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흄의 경혐주의적 회의

도심안 2012. 8. 27. 02:35

영국의 경험주의자들 중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깊은 영향을 남긴 데이비드 흄(David Hume, 원래는 Home)은 1711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다. 에든버러는 1708년 잉글랜드에 병합되기 전까지 왕국 스코틀랜드의 수도였으며, 흄과 교우관계를 맺었던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활동하던 곳으로서, 흔히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본거지로 알려진 아름다운 도시다.

 

흄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 역사 그리고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책을 탐독하면서 12세가 되기 전(10세라는 설도 있다!), 형을 따라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인문학적 소질이 뛰어났었다. 집에서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흄은 철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그의 주저 중의 하나인 [인간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 3권은 1734~1737년 프랑스에 체류 중 준비하여, 영국에 돌아와 1739~1740년에 출판하였다. 흄은 자신의 주저를 불과 23살에 시작하여 29살에 끝낸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책을 출판하였다는 것보다 철학의 거인 칸트를 ‘도그마의 잠’에서 깨우고, 이후 과학철학의 시초, 논리실증주의의 원형으로 알려진, 지식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하였다는 점이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흄, 기존 철학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주목 정합성의 부족, 확실성의 결여

흄은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고의 새로운 장’이 그에게 열렸다고 믿으면서, 기존의 철학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판단력이 있는 배운 사람이라면 최고의 신뢰를 받으면서, 정확하고 심오한 추론이라고 자부하는 체계가 얼마나 허약한 기초에 놓여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단지 믿음에 기초한 원칙들, 이로부터 서투르게 끌어낸 결론들, 정합성이 부족한 부분들, 확실성이 결여된 전체 등은 가장 저명한 철학자의 체계 여기저기에서 접할 수 있으며, 철학 자체를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있다. ([인간본성론] 서문)

철학자의 윤리가 근거 없는 주장의 비판과 정당화의 시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올바른 지식이란 과연 무엇인가?’는 실로 오래된 철학의 주제에 속한다. 그렇다면 흄이 비판의 칼을 갈아서 새로운 철학의 장을 열겠다고 했을 때, 그는 어떤 원칙에서 출발하였을까?

인간에 대한 과학이 다른 과학의 유일하고 견고한 토대가 되듯이, 인간에 대한 과학에 우리가 부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견고한 토대는 경험과 관찰에 근거해야 한다.

흄은 경험을 지식의 유일한 토대라고 보는 경험주의의 입장에서, 바로 인간의 경험에 필수적이라 보이는 귀납논증과 인과관계의 필연성이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일 수 있었다. 우선 ‘귀납논증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라고 알려진 것부터 살펴보자.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모습. <출처: wikipedia>

 

 

귀납논증의 문제 거지논법, 순환논증

흄에 의하면 귀납논증은 ‘관찰된 사실로부터 관찰되지 않은 사태의 추론’을 의미하며, 그것은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감각과 기억을 넘어서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감각과 감각의 기록을 의미하는 기억, 즉 경험의 뒷받침이 없는 지식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경험주의자라면 응당 귀납논증의 정당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귀납추론이 갖고 있는 중요성이다. 지금은 과학의 방법론을 꼭 귀납논증에서 찾고 있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자연과학이란 제한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귀납논증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자연과학이 자연의 진리를 발견하는 유일한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귀납논증의 정당성이 부정된다면, 인간은 ‘원칙적으로’ 자연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흄이 귀납논증을 비판한 이래 지금까지 거의 300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와 논리학자들이 귀납논증에 연역논증이 갖는 수준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하여왔음은 물론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시도가 예외 없이 항상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거지논법(begging the question) 즉 순환논증에 빠지고 만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자연과학이란 제한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귀납논증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출처: NGD>


