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에 갇힌 예수> 저자 한종호
밀실에 갇힌 예수> 저자 한종호
» 이종연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비평한 사람. 그는 1992년 창간한 설교 전문지 <그말씀>의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설교와 설교자를 만나며 생긴 선구안 때문이라 했다. 잘나가던 목사들의 설교를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로, 더 나가 슈퍼스타 전병욱 목사의 설교는 ‘빈볼’(투수가 고의적으로 타자의 머리를 향해 던지는 공)로 판정, 대중에게 지탄을 받았고 결국 잘 다니던 잡지사(두란노서원 <빛과소금>)에서 쫓겨났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사람들은 그가 옳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10년 가까이 편집주간을 맡은 <기독교사상>에서는 대형 투수가 아닌 기본기가 튼튼한 연습생들을 마운드에 올렸다. 그것이 꼬투리가 되어 편집주간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는 요즘 ‘꽃자리’를 엮으며 마음껏 변두리 사람들이 앉을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함께 모인 이들과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이 많다고 했다. 6월 7일 바로 그 꽃자리에서 한종호 목사를 만났다.
전병욱 목사의 교회 개척 소식이 화제다. 2000년부터 그를 ‘알아본’ 목사님의 견해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의 이야기를 짧게 정리한다면?
설교 안에 목회가 전반적으로 녹아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목회자의 정체성이 설교에 녹아 있다는 생각에 설교 분석을 시작했다. 당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전병욱 목사 개인에 대한 옹호나 비판이 아니었다. 그의 설교와 신학적 사고에 깊이 스며 있는, 또 거기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에 주목했다. 그것은 사실 한국교회 전반에 걸친 문제들이었다. 전 목사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걸머지고 나가는 젊은 목회자 세대의 대표 주자처럼 인식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신학이 나사렛 예수의 삶이 지향하는 바와 배치되고, 각종 인문·사회과학적 분야에 무지한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비판은 불가피했다. <전병욱 비판적 읽기>(뉴스앤조이)에도 썼지만 세속적인 성공주의, 엘리트주의 등을 강조하는 그의 설교는 청년들이 신앙 골격을 형성하는 데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또 신앙의 배타성, 독선주의를 은연중에 강하게 전달하는데, 그런 것들이 청년들의 신앙에 영향을 끼칠 경우,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다고 생각했다.
성추행 혐의가 그때부터 있었다고 들었다.
그의 설교 비평은 한두 번만 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그때 <뉴스앤조이> 게시판에 전병욱 목사에게 성추행당했다는 자매가 글을 올렸다. 그것이 커졌다. 전병욱 목사가 연락을 해 왔다. <뉴스앤조이> 기자가 갔는데, 긍정도 부정도 않더란다. 그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일종의 병이었다. 다만 그때는 물증이 없으니까 ‘그럴 리가 있느냐’는 의견이 대세였다. 피해를 본 자매가 한둘이 아니었는데도 오히려 피해자들을 매도하는 분위기였는데, 녹취록이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물러난 것이다. 10년 만에 같은 사건이 났는데 돌출 행동은 아니라고 본다.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문제가 이제야 터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저한 회개, 혹은 구체적인 사죄의 언급 없이 교회를 개척한다고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런 사람이 교회를 개척하는데 사람들이 몰린다는 게 걱정이다. 전병욱 목사 측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로 명분이 생긴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방어하고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집단을, 다소 심하게 표현하자면, ‘사병화(私兵化)’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어찌 보면 그의 대중적 인기가 그를 망가뜨린 것이다. 한 개인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고 지지를 얻을 때, 그 이후에 오는 허전함이 있다. 그때의 고독감이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지면 전혀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진다. 젊은 나이에 추앙을 받다 보니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다시 대중적 인기를 안고 개척을 하려고 한다. 위험한 선택이다. 작년에 이동원 목사님 인터뷰할 때 그러시더라. 젊은 사람인데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를 살리는 길인지는 분명하다.
