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국 농악은 찬송소리 막걸리는 불로초 술
한국 농악은 찬송소리 막걸리 약주는 불로초
허왕보굴 앞에 오두마차가 진시황제의 재생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진시황 삼신산, 설경성 ,허중민, 권채, 유자광, 중종후궁 희빈, 대장금, 허준, 한의학의 연고지
진시황제가 타고 다닌 오두마차가 유일하게 이곳에 만들어저 있다
아래의 그림처럼 진시황제를 모셔내어 타고 나간다는 종교신당 허왕보굴 은 불로초 케러온 서시의 종교신당으로
필자가 찾아낸 유적이다
한국농악은 각 삼국시대 국토 지방 마다 다른데 그 다른 것은 박자와 태평소 피리소리다
우리나라는 특이하게도 혼합박자를 사용 한다
배우기도 어렵고 이상한 박자인데 모두가 가장 먼저 순서로 치고 시작 한다
그 소리가 삼국시대 각국마다 다른 토탬종교 즉 동물을 신으로 모시는데 새는 하늘에서 살기에 그리고 말까지 천마를 타고 내려온 박혁거세 심지어 강물에 떠내려 온 석탈해왕도 까치 새가 날아와서 노래했다
가야국도 거북이 김해 구지산 꼭대기로 내려와 구지가 그시대의 토탬찬송가로 4국 모두 천신하강 임금아기 탄생을 노래했다
백제는 요.순. 은나라 탕왕시대 기우제 토탬소리였던 비들기소리 고구려는 꾀꼬리 한쌍노래 황조가가
고구려는 경기농악으로 그새소리 모방박자 칠채가락이 남아있고, 백제는 오채질굿 정읍농악으로 신라는 밀양과 진주농악에 이런 혼합작자 닭 말 까치 모방소리 길군악 박자가 있다
조선500년 민족음악 말살에 멜러디는 정읍사, 동동,곡을 견훤 이자겸 충열왕 세조대왕 유자광 노력으로 정읍 대장금 너디마을과 중국사신 향연지 음성향 악공들의 수용소에서 정읍농악 우도굿으로 삼국토탬 통합한 농악이 되었다
이 굴에 삼신산 불로초 구하러온 서시가 진시황제를 이곳에 종교신으로 모신곳을 가야망명족 허씨들이 허왕보굴
이라고 허시 시조를 모신 곳으로 추정한다
어느나라에도 없는 오두마차가 굴앞에 있는 이유이다
진시황제 능에서 출토된 오두마차 이다 이와 같은 모양 돌마차는 이곳 뿐이다
뒤에서 본 오두마차 말 모양
그런데 이런 박자와 같이 지금도 그 지방의 사투리가 꼭 같다
그래서 한국 기와집이나 일주문 그리고 묘비석의 상부는 비들기 꾀꼬리 닭 까치등을 상징하는 새모양을 만들고 아래의 밑은 수신 용을 상징하는 김수로왕 거북을 지신으로 만들어 종교건물로 사용했다
조선은 가야망국으로 백제땅 망명독립운동 태인허씨(인천이씨) 이의방의 친족이 함경도 여진족과 지리산 왜구를 치고 조선을 창업했다
그래서 제사그릇도 가야토기 이며 묘의 비석도 거북과 새를 상징하게 된다
그런데 조선시대 당상급 벼슬자 중국신의 상징용을 조각하여 우리나라 환웅조상신 새모양 머리를 치우고 양반행세로 도취되어 있다
고려시대 까지 이런 비석이 불교유적이였으나 조선시대 중국 모방으로
용모양 머리로 영의정급 비석이 되어 지금은 가짜 벼슬을 조상에 씨우는 묘지유행국이 되었다
한민족 정통의 비석은 이것이다 훗날 에 밣혀진다
기와집은 산비들기 상징 색이며 이런 비들기 모양으로 비들기 천신을 위하여 만 만들고
빨간 기와가 한국에는 그래서 전혀없다
