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염재 김균(念齋 金㽦 : 1888~1978) 대동천자문

도심안 2018. 1. 9. 12:29

염재 김균(念齋  金㽦)선생(1888~1978)

 

김균 : 도강김씨 훈도공파(장파) : 생졸년 : 1988,12,3~1978)

子 : 重玉

初名 : 환각(煥珏)

號 : 염재(念齋) 긍세당(矜細堂)

출생지: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면 원촌에서 태어나셨고 일제시대 일본놈들이 보기 싫어 은석마을 깊은 산속 소지동으로 이주하여 산속에 집을 짓고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도강김씨 훈도공파(장파)로 호가 염재(念齋)이며 학문이 높았다. 항일 의병에 앞장 선 춘우정 김영상(1836~1910)의 손자이다.

 

김영상은 1906년 무성서원에서 병오창의 때 선봉이 되어 성명문을 낭독하였고, 손자 균은 동맹록 등 서사를 담당하였으며. 1907년에 의병으로 조부와 함께 순창 구암사까지 갔으나 조모의 병환으로 돌아왔다.

 

염재공에 증조부는 고현내면 송산마을에 살았는데, 태인 고현내면에 1834년 대홍수가가 있어 처가로 이사후  살면서 춘우정(김영상)이 태어났고  1851년 다시 고현내면 원촌마을로 이사하였다.  


염재 김균(念齋  金㽦)은 1888년 12월 3일에 태어나셨는데 이듬해 부친께서 돌아가셨지만, 조부의 각별한 사랑으로 학문을 익히고 공은 항상 조부를 모시고 다녔다. 조부인 춘우정은 1910년에 한일 합방 후 일제가 전국에 유학자 100명을 회유하고자 할 때, 노인은사금 증서를 받고 찢어버린 것이 화근이 되어 동곡파출소에 연행되었다. 이후 군산으로 압송 중 만경강에 투신하였으나 구조되어 군산 감옥에서 9일간 단식한 후 절명하였다.

 

춘우정에 손자 균은 조부에 절명이후 일본놈들이 보기 싫어 은석마을 깊은 산골 소지동에 들어가 학문에 힘쓰고 후학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1948년에 30년 동안 집필해온 대동천자문을 완성했고, 이후 2子 김충기에 의해 1981년에 염재집이 완성되는데 시문, 비문 ,상량문, 행장, 및 각종 묘갈명 등이 기록되어 있다.


표재는 석전 황욱이 쓰다

1978년 6월 16일 향년 91세로 돌아가셨고, 묘는 순창 쌍치면 화곡 해좌에 모셨다.

이후 전북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 산 23로 옮겼다. 묘소에는 묘비와 상석 그리고 동자석, 망주석 등이 있다.

 

염재공은 칠보면 무성리 은석마을  소지동 산속에 살 때 말못하는 3째 혜기와 살았다. 아들이 벙어리이지만 염재의 맞춤교육으로 사물을 직접 보고 일대일 교육을 시켜 사물의 이치를 깨우치도록 노력하였다. 미꾸라지 추자를 가르치기 위해선 미꾸라기를 잡아 실제로 보이면서 한문을 공부시켰던 것이다.

 

말년에 큰아들 덕기를 따라 정읍에 살았는데. 이때 최현식, 박수섭 등이 왕래하면서 물었다고 한다. 3째 아들인 혜기는 부모님과 함께 소지동에 살다가 염재 사후 1980년에 동내로 이주하였다. 


 대동천자문은 우리 역사와 사상사를 테마로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엮은 책이며,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와 흔적을 느낄 수 있다. 후반부에는 풍속과 속담 등이 수록되어 있어 민중들의 생활상을 살펴 볼 수 있다. 그의 저술은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무성서원묘정비와 고현향약비가 있으며, 가사로는 고단 규방가사집에 독초가가 한글로 실려 있다.



공은  석지 채용신이 소지동에서 초상화를 그릴때 옆에서 그림 과정을 글로 남겼는데 현재 화가인 손자 김호석(1957年生)이 석지 채용신 화법을 재현하여 노무현 대통령에 초상화를 그렸으며, 전통 한국화(수묵화)의 명맥을 잇는 몇 안 되는 작가로 꼽힌다. 전통 수묵화의 맥락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재 해석해 온 그는 199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춘우정 및 염재 선생에 유품은 증손 김승운교수가 재직중인 전북대에 기증하였다. 

출처 : 정읍시 칠보면 향토사
글쓴이 : 오선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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