그의 개척 소식을 듣고, 목사님의 활동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글쎄, 내가 집중할 수 있는 분야는 결국 그의 설교가 아닐까. 잘 알다시피 전병욱 목사의 목회 관심은 생존을 위해 여러 가지 복잡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비전을 주는 데 있다. 그런 차원에서 전 목사의 설교가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강도와 그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최근 그의 저서인 <영적 강자의 조건>과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이상 규장)는 책을 보았다. <영적 강자의 조건>이 나약해지기 쉬운 젊은이들에게 승리와 성공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준다면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는 장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 주고 확고한 신념을 갖도록 돕는다. 이 시대에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누구도 이러한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 논리에 좌우되는 험악한 생존 경쟁의 직업 전선에서 성서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어떤 가치와 목표를 사명으로 품을 것인가’이다. 이런 당면 과제 앞에서 전 목사는 도리어 시장의 논리 곧 현실이 요구하는 승패의 논리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젊은이들에게 현실적인 승리의 위상과 좌표를 그려 주고 있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고자 하시는 선과 의에 대한 본질적 충성보다는 남보다 더 빨리, 더 강하고, 더 높게 자신의 위치를 굳히는 데 주력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오히려 바로 이들 때문에 더 많은 소외와 빈곤과 착취와 모순과 부당한 압박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실현할 것인가, 정의롭고 선하고 평등한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전 목사에게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뇌와 올바른 가치관에 대한 촉구와 격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는 패배자가 되더라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가치를 이루고자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이 결국 하나님 나라 안에서 승리하는 자의 가장 소중한 모습이라는 점을 최대한 강조해야 하는데 전 목사의 메시지는 전혀 그렇지 않아 안타깝다. 질타는 할 줄 알지만 성서적 위로의 능력은 없고, 청년들의 감각에 맞는 언변과 수사에 능하지만 정작 자신의 죄는 극복하지 못한 이에게서 나오는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참 고민스럽다.
사실 전 목사뿐 아니라 교회 지도층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여러 불미스러운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적 명성과 교회의 크기, 교회 정치 내에서의 영향력 등 ‘육신의 잣대’가 중심이 되고 있는 현실은 선한 의지에 상처를 주고, 새로운 뜻을 품은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낳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한국교회의 장래에 자신감을 갖기 어려울 뿐더러 예수운동의 근본으로 돌아가, 생명력 충만한 현실을 만들 수도 없다. 기득권을 누리는 교회의 현실로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는 일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됨은 기득권을 한없이 버리는 일이며, 그 버림은 또한 결코 내세우지 않는 작업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도층은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기에 바쁘고, 그로써 개인적 명망을 쌓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
» 이종연
‘대중적 지지’를 많이 받는 김진홍, 김홍도, 강준민 목사 등의 설교도 비평해 왔다.
대중적에게 호응을 많이 받는 설교일수록, 그것이 신학적·성서적으로 바른 것인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안 그러면 교인들이 피해를 입는다. 김진홍 목사의 역사관이 어떻게 굴절되었는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그는 당시 설교에서 미국 등 강대국에 줄을 잘 서야 산다고 가르쳤다. 이는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전 세계를 향해 미국 앞에 줄 설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던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그대로 본 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밀실에 갇힌 예수>에도 언급했지만 그의 변화무쌍한 발언을 보면서 이제, “무늬만 개혁인 개혁적 종교 지도자”로 전락하고 만 느낌이다.
김홍도 목사 같은 경우는 얼마나 많은 설교를 ‘비상식적인 내용’으로 채우나. 요즘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세습을 단행했던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의 참회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홍도 목사의 형인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가 교회를 세습했을 때 교회뿐 아니라 주요 언론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 때 김홍도 목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세습을 비판하는 이들의 진의는 교회 파괴에 있고,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으려는 “적-그리스도 마귀”의 행위며 자유주의신학의 신봉자들과 좌경 세력,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설교인가. 그런데 교인들은 거기에 아멘으로 화답한다. 세뇌가 되면, 다른 설교가 안 들어온다.
강준민 목사의 경우는 대중에게 매우 섬세하게 다가간다. 그는 자신의 성서 해석을 통해서 인생의 한 고비에 서 있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우려 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그로써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계획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로 일으켜 세운다면 기쁜 일이다. 문제는 그의 이러한 접근법이 마치 한때 유행했던 ‘적극적 사고방식’의 한 변형이거나 ‘세속적 축복론’의 계열에 속한 논의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강준민 목사와 같은 흐름 속에서 기독교 메시지가 이해될 경우, 우리는 시대의 거대한 장벽과 마주 서서 자신의 온몸을 던져 죽기까지 하셨던, 그래서 꺾이지 않는 생명력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 가진 의미를 끝끝내 깨우치지 못하게 된다.
