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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읍사, 유자광이 한글로 악학궤범에 수록
도심안
2010. 10. 25. 21:36
정읍사, 유자광이 한글로 악학궤범에 수록
정읍출신 유자광, 정읍사 기록 위해 하위직 장악원제조 자원
권희덕 기자 notay350@hanmail.net
정읍사 노래는 고려사악지에 이두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악학궤범에는 동동, 영산회상과 함께 한글로 수록되었다. 모두 정읍지역의 노래들이다. 이것은 유자광이소리패 여종 출신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또 어머니 곁에서 수시로 노래와 음악을 듣고 자라났기 때문이다. 서자로서 천대받으면서도, 옹동 귀양몰 고모집에서 일을 볼 때에 재치가 있어 아낌을 받았다 한다. 후에 고모부 권채, 신숙주 등의 도움으로 독서를 많이하여 모든 계략의 기능을 소유하였다.
유자광은 흥겹고 예술적인 음악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종 임금에게 음악 정리를 건의하여 음악을 관리하던 하위직으로 자원하여 장악원정으로 부임한다.
악학궤범은 조선실록에도 기록이 없다. 악학궤범은 성종24년에 출판되었는데, 임진왜란의 와중에 잃어버린 악기와 악제 중 유일하게 되찾은 책이다. 이해에 7월말 악학괘범의 편집자 성현이 윤은로와 불화로 탄핵되어 경상도 관찰사로 발령난 것을 유자광의 진정으로 5일만에 예조판서로 고쳐 발령 내어 주었다. 유자광의 정읍사 한글시를 궁중악으로 올리려는 유자광의 열정과 정성이다.
이해의 8월 정축일에 장악원제조 유자광이 성종에게 다음과 같이 진정하였다.
"장악원 제조는 음악을 잘아는 사람으로 해야하는데 전부터 성현이 장악원제조로 근무하여 잘아는데 이제 경상도 관찰사는 다른사람이 할수도 있으나 음악책을 만드는 일은 성현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유자광이 정읍사 동동등 정읍민요를 궁중의 제일음악으로 만드는 작업을 성현과 같이 하려고 장악원제조(현재의 국립국악원)같은 낮은 자리를 자원하여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당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던 유자광은 고향노래 발전을 위하여 좌천을 자원한 것이다. 그리고, 경상도 관찰사로 발령난 성현을 수일내에 자기보다 높은자리인 예조판서에서 근무하게 하고서 정읍사의 한글가사와 그의 춤인 처용무까지 기록하였다.
유자광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면, 태인의 세력가인 영광유씨(문화유씨)로써 옹동면 산성리 귀양몰(대칠 .배미골)에 부처되어 와서 살고있던 세종대왕 시절 우부승지였던 고모부 권채로부터 배움에 기회를 얻었다. 총명한 머리로 사랑을 받던 유자광은 권채가 귀양이 풀려 서울에 갈때 함께 따라 올라갔다.
그러나 천출이라서 무관으로 장원급제 하여 근무하다가 세조와 성종임금의 등극에 공을 많이 쌓아 급성장하였다. 이에 앞서서 세종시대에 박연이 훈민정음등을 정리하였으나 모두가 정악으로 흥이 없고 부적합함을 파악하고 어머니로부터 잘 배운 고향 정읍음악을 강조한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악학궤범의 지은이를 성현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 저자는 유자광이라고 봐야 한다. 책의 서문을 쓴 유자광의 글속에 고향의 노래를 부각하려는 것이 보인다. 오늘이라도 악학궤범의 첫장을 읽어 보면 정읍사 노래가 막강한 유자광 세력과 애향심으로 궁중음악에 올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519(중종13년), 김종직의 제자 조광조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유자광을 미워하여 모든 유자광의 흔적을 없애버린다.
이 때에 김종직의 세력들이 수차례 상소하여 왕명으로 다음과 같이 명하여 정읍사를 없애버린다.
"도교 소격서는 성균관에, 그리고 정읍사는 오관산으로 바꾸라"
그렇게 사라진 정읍사는, 산내면에서 홍경주 딸 홍비의 세력인 대장금,정난정 등등의 궁인 의녀, 수라간 등 정읍출신 궁인들의 협력으로 주초위왕의 최첨단 생물학적 글씨쓰기 병법으로 조광조를 몰아낸 후, 다시 궁중악사와 궁인들이 연주하여 오늘까지 남아 있다.
