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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學習하면 왜 기쁜가?
도심안
2011. 11. 6. 21:0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서 그 배운 것을 때마다 익히니 이 아니 기쁜가?
學(학) : 學은 배운다는 뜻인데 주자는 이를 效(효) 라고 풀고 있다. 效는 본받는다는 뜻이다. 무엇을 본받는다는 것일까?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원래 善한 것이지만 그 본성을 깨달아 실천하는 데에는 선후가 있으니 先覺(먼저 깨달음)者의 실천하는 바를 後覺者는 반드시 본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善을 밝히고 그 본래부터 타고난 인간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없던 것을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먼저 깨달아 실천하는 자를 본받아 본래부터 타고난 자신의 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學(배움)인 것이다.
而(이) : 이곳에서는 承上起下之辭(승상기하지사 : 위를 이어 아래를 일으키는 말)로 쓰였으나 그 쓰임은 아주 다양하다.
1.순접 : 그리고, 하고, 하면서, 그리하여
2.역접 : 그러나, 하나, 이나, 그런데도, 이지만
3.자격,신분 : 로서
4.접미사 : 에
5.한정 종결사 : 일뿐이다.
6.인칭 대명사 : 너
時(시) : 『時의 뜻도 제대로 풀어야 한다. 때때로, 가끔가다 시간이나 여유가 생기면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時는 無時로 풀어야 한다. 곧 어느 때고 `익히지 않음이 없음〔無時不習〕'을 의미한다.』 본래 타고난 본성을 회복하는 일은 우리들이 숨쉬는 일과 마찬가지로 가끔가다 시간이나 여유가 생기면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習(습) : 『주자는 習을 새가 자주 날갯짓하는 것에 비유했다. 새가 날갯짓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날지 못하면 새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새가 새로서의 正體性, 즉 새다움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나는 것이다. 글자의 형태를 보더라도 習은 羽와 白을 합친 글자이고 白은 日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곧 새가 날마다〔日〕 날갯짓〔羽〕하는 모양을 형용한 것이 習字이다. 따라서 배움을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을 마치 새가 날갯짓하듯 끊임없이 익힌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學(배움)이란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곧 사람다움을 추구하는 일이며 習은 그것을 끊임없이 익히는 부단한 노력이다. 당연히 習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주자는 習을 복습으로 보았는데 다산은 실습으로 보았다. 부모에게 문안드리는 예를 배웠으면 제 때에 몸소 문안드리는 것이 習이라는 것이다. 디시 말해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이 習인 것이다.
之(지) : 이곳에서는 지시 대명사로 쓰였으나 그 쓰임은 아주 다양하다.
1.지시 대명사 : 동사 뒤에 놓인다.
2.관형격 어조사 : ∼의, ∼한, ∼하는
3.주격 어조사 : ∼이, ∼가
4.목적격 어조사 : ~을
5.동사 : 가다
說〓悅(열) : 마음 속으로 느끼는 희열로 밖으로 드러나는 즐거움인 樂(락)과 구별된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본받고(學) 그 본받은 바를 실습함(習)으로서 정체성 곧 사람다움을 되찾아 실천하는 것이 學習이다. 따라서 공자의 말씀은 사람다움을 회복하여 실천하는 것에 참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어미 새의 날갯짓을 따라하던 새끼 새가 어느 날 문뜩 자신도 어미 새처럼 푸른 하늘로 높이 높이 날아 올랐을 때 그때 느끼게 될 가슴속 그 희열을 생각해 보라! 어찌 사람으로서 사람다움을 배우고 실천하여 인간 세상으로 날아오르는 일이 기쁘지 않을 수 있겠나?
※『 』안은 田好根의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에서 인용.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서 그 배운 것을 때마다 익히니 이 아니 기쁜가?
學(학) : 學은 배운다는 뜻인데 주자는 이를 效(효) 라고 풀고 있다. 效는 본받는다는 뜻이다. 무엇을 본받는다는 것일까?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원래 善한 것이지만 그 본성을 깨달아 실천하는 데에는 선후가 있으니 先覺(먼저 깨달음)者의 실천하는 바를 後覺者는 반드시 본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善을 밝히고 그 본래부터 타고난 인간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없던 것을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먼저 깨달아 실천하는 자를 본받아 본래부터 타고난 자신의 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學(배움)인 것이다.
而(이) : 이곳에서는 承上起下之辭(승상기하지사 : 위를 이어 아래를 일으키는 말)로 쓰였으나 그 쓰임은 아주 다양하다.
1.순접 : 그리고, 하고, 하면서, 그리하여
2.역접 : 그러나, 하나, 이나, 그런데도, 이지만
3.자격,신분 : 로서
4.접미사 : 에
5.한정 종결사 : 일뿐이다.
6.인칭 대명사 : 너
時(시) : 『時의 뜻도 제대로 풀어야 한다. 때때로, 가끔가다 시간이나 여유가 생기면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時는 無時로 풀어야 한다. 곧 어느 때고 `익히지 않음이 없음〔無時不習〕'을 의미한다.』 본래 타고난 본성을 회복하는 일은 우리들이 숨쉬는 일과 마찬가지로 가끔가다 시간이나 여유가 생기면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習(습) : 『주자는 習을 새가 자주 날갯짓하는 것에 비유했다. 새가 날갯짓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날지 못하면 새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새가 새로서의 正體性, 즉 새다움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나는 것이다. 글자의 형태를 보더라도 習은 羽와 白을 합친 글자이고 白은 日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곧 새가 날마다〔日〕 날갯짓〔羽〕하는 모양을 형용한 것이 習字이다. 따라서 배움을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을 마치 새가 날갯짓하듯 끊임없이 익힌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學(배움)이란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곧 사람다움을 추구하는 일이며 習은 그것을 끊임없이 익히는 부단한 노력이다. 당연히 習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주자는 習을 복습으로 보았는데 다산은 실습으로 보았다. 부모에게 문안드리는 예를 배웠으면 제 때에 몸소 문안드리는 것이 習이라는 것이다. 디시 말해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이 習인 것이다.
之(지) : 이곳에서는 지시 대명사로 쓰였으나 그 쓰임은 아주 다양하다.
1.지시 대명사 : 동사 뒤에 놓인다.
2.관형격 어조사 : ∼의, ∼한, ∼하는
3.주격 어조사 : ∼이, ∼가
4.목적격 어조사 : ~을
5.동사 : 가다
說〓悅(열) : 마음 속으로 느끼는 희열로 밖으로 드러나는 즐거움인 樂(락)과 구별된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본받고(學) 그 본받은 바를 실습함(習)으로서 정체성 곧 사람다움을 되찾아 실천하는 것이 學習이다. 따라서 공자의 말씀은 사람다움을 회복하여 실천하는 것에 참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어미 새의 날갯짓을 따라하던 새끼 새가 어느 날 문뜩 자신도 어미 새처럼 푸른 하늘로 높이 높이 날아 올랐을 때 그때 느끼게 될 가슴속 그 희열을 생각해 보라! 어찌 사람으로서 사람다움을 배우고 실천하여 인간 세상으로 날아오르는 일이 기쁘지 않을 수 있겠나?
※『 』안은 田好根의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에서 인용.
출처 : 방원서당(方圓書堂)
글쓴이 : 曺永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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