중국에서도 황제나 당상관이 사용한 비석머리 인데 조선계급이 일본통치로 무산되자 벼슬소원에 굶주린 백성 노예 광대 할것없이 누구나 중국황제 초대형 용머리 비석으로 삼천리 산천이 덮여 있다
한국의 종교 음악과 묘의 비석 농악의 소리는 철저하게 보존된 종교신앙 행사이기에 원형이
5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민족풍속 말살정책에 농악기를 압수하여 버린 것을 어사 원경하가 보고하자 정읍사람 영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영조왕에게 민족 고래의 풍속으로 말릴 수 없다고 하여 계승되었다
그 다음에 의식주 옷 역시 고구려벽화부터 소매가 길고 새의 날개처럼 생겼다
그리고 농악에서 새의 날개모양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새로 등장하여 교시를 내리는
종교성직자 교황의 모습이 였다
중 승려 도사는 불교시대 불교성직자 종교행사 그대로 중이 주관했다
각시 여인은 삼국시대 원화 화랑도 시대 모계사회 여자무당이 교황으로 국가 기우제등 행사에서 하늘 주관하는 등장 인물이였다
이들 종교가 퇴색되어 조선시대는 양반 사대부 구대진사 통정대부가 농악을 지휘하여야 만 유지를 했다
시대마다 화랑, 불교승려, 유교양반,이 다르게 농악을 진행하여 왔는데 일본이 식민지 일본선전정책 조선양반 부패를 연극으로 만들어서 지금 농악 탈춤 판소리등에서 비리 악역으로 만들어 공연 한다
조선시대 양반의 세력은 북한의 당원 남한의 안기부 세력이였다
그런데 모든 마을이 양반이 허가해야 행사 통치하는데 양반을 욕하다가는 누구도 그마을에서는 살수 없이 맞아 죽는다
이것은 일본이 통치하면서 조선양반의 부패선전으로 군사해산하고 즉시 군부대사용 군악기까지 모두 농악기로 사용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용깃발 기를 일본서기의 기록된 숭신천황의 명령문자 ‘농자천하지대본야’ 즉 ‘농자는 천하의 근본 이니라’라는 천황의 명령을 교시로 외치고 다니는 일본천황을 신으로 모시고 다니는 꼴이 되었다
고려 유물 조선의 수신사나 어느 유물에도 종교 신앙에는 농자천하지대본이 없다
일본이 1930년대 김영수의 글에서 처음 농악이란 단어가 나온다
농악의 깃발은 새를 상징하는 꿩깃털 깃봉과 마을에 세워진 솟대 그리고 고구려 유리왕이 꾀꼬리 솟대 아래서 기도하듯이 새를 그려서 종교 신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전라도농악은 거의 길굿이라는 인사굿장단 같은 장단으로 만 산비들기 소리를 내고 새의 상징 꿩털 깃발을 신으로 모신다
경기도는 칠채굿 꾀꼬리소리를 농악기로치고 꾀꼬리 신에 기도하는 소리로 서울말이 꾀꼬리소리다
경상도는 닭소리 말우는 소리 까치소리 그대로 경상도 사투리다
그래서 후삼국 견훤통일 노래로 비들기 꾀꼬리 닭 말 까치소리 서열순서로 되어 있다
우리민요 우리농악은 이런 공식을 벗어난 민요는 창작곡이다
이런 자료를 올려도 묵살하고 지기 학계정설이 아니라고 농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형문화재심사 또는 농악경연심사를 한다
