶', -- 양반을 떨게 한 강경 지도자(남원 등 전라 좌도 일대 점령
한말의 유학자 매천 황현을 이렇게 스고 있다. "도둑들이 처음 고부에서 봉기할 적에 그 괴수는 태인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전라 좌우도에서 태인접이 으뜸이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나이가 40쯤 되었다. 기범의 일가붙이는 대대로 태인에 살았는데 사람들이 도강김씨라고 불렀다. 김시풍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기범은 사납고 무단스러워 난을 일으킬 적에 여러 일가붙이가 모두 따랐기 때문에 도강 김씨에 24접주가 있었다."(오하기문)
어린시절 돼지 서리
김개남의 근거지인 태인이 가장 농민군이 치열하게 일어낫고 또 그 중에 서도 도강 김씨들이 많았는데 이것이 모두 김개남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 이렇게 쓰고 있다."김기범은 스스로 말하기를 꿈에 신인이 개남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름을 개남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태인은 도둑의 소굴이 되어 재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며 한 집에서 말 네댓마리를 길렀으며 총통을 가장 적게 가진 집이 10여 개였다."
김개남이 "남조선을 개벽한다."는 뜻의 이름으로 바꾼 내력과 그의 근거지에 많은 말과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쓰고 있다. 이렇게 김개남은 봉건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열혈에 찬 행동을 보였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타협을 모르고 후퇴가 없는 강경파로 꼽히고 있다.
김개남은 태인땅 산외면 지금실에서 부잣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들처럼 그도 어릴 적에 서당에 다녔는데 어쩐 일인지 병서읽기를 줄겨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소년들과 어울려 곧잘 장난질을 쳐 말썽꾸러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해진다.
예전 어린이들은 곧잘 참외서리 닭서리 같은 놀이 아닌 놀이를 벌인다. 그런에 영주(어릴 때 개남의 이름)는 통 크게도 돼지 서리를 했다는 것이다. 돼지는 한 집의 살림 밑천이 되는데 돼지를 잡아 먹었다면 도둑으로 몰릴 것이 뻔하므로 부모의 애간장을 무척 태웠을 것이다.
그는 자라서 상두재를 넘어서 전주로 넘나들었고 이때 일가붙이인 전주 명장 김시풍과 교분이 두터웠다 한다. 그리고 그가 이 때쯤 사귀던 사람들은 시세에 불평불만을 가진 사람, 기개가 있는 호걸스러운 사람, 그리고 양반이나 벼슬아치보다 고통에 신음하는 서민들이었다 한다.
이런 그였으니 통학에 입도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적어도 전봉준보다 먼저 동학에 들었고 도강 김씨의 자제들을 여기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1890년 초 최시형은 전라도 일대를 자주 순행하며 포덕에 열중했다. 1891년 최시형은 부안을 거쳐 태인땅에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실 김개남의 집에 찾아갔고 이때 김개남은 여름 옷 다섯 벌을 지어 올렸다 한다.
그 뒤 김개남은 각종 집회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그럴 적마다 강경파로 부상했다. 이런 탓으로 1894년 연합군이 형성되어 본격적 봉기가 전개되자 대장 건봉준 다음의 총관령이 되었던 것이다.
전주에서 농민군이 퇴각할 적에 그는 전봉준, 손화중과 길을 달리했다. 그는 전라좌도 곧 지리산 언저리로 진출했다. 그의 지휘구너 아래 든 지역은 남원을 중심으로 임실 장수 무주 등지였다.
공포의 천민부대
그가 남원에 웅거하고 호령할 적엔 천민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노비,백정,승려,장인,재인을 중심으로 한 천민부대였던 것이다. 그들은 온갖 차별의 굴레를 벗기기 위해 아니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한번 활개를 친 것이리라.
집강소 시기 갑오개혁에 의해 이들은 일단 제도적으로는 신분해방을 얻었다. 그러나 양반이나 상전들은 이러한 제도의 변화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동몽군들은 양반집에 딸이 있으면 수건을 문에 걸어놓고 '납폐'라고 하여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딸이 있는 집은 귓속말로 혼약을 맺어 물을 떠놓고는 화촉을 밝혔다. 이것을 '3일혼'이라 불렀다.
청주 병영 공격의 실패
천민들은 양반이나 사족을 가장 미위하여 길에서 갓을 쓴 사람을 만나면 "네가 양반이냐"고 윽박지르며 갓을 벗겨 찢어버리기도 하고 제머리에 얹어 쓰고 다니며 횡행했다. 노비로 농민군을 따르던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노비들도 주인을 겁주며 노비문서를 불태웠고 강제로 양인신분을 얻으려 했다. 더러는 그들의 상전을 묶어 주리를 틀기도 하고 곤장을 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특히 김개남 부대에서 크게 일어났다. 김개남은 이들을 끌어안고 스스로 왕이라 자처했다고 한다. 이런 철저한 반봉건 운동 탓으로 지금까지 김개남은 핍박을 받고 있다. 김개남은 흥선 대원군의 밀사를 꽁꽁 묶어 죽이려 했고 현직 수령들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칼로 쳤으며 전라감사 김학진과도 전혀 대화를 끊고 상대하지 않았다.
어쨌든 9월 2차 봉기가 일어날 적에 그는 전봉준의 공주공격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강력한 직속 농민군을 이끌고 10월에야 장수 금산 진잠을 거쳐 청주 병영의 공격에 나섰다. 그의 청주 병영 공격은 실패했으나 청주 병영의 관군이 공주 전투에 투입되지 못하게 하는 데는 한몫했다.
그는 패전의 장수가 되어 회문산의 깊은 산골 종송리(지금의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느티마을 매부집으로 몸을 숨겼다. 이 마을의 아랫마을에는 옛 친구 임병찬이 살고 있었다.임병찬은 아전 출신이나 부호였고 또 선비나 벼슬아치들과 폭넓은 교유를 트고 있었다.
이런 임병찬에게 김개남은 구명을 부탁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임병찬은 "자네가 숨어있는 곳 보다 이 곳이 안전할 터이니 우리 집으로 오게"라며 안심시켰다 한다. 그리고 재빨리 전주 감영에 연락하였는데 감사 이도재는 강화도 수비병의 종군인 황헌주와 포교를 보내왔다.
황헌주가 김개남이 숨어있는 집을 포위하고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이때 마침 김개남은 측간에서 대변을 보고 있다가 "올 줄 알았네. 똥이나 다 누고 나가겠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기개에 찬 영웅은 잡혔다. 그런데 이곳은 전봉준이 잡힌 피노마을과 불과 20여리 거리에 있다. 두 지도자는 서로 만나 재기를 도모하려 각기 이곳으로 왔다고 일부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서로 만나지 못하고 한 사람은 옛 친구의 밀고로,한 사람은 옛 부하의 밀고로 12월 2일 한날에 잡혔던 것이다. 묘한 인연이요, 운명이었다.
전주서 즉결 처형
아무튼 김개남은 전주로 끌려와 이도재의 심문을 받았다. 이도재는 정식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현지 처형을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김개남의 부하들이 드세어 그를 탈출케 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라거나 그가 처형한 남원 부사 이용헌의 아들 등이 복수하게 해달라는 요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도재가 그를 국문해보니 흥선 대원군의 밀지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하여 이런 사정을 숨기려고 처형했다는 설이 있다.
그를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하고 그의 배를 갈라 간을 큰 동이에 담으니 보통 사람의 것보다 컸다 한다. 원수진 사람들이 그 고기를 빼앗아 씹기도 하고 제사지내기도 했다한다. 그의 머리만 함지박에 담아 서울로 보내져 조리돌렸다.
그리하여 지금 그의 무덤은 없다. 다만 효수된 사진이 전해져 왔다. 이 사진은 그동안 전봉준의 것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근래 김개남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가 남긴 것은 이 사진 뿐일까?
인터뷰/손자 김환옥씨
할아버지 책 태우던 모습 생생
남의 손에 넘어간 집터 되사야 할텐데…
김개남의 손자 환옥(76)씨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인상이었다. 평생을 흙과 살아와 손등은 거칠고 얼굴엔 깊게 골이 팼지만 차분하고 편안했다. '참 곱게 늙으신 어른이구나.'하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할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셨대. 사랑방에서 굵게 말씀하시면 온 마을에 소리가 다 들렸다더군."
환옥씨는 어릴 적 할머니 무릎맡에서 생전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전쟁이 터지고 남편을 잃은 할머니 전주 이씨는 어렵사리 자식을 키우며 90살까지 살다 세상을 떠났다.
"전쟁 전에 논을 45마지기나 지었다던데 그 많은 곡식을 몰려온 군사들이 며칠만에 남김없이 먹어치웠는데도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시기만 했다더군. 그 재산? 물론 다 남의 손에 넘어갔지."
할아버지와 관련해선 가슴 아프고 죄송스런 기억도 많다. 역적의 손자라고 소근거림 당하던 13살 때 방 하나에 가득했던 할아버지 책들을 집안의 어른들이 재앙거리라며 마당에 모아놓고 불 태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처럼 대접받을 줄 알았더라면 몇권의 책이라도 건져 놓는 건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나하나 더듬어내던 환옥씨는 정작 자신이 살아온 데 대해서는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살고 있는 전북 정읍군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의 집 뒤편에 있는 할아버지의 옛 집(남의 손에 넘어간 뒤 30년 쯤 밭으로 변했다)을 되살릴 돈이 없다는 것과 내년에 큰손자 녀석 대학에 보낼 일이 걱정이라는 말을 꺼냈다.
'김개남 장군의 고택'이라는 팻말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뒷밭 이야기가 나오자 환옥씨의 눈이 금새 붉어졌다.
"작년에 전주에서 대학생들이 찾아왔어. 뒷밭 두렁에서 할아버지를 기념해 만들었다는 노랜지 소린지를 하더구만. 젊은 사람들이 어찌도 구슬프게 불러대는지 목이 메이더군."
6.최경선
-황토현,황룡강 전투 선봉장, 전봉준의 팔다리 역할…1,2차 봉기 동해 끈질긴 항전
전봉준과 한날 처형된 최경선의 판결문은 첫째. 전봉준의 모주가 되어 도당을 모아 고부관아에 들어가 난동을 부리고 그곳에서 전라감영의 군사를 격파하였고, 둘째, 정읍 등 여러 고을을 거쳐 전주에 들어가 전투를 벌일적에 전봉준의 팔다리가 되었고,셋째, 전봉준이 2차봉기를 벌일 적에 그 경륜에 참여하여 도당을 모앗다고 그의 '죄상'을 적고 있다.
지주 집안서 태어나
전봉준의 철저한 협조자로 죽음도 함께한 최경선은 태인현 서촌면 월촌리(지금의 정읍 북면)에서 태어났다.아버지 최성룡은 큰 지주였고 그의 조상은 시골에서 대우받을 만한 벼슬을 얻기도 했다.
그는 병석이라는 이름으로 족보에 올라 있다. 원래 이름은 영창이었으나 뒷날 바꾸어 기재한 듯한데 활동을 벌일 적에는 자인 '경선'으로 널리 통했다.
그가 어느때인지 월촌리의 이웃 마을인 주산리로 옮겨가 살았다. 주산리는 태인현 광아가 있는 곳과는 오리,고부의 말목장터와는 십리, 고부 관아와는 삼십여 리의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전봉준보다는 네살 아래였는데 전봉준은 공초에서 5-6년의 친분을 가지고 있노라고 말했다.판결문이 말해주듯 사발통문에도 주동적으로 참여했다. 또 "창의문을 세상에 전포하고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은 그날로 일어났다. 태인 주산리 접주 최경선 집에도 도인 건장자 삼백여 명을 모아가지고 그 밤으로 고부 북면 말목장터 30리를 달려 들어갔다."는 기록(오지영의 동학사)은 최경선이 1차봉기 때 위 세 사람 아래 영솔장이 되었다고 이어서 전한다. 영솔장이란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지휘하는 선봉장이다.
여기에서 황토현 준투를 이야기해 두어야겠다. 1894년 4월 초 농민군들은 백산에서 연합군 4천여 명이 집결해 주변 고을을 석권했다. 이에 전라 감영에서는 무남영의 군사와 보부상군을 보냈다.
농민군들은 부안,태인 등지에 분산해 활동을 벌이면서 무남영군을 유인했다.무남영군과 보부상군 1천 3백여 명은 거들먹거리며 태인, 백산을 거쳐 진격해왔다. 그들은 항용 하는 대로 오는 길에 약탈을 일삼고 보리밭을 짓밟았다.이에 비해 농민군들은 쓰러진 보리를 세워주기도 하고 노인과 아녀자의 짐을 대신 져주기도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관군과 전투를 하는 동안 서로 함지박에 밥을 담아내 농민군을 먹이는 정성으로 그에 답했다. 무남영군과 4월 6일 황토현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일대 승리를 이끌어냈다.
관군과 접전 첫 승리
감영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고,농민군은 남쪽으로 대장기를 돌렸다.이것이 관군과 접전을 벌여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그때 관군의 시체는 황토현 논바닥에 널려 있었는데 시체 주머니에는 약탈한 금은붙이가 가득 들어있었고 더러는 남장을 한 여자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 그자리에는 황토현기념관과 동학혁명탑이 자리잡고 있다.
이어 농민군이 중앙의 홍계훈군을 유인하기 위해 고창,영광,함평을 돌아 장성 황룡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뒤늦게 붸아온 홍계훈의 일부 병력과 전투를 벌여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중앙군대와 싸워 이긴 2차의 승리였다.
이때 영솔장 최경선의 활동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의 생질이 바로 황룡강 전투에서 전사햇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가 전주에서 퇴각하여 집강소 활동을 벌일 적에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활동지역을 달리한다. 나주, 광주 일대에서 후방업무를 맡아본 것이다.
농민군이 통치하던 집강소 기간 전라도의 고을들이 거의 농민군 송아귀에 들어갔는데 나주목만은 처음부터 목사 민종렬과 영장 이원우의 굳건한 방어로 굴복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농민군의 처지로 볼 적에 눈에 박힌 가시였다. 특히 이원우는 최경선 휘하의 농민군 수백명을 공격하여 참살하였다.
이에 최경선은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성 아래 십여 리쯤에 진을 쳤다. 이원으는 사람을 시켜 거짓 항복을 하면서 '나주의 백성들이 성을 지키느라 곤궁해져서 날로 도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소. 오늘 저녁 동쪽 문을 열어놓을 터이니 시각을 어기지 말도록 해주시오.'라고 말햇다.
최경선이 크게 기뻐하며 새벽에 동문 안 10여 보를 들어가니 "갱도에 빠뜨려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꾐에 빠진 줄을 알고 급히 성 바깥으로 물러나왔으나 복병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해서 죽은 놈민군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나주 함락 끝내 실패
최경선은 장성으로 물러나와 전봉준에게 편지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전봉준은 편지를 내던지며 "각기 자기 직책을 다해야 될 뿐이다. 무슨 까닭으로 먼저 싸움을 거는가? 최경선이 말을 듣지 않고 패전했으니 내 도움을 바라지 말라."고 말했다.(황현의 오하기문)
이는 전봉준이 최경선을 장수감으로 다듬기 위해서 짐짓 책임을 지운 것이었다. 뒤에 전봉준은 민종열의 설득에 나선다. 전봉준이 2차 봉기를 준비할 적에 최경선은 광주 지방에서 군수전, 군수미, 그리고 농민군을 모집하여 전봉준에게 보내주는 일을 맡앗다. 전봉준이 삼례의 저막에서 2차봉기의 작전을 짤 적에 뒤늦게 최경선이 달려왔다.
이때 전봉준은 일본군이 남쪽 바다를 통해 전라도 땅으로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손화중, 최경선을 광주로 보내 이를 지키게 했다.
패주 뒤 밀고로 잡혀
다시 광주에 진을 친 최경선은 오권선의 도움을 받으며 다시 나주공격에 나섰다. 이해 10월 21에는 최경선이 이끄는 광주의 농민군 7백여 명이 광주 침산에 진을 치고 나팔을 불고 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며 전진했다. 광주의 농민군과 나주의 민보군은 한 식경을 싸웠으나 뚜럿한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후로도 농민군은 나주의 민보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나주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후 11월 27일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태인 전투를 끝으로 해산하자 그 잔여 농민군은 광주로 와서 손화중, 최경선의 농민군에 합류했다. 이들은 다시 나주공격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어 일본군과 관군은 담양을 거쳐 광주로 진격해왔다. 농민군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최경선은 동복으로 가서 다시 힘을 모아 남평을 차지했다. 이 급보를 받은 나주 초토영에서는 포군 3백 명과 민병을 보냈다. 최경선의 농민군은 능주쪽으로 바져나갔다.
최경선은 동복 벽성리에 숨어 있다가 밀고로 잡혓다. 그의 끈질기고 기백에 찬 활동은 이렇게 해서 끝을 맺었다. 그는 담양의 일본군 부대에 잡혀 왔다가 나주 감옥에 갇혔다. 여러번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하지 못했던 나주 감옥에 잡히는 몸이 되었으니 통한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도 전봉준,손화중과 함께 서울로 끌려와 재판을 받고 한날에 죽었다.
시신 가까스로 수습
그의 백형 낙선은 유력인사였다. 어떤 로비를 벌였는지는 모르나 그의 시체를 꺼내와 태인현 만촌면 유현리에 안장했다. 그리하여 김덕명과 함께 묘가 아닌 참묘에 사후에나마 편안히 누일 수 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후손을 두지 못했고 그의 아내 정씨만 모진 고생을 하며 78살의 수를 누렸다고 한다.
그는 황룡강 전투에서 잃은 생질과 함께 많은 친척과 친구를 동지로 끌어 들였다. 지금 그의 고택이 있던 주산마을에는 그의 흔적이 전혀 없다.
인터뷰/30여년 농민전쟁 연구 최현식 씨
일본가서 자료 찾고 싶어
젊은 시절 전봉준에 매료… 전국 누벼
동학농민 전쟁 연구에서 최현식(70, 정읍군 문화원장)씨가 차지하는 위치는 각별하다. 아무런 대가 없이 농민전쟁의 흔적들을 밟아온 30여 년의 세월을 견줄 사람이 없는데다, 그 사이 발굴한 사실들 모두가 전쟁의 실체를 밝히는 데 없어서는 안될 수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최씨는 농민전쟁 연구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
"지방지 기자생활을 하던 56년엔가 정읍군지에 실린 <전봉준실기>가 날 붙들었지. 36년에 장봉선이라는 사람이 쓴 10쪽이 채 안되는 글이야. 내 고집대로 파고들다 보니 세월이 훌쩍 가버렸어. 게다가 역사란 게 끝이 없쟎아. 하면 할 수록 자꾸 의문이 생겨서." 그가 연구를 시작한 60년대 초만 해도 웃지 못할 일들이 많았다. 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황토현에 갑오농민혁명 기념탑을 세우더니 선거 한 달을 앞두고 부랴부랴 제막식을 가졌다.
"박의장의 아버지가 동학의 접주였다나.그런데 그 자라에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전봉준의 딸이라고 나타나서 식장이 발칵 뒤집혔어. 물론 나중에 따져보니 가짜로 밝혀졌지. 나이로 보아 전봉준이 죽고 난 뒤에 태어났더라구."
그 무렵부터 최씨는 발로 자료를 모았다. 전라도, 충청도 일대를 수없이 돌아다니며 옛 사실을 일러 줄 노인들을 만났고 국립 도서관, 규장각 등에서 옛 문서를 뒤적거렸다. 그런 노력들이 80년 <갑오 동학 혁명사>로 열매를 맺었다. 3백 60여 쪽 분량의 이 책은 농민전쟁의 전개과정과 그 양상을 전쟁의 현장을 밟아가며 재구성해낸 사실상 최초의 기록이다. 그는 요즘도 농민전쟁의 자료를 모으는 일에 열심이다. 70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표정에 힘이 있고 활력이 넘쳐 보인다. 사정이 허락하면 일본의 규슈대학이나 교토 대학에서 그쪽 자료를 연구해 보고 싶다는 바람을 밝힌 그는 요즘 연구자들이 "새로운 사실을 발굴해내기 보다는 공개된 사실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열중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고 말했다.
7. 김인배
-영,호남 두루 누빈 '청년 장군', 24살의 '영호 대접주'… 순천, 진주 중심 10만 병력 지휘
김인배는 영남 호남을 모두 관활한다는 영호대접주가 되어 크게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비록 '영호대접주'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순천과 진주를 축으로 한 영남 호남의 이랫지역의 농민군 지도자로 군림해 왔다.
그는 24살의 나이로 동학농민군 10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어떤 활동을 벌인 까닭일까? 그리고 남쪽 일대에 무수한 영웅적 전설을 남긴 배경은 무엇일까?
김덕명과 봉기 합류
김인배는 본명이 용배로 전북 금구현(지금의 김제군 봉남면 화봉리)에서 태어났다. 그도 여느 소년처럼 글방을 다니며 글을 익혔는데 글을 잘하고 똑똑해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장성하면서 현실에 눈을 더 어느때인지 동학에 입도했다. 1894년 백산 봉기 때부터 같은 고장 출신인 김덕명과 함께 많은 농민군을 거느리고 합류했다.
전주에서 농민군이 퇴각할 적에 그에게는 새로운 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고향 금구를 떠나 남쪽으로 진출했던 것이다 .이런 기록이 있다.
"작년 6월 이후 금구의 도둑 우두머리 김인배가 이끄는 무리는 각처의 비도 10만이 되었는데 성중(순천을 말함)에 들어와 영호도회소를 설치하고 관가의 군기를 빼앗고 남의 돈과 재물을 빼앗므면서 감히 '군수'라고 일컬으며 돈을 배당하고 곡식 거두기를 마음대로 했다."(순무선봉진등록)
어쨌든 김인배는 순천에 본부를 두고 현지의 유하덕을 도접주로 삼아 영남 호남의 대접주가 되었다. 그리고 경상도쪽 섬진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럴 적에 하동의 농민들과 지리산의 도둑(의적)과 이 일대의 상인들은 부당한 관리의 수탈에 맞서 일대 봉기에 참여했다. 이에 지리산 포수를 중심으로 한 민포군은 이들의 근거지인 지리산 화개골을 분탕질하고 닥치는대로 살육했다. 이들은 광양으로 달아나서 김인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김인배와 유하덕은 1만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9월 1일 하동을 건넜는데 이때 이런 일화를 남기고 있다. 김인배는 부적을 하나 써서 수탉의 가슴에 붙이고 백보 쯤 떨어져 놓게 했다. 그리고 "총은 쏘아도 닭이 맞지 않을 것이오. 접장(이들이 서로를 존중해서 부르는 말)들은 내 부적의 효험을 믿으시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자기 심복을 시켜 총 세발을 쏘았으나 수탉은 한발도 맞지 않았다.(황현의 오하기문)
모두들 그 효험을 믿고 부적을 만들어 옷에 붙이고 전투에 나섰다. 이들은 2일 하동의 앞뒤 산을 점령하고 치열한 싸움을 벌여 일대 승리를 장식했다. 김인배군은 곧바로 민포군의 소굴인 화개동에 들어가 5백여 채의 집을 불태웠다.
이 하동 전투의 승리 소식은 곧바로 진주 사천 곤양 등지로 전해졌다. 진주 일대의 농민군들은 지리산 밑 덕산을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뚜렷한 조직과 구심점이 없었는데 하동의 소식을 듣고 기세가 크게 올랐다.
김인배는 이름 그대로 영호대접주로서 이 일대의 군사 행정의 중심지인 진주로 진격했다. 하동 전투에서 승리한 날 진주에서는 각 동리의 대표 13명 씩 나와 8일 평리 광탄진에 모여 대소사를 의논하자는 방문이 나붙었다.
8일의 군중대회는 예정대로 열렸고 진주의 농민군은 김인배를 받들고 진주성을 차지했다. 경상도의 두 병영 중 하나가 떨어진 것이다. 이때 진주 병사 민준호는 영장을 보내 김인배를 맞이하게 하였고 김인배가 병영에 들어오자 지난날 '도인' 죽인 죄를 사죄하면서 융숭하게 대접했다.(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민준호 편에 나옴)
그후 영남과 호남의 연합농민군은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벼슬아치의 협조를 설득했고 특히 힘을 합해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역설했다. 이때의 정황을 두고 부산의 일본군에게 이런 보고가 날아든다. "아무래도 일본군은 진주에 진을 치고 지방병의 기세를 돕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비들은 아랫구실아치와 몰락한 양반붙이의 부랑분자에 불과합니다. 아랫구실아치는 명령을 하달하는 벼슬아치와 가까운 자들입니다. 그들은 외촌에 있는 동비들의 이목이 되어 관가의 동정을 모두 소개하였습니다. " 모두 한통속이란 뜻이다.
세 차례 여수 공격 실패
이렇게 해서 일본군의 진격이 있었고 일본군은 고승당산의 전투에 이어 하동 등지에서 무수한 농민군을 살육했다. (민준호 편에 자세히 나옴)
이 무렵 김인배는 순천에 물러나 있다가 하동의 농민군으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았다. 김인배는 8만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섬진강을 건너갔다. 10월 22일 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일본군과 관군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은 김인배군은 피를 튀기며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흩어졌다. 김인배는 산속 후미진 곳에 숨어 소나무 가지를 꺾어 얼굴을 가리고 새벽을 기다렸다. 그는 맨발로 빗속을 馰고 광양으로 달아났다. 이것이 김인배로서는 최초의 패전이었다.
김인배는 다시 순천으로 와서 남은 농민군을 수습하여 전라 좌수영(여수)의 공격에 나섰다. 김인배는 여수 앞바다를 틀어막고 진남관의 뒷산인 종고산에 진을 쳤다. 11월 초순의 날씨는 매우 추웠다. 농민군들은 밥을 얻어먹으려고 민가로 내려갔기 때문에 대오가 흩어졌다. 농민군들은 양곡이 떨어져 밥을 지을 수 없었고, 모두 피난가서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을 수도 없었다. 더욱이 밥을 지어 가져오면 얼어 터져서 목에 넘길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김인배는 농민군을 이끌고 순천으로 돌아왔다.
그 6일 뒤에 다시 좌수영 공격에 나섰으나 방어가 견고하여 며칠 싸우고 다시 돌아왔다. 그 4일 뒤인 12월 2일 또 한차례 좌수영 공격에 나섰다. 전력을 다해 최후의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 군함 축파호의 육전대가 상륙하여 공격해 왔고 바다 쪽에서도 일본군의 공격이 치열했다.
끝내 농민군은 좌수영 함락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그러면 왜 김인배는 세차례나 사력을 다해 좌수영 공격에 나섰던가? 일본군과 관군이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다는 소문을 듣고 좌수영을 차지하여 지구전을 벌인다는 계획이었고 만일 오래 좌수영을 차지할 수 없게 되면 바다를 통해 섬으로 들어가겠다는 의도였다 한다. 참으로 끈질기고 의욕적인 작전이었으나 사정은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동지들과 최후" 유언
좌수영에서 돌아온 김인배는 이제 순천에 근거지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광양으로 진출했다. 김인배가 좌수영을 공격할 적에 여수의 상인들은 '백성'의 이름을 빌어 일본 축파호 함장에게 이런 글을 보낸다.
" 저 흉측한 적도들은 다 섬멸하지 않고 갑자기 군함이 떠나려고 하니 만일 저 무리들을 이와 같이 놓아주고 병함이 되돌아간다면 그들은 즉시 경내를 침범하여 본영 안의 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단연 그치지 않을 것이니 특별히 하해 같은 덕을 베푸시어 5일만 더 기다렸다가 많은 백성들을 살게 해주시기 천만번 비옵는 바입니다."
한 겨레붙이의 생각이 이처럼 달랐던 것이다. 이런 백성은 살아남았으나 김인배는 붙잡힌 뒤 광양 객사에 목이 효수되어 빛나는 활동을 마감했다. 김인배는 당시 일을 그르친 줄 알고 함께 활동하던 조씨 성의 처남에게
"장부가 사자에서 죽음을 얻은 것은 오직 떳떳한 일이오.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 나는 함께 설고 함께 죽기를 맹세한 동지들과 최후를 같이 할 것이니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고 말했다.
이것이 열혈청년 김인배의 유언인 셈이었다. 처남은 살아와서 이 말을 전해주었다.
인터뷰 / 증손자 김영중씨
"효수 현장 등 돌며 10년 자료 수집 "
꿋꿋하게 사신 증조할머니 갈수록 그리워
"증조 할아버지가 일본군에 붙잡혔다는 소식에 틀림없이 돌아가셨거니 생각햇다더군. 하지만 제삿날을 정할 수가 있나. 그래 상할머니가 떡시루에 흰 쌀가루를 깔고 매일 아침 들여다 봤는데 12월 9일 쌀 가루에 새발자국이 뚜렷이 나타나더래. 그날 이후 지금까지 증조할아버지 제삿날이 12월 9일이야."