김동호 목사는 김진홍, 김홍도, 강준민 목사와는 또 다른 유형의 설교자인 것 같다.
요즘 소위 고지론과 미답지론이 논란이 되는 모양이다. 삼일교회 후임으로 내정된 송태근 목사가 인터뷰에서 한국교회 청년들의 의식 구조 속의 잘못된 고지론, 어설픈 고지론을 언급하자 김동호 목사가 페이스북에서 불을 붙인 모양이다. 지금 고지론 전도사인 김동호 목사와 논쟁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김동호 목사가 2003년 교회 게시판에 ‘삼성 이건희 회장에 대한 구구절절한 찬사’를 보낸 칼럼에 대해 그 생각이 변함이 없는지 묻고 싶다. 그건 ‘고지론자’가 품고 있는 뿌리 깊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역사의 비애와 극적으로 대결하면서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모순과 갈등, 고난과 비극의 문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만나는 이마다 한국 사회의 고뇌를 이야기하고, 정세의 혼란을 말하며 한반도의 위기를 걱정하지만, 김동호 목사의 글이나 설교에서는 절절한 고난에 대한 성찰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유의 설교에 의해 훈련된 기독교인들은 그래서 역사의 과제를 말하는 신앙을 회피하거나 적대한다. 그런 따위는 신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듯 말한다. 그러니 아무리 교회가 늘고 그와 함께 믿는 이들의 수가 증가한다 해도 그것은 개인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사건일 뿐,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역사의 희망을 만들어 가지 못한다.
아직도 설교 비평에 대해서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느냐는 인식이 깔려 있다.
옛말에 ‘볕이 밝으면 그림자도 진하다’는 경구가 있다. 희미한 빛 앞에서는 그림자 또한 희미하나, 밝은 빛 앞에서는 그림자도 진해지는 법이다. 그 빛이 너무 밝아 그림자를 보지 못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명망 있는 설교자들의 그림자는 너무 밝은 빛에 가려, 빛인지 그림자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설교가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채우며 교권적 군림을 꾀해도, 삶과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유리되어 버려도, 메시지가 교묘하게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 이기심을 포장하는 경우에도, 오도된 역사 인식을 주입시켜도 그 진한 그림자는 그만 빛에 매몰되고 만다. 세뇌당하고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일종의 ‘블랙 코미디’인 셈이다.
인기 있는 목회자들의 설교를 다뤘기에 욕도 많이 먹었을 것 같다.
<뉴스앤조이>를 창간할 때 처음으로 ‘설교 비평’이란 악역을 맡으면서,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접했다. 당시만 해도 강단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지금은 다른 분들이 저보다 더 나은 설교 비평 작업을 해 오시기에 그때보다 형편이 많이 나아졌고 받아들이는 분들 입장에서도 이런저런 견해를 피력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설교란 성서를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명제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설교에 대하여 일반 평신도가 논리적으로, 조직신학적으로,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명확하게 정리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평신도가 설교를 비평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나 안목 없이 설교에 노출되면, 설교자의 일방적인 논리에 휘둘리거나 잘못된 신념을 갖게 된다. 은혜라는 것은 올바른 메시지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의 결과다. 잘못된 메시지에조차 무조건 ‘아멘’ 하는 것은 최면이나 오도(誤導)의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하며, 어떻게 평신도들의 성서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도록 할 것인가, 수준이 달라진 평신도를 대하는 설교자의 설교가 질적으로 발전하도록 어떻게 견인하는가 하는 문제의식과 질문이 이어진다. 바로 이것이 설교 비평이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 이종연
익명으로 올리던 ‘설교 비평’이 문제가 되어 다니던 잡지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당시 ‘이성규’라는 필명으로 활동했고, ‘이성규의 커밍아웃’이 화제가 된 바 있다. 12년 전의 일이다. 복상의 젊은 독자들을 위해 그때의 이야기를 조금만 해 달라.