그리고 음식물은 일본 중국몽고와 다르게 약초를 음식으로 먹는다
막걸리를 약주라고 한다
모든 곡식이나 약초는 독이 있다
그 약초 독을 제거하려면 술에 담아서 독이 없는 약으로 한국은 동방불로초의 조선국으로
이름이 나서 진시황제가 서시를 보내서 한약술 막걸리로 제조된 탕약을 조한 것으로 본다
삼신산은 열자의 기록에 13개 거북이 동해바다 물위에 거북 사는데 용삭이라는 용이 잡아 먹어서 3개의 섬으로 만 남았다고 기록했다
고려시대 이자겸이 송나라사신 맞이 삼신산 섬이 있는 삼산동 음성향의 유적
그앞 입암산 방장산을 이곳에서는 삼신산으로 지금도 주민들이 부르고 있다
초초의 역사서적 산해경의 기록에서 삼신산으로서 그 섬이 비래 방장 영주인데 영주는 지금의 고부 비래는 변산 방장은 방장산으로 모두가 정읍사 노래로 중국사신의 가무향연지 신라 음성향(陰聲鄕 정읍시 음성부락 동국여지승람 고부편)으로 음성서 뜻이고 고려시대는 기로회(耆老會) 한림들의 가무자리로 이마을 이름이 기로. 지로. 음성으로 불린다
그리고 남원 광한루, 태인 피향정, 음성향, 이 모두 세개의 거북상진의 섬이 있는 연못이다
이 지역은 마을 방죽에도 가운데 섬이 있는데 그 섬은 농악치며 모셔온 산신 깃발을 신방 기도순회하고 밤에는 이 방죽섬에 모셔두는 보관소이다
그 섬이 불로초 삼신산을 만들어 놓은 신앙터이다
이 마을이 태인허씨 소유지였고 후손 이자겸이 송나라 망명 귀족 송씨를 대장금 마을의 요새지 자기 땅에 살게하여 그들이 몽고 남침 7차 전쟁에서 격파 생포 몽고와 화친하였다
몽고가 동로마 까지 통일하였는데 몽고 황제가 병으로 위중하여 세계의 의사와 약을 구했는데 대장금 마을 설경성 의원이 몽고황제의 병을 완치 몽고황실로 대거 고려 인물들이 들어갔다
고려시대 약초기록을 세종대왕 시대 사가독서 1호 권채가 향약집성방 책을 만들엇는데
대장금 마을 너디가 권채의 홍씨 외갓집으로 고려시대 설경성을 계승한 어의 허중민의
고향으로 같은 성씨 허준이 동의보감을 써는데 이시기는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강원도에서
숨어살다가 태인 장금산에서 홍길동전을 썼다
홍길동은 권채의 동서 홍령의 사촌 동생이다 홍령은 이곳에서 살았다
조선 태종이 이성계파 허씨를 숙청하여 허균은 강원도 동의보감 허준은 산청으로 모두 벽지에서 숨어 살앗다가 광해군 때에 고관 이이첨 허균이 득세하던 때 이곳으로 허준이 와서 설경성 허중민 그리고 권채의 향약집성방책을 기초로 동의보감을 만든 것으로 보아진다
광해군시대는 세조대왕 연산군 유자광계통 실학파 민족주의자 실권으로 허씨들이 본고향에 몰려들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주자학파 이율곡의 제자 송익필 이귀 정철파 세력의 집권으로 다시 허씨들이 분산되었거나 형제족 양천허씨 로 거의 성을 바꾸어 생존한 것으로 보여 진다
태인허씨는 희귀하고 정읍등 전라도지역 땅에 거의 양천허씨 집성촌으로 보아 허씨 수난사를 알게 한다
조선 중종반정 최고 일등공신이였던 유자광파 들이며 유자광이 자기 심복 홍경주 딸을 후궁으로 희빈을 들이면서 시녀로 대장금이 따라 궁중에 갔다
유자광파 박영문을 역모로 몰아 죽이자 문정왕후가 희빈을 내몰려고 악독한 압력이 가해저서 죄주려 했던 대장금이 살아 남은 것은 왕비의 병을 치료한 뛰어난 의술이였다