농민전쟁 당시 영호대접주로 용맹을 떨친 김인배의 증손자 김영중(61. 철도공업주식회사 부회장)씨가 어릴 적 상할머니(증조할머니)에게 들은 증조할아버지의 기일에 얽힌 얘기다. (황토흙,떡시루 등에 나타나는 표시를 이용해 종잡을 수 없는 시간이나 장소를 점치는 것은 전통 제수굿의 하나다.) 김씨에 따르면 김제 조씨 성의 상할머니는 여느 농민군 지도자의 가족들이 그랬듯이 힘겹게 살았다. 전쟁이 일어나자 두 아들(전쟁이 일어난 그해 태어난 둘째 아들은 끝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해 유복자가 됐다)을 인근 친척 집에 맞긴 상할머니는 옷감을 장사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금구현의 옛집으로 돌아와서도 개 짖는 소리만 들리면 집 뒤편 대밭으로 자식들 감추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억척스레 일한 상할머니 덕에 살림 규모가 늘었고, 김씨는 어느 정도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지난 63년 지금의 철도공업주식회사에 들어와 줄곧 근무해 오면서 생활도 안정되었다. 경제적으로 틀이 잡히자 증조할어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0여 년 전부터 증조할아버지가 효수당한 광양, 일본군, 관군과 격전을 벌인 여수, 고향인 금구현(지금의 전북 김제군 봉남면) 등을 돌며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증조할아버지의 자료를 찾으로 다닐수록 더욱 커지는 건 상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야. 내가 4살 되던 핸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10년 가까이 상할머니가 날 키우셨지. 그 험한 세월을 그렇게 꿋꿋하게 사셨으니. 상할머니는 분명 넘편 못지않은 여장부셨어."
8. 최달곤
-신출귀몰 '전봉준의 암행어사', 통문·탐관오리 명단 지니고 영남 곳곳 수령들 질책
전라도를 중심으로 농민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경상도 땅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벌어졌을까? 부산 일대에서는 1894년 7월 경부터 일본군용 전선의 전주가 뽑히기도 하고 일본군 장교가 습격을 당해 살해되기도 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산발적인 봉기마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럴 때인 8월 27일 동래부 관아에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동래 부사 후한 대접
동학당의 감찰사라고 자칭하는 두사람이 소년 하나를 데리고 동래부사의 면회를 요청한 것이다. 그들의 행장에는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우두머리인 '전봉준'의 이름이 적힌 격문과 함께 놀랍게도 각지의 탐학한 관리와 토호들의 명단을 적은 <염찰기>라는 치부책이 들어 있었다.
둥래 부사 민영돈은 이들을 방안으로 맞아들이고 주위 사람을 물리친 뒤 몇 시간동안 밀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들에게 술을 곁들여 후한 대접을 하고 다음 날 오후 떠날 적에 말 두필과 상당한 여비까지 내주었다.
이 사실은 즉각 일본이 박아둔 밀정에 의해 부산 주재 일본 총영사에게 보고되었다. 일본 영사는 이를 엄중히 항의했으나 동래부사는 그런 사실이 없으며 다만 어떤 정탐객이 이방을 찾아와 공갈협박을 일삼다 갔다고 회답했다.(주한일본공사관 기록)
일본쪽에서는 이들을 계속 추적한 끝에 울산에서 잡아 동래 감리서에 구금하고 문초를 시작했다. 이들의 신원은 최달곤, 최병두, 김만수로 밝혀졌다.
그 가운데 우두머리인 최달곤은 하동 사람으로 학봉이라는 변성명을 사용했다. 그는 충청도,전라도의 농민봉기 소식을 들은 6월 말경 집을 나와 하기장터에서 떠돌이 소년 김만수를 만났다. 그는 소년 김만수에게 "행장을 하고 나를 따라오라. 살길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최달곤은 이를테면 김만수를 수행비서로 삼아 곤양·덕산·단성·함안·창원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지방의 실정을 살피고 못된 구실아치의 행패와 이름을 적었다.
특히 함안에서는 그곳 좌수와 함께 수령을 만나 "영감께서는 목민관으로서 이와 같이 흉년을 당한 백성들에게 부세를 독촉하여 그 고통을 견딜 수 없게 하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따지며 시정을 촉구했다.
이어 8월 3일에는 마산포로 들어갔다.그리고 전운사 정병하에게 "영남도민의 목숨과 생활이 영감의 손에 달려있는데 지금 모두 죽이려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수세가 지연되면 해당 관리는 주리를 틀고 구실아치는 형벌을 시행한다 하니 이런 흉년에 어찌 이처럼 수세 독촉이 심한가?"라고 힐난했다. 세무 감사관에게도 그 책임을 엄하게 물어 이에 대한 시정을 약속받았다.
계속해 진해에서 수령의 불법을 나무란 뒤 고성으로 향했다. 이때의 사실을 고성부사 오흥묵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하동에 산다는 최학봉이 남원 전봉준 접소의 공문을 가지고 각 읍의 정치를 살펴보기 위해 6월 그믐께부터 각 지역을 순행한다고 밝혔다. 그리고는 '들으니 고성에서 민요가 일어났다기에 찾아왔는데 사또를 보니 나이와 덕이 노성해서 잘 던련하고 체신을 지킬 것 같은데 무슨 까닭으로 민요가 일어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라고 말했다.
이어 공문을 보니 수령의 정치와 민간 토호의 잘못을 살피고 또 이달 15일 영남으 螡각 접이 의령 백곡촌에 모여 폐단을 바로잡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 도인은 선정을 당부하고 물러갔다.
(오흥묵의 <고성총쇄록>)
"폐정 고치겠다" 약속
당시 오흥묵은 폐정을 고치겠다고 약속하여 봉기의 확대를 막았다. 실제로 그는 구실아치들이 잘못이 없다고 변명하며 폐단을 바로잡기를 소홀히 하려들자 엄단하겠다고 공표했다.
최달곤은 통영을 거쳐 거제로 나아가 그곳에서 고향사람 김병두와 합류한다. (김병두는 당시 의약상으로 약값을 수금하러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실제 내력을 알 방도가 없다)최달곤은 거제 수령을 만난 뒤 김병두와 함께 장승포·웅천을 거쳐 김해에 도착했다.
김해에서도 마침 민요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수령을 만나 "봄이 되기 전에도 민요가 있었는데 지금 또 이런 소요가 일어나니 백성들의 원망이 없다면 어찌 이 경내에서 일어나겠는가? 감옥에 갇힌 백성들을 석방해 주어야 한다." 고 말했다.
그길로 8월 25일 동래로 와서 남문 밖 병영거리 주점에 유숙하면서 동래 부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최달곤 일행은 이처럼 바닷가쪽을 골골샅샅 쑤시고 다니며 페정의 시정을 요구했고 그 성과도 컸다. 특히 전봉준의 통문 혹은 공문은 큰 역할을 했다. 부정한 인사의 이름을 적은 염찰기는 암행어사의 행동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동래에서 나와 기장으로 옮겼다. 마침 기장현의 좌천장터에서 큰 민요가 일어났다. 민요는 며칠간 계속됐다. 최달곤은 좌천장터로 뛰어가 민요의 주동자들 가운데 대표를 뽑아 함께 기장현감을 만나 페막을 시정케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대표자들은 나서지 않았다. 대신 구실아치와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울산민란 등 해결 자청
그리하여 최달곤들은 기장현감을 찾아가 그 해결을 자청하고 나선 다음 민요의 장두를 만나 설득을 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울산으로 갔다. 울산도 민요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이때에도 을산부사를 면회하고 힐문했다.
최달곤은 활동의 후반기를 민요의 한복판에서 보냈다. 김해·기장· 울산 등지에서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폐막의 해결을 자청했던 것이다. 최달곤은 울산의 경상좌수영에서 병사를 만나려던 중 그를 추적한 일본쪽의 지시를 받은 동래의 포교들에게 체포됐다.
일본 "가짜 동학당" 기록
동래감리서의 순사는최달곤 등을 닥달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재물을 갈취하기 위해 벌인 행동이라고 변명했다. 최달곤이 끝까지 동학 관련성을 부인하자 부산의 일본 총영사는 이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회유하려던 계획을 중지시키고 서울의 오도리 공사에게 그 전말을 보고했다.
총영사는 세사람이 한문을 모르는 무식꾼인데다가 진술이 별로 어긋나지 않으므로 전봉준이 보낸 염찰사나 순회원이 아닌 단순한 가짜 동학당원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면서 보고 끝에 이렇게 적고 있다.
" 양인을 동학당이라고 인정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으며 만분의 일이라도 같은 당원이라 할지라도 결코 그 영수라 할만한 인물이 아니므로 우리나라에 끌고간들 그럴만한 이익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하니 만약 도항시키려는 생각이 있으시면 두사람의 희망으로 한 것처럼 하여 우리나라로 가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이므로 부디 훈시 있으시기를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
그러나 이 공사관 기록에서는 어긋나는 점이 ꃹ가지 발견된다. 가짜 동학당이라면 어떻게 위험한 지역을 두루 다니며 패악의 시정을 요구할 수 있었겠는가? 또 당시 아무리 동학 농민군을 무서워했다지만 고성부사 오흥묵, 전운사 정병하, 동래부사 민영돈 같은 유명한 지방관을 회유할 수 있었겠는가 ?
정체 숨겼을 가능성
오히려 민영돈, 정병하 등이 자기들의 행동을 숨기기 위해 이들을 단순한 범죄자로 꾸몄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염찰기>에 동래부 인사가 빠져있는 사실도 이런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최달곤 등도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려 했을 것이다.
최달곤 등이 동래감리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일본으로 끌려갔는지 아니면 죽임을 당했는지 뒷날의 행적을 알려주는 기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아무큰 단편적으로 전해진 이들의 활동에서 동학농민전쟁 당시 이 일대의 실정을 짐작할 수 있다.
농민전쟁 당시 부산은 왜 잠잠했나
일본군 주둔 … 동학 조직 미약
"지역운동사 연구미흡해 안밝혀져" 주장도
최달곤이 동래부사 민영돈을 만나 페정의 시정을 요구하던 1894년은 농민전쟁이 일어나는 한편 일본이 부산에 병참부를 설치해 3백여 명의 무장병력을 주둔시킨 해이다. 일본은 군함까지 끌고와 띄워놓고 있었다. 이 시기 사회운동사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갑오농민전쟁이 부산 일대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농민전쟁과 관련해 이 지역의 상황을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이 아직 발굴되지 않는 것인지, 실제로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는지조차 확증할 길이 없는 상태이다. "지난 89년 부산시사 발간에 참여한 부산대 김동철 교수(사학)는 '개항기의 부산'이라는 주제아래 1876년 ∼ 1910년의 부산 역사를 기술하면서 느낀 당혹감을 이렇게 토로했다.
학계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는 시각이 우세한 편이다. 이런 판단은 크게는 일본이 이 지역 일대를 장악해 농민전쟁의 가능성을 봉쇄했으리라는 추정에 근거해왔다. 서울대 신용하 교수(사회학)는, "일본은 진주 등 서부경남지역의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부산지역의 병력을 토벌대로 파견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 일대에서 큰 규모의 봉기가 있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민전쟁의 주요한 줄기를 이룬 동학조직의 규모를 그 이유로 설명하는 시각도 있다. 경상도의 경우 경북지방과 진주 하동 등 서부경남 지역은 곳에 따라 동학의 영향력이 컸으나 부산 일대는 동학조직의 규모가 작아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농민전쟁의 주무대인 전라도 지역에 가깝고 동학조직의 세가 강했던 서부경남 지역은 어느 지역보다 치열하게 전쟁으르 치렀다.
그러나 이 지역 운동사에 대한 연구의 부족을 지적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당시 일본은 부산 일대에 깊숙히 침투해 상권을 거의 다 장악하는 등 조선에 대한 수탈을 한층 강화하고 있었다. " 농민전쟁이 터질 당시 부산 일대의 농민은 봉건적 수탈과 제국주의적 수탈의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상식적으로 적지 않은 저항의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라는 김동철 교수는 '부산의 침묵'을 "이 지역 운동사가 거의 연구되지 않아 자료가 아직 발굴되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역사의 장막 뒤에서 언뜻 드러나는 '의문의 사나이' 최달곤의 정체 역시 그러한 연구 진척에 따라 밝혀질 것이다.
9. 민준호
-농민과 함께한 의로운 무관, 진주병사 부임뒤 동학군 돕고 토벌 거부하다 해임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1894년 12월 이후 각지 수령이나 군사 책임자의 잘못과 공로를 가릴 적에 진주병사 민준호에 대해서 "헛되이 어리석고 무서운 생각을 품고서 비류들을 후대했으며 하동에서 급박함을 고하는데도 하나의 군졸도 보내지 않았으니 잡아다가 문초하여 중한 죄를 내리라."(고종실록)는 조처를 내렸다.
민준호는 격전이 크게 벌어졌던 진주의 병사로서 실상을 알아보면 위의 내용보다 훨씬 치밀하게 농민군을 도와주거나 벼슬아치로서는 드물게 농민군의 지지를 받았다.
선정 베풀어 칭송
그러면 민준호는 어떤 내력을 지닌 인물인가? 그의 집안은 여흥 민씨로 대대로 무과에 합격하여 무관벼슬을 지냈다. 그러니 문과 출신보다 한 등급 낮추어 보는 신분인 셈이다. 그가 25살에 무과에 합격하였을 적에 민씨세력은 아직 힘을 잡지 못했다. 그 뒤에 방어사와 경리청 영관 등을 지내고 1894년 정월에 진주병사로 부임했다.
이때쯤 여흥 민씨들이 고종의 왕비 민비의 힘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고 있었으니 그가 민씨 세도의 덕을 보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가 부임하여 아전 병사와는 달리 많은 선정을 베푼 탓에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한다. 아마 이렇게 끝났으면 그의 송덕비가 진주병영 앞에 버젓이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상황은 그러질 못했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전라도 충청도에 이어 진주 일대의 농민군이 크게 진동했다. 전통적으로 지리산을 북쪽에 두고 있는 진주는 민란을 자주 겪었다. 그해 4월에 들어 고부의 봉기 소식이 이 일대 고을에 널리 퍼졌고 이어 전봉준 등이 무장에서 선포한 포고문 등이 그대로 전해졌고 전주감영이 함락되었다는 소식도 날아들었다.(오흥묵의 고성촉쇄록)
이렇게 되자 이곳의 농민군들도 소집단으로 모여 여기저기에서 출몰했다. 이들은 고을을 접수하려고도 아니하고 관군과 대진하여 싸우려고도 아니했다. 순전히 유격전술을 쓰고 있었다.
이들은 덕산(지금의 산청군)을 근거지로 하여 삼장·시천· 첨암·사월 등 지리산 주변을 넘나들었다. 이들은 바다쪽과는 달리 하나의 근거지를 두고 구실아치,양반,토호를 징치하면서 치고 빠졌다.
그리하여 외무대신인 김윤식은 이곳 실정을 "이 무리들은 병사를 포진하여 체포하려고 하면 모두 쥐처럼 도망을 치고 체포를 중지하면 새처럼 모여 변란을 일으키고 있으니…."라고 했고 "개똥벌레만한 불꽃이 맹호보다 더 뜨겁고 하루살이 같은 벌레가 표범과 이리보다 더 독한 것 같다."고 일본쪽에 보고했다. (주한임본공사관 기록 중에서 경상우도 동학당 요한 경황과 이에 대한 의견)
그런데도 이 일대 치안을 맡고 있는 민준호는 이런 준동을 금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기세를 돋워주고 있다고 김윤식은 보고하고 있다. 다시말해 민준호는 진주병영의 군사를 풀어 이들을 체포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농민군의 활동을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윤식은 일본 군대가 진주에 진주하여 농민군의 근거지를 소탕해야 더 큰 화를 모면할 수 있다고 일본군 출병을 요구했다.
9월에 들어서는 더 큰 소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9월 2일에 진주 성내 곳곳에 방문이 걸렸는데 진주 성내 73곳의 이장들은 각기 13명씩 인솔하고 평거 광탄진에 8일 모이라는 내용이었다. 만일 참석하지 않으면 처벌이 있을 것이라는 단서가 붙기도 했다.
이때 순천에 있는 영호대접주 김인배는 광양을 거쳐 하동군에 진출해서 민포군을 깨고 계속해서 진주로 진출했다. 이때 김인배와 진주의 농민군은 서로 연락하여 연합작전으 편 것으로 보인다.
성 점령 농민군 영접
이럴 적에 민준호는 평거 광탄진의 군중대회를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동부사의 긴급한 원병요청을 외면하고 있었다. 하동에서는 진주와 통영에 급보를 보냈는데 진주병영에서는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햇고 통영에서는 무기를 공급받았다.
김인배의 농민군과 진주의 농민군은 9월 8일 진주성을 점령했다. 경상우도의 요충지가 농민군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민준호는 영장을 보내 이들을 정중히 맞이하였고 농민군들이 병영 앞에 이르자 이교 30여 명을 이끌고 출영하여 성내로 안내하고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였다.
이들 농민군이 진주성을 점령하던날 부산 일본병참사령부에서는 진주 출병에 나섰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대구감영의 판관으로 후세에 종두를 도입한 인물로 이름이 남은 지석영을 도포사로 하여 앞길을 인도하게 하고 통영 마산포를 거쳐 하동으로 상륙했다.
진주의 농민군들에게 이 소식은 곧바로 전해졌다. 농민군들은 9월 10일 통문을 돌려 큰동네에서는 30명, 작은 동네에서는 20명, 아주 작은 동네에서는 10명 씩 인솔하여 복흥대치(지금 하동군 금남면 금오산 아래의 한 재)로 모여서 민폐를 교정하자고 했다. 이들이 다음의 고성산 전투의 주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날, 경상우도의 각 고을에 띄우는 방문이 나돌았는데 여기에는 봉기의 대의를 설명하고 이렇게 적고 있다. " 진주는 서른 세 고을 중에서 대절도사의 영문이며 삼남의 요충지가 되는 곳입니다. 지금 우리 병사인 민공을 보면, 공은 사심이 없는 분으로 온화하고 순량하며 청백하고 정직하여 지난 병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분은 대영문의 임무를 맡을 만한 사람으로 경상우도 토민들의 중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임한 지 1년도 채 못되었는데 지금 들은 바에 의하면 왜인과의 약조에 따라 선출된 새 병사가 부임한다고 하니 그 일이 비록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 도류(道流)들이 왜인을 섬멸하고 그 잔당을 깡그리 토벌할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이쪽 방면의 귀임을 질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이 해임 반대
그리고 민준호가 큰 인물임을 말하고 이렇게 쓰고 있다. "옛 병사는 그 임기동안 유임해주기를 바라고 새 병사는 우리 지역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뜻에서 통문을 발송하여 진주에서 대회를 갖고자 하오니 도민들은 경동하지 말고 옛날과 같이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올바른 일일 것입니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I )
진주병사의 교체소식이 들리자 그 유임을 위해 한재대회와는 별도의 진주대회를 추진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동학농민전쟁 기간을 통틀어 이곳 외에서는 발견할 수 없은 사건이었다.
어쨋든 일본근은 하동에서 농민군을 전라도로 몰아내고 진주성에 진주했다. 농민군은 하동접주 여장협, 진주접주 전희순 등의 지휘 아래 진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단성에 모였다. 이들 5천여 명은 수곡장터로 진출했는데 일본군은 즉각 공격에 나섰다. 농민군은 해발 185m 높이의 고성산(고승당산, 고시랑산이라고도 부름)에 진을 치고 10월 14일 격전을 벌였으나 끝내 패전하여 많은 시체를 남기고 흩어졌다.
일본군은 ' 비적 186명이 즉사' 라고 보고했으나 몇천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일대에서는 10월 13일 한날에 제사 지내는 후손들이 무수하다. (진양 향토사 연구소장 김범수씨의 증언) 그런데 이 결전은 순전히 일본군과 농민군의 싸움이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병사 민준호나 토포사 지석영과 관군은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진주병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훗날 행적 안알려져
민준호는 결국 병사에서 해임되었으며 아쉽게도 해임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면 민준호는 왜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농민군을 돕고 토벌에 나서지 않았던가? 일본 세력을 거부하고 농민군의 반외세 항쟁에 동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모습은 순창군수 민충식, 영호좌선봉장 이규태, 전라감사 김학진 등에게서도 발견된다. 나라가 침략을 당할 적에 썩은 장수와 벼슬아치만 있었던 것이 아님이 증명된다.
산성 성역화로 원혼 위로를
일본군에 수천명 학살된 격전 … 보존 시급
고성산 전투 연구 향토사학자 김범수씨
"이 일대에선 고성산이라면 잘 몰라. 고시랑산이라고 부르지. 밤에 비가 오거나 흐릴 때면 '고시랑고시랑'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래. 이제 생각하니 그 소리는 일본군에 패해 억울하게 죽은 농민군들의 혼령이 울어대는 곡소리인지도 몰라."
진주·하동·사천 등 서부경남 일대의 농민군 5천여 명이 일본군과 피어린 전투를 벌였던 경남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고성산의 이름에 관해 향토사학자 김범수(65.진양향토사 연구소장)씨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현재 진주 동학군 고성산성 대일군 전적지 보존회 회장이기도 한 김씨는 80년대 말 우연찮게 이 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경찰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 평소 관심사인 지방문화를 연구하던 중 이 일대에 많은 사람들이 묘소도 없이 음력 10월 13일 한날에 제사를 지내는 '기이한'사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 사람들을 하나, 둘 찾아다니며 고성산성이 동학농민전쟁 때 엄청난 격전지엿다는 것을 알았지. 10월 14일은 그들의 선조들이 일본군에 패해 형체조차 찾을 수 없이 불태워진 날이고."
그 이후 김씨의 관심은 고성산에 집중됐다. 89년 8월 고성산 일대의 8개 시군에 흩어진 후손 70여 명을 모아 보존회를 결성해 후손이 아닌 자신이 회장 자리까지 맡았다. 그 사이 "당시 일본군의 기록도 확인했고, 몇 십차례의 답사 끝에 농민군이 쌓았던 산성의 흔적과 장군바위 등 유적도 찾아냈다. 이런 연구 결과들을 모아 91년 '진주 동학군 대일군 전투'라는 논문도 써냈다.
김씨는 지난 17일 보존회 이름으로 하동 군청에 고성산성의 사적지 지정을 요청하는신청서를 제출하는 등 이 지역을 성역화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전투 99주년인 오는 27일(음 10월 14일)에는 산 중턱에서 5백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농민군 희생자 위령 천도제를 지낼 예정이다. 그가 고성산성의 성역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고성산 전투가 순순하게 일본군과 벌인 전투였기 때문이다.
"고성산성 전투는 여느 전투와는 달리 동족끼리의 유혈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농민전쟁을 통틀어 반외세와 민족자주의 정신이 이곳보다 더 훌륭하게 구현된 곳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10. 오권선(1861-?)
-끈질긴 투혼의 나주 대접주, 민종열이 지킨 나주성 일곱차례 공격 …끝내 실패
나주 지방의 노인들은 갑오년 당시 "잘났다 오중문, 글 잘한다 오중문, 쌈 잘한다 오중문"이라는 말이 이 지방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활약상 입으로 전해져
중문은 오권선의 자인데 이곳에서는 오권선보다 오중문으로 널리 통한다. 이 오권선은 나부목의 유림 이병수가 관변의 시각으로 기록한 문집에도 모습을 나타낸다.
"동도 괴수 오권선은 곧 우리 고을 삼가리 사람인데 평소 부랑배로 오염된지 오래되었다. 저네는 이른바 옛 동학의 대접주로 도당 수천 명이 고부 장성 전주에서 세차례 접전을 벌일 적에 사납게 합세한 자이다. "(이병수의 금성정의록)
여기에는 그의 행정을 말하면서 부랑배로 일컫고 있다. 보는 눈에 따라 이렇게 어긋나게 평가된다. 아무튼 오권선은 나주군 삼가면 세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남규는 부호일 뿐만 아니라 나주 성내에서는 그곳 자제들의 교육을 맡은 이름난 선비였다. 이런 아버지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니 호강스럽게 자라났고 또 "글 잘한다."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촉망을 받았던 것이다.
그가 어는 때에 동학접주가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위에서 본대로 1894년 봄 백산기포에 참여하여 장성전투와 전주점령에 가담해 크게 활약했다. 전주에서 물러나와 농민군이 집강소 활동을 벌일 적에 그는 나주 대접주가 되었던 것이다. 나주는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함평을 점령하고 나서 나주공격을 피하고 장성으로 돌아 올라온 뒤 집강소 기간에도 함락되지 않았다.
나주목사 민종렬과 그곳 민보군은 성의 방비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나주는 그만큼 양반 또는 유림세력이 드센 곳이었다. 오권선의 집안인 오씨들도 삼가면을 중심으로 본양 도림 일대에 수백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토반이었다. 이 오씨들도 두 쪽이 나서 각기 싸움에 가담했다.
이 기간 오권선의 활약상을 또 이렇게 전한다. " 이때에 이르러 기어코 나주읍내에 들어오려고 백가지 꾀로 공격하려 하였는데 5-6월 사이에는 매일이다시피 더욱 창궐하였다. 고을의 북쪽 40리는 모조리 큰 고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들이 행군할 적에 나팔을 불고 대포를 쏘았으며 큰 깃발을 내걸고 좋은 말을 타고 다녔다. 평림의 세장터와 북창 등지에서 백성을 약탈하고 소를 잡아먹고 양식을 빼앗으면서 낮과 밤으로 배불리 먹고 떠들어댔다. 그리하여 마을마다 텅텅 비고 집마다 뒤주가 바닥이 났다. "(금성정의록)
이에 7월들어 태인의 최경선이 합류해왔다. 최경선은 광주 등지에 연고가 있어 이곳을 진출하여 오권선과 힘을 합해 나주성 공격에 나섰으나 다시 실패하였다.
성 밖 집강소 활동
이렇게 되자 이해 8월 13일에는 전봉준이 직접 찾아와 목사 민종렬을 설득하였다. 곧 전라감사와 합의하여 집강소 활동을 벌이고 있으니 협조하라고 설득한 것이다. 민종렬은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때 민보군은 전봉준을 사로잡으려 하였는데 전봉준과 수행원 10여 명은 옷을 벗어주며 "이것은 우리 수행인들의 옷이다. 몇달 동안 더위 속에 지내다 보니 땀과 때에 절었다. 영암을 돌아 3-4일 뒤에 다시 와서 갈아입겠으니 빨아가지고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나주청의 장령들이 그때 가서 죽여도 되겠다고 생각하여 문을 열어주었다. 전봉준 일행은 그 뒤에 다시 나타나지 않아 장령들은 그때야 속았음을 알고 이를 갈았다 한다.
오권선이 이럴 적에 전봉준과 행동을 같이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뒤 손화중 최경선과 힘을 합해 계속 나주 공격에 나섰다. 민보군과 농민군은 10월 21일, 11월 12일, 11월 24일에 걸쳐 용진산 등지에서 크게 전투를 벌이면서 큰 희생을 당했다.(이 전투상황은 최경선 편에 나옴)
이대 수성군(민보군)에는 오권선의 아버지 제자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은 오권선의 친구였던 셈이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었으니 이것은 시대의 탓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같은 오씨 문중의 형뻘 되는 오준선은 엽전 5백냥을 수성군의 경비로 내놓기도 하였다 한다. 살아남기 위한 계책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전투는 노안면 서답바위 일대에서 벌어졌다. 농민군이 길을 막고 있을 적에 큰 상여가 나왔다고 한다. 농민군은 출출한 김에 상가의 술잔이라도 얻어 마시려 했는지 상여를 멈추게 하였다.
상여 행렬에 속아 패주
그런데 갑자기 상여가 넘어지면서 수성군들이 쏟아져나와 농민군을 기습하였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는 것이다. 이때 수성군 쪽에서는 오중문은 죽이지 말라는 지시가 있어서 오권선은 말을 타고 달아났다고 한다. (광산구 의원 김희규씨의 증언)
또 오권선과 이웃마을에 살았던 이병수는 이때의 정경을 이렇게 전한다. "시체가 들판에 가득히 널려 있었고 흐르는 피가 똘을 이루었다. 권선은 겨우 나귀를 타고 멀리 도망쳤다. 부대가 남산을 넘어 추격하여 하촌의 뒤에 이르러서는 권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으나 가맣게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주성의 공방전은 끝이 났다. 9개월 동안 일곱번에 걸쳐 큰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나주 공방전은 어디까지나 오권선의 끈질긴 도전에서 나온 것이다.