귀납논증을 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연이 지금까지의 진행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이른바 ‘자연의 제일성(齊一性, uniformity of nature)’을 가정하는 것이다. 자연의 제일성을 귀납논증에 추가한다면 쉽게 그 정당화가 가능하다. 문제는 자연의 제일성이란 바로 귀납논증의 정당성과 내용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다.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귀납논증을 경험주의의 입장에서 정당화하려는 또 다른 시도는 귀납논증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경험이 바로 귀납논증을 포함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귀납논증으로 귀납논증을 정당화한다는, 즉 ‘대상과 수단의 동일성’으로 인해 이 시도 역시 원위치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동양의 속담에 ‘손가락이 모든 것을 가리켜도 자신을 가리키지는 못한다’는 방법론적 순환에 대한 경고가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결국 ‘매일 새벽 6시 종이 울리면 먹이를 받아먹게 되자, 귀납논증을 통해 ‘새벽 6시 종 → 식사시간’이라는 결론을 내린 천재 칠면조가 어느 날 새벽 6시 종이 울리자 먹이를 받는 대신 목이 잘렸다’는 러셀식 우스개가 현재 귀납논증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는 셈이다. 바꿔 말해 흄에 의하면 관찰된 규칙성(regularity)만으로는 귀납논증을 정당화 할 수 없으며, 귀납논증은 다만 인간의 마음이 형성하는 습관(custom)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대한 흄의 비판

귀납논증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대한 흄의 비판이다. 여기서 흄이 말하는 경험의 내용을 약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흄에 의하면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세계를 경험할 때, 우선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인상(impression)을 받게 된다. 이 인상은 직접적인 만큼 강렬하고 생동적이다. 다른 한편 인상은 인간의 마음속에 관념(idea)을 남기게 되는데, 이 관념은 인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흐릿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인과관계가 원인(cause)이라는 사건유형(e vent type)과 결과(effect)라는 사건유형과의 관계라는 점, 그리고 원인이 선행하고 결과가 후행한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흄의 비판을 살펴보자. 우선 흄은 인과관계를 인간이 결코 선험적(a priori)으로, 즉 인상들의 논리적 포함관계로부터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다. 실제로 어떤 신약이 특정 질병에 효과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논리학자가 아니라 임상의학자이다. 즉 경험에 의해서 인과관계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떤 사건유형을 다른 사건유형의 원인이라고 간주하더라도 원인에 이어 결과가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 한 마디로 인과관계의 파악에 있어서 두 사건유형을 우리는 서로 독립적인 존재로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처럼 독립적인 존재들 간의 관계를 ‘외재적(external)’이라고 불렀으며, 인과관계는 이런 점에서 외재적 관계다.)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위한 조건은 반복을 의미하는 규칙성이지만, 여기서 인과관계의 필연성은 논리적으로 확보가 불가능하다. <출처: NGD>

 

추론이 아니라면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관찰, 즉 경험에 의거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인과관계를 직접 관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의 시간적 양상에 의해 원인이 존재할 때는 결과가 없고, 결과가 존재할 때는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과관계를 두 사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추론에 의해서도 관찰에 의해서도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은 인과관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흄의 결론은 귀납논증의 경우처럼 습관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즉 특정한 사건에 이어서 또 다른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반복되면, 우리의 마음은 습관적으로 이 두 사건의 유형으로부터 받는 인상들과 이에 상응하는 관념들을 결합하여(associate), 즉 투사(projection)하여 인과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흄의 비판이 있기 전까지는 인과관계는 필연적 연결(necessary connection)로 간주되었지만 이제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한편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확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인과관계를 개별사건(event token) 간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위한 조건은 비슷한 사건들의 반복을 의미하는 규칙성이지만, 이 경우 인과관계의 필연성은 논리적으로 확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인과관계가 단순히 반복에 의한 규칙성과 다르다는 점에서, 즉 원인이란 인과력(causal power)을 갖는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어떤 비판이 가능할까?

 

개별사건간의 인과관계란 오로지 사후에만 판단된다는 점에서 두 사건이란 실은 하나의 사건을 분할한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때 확보된 필연성은 두 사건이 다시는 반복될 수 없다는 점에서 독립성의 상실에 기인한다. 파르메니데스적 일자(一者, the oneness)가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전체의 분할에서 생기는 상호의존적, 필연적 관계를 ‘내재적(internal)’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인식론적 전회 20세기 논리실증주의의 선구자