그런 역사는 오랜 5000년 기간 경험과 기록 신선약 불로초는 장수식품을 막걸리로 삭혀서 먹는 기술 계승이였다
여름에 밥이 쉰것을 약초 진득찰 등 여러식물을 넣어 식헤. 감주를 만들어서 자주 먹었다
서양 사람을 생 과일 채소를 먹고 중국사람은 생 양파를 먹는다
한국 사람은 젓 김치 된장 간장 막걸리등 발효시켜서 먹는다
음식이 오랜 시간 발효하듯이 사람 역시 곰 개구리처럼 굴속에서 잠을 자고 공부하여 신으로 탄생 되는 것으로 믿고 신앙생활했다
그 신앙이 단군신앙이고 그런 종교가 일본에 남은 천석굴(天石屈)신화 또는 동경이름 신쥬꾸(神宿區)로 일본 시조 천조대신의 탄생신화다
일본서기 478년기록문 그대로 천석굴(天石屈)신화 그 굴과 똑같은 모양과 478년 백제 정읍 태인 대산성 기생반숙조(氣生磐宿祚) 반란사건기록이있다
기생반숙미해(氣生磐宿 彌解)그 이름이 ‘바위에서 자고 있는 미륵 햇님’ 이였는데 지금은 허장군 턴생 허왕보굴(許王寶屈) 이름이다
매년 씨름으로 선수를 뽑아 농악치고 신을 모셔내는 풍속이 전래한다
이런 자료를 종합하여 보면 농악은 종교 막걸리는 불로초 한약탕으로 다른나라의 종교와
음식과는 아주 다르다
5000년 토탬시대 농악을 '농자천하지대본야' 일본 숭신천왕 교시문자 깃발모시기, 100년 농부놀이 불교악기놀이로 가르치는 한국교육학계가 군사 구테타 혼란시기 자기들 임의로 준 그 내용 그 모습이 우리것이라고 하다니 ....
한류문화 40년 리틀엔젤스와 김덕수사물놀이가 후진국 한국을 세계에 올렸다
그것은 40년 창조가 아니라 5000년 꾀꼬리소리 찬송하기 한약초로 약밥 한약초로 술담그는 5000년 기술의 계승이다
40년대부터 60년대 한국의 노인들은 거의 약초를 넣어만든 약술을 음료수로 복용했다
세무서 적발단에게 술독에서 익모초 쇠무릅 똥풀등 약초를 꺼내어 보여도 묵살 벌금을 물렸다
그리고 한국인은 여우같이 썩은 박테리아 만 먹고 식인종 인디언 같이 깃털상모쓰고 농악치는 야만인으로 기르치고 아리랑 민요를 퇴페 방가라고 벌을 받았다
양조장 막걸리는 약초가 없는 이다 서양 포도주는 포도 하나이지만 대장금 마을에서 지은 권채가 지은 향약집성방은 그 분량이 엄청나다
권채가 지은 향약집성방을 가난한 북한에서 한글로 번역하여 그것을 복제한 책이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지방문화 축제 때에는 이런 역사와 고고학에 기반을 둔 축제가 없이 정치선전 정치인 공적 알리기 행사비 부풀려 돈남기기 등으로 국가예산 소비로 일관하기도 했다
지역문화 역사 관광과 아무 의미도 없는 가수노래 급조된 식품 콜라 맥주등 소비로 형식만 가추고 정치자금 비자금 만들기 행사장으로 문화발전은 희박하다
100% 한국 고유문화 자료보존 한 한류의 근본은 농악과 막걸리이다
그래서 싸스열병에도 한국인은 무사했고 신종풀루 역시 고령자보다 어린애나 한식과 막걸리에서 먼 서구적 습성 한국인이 약하다
민족을 버리고 민족을 무시해야 존경받는 한국 사회 이제는 힌국의 원류 농악과 막걸리를 심층 분석 교육해야 한다
권희덕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