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내에 계신 승객 여러분,저는 조선대 의대에 다니는 정일봉이라는 학생입니다. 오늘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여러분 앞에 서서 소란을 끼치게 된 것은 저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고자 해서입니다. 저는 지금 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둬야 할 형편입니다. 그러나 저는 공부를 계속해서 훌륭한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혹시 지갑이 필요하신 분들은 제가 지금 들고 있는 이 지갑 한 개씩만 사주세요. 여러분의 은혜는…”
나의 대학생활은 엉망이었다. 집안형편상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상태였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입시 성적이 좋은데다 어려운 집안 사정을 인정받아 학비는 전액 면제받았다. 그러나 생활비와 교재비 등은 어떻게든 내가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광주 시내에서 송정리를 오가는 버스 안에서 지갑을 팔고 여기저 쫓아다니며 할부 책장사 등을 했다.
어머니와 우리 4남매는 단칸방에서 지냈다. 말이 좋아 방이었지 거의 개나 돼지 우리에 진배 없었다. 나는 그 속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와 바깥으로 나돌았다. 여름에는 강의실에서,겨울에는 부속병원의 빈 입원실을 찾아들었다. 이도 저도 어려울 땐 염치고 체면이고 벗어던지고 친구나 선배의 방을 찾았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짐승만도 못한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하나? 차라리 학교고 뭐고 다 치워버리고 뒷골목 건달들 속으로 들어가 버릴까…’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이 싫었고 세상 사람들이 적대시됐다.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술자리라도 가지면 술을 입 속으로 들어붓다시피 했다. 술이 취하면 내 울분을 못 삭여 소리를 지르거나 울기도 자주 했다. 이 때 누구든 기분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면 주먹이 날아갔고 그조차 제대로 안 되면 병이든 뭐든 들고 ‘응징’을 했다. 친척들과 아버지 살아계실 때의 지인들이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 더욱 서러움을 부채질했다.
요즘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아마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극도로 거칠었고 난폭했으며 심지어 흉포하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내가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 습성이 지금도 그대로일지 모른다. 어쩌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낙오자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런 점에서만도 나는 하나님 그리고 나의 신앙을 생각하면 흔히 하는 말로 가슴이 후끈 달아오른다.
내가 예전에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회상시켜주는 일이 지난해 있었다. 서울 강남역 옆에서 ‘닥터봉 성형외과’를 운영하고 있는 어느 날 전화 한 통화가 걸려왔다. “기억하겠어요? 서안석이라고 하는데요.” 갑자기 가슴이 철렁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25년전,그러니까 1979년 광주 시내에서 서로 술에 취해 싸우다 한 쪽 팔에 약간의 장애를 입힌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 얼굴은 모르지만 이름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만나 깊이 사죄하고 용서를 빌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사람이 나타나고 보니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왔다.
바로 약속을 하고는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당시 우리는 각자 광주시내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합의를 하는 바람에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연배의 후덕한 그의 모습이 상당히 낯익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놓는 그의 첫 마디. 무심코 내뱉는 그의 말이 나의 심장을 멎게 만드는 듯했다.
“쌍꺼풀수술 名醫”소문… 돈벌자 오만
“저는 지난 25년 동안 정일봉씨를 한번도 원망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정일봉씨가 잘되기를 기도해왔습니다.”
그의 첫 마디에 내 입에선 절로 “할렐루야!”가 튀어나왔다. 상대의 입에서 공격적인,적어도 원망의 말이 나올 걸로 각오하고 있었는데 나를 위해 기도해왔다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나는 아무 말로 할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이 마치 예수님처럼 성스러워 보였다. 그는 대치동에서 ‘동서부동산’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의사이면서 목사가 됐다고 하자 그는 무척 기뻐했다.