오권선은 많은 재산과 명망으로 이곳 농민군을 규합하고 양곡을 조달했다. 그리고 성 외곽은 완전히 오권선의 수중에 있었으며, 광주에 근거지를 마련한 손화중,최경선과 연합 또는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런 전투를 벌일 적에 민보군 중군인 정석희는 서봉리에 있는 오씨의 재각에 불을 질렀다 한다. 정석희는 오권선을 철저하게 미워한 나머지 전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재각을 해코지한 것이다. 아니면 야간에 행군할 적에 길을 밝히기 위해 불을 질렀을까?
고향에 다시 안나타나
어쨌든 이 재각 방화사건은 오권선을 평생 죄의식에 빠지게 했다. 그러고 이 사건은 또 오씨 문중의 한과 원망을 남겼다.
나주를 떠난 뒤 오권선의 행방을 밝혀지지 않았다. 12월 초 최경선이 남평을 공격할 적에 여기에 참여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또 나주 초토영에서 이 일대의 농민군을 마구 잡아들이면서 오권선을 줄기차게 수배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멀리 떠났기 때문에 끝내 잡히는 몸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 태인에서 숨어 지내다가 금산에 가서 살았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고향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서자가 한번 다녀갔다고 한다.
오권선은 오씨문중의 재실을 지을 돈을 마련하고서야 고향에 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끝내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가난하게 살았던 모양이다.
<나주오씨세보>에는 그의 죽은 연대가 기재되지 않았으며 그의 외아들 도수는 1912년 생으로 되어있다. 다른 곳에 가서 장가를 들어 후손을 두었는데 논산에 사는 그의 손자 종덕은 할아버지의 일을 까맣게 모르고 살아간다. 아마도 신분을 철저히 감춘 탓일게다. 그 때문에 나주 오씨의 문중은 큰 피해를 입었고 또 지금까지 원망이 가시지 않고 있으나 나주지방에서 그의 신화같은 행동은 아련히 민중의 입을 통해 전해온다.
나주 농민문제 연구 구의원 김희규씨
농민군 기록 너무없어 아쉬움
동곡·서남 등 전투지역 답사하며 구전 수집
"고향의 역사를 공부한다는 게 재미도 있고 의미있는 일입디다. 내 고장의 옛일을 모르면서 지금의 내가 후대에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욕심이지요."
나주 일대의 동학농민전쟁을 연구해 온 광산구의회 김희규(49. 사업) 의원은 고향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열심이다. 김의원은 5년 전쯤 <금성정의록>이라는 문집을 접하면서 '흥미진진한' 과거와의 대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농민전쟁 당시 나주목의 유림인 이병수가 농민군을 토벌한 관군과 민보군의 공적을 기록해 놓은 이 문집에 김의원이 태어난 곳인 옛 나주군 평동면(48년 광산구로 바뀌었으며 지금은 광주시 광산구) 일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잇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주의 평동, 본양, 삼도 일대를 장악하고 나주목을 위협한 오권선이란 인물이 눈에 들어옵디다. 하지만 아무리 오권선을 물어도 아는 사람이 있나요. 나중에야 오권선이 삼도 사람 오중문의 다른 이름인줄 알았죠. 그때부터 일이 술술 풀리더군요."
김의원은 <금성정의록>에 기록된 사실들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갔다. 농민군과 나주 수성군이 전투를 벌인 바로 그 날짜에 전투지역인 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동곡, 서남, 삼도, 본양 등지를 답사하며 혼자서 당시의 전투를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 전투지역 일대의 노인들로부터 전해져내려오는 이야기도 수집했다.
"전투규모 등 여러 면에서 기록이 과장된 것이 많더군요. 특히 농민군을 비적으로 취굽하고 있고. 하지만 농민군쪽에서 작성한 기록들이 너무 없으니 ……."
농민전쟁 뿐 아니라 이 지역의 몇차례에 걸친 의병운동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동학농민군이나 의병의 후손들을 만날 때마다 늘 느끼는 아쉬움이 한가지 있다고 털어놨다.
"그 후손들이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권선만 해도 논산에 나보다 두살인가 어린 친손자가 살고 있는데 생활도 어렵고 무엇보다 할아버지 일을 거의 모르더라구요. 참 자랑스럽고 훌륭한 과거인데."
11. 김학진(1838∼1917)
-농민 편에 선 당찬 전라 감사, 전봉준과 밀담 갖고 집강소 지원, 군량미· 무기도 내줘
동학농민군은 본격적으로 봉기하여 황토현 장성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전라감영으로 지쳐 올라가자 조정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우선 그 책임을 당시 전라감사인 김문현에게 물어 파직시키고 참신한 인물을 물색하였다. 민씨 세력이 아니면서 청렴하고 명망 있는 인물을 새 감사로 임명하여 민심을 얻어보려 한 것이다.
대중적 명망 얻어
이때 떠오른 인물이 김학진이었다. 그도 세도가 안동김씨에 속한 인물이기는 했으나 대중적 명망을 얻고 있었다. 더욱이 이름난 척화파요 정치가인 김상헌 김수항의 직계 후손으로 깨끗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많은 벼슬아치들이 전라감사 임명을 애써 피하려고 요리조리 핑계를 대고 있었다. 임금이 그를 불러들여 전라감사 임명을 통고하니 , 그는 임금 앞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았다. 임금이 일어나라고 분부했으나 끝내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임금은 무슨 할 말이 더 있느냐고 물었고 김학진은 '편의종사(便宜從事)'의 조처를 내려달라고 말했다.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 엎드려 있자, 임금은 어쩔 수 없이 "편의종사하라"고 허락했다. 편의종사란 임금의 결재를 받지 아니하고 우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는 집에 돌아와 떠날 채비를 하면서 아내를 보고 오열했다 한다.
김학진은 이렇게 해서 조정에서 맡긴 큰 짐을 지고 현지로 부임했다. 그가 삼례에 이르렀을 적에 전주감영은 농민군의 손에 떨어졌고 이어 휴전이 성립되어 집강소 기간으로 들어갔다. 김학진과 농민군 지도부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질지, 서로 협조관계가 이루어질지 주목되던 순간이었다.
이때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고종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고 일본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개화정권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은 계속해서 조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상륙한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들 사건은 김학진을 농민군 편으로 돌려세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주에서 물러나온 농민군 지도자들은 각 고을을 돌면서 자신들의 힘으로 폐정개혁에 나섰다가 이해 6월 초에 전봉준, 김개남 중심의 집회를 갖고 좀더 조직적인 활동을 모색했다.
폐정개혁 등 약속
김학진은 전라감영 총서 김성규 등의 도움을 받으며 농민군의 활동을 지원했다. 이 남원집회에 김학진은 군관 이용인을 보내 몇 가지 제안을 했는데, 첫째 폐정은 일체 뜯어고칠 것이되, 작은 것은 자신의 손으로, 큰 것은 조정에 보고해 고칠 것이며, 둘째 농민군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것을 보장하되, 각기 면과 이 단위에는 집강이 설치되어 있으니 억울한 것은 집강을 통해 호소해오면 감영에서 처리할 것이고, 셋째 병기를 환납하는 일 이외 곡식 등을 빼앗은 일은 전혀 묻지 않을 것이며, 넷째 금년의 각종 세금은 낱낱이 면제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제안은 농민군의 활동을 공인하는 것이었고 뒷날 커다란 비난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농민군의 집강소 활동은 이 수준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들은 곡식과 무기를 거두어들이면서 폐정개혁에 나섰다. 무엇보다 양반과 상놈, 상전과 종, 남자와 여자의 차별타파, 곧 사회신분 타파가 주된 활동이었다. 그리하여 호칭을 '접장'으로 통일해 부르면서 평등의 실현에 주력했다.
그들은 또 빈농, 영세상인, 어민 중심의 경제적 불균형 시정에 나섰다. 이들에게 씌워진 무거운 조세를 거부하고, 부당한 고리채를 탕감하고 대지주와 도매상인의 횡포를 다스렸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노비문서와 토지문서를 불태우는 일이 벌어졌고 또 사사로운 원한을 푸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분위기는 충청도, 경상도로 급속하게 번져나갔다.
이런 가운데 각지의 수령들은 도망치거나 몸을 사려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일부 농민군의 횡포가 말썽이 되기도 했다. 더욱이 농민군 지도부가 청일전쟁을 수행하고 개화정권을 농락하는 일본군과 전면적 항쟁을 벌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해 7월 15일 남원에서의 대화를 갖고 이런 문제에 대한 의견을 모으려 했다. 남원에서 전봉준 세력과 김개남 세력은 힘을 합해 새로운 갈등을 해소하고 관의 협조를 모색하려 했다. 이 남원대회에 김학진은 군관 송경원을 보내 "함께 국난에 대처하기 위해 감사는 도인을 거느리고 힘을 합해 전주를 지키기로 약속하자"고 제의했다.
김개남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전봉준은 '관민상화지책'을 도모하려 전주로 나와 김학진을 면담했다. 두 사람은 밀담을 나누면서 서로 뜻이 통했고 전봉준은 전주를 지키기로 하고 김학진은 집강소 활동을 공인했다.
김학진은 감사의 집무실은 선화당을 전봉준에게 내주었다. 김학진은 각 고을 원들에게 글을 보내 농민군 집강소 활동을 적극 도와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정 인사조처 거부
김학진은 역적을 돕는 수준이 아니라 스스로 '역적질'을 시작한 셈이다. 이런 김학진의 행동을 황현은 이렇게 매도했다.
"전봉준은 이에 김학진을 끼고 이익을 많이 남길 물건으로 삼아 한 도를 전제했다. 학진의 주위는 모두 그들 무리였다. 몰래 여러 도둑을 불러 성안에 들어오게 했는데 이름은 성을 지킨다는 것이나 실지는 성을 포위한 것이다. 학진은 괴뢰와 같은 사람으로 일어나거나 앉고 침 뱉거나 삼키는 것까지 자의로 하지 못하고 오로지 문서만 받들어 행할 뿐이다. 이래서 백성들은 도인감사라 불렀다." (오하기문)
이렇게 되자 나주목사 민종렬과 순창군수 이성렬 등이 김학진의 지시를 거부하고 감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김학진은 이들을 파직시키라는 글을 조정에 올렸다.
이때 조정에서는 김학진을 병조판서로 삼고 장흥부사 박제순을 전라감사로 임명했다. 김학진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전주에 남아 농민군 활동을 도왔다. 박제순이 부임하려 전주에 오자 김학진은 인계를 거부했다.
일제땐 남작 지위
박제순은 분통이 터져 "김학진이 도둑을 끼고 임금이 되려 한다" 는 글을 올렸다. 조정에서는 김학진을 잡아들이려 했으나 그의 일가로 세력가인 김가진의 노력으로 불문에 부치기로 하고 그대로 임지에서 활동을 계속하게 했다.
이런 일에 대해 황현은 또 "김학진의 머리를 잘라 아침에 매달고 전봉준의 시체를 저녁에 돌연자에 갈아야 한다"고 했다.
2차 봉기를 시작한 농민군은 김학진의 도움에 힘입어 많은 군량미와 무기를 입수했다. 김학진은 전주에 있는 회룡총 4백 자루, 크르프포 등 대포 3문, 그 외 탄알 등과 위봉산성에 있는 무기를 내주게 했고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농민군 운량관이 되기도 했다.
공주 전투를 앞뒤로 하여 김학진은 전라감사 자리를 이도재에게 내주고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해 정국이 전환된 탓인지 그의 행동은 흐지부지되었다.
을사조약 이후 최익현은 그에게 의병에 나설 것을 제의했으나 동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후 조정에서는 놈민군에게 인기가 있는 그에게 태의원경 등의 벼슬을 주었고 일제는 또 그에게 남작을 주어 회유했다. (조선신사대도보)
농민전쟁 당시 그는 농민군의 집강소 활동을 돕고 대일 항쟁에 동참했으나 그후에는 조용히 살았다.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으나 적극 독립운동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시기에 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인터뷰/ 김학진 참모 김성규의 손자 김방한씨
김학진은 - 전봉준 연결역할
"할아버지는 진보적인 분"
"관리 신분으로 농민군의 활동에 어느 정도 협조했으니 할아버진 상당히 진보적이셨던 모양이야. 하지만 어릴 적 기억으론 매우 엄하셨던 모습으로 주로 떠올라."
동학농민군이 전주화약을 맺고 집강소 시기로 들어선 뒤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김성규의 손자 김방한(68·서울대 명예교수)씨의 얘기다.
집강소 시기는 농민전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집강소를 통해 농민군은 정부와의 타협 속에 사상 처음으로 제반 폐정과 모순을 주체적으로 개혁했다.
김성규는 이 시기에 전라감영의 총서로 김학진의 막후구실을 하며 집강소를 지원했다. 그는 농민군에 대한 효유문, 관할 53주에 내린 감결, 수습안 등을 직접 작성했다. 뒷날 그가 작성한 문집 <초정집>은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해주는 몇안되는 소중한 문헌자료로 남아있다. 그러나 김성규는 전봉준이 서울 공격을 위해 공주로 북상한 사이 '급진파' 김개남이 전주를 장악하고 관리들을 처단하자 그를 체포해 효수하는 등 전쟁 종반에는 농민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농민군과 이를 토벌하는 관군 사이에서 갈등하는 김성규의 모습은 1920년대의 대표적인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인 아들 김우진이 쓴 희곡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김우진은 1926년 당시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할아버지는 나중에 고종의 명으로 암행어사에 해당하는 순찰사가 되어 강원도를 순찰했지. 당시 홍천의 유명한 탐관오리를 봉고파직시켰는데 도리어 피소돼 재판에 졌어. 그 관리가 받은 뇌물액수까지 문집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말이야. 이렇게 관리들이 썩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리 있나. 그 길로 할아버지께선 관직을 그만두셨어."
한국어 계통론 연구의 대가인 김교수는 지난 90년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직을 정년퇴직한 뒤 건강이 종지 않은데도 이번 학기 대학원의 한 강좌를 맡는 등 정열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내년 3월께는 <언어와 문화>(가제)를 출간할 예정이며, 83년 출간한 <한국어의 계통> 증보판도 준비중이다.
12. 정백현(1869-1920)
격문 도맡아 작성 … 봉기 풀무질, 전봉준 비서로 글솜씨 발휘…직접 행동대 지휘하기도
농민군 지도부에서는 봉기 초기부터 무수한 격문 통문규약 폐정개혁 등을 써서 진중에도 돌리고 전국에도 띄웠다. 전봉준은 이를 간혹 자신이 쓰기도 했으나 대서한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서 쓴다는 것은 글을 짓는 일과 쓰는 일을 모두 일컫는 말이다.
처음 무장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이어 백산에서 재집결을 해 부서를 정할 적에 비서(비밀스런 글을 담당한다는 뜻)로는 송화옥, 정백현이 나타난다. 이 두 사람은 바로 전봉준의 직속 심복이었던 셈이다.
정백현은 이 지방 향반인 진주 정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상례마을(당시 우장현 소속)에서 정만원의 아들로 세상을 보았다.
"글 잘한다" 명성
그의 아버지 정종현은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는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뒷날 효행으로 통덕랑이 제수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2백 석의 도조를 거두는 지주였는데 무자년(1888) 흉년에 빈민을 널리 구제해 인망을 얻었다 한다.
정백현의 이름은 근영(족보)이요 백현은 자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이 지방의 명망 있는 선비인 정학원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촉망받는 문사감으로 일컬어졌다한다. 어느 때인지 이웃마을인 구정마을로 옮아가 살면서 독서에 정진했다. 아마도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과거준비를 하고 벼슬살이를 할 꿈을 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엉뚱한 길을 걷게 된다. 전봉준이 태어나서 열세 살까지 살았다는 당촌마을과 구정마을은 한 고을이었고 또 이들 전씨와 정씨들은 교류가 잦았다.
정백현의 아들 병묵씨는 전봉준의 일가인 전근호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해준다.
"우리 아버지는 부잣집 아들로 글 잘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대. 전봉준 선생이 은밀히 일을 벌이면서 우리 할아버지를 끌어들였다는구먼. 전봉준이 여러 차례 간곡히 부탁해서 아버지께 글 짓는 일을 맡긴 거래. 그렇게 해서 사발통문의 글도 짓고 모든 격문, 통문의 글을 도맡아 지었다고 일러주데."
1893년 11월 전면봉기를 준비하면서 사발통문을 고부 죽산리 송두호 집에서 만든 사실은 앞의 글 (송화대편)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하지만 정백현의 이름은 20명의 서명자 명단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후 농민군은 1894년 3월에 무장에서 본격적으로 봉기하면서 첫 창의문을 발표해 대의를 천명하는데 이 글은 정백현이 지도부의 뜻을 받들어 송희옥과 함께 지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간다. 이어 4대명의(四大明義) 등의 행동지침이 마련되는 과정에서 그의 글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을 것이다.
황토현 전투 등 참여
비서라는 직책은 늘 대장이나 지도부와 함께 행동하면서 그 뜻을 충실히 받들어야 한다. 그런데 <천도교교회사초>는 각지의 1차봉기 지도자를 소개하면서 "이때에 송문수 강경중 정백현 송경찬 송진호는 무장에서 기포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그는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고향 주변의 농민군을 이끌고 행동대의 지휘자로서 황토현 장성 등지의 싸움에 참여하고 이어 전주성에도 진출했던 것이다.
1차봉기 첫 단계에 "농민군의 수령은 앞서 비밀리에 58개 고을의 동학당에 격문을 띄웠다. 그 목적은 다만 한 군의 이해를 따질 뿐 아니라 우선 전운영(당시의 세곡운반회사)을 파괴하고 나아가 폐정을 뜯어고치려고 함에 있다는 것"(고부민요일기)이라 하니 그 수많은 격문을 베끼는 일만 해도 팔이 저렸을 것이다.
그는 키가 크고 성미가 괄괄했다고 한다. 이런 그였으니 농민군의 기세가 등등할 적인 집강소 기간에 조용히 집에 틀어박혀 있을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나이가 젊은 탓인지 집강의 일을 맡지는 않았으나 토호의 징치에 발벗고 나섰을 것 아닌가?
2차봉기 때 그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전봉준이 잡혀서 문초를 받을 적에 일본 형사는 송희옥의 대필문제를 집요하게 캐물었으나 정백현에 대한 문초는 없었다.
아버지가 대신 희생
아마 정백현이 잡히지 않은 까닭일 게다. 전봉준은 직접 농민봉기에 연루되지 않았거나, 발각되지 않아 잡히지 않은 사람은 철저하게 사실을 숨겨서 보호했음이 관련 기록에 나타난다.
아무튼 공주 원평 태인 전투가 끝난 뒤 그는 집안에 있던 모든 관련문서를 깡그리 불태워 없앴다. 그때 여러 격문 통문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당촌마을 앞에 있는 신촌마을로 몸을 피해 그 마을에 사는 친구 봉정범의 집 골방에 숨어 지냈다. 이런 피신은 여간 위험하지 않다. 몸을 숨길 적에는 살던 곳에서 멀리 떠나야 한다. 배반자는 늘 친지나 주변인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약 3개월 동안 골방에서 몸을 숨기다가 서울로 튀었다. 그리하여 농민전쟁의 지도자 중에서 몇 안되게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의 하나가 되었다. 그 대신 그의 아버지가 연좌법에 걸려 고부 수성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죽고 말았다. 아들 대신 목숨을 잃은 것이다.
서울서 도피 생활
비록 그의 일가들이 주검을 찾아 반장(객지에서 죽었을 적에 주검을 찾아 장사지내는 일)하기는 했으나 큰 비극임에 틀림없다. 그의 큰 아들은 일곱살, 둘째 아들은 두살이었으니 연좌법에서 벗어나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아들 병묵의 증언)
그러면 그는 서울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그 뒤의 삶은 어떠했던가?
당시 일본군은 "동학당이 이름을 바꾸어 경성으로 잠입한다는 풍문이 있다."고 일본공사에게 보고하고 있고, 이에 따라 서울 일대 수색을 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그는 연줄을 찾아 판서를 지낸 신헌구, 참판을 지낸 이근용 이중하 등과 어울렸다. 이때 그는 이름을 바꾸고 시솜씨를 뽐내 이들과 아무런 의심없이 지냈던 것이다.
1903년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사람들을 위해 순천 송광사에 성수전을 짓게 되었다. 이때 일가 아저씨뻘 되는 정명원의 천거로 성수전 공사를 지휘하는 별유사를 맡았다. 이 일을 훌륭히 마무리하고 나자, 그에게 해주관찰부주사가 주어졌다. 이런 일은 아마도 그의 재산과 일가들의 덕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지만 그의 학식이 뒷받침이 됐을 것이다.
그는 서울생활 동안 "오래 한 모퉁이에 머물면서 고향 소식을 못 들은지 지금 2년이다. 아아. 가사가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심사가 정해지지 않고 가슴이 깡그리 찢어진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집에 돌아가 죽었든 살았든 소식이라도 들으면 안심이 될듯하다."(그의 글(진암 견문록))고 회한에 차 쓰고 있다.
그는 비록 하찮은 벼슬자리를 받아 보신했으나 나라 일이 그릇되는 걸 보고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9년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끝내 고향에 돌아왔다. 집을 고창 오성동으로 옮게 살았다.
귀향 뒤 조용히 여생
그는 새 집에서 글을 읽으면서 세상을 담담하게 살았다. 3.1항쟁 다음해까지 살았으나 이런 일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인심은 후하게 얻었다. 그는 남에게 곡식이나 돈을 꾸어주면 받을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은 인심이 후한 사람을 두고 "나물양반 새꺼리 주듯이 한다."고 불렀다 한다. '나물'은 그의 차가 동네 이름이다. 이런 것으로 그의 한을 풀었던가?
인터뷰/정백현의 셋째 아들 정병묵씨
아버님 문집 견문록 널리 알려졌으면
정병묵씨는 올해로 88살이다. 그러니까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에 태어났다. 동학농민전쟁의 주요 지도자들이 대부분 갑오년 그해 숨져 손자나 증손자만 남아있는 까닭으로 그는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의 유일한 주요 지도자의 1대 자손이다. 정씨의 아버지 정백현은 서울 피신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를 낳았다.
" 내가 어릴 때 아버지께서 별 말씀이 없으셔서 전봉준 장군을 도운 사실을 50살 무렵에야 알게 됐어. 아버지의 제삿날인 3월 초아흐레 무장리 유황동 선산에서 제사를 지낼때 전 장군의 먼 친척인 전근호씨가 찾아와 아버지 행적을 알려주더구먼. 그 양반은 나보다 10살이 위였어. "
정씨에 따르면 아버지가 농민전쟁에 가담한 이후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대신 처형을 당했고, 많던 재산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중농 수준은 돼, 고향에 돌아온 정백현은 3·1운동 다음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바깥 출입을 계속했다고 한다.
정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친구인 신을봉씨한테서 한문을 배웠다. 고창군 아산면 주진리 고향땅을 지키며 아들 일곱에 딸 다섯, 모두 열두 자식을 키웠다. 손자들까지 합치면 지금은 자손이 모두 60명이 넘는다. 그 자손들이 힘을 모아 지난 81년 집 바로 옆에 아버지 정백현의 제각을 지었다.
"내 생전에 가장 기쁜 일이야. 비록 본채뿐이고 문간채는 없지만. 죽기 전에 문간채도 올려야지. 거기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한글로 번역한 아버지의 문집 <견문록>을 많이 찍어 세상에 널리 알 렸으면 좋겠어."
아흔을 눈앞에 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씨는 정정했다. 가는귀가 조금 먹었을 뿐 고기를 먹을 정도로 이도 튼튼했다. 기억력도 여전해 <견문록>에 나오는 할아버지의 한시를 줄줄 외웠다.
13.이상옥(이용구)(1868-1912)
-'동학재건' 팽개치고 친일 선봉, 최시형 총애받은 지도자 … 일진회 결성 한일합방 앞장
경기도와 충청도의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1894년 9월 무렵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치열하게 번졌다. 이를 토벌키 위해 죽산부사 이두황과 안성군수 성하영이 우선봉진의 지휘관이 되어 골골을 쑤시고 다녔다. 이곳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한 사람이 바로 이상옥이다.
이상옥은 경상도 상주땅 낙동강 강가 마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워낙 가난한 탓으로 여덟살 적에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경기도 안성에 이사온 뒤, 경기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며 살았다. 더욱이 열세 살 적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여의어 집안 살림이 온통 그에게 떠맡겨졌다.
1890년대 초 동학이 한창 번져나갈 적에 최시형을 찾아 동학에 입도하고 나서 생업보다 동학포교에 열중하게 되었다. 동학 입도는 그의 운명을 갈라놓았지만 뒷날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많은 교도를 거느리고 보은집회에도 참여하였다. 보은집회가 있은 뒤 각지의 수령과 토호들은 동학교도라는 혐의를 씌워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족치거나 재산을 갈취하고 있었다. 이천땅에 사는 토호 김봉규도 그런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경기 일대의 '영웅'
이상옥은 1894년 봄 교도 몇천 명을 이천에 모아놓고 이천군수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이천군수는 그 위세에 눌려 잡아가둔 교도를 풀어주고 빼앗아간 재산을 돌려주었다. 이 일로 하여 경기도 일대의 하층민들은 그를 영웅으로 우러러보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수령과 토호들은 서울과 끈이 단단하게 이어져 있어서 민중들은 다른 지역보다 더욱 숨을 죽이고 있었다.
청년 이상옥은 그 뒤 교단에서도 인정을 받아 경기도 편의사라는 직책을 받는다. 그는 편의장 이종훈과 함께 이 일대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당시 맹영재 등이 민보군을 조직해서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를 넘나들며 교도와 농민군을 잡아 살육하고 있었다. 강원도·경기도 일대의 많은 사람들은 충주의 황산에 있는 충의포 도소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충의포의 대접주는 손병희였다.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두황을 장위영 영관, 성하영을 경리청 영관을 삼아 우선봉진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토벌케 했다. 또 선유사 정경원은 포군 8백 명을 이끌고 사창리(지금의 음성군 금왕읍)에 진을 쳤다.
성하영을 경리청 영관을 삼아 우선봉진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토벌케 하였다. 또 선유사 정경원은 포군 8백명을 이끌고 사창리(지금의 음성군 금왕읍)에 진을 쳤다. 사창리와 한마장 떨어진 황산의 농민군과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뻔하였으나 정경원군은 군사를 돌렸다. 이에 이종훈과 이상옥은 충주·안성·양지·여주·이천·양근·지평·광주·원주·횡성 ·홍천의 농민군을 황산 충의포 도소로 모아들였다. (천도교 교회사 초고)
이상옥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수만명은 무극장터(지금의 금왕읍)로 진출했다. 우선봉진의 군대와 한바탕 전투를 벌이려는 것이었다. 이때 괴산에서는 충주에 있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농민군을 살육하고 있었다. 이들 농민군은 발길을 돌려 괴산땅을 들이쳤다. 그리고 하룻밤을 괴산에서 지내게 되었다. 한편 진천의 구만리 장터에 모여 있던 수많은 농민군은 진천관아를 들이쳐 군기를 빼앗아 갔다. 이들은 합류해서 청주로 진출했다. 이두황은 이들을 뒤따라오며 무고한 양민을 잡아 쳐단하고 있었다.(우선봉일기)
사형 기다리다 구출
이후 북접의 농민군은 남접의 농민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10월 9일 논산에 집결하고 나서 공주전투를 벌인다. 이상옥은 북접 농민군의 지도자로 17일 충청감영의 뒷산인 봉황전투에 나섰다. 한나절을 접전한 끝에 이상옥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리하여 논산으로 물러나와 있다가 주력부대와 행동을 같이해서 태인까지 간 다음 임실에서 최시형을 만나 충주까지 동행한다.(이때의 과정은 다음의 손병희 편에 나옴) 그는 충주에서 일단 최시형, 손병희와 헤어진다.
우리는 이상옥의 그후의 행적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가 몸을 피해다니는 생활 속에서 아내는 바위굴에서 해산을 했으나 미역국은 커녕 사흘동안 밥을 굶는다. 그의 어머니는 밥을 빌어 산모를 먹였다.
그가 수원땅에 속하는 독포도라는 섬에 숨어 지낼 적에 그의 아내는 잡혀 모진 고문 끝에 몇달 만에 풀려났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곧 죽는다. 그는 몸을 피해 다니다가 1895년 홍천에 숨어있는 최시형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나서 끝없이 잠행하여 황해도·평안도·함경도 일대의 포교에 전념한다. 그러다가 1898년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위해 어머니를 찾아왔다가 잡히는 몸이 되어 이천감옥에 갇힌다. 이때 최시형의 소재를 대라는 모진 추궁을 당했지만 왼쪽 다리뼈가 부러지면서도 그 소재를 대지 않고 "동철은 비록 좋으나 단련하지 않으면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없고 송백은 비록 굳세나 눈서리가 아니면 높은 절개를 알지 못한다."(시천교종역사)고 말했다 한다. 두고 볼 일이다.
