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새만금은 한민족 수호 학당교육터 2
새만금은 한민족 국방. 음악. 한글 교육의 성지
새만금은 인재교육 한민족 수호학교 학당 근본지
새만금은 갯벌 조개 어류 군량이 풍족하고 변산과 섬들이 많아 백제 가야군이 독립운동 흑치상지
걸사비우 허국(허나라) 허기 허사문의 땅 최치원 최무선 정여립 이곳사람이 한글학당을 세워
새만금은 최고 조개 소금 고기 어장으로 군량이 풍부하고 부안변산의 고군산 선유도 위도의 섬이 많이 있어서 전투요새지로서 당나라 소정방도 이곳을 먼저 점령하고 쉽게 왕궁 부여를 함락했다
공주 웅진성으로 의자왕이 웅거하였지만 웅진성 장군 예석진이 의자왕을 생포하여 당나라에 항복하여 바치고 당나라에서 출세하였다
흑치상지는 할수 없이 의자왕을 따라 항복한 흑치상지는 소정방의 백제인을 무자비하게 학살에 분개하여
흑치상지 장군과 가야 백제 망명군 들이 부안 변산을 중심으로 주유성(부안 줄포) 개암사 지역에서 백제부흥군으로 백제땅을 거의 수복했다
그러나 의병장군 도침과 풍왕의 불화로서 분산되어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다시 항복하고 지수신 장군은 고구려로 들어갔다
그 당시 당나라 고종시대 야심찬 후궁 측천무후는 허의후(許儀後)라고도하는 재상 허경종(許敬宗)과 밀접한 음모를 꾸며 왕후를 몰아내고 측천무후가 황후가 되는데 성공 한다
원효대사 설총 흑치상지 지수신 도침 풍왕 허세신 역사가 있는 울금바위굴
그리고 측천무후가 고종이 죽자 충신을 축출하고 구테타를 성공하여 여황제로 당나라를 장악했다
여기서 허경종과 성씨가 같은 가야 백제 망명족 허세신의 후손으로 걸사비우 이름이 등장하는데
측천무후는 걸사비우에게 허나라(許國)이라는 나라 왕 작위를 주었다
그 시대는 측천무후의 최고 공신 세력가 허씨 허경종(許敬宗)과 허나라 허왕 걸사비우는 혈족이였을 가능성이 많다
사천성에 가야국 허황후 유적도 발견되고 있고 이곳이 걸사비우 허나라 군사들이 망명하여 흑치상지 부대에서 살아남아
훗날에 755년 안록산 남을 토벌한 이기(허기) 장군의 활동지로 보인다
그러니까 허나라 걸사비우는 대조영과 고구려독립을 고수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걸사비우의 군사들이 살려고 흑치상지 군사로 편입되어 이들은 당나라 서쪽 사천성 촉나라 지역과 돈황 지역으로 가서 터어키 돌궐족과 몽고족을 막는 군사활동으로 전투마다 크게 승전하여 반드시 개선가 음악 행진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흑치상지 비문에 기록했다
그 흑치상지 노래는 동방에서 들어 왔다고 도 비문에 기록했다
대국 당나라가 에 한류열풍으로 흑치상지 전투승리 개선행진곡이 유행되었다
그러다가 측천무후는 흑치상지 장군에게 채나라(蔡國)를 치라고 하였는데 미온적으로 흑치장군이 회피하여 그 죄를 들어서 측천무후가 흑치상지장군을 죽였다
그래서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준이 반기를 들고 서역에 망명 항거하였다
여기서 흑치상지를 따르는 가야족 허씨 종족도 합류하여 터어키 인도 몽고 돈황지역 변경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측천무후가 흑치준 장군을 달래어서 벼슬을 주고 의자왕 흑치상지를 북망산 왕족묘에 모시게 하였다
그래서 여기에 있던 허기장군이 터어키 돌궐족 서역의 세력가가 된 시기 755년에 당나라에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서 안록산이 황제가 되고 당현종은 사천성 촉나라 성도로 도망하여 왔다
755년 안록산 난 평정한 허기장군이 당나라가는 신라를 신앙터 수성당 부안 격포 채석강
그리고 당현종은 터어키왕국 황제에게 안록산 토벌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당현종은
"당나라 땅만 남기고 여자, 금,은,보화, 모두 가저가라"