퇴근을 하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빛과소금> 책임자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사무실로 다시 오라는 말이었다. 퇴근 중이니까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자고 했더니, 급한 일이라고 지금 당장 오라는 거다. 사무실에 가니 나더러 <뉴스앤조이>의 이성규가 당신이었냐, 묻더라. 맞다고 했더니 회사와 온누리교회 비서실, 심지어 간암 수술을 위해 미국 LA에 있던 하용조 목사도 상당히 걱정하는 눈치여서 바로 사표를 썼다. 두란노가 추구하는 신앙과 ‘이성규’의 글이 보여 주는 그것은 함께 가기가 불가능했다. 다음 날이 수요일이었다. 두란노 직원들은 수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는데, 그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결론적으로는 깔끔하게 마쳤다.
10년 가까이 일한 <기독교사상>(기상)에서 그만둘 때는 ‘깔끔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있다. ‘내쳐졌다’는 표현이 인터넷에 돌더라.
기상에서 일한 때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그곳에 있는 동안 내 인생에 있어서도 좋았던 기억들이 많고,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에도 충분히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서 한편 감사하다. 나도 그런 배려를 잘 알고 있기에, 내 역량의 대부분을 남김없이 쏟았고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만두는 과정에 있어서의 매끄럽지 못한 일이 그동안의 좋았던 일을 다 뒤엎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나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출판국장(지금은 상무 겸 출판국장)이 부르더니 사장과 같은 생각이라면서 기상을 ‘정리’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더라. 한마디로 황당했다. 자기도 같은 생각이라면서 사장의 얘기를 대신 전한다 하기에, 그 자리에서 이유도 묻지 않고 ‘알았다’고 했다. 인사권자인 사장을 만나서 얘기할 생각이었다. 사장을 직접 만나 그만두라는 이유가 뭐냐 물었더니, 두 가지를 얘기하는데 ‘필자’와 ‘경영’의 문제란다. 필자는 ‘주류 필자’를 쓰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내가 기상을 맡은 후 편집 방향이나 필자 선택에 대해 주변에서 좋은 얘기를 많이 듣는다고 당신 스스로 얘기하고선 이제 와서 필자가 문제라니,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기상에 연재했던 정용섭 목사의 설교 비평은 단행본(<속 빈 설교 꽉 찬 설교>,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설교의 절망과 희망>)으로 묶여 당신이 사장으로 온 이래 가장 많이 팔렸다고 격려금까지 받았다. 그 외에 연재가 끝나고 단행본으로 호응을 받은 것이 한두 권이 아니었다. 정용섭·김기석·김영봉·김회권·임의진 목사나 김학철·구미정·백소영 교수가 주류인가? 적자 경영에 허덕이던 것을 흑자로 돌려놨더니 경영이 문제라고? 대한기독교서회는 1년 예상 매출 150억을 가까스로 90억대로 마감하면서도 그 부분에 대해선 일절 책임을 묻지 않고, 몇 억뿐인 기상의 예산을 가지고 문제 삼는 곳이다. 대판 싸우고 그 후 다른 부서로 발령을 내기에 그만두었다. 할 얘기는 많지만 그만둔 사람이 나와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좋은 모습은 아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고 싶다.
통합진보당 사태도 그렇지만, 기독교 안에도 진보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꼼수를 쓴다. 아주 안 좋은 정치꾼들이 너무 많다. 일종의 밀실이다. 밀실에서 소수의 몇 명이 이 판을 다 휘저을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한다. 내가 머물렀던 곳에서도 공적인 영역을 사유화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능해도 자기 사람이면 승진한다, 사고치고 나가도 내 사람이면 다시 불러 앉힌다. 기상에 있으면서 편집 방향을 주도적으로 결정해 왔지만, 못한 것이 있다. 한기총 문제가 불거졌을 때, 창간 때부터 독자인 제주도 사는 어느 장로님이 한기총 문제를 특집으로 심도 있게 다뤄야 한다고, 기상에서 나팔을 불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진보 측 이해관계로 다루지 못했다. 당시 보수적인 기윤실이 한기총해체운동의 전면에 나섰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NCCK 총무가 <국민일보> 인터뷰 기사에 순복음교회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조용기 목사 가족의 문제는 다루지 말자며 옹호하고 나서는 현실이다. 이 인터뷰 기사에 대해 <뉴스앤조이> 김종희 대표가 비판한 ‘NCCK 총무 보니 한기총 해체만이 능사 아니네’라는 글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상의 정신과 어긋나는 사람의 1년 연재가 나간 적도 있다. 낙하산으로 떨어진 필자였다. 어떤 사람인지 몰랐는데 첫 글이 나간 후 엄청나게 많은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야기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사람에 대한 기사가 <미디어오늘>에 나오기도 했다. 10년 동안 있으면서 가장 부끄러웠던 일이다.