흄의 귀납논증과 인과관계의 필연성 비판은 칸트에게 ‘지식의 원천은 오로지 경험에 있을 뿐이지만, 경험이 곧바로 지식은 아니다’라는, 이른바 철학의 인식론적 전회(轉回)를 가져왔으며,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인간의 지식체계를 경험의 의한 검증가능성에 기초하려는 20세기 논리실증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생전에는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영국의 역사(History of England)] 6권을 지은 역사가로서 더 알려진, 그리고 대학에는 한 번도 자리를 얻지 못한 ‘흄의 회의’에 대한 구조적 이해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흄의 인과관계의 필연성 비판은 구조적으로 볼 때 사실 인과관계에만 국한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비판의 핵심을 조금 더 일반화시키면 ‘독립적으로 도입된 어떤 존재들 간에도 필연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두 존재간의 필연성 확보란 사실 ‘하나의 존재를 두 부분으로 분할하여 경계를 그었지만 두 부분이 만나고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파르메니데스의 귀환!) 다빈치의 물과 공기의 경계, 연속개념, 극한, 무한소의 이중성, 인과관계의 필연성 비판 등은 어쩌면 동일한 구조적 문제에서 출발하는 친족들일 가능성이 있다.

 

 

 

 

  1. 귀납논증

    귀납논증(inductive argument)를 흔히 개별명제로부터 일반명제를 끌어내는 추론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귀납논증의 한 예일 뿐이다. 귀납논증은 연역논증(deductive argument)과 대비하여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논증이란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는 행위이며, 이때 전제들이 모두 참일 경우 결론도 ‘반드시’ 참인 논증을 연역논증이라고 하며, 전제들이 모두 참이더라도 결론이 참이 아닐 수 있는 논증, 혹은 ‘아마도’ 참일 수 있는 논증을 귀납논증이라고 한다. 따라서 연역논증이 진리보존적이나 지식비확장적인 반면에, 귀납논증은 진리비보존적이나 지식확장적인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여론조사나 유비추리는 귀납논증에 속한다. 참고로 수학적 귀납법(mathematical induction)은 그 명칭과는 달리 연역논증에 속한다.

  2. 인식론적 전회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란 서양철학사에서 철학의 주요 관심이 존재론 즉 형이상학으로부터 인간이 획득한 지식의 본질로 크게 바뀌는 것을 말한다. 즉 고대와 중세를 지배했던 실재론(realism)에 대하여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그 실재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지식 중에 선험적(a priori) 가능성을 천명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획을 그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인식론적 전회를 통해 과거 존재론과 인식론의 구별이 근거 없음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존재론과 인식론의 등가성에 대하여는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홍성기 / 아주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 철학과 석사, 자르란트대학교 철학과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현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용수의 논리], [불교와 분석철학], [시간과 경계], [고전 논리학과 대화 논리학]이 있다.

 

발행일  2010.08.08

 

 

 

 

 

댓글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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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씨 (free****) 2012.08.26 23:01

    뒷북 중의 심각한 뒷북 한번 올리겠습니다. 근 2년만에 네이버 메인에 이게 떴길래 호기심에 봤다가 메아리님의 댓글이 십자포화 비슷한 걸 받는 걸 보고 '이게 뭐시여'하고 찾아봤는데.... 저 개인적으로 몇가지 의문과 반박을 뒤늦게 올려보고 싶습니다. 흄, 그리고 회의론자들은 '진짜 확실한 것은 인상 외에는 없다'라고 말하고, 그것은 인간의 지식과 기억, 심지어 자아마저도 확신할 수 없게 만들어주며, 그들이 주장한 것의 대안도 없이 내뺀다.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마저도 확신할 수 없는 혼란 뿐이다. 그래서 회의론자들에게 동감할 수 없다.... 라는 논조의 말을 하셨습니다만, 오히려 저는 이 '혼란'이 회의론자들이 가장 바라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 프리씨 (free****) 2012.08.26 23:06

      사회전복이나 지구정복같은 허무맹랑하고 사악한 계획의 일환 같은 건 아니고, 이제까지 단 한번도 의심해보지 못했던 '나'를 의심하게끔 해 주는 기폭제라고 해야 할려나요. 회의론자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랬지 '불신'하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사실 불신, 그러니까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도 회의론자들은 싫어할 겁니다. 완벽한 긍정처럼, 완벽한 부정도 확실히 땅땅!하고 판가름 할 수 없으니까요. '회의'라는 어려운 말이 나왔지만, 결국 저건 '일단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을 다시 늘어놓고 [이 중에 정말로 쓸만한 것은 뭘까?]라고 고민한 다음 쓸만한 것을 회수하는 것'정도로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이나 상황이 변하게 되면 다시 늘어놓고 '회의'를 반복하는 거죠.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니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것도 다시 생각해보고 일단 지금 쓸만한 건 주워담고, 어차피 넌 한번에 완벽하게 취사선택은 할 수 없으니까 필요할 때 마다 이 짓을 계속 하렴'

