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내러티브 저널리즘 리포트] <상> 결혼이민자를 보는 대한민국의 불편한 시

도심안 2010. 6. 7. 20:17

[내러티브 저널리즘 리포트] <상> 결혼이민자를 보는 대한민국의 불편한 시선 [중앙일보]

2010.06.07 01:31 입력 / 2010.06.07 01:37 수정

자스민은 한국인이다

부잣집딸, 의대생, 미인대회 출신 … 자스민은 필리핀에서 ‘엄친딸’ 1등 신붓감이었다. 그런 그녀가 한국서 온 띠동갑 연상 항해사 남편과 사랑에 빠져 그의 아내가 됐다. 열아홉에 장남 승근이를 낳고 한국아줌마 됐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생각일 뿐이었을까?

귀화했고, 주민등록증까지 나왔지만 사람들은 수군댔다 “외·국·인인가봐”… 2등 국민같이 느껴졌다. 6년 전 아들 학교에 급식봉사를 갔다. 아들은 큰 소리로 “엄마”라고 외쳤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이 달라졌다. 지금 그녀는 당당하다. 영화와 방송에 나갔고 지방선거 비례대표의원 추천 소동 유명세도 치렀다.

10년 뒤 10가구 중 1가구가 다문화가정이 된다. 배우와 정치인이 되겠다는 그녀의 꿈이 이뤄질 날도 멀지 않았다


‘필리핀 며느리’ 자스민(33·여)은 2일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했다. 한국인으로서 그녀는 투표했다. 주변에 있는 이주 여성들이 자스민에게 물었다.

“투표는 어떻게 하는 거야.” “시의원은 뭐하는 사람들이야.” “그럼 우리 사는 것도 좀 나아지나….”

자스민은 이번 선거 과정에서 유명인이 됐다.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둔 4월, 한나라당이 광역 비례대표 의원으로 그녀를 추천할 것이라는 뉴스가 보도됐다. 그러나 최종 명단에 자스민은 없었다.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을 발견했다. 함께 투표를 고민하는 이주 여성들이 생겼다는 변화가, 자스민은 신기했다. 자신의 정체성이 한국인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기분이 괜찮았다.

1995년 띠동갑 한국인과 결혼한 필리핀 출신의 자스민. 필리핀 명문 의대에 다녔고, 집안은 부유하고 외모는 빼어나다. 한국에 시집와서 두 아이를 키우느라 12년간 바깥생활을 못했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다큐멘터리 번역가로, 방송 패널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필리핀에선 1등 신붓감이었겠다고, 그녀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랬겠죠. 하지만 한국에선 2등 국민, 아니 등외죠.”

그녀는 ‘2020년이면 10가구 중 1가구는 다문화 가정이 될 대한민국의 오늘’을 이야기했다. 이 글은 자스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자스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의 15년 한국 생활은 동남아 출신 이주 여성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녀에 대한 편견은 곧 우리 사회의 수준을 말해 주고 있다.

발렝케 퀸

①자스민이 남편 이동호씨와 만난 건 1994년 의대 3학년 때다. ②95년 경복궁을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다. 자스민은 “몸무게가 43㎏ 나가던 시절”이라고 했다. ③1996년 결혼식에서 폐백을 올리는 모습. 부부는 95년 필리핀에서 결혼식을 치른뒤, 첫째를 낳고 96년 한국에서 다시 혼례를 올렸다. ④이름난에 ‘자스민바’로 적힌 운전면허증.
자스민의 어린 시절 애칭은 ‘발렝케 퀸’이었다. 발렝케는 필리핀어로 시장이다. 부모는 시장에서 가장 큰 잡화점을 운영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4명, 가게 직원이 3명이었다. 승용차 6대 중 2대가 독일제였다. 스쿨버스에서 내려 우아하게 시장으로 걸어오는 소녀를 보며 사람들은 ‘발렝케에 퀸이 오셨다’고 말하곤 했다.