그는 넉달만에 풀려났으나 1898년 최시형이 원주에서 잡힐 적에 다시 잡힌다. 그는 경성감옥에 끌려가 또다시 다리가 부러지는 고문을 받고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러나 추종자들이 감옥을 깨고 구출해 내서 다시 살아남았다. 1901년 손병희가 일본에 갈 적에 함께 따라갔고 그후 세차례에 걸쳐 도쿄를 왕래했다. 이때 손병희는 그에게 동학 재건의 소임을 맡기고 또 중립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상옥을 데리고 미국으로 유람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스스로 시천교 창교
이상옥은 중립회를 진보회로 개칭하고 다시 진보회는 일진회로 통합되었다. 이때까지 손병희의 신임을 받고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이루어질 적에 그는 손병준과 함께 "대한의 일본 보호"를 외치고 나왔다. 이때 그의 이름은 상옥에서 용구로 바뀌어져 있었다. 상옥에서 만식으로 바꾸고 다시 용구로 개명하였는데 그의 이름과 함께 그의 행동도 변절되어 갔다. 이용구는 일본을 왕래하면서 일본 군부의 끄나풀이 되었고 또 송병준의 유인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을사조약이 이루어질 무렵 그 마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보호국 문제는 손병희의 반대에 부닥쳤고 또 일진회 회원의 탈퇴소동이 벌어졌다. '역적 이용구'라는 구호가 온 나라에 걸쳐 메아리쳤으나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런 지경인데도 손병희는 계속 그에게 교수의 직책을 주기로 하고 천도교가 창건될 적에 고문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끝내 이용구가 일진회를 친일행동대로 밀고 나가자 손병희는 어쩔 수 없이 1906년 이용구 등 62인을 천도교에서 출교처분하고 만다. 이에 가만히 있을 이용구가 아니었다. 그는 친일세력을 이끌고 새로이 시천교를 창교했다. 그리하고 동학의 정통을 이었다고 떠벌였다. 여기에 웃지못할 일화가 하나 있다.
"내가 속은 것인가"
1907년에 내각에 여러차례 건의한 끝에 그가 교조 최제우와 최시형을 신원케 한 일이다. 교조신원이 농민군 봉기의 한 원인이 되었는데 그의 노력으로 신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제우의 초상을 유명한 화가 안중식을 시켜 그리게 하고는 교당에 걸어놓고 받들었다. 너무 심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는 1909년 12월 일본 천황과 각계에 '1백만 일진회 회원' 이름으로 합방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합방에 앞장섰다. 그러나 합방 뒤 일본이 주는 작위를 거절했다.
그는 1911년 신병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일본에서 입원치료를 하던 중 그는 한국에서 함께 합방활동을 벌인 극우인사 다케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나와 송병준이 속은 것인가"
죽기 직전의 그의 정확한 심사를 알 길이 없다.
변절자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
일본서 자라나 우익활동
'이용구의 생애' 책 펴내 아버지 변호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이용구의 후손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80년대 일본 도쿄대에서 일제 침략사를 연구한 강창일 배제대 교수는 이용구가 낳은 이석규(일본명 다이토 쿠니오)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85년껜가 대학으로 나를 찾아왔다. 70대 중반의 노령으로 몸이 상당히 쇠약해 보였다. 길게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매국노가 아니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 몇해 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교수에 따르면 이석규는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용구에게는 양아들 현규가 있었다. 그 뒤 이용구가 병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오자 아버지를 따라 왔다. 1912년 이용구가 죽자 일본의 극우인사 다케다가 관계하는 나고야의 조동종 절에서 자랐다. 다케다는 이 종파에 소속된 승려로서 한일합방 당시 일진회 등과 접촉하며 합방을 부추긴 인물이다. 그의 일본이름에 들어있는 대동국(大東國)은 일본·조선·만주·몽고가 동이족의 한 나라를 건설하자는 뜻의 우익용어이다. 그는 이송학사 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시대 동안 대동숙이라는 우익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한·일 수교 전에는 '일한 회담 촉진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한·일수교 뒤에는 몇차례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1960년 <이용구의 생애>라는 책을 써서 아버지의 삶을 변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선린우호의 초일념을 관철한다.'는 부제를 붙인 이 책에서 이석규는 "이용구는 훌륭하다. 선린우호의 차원에서 일본과 조선의 대등한 합방을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의 일부 정치권력자에 속아 나라를 병합당했을 뿐이다. 그는 매국노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석규는 일본 여자와 결혼해 딸 하나만을 남겼다고 한다.
14. 차치구(1851-1894)
-정읍 고창 전설적 '평민 두령', 동학교도 아니지만 전봉준 권유로 거사…수천명 이끌어
동학농민전쟁이 한참 진행될 적에 벼슬아치나 양반 토호들은 몸을 숨기거나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국면이 한번 바뀌자, 이들은 혈안이 되어 민보군을 조직하고 더욱 처절한 복수를 자행했다.
특히 이들 민보군은 대의명분을 세우면서도 일본 침략군에 협조하여 농민군 타도에 앞장섰다. 1894년 11월 농민군이 패배를 거듭하고 일본군의 지휘 아래 관군이 휩쓸고 내려오자, 곳곳에서 민보군이 일어났는데 정읍·흥덕·고창지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개 넘친 7척 거구
이 지방의 토호로 악명이 높은 강영중과 현감벼슬을 샀던 은수룡 등은 이른바 창의문을 돌리고 농민군 탄압에 나섰는데, 그 한 구절에 "지금 도둑의 형세는 갈수록 뻗어가고 심지어 수령을 죽이기도 하며 군현을 함락하고 성지를 점거하기도 한다. 하물며 동학의 도둑 차치구는 관아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고 삼강오륜을 깡그리 저버리고 있으니 일이 매우 절박하다."고 하였다. (거의록)
차치구는 정읍 입암면 마석리에서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 이름은 중필이었는데 가난한데다가 신분도 평민이어서 서당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키가 7척의 거구인데다가 기개가 남달라 장수감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한다. 그는 스무살 안팎에 이웃마을 대흥리로 옮아가 살았다. 이 대흥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대흥리와 이웃마을인 지선동에 임감역(감역은 벼슬이름)이라는 천석군 부호가 살고 있었다. 임감역은 전라도 남쪽 지방에 많은 땅을 가지고 소작을 주었는데 양반 끄트머리인 소작인들은 위세를 빌려 도조를 내지 않았다. 임감역은 청년 차치구를 불러 "도조를 받아 마음대로 쓰라."고 일렀다.
차치구는 그 곳에 가서 소작인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중 힘센 듯한 두 사람을 잡아 꺾고는 "양반인 주제에 도조를 안내는 도둑놈짓을 하느냐?"고 호통을 치고 위협을 가했다. 이렇게 해서 도조 수백섬을 거두고 나서는 소작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잘 대접하고 말했다.
"갑자기 도조를 내느라 무리했을 터이니 3분의 2는 도로 가져가시오. 다름부터 도조는 꼬박꼬박 내시오." 그리고 나머지는 동네의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다.(손자 용남의 증언)
이 이야기는 그의 기개를 잘 나타낸다. 또 임감역의 집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자, 감역은 차치구더러 들어와 살면서 호랑이를 몰아내달라고 청했다. 차치구는 가족을 데리고 그 집에서 살았다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그가 이 지방 민중의 가슴 속에서 전설적인 영웅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때인가 전봉준이 대흥리로 찾아와 함께 거사하자고 꾀었다.
그러나 처음에 차치구는 "우리 군의 수령을 내붸는 일은 할 수 있으나 다른 곳에 가서 거사하면 역적이 된다."고 거절했다 한다. 이에 전봉준이 "나라를 위해 일어나야 한다."고 끈질기게 권유하자 전봉준을 따라 고부봉기에도 참여했고, 이어 전주입성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동학에 입도한 적이 없다. 전봉준의 권유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참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읍의 책임자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동원했다.
과격한 투쟁 유명
집강소 기간 그는 정읍 일대에서 활동했는데 이때 하나의 적을 만나게 된다. 홍덕현감 윤석진은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고 그곳 농민군 두령 고영숙을 잡아 가두었다. 차치구가 이끄는 농민군은 흥덕을 들이쳐서 고영숙을 구하고 윤석진을 죽이려 하였다. 윤석진은 고영숙의 부탁으로 목숨은 건졌다. 차치구는 신분 탓인지 빈한한 생활환경 탓인지 과격했다. 그리고 열화같은 의지에 불타 변혁운동에 앞장섰다. 이런 행동이 바로 이곳 민중의 입을 통해 전설로 이어져오고 있다.
2차 봉기 행동대 활약
아무튼 그는 2차 봉기 때에도 많은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에도 참전했고 이어 전봉준의 주력군이 원평과 태인에서 전투를 벌일 적에도 행동대로 활약했다. 전봉준은 태인전투를 끝으로 부하 10여 명을 데리고 장성의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순창 피노리에 몸을 숨겼다. 이때 차치구는 피노리까지 전봉준과 동행했는데 그의 어린아들 경석도 데리고 다녔다 한다.
차치구는 피노리에서 전봉준과 헤어져 고향땅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마석의 뒷산인 원사봉 토굴에서 숨어 지냈다. 원사봉 아랫마을 광조골에 사는 친구 최제칠은 몰래 밥을 날라다 주며 그의 피신을 도왔다. 이 소문이 퍼지자 흥덕관아에서는 최제칠을 잡아다가 고문했으나 그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친구 목숨보다 본인 목숨이 중요하다"는 부인의 설득도 소용이 없었다. 최씨 부인도 차치구가 숨은 곳을 알지 못했다.
보다 못한 마을 사람 하나가 차치구가 숨은 곳을 알고 관아에 고발했다. 흥덕의 수성군이 토굴으 덮치자 차치구는 두려움 하나 없는 몸짓으로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칼 한자루와 담뱃대 하나가 들려 있을 뿐이었다. 수성군들이 그를 묶으려 하자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겠다. 이대로 같이 가자."고 호통을 쳤다한다.
현감 윤석진은 그를 닦달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행적을 심문하고 동조자를 불라고 회유와 고문을 섞어 몰아쳤다. 차치구는 "네 소행으로 보아 죽이고 싶었는데 살려주었더니 끝내 너에게 당하는구나."라고 소리치며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차치구는 윤석진을 마지막으로 질타했다. "나는 죽을 뿐이다. 더이상 심문하지 말라."
현감 칼에 찔려 죽어
윤석진은 분기탱천하여 칼을 빼서 차치구의 가슴을 찔렀다. 이렇게 해서 차치구는 정식재판도 받지 않고 불법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분살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것은 절못된 것임) 당시 이렇게 죽은 것은 차치구만이 아니었다. 불법으로 효수형(당시는 효수형이 금지된 상태였음)에 처하기도 하고 땅에 한꺼번에 묻기도 하고 강물에 한꺼번에 묶어 쓸어넣기도 하고 짚둥우리를 씌워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후손들은 차치구의 제사를 12월 29일로 지내고 있다. 주검과 관련해 이 지방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 한마디. 그의 시체는 사형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아들 경석은 밤에 철책을 뚫고 들어가 시체를 업고 기어나왔다. 그리고 30리를 달려 선산 아래에 가매장 했다. 지금 족박산에 있는 소박한 무덤이 바로 그곳이다. 비석 하나 서 있지 않다. 영웅적인 죽음치고는 묘소가 너무 소박하다.
그러면 여기에 등장하는 그의 아들 차경석은 누구인가? 차경석은 뒷날 다시 윤석진에게 잡힌다. 윤석진은 시체를 훔쳐간 죄상을 따지며 "네 애비가 잘못 죽었느냐, 잘 죽었느냐?" 물었다. 차경석은 "부모의 죽음에 시비를 못가린다. 다만 국법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윤석진은 차경석을 총살형에 처하게 했는데 이때 서울에서 내려온 참위라는 군인이 동석하고 있다가 연좌법도 폐지되고 총살형도 폐지되었으니 죽이지 말라고 말렸다. 윤석진은 몰래 사격준비를 시켰고 차경석을 형틀에 매어놓았다. 그 참위는 중지를 명령하고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들 용남의 증언) 그후 차경석은 1899년의 정읍 농민봉기에도 참여하고 일제때 보천교를 창설해 민족종교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안후상의 보천교 운동 연구)
인터뷰/ 차치구의 손자 손용남씨
"농민봉기가 동학 때문은 아니지"
한학에 능통…아버지는 보천교 교주
"우리 집안은 이조 5백년 동안 벼슬을 안했어. 그야말로 가난한 평민의 집안이었지. 벼슬하지 못한게 무슨 부끄러움이야?"
전북 정읍 일대를 휩쓴 평민 두령 차치구의 손자 용남(72. 전북 정읍군 입암면 접지리)씨는 맺고 끊는 것이 분명했다. 일단 말문이 열리자 대대로 벼슬에 오르지 못한 사실도 선선하게 얘기할 만큼 화통했다. 외모도 7척 거구였다는 할아버지를 닮은 듯 눈코가 모두 부리부리했다. 흐고 굵은 수염은 가슴 아래까지 덮었다.
"어릴적 할아버지 얘기를 별로 듣지 못했어. 아버지는 교 사업을 하실 때 집안 얘기를 전혀 하지 않으셨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중에 집안 어른들께 들은 것들이야."
용남씨의 아버지는 1910-30년대 크게 교세를 떨친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이다. "일제가 망하고 조선이 해방된 뒤에 새 왕조가 열린다."는 주장을 편 보천교는 일제 치하에서 좌절과 허탈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차경석은 '차천자(天子)로 이름이 오르내렸고 총독부조차 그 신도수를 수백만명으로 헤아렸다.
그러나 보천교는 30년대 말 차경석의 죽음과 일제의 탄압으로 급격히 쇠락했다. 지금 용남씨가 살고 있는 입암면의 보천교 중앙본소 건물도 한창때보다 수십배 줄어든 규모다. 하지만 욘남씨는 어린 시절 유복한 환경 덕분에 유명한 학자들로부터 한학을 사사했다. 자신의 입으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한학 실력이 남다른 듯했다. 특히 주역에 능통해 주변사람들은 스스럼없이 그를 몇안되는 죽역의 대가로 손꼽았다. 실제로 지난해 그는 일주일에 한차례씩 대전의 과학기술원에서 주역을 특강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남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말한 적이 거의 없어. 무엇보다도 갑오년 당시의 움직임을 동학과 연결짓는 게 싫었기 때문이야. 물론 할아버지는 동학교도가 아니었지.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난게 어대 동학 때문이겠어. 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지."
15. 홍낙관(1850∼?)
-신분해방의 들불 댕긴 '큰 괴수', 고창일대 천민부대 지…동학 패배 뒤에도 민란 주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물러난 1894년 5월 이후 일본군은 경복궁 쿠테타를 일으켜 친일 개화정권을 출범시켰다. 농민군은 집강소 기간중 사회신분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타파하여 백정, 노비 등 천민들을 해방시키고 상전과 종, 양반과 백정이 서로 '접장'이라 부르며 맞절을 했다.
서울 출신 재담꾼
한편 개화정권도 우선 역인·재인·백정을 천민신분에서 해방시키고 이어 칠반천인 (일곱가지 천한 일에 종사하는 신분층)도 평민신분을 주었다. 이는 과정이야 어쨌든 법제상으로 천민을 없앤 것이다. 이렇게 되자, 양반이나 상전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한편 천민들은 노비문서를 불태우기도 하고 상전에게 먹고 살 재산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 '동사생계'(함께 살고 죽자는 모임'나 '모살계'(상전을 죽이자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뚜렷한 계급투쟁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럴 적에 고창 일대에서 천민부대가 이루어져 신분해방을 주도적으로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고창은 특히 재인패와 당골(무당)등 천민이 많이 살던 곳이다. 이런 기록이 있다.
"손화중은 우도에 있으면서 백정·재인·역부·공장이·중 등 평소에 가장 천한 무리들을 모아 하나의 접을 만들었는데 사납기가 이를 데 없어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 하였다."(황현의 오하기문 2월)
이 천민부대의 지휘자가 바로 홍낙관이다. 19세기 말 어느 때인지 고창 장터에는 서울 말씨를 쓰는 한 재담꾼이 등장했다. 그는 시장 입구에 앉아 옛날 이야기와 유식한 문자를 섞어가며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서울 말씨를 쓰는 사람을 이런 후미진 곳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으므로 그는 이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장꾼들이 던져주는 돈을 받아 밥도 사먹고 잠잘 곳도 마련했으니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그야말로 동가식 서가숙의 방랑생활이었던 것이다."(고창읍 화산리에 살았던 홍경표의 증언)
이 재담꾼이 바로 홍낙관이다. 그는 서울 출신인데 어느 때인지 고창읍 회산리의 남양 홍씨 마을로 찾아왔다. 그리고 같은 일가라는 인연으로 이곳 홍씨들에게서 밥도 얻어먹고 잠자리도 마련했다. 이로 보면 그는 순 상놈은 아니었던가 보다. 이곳 홍씨들은 그가 서울의 무슨 사건에 연루되어 몸을 피해 이곳으로 흘러들었다고 수군댔다. 이곳 동학농민군의 행적을 오래 추적한 고창문화원 이기화 원장은 그 무슨 사건은 아마도 같은 성바지인 홍영식이 주도한 갑신정변일 거라고 추측했다.
'사건' 연루 도피 생활
이 추축이 맞는다면 홍낙관은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아내는 데리고 오지 않았으나 동생 계관·동관(형제간이라고 추정될 뿐이다.)이 뒷날 농민군에 가담하고 또 아들과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아 깊은 사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무장·백산봉기 두령
또 어느 때인지 며느리를 얻었는데 하필 세습 당골이엇다 한다. 등골 며느리를 얻으면 천민신분으로 떨어지게 되는 당시의 처지를 감안해 보면 아마도 무척 살기 어려웠던 탓일 것이다. 고창의 당골은 동부 당골과 서부 당골로 구역이 나뉘었는데 그의 며느리는 서부의 홍당골이었다. 적어도 당골은 먹고 살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이 일로 하여 화산의 홍씨들은 그와 교유를 끊어버렸다 한다.
아무튼 그는 무장·백산봉기 때 두령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집강소 기간에 그는 천민부대를 이끌고 활약했다. 그의 동생들 행적이 함께 나타나는 것도 이때다. 천민부대를 이끌 적에 당골 며느리의 존재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민부대의 자세한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잡힌 뒤 고창 유진교장(留陣敎長) 홍경원이 보고할 적에 "큰 괴수 홍낙관"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와 천민부대의 활약이 컸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가 잡힌 것은 1894년 12월 초순이었다. 그는 현지에서 처형되지 않고 서울로 끌려가 전봉준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다행히도 사형은 면하고 장(杖) 백대를 맞고 3천리 밖으로 유배되는 판결을 받았다. 이것으로 그의 활동이 끝났던가?
1898년 11월 16일 전북 흥덕의 농민 3백여 명은 이화삼이라는 두령을 앞세우고 흥덕관아를 습격해 들어갔다. 이들은 무기를 거두어 들이고 관아를 차지해 잇다가 반격을 받아 퇴각했다. 이 사건은 영국인 목사가 말목장터에 세운 교회에서 비롯됐다. 교회를 중심으로 '영학계'라는 조직이 이루어졌는데, 이들 영학계 계원들이 흥덕민란 또는 영학당 사건이라 부르는 관아 점령을 주도한 것이다. 이의 지도자 이화삼은 농민군 지도자 출신이었다.
전봉준과 재판, 유배
이듬해 정읍의 최익서 등은 정읍을 비롯하여 고부·흥덕·무장·고창·장성 등지로 조직을 확대하여 4월 농민 4백 여명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했다. 이때 농민군은 '벌왜' '벌양' '보국안민'의 깃발을 내걸고 나섰다. 이들은 1차로 고부의 무기를 접수한 뒤 흥덕관아를 차지했고 이어 무장으로 진출하여 무기를 빼앗았다. 이달 22일에는 고창읍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벌였다. 그러나 날이 어둡고 비가 쏟아져 수성군에 패전하고 주력부대가 해산했다.
이때 이들은 "하지 못할 일이 없으며, 화응하지 않을 바가 없으며, 알지 못할 것이 없으니 공변괴고 거룩하지 아니하나."고 외치고 다녔으며 '성찰'따위의 소임을 주어 독려했다고 한다.(사법품보-- 광무 3년에 나온 재판기록)
4년 뒤 다시 붙잡혀
여기에 홍낙관·홍계관의 이름이 등장한다. 처음 잡힌 지 불과 4년 뒤의 일이니 그는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이곳에 와 일을 벌인 것인가? 또 흥덕민란 관련 기록에도 홍낙관의 이름자에 '큰 괴수'라고 부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 사건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가 사형당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그의 며느리와 아들 손자들의 이야기가 아련히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의 당골 며느리와 손자며느리는 고창읍 성남동에 살면서서부 당골로 군림했는데 그들의 영향력은 고창 일대만이 아니라 영광·무장에까지 뻗쳤다.
또 유난히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 어느 땐가 당골집이 불에 타버렸는데 이 집을 사면 재수가 있다고 하여 마을 사람이 사 새집을 지었다 한다.
현재 당골내 터에 살고 있는 최인봉씨는 "이 당골 할미는 새마을 사업으로 미신을 타파할 적에 생계가 막혀 떠나버렸다."고 전한다.
오늘날 그에 앍힌 이야기는 이 정도로 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처절하고 끈질긴 삶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터뷰/ 고창문화원장 이기화씨
농민전쟁 묻힌 역사캐기 30년
"어머니로 모신 분 알고보니 홍낙관의 며느리"
"내가 태어났을 때 세살까지 수가 사납다는 명괘가 나왔데. 그래서 집안에서 당골에게 나를 팔앗지. 실제로 어머니라 부르며 가깝게 모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흥낙관의 며느리였어."
30년 남짓 고창 일대의 동학농민운전쟁을 연구해온 이기화(59) 고창 문화원장은 "따지고 보면 나도 농민전쟁 지도자의 후손"이라며 웃는다.
고창 문화원을 지난 63년 설립해 30년째 원장직을 맡고 있는 이씨는 한평생을 고집스럽게 고향의 뿌리를 찾는데 바쳐왔다. 고창에서는 그르 가리켜 '걸어다니는 박물관'이라고 부른다. 고창의 문화유적치고 그의 손때가 묻지 않고 발굴되거나 복원된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동학농민전쟁만 하더라도 전봉준·홍낙관·홍계관·오시영 등 주요 인물들의 많은 행적이 그의 연구를 통해 빛을 보게 됐다.
"이리농대를 졸업하고 농촌운동을 벌이다, 지역문화에 관심이 생겨 문화원을 개설했지. 그런데 노인당의 촌로들이 녹두장군은 고창 당촌 사람인데 왜 고부사람으로 둔갑했느냐며 꾸짖으시는거야. 그 꾸짖음이 나를 이길로 들어서게 한거지."
16. 이희인(1846∼1894)
- 세성산 전투 이끈 '꼿꼿한 선비', 북접 계통 지도자…우금치 전투에도 영향미친 뼈아픈 패배
동학농민전쟁 중에 목천(지금의 천안) 일대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회덕·공주·청주·천안의 중간에 끼어 있는 이곳은 양반붙이가 많이 사는 고장이었는데 1894년 봄 잘라도에서 처음 농민봉기가 일어났을 적에 맨먼저 호응한 곳이 바로 회덕 등 이 일대였다. 양반 토호가 극성해 그득에게 짓눌린 하층민의 고초도 더욱 컸던 것일까. 또 농민군의 2차 기병 때 농민 연합군과 정부·일본군 연합군의 대회전이 벌어진 공주에서 경기도 안성, 멀리는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공주 전투에 앞서 목천 세성산에 농민군이 집결하여 공주의 배후를 지키게 된 것도 그런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독자적으로 행동
이곳의 농민군 지도자가 바로 이희인·김복용이었다. 이들은 동학에서도 북접계통이었다. 그러나 최시형의 북접이 초기에 호남 남접의 봉기에 최후까지 반대를 표명하던 상황이었는데도 이곳에서 호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은 북접의 지휘만 착실히 따르기 보다는 독자적 판단으로 행동했던 듯하다.
이희인은 왕 세종의 후손이었다. 할아버지 수익은 무과출신으로 평양감영의 중군과 서산군수를 지냈고 수익의 큰아들 학래도 부사를 지냈다. 당시 양반들 가운데는 벼슬을 사기만 하고 실직에는 나가지 않으면서 행세나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은 실제로 수령노릇을 했던 것이다.
이희인의 아버지 봉래는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큰 지주였다. 맏형 희민은 학래의 양자로 나갔는데 그 역시 참봉직함을 가진 큰 부호였다. 희인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나 글잘하는 선비로 이름난 향촌 지식인이었다. 벼슬아치의 손자요, 지주의 아들인 이희인이 동학에 입도한 내력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1893년 2월 동학도들이 올린 상소문에도 이름을 남겼다. "지금 조선으로 조선을 공격케 하는 것이 왜양(일본과 서양)의 장기이니 통곡스럽고 한심스럽다…창의하여 왜양을 치려는 것이 무슨 큰 죄라고 한쪽으로는 잡아 가두려 하고, 한쪽으로는 제거하려 하는가?" 강력한 시국관을 피력한 이 글에는 허연·서병학 등 동학의 상당한 지도자 6명의 이름이 함께 연명되어 있어 그의 비중을 짐작케 한다.
그의 기개나 인품을 전해주는 일화들도 남아있다. 그는 목천현 병천면 병천리 개목마을(지금의 신촌)에 살고 있었는데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북면의 양지리에는 흥선대원군의 사위요, 판서를 지낸 조경호(1839∼?)가 살았다. 한번은 이회인이 고향을 떠나 있던 조경호를 서울로 찾아갔다. 그는 조경호에게 "자칫하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된다.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좋은 정치를 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대답이 시원치 않자 그느 영창문을 때려부숴 마당에 내팽개치고 나왔다(손자 호익의 증언).
이런 그가 토호로서 세력이나 부리며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상이 유달리 커서 '이대가리'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그는 민중들의 고통을 두루 살핀 탓으로 성망이 높았다 한다.
1894년 9월 농민군의 2차봉기가 단행될 적에 그는 김복용과 함께 목천에서 본격적으로 기병했다. 그리하여 목천·천안·정의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모조리 빼앗고 양곡을 거두어 세성산과 적성산으로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서로 마주 바라보는 두 산은 그 중간길로 들어오는 롁거을 공격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들은 겨울을 앞두고 적성산에 구들을 놓아 초막을 짓고,세성산에 토성을 쌓아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이때 목천 일대는 농민군의 수중에 떨어져 농민군의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향토사학자 이원표씨의 증언).
정부군의 우선봉장으로 남하한 이두황은 이때 죽산의 상황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목천의 도적들이 두 진영의 사이에 죽치고 장차 큰 일을 저지를 염려가 있다. 또 서울길과 아주 가까워 선봉(자신의 군대)의 앞길에 장애가 될 것이다. 그러니 서울 가까운 도적을 격파하여 우리 군사가 승리를 기록한 뒤 그 승전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승승장구 해야 우리 군사는 기세가 올라갈 것이요 도둑들은 예기가 꺾일 것이다."(양호우선봉일기)
이곳은 이처럼 중요한 전략지점이었다. 이두황의 우선봉군은 청주 병영군과 함께 북면 양지리에 유진소를 두고 주변의 민가를 불태우고 수색을 벌이며 이곳을 압박해 들어갔다. 동학의 남접과 북접이 의견조정에 한달 가까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서울으 조정에서는 토벌의 대열을 정비할 시간을 얻은 터였고, 청일전쟁을 평양전투를 통해 승리로 이끈 뒤 압록강 유역까지 추격하고 난 일본군도 여유를 얻은 상황이었다. 그 일본군도 관군과 손잡고 문의·연기 일대를 수색하며 모여있는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 10월 21일 이두황군은 세성산 밑에 이르렀다. 이두황은 "세성산은 삼면이 심한 절벽이고 함면만이 조금 평지였는데 진지가 매우 견고하고 넓었다. 깃발이 숲처럼 서 있었고 포성이 들판을 울렸다."고 그날 아침 정경을 기록하고 있다.
