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세종대왕의 의학정리 `향약집성방` 권채는 대장금마을 사람
세종대왕의 의학정리 '향약집성방' 권채는 대장금마을 사람
신라는 대구, 백제는 전주로 간 그 원인은 허장군 로마교육에서
의녀 대장금 마을 사람 세종의 승지 권채 대사성으로 제작한 이름이 있다
허기장군이 로마식 학교 학당이 이화학당 배재학당 남부학당은 서울대치대로 발전했다
대장금 태인 학당이 강화도 개성, 그리고 서울로 가서 서울대학교의 모체가 되고 성균관대학은
전투. 의학. 음악. 웅변이 전무한 교육 성균관교육의 후속이였다
한국의학의 발상지 대장금 마을의 역사는 신라와. 백제의 수도 경주와 부여는 허기장군 로마교육세력으로 청도에서 대구로, 정읍에서 전주로 바뀐 원인은
허기장군이 로마교육으로 군사 고려무신정치, 조선태조 왕자의 난등 군사구테타 전투 문화 세력이 동학군까지 이어진 이유이다
BC 210년 진시황제가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해오도록 조선에 불로초 구하러 보낸 서시(徐市)는 진나라가 망하여 귀국을 못하고 허왕굴 앞에 진시황제 재림하여 타고나갈 5두마차가 있다
백제가 망하고 당나라 측천무후 군장으로 있다가 위험하여 터어키 땅에 망명한 허기 장군이 755년 당나라 안록산의 난에서 당현종을 구해주어 ‘신라는 동방예의지국’ 이라는 당현종 친필 호칭 글과 당나라 모든 악공 기술자 보물을 갖고 귀국하였다
허기장군은 당현종을 구하여 수양아들로 삼고 '이기' 이름으로 생명의 은인으로 종소경, 안금장과 두씨. 무씨 당현종 친족그리고 양귀비 가무악공 궁녀 백공기술자를 데리고 귀국 산내면에 정착하여 후손 887년 허사문이 최치원과 장보고 후손이 정착하여 로마학교 학당(전투 의학 음악 웅변 )교육으로 군사양성한다
산내 대장금이 사는곳은 종소경 이름이 종성 종암이름으로 안금장이 안성대 가무궁녀의 이화원이 이화동 유적이름이 지역 가운데 대장금 같은 의술에 뛰어난 소녀는 이화원 마을 안금장 종소경 장군의 전투 의술 음악 전통적 로마 궁중교육으로 계승 남아있어 최고의 장수촌 최고의 의녀 가 탄생되는곳이다
북한에서 번역한 책 세종대왕 의학의 대사전 '향악집성방' 1권 책표지
이 책을 허준이 동의보감으로 개선 했는데 산청군이 의학의 성역으로 알려지고
의학을 가치는 로마교육 학당의 교육으로 정읍 산내 대장금 마을인데도 ....
그간 정읍 지도자는 문화를 모르고 동학군만 연구하여 정치투쟁 만발전 했다
이들이 고려 궁중세력 사병 양성하고 군사훈련지로 1170 고려무신정권 이의방 허승에서 조선시대 동학군까지 국방운동은 이곳 사람 무술로 지탱했다
허씨 후손 이지겸 통치시대 중국 송나라에서 원나라에 밀려 온 망명귀족 송씨를 이곳에 정착시키어 후백제 세력 호족이 허씨궁전을 허궁실에 짓고
경상도 청도 진주로 번저간다
원나라 황제의 병을 고친 설경성 의원이 그리고 두문동 72인 허중민 어의가 있었다
한국 최초 의학책 향약구급방 한약책이 고려 최씨정권시대 1236년 대장금 성씨 대씨 부인이 최우의 부인으로 있을 때 출판되고 금산사 금구를 이의방의 고향이라고 하여 군으로 승격했다
남양 홍씨는 홍규가 자기 딸을 몽골제국에 공녀로 바치길 거부했다가 쇠몽둥이로 구타당한 바 있고, 그 홍규의 딸이자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 홍씨는 몽골제국 공주들의 눈치를 보느라 한동안 궁에 들어와 살지도 못했다.