라고 애원하는 구조 원병하는 글이 남아있다
여기서 돌궐군 지역에서 세력을 장악한 가야족 허기장군 앞에 당현종이 애원하였을 것으로보이며 그런 역사를 삼국사기 김부식이 식민지 사관으로
신라사신 이기가 양가강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당현종을 알현하였다고 식민지 신하로 고처서 기록했다
안록산 황제 군사가 장악한 길고긴 양자강을 허기(이기) 장군이 통과 할수도 없고 허기장군은 흑치준(흑치상지 아들)을 따라 서역의 터어키 돌궐군사 사천성 지역에서 도망 온 당현종을 보호하여 당나라가 살아난 역사를 말한다
새만금 부안 변산 내소사 개암사의 허기, 흑치준 등등, 호족이 당나라 세력으로 존재할 시기에 장보고가 새만금 지역 노예로 잡혀가서 허기장군 힘으로 승진이 쉬어서 대장군 으로 승진하고 신라왕권을 취하려 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 후에 선유도 사람 최치원이 군산에서 배를 타고 가서 단번에 장원급제 하고 서역 오랑케의 글과 말에 능통했다고 한다
최치원 역시 서라벌에 입성하여 김씨 진성여왕을 구출하려고 하였으나 시기하는 박씨 세력에 물러나서 고향 새만금의 자금으로 정읍 칠보면 허기의 후손 허사문 지역에 태산학당을 세우고 당나라로 피신한 장보고 후손들 (안동장씨 부안장씨)을 부르고 이씨 견훤을 불러 그세력이 후백제로 발전했다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장군으로 측천무후가 채나라를 치라고 명했을 때 채나라에 백제 군사들이 망명하여 서로 화친 내통하고 있었는지
채나라를 치지않고 오히려 다른 당나라 장군가 대패하고 전사하였으니 당연히 의심이 가고 흑치상지 는 죽고 허나라 걸사비우 후손 허기 장군이 채나라 부족과 신라에 755 귀국하여 새만금 부안 해변에 정착 그리고글안군 침입 시대에 고려현종을 채충순 장군이 이곳으로 피난시켜 이자겸, 이의방 친족과 현종을 결혼시켜 고려왕족 세력을 장악했다
채나라에서 온 채륜 이라는 새만금 군산지역 호족이 고려시대 정중부난에서 이의방 두경승과 중심세력으로 일어났다
정중부난의 무신 주역장군들이 새만금 지역 호족으로 그들은 신라말과 고려시대 성균관 유교학교 교육으로 김부식 김돈중 부자 문신숭상 무신천대 정치를 하여 송나라 성균관 교육출신이 무너젔다
흑치상지, 걸시비우 허국, 채국, 출신 돌궐 서양로마교육으로배운 전투 음악 웅변 의술 교육 기능을 익힌 새만금 서해안 지역 무신세력에 무너젔다
고려시대 일본 고려청자기 소유 이자겸 호족과 충열왕 시대 일본정벌의 주역과 정중부난의 중심이 이곳 세력인데 모두 전투 음악 웅변을 배우는 학당교육 세력들이다
군항지 관광객
이들이 인도구자라트 몽고 돌궐족의 통합 문자로 한글문자를 사용하고 그것을 수양대군이 수집해 갔다
최만리의 반대를 호되게 질타하고 축출한 수양대군이 기거하였기에 그 아들 예종대왕 태실 덕종 태실도 있다
서해안 사람들이 887년 태산(정읍 칠보)태수 최치원이 로마식 학교를 세워 사병을 양성하였고 웅변과 음악교육이 판소리가 되고 의약 약초이름과 노래가사 기록에서 한글이 사용되고 그 한글은 정의공주가 이곳 사람 안병담 시집오고 수양대군이 주재하며 한글과 가야금을 배우고 태인호족 송인수와 절친하고 그 누이를 동생부인으로 그 딸을 단종왕비로 만들어 세력을 잡았다
그러나 단종내객 세조내각에서 밀려난 성균관 출신 사륙신세력이 금성대군을 부추겨 세조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죽었다
사륙신 세력이 중종반장 인조반정 구테타로 세조대왕의 업적과 학당교육 전투 예술 의학은 사라지고 성균관 예기학문 인재로 모든 무신의 권력 장수로 임명하여 임진난에 성균관 출신을 뺑소니 장군에 비하여 태산학당 출신 홍길동 유자광 정여립 송상현 김천일으로 이순신 장군도 이허겸 후손 이라고 전하기도 하니 이허겸은 걸사비우 후손 허기장군 그 후손 태인 허씨 허사문의 아들 이허겸은 인천이씨 시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