정읍사공원, 정읍사예술단 등이 생긴지 오래되었어도 정읍사람들이 모르고있다. 심지어 국악과 대학교수까지도 유자광이 악학궤범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다.
영남 도학파 김종직, 조광조, 이퇴계, 이율곡의 승리의 세력만이 조명을 받게 되면서, 유자광, 홍경주, 정여립은 고향에서까지 악인으로 취급받고 있다. 민족의 예술을 가꾸어준 역사의 공을 정읍사람마저도 모르고 이구동성으로 욕을 하고 있다.
예술과 흥을 말살해 버린 조선사회를 연산군시대에 예술부흥사회로 만든 예술가들, 단군신단을 보수하고, 중국사상을 배척하며, 국방농악을 발전시킨 유자광,송세림 등 정읍예술의 역사를 지금이라도 제대로 알자.
9권 3책. 1493년(성종 24) 왕명에 따라 예조판서 성현(成俔)을 비롯하여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 ·신말평(申末平) ·박곤(朴棍) ·김복근(金福根) 등이 엮은 악규집(樂規集)이다. 당시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된 의궤(儀軌)와 악보(樂譜)가 파손 ·소략(疏略)되고, 세종(世宗) 이후의 성악유법(聲樂遺法)이 결폐(缺廢)되는 감이 있으므로, 이 책을 지어 임금께 바친다고 하였다. 편찬자들 중에서도 성현은 장악원의 제조(提調)를 맡았던 만큼 음악이 따르는 궁중의 전례(典禮)에 실제로 참여하여 음악에 정통하였으므로, 이 책을 편찬함에 있어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다.
[편집자]참고로 백과사전에 나오는 악학궤범에 대한 설명을 붙인다.
이 책에는 《동동(動動)》 《정읍사(井邑詞)》 《처용가(處容歌)》 《여민락(與民樂)》 《봉황음(鳳凰吟)》 《북전(北殿)》 《문덕곡(文德曲)》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의 가사가 한글로 정착되어 실렸으며, 궁중의식에서 연주하던 아악(雅樂) ·당악(唐樂) ·향악(鄕樂)에 관한 여러 사항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하고, 그 밖에도 악기 ·의상 ·무대장치 등의 제도, 무용의 방법, 음악이론 등을 자세히 적고 있다.
가사의 내용이 주가 된 책이 《악장가사(樂章歌詞)》이고, 음악의 곡조를 위주로 한 것이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임에 비하여, 《악학궤범》은 음악의 이론과 제도 및 법식(法式)을 주로 다루어 이 방면의 연구와 이해에 귀중한 문헌일 뿐만 아니라, 고려악사(樂史)를 아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내용을 보면, 1책에는 권1에 악리(樂理)와 용법을 다루어 육십조(六十調) 등을 설명하였고, 권2에 아악진설도설(雅樂陣說圖說) ·속악진설도설(俗樂陣說圖說), 권3에 고려사 악지 당악정재(高麗史樂志唐樂呈才)와 고려사 악지 속악정재(高麗史樂志俗樂呈才)를 해설하였다. 2책에는 권4에 시용당악정재도설(時用唐樂呈才圖說), 권5에 시용향악정재도설(時用鄕樂呈才圖說), 권6에 아부악기도설(雅部樂器圖說)을 싣고 있다. 3책에는 권7에 당부악기도설(唐部樂器圖說), 권8에 당악정재의물도설(唐樂呈才儀物圖說) ·연화대복식도설(蓮花臺服飾圖說) ·정대업정재의물도설(定大業呈才儀物圖說) ·향악정재악기도설(鄕樂呈才樂器圖說) 및 둑제소용(纛祭所用)의 궁시 ·검 ·창에 대한 설명, 권9에 관복도설(冠服圖說) ·무동관복도설(舞童冠服圖說)과 둑복(纛服) 및 여기복식도설(女妓服飾圖說)을 수록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에 있던 악기와 악제가 모두 불타버렸으나 이 책만은 되찾아 1610년(광해군 2)에 복간되고, 그 후 1655년(효종 6)과 1743년(영조 19)에 각각 중간되었다. 1933년에는 고전간행회(古典刊行會)에서 이 책을 영인(影印), 간행하였다.
2004년 0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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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이러브정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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