서울 길목 전략 요충
이두황군은 세 갈래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농민군은 해질 무렵 진지를 버리고 흩어져야 했다. 이두황군은 달아나는 이들을 몇십리나 뒤붸아가서 쏘아 죽이기도 하고, 사로잡기도 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 노획물은 총과 창 4백 28자루, 화살 5천 3백 촉, 탄환 2만 5천 5백 개, 철환 36만 6천 개, 곡식 7백 여섬 등이었다. 이두황은 이 싸움에서 희생된 농민군 숫자는 밝히지 않고 추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아 죽인 숫자가 17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성산 밑 슨냥리 사람들은 산속에 시체가 하도 많이 쌓여 있었다 해서 지금도 이 산을 '시성산'(시체가 쌓여 이룬 산이라는 뜻)이라 부른다. 산 아래를 흐르는 개울은 피가 얼마나 흘렀던지 '피골'이란 이름을 얻었다. 농민군이 이 거점을 잃은 것은 며칠 뒤 공주전투에서 전술적 상처로 나타났다.
이두황은 세성산 전투에서 유명한 우두머리 김복용을 사로잡았으나 '거괴'는 잡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거괴' 이회인은 과로가 겹쳐서 가랫톳이 서서 멀리 달아날 수가 없었다. 우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은 이미 불타고 없었다. 겨우 몸을 움직여 이웃마을에 있는 사돈집에 숨어들었으나 동네 사람의 밀고로 붙잡혀 갔다. 가랫톳이 생명을 앗아간 셈이다.
그가 유진소에서 닦달을 받을 적에 형 희민은 달려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희민이 참봉벼슬을 얻었고 또 양반지주여서 소홀히 대접할 수가 없었던지 책임자(아마 이두황이었을 것이다.)는 목천현감의 신임장을 얻어오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형 희민이 겨우 신임장을 받아와보니 이미 이희인을 사형에 처한 뒤였다.
밀고로 잡혀 처형
이희인은 북면 사기실에서 여러 부하 농민군들과 함께 24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가 살던 개목마을은 동학의 집단주거지라고 하여 깡그리 불태워 없애버렸다.
이희인이 주도한 이 고장은 그 뒷날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항유길은 곡식을 빼앗아 군량미로 실어 날랐다고 매맞아 죽었다. 그리고 북면 접주 정인석은 종중에서 많은 뇌물을 바쳐 겨우 살아남았다. 황해도 일대에서 농민봉기를 주도했던 김구도 몸을 피할 적에 이 정씨마을에서 한때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뒷날 정씨 종중에서는 뇌물마련 때 얻은 빚 감당에 지쳐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정인석의 후손과 짐안 10여 호는 밤을 틈타 만주로 이주해 갔다.
(위 이원표씨의 증언)
인터뷰/ 이희인의 손자 이호익씨
'할아버지 정신 잊지 말았으면
일제 징용·생활고로 지긋지긋한 고생
"동학전쟁을 얘기하라고? 말도 마. 다른 건 둘째치고 일제시대 강제 징용돼 고생한 생각이 몽서리가 나. 일본 사람들 왜 그리 몹쓴 짓만 골라서 했는지 원."
농민전쟁 당시 세성산 전투를 주도한 이희인의 손자 호익(76. 충남 천안군 병천면 병천 6리)씨는 할아버지와 관련된 얘기를 묻자 대뜸 강제 징용당한 고생담을 꺼냈다.
"농민전쟁 이후 집안이 겪은 고통은 대부분 일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호익씨는 22살 나던 1942년 일본 규슈의 탄광으로 강제징용 당했다. 전쟁물자 징발에 열을 올리던 마을 이장에게 밭일을 하던 어머니가 은비녀를 빼앗기자 이장을 붸아가 따진 것이 화근이 되었다.
"지긋지긋한 날들이었어. 전부가 조선사람이었는데 낮밤 2교대로 짐승처럼 일만 했지. 꼬박 3년이 넘게 지하 막장에서 일을 하고서야 귀국선에 탈 수가 있었어."
집안에서 호익씨만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당숙인 건용씨는 만주에서 지하운동을 하며 가진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건용씨는 특히 아들이 신식교육을 받자 "친일파가 됐다"며 온몸을 때려 그 여독으로 아들이 죽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농민전쟁에 많은 재산을 쓰고 일제시대에는 농민군 후손이라고 시달린 탓에 해방 뒤로도 호익씨는 생활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다. 지금도 부인과 함께 몇마지기 안되는 땅을 부치며 대학 진학을 앞둔 아들을 힘겹게 뒷바라지 하고있다. 지난해 봄 교통사고를 당한 뒤 기력도 눈에 띄게 쇠약해져 방에 드러누워 있는 시간도 부쩍 많아졌다.
"동학백년이라고 어떻게 알았는지 하나둘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 나야 별로 아는 게 없는 늙은 노인네지만 우리 할아버지들이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정신만큼은 젊은 사람들이 잊지말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
17. 최맹순(1852∼1894)
-양반고장 예천서 봉기 횃불…조직력 뛰어난 옹기장수…예천읍 둘러싼 피맺힌 전투
경상북도 서북부 곧 낙동강 상류지역인 상주·선산을 비롯하여 안동·의성·예천에서는 1894년 치열한 갈등이 벌어졌다. 이 지방은 양반 토호의 고장으로 이름높았는데 여기에 맞선 하층민들은 때를 타서 일대 저항에 나섰다.
초기에는 북접의 지시를 받고 있던 탓인지 궁아를 점령하는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으나, 2차봉기 무렵에는 성주·상주·선산·김산(김천) 등지의 읍성이 함락되었고 낙동강 주변의 일본 병참기지를 습격하여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이런 속에서 예천은 농민군의 희생이 컸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곳은 양반 토호 구실아치를 묶은 보수세력과 농민 소상인을 묶은 농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농민군이 패배하여 많은 살륙이 따랐던 것이다. (신영우의 갑오농민전쟁과 영남 보수세력의 대응)
스무살 무렵 입도
예천 지방의 지도자는 최맹순이었다. 그는 본래 강원도 춘천 사람으로 스무살 무렵 동학에 입도하여 몸을 숨기며 동학 경전을 익혔다. 아마도 최시형이 1870년에 강원도 일대를 잠행하며 포덕에 열중할 적에 인연이 닿아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느 때 무슨 연유로 예천땅 동노면 소야리로 흘러들어 왔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최맹순은 고향땅을 떠나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옹기장수를 했다. 소야마을 근처에는 좋은 옹기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그가 여러해 옹기를 팔고다닌 것은 생계를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신분을 가장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르나 이런 장사는 천한 출신 또는 가난한 사람들이 벌이던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그는 단순한 옹기장수가 아니었다. 아웃집에 사는 장북극을 동학에 끌어넣기도 하면서 동학조직을 넓혀갔다.
열정적 '관동 수접주'
1894년 3월 보은집회가 있은 뒤 경상도지역의 동학교도들은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듬해 3월 고부봉기가 한창 일어날 무렵, 최맹순은 후진 소야마을에 접소를 차리고 관동수접주라고 일컬으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뒤인 6∼7월에는 면과 리단위에까지 조직을 만들어 나갔는데 48개 접소에 7만여 명을 끌어들였다.
이런 기록이 있다 ." 큰 접소는 1만여 명, 작은 접소는 몇천 명이 되었는데 시정의 불량청소년 ·평민·노비·머슴 따위들이 자기 멋대로 뜻을 얻은 때라 여기고 관장을 능욕하고 사대부를 꾸짖으면서 마을을 노략질하고 돈과 재물을 빼앗으면서 무기를 도둑질하고 남의 노새와 말을 몰아가고 남의 묘를 파헤쳤다.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 사람을 묶어 두들겨 패서 더러 죽이기도 했다.(갑오척사록)
이렇게 군단위에 큰 조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최맹순의 열정과 지도력이 뛰어났음을 알만하겠다. 더욱이 이들은 예천 읍내를 제외하고는 서북지역의 행정을 장악하고 향촌질서를 재편하고 잇었다. 또 함양 박씨의 유계소를 농민군이 빼앗아 접소로 삼는 등 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금곡접소에는 몰락양반인 함양 박씨들도 농민군에 가담했거니와 만석꾼으로 이름난 전돼지 (본명은 기항)가 모량도감이 되어 경비를 대고 있을 정도였다. 전돼지는 모습이 돼지 같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인데 "돈 많고 글 잘하고 풍채 좋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향촌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고손자 전장홍씨의 증언)
농민군은 7월들어 영장을 지낸 토호 이유태를 끌어내 두들겨 패고 곡식을 빼앗아가기도 하고, 읍내로 들어와 악질 구실아치 김병운을 두들겨 패고 그의 아버지 묘를 파내기도 하고, 안동부사가 경진가점을 지날 적에는 부사의 의관을 빼앗은 뒤 두들겨 패고 마누라의 비녀, 가락지 따위의 여장을 깡그리 빼앗아 가기도 하엿다.
이럴 적에 최맹순은 아무런 준비도 없는 읍내를 공격하려 하지 않고 농민군의 행패만을 막고 있었다. 더욱이 위의 짓거리를 일삼는 유천접주의 죄상을 적어 읍내로 보내기도 했다. 이동안 읍내의 양반층과 향리들은 집강소라는 이름으로 개고간에 본보를 두고 1천 5백여 명의 민보군을 조직햇다. 그리고 농민군에 대응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8월 9일 북부 구산마을에 농민군 수십명이 들이닥쳐 지주집을 습격했다. 이때 민보군이 출동하여 농민군 11명을 잡아왔다. 농민군이 "우리를 죽이면 너희달이 살아남을 것 같으냐"고 호령하자 이들을 한천 냇가로 꿀고가 생매장했다.
읍내 봉쇄전술 실패
이들은 금곡접 소속이었는데 금곡접주는 물론 최맹순은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최맹순은 읍내의 집강소에 "불쌍한 저 백성들은 관에서 얼거내는 가렴주구와 구실아치의 토색질과 양반의 토薽짓을 견디기 어려워 조석도 살아갈 수 없다."는 글을 보내고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또 집강소의 설치를 힐문했다. 이어 금곡퍼덕도와 화지도회에서도 집강소의 행동을 나무라고 함께 일본 공격에 나서자고 요구했다. 이른바 보수 집강소에서는 이들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타이르고 있었다.
농민군의 연합부대 곧 최맹순 도접주를 비롯하여 상주·용궁·안동·풍기·영천·문경·단양 등의 13접주가 예천읍을 공격한다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북쪽의 금곡, 서쪽의 화지에 수만 명의 농민군이 집결하고 나서 예천읍을 사면으로 틀어막고 양식과 땔감의 통로를 막으면 한달이 못되어 굶어죽게 된다는 전술을 짰다.
이 사실을 염탐한 집강소에서는 8월 23일 먼저 공격에 나서서 약간의 피해를 입히고 퇴각했다. 하지만 읍내는 절박한 지경에 있었다. 이때 사정에 대해 <갑오척사록>은 "읍내의 방수가 거의 한 달동안 밤낮으로 계속되어서 사람들이 잠을자지 못하고 저자와 길 막힌 것이 또 한달 가까이 되어 땔감과 양식이 끊어져 읍내 백성들이 모조리 주려있고 울부짓는 소리가 진동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어쨋든 민보군의 공격소식을 들은 최맹순은 이때 결연한 행동을 개시하였다. 8월 28일 한낮 화자농민군 수천명이 읍내 10여리 지점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협공을 약속한 금곡의 농민군은 도착하지 않고 잇었다. 양쪽의 싸움은 밤까지 이어륵는데 갑자기 남쪽 동산에 횃불이 오르면서 안동의 구원병 3천 명이 온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농민군은 일시에 무너져 달아나다가 서정자 들판의 동남평 논에 무수한 시체를 남기고 퇴각했다. 민보군이 읍내로 들어와 승리를 자축할 적에 금곡의 농민군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민보군을 광천의 모래밭에서 일제히 농민군을 공격해 퇴각시켰다.
이렇게 승리를 장식한 이튿날 일본군이 들이닥쳤고 민보군은 금곡의 농민군 포덕소인 유계소 건물에 불을 질렀다. 무수한 농민군이 잡혀 죽었으나 최맹순과 전돼지는 몸을 숨겼다. 최맹순이 처음부터 읍내를 공격하지 않았고 또 봉쇄로 자멸을 기대린 것이 전술적 착오였을 것이다. 기득권을 누린 세력들의 악날함을 소홀히 본 것이다.
강원·충청서도 활동
최맹순은 강원도 평창으로 가서 농민군을 규합해 충청도를 거쳐 다시 예천 적성동을 공격했고 이어 충주 독기령을 넘나들며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끝내 11월 21일 아들 최한걸, 동료 장복극과 함께 잡히는 몸이 되었다. 최맹순은 남사장에서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고 최한걸과 장북극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때 최맹순의 부하들은 읍내로 숨어 들어와 구출을 도모했다 한다. 그러나 금곡 포덕소의 모량도감 전돼지는 끝내 잡히지 않고 뒷날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많은 재산은 모두 구실아치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한다.
인터뷰 /최맹순과 활약 '전돼지'의 손자며느리 정금섭씨
"시할아버님이 만석꾼이셨다는데 내가 이 집에 들어올 땐 숟가락 하나 안 남았어. 시어머님 모시고 살기가 워낙 힘들어 나중엔 산으로 들어갔지."
예천 일대의 농민군 지도자 '전돼지'의 손자 며느리 정금섭(94·대구 수성구 만촌 1동) 할머니는 백살을 눈앞에 둔 나이인데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작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 말고는 특별히 아픈데가 없어 지팡이 짚고 도네 나들이도 한다고 했다.
정씨는 열일곱살 나던 해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 마을의 동갑내기 남편 일호씨에게 시집왔다. 붙잡힘을 피해 뙘로 떠돌다 슬그머니 고향으로 돌아온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만석꾼 살림은 물론 남김없이 아전들의 차지였다. 고향살이라고 하지만 동학 얘기만 나와도 오금이 저리는 조바심에다 생계도 막연해 문경의 산악지대로 들어가 화전을 일궜다.
"화전생활도 참 힘들었지. 특히 겨울에는 식량이 모자라 가을에 모아둔 도토리를 껍질은 벗긴 뒤 방아로 찧어 팥고물처럼 만들어 먹었어. "
정씨는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금당실로 되돌아와 소작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6·25가 정씨의 삶을 뒤흔들어 놓았다. 예천 일대가 최고의 격전지였던 탓에 큰아들과 함께 피난 간 남편이 혼자 돌아온 것이다.
"걔가 아마 스물여덟살인가 됐을 때였어. 어쩌다 제 아버지와 헤어진 모양인데 지금도 죽었다는 생각이 안 들어. 그놈 얼굴을 다시 보기 전에는 눈도 못 감을 것 같애."
정씨는 예천에 후손들이 있지만 지금은 며느리와 함께 대구에서 산다. 증손자가 이곳에서 학교에 다니기 때문이다. 웃는 표정이 참 온화해 보이는 정씨는 올해 고등학교 삼학년인 증손자가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8. 편보언(1866∼1901)
-양반토호 꼼짝마라 …김천 쥐고 흔든 '도집강', 행정권 장악…서슬퍼런 상놈 중심의 개혁
김산(지금의 김천 장터)는 조선시대 전국의 5대 시장으로 꼽혔다. 대구로 통하는 길목인 김천 강변에 큰 장이 섰던 것이다. 이 장터에는 소시장이 유명했고 장날에는 김천의 모래밭에서 곧잘 씨름판도 벌어졌다. 이런 중요한 길목에 농민군 도소를 설치하고 도집강이라는 이름을 내고 호령한 농민군 청년지도자가 바로 편보언인 것이다. 김산은 작은 고을이기는 했으나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라도의 집강소를 방불케 하는 집강이 설치되어 향촌의 권력을 틀어쥐고 양반과 토호를 징치한 격렬한 지역이었다.
무관 집안서 태어나
특히 위로는 상주, 아래로는 지례를 두고 때로는 양쪽 농민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기도 하고 직접 진출하여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편보언은 이곳 어모면 참나무골 주변에서 무관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이곳 편씨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유격장 편갈송의 후손으로 대대로 무과 벼슬을 하면서 양반 대열에 끼었으나 토박이 문과 출신 양반보다 격이 떨어졌다. 그러니 턱걸이 시골양반이 겪는 서러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땅 50마지기 날려
편보언의 아버지는 상당한 지주였던 까닭으로 아들에게 출세길을 열기 위해 글을 가르쳤다. 그는 살짝곰보이기는 했으나 장성하면서 "키 크고 글 잘한다"는 칭송을 받았고 아버지한테서 50마지기의 재산을 물려받은 중농이었다. (손자뻘인 편중언씨의 증언)
참나무골에는 어느때부터인지, 동학이 퍼지지 시작해서 온 마을이 동학촌이 되었다. 보은집회가 해산된 뒤 최시형은 몸을 경상도로 날려 칠곡·안동을 거쳐 참나무골로 와서 편보언의 집에 숨어 있었다.
이때 저 유명한 서병학이 찾아와 "교도를 모아 정부를 공격하고 국가를 혁신하기로" 진언하였다 한다. (천도교 창건사)
이로 보면 그가 당시 동학교단에서 상당히 인정받고 있던 인물임을 알만하다. 그는 동학포교에 열중한 나머지 50마지기의 재산을 몽땅 떨어먹었다고 한다.
1894년 봄 무장봉기에 이어 농민군이 승승장구할 적에 김산 일대에도 불꽃이 튀었다. 교통의 요지인 탓으로 소식이 재빨리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저곳에서 접소를 두고 양반 토호를 다스렸다.
그중 하나의 보기를 들어보자. 이곳 기동에는 양반 지주인 여씨 부자가 살고 있었다. 여씨는 유난히 소작인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었다. 이 집 며느리 또한 모질었다 한다. 이 집 며느리는 눈이 통방울눈에 키도 큰 미인이었고, 부잣집 마나님으로 위엄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마나님이 소작인이나 종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소작인들이 물건을 바칠 적에 마음에 들면 여지없이 챙기면서도 묵과 같은 시시한 물건이 들어오면 마당에 패대기치고 "이것도 음식이라고 가져왔소."라며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이곳의 접주는 여씨들의 정자 고지기 김정문이었다.
여씨 부자는 이들에게 돈과 곡식을 뜯기다가 지레 산골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관리인을 두어 재산을 빼돌리고 있었다. 농민군은 양곡을 모으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아무튼 지례의 농민군은 여씨 부자를 잡아다가 족치며 돈을 내게 하였다. 또 기동의 농민군은 여씨의 근모묘를 파내 관을 여씨 집 마루에 옮겨 놓았다. 이 묘는 남의 무덤에 혈맥을 끊고 강압으로 빼앗은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여씨는 집으로 달려가서 농민군을 향해 '역적질'을 한다고 호통을 쳤다. 결국 여씨는 죽지 않을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았고 농민군은 돈과 소를 빼앗아 갔다. 어떤 곳에서는 하층민이 옛 원한으로 토호를 죽이자, 그 아들이 다시 그 원수를 갚아 죽이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신영우의 갑오농민전쟁과 영남보수세력의 대응) 이런 소문을 들은 양반 토호들은 더욱 몸을 숨기기에 바빴고 농민군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상주·선산일대 점령
농민군의 접주들은 일정한 지휘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조직적인 활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동학교단과 직접 끈이 닿는 북접계통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전봉준과 연결되어 활동을 벌이는 세력도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각 지역의 접주들을 통괄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중에서 참나무골의 편씨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편보언은 김산장터에 도소를 차려 놓고 도집강이라는 이름으로 이를테면 군정을 실시한 것이다.
같은 해 8월 무렵 편보언은 김산의 총지휘자로 군림하면서 도소에 몰려드는 사람의 이름을 적고 교주 최시형의 도장이 찍힌 '예지'라는 증명서를 발급하고 또 접주·접사·성찰 등의 분임을 임명했다.
특히 성찰은 상놈으로 임명하여 폐정을 개혁하는 일에 착수하게 했다. 성찰은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책임자인데 무장 호위대를 저느리고 일선에 나가 일을 처리했다. 이럴 적에 종들이 속속 모여들었는데 그 상전은 종래와 달리 아무 대가도 없이 종들을 속량했으며, 속량을 거부하면 성찰에게 보고되어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도집강 편보언은폐정을 뜯어고쳐가면서 한편으로는 막대한 군량미와 재물을 거두어들였다. 도집강 아래에서 접주들은 말을 타고 짓발을 세우고서 마을로 들어갈 적이나 나올 적엔 포를 놓아 알렸다. 행정을 완전히 이들이 장악한 것이다.
9월 말께 북접 교단으로부터 편보언에게 기포령(起包令)이 내려졌다. 편보언은 이에따라 각 접주들에게 기군령(起軍令)을 내렸다. 감천의 모래밭엔 수많은 농민군으로 발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일본군 기습에 패주
그들은 바로 이웃 고을을 점령하여 농민군 통치지역을 확대하고 낙동강가에 있는 해평의 일본 병참부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어 그 여세를 몰아 공주쪽으로 진출하려 했다.
김산의 농민군은 상주·선산의 농민군 그리고 예천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맨먼저 선산의 관아를 공격하였다. 이들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관아를 접수하였는데 그 선봉은 김산 기동의 접주 김정문이었다.
농민군은 너무나 쉽게 선산을 점령한 뒤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럴 적에 일본군이 새벽을 틈타 기습을 감했해왔다. 이에 농민군은 혼란에 빠졌다. 일본군 총탄에 맞아 몇백 명이 쓰러지기도 했고, 성을 넘어 도망치다가 떨어져 죽은 자도 태반이었다.< (세장년록) 참조 >
연합 농민군은 상주도 점령하였는데 이때도 일본군의 기습으로 쉽게 무너졌다. 편보언과 김정문 등 김산의 농민군 지도자들은 다시 김산장터로 돌아왔다. 그리고 재기를 도모했다. 이때까지 출진을 않고 있던 대구의 남영병이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남영병이 김산장터에 들이닥친 것은 10월 5일이었다. 이때 편보언은 재대로 저항도 못하고 흩어졌다.
고향땅 숨어 살아
각지의 접주들은 계속 잡혀와서 모진 매를 맞으며 죽어갔다. 그러나 편보언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그후 다른 접주들의 활동은 이어졌으나 편보언은 어디로 꼭꼭 숨어 버렸다. 그를 두고 "글 잘한다"고 했으니 먹물을 너무 진하게 먹은 탓인가?
아무튼 세상이 조용해지자 고향 마을로 돌아와 숨을 죽이며 살았으나 재산은 모조리 빼앗겨 어렵게 생계를 꾸렷다 한다.
그러나 참나무골 편씨들은 많은 희생을 당했고 항일의식이 드높았다.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던 편강렬도 이들 편씨 집안이었다. 그의 큰아들과 둘째아들응遁 살길으 찾아 만주 서간도로 갔고 셋째 아들만이 고향에서 어렵게 살았다 한다.
인터뷰/ 편보언의 재종손 편중렬 씨
동학·독립운동 참여한 집안 전통 자랑스러워
"보언 어른은 동학에 열심이셨던 모양이야. 그 많던 살림을 다 털어먹었다는 얘기가 두고두고 집안에 전해지니 말이야."
경북 김천 일대를 호령한 편보언의 재종손 중렬(82·경북 금릉군 어모면 다남 2동)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편보언의 고향마을인 어모면에 손자 사열씨 등 직계 후손들이 살고 있긴 하지만 갑오년 당시 그의 활약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었다.
"보언 어른의 영향으로 집안에서 동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지. 같은 항렬의 겸언 어른은 당시 기천장터에서 왜놈들한테 처형당했고."
농민전쟁 뒤로도 집안 전체가 일본의 탄압을 심하게 받았다고 중렬씨는 말한다. 고향으로 되돌아와 숨을 죽이고 살았던 편보언은 밤낮으로 찾아다니는 감시원의 등살에 집을 다른 동네로 옮기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탄압이 심할수록 이에 항거하는 투사도 많았다고 중열씨는 자랑스러워 한다. 조선 총독 데라우치 암살미수 사건과 관련해 일어난 105인 사건으로 구속된 독립투사 편강렬 같은 이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만주에서 활약이 대단했지. 장춘·봉천 등지의 거리에서 대낮에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대. 1925년엔가 붙잡혀 서른여섯의 아까운 나이에 감옥에서 병사했지."
중렬씨는 이런 자랑스런 집안의 전통이 후대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걸 무엇보다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이 죽고 나면 누가 자손들에게 조상 얘기를 전하겠어. 제 뿌리를 알아야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인데."
19. 황하일(1845∼?)
-충청에서 호남까지 강경 깃발, 남접과 행동 같이한 북접 지도자…삼례·보은 집회 큰 몫
황하일은 강경파였고 서장옥과 함께 남접을 지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기록이 있다. "갑오란을 당하여 전라도를 남접이라 이름하고 충청도를 북접이라 이름하여 서로 배척하게 되었고 또 우스운 일은 전라도에 있어도 북접파가 있고 충청도에 있어도 남접파가 있어 그것이 거의하는데 큰 문젯거리가 되었다. (오지영의 동학사)
이렇게 달라진 것만이 아니었다. 두 계열이 만나면 처음에는 언쟁으로 시작하여 논란을 벌이다가 육박전을 전개하기도 하였고 끝내는 서로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황하일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처신했던가? 그는 1882년 서장옥과 함께 동학에 입도했다. 그 당시 최시형은 강원도 일대에서 오랜 잠행을 끝낸 뒤 없어진 <동경대전>을 인제와 목천에서 간행하고 본격적인 포덕에 나설 때이다.
이 무렵 손병희·손천민·박인호 등 많은 인재들이 최시형에게 몰려와 그야말로 동학의 중흥이 이룩되고 있었다. 황하일은 바로 이런 때에 동학에 입도했고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런 중흥의 기운을 틈타 최시형은 조직을 새로이 정비하고 보은 장내리로 나와 제자들을 이끌었다. 최시형은 최제우의 조난기념행사를 벌였는데 이때마다 서장옥과 황하일은 늘 앞장섰고 열성을 다하였다.
최시형이 다시 관의 주목을 피해 상주로 피신하였을 적에도 두 사람은 피신처를 찾아가 온갖 정성을 다해 생활을 돌보았고 또 최시형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1890년대에 들어 동학은 전라도 지역에 급속히 번져 나갔다. 최시형도 이곳으로 진출하여 포덕에 열중하였다.
서장옥과 함께 입도
이때 가설무대 같은 가건물을 세워놓고 징과 꽹과리를 두들기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군중이 모이면 어떤 사람이 "동학에 들어 살길을 찾자. "고 열변을 토한다. 그러면 군중들이 박수를 치며 몰려드는 것이다.
최시형이 자리를 정하고 입도식을 가졌는데 하도 사람들이 몰려들어 마당에 정수 한그릇 떠놓고 절하는 것으로 입도식을 대신하였다. 이것을 '마당포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럴 적에 황하일은 서장옥과 함께 전라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는충청도 출신으로 청주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했고 재판받을 때의 주소는 보은군 송림면 구강교로 밝혀져 있다.
그가 전라도로 진출한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동지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것이다.
이때 그는 서장옥과 함께 남접의 지도자를 끼우고 이끈 것이다. 그리하여 전봉준 등과 두터운 교분을 쌓으면서 어울렸다. 이때까지도 그는 최시형의 충실한 문도였다.
이렇게 세력이 커지자, 서장옥·서병학 등은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려는 운동을 벌였고, 최시형·김연국 등 교단의 지휘부는 이를 말리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끈질길 요구에 공주·삼례집회와 광화문 복합상소가 있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실제적인 주도자는 서장옥·서병학·황하일 등이었으나 동학교단에서는 삼례집회에 손천민, 광화문 상소에 박광호 등 온건파를 내세우고 있었다.
이때부터 강경파와 온건파가 뚜렷이 갈라졌고 강경파는 차츰 교단에서 배척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보은 집회가 열렸을 때에 지역과 인맥을 절충한 9인의 대접주를 임명하였는데 여기에 황하일 등 강경파는 한 사람도 끼지 못했다.
이들 대접주는 손병희·박인호·남계천 등 온건파로 짜여 있었고 서장옥·황하일 등은 지휘부에서 밀려나 있었다.
최시형 충실히 따라
더욱이 최시형은 관가의 수색을 피해 다니면서 1893년 11월에 온건파들을 각 도소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교도들의 난동을 막게 하였다. 그 까닭은 "전봉준이 교도들을 사사로이 빼앗아 전라도 금구군 원평에 주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때에 전봉준·김개남이 호남지방에서 교도들을 스스로 거느리고 더러 모이기도 하고 더러 흩어지기도 하면서 갑오년을 맞이했다."(시천교역사) 고 말했다.
바로 이럴 즈음 황하일은 남접에 동조하거나 북접의 강경파를 이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4년 1차 농민전쟁이 전개될 때 그는 최시형의 주변에 있었다. 최시형은 전봉준에게 봉기 중지를 명하는 글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끝내 말을 듣지 않자 '고절문'을 보내 관계 단절을 정식 통고하고 이어 북접 지도자들에게 '사문의 난적'이라고 지목하여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이럴 적에 북접 일부에서도 큰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온건파가 이끄는 변집강의 이름을 띤 신재련의 농민군이 강경파가 이끄는 민보군의 이름을 띤 허문숙이 대치하여 서로 죽이는 사태로 번진 것이다.