자스민은 공부를 잘했다. 92년 필리핀 대입 시험에서 100점 만점에 99점을 맞았다. 필리핀국립대(우리의 서울대)에 합격했지만, 마닐라까지 보낼 수 없다는 부모의 반대로 집(민다나우 다바우) 근처에 있는 아테네요 대학 의대를 선택했다. 최상위권 사립대다. 의대 재학 중이던 94년에는 미스 필리핀 다바우 지역예선에서 3위에 올랐다. 대학 밴드에서는 리드 보컬을 했다.

바로 그해, 남편 이동호씨가 2등항해사로 일하던 선박이 다바우에 정박했다. 동호씨는 식료품을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 자스민의 부모가 운영하는 가게였다. 동호씨는 그곳에서 자스민을 봤고, 사랑에 빠졌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동호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필리핀으로 건너왔다. 끈질긴 구애였다. 그 정성에 부모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완강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저런 외국인과…. 백인이라면 모를까. 영어도 형편없잖아.”

그러나 자스민은 동호씨의 진심을 봤고, 사랑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95년 4월 결혼했다. 자스민은 공부를 그만두고 싶지 않아 필리핀에 남았다. 그러다 덜컥 임신을 했다. 자스민은 시부모가 있는 한국으로 건너갔다.

첫째 승근이가 96년 7월에 태어났다. 자스민의 나이 19세였다. 그날 이후 자스민은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혹시 한국에서 편입할 때 필요할까 봐 대입시험과 내신 성적표를 가져왔지만 쓸 일은 없었다. 둘째 딸 승연이는 2000년 5월에 태어났다.

자스민바

한국에 시집온 지 3년째인 98년. 자스민은 귀화했다.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이름란에는 ‘자스민바’라고 적혀 있었다. 원래 이름은 ‘자스민 바쿠어나이’.

이름은 네 글자까지만 들어갑니다, 동사무소 직원이 친절히 설명했다.

바쿠어나이가 성(姓)인데…, 자스민은 네 글자 이름이 어색했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자스민은 12년 만인 올해 ‘자스민 이(李)’로 개명신청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자스민은 장을 보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두 사람이 앉는 좌석에 50대 초반의 아줌마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자스민은 얼른 자리를 잡았다. 아줌마는 자스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국인은 자기들과 조금만 다르다 싶으면 집요하게 쳐다보는 습성이 있다. 그건 자스민이 가장 불편해하는 한국인의 특성이다. 자스민이 얼굴을 피하자 아줌마는 몸을 틀어 따라오며 쳐다봤다. 어색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한국말 하네!”

자스민은 고개만 끄덕였다.

“어.디.서.왔.어.요?”(못 알아들을까 봐 또박또박,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필리핀요.”

“필리핀! 나 가봤어. 거기 애들 너무 불쌍하더라. 가난하잖아. 도둑도 많고.”

“거기도 여기랑 사는 건 같아요.”

“무슨 소리야. 가이드가 가방 조심하라던데.”

자스민은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줌마는 존대하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왔어?”

“결혼이요.”

“통일교?”

“아니에요.”

필리핀에는 무니스(Moonies, 문씨를 따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라고 알려진 종교. 90년대 중·후반까진 합동결혼으로 한국에 왔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었다.

“아니구나…, 어디서 만났어?”

“필리핀요.”

“연애? 아… 내가 말실수 했네. 미안, 미안.”

“….”

“남편이랑 나이 차이 많이 나지?”

“조금요.”

“10살 이상 나지? … 쯧쯧. 어려 보이는데….”

90년 후반부터 이주여성, 국제결혼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선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쉽게 볼 수 있었다. 한국에 시집온 동남아 여성을 보는 시선은 늘 슬펐다.

첫째가 2002년 취학했지만 자스민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슬픈 시선을 아들에게 보내는 걸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들의 외모는 누가 봐도 한국인이었다. 피부는 하얬다. 다행이었다. 나만 안 가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자스민은 결론 내렸다.

