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황성 옛터 또는 (荒城의 跡)의 노래에 얽힌 기구한 이야기
황성 옛터 또는 (荒城의 跡)의 노래에 얽힌 이야기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나는 가리로다 끌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 깊이 묻어놓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1928년 늦가을, 악극단 취성좌[翠星座, 1929년에 이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로 통합됨] 멤버들이 지방공연을 위해 황해도 배천에 왔을 때, 비가 내려 공연을 할 수 없어 모두 여관에서 할일 없이 죽치고 있게 되었다.
극단의 배경음악 연주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전수린(全壽麟)은 창가에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이곳에 오기 전에 전속극작가 왕평(王平)과 함께 들렀던 자기 고향인 개성의 만월대와 고려성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500년 전에 번성하던 고려 왕도 개성의 영화는 온데 간데 없고,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있는 옛 궁궐의 주춧돌과 흐트러진 성벽의 일부만 초라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권력의 무상함과 나라 잃은 사람들의 아픔이 지금 일제 치하에 있는 우리 민족과 자기들의 서글픈 신세와 다르지 않음을 떠올리며 쓸쓸히 돌아왔던 기억들이, 창밖에 내리는 비속에서 어른거렸던 것이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들어 그 착잡했던 심정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소리를 들은 왕평이 이 선율을 악보화하도록 하고 스스로 가사를 지어 붙인 것이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즐겨 부르고 있는 ‘황성옛터’[처음 제목은 황성의 적(荒城의 跡)]가 된 것이다.
당시 새 노래가 나오면, 신파연극 공연의 막간에서 부르는 막간가요로서거나, 아니면 활동사진이 상영되는 극장무대 아래서 반주 팀이 부르는 주제가로서 불리어져 대중에게 전달, 확산되었는데,
‘황성의 적‘은 막간에서 앳띤 미녀 가수 이애리수가 막간에 나와 불러 인기를 끈 막간 가요였다
결혼과 함께 모습을 감춰 이미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졌던'황성옛터' 의 가수 이애리수 여사.
워낙 고령이어서 휠체어에 의지해 지내고 있지만, 병원에서"110세까지 사시겠다"고 진단할 만큼 정정하다.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 이애리수( 본명 이음전ㆍ98)씨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씨는 현재 경기도 일산 백송마을의 한 요양시설에서 가족과 간병인의 간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는 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일제강점기인 지난 1928년 <황성옛터> 를 불러 '국민가요'로 칭송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1932년 발매된 <황성옛터>의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판매되면서 그 인기를 증명했다.
<황성옛터>는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곡으로, 최초로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대중가요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씨는 1930년대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나 가정주부로 생활하며 종적을 감췄다. 이씨는 개성 출신으로 10세 무렵부터 배우로 활동하며 막간 가수로도 무대에 올랐으며, 18세 때 <황성옛터>를 부르며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그는 22세 때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남편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씨의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가수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 씨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고 2남7녀의 어머니로서만 살아왔다. 당시 남편의 집안에서 가수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했기 때문이다.
작은사진은 음반 발매 당시의 이애리수.
이애리수
극단 취성좌(뒤에 조선연극사)가 단성사에서 공연할 때, 이애리수 자신도 이 노래의 노랫말과 선율에 담긴 비통한 감정을 가누지 못하여 3절을 부르다가 흐느껴 울어버린 해프닝이 생겼다.
가수가 부르던 노래를 중단한 것은 큰 실수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관중들의 감동을 일으켜 객석에서는 오히려 폭풍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재청이 터져 나왔다.
이애리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노래를 불렀으나, 순조롭게 흐르던 선율이 어느듯 흐느끼면서 또 다시 노래반, 울음반이 되고 말았다.
가수도 관객들도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고, 떠나갈 듯한 박수 속에 앵콜이 요구되어 다음 막의 연극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회자의 말은 묻히고, 일곱번이나 앵콜을 받아야 했다.
관중들은 열광하며 따라 불렀고, 언제나 노래의 3절에 이르러서면 가수와 관중 모두가 노래 반, 눈물 반이 되어버렸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이러한 눈물의 합창이 나오게 되자, 종로서 임석 일본 경관이 무대 위로 올라가 공연을 중단시켰고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이 노래의 작사자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종로서에 끌려가 밤을 세워가며 조사 받고서야 풀려난 적이 있었고, 총독부는 한때 이 노래에 대해 금지곡 처분을 내리기도 했으며, 대구의 한 보통학교에서 음악시간에 이 노래를 가르친 교사는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황문평은 이 노래를 극장에서 먼저 부른 가수는 극단 동방예술단의 기생출신 가수 신일선으로서, 그녀의 노래에 관중들이 흥분하여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자 임석 경관이 노래를 금지시켰고, 이로 인해 왕평과 전수린이 종로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고 했다 (신성원, 우리 대중가요,현암사,2008,현암사, p.38)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애리수는 그 뒤에 단성사 무대에 나왔다고 보겠지만, 계속해서 그녀가 무대에 섰고 나중에 취입까지 하였으니, 처음 누가 무대에 섰던 것인가에 상관없이 이 노래는 이애리수에 의하여 유명해진 것이다.
그 뒤부터는 본프로인 연극보다 막간에 나오는 미녀가수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 노래를 들으러 관중이 몰려들었으며, 관중들은 마음 속에 내재된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과 회한을 노래로서 풀어보려는듯 자신들도 모르게 노래 속으로 끌려들어가 마음껏 합창했다.
전국 각 지방에서 순회공연하는 악단에서마다 막간에서 이 노래는 단골로 불러지게 되었고, 전국 방방곡곡 시골논밭 골목골목에서도 노래하게 될 정도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대박을 예감한 빅터 레코드사에서는 이애리수를 전속으로 영입하고, 일본 동경으로 보내어 노래를 취입시켜 1932년 3월에 음반을 발매하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기록인 5만장의 음반이 팔려나갈 정도로 히트함으로써 이 노래는 일약 민족의 가요가 되었다. 여기에 원판에 있는 이애리수의 노래를 소개한다 이 애리수 - 荒城의 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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