온건파와 첨예 대립
이들의 토벌에 나선 이두황은 "유학당 허문숙 서장옥 등 5만∼10만 명은 충주 용수포에 웅거하고 있고 동학당 신재련 등 4만∼5만 명은 진천 광혜원에 웅거하고 있으므로 머지 않아 서로 싸움을 벌일 것이라고 하는데 그 내막은 잘 모르겠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다.
두 세력은 적대관계로까지 발전하여 전면 대결을 벌이는 사태로까지 치닫고 있었다. 신재련은 이두황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
"허문숙의 도둑 우두머리는 비록 잡지는 못했으나 그들 떼러리는 흩어졌다. 방문을 각처에 걸고나서 장차 해산하고 돌아가려 하였다. 그런데 어제 저녁 무렵 각처에 피난하는 사람들이 급박하게 달려와 통보하기를 '허문숙·황하일(본문에는 상인 허와 황만 쓰고 있다) 두 도둑이 괴산 일부를 차지하고서 창고의 무기를 꺼내고 무리를강제로 모으고 있다. 그들은 방문을 붙여 명령을 시달하였는데 도인 한명 이상을 잡으면 천금을 상으로 준다고 하고 잡은 즉시 죽인다고 하였다.(이두황의 양호우선봉일기)
김개남과 청주 공격
일단 이들의 대결은 불발로 그쳤다. 그러나 신재련의 농민군은 진천을 들이쳐서 관아를 차지하고 무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황하일이 이끄는 농민군은 괴산을 들이쳐서 무기와 곡식을 빼앗고 물러났는데 뒤이어 성내를 불지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들은 출동한 일본군과 이두황군에 붸기거나 전투를 벌이다가 10월 초순께 청주로 방향을 돌렸다. 아마도 9월 18일에 최시형이 보낸 총동원령이 전달된 탓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북접 내부의 강등은 일단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북접의 농민군은 총동원령에 따라 논산·공주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도 서장옥·황하일은 다른 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이런 기록이 전해진다.
"청주는 지난 23일(10월인 듯)부터 동학도 가운데 서일해(서장옥의 호)라는 자가 수십만의 군중을 이끌고 수십겹으로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병사는 성문을 굳게 닫고 외부로부터의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위급한 상황에 있다."(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1)
이로 부아 청주를 중심으로 한 서장옥의 세력과 보은을 중심으로 한 황하일의 세격은 공주 대회전에 참여하지 않고 남접의 김개남 농민군과 함께 청주병영 공격에 나선 것으로 추측된다.
풀려난 뒤 행적 묘연
일본군 쪽은 충청도지역의 두령을 보고하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꼽고 있다. 아무튼 황하일은 잡혀서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유죄가 인정되어 태형 1백 대에 유배 3년의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사형을 최소한도로 줄이려는 일본의 정략에 따라 사형은 당하지 않았다. 그후 행적은 묘연하였다. 그는 천도교 등 관련단체에서도 영영 이름이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마지막 삶을 장식했을까?
인터뷰/ 충북·경북 일대의 농민전쟁 연구 신영우 교수
전라도 중심의 역사 서술 극복해야
80년 초부터 연구 시작 … 사료 하나하나 현장 확인
"최맹순, 황하일,. 편보언, 손천민 등 충청·경상지역에도 내로라하는 농민전쟁 지도자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이들은 근 1백년 동안 역사의 뒤안에 묻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였다."
충북과경북 일대의 농민전쟁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충북대 신영우(44·사학)교수는 이제까지의 이 분야연구를 "6월항쟁을 명동성당의 농성만으로 해석하는 것"에 비유했다. 명동성당의 농성이 6월항쟁의 정점이지만 그것만으로 6월항쟁의 전체상을 불가능하듯, 전라도 중심으로 서술돼온 농민전쟁의 역사도 이제는 전국차원으로 넓혀 그 전체상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80년도 초반부터 신교수의 농민전쟁 연구는 현장성을 제 1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연구자의 태도와 다르다. 그는 <고종실록>이나 <승정원 일기>등의 관찬사료를 중시하면서도 이를 반드시 지역조사르 통해 확인하고 보완해왔다.
"대학교수라고 책상에 앉아 사료를 자신의 사관에 꿰맞추는 방식으로 역사를 정리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사료 하나하나를 현장에서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사실성이 검증되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역사가 살아있는 실체로 재구성이 된다.
10년이 넘게 산간벽지를 답사하는 동안 일화거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신교수는 말한다. 노인정에서 여러 차례 밥을 지샌 것은 물론 한밤중에 차가 끊겨 장의차를 얻어타거나 경운기의 나뭇짐 꼭대기에 앉아 산 고개를 넘은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의 아런 발걸음이 하나로 모인 것이 박사학위 논문인 '갑오농민전쟁과 영남 보수세력의 대응' 이다. 경북 에천·상주·김천 일대의 농민전쟁을 분석한 이 논문을 통해 이 일대의 주요한 농민전쟁 지도자와 전쟁 양상이 되살아 났다.
그는 이 지역의 노인전쟁이 전라도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일어나지 못한 것은 "양반 보수세력의 힘이 전라도지역보다 훨씬 컸고 일본이 병참부를 설치해 농민군의 발흥을 견제했기 때문" 이라고 분석한다.
1차 사료를 제대로 모으는 것이 연구의 첫단계 라고 강조한 신교수는 앞으로도 이 지역을 샅샅히 돌아다닐 것이라고 말했다.
20. 손천민(1857∼1900)
-전봉준 노선과 극한 대립. 최시형의 오른팔, 북접 보수파 대표적 지도자…무장봉기 거센 반기
동학농민전쟁을 앞뒤로 하여 동학 교단에서는 많은 글을 각지에 띄우거나 보냈다. 이런 글을 도맡아 쓴 사람이 바로 손천민이다. 손천민은 그만큼 학식과 문장이 뛰어났다.
그리하여 최시형의 오른팔 노릇을 했고 또 최시형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탓으로 보수파 또는 우파로 지목된다. 이런 과정에서 그의 역할 또한 어느 의미로 따지든 컸다.
그는 청주목 관할 아래에 있는 솔뫼(지금의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에서 살았으며 아전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도 이방 노릇을 했다. 아전을 지냈다고 해서 모두 재산을 모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장자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생활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방 출신 문장가
그는 어릴 적에 글을 배원 물리가 트였고 또 글씨도 아주 잘 썼다. 이런 그였으니 솔뫼의 넓은 들판에 자리잡은 집살림을 꾸려나갔으면 신분은 낮았지만 행세깨나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나이 스물 여섯살 때인 1882년 겨울에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 당시는 최시형이 강원도에 근거지를 두고 경전을 간행한 직후로 충청도 일대에는 아직 포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동학에 입도한 것이 어떤 인연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의 표현대로 "민심이 날로 떨어져 나가고 국세가 날로 외로워지는" 현실 때문인지, 푸대접 받은 중신신분 탓인지 모를 일이다. 그후 그는 동학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표덕에 열중했고 교조 최시형도 지성스럽게 받들었다. 이렇게 포덕에 열중하고 또 입도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자 관가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하여 관가에서는 최시형을 잡아들이려 하였고, 손천민도 체포대상으로 지목되었다. 그가 몸을 피해 다닐 적에 아내가 잡힌 적도 있었다. 이때쯤 그는 동학의 지도자로 떠올랐던 것이다.
1892년 겨울 들어 강경파가 중심이 되어 교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고 동학 도인의 탄압을 중지하라는 요구를 하며 공주와 삼례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에 충청감사 조병식과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항의문을 보냈고 또 도인들에게 그 대의를 밝히는 입의문과 발의문을 전국에 띄웠다.
이때 최시형은 삼례집회에 참여하러 오다가 낙상을 당하는 바람에 손천민을 대표로 삼아 삼례로 보냈다. 손천민은 자신의 주견을 섞어 모든 문서를 작성하였다. 풍부한 지식과 잘 쓰는 글씨로 문장을 엮어냈다. 하지만 그 중심 내용은 어디까지나 '교조의 신원'에 있었다.
이듬해 1월 삼례의 결의에 따라 임금에게 상소하기로 하였다. 이 일을 위해 모일 장소를 보은 장뇌리로 정하고 그 상소 실무 일은 솔뫼 손천민의 집으로 정했다. 이 상소문도 손천민이 지었다.
교조신원 상소문
그 상소의 내용은 온건했으나 명문이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때 행동으로 옮겨 위양세력을 몰아내자는 강경파를 꺾고 온건파는 별 효과도 없이 보은으로 돌아왔다.
이해 3월 보은집회가 있었고 집회 도중에 전국 26명의 대접주를 임명하였는데 그는 청의대접주로 청주 일대를 관할케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강경파와 온건파의 갈등은 표면에 드러났고 그는 김연국과 함께 온건파(혹은 보수파)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의 명먕에 흠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뛰어난 문장력도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노선은 어디까지나 최시형의 가르침을 따라는 것으로 "도로써 난을 지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끝내 전봉준 주도의 농민전쟁이 터지자 그는 이를 금지하는 통문과 효유문을 작성하여 도인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전봉준에게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할진대 효도랄 것이요, 상민을 구제하고자 할진대 어질 것이다 …… 운이 이미 열리지 않았으니 시기 또한 이르지 않았으니 망동하지 말고 진리를 더욱 찾아 천명을 어기지 않으면 좋을 것이다." 고 하였다. 이래도 전봉준이 말을 듣지 않자 '고절문'을 전국에 보내 전봉준의 농민군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시천교 역사에 나옴)
이래도 말을 듣지 않자 그는 최시형의 명을 받고 이해 9월에 삼례로 갔다. 그리고 전봉준을 만나 귀화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자 전봉준 등 남접의 지도자들은 칼을 빼들고 손천민을 죽이려 하였다. 손천민은 몸을 빼서 보은으로 허겁지겁 돌아왔다. (자신이 쓴 유언에 나옴)
그는 다시 보은에 자리잡고 앉아 계속 효유문을 띄우며 농민전쟁을 방해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더욱이 최시형의 총동원령에 따라 공주대처전이 진행된 적에도 그는 여기에 참여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북접이 공주 출진을 앞두고 치성식을 올렸는데 그 축문을 또다시 그가 썼다고 전한다. (천도교 백년약사)
그의 지휘 아래에 있는 송산포의 농민군 만여 명이 청주 동면에 집결해 있다가 청주목사 이장회가 이끄는 관군에 붸겨 달아났고, 이들은 괴산으로 가서 충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충의포에 합류했다고 한다.
손천민이 살았고 농민군을 규합한 솔뫼마을은 그 뒤 쑥대밭이 되었다.
남접에 살해될 뻔
그가 잡혔을 적에 스스로 종이와 붓을 달라고 해서 이때의 사정을 두고 "법을 어지럽히고 도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다스렸다."고 했고 또 "하늘의 우뢰가 이로써 동학에 죄를 돌렸다."고 했다.
아무리 잡혀 있으면서 죽기 며칠 전의 고백이라 해도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그의 행동폭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마무튼 취시형이 강원도 홍천에 몸을 숨길 적에 여기에 따라갔고 다시 지성으로 스승을 모셨다. 교세가 여지없이 쭈그러들었을 적에도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최시형은 정세가 누그러들자 1985년 겨울 원주 치악산 밑 수례마을로 옮겨와 살았다. 그리고 세 문도 곧 김연국에게 구암, 손천민에게 송암, 손병희에게 의암이라고 호를 내렸다. 이어 "너희들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천하가 이도를 흔들고자 할지라도 어찌하지 못하리라." 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암(세 암자 돌림)이라는 동학의 지도자가 탄생하였다.
한동안 세사람에 의해 동학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듯 했다. 그런데 1897년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했고, 이듬해 잡혀 처형당했다. 김연국은 새가만 후배를, 손천민은 여섯살 아래의 증조카를 교주로 받들어야 했다. 더욱이 최시형의 죽음을 두고 김연국·손천민은 스승을 붸아 순도하자고 주장했고, 손병희는 "살아남아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보수파와 진보파(또는 중도파)는 견해를 달리하기 시작했고 내면의 갈등도 유발되었다.
인간은 언제나 이해와 지위가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이 경우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손병희는 손천민을 성도주(誠道主), 김연국을 신도주(信道主), 박인호를 경도주(敬道主)로 삼았는데 이는 동학 수행의 기본인 성·경·신에서 도주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박인호를 제외한 두 사람은 세력이 약한 탓인지 어쩔 수 없이 굽히고 들어갔다. 하지만 이 도주의 자리도 곧 뒤바뀌어 박인호를 윗자리에 두는 수모를 겪는다.
손천민은 부하 서우순과 함께 청주 산외면 서상옥의 집에 있으면서 포덕에 열중하다가 끝내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18년 동안 동학을 포덕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사후 아들 재근은 손병희의 천도교에서 떨어져나가 천도명리교를세웠고 또 다른 아들 재기는 6·10만세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했다. 그의 후손들은 영락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일부는 미국으로 이민하기도 했다.
인터뷰/ 청원군의 마을이장 지낸 강순원씨
"손천민 신송리에서 세규합"
관군 토벌에 동네 온통 잿더미 변해
"산송리는 당시 동학의 충청지역 본부 정도 됐던 모양이야. 손천민이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세를 키웠지. 하지만 관군 토벌에 깡그리 불탔고, 그 뒤로도 동학일을 입에 담기 어려웠지."
손천민이 활약했던 충북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당시 청주목 남일면 송산리)에서 농민전쟁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이장을 지낸 강순원(58)씨만은 농민전쟁에 얽힌 이 마을 사람들의 얘기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강씨의 증조 할아버지와 사촌간이었던 강영문은 자신의 집을 포교당으로 내놓고 동학에 깊숙히 개입했다가 처형당했다.
"옛날 어른들 말에 의하면 당시 엄청나게 비밀스레 일을 꾸몄다더군. 동네 입구에 질병이 도는 것처럼 금줄을 쳐 외지인의 출입을 막고 산으로만 왕래했대. 동학 본보에는 특히 벙어리들로 하인을 삼아 비밀이 새니가지 못하게 하고."
강씨는 당시 농민군이 무기에 대해 전해들은 것도 적지 않았다. 큰 소 두마리 값을 주고 화승총 한자루를 구했고, 단단한 흙에 종이를 바른 뒤 독약을 칠한 지탄환을 만들어 무기로 했다고 한다. 사람 오줌찌꺼기에 화약을 섞은 자공황이라는 폭약도 만들에 사용했다. "당시 관군에 붙잡힌 농민군을 불태우며 위협을 했던 모양이야. 비복 하나가 겁을 먹고 신고를 했대. 동짓달 초열흘날인가 진눈깨비가 휘날리는데 관군이 습격을 했지. 제대로 전투 한번 못하고 다들 붙잡히거나 달아났고 동네는 온통 잿더미가 됐대."
농민군 후손들의 삶도 당연히 편치 못했다. 당시 열한살 먹은 강영문의 아들 학수는 친척집에 조차 있을 수 없어 오대산 월정사에 피신했고, 그곳에서 해금과 가야금을 배워 평생 해금을 켜며 전국을 떠돌았다고 한다.
"학수씨의 아들 대륜씨가 지금 삼천포에 살고 있지만 이곳을 잘 찾지 못해. 뭐 먹고 살기가 힘든 탓도 있었겠지만 아직도 피해의식이 좀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몰라.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 객지로 떠나 있는 후손들이 마음 편하게 고향땅이라도 밟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
21. 차기석(?∼1894)
-오대산 최후의 유격대장, 홍천·강릉등 5개 읍 총지…골짜기 피로 물들인 항전
동학농민전쟁 당시 강원도 지방은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이 지방에는 두 세력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였는데, 하나는 해안쪽을 다른 하나는 내륙을 중심으로 움직인 세력이었다.
이들은 중심부의 지시나 지원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유격활동을 줄기차게 벌였다. 애초에 내륙세력은 남하작전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경기도 지평에 근거를 둔 소모사 맹영제는 홍천의 남하도로를 차단하였고, 또 일본군도 남쪽세력이 강원도 산악지대로 잠입하는 통로를 막아 게릴라 활동을 봉쇄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런 사정에서 강원도 오대산 아래쪽을 중심으로 줄기차게 최후까지 유격활동을 벌인 농민군 지도자가 바로 차기석이다. 그는 홍천군 내면에 살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태어난 하나 출신성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일찍이 동학 입도
그는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 홍천대접주로 홍천지방의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했던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동학에 입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록이 있다. "내면땅에 차기석이라는 자가 있는데 스스로 득도했다고 일컬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꾀어낸 것이 천여 명이다. 전해지는 말에는 이들이 호남의 비도와 달라 학업으로만 일을 삼고 의롭지 않은 거동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그 도당을 보호하려는 말이지 진실로 믿을 것이 못된다. "(임명토비소록) 이로보아 그 세력의 규모를 짐작할만 하겠다.
1894년 9월에 들어 차기석은 최시형의 동원령에 따라 많은 농민군을 이끌고 북접의 주력부대에 합류하려 하였다. 그러나 맹영재의 민보군에게 길이 막혔다.
그는 다시 홍천으로 올라갔다. 이때 해안세력은 강릉 주변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해안세력은 원래 영월·평창·정선의 농민군과 제천 방면에서 합류한 농민군인데 최시형의 동원령이 있기 전인 9월 4일 강릉부를 들이쳐서 차지했다.
그리고 4∼5일동안 강릉부 삼정의 조세를 삭감하기도 하고, 부호에게 군사경비를 거두어들이기도 하고, 토지문서를 빼앗기도 하고, 구실아치를 잡아 가두기도 하고, 민간의 송사를 해결하기도 했다. 또 농민군을 더욱 규합하기도 하고 군기를 거두기도 했다. 남쪽의 집강소 행정을 방불케 했다.
이에 맞서 선교장의 이회원은 토호인 최씨들의 합력으로 새로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을 몰아냈다. 이회원은 이 공으로 강릉부사가 되었고, 농민군은 주변 고을로 흩어져 새로운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차기석의 농민군은 이와 달리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결집해 그곳에 위치한 동창의 곡식을 털고 나서 불을 질렀다. 그리고 이웃의 장야촌으로 물러갔다. 맹영재가 이끄는 민보군과 횡성현의 관군은 장야촌으로 진출했다.
이때의 사정을 맹영재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지난 10월 21일 행군하여 홍천 장야촌에 이르러서 비류 30여 명을 포살했다. 이튿날 서석면으로 가보니 비류 수천명이 백기를 세우고 진을 쳐 모여 있었다. 충을 놓아 접전했는데 그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갑오실기)
이 말처럼 차기석은 서석면 풍암리 언덕바지에 진을 쳤다. 지금 이곳에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의 왼쪽으로 뻗어나간 밭자락을 '진등'이라 부르는데 바로 농민군이 '진을 친 등성이'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곳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민보군 앞에 죽창으로만 무장한 농민군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싸움에서 8백여 명이 죽었다고 하며 음력 10월 22일에는 풍암리에서만 1970년까지도 30여 호가 한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 진등 일대의 밭에서는 길을 넓힐 적에 송장뼈가 무더기로 나왔다고 한다. (지금 고인이 된 최주호씨의 증언)
8백명 죽은 서석 전투
아무튼 이런 희생을 치르고도 차기석은 몸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근거지인 내면으로 진을 옮겼다. 그리고 본격적인 유격활동을 벌였다. 이보다 앞서 강를에서는 민보군을 결성하고 무과출신인 이진석을 중군으로 삼아 이들의 토벌에 나서고 있었다.
차기석의 농민군은 내면의 창고 옆에 목책을 세우고 각 마을의 집마다 조와 쌀 여섯 말과 마투리 한 켤레를 배당하고 가축을 거두어가기도 했다. 또 바다와 내륙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면서 정보를 전달하는 보부상을 징치했다. 농민군은 보부상의 재물을 빼앗기도 하고 말을 안듣는 수백명을 죽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양양 강릉과 홍천 원주의 통로는 끊겼고 오대산 주변은 해방구가 되었다. 관군이나 민보군은 서로의 연락망도 끊겼다. 이해 11월 초순 이진석의 민보군은 정선을 거쳐 평창으로 진출했고 원주에 주둔했던 일본군 2개 중대도 투입되었고 춘천의 관군도 기어들었다.
내면의 외곽인 정선과 평창에는 농민군 4천여 명이 집결해 있었다. 이때쯤 차기석은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의 농민군을 총지휘하는 다섯 읍의 접주로 꼽히고 잇었다.
적어도 차기석은 산악지대의 유격활동을 벌이면서 강원도의 농민군을 총지휘하게 된 것이다. 민보군은 맨먼저 평창 후평에 있는 농민군을 공격하여 백여 명을 살육하였다. 살아남은 농민군은 삼척쪽으로 내달았다. 민보군은 농민군의 중심부대가 포진해 있던 내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내면 골짜기는 깊고도 길었다. 내면에서 청도까지는 60리의 긴 골짜기였으나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았다. 양양을 넘나드는 구룡령에는 나무꾼의 길이 희미하게 나 있을 뿐이다.]
눈속의 살육전
11월의 이곳은 많은 눈이 쌓이고 엄청난 추위가 몰아친다. 명화적이 예전부터 이곳을 근거지로 겨울을 났었는데 이때 명화적은 농민군에 합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11월 9일부터 14일에 걸쳐 사면 포위작전을 폈다. 관군은 추위와 눈속에 달아나는 농민군을 잡는 대로 죽였다. 봉평에서 시작된 살육전은 창촌·원당·청도로 이어졌고 농민군 시체는 오대산 골짜기의 쌓인 눈을 피로 물들였다. 관군은 추위와 눈속에서 달아나는 농민군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농민군은 양곡의 절대량이 모자라고 추위 속이라 아螸트로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보군은 창촌을 거쳐 원당으로 지쳐들어갔다. 원당리에 대기하고 있던 차기석은 농민군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대 결전을 벌인 끝에 관군과 민보군의 협공을 받아 농민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차기석은 부하들이 죽어가는 속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차기석은 멀건 눈으로 부하인 성찰 오덕현, 집강 박석원 등이 포살되는 광경을 보아야 했다. 청도와 약수포로 끌려오면서 부하들이 참살당하는 모습도 보아야 했고, 농민군의 집들이 깡그리 불에 태워지는 꼴도 보았다.
강릉서 처참한 죽음
민보군의 지휘관 이진석은 차기석을 강릉에 보내고 나서 원주의 일본군에 전말을 보고했다. 이 무슨 추태인가? 차기석은 11월 22일 강릉의 교장으로 묶여 나왔다. 그리고 강릉 부사 이회원과 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막걸리 한잔과 돼지고기 한점을 삼키고는 포살당했다. 그리고 그의 잘린 몸은 원주의 순무영으로 보내져 조리돌려졌다.
지금 그의 전설은 강원도 사람들의 입에서 거의 사라졌다. 다만 오대산 한 바위에 그의 발자국이 큼직하게 찍혀 남아 있다는 전설이 아련히 전해진다.
또 지금 그의 후손을 찾을 길도 없고 차씨의 대동보에도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 홍천군 화촌면에 삼포리가 있었는데 어느새 농민군과 반농민군 마을로 갈라져 외삼포리와 내삼포리가 되었다. 갈등의 흔적은 이렇게 아직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인터뷰/ 13대째 홍천 살아온 최낙인씨
증조부등 집안 어른들 갑오년에 몰살당해
"국민학교 시절 여름 장마철이면 마을 어귀 언덕바지는 온통 수령으로 변했습니다. 귀퉁이가 무너져 여기저기 뼈다귀가 튀어나오고요. 지금 위령탑이 선 곳이죠. 밤이면 도끼비불이 번득여 나다니기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마을 아이들은 그 뼈가 누구의 뼈인지 왜 거기에 그렇게 많은지 아무에게서도 듣지 못했다. 여기서 13대째 살면서 지금은 퉷천 우체국에서 일하는 최낙인씨(33)도 마찬가지다. "동학군을 생매장하고 뒤덮은 거적들이 움썩거렸다는 얘기나, 황토흙에 검붉은 피가 자작자작 젖어들었다고 해서 자작고개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도 머리 크고 책을 보고서야 뒤늦게 알았지요."
최씨는 대학(강원대) 공부로 역사를 택했다. 그가 보여준 족보에는 열자 돌림이 갑오년 몰살당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최도열도 그러했다. 사망일은 음력 10월 23일, 서석싸움 마지막 날이다.
"그날 이후 증조할머니께서 두살배기 아이를 안고 피신해 오랫동안 산생활을 했답니다. 그 아이가 할아버지죠. 또 유복자였다고도 하지요. 아버님이 한푼의 유산도 물려받지 못할만큼 가산이 몰락한 건 물론이고요. 증조부께서는 천석꾼이셨답니다. 양반은 아닌 것 같고, 신흥부농이셨을 겝니다. 동학군에 군량미를 댔다는 설도 있지만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고…….확실치 않지요. 면장격의 일을 하셨답니다. 사발통문을 돌리셨다고도 하고요."
최씨 집안은 "세상도 변하고 겁도 나서" 동학을 끊었다. "집안 어른들로부터 동학에 관해 직접 들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아버님이 농민전쟁 이야기를 꽤 알고 계셨다는 것도 지지잔해 타계하시고 나서야 뒤늦게 전해들었거든요. 생전 말씀이 없으셨지요." 아버지 최주호씨는 홍천군 일대의 동학군 사연을 증언한 거의 유일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다음말을 덧붙이길 잊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지금같이 동학붐이 불었어요. 그때는 마을에 갑오년 생의 어른도 살아 계셨습니다. 하지만 답사왔던 누구도 그 분을 찾지 않던걸요. 관청 주위만 맴돌다 되돌아갔지요."
22. 김창수(김구: 1876∼1949)
-해주 전투로 용맹 떨친 황해도 17세 '아기접주', 산포수·상민부대 지휘…팔봉·구월산 누벼
황해도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라도 다음으로 감영과 수영이 일시 농민군 수중에 떨어진 지역이다. 그리고 약 3개월간 적어도 60% 이상을 농민들이 점령해서 다스렸다.
이 지역은 양반 톳호가 상대적으로 적은 탓으로 그 두드러진 봉기의 동기는 관권의 부정과 대일항쟁에 초점이 놓여 있었다. 따라서 '위동학당(僞東學黨)' 곧 외국인을 혐오하는 무리, 강도·절도나 그외 무뢰배·무직자로 생계가 어려운 무리, 지방관의 부정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무리, 사금 채취를 금지 당한 광부 등이 그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황해도 동학당 정토약 ? )
여기에 상놈과 포수들이 합세했으니 그 강도도 강원도나 경기도보다 훨씬 치열했다. 이 지역 상놈 출신 접주가 있었으니 바로 김창수다. 김창수는 뒷날 민족의 지도자가 된 김구의 본명이다.
과거 포기 병서 탐독
김창수는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대대로 터전을 잡고 살아온 안동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순영은 순무식쟁이였다. 그 자신은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행세를 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압제를 받아왔다.(백범일지)고 쓰고 있다.
그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글을 익혔고 과거를 보아 출세를 하려고도 했다. 그가 마지막 향시(감영에서 치르는 초시)에 일단 응해보았으나 온통 부정으로 치러지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달리먹었다. 축문 쓰는 법 따위나 익혀 행세해 보려 했고 풍수쟁이가 되려고도 했고 병서를 탐독하기도 했다.
이렇게 방황할 적에 그는 이웃 마을에 사는 최유현·오응선을 통해 동학에 입도했다. 그는 동학경전을 열심히 익히고 또 포덕에도 열중한 탓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와 동학에 들었다. 이때 그는 창암이라는 이름을 창수로 바꾸어 불렀다. 17살의 창수를 사람들은 '아기접주'라고 높여주었다. 그는 최유현·오응선을 따라 보은에 있는 최시형을 찾아보았고 또 이때 손병희 등의 동학교단의 지도자들을 만나 보기도 했다.
그가 보은에서 서울을 거쳐 해주로 돌아올 적에 동학농민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그가 사는 마을의 뒷산이 팔봉산이어서 발봉도소의 접주가 되고서야 '아기접주'라는 호칭을 뗄 수가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농민전쟁에 뛰어들기 전에 벌써 큰 사단이 벌어지고 있었다.
팔봉접주 맹활약
1894년 9월에 이 지역 산골에는 농민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 농민군은 연합하여 해주의 서쪽에 사는 취야장터에 수만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10월 6일 해주감영으로 몰려갔다.
농민군은 감영에 무혈입성하고 나서 군기를 빼앗고 문서를 불지르고 군인과 구실아치를 묶고서 두들겨 패대기를 쳤다. 심지어 감사를 당 아래에 꿇리고 몽둥이 찜질을 가했다. 농민군들은 성내를 물샐틈없이 틀어막고 있다가 사흘째에 들어서야 동서 두 대열로 나누어 성을 나왔다.
