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드라마 동이 - 숙빈 최씨는 어디서 태어난 것일까?
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생모인 그녀. 그러나 그녀의 출생은 물론 어떻게 성장했는지 도통 의문 투성이다.
하나 - 은평구 구파발 부근일 것이란 이야기.
아버지 최효원의 신도비가 진관사 부근에 있음을 보면 그리고 당시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최효원이 구파발 부근에서 채소장사를 했으며 그래서 그곳에서 태어났을 것이란 추측. 보광사와 흥국사 등에는 숙빈 최씨에 얽힌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구파발에서 10분 거리의 흥국사는 영조가 어머니 묘인 소령원을 가기 전에 항상 들러 어머니를 추억하던 곳이다. 숙빈 최씨는 1718년 죽기 직전에도 아들의 무사안녕을 빌며, 또한 왕이 되게 해달라고 그곳에 자주 들러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숙빈 최씨가 아들이 왕이 되게 해달라고 자주 기도했다는 보광사 전경
둘 - 태인현 정읍이란 주장
1936년 장봉선이 펴낸 『정읍군지』라는 책에는 지금 정읍시 태인면 거산리 대각교라는 다리에 얽힌 숙빈 최씨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을 한 번 기록해 본다.
"대각교라는 다리는 전주 감영으로 가기에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1675년(숙종 1년)에 둔촌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부임길에 아내와 딸을 대동하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대각교 다리 위에 한 거지 몰골을 한 소녀(동이, 숙빈 최씨)가 서 있었는데 초라하지만 너무나도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시 아홉살 된 인현왕후를 안고 있던 민씨 아내는 그 아이를 불러 이것저것 묻고 부모 없이 밥을 얻어 먹으며 거지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그래서 평소 인정이 많기로 유명한 인현왕후 친정어머니는 아이를 데려다 키우기로 하였다.”
그렇게 해서 동이(숙빈 최씨)는 대궐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에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고 김춘택의 아들이며 다리 아래에서 노론의 젊고 잘생긴 정치기획가 김춘택이 최효원의 딸과 간통을 해서 낳은 아이’라는 소문들이 파다했다. 다리에서 관계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대개 천박하고 음탕함을 과장하기 딱 좋은 이야기다. 영조의 출생이 숙빈 최씨와 김춘택의 불륜, 혹은 야합에서 태어났다는 소론을 비롯한 노론 반대세력에 대한 유언비어가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이런 유언비어들이 당시에는 너무 파다하게 퍼진 것이다. 그래서 영조 역시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 - 실록에 기록된 허구
실록에 보면 숙빈 최씨의 아버지 최효원은 드라마 동이에서처럼 검계의 우두머리는 아니다. 그런데 왜 검계의 우두머리라는 상상을 했을까? 그건 실록 기록에 최효원이 무관출신이란 기록이 나온다.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가계를 조사하게 했지만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임금의 총애를 받기 위해 가계를 조작했다. 실록의 조작된 기록은 이렇다.
최효원의(崔孝元 1638~1672년) 직은 충무위 부사과(종 6품). 해주 최씨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라고 한다. 최효원과 남양 홍씨가 결혼해서 1남 2녀를 낳았는데,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위로 언니도 있었고 남동생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집안의 족보에는 숙빈 최씨의 아버지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숙빈 최씨의 집안이 워낙 근거도 없고 족보도 없어, 고심 끝에 영조는 외가 족보를 아마 위조하거나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출생지까지 조작했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자신의 생모가 한양의 한복판인 여경방(오늘날 서울 시청 부근)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정읍의 설화도 그렇고 구파발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 영조는 1761년 자신의 어머니 추존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정치적으로 아주 긴장되던 해였다. 1761년 그 해는 사도세자 비극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시기, 영조는 천민 어머니를 두었다는 출생의 콤플렉스 때문에 아예 숙빈 최씨를 천민 신분에서 양반 집안이라고 조작을 한다.
1761년 8월 4일 영조는 어머니 최씨가 탄생한 옛날 집을 사들여 그 집안에게 귀속시킨 뒤 전매를 금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곳이 한성부 여경방 서학동, 오늘날 서울신문사 부근이며 조선시대 무기를 만들던 군기시라는 관청이 있던 곳이다.
영조실록의 행장(임금의 한 행적을 기록한 글)을 보면 맨 뒤편에 나와 있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연보다.
1670년(현종 11) 11월 6일 태어나,
7세(1677년)에 궁에 들어와
23세(1693년) 4월 26일 내명부 숙원(종4품)으로
그 해 10월 6일 왕자 영수를 생산하고 소의로 품계를 받다.
24세(1694년) 9월 20일(영조의 생일은 원래 9월 13일, 이것도 의문이다.) 영조를 낳은 뒤 숙의로 봉해졌다.
1698년 7월 10일 한 명의 아들을 더 낳고 후궁의 품계 가운데 가장 높은 숙빈(정1품)이 됐다고 기록돼 있다. 물론 마지막에 낳은 아이는 이름도 짓기 전에 죽었다.
1718년 3월 9일 숙빈 최씨는 48세 일기로 2년 동안 시름 시름 앓다가 숨을 거둔다. 그녀는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 머물던 창의궁 잠저에서 아들의 손을 잡고 죽었다. 아들이 임금이 된 것을 보지 못한 숙빈 최씨, 그러나 죽어서 결국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참고도서
<영조의 세가지 거짓말> 2010년 3월 22일 올댓북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