내 대학 생활은 한시도 편할 날 없이 어렵고 힘들게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느새 1978년 의과대학 공부를 모두 마쳤다. 그러고 앞서 말한 대로 술집에서 싸움을 한 뒤 곧바로 고향 광주를 떠났다. 서울의 한 병원 응급실장으로 가게 됐다. 거기에서 얼마쯤 일하다가 울산에 당직 자리가 생겨 ‘제2의 고향’ 울산으로 내려갔다.
울산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그리고 경남 남해와 산청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했다.
그리고 지금의 내 반쪽인 진주 출신의 김정애와 결혼도 했다. 이때서야 내 생애 처음으로 건실한 생활이 가능해졌다. 광주 동생들에게 학비를 보내기 위해 매주 창원으로 달려가 산재병원의 야간 당직까지 서면서 열심히 일했다.
전공의 과정을 거쳐 전문의가 된 나는 1989년 4월 울산에서 ‘정일봉 성형외과’라는 간판을 내걸고 병원을 개원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내가 성형수술에 탁월한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개원하고 얼마 안돼서부터 쌍꺼풀 수술을 잘한다는 소문이 일대에 쫙 퍼졌다. 병원에는 눈 성형수술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했듯 나는 서서히 예전의 정일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늘어나는 수입을 주체하지 못해서인지 술과 도박에 빠져들었다. 돈 많은 의사라는 직업은 천성적으로 친구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내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매사 안하무인이었고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 1년여가 지났을까. 당시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내게 생겨나고 있었다. 잠자다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 무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꿈을 꾸지 않으려고 일부러 술을 잔뜩 먹고 잠을 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항상 피곤했고 뚜렷한 이유 없이 우울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기조차 겁이 났다. 평소의 나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자신이 너무나 확연히 느꼈다. 거기다 ‘내가 이렇게 살기 위해 어릴 때부터 갖은 고생을 해왔나’하는 자책감과 자괴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친했던 사람의 권유로 점집에 찾아갔다가 “조상신이 노했으니 굿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질겁하며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종교를 가질 거라곤 생각도 못해 봤다. 그런 내가 내 발로 성당과 절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를 위한 준비를 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험하고 굴곡 많은 삶을 살아온 나를 선택하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쓸모없어 보이는 정일봉을 쓰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고 계셨던 것이다.
목사님 손에 이끌려 난생 처음 주일예배
1990년 4월 중순 어느 날 나는 한없이 울었다. 원장실 문을 안에서 걸어잠그고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훌쩍거리며 울었다. 예수님도,하나님도,기독교도 생소하기만 했던 내 가슴에 김 목사님의 설교가 비수가 되어 꽂히는 느낌이었다.
병원에서 일하던 백 간호사가 내 마음을 알았을까,그녀는 내 마음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준비을 하고 있는 걸 알아챘을까,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무슨 언질이라도 줬던 것일까? 아마도 나의 허허로운 마음은 대충 짐작했을 것이다. 백 간호사는 그 날 “원장님,이거 한번 들어보세요”라며 테이프 1개를 건네주었다. 백 간호사는 지금 서울 명성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친구 사무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눴는데 그분이 목사님이었다. 그 친구는 “좋은 분인데 알고 지내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난생 처음 목사님과의 대면이었다. 당시 울산에서 조그마한 교회를 개척해 열심히 목회하고 계시던 김창영 목사님이었다. 지금은 경남 거제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 그분은 대뜸 기도하자고 해 얼떨결에 역시 난생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그러고 그 다음 주일날 아무 저항 없이 목사님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다.
전체 교인이라야 50여명인 그야말로 작은 교회였다. 시쳇말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교회에서 예배까지 드리게 됐다. 교회문을 들어설 때만 해도 가슴이 뛰고 두려웠다. 그러나 막상 문에 들어서서 강대상 뒤에 내걸린 커다란 십자가를 보자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놀라운 일은 교회에서도 이어졌다. ‘공부를 잘하려면 가장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맨앞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보통 처음 교회에 오는 사람은 구석진 자리를 찾기 마련인데 제발로 앞자리를 찾아가는 나를 보고 목사님도 놀라는 눈치였다.