그래서공민왕 몽고가 약한 틈을 보고 나중에 기철을 죽이고 원나라를 반대하는 정치를 하였다
그래서 홍규는 같은 익산사람 송송례와 삼별초를 움직여 최충헌의 손자 최항 그리고 김준 임유구와 그 일당을 차례로 제거함으로써 무신정권은 100여년 만에 끝나게 되었으며,
1274 홍씨 홍규와 여산송씨 송송래와 송분, 송인이 합세하여 그 바탕에 고려 충열왕이 임금이 되어 공민왕 때 까지 平和의 時代로 宋氏, 林氏, 洪氏, 蔡氏, 등이 합세하였다
1353 공민왕이 집권하여 홍씨들이 사는 정읍 산내 장금산 너디 대장금 마을은 임실(구고)현과 태산(정읍)현과 접경지역이다
그래서 공민왕은 어머니 고향 너디 마을인 구고현과 태산현. 두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준다
1359 홍건적의 난으로 이성계와 권희가 합세하여 홍건적의 난을 진압하고 그 힘으로 세력을 장악하고 고려 우왕 때에 또 다시 왜구의 침입으로 홍규와 이성계가 고부, 태산,을 거처서 지리산에서 1380 왜구 아지발도 토벌의 대승전을 이루니 더욱 커진 태산군 향학당 훈련 세력으로 이씨 조선창업 세력이 된다
1371 이성계는 우왕 창왕을 죽이고 자기와 가까운 동족 태인허씨 계열로서 이씨 공예태후 후손 공양왕을 왕으로 세우고 차후에 이성계가 조선 태조가 되었다
공민왕이 몽고와 친한 송씨 권씨 허씨 족을 숙청할 때에는 송인의 아들 송안이 함흥 이성계 부하로 숨어들어 가서 함경도에서 부터 지리산 황산전투와 공양왕 때 최영장군과의 이성계 간의 전투에서 이성계 군악대장으로 1388 승리하게 된다
그래서 홍씨 세력은 숙청을 피하여 이곳 정읍시 산내면 너디 마을과 . 임실 순창 근처 산간 연고지에서 숨어 살었다
충녕대군의 스승 권우 아들 권채(1399~1438) 너디마을 홍씨 외가집 가문에서 태어난다
권우는 세종의 스승으로 변계랑 정인지등 72인을 가르첬다
세종대왕이 고려시대 ‘향약구급방’ 책을 개선 ‘향약집성방’ 책 확대하려 권채가 의원 유호통 노중례 박윤근을 전속으로 데리고 출판하였으며 유호통은 양영대군과 수양대군의 병을 치료하여 상을 받었고 박윤근은 이곳 사람이다
대장금마을사람 권채가 세종에게 알리고 정의공주가 이마을 제현동으로 시집와서
한글도 채집했다
향약구급방 향약집성방에 기록된 중국어 약초 한문이름을 한국말 소리 이두문자 표기로 쓰다가 원래 사용한 몽고 인도 터어키 문자를 한글문자로도 사용한 사투리 소리표현
글자가 한글창조의 첫 길이 되었다
특히 수양대군이 향악과 향약(의학) 한국말 소리를 표기 한글창제를 명나라가 알지 못하게 세종의 비밀 연구지시를 하였다
그래서 수양대군이 한글소리 문자자료를 누나 정의공주와 함께 비밀리에 한글을 만들었고 한글을 반포하니 최만리가 즉석에서 반대하자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궁에서 최만리를 축출해버렸다
모든 한글은 시 소설 시조 가요 향가 판소리 등 정읍에서 시작 되어 있었다
그리고 권채가 구성한 집현전을 수양대군이 이어 받아 그 인맥으로 1452 특히 단종왕 시대 정읍인맥 송인수 유자광 부친 유규 홍길동의 형 홍령 세력으로 단종내각에 참여 한다
단종을 모신 대맹례가 태맹레(太孟禮) 로 변성하여 함경도 가서 살았고
그 후 유자광의 세력으로 태맹레(太孟禮) 일부 후손이 산내면, 산외면 종산리에 살았고
장금산 서낭당 의녀 가문으로 내려오다가 연산군시대에 유자광의 부관으로 너디마을 사는 홍경주가 군부 벼슬을 맡아서 중종반정에 성공하여 유자광 몫 왕비로서 홍경주 딸이 희빈 홍씨로 입궐 한다
중종의 후궁 희빈은 유자광의 힘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유자광 벼슬이 ‘부원군’으로 올랐던 아래 기록이 있다
'세조(世祖)에게 인정을 받아 녹공(錄功) 되었고, 부원군(府院君)에 이르렀다'(중종실록 10년(1515 ) 9월 8일)
유자광은 서자라서 자기 딸을 왕비로 들일 수가 없어서 심복 홍경주의 딸로 종종의 후궁 희빈이 되었다
유자광 고모부 홍령의 친족 홍경주와 그 장형 홍경림의 후손이 이곳 태인현의 홍씨 집성촌(홍성대) 등이 살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태조 왕건의 사위 허사문, 공민왕 모친 명덕태후, 단종왕비,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 등 대를 이은 왕비들의 교육 양육 고을 이였기에 너디마을 입구에는 홍살문(紅門)과 영문(營門)마을이름이 있고 장금산 서낭당집이 있고 또 음악악공이 사는 ‘재인동(才人洞)마을이 있는 누평현 돌평현의 군청소재지였다
대장금은 미인 이였기에 중종이 가장 사랑하는 희빈 홍씨의 의녀로서 중종의 노환을 치료하는 시기에 장수비결을 보려고 수차례나 장금산 고향 마을의 사람 100세 노인만을 집요하게 서울로 올라오게 전라관찰사에게 명하였다
연산군시대 부터 중종시대까지는 정읍사람 유자광(옹동) 송세림 (칠보) 홍경주(산내)등등 태인현 사람들이 궁중 수라간에서 의술치료을 인선차출을 장악한 세력이였다
이 마을 사람 홍령은 홍길동의 형이 되며 유자광 고모부로서 단종 왕을 모시다가 영월에서 죽었고 이때 대장금의 친족 대씨들이 함경도로 도망하여 남원태씨로 살고 있다
유자광이 연산군시대 궁중 의약과 요리 담당 사옹원장이였던 유자광이 고향에서 어린 대장금이 수라상이 무거워서 힘이 들어 하므로
수라상의 무거워 둘로 나누자는 대장금 어린 의견을 연산군에 전하였다가 유자광이 아래와 같이 국문을 당하여 으로 죽을 뻔하였다
연산 10년(1504) 기사
음식을 두 소반에 나누어 차릴 것을 청한 유자광을 국문케 하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음식을 올리는 큰 소반이 매우 무거워 들기 어려우니, 두 소반에 나누어 차려 드리기 편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신하로서 인군 앞에서 공경하고 조심한다면 어찌 들기 어려우랴? 자광이 말할 것이 아니요, 승지 역시 아뢸 것이 아니다. 자광을 국문하도록 하라.”