자스민의 아들

자스민이 남편 동호씨와 아들 승근이, 딸 승연이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2003년 이후 ‘다문화 가정 자녀의 왕따’ 문제가 종종 보도됐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단어가 2003년부터 생겼으니 그 전엔 혼혈아로 보도됐을 것이다. 혼혈아든 다문화 가정 자녀든 그런 식의 규정은 당사자들에게 적절하지 않았다.

아들 승근이가 취학한 후, 한 달에 두 번은 학교에 나가 급식을 도와야 했다. 자스민은 급식봉사에 시어머니를 보내고 시동생을 보내고 남편을 보냈다.

2004년 10월, 그러니까 승근이의 2학년 2학기였다. 어느 날 아들이 물었다.

“엄만 왜 학교 안 와?”

“바빠서.”

“뭐가 바빠? 왜 거짓말 해?”

“….”

“이번 급식봉사엔 꼭 와. 응?”

“승근아…, 엄마는 다른 엄마들이랑 좀 다르잖아. 그래도 괜찮아?”

“응! 내가 애들한테 다 얘기했어. 엄마 필리핀 사람이라고. 엄청 예쁘다고. 영어도 정말 잘한다고. 이번엔 꼭 올거지?”

“어? … 어, 응, 그… 그래.”

첫 급식봉사.

엄마 자스민은 무채색 옷을 입었고, 무난한 신발을 신었다.

내가 백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자스민은 생각했다. 백인이 아니어서 남편을 반대했던 친구들 생각이 났다. 인종 편견은 전 지구적인 것이어서 자스민은 피할 수 없었다.

급식은 강당에서 진행됐다. 엄마들끼리의 대화가 들렸다.

“원어민 선생님인가.” “앞치마 두르네. 도우미를 대신 보냈나 봐.”

자스민은 연희동에 살며 두 명의 필리핀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둘 다 직업이 가사 도우미였다. 학부모들은 현실을 얘기했지만, 예외를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 외국인이다.” “와~ 아프리카 사람인가봐.”(꼬마들은 피부색이 검으면 아프리카를 먼저 떠올린다.)

자스민은 활짝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했다.

“맛있게 먹어요.”

“우와, 한국말 한다.”

저기 멀리서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찾나. 그냥 나가지 않을까. 모르는 척하면 어쩌지.’

자스민은 숨이 막혔다.

“엄! 마!”

그건, 지금까지 아들이 엄마를 불렀던 목소리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아들은 엄마를 부르며 뛰어왔다. 강당에 있는 모든 이가 아들을 봤고, 고개를 돌려 자스민을 봤다.

“얘들아, 우리 엄마야.”

꿈틀! 엄마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학부모들도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승근이 친구 엄마예요.”

승근이는 학교에서 반장이었다. 아들은 강당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아무도 자스민을 무시하지 못했다. 아들이 측정하지 못할 만큼 커 보였다.

그날 이후 자스민은 학교에 자주 갔다. 봉사할 일이 있으면 손을 들고 자처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좋은 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아들에겐 ‘몽키’라는 별명이 생겼다. 아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 나 원숭이다.”

별거 아니라는 저 말투…, 저 쿨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쿨한 아들이 몇 번 싸운 적이 있다. 원숭이란 놀림이 엄마를 향할 때.

첫 급식 날은 자스민의 한국 생활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그녀는 안으로 숨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영화 ‘의형제’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맡은 역은 도망간 베트남 며느리. 외국인 며느리에 대한 고정관념은 일상에서도, 영화에서도, 꿈 속에서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유쾌하게 배우와 정치인을 꿈꾼다. 내일 ‘자스민의 꿈’을 소개한다. 필리핀 며느리가 꿈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글=강인식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내러티브 저널리즘(narrative journalism)

기존의 ‘단순 사실 전달식’ 기사 형태에서 벗어나 소설 문장처럼 ‘이야기하듯’ 구성하는 기사 형식. 주요 인물을 추적해 사건의 이면을 보여주고, 사실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