이 사실이 중앙에 알려지자 일본군 70여 명은 스즈키 소위의 인솔 아래 황해도로 파견되었고 또 현지에서는 유림·이교도들을 중심으로 농민군 토벌군을 결성했으며 평양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신천지방으로 진격해 왔다.
한편 농민군은 두 대로 갈라져 강령 신천 송화 문화 평산 등지를 차례로 접수했고 이곳의 방어성인 장수산성과 수양산성도 차지하였으며 옹진의 황해도 수영도 함락시켰다. 여기 농민군의 지도자 임종현은 관군 일본군과 접전을 곳곳에서 벌이며 치고 빠졌다.
농민군쪽에서는 많은 산포수들이 합세했고 사금 채취 노동자들이 가장 격렬하게 맞서 싸웠다. 한편 신천의 산포수 70여 명은 농민군 토벌에 앞장섰고 또 신천의 진사요 부호인 안태훈도 포군을 앞장세워 농민군을 치고 있었다.
농민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했다. 그리하여 해주 죽천장터로 일제히 모이기로 했다. 이때의 총지휘자는 최서옥이었다. 이들은 죽천에서 다시 취야장터로 집결해 있다가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다시 후퇴하였다.(갑오해영비요전말 참고)
포수 7백명 거느려
11월 27일 다시 해주감영 공격에 나섰다. 이때부터 김창수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팔봉접주 김창걁구는 막강한 산포수 7백여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 탓으로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으로 지명되었다.
이에 대해 그자신은 "내가 평소에 병서에 소양이 있고 또 내 부대에서 산포수가 많은 것도 이유겠지마는 자기네가 앞장을 서서 총알받이가 되기 싫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고 쓰고 있다.
팔봉접의 농민군은 먼저 성의 서쪽 선녀산에 진을 치고 성중을 내려다보며 총공격령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창수는 선발대로 하여금 남문을 공격하여 성내의 관군을 그쪽으로 끌어낸 뒤 서문을 공격, 입성하는 작전을 세웠다. 남문을 공격하던 선발대는 일본군의 기습을 불의에 받았다.
농민군은 일본군이 성안에 없는 틈을 타서 공격에 나섰던 것이다. 일본군은 성 바깥에 출동해 있다가 해주공격 소식을 듣고 뒤늦게 달려와 공격을 하였던 것이다.
산발대는 일본군과 한때 격전을 벌이다가 달아났다. 김창수는 어쩔 수 없이 서문을 공격하였다. 전투가 계속될 적에 총지휘부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김창수는 농민군을 이끌고 해주성에서 빠져나왔다.
이때 농민군의 총 수는 3만명이었고, 5시간에 걸친 전투를 벌였다. 김창수는 해주에서 80리 떨어진 회학동으로 질서정연하게 퇴각하고 나서 점검해보니 "무장한 군사는 축이 안나고 거의 전부 따라와 있는 것이 대견하였다."고 썼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기록에는 농민군을 30리까지 추격하자, 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고 또 산포수 20명을 포살하고 15명을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아무튼 이 전투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팔봉접주는 더욱 유명해졌고 또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농민군은 이 전투로 기세는 꺾었으나 좌절할 수는 없었다. 특히 김창수는 잘 훈련된 군사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는 군사경험이 있는 인물을 교관으로 삼아 조련을 시켰다.
진지 구월산으로 옮겨
다시 장기전에 대비해서 진지를 구월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재령과 신천에 일본군이 쌓아둔 곡식을 실어날라 구월산 패엽사에 옮겨 두었다. 이때 새로운 황해감사로 조희일이 부임해 와 유화정책을 펴자, 바로 김창수를 동학에 입도시킨 최유현·오응선 등은 농민군의 '무기를 거두고 해산시켜 귀화한다.'는 글을 올리고 있었다.
김창수의 기개는 이처럼 나약하지 않았다. 다만 청계동의 안태훈에게서 밀사가 와 서로 공격하지 말자는 제의를 받고 이를 수락하였을 뿐이다.
구월산 패엽사의 농민군 훈련 소식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들어갔음은 뻔한 사실이다. 일본군의 공격을 받을 급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다른 농민군들은 산악지대로 들어갔는데 그중 이동엽이 거느린 농민군은 큰 세력으로 구월산 근방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이동엽의 농민군이 노략질을 일삼자 김창수의 농민군이 이들을 잡아 처벌하였고, 또 이쪽의 농민군이 저쪽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김창수의 농민군은 세력이 쭈그러들었다.
김창수가 홍역을 앓아 자리에 누워있을 적에 이동엽의 공격을 받아 화포령장 이종선이 죽임을 당하였고 그 부하 농민군들도 그쪽으로 많이 붙었다. 김창수는 저항을 포기하고 숨어지내다가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재봉기…항일투쟁
한편 일본군이 구월산의 농민들을 공격하여 해산시키자 황해도 농민군 활동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화현 출신 이동엽과 중금월은 포살당했다. (사법품보)
그리고 살아남은 김창수는 황해도를 중심으로 재봉기의 활동을 벌였다. (이 사실은 다음 백낙희 편에 자세히 나옴) 김창수는 이런 활동을 벌인 끝에 본격적인 항일의 길로 들어섰다.
인터뷰 /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씨
아버님 활동 백범일지서 읽어
할머니 말씀에 쌀 두 섬 가볍게 든 장사
"나는 몰라. 상하이에서 났고, 아버님과 한집에서 산 적도 드물지. 환국해 2년간이 고작인가. 어머님도 날 나으시고 2년 못돼 곧 돌아가셨거든. 물론 1894년 어름엔 혼인도 안하셔서 얘기해주실 수도 없지만. 1939년(82살)에 돌아가신 조모님이 어머니인 셈이야. 하지만 동학을 입에 올리신 기억이 없어. 고향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백범일지>를 보고 알 수 밖에."
김창수, 곧 김구선생은 두 아들을 두었다. 김인은 45년 작고하고. 작은아들 김신(72·전 교통부장관)씨는 서울에 살고 있다. 그를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옆 백범회관에서 만났다. <백범일지>에 적힌 고향은 황해도 해주 땅. 그는 안동 김씨다.
"역적으로 몰려 도망친 양반이 머나먼 산골에서 어찌 살았겠소. 상놈으로 됐지. 가난해서 대대로 아주 어렵게 살았다. 술을 많이 했다. 이게 할머니를 통해 들은 전부야. 인천거리서 동냥을 해 어버지를 옥바라지 했고. 상하이에서는 나를 몇번이나 고아원에 버리셨다고도 들었어."
이래서 할머니가 다섯살배기 김신씨를 업고 26년 다시 황해도로 돌아올 때도 고향 대신 수십리 떨어진 안악을 택한다. "누가 있어야 가지." 지금도 외가건 친가건 고향 친척을 찾지 못했다.
"할머니도 아버님이 힘이 장사였다는 말은 자주 하셨어. 쌀 두섬을 겨드랑이에 끼고, 왜 아버님이 여러 죄수들의 발을 함께 묶게끔 만든 차꼬를 혼자서 번뵢 들었다는 일화가 있잖소. 허튼 얘기가 아니라는 거야. 수백명의 포수를 거느리셨다는데 아마 그런 강단이 있었겠지."
그가 아버지한테 직접 들었던 고향소식은 아마 다음이 유일한 듯하다.
"고향에 강씨라는 집안이 있었대. 양반인데 대대로 우리 가족을 괴롭혔다지. 몰매를 때리고 아버님이 어린 마음에 깊이 사무치섰던 모양이야. 중국에서도 본국에 돌아가면 강가놈 원수를 갚겠다 되뇌셨을 정도야. 그런데 어느날 아버님이 껄껄 웃으시며 이젠 원수갚긴 틀렸다고 하시는 거야. 광복군 면접때 강씨 자손이 응시했다고. 같이 독립투사가 됐다고."
그의 동학관은 간단했다.
"동학 옛날에는 동학난이라고 불렀잖아. 나쁘다는 말이잖소. 혁명이라 말하기 시작한게 20년이나 되나 잘된 일이야."
23. 박인호(1855∼1940)
-흩어진 농민군을 하나로 충청 해안지방 큰 지도자, 홍주성 전투 등에서 맹활약…손병희 이은 천도교 대도주
충청도 해안 지방은 1894년 7∼8월께부터 거의 농민군의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이곳의 어민·농민들은 남접의 지원이나 연계아래 해상통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내포평야는 곡창지대로 이곳의 양곡을 정기적으로 뇌물로 실어날랐는데 이 통로가 막혀 중앙에서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었다. 특히 이창구가 이끄는 농민군은 내포에 진을 치고 서울로 통하는 조운선을 막고 주변 고을을 석권하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관1)
그러나 전면적인 조직과 지휘계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를 묶어낸 인물이 박인호였다. 박인호는 충청도 덕산 막동(지금의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평민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영구는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전형적인 소작농이었다.
그러한데도 자식의 교육에는 소홀하지 않았다. 박인호는 서당교육을 받으며 농삿일을 거들어야 했다. 박인호의 성격은 온순했으나 힘이 장사였다.
그래서 덕산장터에서 씨름판이 벌어질 적에 상으로 주는 소를 끌고가기가 일쑤였다. 무뢰배들이 소값을 뜯으려 하면 막대기를 휘두르며 소를 끌고가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고 한다.
정의감 넘치는 장사
그는 씨름 뿐 아니라 술도 말로 마셨고 걸음도 빨라 '용호도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 갈아먹을 농토도 없어서 글줄이나 배운 덕택에 의술이나 집터·묏자리 봐주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한편 정의감도 대단하여 동네사람들이 일을 당하면 이를 도맡아 처리하는 시쳇말로 해결사 노릇을 하였다. (이상재 증언)
이런 그의 삶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예산읍 오리장터 주막집 주인 박첨지에게서 동학 이야기를 들었다. 1883년 29살의 나이로 동학에 입도하여 최시형을 찾아본 뒤 그는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는 때때로 가업을 꾸려가면서 동학의 수도에 열중했고 주변고을을 돌아다니며 포덕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동학교단의 지도자로 부상한 것은 1892년 광해문 복합상소때부터이다. 그도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상소에 이름을 올렸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사촌동생 광호를 소수(疏首)로 내세운 것이다. 곧 교단 지도자들의 문책을 피해보려 2급지도자를 소수로 내세울 적에 그의 사촌동생이 뽑힌 것이다.
다음해 보은집회때 전국의 동학조직을 확대하고 계통을 세울 적에 그는 덕산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해안지대의 책임자가 되었다. 곧 덕의대접주로 지명받은 것이다. 이 임명은 1894년 9월 이후 이 일대의 농민군을 통합전선으로 묶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박인호가 최시형의 대동원령에 따라 이 지대에 자리를 잡자, 신창·해미·홍성·서산·태안·안면도의 산발적 농민군은 하나의 구심점을 찾게 되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이 일대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공주전투 이전에 먼저 이곳 농민군을 토벌해서 공주로 합류하는 것을 막으려는 작전을 짰다. 박인호의 농민군이 일본군 관군과 맞닥뜨린 곳은 당진군 면천의 승전곡이었다.
산처럼 쌓인 주검
승전곡은 깊은 골짜기로 이어져 있고 그 입구에는 넓은 들판이 자리잡고 있다. 들판에 농민군10여 명이 깃발을 흔들자 일본군은 승전곡 골짜기로 전진했다. 농민군은 맹렬한 사격을 가해왔고 또 산과 들에 불을 지르고 서풍을 이용해 공격해왔다.
일본군은 많은 물건을 버리고 면천읍내로 퇴각했고 농민군은 의기양양하게 '천불도역불변'(하늘도 변치않고 도도 변치 않는다)이라고 쓴 깃발을 내세우고 당진으로 쳐들어갔다. 일본군과 붙은 첫번째 싸움에서 박인호가 이끄는 농민군이 승리한 것이다.
농민군 5만여 명은 예산 신례원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홍주(지금의 홍성)에 있는 관군과 민병 천여 명이 출동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재빨리 이들을 포위해 공격했다. 신례원 들판은 주검으로 언덕을 이루고 피로 들판을 적셨다. 그러나 양쪽에서 사상자는 무수히 났지만 어느 한쪽이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농민군은 곧바로 공주나 서울로 진격하려 했으나 일단 홍주성을 치기로 작전을 세웠다. 음력 10월 28일 벌어진 홍주성 공방전은 참으로 치열했다.
특히 동문의 전투에 대해 일본군은 "적의 한 부대가 동문 전방 약 6백m에 있는 숲속으로 들어가 서서히 전진해왔다. 그리고 민가에 불을 지르고 연기와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이용하여 성밖 1백m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연달아 맹격해오므로 응원대를 동문으로 증파하여 응전시켰다. 적은 밤이되자 야음을 틈타 대포를 동문 앞 40m 지점에 끌고와 동문을 마구 쏘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농민군 숫자를 3만여 명으로 추산했다. 이렇게 30여 시간을 싸운 끝에 농민군은 해미 쪽으로 퇴각했다. 그들 시체는 동문의 거리를 메웠다. 이 전투에는 일본군과 관군 이외에 이른바 유회군(儒會軍)이 참여했다. 유회군은 민보군과 약간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유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끈질긴 지하포교
아무튼 우선봉장 이두황은 "군사를 이끌고 동문을 나와보니 좌우의 민가는 불에 깡그리 타버려 참혹하여 볼 수가 없었는데 길 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동도가 성을 에워싸고 접전할 적에 그네들이 불을 질러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백여보를 걸어나오니 적의 시체가 도로가에 가로 세로로 산이나 숲처럼 쌓여 있었다." 고 하였다. (양호우선봉일기)
농민군은 서산 태안지방으로 흩어졌으나 계속 관군의 추격을 받았다. 이들은 결국 공주전투에 참여치 못했다. 30대 중반의 장년 박인호는 참담함을 느끼고 농민군의 재수습에 나섰으나 참모진조차 만날 수가 없었다.
박인호는 부하 몇 사람만을 데리고 예산에 있는 금오산의 토굴로 들어갔다. 추운 토굴에서 짚신삼기로 겨울을 나고 나서 청양의 칠갑산 두치로 아지트를 옮겼다. 이곳에서 새우젓 장사로 위장한 동료 홍종식을 만난다. 박인호와 홍종식은 동학 재건을 굳게 다짐했다. 이렇게 해서 접주인 장세화의 방문을 받는다.
세사람이 중심이 되어 지하 포덕이 끈질기게 이어진다. 충청도의 교단 지도자들이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고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의 농민군 지도자들이 잡혀 죽거나 숨어지낼 적에 박인호 중심의 재건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고 뒷날 그를 큰 지도자로 떠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그는 씨름꾼이나 풍수장이가 아니었고 민족의식으로 투철히 무장된 민족지도자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박인호는 동학교단의 주류와 이렇게 하여 헤어져 있으면서 활동했다. 그동안 최시형은 강원도 일대에서 손병희·김연국·손천민에게 도통을 전수받게 하였고 끝내 손병희가 대도주가 되었다. 그리고 원주에 있는 최시형을 만나 그가 손병희를 대도주로 삼은 사실을 알고 지성스럽게 모셨다. 박인호는 손병희보다 여섯 살 위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도의 질서만 있었지 개인의 장유(長幼)는 따지지 않았다.
최시형은 최보따리라는 별명을 얻어가며 '잠행'의 천재였는데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다. 이때 교단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박인호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부하를 홍성의 김봉열에게 보냈다. 김봉열은 4월 모가 시퍼렇게 자라는 논 열두락을 팔아 바쳤다.
3·1운동으로 옥고
이때부터 그는 돈을 만들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리고 김연국·손천민이 손병희와 갈등을 빚을 적에 그는 대도주로 후계자가 된다. 또 손병희가 일본에 건너가 동학의 재건을 도모하고 이용구 등 친일세력을 몰아낼 적에도 큰힘을 보탠다. 3·1항쟁이 있은 뒤 그는 48인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렀고 신간회가 결성될 적에 막후에서 많은 자금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그의 아들 박내홍은 신간회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음모로 칼에 찔려 죽었다. 1938년에 민족운동이 숨을 죽이고 있을 적에 '일본을 몰아내는 기도'를 지시한 사건이 발각되어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의 민족운동이 격력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결코 지조를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인터뷰/박인호 연구하는 이상재씨
"아들 박내홍 일가족 모두가 항일 앞장"
"박내홍이라고 못들어봤을걸. 동학 지도자 박인호의 아들인디. 홍명희의 친구고. 역사책에는 없어. 우리 학자들은 헛장난만 혀. 물론 식민사관 탓이겠지."
충남 예산군 임성중학교 교쟝 선생님 이상재(66)씨가 말하는 박내홍은 베이징 대학을 나오고 홍명희 등과 신간회를 만들고, 민족운동 좌파격으로 분류되는 천도교청년동맹을 이끌고,천도교의 친일파 최린과 맞서다가 28년 "왜경 구보다의 사주를 받은" 신도에게 칼로 찔렸다. 현재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 자리에서다. 신간화와 천도교가 합동장례로 그를 보냈다.
"자료가 뭐 있겠어. 둘이 부자지간인지도 몰랐어. 손자인 박의섭씨가 그렇다니까 알지. 박인호는 원래 아들이 없어. 양자였다고 그러대. 5살때 아버지가 서울에서 홍명희 등과 만나던 기억이 있드만."
"기풍이겄지. 아버지 아들 사촌 일가가 전부 했으니까. 반일 말이여. 박인호가 40년에 세상을 떳응께 아들을 먼저 보냈지. 가슴이 아펐겠지만 남아있는게 없지 뭐. 증손자들도 모다 일류대학을 나왔다던데. 하지만 조상에 무관심한것 같아 아쉽긴 해. "
이씨가 34년째 일하는 학교 옆엔 너른 소들평야가 있다. 그의 사투리가 진국이다. 또 몸집이 작으면서도 하도 당당해 옆에서 신바람이 난다. "예산군지를 만들려고 도지를 들척이다 보니 박인호란 이름이 달랑 있데.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하다 그만 부업이 됐지 뭐. 벌써 20년이여."
사실 그는 윤봉길 전문가다. 그에 따르면 윤봉길과 박인호만 알면 조선시대 평민사를 두루 꿰는 셈이라고 했다.
"홍성읍의 홍주의사총 말이여. 거기 묻힌 주검이 왜 의병들이여? 동학군이지. 홍성천 등에서 9백구가 발견됐다메. 재판기록에 의병은 82명 죽었어. 홍성에서 싸움은 을미의병과 동학농민전쟁 밖에 없었잖여. 동학때는 동문 솔밭에만도 수백구가 깔렸다면서. 그렁께 동학군 무덤이어야 맞는거잖어. 학자들은 뭐하는지 몰러."
25. 손병희(1861∼1922)
-평가 엇갈린 민족운동의 '거목', 북접 농민군 총지휘한 중도파…전봉준과 연합군 형성. 천도교 창건 3·1운동 주도 불구 '정치적 처신' 지적도
손병희는 3·1항쟁을 주도한 것으로 민족운동사의 거목으로 자리잡았다. 또 민족종교의 지도자이면서 항일운동을 줄기차게 벌였다고 하여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면 동학농민전쟁 당시에는 어떤 모습을 보였던가? 그는 출신배경과 의식수전으로 따져보아도 '동학인'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반항아
손병희는 청주의 아전인 두흥의 서자로 태어났다. 이 두가지 출생조건은 바로 그가 봉건모순을 철저하게 느끼고 현실인식에 눈을 뜨게 했을 것이다. 그의 기질은 단순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반항심이 싹텄고 의협심이 보태져 돌출행동을 보였다. 그의 어릴 적 여러 일화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될 것을 예고한다. 그가 초정약수터에 가서 어느 양반을 만나고 지었다는 시 한 구절에 "고금의 양반 상놈이 어찌 구별이 있으랴. 초정에 마음을 씻으니 평등한 사람 되었네. "라는 것이 있다. 그는 이런 의식 속에서 10대와 20대 초반을 보냈다.
그가 양반 상놈을 가리지 않으면서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가르친 동학에 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 그가 살던 주변에는 동학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으니 이리저리 인연의 끈도 닿아 있었다. 그가 20대 중반에 동학에 입도하고 최시형을 만난 뒤에는 쉽게 말해 '할일'이 생겼다. 그 전의 의협한 행동이나 반항의 무절제한 모습에서 동학의 수련에 열중하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에 마음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최시형의 그림자
그는 지성스럽게 최시형을 모시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피나는 수련도 거듭하였다. 그의 자질 탓인지 이런 열성 탓인지, 30대에 들어 최시형의 신임을 두터이 받았고, 따라서 동학교단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1890년대 들어 동학교단은 몇가지 큰 일을 벌인다. 바로 삼례집회, 광화문 상소, 보은 집회 등이다. 이때 현실 대응을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서로 맞서고 있을 때 그는 언제나 중도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처신은 그를 정치적 인물로 비치게 한다. 이런 모습은 그 뒤의 행적을 추적해 보아도 별로 어긋남이 없다고 하겠다.
1894년 3월 이후 무장·고부·전주를 남접 농민군이 승승장구 할 적에 최시형은 계속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이때 손병희는 은인자중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뚜렷이 자기 견해를 밝히지 않는다. 김연국·손천민 등 온건파(보수파)는 최시형을 감싸고 돌며 남접의 행동을 견제하고 있을 때였다.
이해 9월 북접은 조정에서 남·북접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다루는데다, 북접 동학교도들의 열화같은 압력에 굴복하여 끝내 이달 18일 대동원령을 내렸다. 이때 북접의 농민군의 총지휘자인 통령으로 손병희가 지명되었다.
당시 강경파(진보파)였던 서장옥·황하일 등은 교단에서 소외되고 있었으니 주도파 손병희가 총지휘자로 지명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통령 손병희는 황색 깃발을 내걸고 중군을 이끌어 논산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전봉준과 만나 손을 잡고 굳게 맹세한다. 이때 손병희는 '벌남기('伐南旗)를 내걸고 나왔다가 전봉준의 회개를 받고서야 척왜양창의기(斥倭洋倡義旗)를 내걸었다든지, 서로 형제의 의를 맺었는데 손병희가 형이 되고 전봉준이 동생이 되었다든지 하는 기록이 있다.(천도교 교회사 사초고 등 참조)
어떻게 수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나오면서 '남접을 친다는 기'를 내걸고 올 수 있겠는가? 또 전봉준은 손병희보다 다섯살이 위인데 어떻게 동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전봉준은 9월 말께 삼례를 출발하여 논산에 진을 치고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길을 비키라는 글을 보내며 한달 가량 북접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접군은 어떤 사연인지 10월 11일에 청산대회를 갖고 10월 20일께야 논산으로 진출했었다. 이것은 막대한 전술상의 차질을 빚었다.
아무튼 손병희의 북접 농민군은 모처럼 남·북접 연합군을 형성하여 공주 공격에 나섰다. 관계기록으로 보아 처음 손병희의 농민군은 이인과 봉황산 공격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이인전투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봉황전투는 실패로 끝났다. 봉황산을 넘으면 바로 공주감영이 자리잡고 있는데 손병희 휘하에서 북접 농민군을 지휘하던 이용구는 이곳에서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물러갔던 것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남접 농민구이 공주전투를 주로 이끌었고 희생도 이에 비례해서 크게 치렀을 것이다. 우금치 전투야말로 남접 농민군의 최후의 결전이었다.
공주패전 이후 손병희는 전봉준과 함께 전주·원평·태인 전투를 치르고 전봉준과 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확실한 기록이 없다.)손병희는 아무 연고도 없는 광주 쪽으로 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최후까지 살아남아
손병희는 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임실·순창을 거쳐 북상했다. 그는 임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최시형을 만났다. 최시형과 손병희가 이끄는 농민군은 장수·무주를 석권하고 영동·황간을 함락시키면서 영동의 용산으로 진출했다.
이런 급보를 받은 청주병영과 대구감영의 영병, 그리고 경상도의 민보군, 낙동강 병참부의 일본군 등 1천여 명이 용산으로 밀려들었다. 이때 농민군은 3만∼4만 명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들은 모두 공주전투에 참여한 농민군이 아니라 중간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12월 11∼12일에 걸쳐 청주병영군과 상주 민보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농민군이 승리를 거두고 청산을 접수했다가 보은을 차지했다. 이때 농민군은 계속된 행군의 피로도 풀 길이 없이 보은관아에 들어가 일대 복수전을 펼쳤다.
"동학 신비주의 변질"
농민군은 속리산 줄기 아래 자리잡고 있는 북실마을로 진지를 옮겼다. 12월 17일 밤 상주 민보군과 일본군은 북실 공격에 나섰다. 이날 밤은 강추위가 몰아쳤고 폭설이 내렸다. 민보군은 파수를 보던 농민군을 잡아 이런 정보를 얻는다. " 호남으로부터 시작해 열일곱 번을 싸워왔다. 지금 삼남이 모두 일어났는데 한 길은 무주·영동·청산·보은·상주·완산과 일본군의 병참과 대구감영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한 길은 청주·공주로 향하여 한강을 건너 서울에 주둔하여 대사를 도모하고, 한 길은 청국과 약속하여 후원이 되었다. 서북의 각 길도 모두 호응했다. 지금 북실에 주둔한 군사는 모두 삼남대장이 거느린 10만이다.(토비대략)
물론 이 말은 그들의 선동이거나 허풍일 뿐이다. 18일 새벽 일본군이 앞장서 총공세를 펴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농민군은 패주했다. 상주 민보군을 지휘한 김석중은 2천 6백여 명을 죽였다고 하엿다. 또 이 전투에서 대접주 이원팔·임국호 등이 죽었으나 최시형·손병희는 몸을 날렸다. 이 전투가 공식적으로 장흥전투 이후 최후를 장식했다. 손병희는 충주를 거쳐 강원도로 잠입했다. 분명히 용산 북실전투는 손병희의 명예를 회복할 만했으나, 북실전투에서 먼저 달아난 사실도 지적해두어야 한다.
그는 어찌되었든 살아남았다. 그리고 천도교를 창건했다. 또 3·1항쟁과 함께 민족운동을 줄기차게 지도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표폄이 엇갈려 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에 군자금을 댄 일, 한일합방을 주장한 이용구를 상당기간 끌어안은 일, 돈을 민족운동 이외에 마구 쓴 일, 본부인말고도 첩을 둘씩이나 거느린 일 따위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또 최제우·최시형을 신으로 만들고, 자신도 성사(聖師), 인황씨(人皇氏)로 추앙하게 한 것도 인간 중심의 동학을 신비주의로 변질시켰다는 입질이 따른다. 걸출한 인물에게도 흠집이 있다는 말로 호도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다는 평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인터뷰/ 청주지도자 정필수의 증손자 정용승씨
정필수는 청주에서 동학군 지도자로 맹활약했다. 그를 증조부로 둔 정용승(56)씨는 1백년은 족히 묵었을 한지를 여러 뭉텅이 꺼내 놓았다. 사람 키만한 책장 반을 메울만큼 많았다.
"몇해 전 집수리하는 중에 거두어 모았어요. 뭔지 몰라 물어물어 찾은 충북대 신영우 교수로부터 귀한 자료라 듣고 보관중이에요. " 그도 교수다. 교원대에서 대기화학을 가르치는데, 한자보다는 영어가 가까워서인지 "무슨 내용인지 잘 몰라 안타깝다."
수백장 가량의 한자는 거의 고조부 거다. 마을서 서당하다 상경해 내주부사를 지내던 고조부가 고향의 두 아들, 집 근처 운적산에 훈련장을 만들어 동학군을 조련하던 장남 필수와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진사로 급제한 차남에게 띄운 서한도 백여 장이다.
"33살의 아들이 끌려갔다. 소식 듣고 급히 청주감영의 친구에게 선처를 부탁했는데 이미 총살된 뒤였답니다. 관보에도 나옵디다… 농민만 동학군이 아닌거죠. 증조부님이야 분명히 농민이 아닌데. 항일 그거로 뭉친 거죠."
정필수는 어린 시절 손병희와 한 마을, 충북 청원군 북이면에서 살았다. 나이는 동갑이었고, 집이 5백m 떨어져 있었다. 지금 정씨가 작은 농장을 꾸민 청주군 강내면으로 온 집안이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이사 오기 전까지이다.
또 3·1운동 33인 가운데 하나인 정춘수 감리교 목사도 조부의 14살 아래 사촌으로 같이 살았다. "아마도 이곳이 엄청난 근거지였던 것 같죠."
정씨는 두 사람의 묘를 집 옆에 모셨는데, 필수 할아버지 앞에는 반석만 놓았다. "상석은 나중에 국가가 세우라고 남겼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렇게 해서 억울한 한을 풀어줘야죠. 명예회복 해달라 그말입니다."