그리고 11년후 중종 10년에 대장금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 난다
"우선 중종실록 1524-1533 년간에 이런 글이 있고, 태인 사람들이 자주 오른다.
1524년(중종 19년)의 기록에 의하면,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看病)하니, 이 전체아(全遞兒)를 대장금에게 주라" 고 되어 있다.
1533년(중종 28년). "내가 여러 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 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의녀(醫女) 대장금과 계금(戒今)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관목면(官木綿)과 정포(正布)를 각기 10필씩 내리고"고 되어 있다.
중종의 병이 완쾌하고 장금산(산내면 장금터널의 산) 남북의 두 100세 장수노인에게 수차레 상경을 명령한 것은 대장금의 인척에게 상을 내리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리가 멀고, 건강상 이유로 상경하지 못하자 이들에게 후한 식량과 옷감등 재물을 주도록 전라관찰사에게 하명한 기록이 있다.
1533년 7월 17일 (중종33년)에 대장금이 중종의 병을 치료하면서 태인현 산내면의 송효행씨 부인 김씨와 순창 의 마유량씨 부인 조씨가 100세 이상으로 전국최고 장수노인으로 알려져 중종이 수차례 두사람을 궁중으로 올려오게 하여 중종의 병, 노인병의 표본으로 관찰하고 치료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대장금이 자기의 고향에서 소문난 100세 이상 노인의 존재를 중종에 알린 때문일 것이다.
"홍침(洪沈)및 내의녀(內醫女) 대장금"이라는 중종실록의 궁중기록은 수침동 마을 홍씨 수침(水沈)댁, 장금댁(內醫長今)이라는 호칭으로 궁중에서 불렸다
홍씨 후손들이 토속성씨로 지칭하는 두월리 장금리 홍씨 집성촌으로 보인다.
명종때 화가로서 태인현감 신잠이 8년간을 이곳에서 근무하였고 홍침의 이름 수침동과 장금이 이름 장금산으로 불리였다
진시황제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황제등 귀족의 불로초등 치료약초를 재배하고 그것을 최초로 대장금의 조상 최충헌 며느리 최우시대 대씨부인 세력시대 ‘향약구급방’ 출판되었고 대씨기 대대로 장금산과 수침동 산에서 주로 약을 체집하여 책을 鄕藥採取月令책을
너디사람 권채와 부하 유호통 노중레가 사투리 약 이름 기록문자 창조에 수양대군이 협조하여 완성하여 향악 향약 한글이 모두 완성되었다
대장금은 서낭당에서 장금산과 수침계곡을 향약월별 채취하는 일이 장금산 대부분 주민의
하는 일로서 대장금일을 재현한다
대장금이 약초 채집하는 과정을 알수 있게 숲길 가에 한문 이두문 한글표기 150가지 약초를 심어서
의약 한글 국악 판소리의 근본지역의 고증을 현지에서 한눈에 보고 이해하는 학습관광을 하게 한다
한문 이두문 한글표기 150가지 약초 예
중국약명 - 향약채취월령이두문 - 고어 - 한글
萆麻子 - 阿次加伊 - 아가리 - 아주까리
蟾蜍 - 豆何非 - 두허비 - 두꺼비
麥門冬 - 冬乙沙伊 - 겨사리 - 겨을사리
향약집성방 지은이 권채의 사촌형 권옹의 외손자 유성룡이 권율장군 세력으로 출세 그후 집권하여 안동하회마을로 으로 악공을 모두 데려가고
허장군을 허도령으로 부르고 이곳과 같이 허씨 안씨가 주로 함께 산다
단종복위 사건으로 송현수 숙청, 중종반정으로 유자광숙청 인조반정으로 유성룡이 정권을 장악 이곳에서 성행힌 로마군사교육인 스페인 투우
소싸움 소도살 백정마당 탈춤등 소죽이기 는 로마교육이 페르샤 터어키에서 허기장군이 터득하여 정읍에서 군사훈련 유습으로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