두란노서원을 그만둘 때와는 느낌이 달랐을 것 같다. 상처가 크지는 않았는지?
두란노서원을 그만둘 때는 인간적인 면은 지켜줬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당시 두란노서원 원장)는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 힘들 수도 있다면서 상당한 금액의 격려금을 주기도 했다. (퇴직금과 합해서 <뉴스앤조이>에 다 부었지만) 꼭 돈 때문이 아니다. 함께 일했던 사람으로서의 예의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10년을 다닌 직장에서 직원들한테 인사도 못하고 나왔다. 심지어 기상 편집위원들한테도 인사하지 못했다.
‘비주류 필자’를 발굴했다는 점에서 기상을 높게 평가하는 분들이 많다.
10년간 기상을 많이 바꾼 것에 대해서 지금은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지만, 초기에는 힘들었다. 표지를 인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가 많았을 정도니까. 과거에는 에큐메니칼진영의 필자 일색이었다. 지금은 복음주의진영에서 활동하지만 진보진영 못지않은 소신과 견해를 펼치는 이들이 글쓴이로 결합했다. 신선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들의 설교를 비평한 정용섭 목사, 실존적인 깊은 영성을 담아내면서도 역사와 현실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김기석 목사, 함석헌과 김교신을 옆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풀어 놓은 백소영 교수, 성서 속의 숨결을 풀어낸 임의진 목사, 렘브란트와 성서를 연결하는 신선한 글을 쓴 김학철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김회권 교수도 1년 넘게 모세오경을 연재했다. 여기에 주류가 아닌, 소장파 학자들과 목회자들로 필자를 재구성했다. 글쓴이와 다루는 내용이 달라지니 독자 폭도 넓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꽃자리’라는 출판사를 냈다. 무슨 뜻인가?
구상의 시 ‘꽃자리’에서 가져왔다. 돗자리에 무늬가 들어가 있는 자리를 꽃자리라고 한다. 꽃이 떨어진 자리라는 뜻도 있다. 꽃은 떨어진 자리에서 열매를 맺는다. 꽃잎의 모양이 십자가도 되고,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류연복 선생님이 직접 글자를 써 주셨다. 그리고 나무에 직접 파서 오셨다.
특별히 출판사를 시작한 이유가 있으신지?
원래 옛날부터 책 마을을 만들려고 계획했다. 좋은 필자들을 모셔 글쓰기 강좌도 열고, 1박 2일로 책과 관련한 여러 현안과 교회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해 볼 참이다. 일하면서 얻은 제일 큰 자산이 사람이다. 인터뷰로 만나고, 소개에서 소개로 만나고. 제일 큰 힘이다. 그런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계속 미뤄왔는데 ‘꽃자리’를 시작한 계기로 다양하게 시도해 보려 한다. 도메인(fzari.com)도 하나 만들어 놨다. 이 공간에서 나를 비롯한 7~8명의 필자들이 글을 쓸 것이다. 예를 들어, 전병욱 사건도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옛날처럼 날을 세운다기보다 그때그때 중요한 현안을 깊이 조명해 볼 생각이다. 지금 좋은 필자들이 모인다. 기상에서 하던 ‘나의 설교를 말한다’도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예정이다.
‘꽃자리’에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첫 번째 책이 김기석 목사와 손석춘 교수가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다.
얼마 전에도 만났는데 손석춘 교수와 김기석 목사는 지금도 이메일을 주고받는다고 하더라. 이 책은 일부러 ‘종교’가 아닌 ‘인문 사회’ 쪽으로 잡았다. 앞으로도 진보니 보수니 나누는 것 보다, 여기저기 넘나들 수 있는, 오지랖 넓은 사람의 책을 낼 생각이다. 김회권, 김기석, 김민웅, 김영봉과 같이 외연을 넓혀가면서, 신앙의 본질을 대중적으로 풀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 나온 책은 직접 쓰신 <밀실에 갇힌 예수>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독교 언론에 몸담고 있으면서, 써 내려 간 흔적”이라고 표현했다.