26. 전봉준(1855∼1895)
-민중 가슴에 영원한 녹두꽃, 농민 분노와 동학 결합시켜 '반봉건 반외세' 들불 지펴
주체 역량과 동력이 있다고 하여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조직화하고 폭발적인 분출로 끌어내는 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전봉준, 마무리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려 해도 틈을 비집고 끼어든다. 특히 유신 이후 그의 초상화는 끊임없이 민중의 눈을 현란케 했다. 우리는 영웅사관을 배제하면서도 영웅의 모습을 그리워한다. 왜 그럴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전봉준은 고창의 당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상놈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너무나 보잘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기 짝이없는 아버지 전창혁은 훈장질로 입에 풀칠을 한 평범한 위인이었으나 외아들을 잘 둔 탓인지 자주 역사에 이름이 오른다. 전창혁은 글줄을 익힌 탓으로 당촌마을에서 훈장 노릇을 했다. 어린 전봉준의 영웅설화 속에 글 잘한다는 이야기는 드물다. 하나 개구쟁이로 더욱 이름을 떨쳤던 것 같다. 10대 초반 당촌마을 앞에는 인내가 있고, 그 건너편에는 김씨 성을 가진 양반들이 살고 있었다. 정초에 두 동네 아이들이 패싸움을 벌일 적에 전봉준이 늘 앞장을 섰다고 한다. 전창혁은 유민처럼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런 여건에서도 아들에게 서당교육만은 시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창혁 편 참고)
전봉준이 장성해서 정약용의 국가제도 개혁방안을 담은 <경세유표>를 읽었다고도 하고 서울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만났다고도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유랑생활 속에서 사귄 동무나 선배, 곧 김덕명·김개남·손화중 드잉 함께 거사했고, 또 그가 알고 지내던 송여옥·차치구·정백현 등을 끌어들였다.
30대 초반에 봉기의 꿈
그는 늦어도 30대 초반에 일대 봉기의 꿈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들이를 할 적에 수행원 여럿을 거느리고 밤에 친지의 집에 찾아들기 일쑤요, 그의 일행에게 밥을 지어줄 적에도 그 숫자를 모르게 하였다고 하며, 수행원의 밥그릇을 나귀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 그가 장성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갈 적에 훈장 노릇은 물론 때로 풍수쟁이, 약장수 등을 했다 하며, 때로 날도 잡아주고 편지도 대필했다는 것이다. 그런 속에 가렴주구와 민중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며 더욱 봉기의 조직을 넓혀갔다.
그가 일본 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을적에 자신은 논 세 두락을 부치무로 하등 빼앗긴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사관이 "너는 피해가 없는데도 무슨 까닭으로 소요를 일으켰느냐"고 물으니 그는 "일신의 피해 때문에 기포한다면 어찌 남자의 얼이겠느냐? 중민이 원통해하고 한탄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전봉준 공초)
그가 동학에 든 것은 1890년대 초였다. 그는 접주라 했고 동학을 몹시 좋아한다고 했으나 포덕에 나서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동학의 신비성, 주술성과 조직을 가장 잘 이용했다.
이렇게 해서 봉기했다. 그는 민중의 동력을 끌어낸 제일의 공로자이다. 무장 고부봉기 이후 많은 포고문·격문·행동강령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는 처움부터 반봉건반외세의 지향을 뚜럿이 보여주었고, 민심을 얻는 농민군의 행동지침을 내렸다. 오늘날의 안목으로 그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탁월한 전략·전술가
적어도 1차 봉기때에는 전략 전술가로 나무랄 데가 없다. 집강소 기간 호남의 3분의 2 이상이 그의 지휘하에 있었고, 부분적이나마 경상도와 충청도에도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경상도 지역의 당시 기록에 전봉준은 한결같이 '수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7월 15일 남원대회 이후 농민군 지도부는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하나는 집강소 통치에 감사(정부의 대행)의 공인을 받는 것이었는데, 김개남은 이를 반대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전봉준은 감사 김학진의 협조를 얻어 반봉건운동을 추진했다.
김개남보다 중도 입장
또 하나는 경복궁 쿠테타와 개화정권을 반대하고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은 일이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반일반개화에는 뜻을 같이했으나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에서는 미묘한 이견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개남은 수령·양반·토호의 징치에 강도를 더했고, 전봉준은 유화책으로 화유와 설득을 통해 풀어나가려 했다. 이렇게 해서 호남의 세 거두, 곧 김개남을 급진파. 손화중을 온건파, 전봉준을 중도파로 구분할 수 있었다.
공주 대회전의 주력 농민군은 어디까지나 전봉준이 이끌었다. 공주의 패전은 그에게 결정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2차 봉기를 9월에 단행한 것은 곡식이 여물 때를 기다린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때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를 평양에서 크게 깨뜨리고 충부리를 농민군에 집중적으로 겨눌 수 있었으며, 게다가 개화정권의 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 시기였다.
공주 대회전은 일본군에게 많은 시간을 주어 북쪽과 경상도·충청도 해안 세력의 합류를 차단당했고, 또 남접의 일부 이탈과 북접의 연합이 늦어진 속에 전면대결을 벌여 일본의 신무기와 정면으로 맞섰다. 날씨가 추운 자연조건에서 장기전을 벌였으나 분산전과 유격전은 시도자히 않았다.
이때의 전략전술은 논란거리를 제공할 만했다. 그는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반일의 의리를 따져 마지막으로 일본군의 앞잡이 또는 일본군에 협조하는 개화정권의 군대와 구실아치, 보부상들에게 애국의 의리로 호소했다. 그러나 그 뜻대로 세상 인심은 움직이지 않았다. 흔히 동양의 역사관은 이를 '시운'이라고 말한다.
운명의 공주 대회전
아무튼 전봉준은 원평 태인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회문산 아래 순창 피노리로 몸을 뺐다. 그를 입암산성장이나 백양사의 중들도 고발하지 않았는데, 피노리의 엣 부하 김경천의 변절로 잡히고 말았다. 이것은 그의 또다른 큰 실수였다. 그러나 불과 20리 지점에 숨어있던 김개남과 만나 재기를 도모하려 했다는 일도 있다. 그는 용케 일본군에게 끌려간 탓으로 재판을 받고 자신의 견해를 밝힐 기회를 얻었다. 처음 잡힐 적에 그는 몽둥이인지 칼인지에 다리를 크게 얻어맞아 다쳤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었다. 이런 몸으로도 그는 조금도 기개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신중하고 조직적이면서도 기질은 아주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주에서 서울로 잡혀올 적에 그의 행동은 이렇게 전한다.
당당하게 최후 맞아
"전봉준이 벼슬아치를 보고는 모두 너라고 부르고 꾸짖으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길을 오는 동안 죽력고(대나무 진액으로 빚은 술)와 인삼·미음을 달라고 하여 먹으면서 행동거지가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의 뜻을 거스르면 꾸짖기를 '내 죄는 종묘사직과 관련된 것이니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 나희들이 어찌 나를 함부로 다루느냐?" 하였다. 잡아가는 이들이 이를 보고 "예예" 하며 잘 모셨다. (오하기문 3월)
또 그의 수행원이었던 김흥섭은 "전대장은 기지개를 켤 적에 큰대자 모양을 하였으며, 하품을 할 적에도 큰기침을 먼저 하였다. 버선 목을 벌려 이를 잡게 할 적에는 번듯이 누워 있었다."고 하였다.(이기화씨의 증언) 이랬으니 일제의 회유를 호락호락 받아들일리가 없었다. 일제 당국은 그에게 지위를 준다거니 재산을 준다거니 온갖 방법으로 회유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죽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재판정에서도 너무나 당당했다. 그리하여 일본 사람들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일본 신문 이륙신보 등)
만일 그가 비굴한 처신으로 살아남았다면 우리는 훌륭한 정신적 지주를 잃었을 것이요. 바람직한 역사상에 큰 흠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인에게는 죽음의 선택이 큰 의미를 준다. 그는 비록 비명에 갔으나 오늘날 우리는 그를 길이 추앙하고 있다.
인터뷰 / 전봉준 잡힌 순창 피노리 주민 박환성씨
"전장군 장작더미 올라 최후 저항"
"서당에서죠. 9살때던가 훈장님과 마을 어른이 도란도란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녹두장군 전봉준이 우리 동네에 왔었고, 예서 잡혀 끌려갔다던 얘기를."
박환성(68)씨가 사는 피노리, 요샛말로 순창군 쌍치면 금석리는 첩첩산중 꼭대기에 움푹 들어선 분지 모양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천혜의 피난지로 알려졌는지 멀리는 노론의 일파가 여기서 한숨을 돌리고, 한국전쟁 때에는 낙동강 전투의 패잔병들이 건너편 회문산에 본거지를 틀기 전에 이미 해방구 '인민공화국'을 세웠던 지역이다. 그 때문에 태우고 죽이고 보복도 심했다. 그도 부역했느니, 안했느니 시달리다, '친구가 면서기를 했는데 빼내줘'서 살았다.
피노리에는 박씨가 어릴 적만 해도 큰 장이 섰다. 물론 여관도 주막도 있었고, "왜놈이 세운 소방대도 있을"만큼 북적댔다. 갑오년 당시에는 조선땅 8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았단다. 지금은 이농으로 70호만이 쓸쓸히 남은 고즈넉한 산촌으로 줄었고, 마을 어귀에는 농산물개방을 규탄하는 구호가 벽에 박혀 있다.
"관군이 주막을 에워싸니까 월동용으로 쌓아놓은 장작더미 위에 올라 버텼답니다. 관군은 장작더미에다 불을 질렀고, 펄쩍 뛰어 담을 타넘는데 일본도에 회목(아킬레스건)을 맞아 주저앉았고요. 그날 밤새 하도 많이 두들겨 패서 하루면 갈 길을 이틀 걸려 순창군청으로 끌고 갔다고 들었어요."
주막자리며 장작더미 자리를 박씨에게 들려줬던 노인마저 3년 전 세상을 떠났으니 어쩌면 전봉준이 잡힌 자리를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는 이는 통틀어 그만이 남은 셈이다. 마을에는 아직 아무런 표시도 없다.
그동안 오는 사람마다 그를 찾았다. 그는 이미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말을 요령있게 풀 만큼 익술해 있었다. 그러나 어릴 적에 들은 말과 나중에 책 등을 통해 전해들은 걸 또박또박 구분하려 애썼다. "수십년 동안 민족상잔에 묻혀 왜놈얘기는 쑥 들어갔어요, 학교서도 반공만 가르치지 반일은 없잖아요. 어떻게 당했는지도 잊혀져가고요."
27. 백낙희(1858∼1896)
-'마지막 봉기' 앞장선 산포수, 김구·김형진 더불어 황해도 농민군 잔여세력 규합활동
동학농민전쟁이 일단 끝난 뒤 농민군은 무수한 죽임을 당했고 우리 사회는 커다란 변화에 직면했다. 전통적 신분질서는 더욱 빠르게 해체되고 일본의 입김은 한층 거세졌다.않고 이어졌다.
꺼지지 않는 의병항쟁
이에 농민군 토벌에 나섰던 민보군과 관망하던 유림들은 민비시해와 단발령이 있자 의병에 나섰으나 남은 농민군의 합류는 막았다. 농민군은 독자적 노선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군의 반봉건·반외세의 항쟁은 쉽사리 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영학당 사건(홍낙관 편 참조)이었고, 삼남의 평민 의병항쟁이었다.
여기의 한 사례가 바로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백낙희의 활동이었고, 이 활동은 김구와 연결이 되어 나타났다.
김구는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해 숨어지내다가 만주땅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가 만주로 가기 전에 안태훈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그 집에서 남원 귓골에 산다는 참빗장사 김형진을 만난다.
김형진은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뒤 온통 일본세상이 돼가는 것을 보고 의분을 느껴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당시 군 실력자인 신정희를 만나 의병봉기를 공작하기도 했다. 그는 배로 황해도 연안을 거쳐 신천으로 찾아온 것이다.(노정약기 참고)
김형진과 김구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백두산과 간도 일대를 돌아보고 베이징까지 가기로 했다. 그들은 등짐장수로 꾸미고 만주 일대를 돌아다녔다.
거기에서 그들은김이넌이라는 벽동 출신의 인물이 일본을 칠 의병을 모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김형진이 먼저 김이언을 찾아 길을 떠났다. 김구는 뒤따라가다가 중국인 서씨를 만나 일본에 대한 복수의 뜻을 맞추었다.
김구도 끝내 김이언을 만났다. 김이언은 50여 살의 장년으로 큰 대포를 안아서 들었다 놓았다 하는 장사였다. 또 김이언은 스스로 창의의 수령이 되어서 초산·강계·위원·벽동 등지의 포수와 중국땅에 사는 동포 중에서 사냥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모아서 3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김이언은 국모 시해의 일과 그들이 거사하는 동기를 적어 격문을 띄웠고 김형진과 김구도 합류하기로 했다. 거사일은 1895년 동짓달 초순으로 정했고 목표는 강계성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강계성을 공격하는 도중에 먼저 공격을 받고 의병들은 흩어졌다. 김형진과 김구는 이때도 몸을 피해 신천으로 찾아들었다.
여기까지는 김구의 <백범일지>와 <노정약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다른 쪽으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백낙희는 산포수 출신이다. 그는 1894년 7월 농민군 조직에 뛰어들었다. 또 동학조직의 하나인 교장을 맡으면서 푸수들을 지원했다. 그는 농민군 여당을 색출할 때 말할 것도 없이 몸을 숨겼다.
'해주부 산포' 조직
이들 농민군 잔여세력은 장수산성등 산악지대에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백낙희는 산포수를 모아 '해주부 산포'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넓혔다. 도반수(都班首)는 김재희가 되었고 백낙희는 명사반수(名査班首)가 되어 마을을 쑤시고 다녔다.
이럴 때인 1895년 12월 해주의 검단방 손이고개에 있는 김창수(김구)를 찾아갔다. 김재희는 김창수의 작은 할아버지ꥩ이었다. 김창수는 해주 북방의 청룡사에 숨어 있는 김형진을 그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김형진이 이런 계획을 털어놓는다.
그 자신은 창나라에 수차례 다녀왔다. 그곳 선양에 있는 마 대인과 선양자사 이 대인에게 '동쪽을 진암하라'는 창의의 인신(印信)과 직첩을 받았다. 그리고 베이징으로 가서 황제에게 이런 전말을 적어올리고 돌아왔다.
"이러니 마 대인이 머지 않아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러 올 것이다. 나는 평안도 ·전라도·황해도 등 세 도의 도통령이 되고 당신(백낙희)은 장연의 선봉장이 되어 군사를 모은다. 당신이 장연의 산포를 움직여 장연을 들이쳐서 먼저 군기를 빼앗은 후에 수령과 구실아치를 도륙하라. 그리고 나서 군사를 이끌고 나에게 오면 해주·안악·문화 등에 사는 세력들이 협력하여 해주부를 소탕한다. 이렇게 되면 청나라 군사가 나올 것이다. 이때 두 군사가 힘을 합해 서울로 곧바로 내닫는다. 그리고 이어 서울을 도륙내고 정씨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는다. 이어 일본과 서양세력을 몰아낸다."
참으로 거창한 계획이다.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이고 농민군을 연합세력으로 조직하는 데 산포수를 앞장세워 이씨 왕조를 전복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의 사실 여부를 제쳐두고 위의 김구의 행적과 맞추어볼 필요가 있다. 어쨌든 이 게획은 배후에 김형진 김구가 있었고, 일선 행동책은 김재희 백낙희 등이었다.
백낙희는 이런 계획에 적극적으로 찬동을 하고 김제희와 정월 초하루를 거사일로 정하고 장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신이나서 부하들을 데리고 산포수들을 모으러 다녔다.
그의 부하는 모두 같은 마을에 사는 전양근 백기정 김계조 김의순 그리고 동생 백낙규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농민전쟁 당시 해주공격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백낙희가 규합한 세력이 1백여 명.
그러나 백낙희는 조심성이 조금 없었던 듯하다. 그가 이렇게 세력을 규합하는 속에 내동과 사랑동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곳은 두민(豆民) 등은 백낙희를 꽁꽁 묶고 몽둥이찜질을 해댔다. 이 소식을 들은 동생 백낙규는 그 마을로 달려갔고 그 자리에 있던 박기정은 빨리 갬재희와 약속한 산포수들을 데리고 와서 구하자고 일렀다.
장연고을·해주 큰소동
백낙규는 약속장소로 달려갔으나 김재희와 산포수가 보이지 않았다. 백낙규도 이곳에서 머뭇거리다가 장연의 교졸들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중범공초)
이 무렵 그 배후인물인 김구는 실의에 빠져 방랑의 길을 떠났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치하포에서 일본군 육군중위를 '국모살해의 원후'라고 하여 죽이는 일을 벌였다.
아무튼 백낙희 사건이 터지자 장연고을과 해주는 큰 소동이 일어났고 골골에서 연루자 체포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두달이 넘도록 김형진·김재희·김창수를 잡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해주부에서는 법무대신에게도 보고하고 있다.(사법품보에 나옴)
여기서 한가지 밝혀둘 것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농민군 활동이 어떠했나 하는 것이다. 적어도 황해도의 활동에 비해 미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부적이기는 하지만 농미군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전사>에는 이 지대의 봉기고을이 표시되어 있으나 그 구체적 자료제시와 내용이 없다. 이 지대의 자료를 입수하지 못하고 답사도 할 수 없어 이곳 지도자의 활동을 소개하지 못하고 말았다. 안타까움과 함께 통일의 그날로 미룬다.
이무튼 이들의 봉기는 바로 하나는 생존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는 나라를 위해서였다. 정당한 생존권의 획득과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는 의지가 한길로 모아져 폭발한 것이다.
생존·구국의지 드높아
그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용감하게 목숨을 걸었다. 형편없는 무기와 주린 배를 끌어안고 처음에는 들판에서 싸움을 벌였고 나중에는 산속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왕조를 떠받치는 기득권 세력과 일본의 침략세력은 이들을 모질게 공격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 후기 의병활동을 줄기차게 벌였고 끝내 만주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는 국내에 남아 있으면서 3·1운동이나 소작쟁의에도 참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통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모진 고난을 안겨주었다. 자손들도 목숨을 붙이려 산속이나 섬으로 도망다녔고, 재산을 몽颷 빼앗겨 머슴살이나 비럭질로 살아야 했다. 이들의 후손들은 자신의 재산을 빼앗아간 구실아치나 지주들에게 빌붙어 살기도 했고 때로 친일파의 압제를 멀거니 지켜보며 당하기도 했다. 그러했으니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고 출세를 할 수도 없었고, 나라를 되찾았다는 해방 뒤에도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아아, 민족사의 씻을 수 없는 왜곡이요, 모순이 아닌가?
인터뷰/ 황해도 봉기 주동 김형진 손자 김남식씨
김구선생 조부 찾아 집 방문
유품 동학접주 임명장·'노정약기' 남겨
"할아버님이야 자손들에게 평이 좋을리 없지. 7살때 서울로 유학가 진사까지 했다는데 중국이다 어디다 여기저기 나다니느라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한창땐 앞마당에 도조받아 쌓아놓은 노적가리가 하도 커 그늘이 지는 바람에 옆집에선 벼도 못말릴 정도였다던데. 할머님이야 남편이 아들하나 달랑 낳아놓곤 집안에 붙어있질 않았으니 영락없이 청춘과부로 늙으셨지. 고생할 적마다 오죽 서운하셨을까."
김남식(73)씨는 9살때 돌아가신 할머니, 그러니까 김형진의 아내가 왜정 때 전주향교로부터 받은 열녀 임명장을 간직하고 있다. "1898년 2월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나이가 38세 때지, 저銘경찰서에서 갑작스레 연락이 왔대. 피범벅이 된 시신을 찾아가라고. 아버님이 10살 때던가. 할머님한테는 왜놈에게 맞아 돌아가셨다고만 들었어. 그 이유는 일절 말 안하셨을 걸. "
김씨와 그의 동생은 무학이란다. '기피가문'이라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49년 김구선생이 완주군 조촌면 집으로 찾아오셨어. 아버님과는 한번 인연이 있었고. 인천감옥을 탈출해 금구 집으로 조부를 찾아왔다가 숨졌다는 소식만 들었다지. 그땐 김창수였는데 김구라니 몰랐는디. 조부와는 안동김씨 이권공파 항렬도 같어."
"유품이야 많았지. 한발짜리 칼하며 손바닥만한 도장에다 금토씨꺼정. 중국서 대장노릇가지 하셨다닝께. 하지만 일제가 공출이 좀 심했나. 방구들까지 뒤졌으니, 내주긴 싫고 모두 동네 방죽에 빠뜨려버렸지."
해방 뒤 족보가 담긴 궤짝을 뒤지다가 두루마기 소매 속에 품고다니셨다던 1m짜리 보검, 동학접주 임명장, 그리고 조부가 일기삼아 적은 <노정약기>를 찾은게 고작이다.
이마저 5년 전에 남에게 넘겼다. "7백만원인가 받았소. 조부님이 남의 산에 묻혔거든. 할머님도 공동묘지에 계셨고. 두 분을 옮겨 합장할 颷 1천평을 마련하는데 보탰는데 …."
결국 잊혀졌던 세점의 유품이 아픈 역사에 쓸려 헤어진 부부를 1백여 년만에 하나되게 한 셈이다. 땅속에서나마. 재작년부터 김씨 가족은 다달이 47여만원의 연금을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애국장이 추서됐기 때문이다.
"국립묘지로 이장하자고 말들 하대. 하지만 왠지 아직은 옮기고 싶지 않어."
*******아래글 출처? 모름 ****8**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빼어난 혁명가로 추앙받는 전봉준 장군은 태어난지 150년, 효수당한지 109년 밖에 되지않았지만 그의 출생지가 어딘지, 시신은 어찌 되었는지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국회는 최근 동학농민혁명을 국가지정기념일로 정하는 등 동학혁명에 대해 처음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재평가작업에 들어갔다.
동학(東學)은 서학인 천주교에 반대하여 수운 최재우가 창도한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신흥종교이다.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는 삼정의 문란과 관리의 부패, 이로 인한 각지의 민란, 외국의 간섭 등으로 국가는 매우 불안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여기에 종래의 종교는 쇠퇴하거나 부패하여 민중의 신망적인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새로 들어온 천주교는 이질적 가치와 성향이 한국인의 전통과 맞지 않아 충돌을 일으켰다.
경주출신 최제우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양산의 천성산 바위굴에서 오래 수도하여 ‘한울님(上帝)’의 계시를 받고 동학을 열었다. 동학은 서학에 대응하는 한국의 종교란 뜻으로,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불·선 교리를 바탕으로 하여 ‘인시천(人是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인시천’의 원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표현한 것으로 종래의 유교도덕과 양반사회의 계급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신분·적서제도 등 사회적 모순에 비판적이었던 동학의 교리는 민중에게 큰 호응을 받아 질병에 시달리던 삼남지방에서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정부는 동학을 서학과 마찬가지로 사교(邪敎)라 하여 탄압하기 시작했고, 1863년 포교를 시작한지 3년만에 최제우는 혹세무민 죄로 체포돼 이듬해 대구에서 참형되었다.
2대교주 최시형은 지하에서 교조의 유문 〈동경대전〉 〈용담유사〉를 간행하면서 교리를 체계화하는 한편, 교회조직을 확립하여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교도가 주체가 된 동학농민혁명이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동학혁명군의 주체는 동학교도이고 혁명의 이념과 조직 역시 동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전봉준은 젊을 적부터 사회개혁의 뜻을 품고 활동하다가 30여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 접주가 되었다. 척왜척양·폐정개혁의 기치를 들고 동학교도와 농민군을 이끌고 삼남을 석권했다. 그러나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몇 동지들과 순창으로 몸을 피해 재기를 꾀하다 현상금을 탐낸 피로리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전봉준은 착취와 억압속에 신음하는 농민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외세 침탈에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창의(倡義)’에 나섰다가 농민들의 밀고로 붙잡혀 일본군에게 참수를 당한 비운의 혁명가이다.
◇전봉준의 출생지는 어디인가=동학의 이념으로 만민평등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전봉준이 태어나 태를 묻은 그의 출생지는 어디인가. 연구가들 사이에도 몇가지 이설이 전한다.
첫째, 직접 동학혁명에 참가하고 가장 먼저 동학혁명에 관해 책을 쓴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고창현 덕정면 당촌 출생설을 주장한다. 당촌에는 옛날 20여호의 전씨 마을이 있었고 1894년 농민전쟁때 농민군의 두목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관계로 보아 이곳 출생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전봉준 선생은 본래 전라도 고창현 덕정면 당촌 태생으로 이름있는 사림(士林)집 사람이다. 그는 자라서 교부 양교리와 전주 구미리, 태인 동구천 등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며 유동생활을 하였다”고 썼다. 향토사학자 최현식씨도 〈전봉준전기〉에서 선대의 세거지(世居地)가 고창군 신림면 벽송리였으며, 선대의 묘가 모두 벽송리 승판동에 있다는 점에서 당촌 태생설을 뒷받침한다. 지금도 당촌에는 전봉준이 태어났다는 집 터가 전하고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서당 터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사학자 김상기씨는 〈전봉준전기〉에서 고부군(현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 조소 마을설을 주장한다. 조소마을에 전봉준이 살았다고 하는 옛 집이 남아 있음을 제시한다. 일제시대와 해방후의 언론인·역사학자인 장도빈도 같은 주장이다. 그러나 그 집의 상량문에는 집의 건축연도인 ‘무인(戊寅)’(1818년 또는 1878년)이라는 간지가 적혀있어 전봉준의 출생연도와는 상당한 시간차가 있어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따른다.
셋째, 건국대 신복룡 교수는 〈전봉준의 생애와 사상〉에서 정읍군 덕천면 시목리설을 제기한다. 전봉준과 친숙한 사이였다는 옹택규의 손자인 옹경원이 할아버지에게 들었다는 데서 근거한다. 옹택규는 동학혁명 당시 남접(南接)에서 어느 정도 활약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오지영은 〈동학사〉에 기록했다. 〈천도교 월보〉 월간 제98호는 “아버지는 전창혁인데 출생 사망 신분 등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전봉준의) 출생지와 거주지는 여러 설이 있는데 오지영의 〈동학사〉는 고창 당촌(죽림리)이라 했다”고 하여 천도교측에서도 정확한 출생지를 밝히지 못한 상태이다.
◇효수된 머리-사체 행방몰라=농민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사들에게 인계된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에 있는 일본군 제19대대 대장 미나미에게 인계돼 서울의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 영사관에 억류돼 신문받을 때 법관이 죄인 취급하며 다루려 하자 전봉준은 “동학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여 탐학하는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악을 행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를 없애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락하여 사복을 채우는 자를 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너희는 외적을 이용하여 자국을 해하는 무리이다. 그 죄 가장 중대하거늘,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고 법관을 준열히 꾸짖었다. 일본 영사관에 억류돼 있을 때 어떤 일본인이 “그대의 죄상은 일본 법률로 논할 것 같으면 상당한 국사범이지만 사형에 까지는 이르지 아니할 수도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일본인 변호사에게 위탁하여 재판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오, 또는 일본정부의 양해를 얻어 활로를 구함이 좋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였다.
전봉준은 이에 “내 구구한 생명을 위하다가 활로를 구함은 본의가 아니다”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며칠후 또 다른 일본인이 나타나 일본공사에게 살려달라고 청원하도록 설득하였다. 전봉준은 “이때에 와서 어찌 그러한 비열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죽음을 기다린지 오래 되었다”며 분연히 거절하였다. 일본은 전봉준을 살려서 조선침략의 하수인으로 이용하려 하였지만 이를 간파하고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전봉준의 선고 공판은 1895년 1월 29일이었다. 재판정에 끌려나온 전봉준은 심한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재판장은 법무협판 이재정이고 판관은 장백과 일본인 우찌다 영사였다. 즉시 사형을 집행한다는 ‘부대시참(不待時斬)’의 판결이 내리자 전봉준은 분연히 무릎을 치고 일어나면서 “정도(正道)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고 대갈일성하여 재판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교수대에 올라갈 때 법관이 전봉준에게 “가족에게 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자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내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컴컴한 적굴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며 꾸짖어 최후의 순간까지도 굳건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전봉준의 교수형을 집행한 집행총순(執行總巡)은 〈동학사〉를 쓴 오지영에게 다음과 같이 전봉준의 최후의 모습을 전하였다.
“나는 전봉준이 처음 잡혀오던 날부터 끝내 형을 받던 날까지 그의 전후 행동을 잘 살펴보았다. 그는 과연 보기 전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돋보이는 감이 있었다. 그는 외모부터 천인만인의 특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