교인들이 찬송가를 불렀다. 따라 부르지 못하는 나는 그들이 부르는 가사의 뜻만 새겨 들었다. 그 내용이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한 것처럼 들렸다. 또 다시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자 눈물이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과 교인들은 “초신자가 엄청나게 은혜 받았다”면서 좋아했다.
그러나 역시 정일봉은 어쩔 수 없었다. 당장 그날 밤 또 친구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벌였다. 오히려 마음이 좀 안정되다보니 전보다 더 술맛이 나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 내가 교회에 가서 울었다는 말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친구들 가운데선 “야,네 주제를 알아라”며 비꼬는 이도 있었다. 한 친구가 그때 “정 원장 나중에 목사 되는 것 아냐?”라고 농담을 했는데 나중에 그 말이 씨가 됐다고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아끼는 한 집사님이 병원에 찾아와 “정 원장,1주일 뒤 부흥회가 있으니 은혜 받을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렵더라도 며칠 동안은 술을 마시지 말고 마음을 좀 안정시키라고 권고했다. 솔직히 나는 부흥회가 뭔지도,은혜 받는 게 뭔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왠지 뭔지 모를 기대감이 생겼다. 정말로 며칠 동안 술자리를 피하기 위해 병원 일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직행했다.
부흥회서 성령체험후 새사람 거듭나
부흥회가 시작된 날은 내가 교회에 나간지 2개월쯤 됐을 때였다. 당시 인천 성지교회를 담임하는 하영식 목사님께서 강사로 나와 사자후를 토하셨다. 말씀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부분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몸이 감전된 것처럼 떨렸다. 지난 40여년 동안 지은 죄들이 활동사진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온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주님께서 넓은 들판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우리 가족에게 안수해주시는 장면이 떠올랐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왔다. 입에서 방언이 튀어나오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했다. 성령 체험이었다.
나는 비로소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탕자 정일봉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세상이 온통 새롭게 조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 새로운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마치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에덴동산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들이 모두 예수님인 듯했다.
문득 집 생각이 났다. 갑자기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밤 12시. 평소 술판을 벌일 때는 초저녁이었는데도 귀가하기에 너무 늦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는 아내의 눈이 무서워 보였다. 평소에는 아무리 늦게 들어가도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없었는데 이 날은 달랐다. 평소엔 아내가 바가지를 긁더라도 대충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지만 이 날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보,미안하오. 여보,사랑해. 여보,미안하오. 여보,사랑해”를 반복했다. 그리고 “부흥회는 내일까지이니 당신이 좀 이해해줘”하며 애원했다.
아내는 내가 교회 나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뒷날 아내의 말에 따르면 내가 은혜 받고 있을 부흥회 시간에 자신은 아파트 10층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는 분명 마귀의 사주였을 것이다. 우리 가정에 예수님이 찾아오는 것을 막으려는 마귀의 장난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기시는 분이다. 전능하고 전지한 그분을 당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나는 이미 그때 그런 하나님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와 능력도 갖춰가고 있었다. 아무리 강하게 막아도 하나님께 향한 내 마음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생활도 180도 바뀌었다. 변하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게 변했다. 내가 받은 숱한 은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망각의 은혜’였다. 지난 날의 죄와 허물도,좋아하던 술과 담배도,가끔씩 저질렀던 폭력과 도박도 모두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물론 밤마다 괴롭히던 아버지의 환상도 깨끗이 없어졌다.
성령 체험 후 동료 의사들과의 첫 회식자리였다. 술잔을 받은 나는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술을 못 마신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술맛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주종불문에 두주불사였던 내가 이렇게도 변할 수 있나 싶은 게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하루 2갑 이상을 피워대던 골초였던 내가 앞에 앉은 친구 콧구멍에서 담배연기가 나오는 게 신기해 보였다. 참으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