    • 프리씨 (free****) 2012.08.26 23:11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네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이 바로 모든 것의 붕괴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모든 것의 붕괴로 이어지는 건 그냥 '모든 것에 대한 불신'이죠. 불신은 맹신만큼 위험합니다. 그리고 회의론자들이 오래오래 세계의 대세가 되는 확률도 그리 높지는 않아보여요. 아무리 좋은 철학이라도 일단 좀 우울하잖아요. 인간은 이성으로 완벽하게 무장하지 못했으니까요. 뭐, 언젠가는 완벽한 이성으로서만 이루어진 인간(또는 다른 지적존재)이 나올지도 모르지만요. 암튼 '되도록이면 덜 아프고 많이 즐겁고 싶은' 대다수의 인간들 사이에서 회의주의가 만연할 일 까지는... 크게 없을 것 같아요.

    • 프리씨 (free****) 2012.08.26 23:14

      그래도 비교적 인류의 소수를 차지하고 있는 회의론자들은 언제든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프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끔 '아프지 않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을 안해버리는 짓을 저지르기도 하거든요. 그 무통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회의론자들은 통각신경과도 같은 역할을 해 줘야 합니다. 실제로는 다쳤는데도 고통을 모르고 뛰놀다가 정말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안되잖아요? 회의론자들은 그럴 때 경고를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회의론자들의 존재 자체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들의 주장에 호감이 가기도 합니다. 이 발언은 어디까지나 제 취향 문제지만요.

    • 프리씨 (free****) 2012.08.26 23:17

      솔직히 통각은 우리의 어딘가가 다쳤다는 신호를 보내주기는 하지만, 통각 자체가 우리 몸을 고쳐주진 않잖아요? 뭐 고쳐준다면야 더더욱 좋겠지만.... 아직까지 거기까지는 무리인 것 같네요. 아무튼 일단 회의론자들이 보내주는 통각이 불쾌하고 싫겠지만, 그건 그만큼 우리의 어딘가가 많이 아프다는 소리이기도 하니까, 통각을 무시하지 말고 처치를 해야죠. 이런겁니다.

  • 썸네일

    개인적으로 귀납논증쪽이 더 좋네요 :) 칸트의 철학을 아직 안 읽어봤는데 다음 번 도서관에 갈 때 살펴봐야겠어요! 그나저나 거지논법은 뭘까..

  • (zest****) 2012.08.25 23:32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배우는 학생으로서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네요.. 읽고 배우는 게 많습니다. 글을 보고나니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약간 아쉬움이 드네요.... 3~4줄로 정리되는 흄,, 뭐 다른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과서의 작달막한 정리와, 정형화된 수능 유형 학습으로 인해 개인적,,주관적 해석이 많았던 것 같네요,,, 다른 철학자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나 저작의 원론등을 더 많이 실어 놓았다면,,, 인문계열 학생들 수준향상에 더욱 도움이 됬을것 같은데 아쉽네요. 글 읽고 흄을 다시보게됬고,, ,ㅋ 원래 스피노자 신봉자였는데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 스릉 (exce****) 2012.08.27 01:43

      학생의 입장으로서 굉장히 좋은 자세를 지니고 계시네요 ^^ 다만 어떠어떠한 철학자를 '신봉'한다는 것은 철학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만 아시면 좋겠습니다. 철학은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이며 자기정립의 과정입니다.

  • 댓글을 보니 예전 공무원시험 학원에서 당시 국어강사가 승무의 파르라니 란 어휘를 예를 들며 우리는 파랗다 푸르다 시퍼렇다 푸르스름하다 이리 다양한데 영어는 파란색이 블루 하나라고 영어를 비꼰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영어에도 블루 아쿠아블루 스카이블루 모나코블루 인디고블루 갤럭시블루 미드나잇블루 다크블루 등등 많지요 우리만 어휘의 다양성이 있는게 아니죠 우리는 형용사적 형태로 표현하고 서양은 명사적 표현으로 표현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 (mhol****) 2012.08.25 16:47

      그렇죠. 우리말은 격변화가 심할 뿐입니다. 물론 그에 따라 맛은 다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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