한국교회의 실상은 너무 암담하다. 빛과 소금이 아니라 빛을 막는 두꺼운 암막이며, 소금이 아니라 세균이었다. 슬픈 현실을 막고자 하는 마음으로 써 왔던 글들과 새 글을 묶어 출판했다. 교회의 주인공이 예수가 아니라 교권을 가진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인들이 예수를 따돌리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밀실에 갇힌 예수를 광장으로 나오게 하려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앞으로 꽃자리에서 나올 책들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책을 계획하고 있는지?
다음 책의 콘셉트는 ‘잡설’이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의 입장에서 현안을 분석하거나 깊이 풀어 줄 수 있는 분들을 모시고 이들의 이야기를 담을 참이다. 서로의 종교 입장에서 공통분모도 있을 것이고, 갈등도 있을 것이다. 정리해서 책으로 내려고 한다. 하나님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하나님의 거시기>나, <성서의 에로티시즘>, <왜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 그리고 설교 비평과 관련한 책들과 이현주 목사의 <불을 지르러 온 불>이라는 책을 내려고 한다. 이현주 목사의 책은 아주 결기가 넘치는, 결이 서린 글이다. 단상과 기도문으로 짜인 짧은 글인데, 다시 내고 싶다. 항상 돈이 문제지, 낼 책은 많다.
경제적인 상황은 어떤가? 매달 안정적인 급여를 받다가, 갑자기 ‘대표’가 되어 힘들 것 같다.
지금까지는 사는 데 특별히 지장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조금 안 좋다. 지금 있는 이 사무실도 비워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다. 20여 년을 먹고, 책 사고, 그 돈을 아꼈으면 집 한 채를 샀겠지. 작년 11월에 급여 명세서를 처음으로 아내에게 보여 줬다. 20년 동안 급여를 한 번도 아내에게 갖다 준 적이 없다. 회사를 그만둘 때에도, 한 번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번에도 1년 해 보면서 말아먹더라도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하더라. 비빌 언덕이 있으니 개기는 것이다.
포기한 것인지, 지지해 주는 것인지?
포기김치를 많이 먹었더니. (웃음) 100퍼센트 지지해 준다.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우연히 출판·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20년이 흘렀다. 그간 어떤 이들의 편을 들어 주며 살아왔나?
사람들은 늘 중심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크든 작든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한다. 나는 비주류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눈길이 가는 것은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 바닥에서 주류는 아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삶을 사는 사람들, 연대하고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가고 있다. 역사는 주류와 강자가 써 나가는 것 같지만, 성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세상은 강자의 편에 붙어사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치지만 성서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현실은 대세를 쥔 쪽에 서라고 하지만, 성서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라고 한다. 그래서 시편 1편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 약삭빠르게 사는 꾀가 많고, 강하고 부해져서 오만해진 자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것 같지만 복 있는 사람은 그런 길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비록 초라한 것 같고 대단할 것도 없는 자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 따라 열매를 맺고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궁성의 부’를 비교하면 시냇가의 나무는 아무 것도 아닌 듯싶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드러내 보이는 생명의 힘을 소중히 여기는 이를 축복한다고 하시지 않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삶을 가난하다고 여기고, 힘없다고 생각하면서 내버리고 만다. 그건 착각이 아닐까? 하나님의 축복을 굳게 믿는 이들은 세상의 대세에 휘둘리지 않는다.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강자나 부자들의 오만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힘이 없는 이들은 여전히 힘이 없어 늘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한다. 교회는 이들을 위한 희망의 거처가 과연 얼마나 되어 주고 있는 것일까? 거대 교회, 이른바 메가 처치가 되기 위한 야망에만 집중하는 한국교회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만 같다. 교회는 시장의 논리를 따르고, 권력이 되고 있으며 의로운 시인들을 추방하고 있지 않은가. 악인의 삶은 아무리 매혹적이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악인의 삶일 뿐이다. 성서의 시인들은 이 선과 악의 분별에 민감했다. “이 땅을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은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 이 세상을 돌이키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영혼이 시들지 않으며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런 축복을 바랄 것인지, 우리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달려 있다.
진행 및 정리 : 이범진 편집위원, <유코리아뉴스> 기자 poemgene@ukore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