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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실의 성이 애신각라(愛新覺羅)인 이유는 뭘까요?| 역사, 문화 동

도심안 2009. 11. 8. 20:32
청나라 황실의 성이 애신각라(愛新覺羅)인 이유는 뭘까요?| 역사, 문화 동호회
신박사 조회 112 | 09.10.01 16:46 http://cafe.daum.net/obdh/AHQ2/86

청나라 황실의 성이 애신각라(愛新覺羅)인 이유는 뭘까요?



청나라 황실의 성이 애신각라인 이유는 ...

애신( 愛新)-신라를 사랑한다.

각라( 覺羅)-신라를 기억한다.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가 신라 경순왕의 후예라고 합니다.


후김(대청제국) 시조 애신각라 누루하치

[愛新覺羅-大淸帝國]



 북부 한국, 만주대륙 이곳은 태초부터 한민족의 영원한 보금자리였으며, 한웅천황 이래로 단군쥬신, 가우리, 대가우리, 대김제국을 거치며 민족 사이에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민족의 본 고향땅이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퇴하며 발생된 행정 공백의 틈을 뚫고 한족(漢族)의 신흥 세력인 명나라와 옛 땅을 다물하려는 왕씨 가우리[高麗]의 다툼에서 민족 숙원의 절대명령을 거부하고 제 한 몸의 영예에만 집착했던 이성계의 반역으로 그만 민족의 귀중한 성역을 명나라에 빼앗겨 버리고만 통한이 서린 우리 땅이다.

 비록 명나라가 만주를 빼앗았다고 하나 그들의 행정력이 미치는 곳은 겨우 요녕성 정도에 불과했고, 그 동쪽의 광활한 대지에는 여전히 옛 여진족(女族)이 각 부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본서가 일찍이 밝힌 것처럼 여진족은 쥬신[朝鮮]족으로 우리와 같은 족의 일파이다. 만족 대사전(滿族大辭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듯이 여진(女)은 만족의 선세(滿族的先世)이며 만주어 발음으로 쥬신[朱先, 朱里, 諸申, 혹은 珠申]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와 같은 민족[朝鮮=珠申] 쥬신족임은 명백한 진실이다.


 개천(開天) 5457년: 서기 1559년, 만주의 대영웅 누루하치[努哈赤]가 멍거테무얼[猛哥帖木]의 5세손, 탑극세(塔克世)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인데, 애신(愛新)은 실라[新羅]를 사랑하고, 각라(覺羅)는 실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옛 조국 실라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옛 실라의 망명 집안인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 신단민사는 애신각라는 김태조(金太祖)와 같이 계림(鷄林) 김(金)씨의 후손이라고 했다. 신라가 망한 후 경주 김씨 경순왕의 망명 왕자들이 금강산과 흑룡강성 그리고 백두산 속으로 흩어졌다가 훗날 제각기 힘을 모아 다시 흥기했던 것이다.



개천(開天) 5481년: 서기 1583년, 누루하치는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을 위하여 만주에 들어와 있는 한족(漢族: 明國)들을 추방하기 위하여 군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강력한 힘을 가진 한족을 몰아내려면 우선 만주를 통일한 후 모든 힘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이리하여 시작된 민족 통일전쟁은 수년간 계속되었고, 마침내 건주 여진(여진이 여러 부족 중 가장 강력했던 부족)을 손에 넣은 후 서기 1587년에는 쑤쯔허[蘇子河] 상류에 최초의 성을 구축하여 강력한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서기 1607년에는 후이파를, 13년에는 우라[烏拉]를 병합하여 명실공히 통일 여진국을 만든 후 서기 1616년에 한(汗)의 지위에 올랐다. 새 나라의 이름은 대김제국(大金帝國)의 영광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후김(後金)으로 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정하였다.

 

누루하치는 역사의 초기부터 써 오던 한자(漢字)가 우리 쥬신족의 소리말에 적당치 않으므로 새로운 글자 "여진 문자"를 발명하였으며,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여 나라의 기본으로 하고 도성을 허투아라[赫圖阿拉]로 옮겼다.


서기 1618년, 마침내 대명 선전포고를 하고 푸순[撫順]을 곧 취하더니, 곧이어 청하(淸河)지방의 한족들을 멀리 서쪽으로 내쫓고 이 지역을 완전히 다물해 내었다.

개천(開天) 5523년: 서기 1625년, 후김은 서울을 심양으로 옮기고 요하 이동 70여성을 모조리 탈환하였다. 누루하치가 죽자 그의 여덟번째 왕자인 황태극[皇太極]이 즉위하여(1,636년), 나라 이름을 후김(後金)에서 청(淸)으로 고치고 여진인을 만주인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후김, 청으로 이어지는 만주의 동포들은 남쪽에 있는 동족의 나라인 조선[李氏 朝鮮]에게 연합군을 형성하여 민족의 원수인 한족[漢族之國=明]을 토벌하자고 간절히 요청하였으나, 얼빠진 이씨조선 왕족들은 동족인 청을 거부하고 명나라에 빌붙어 만주 동포들을 실망시켰다.

 오히려 이를 강압적으로 바로잡으려는 군사 행동(丙子胡亂)을 굴욕적인 국치였다고 원한의 감정만 쌓게 되니, 이씨 왕족들의 사대주의 사상은 가히 실라가 당을 상대로 행했던 추태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종횡으로 누비며 생업을 꾸리던 만주인들은 기마민족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특유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른바 그 유명한 8기제도(八旗制度)가 그것이다.

이 제도는 평상시에는 밭 갈고 사냥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일단 전시 동원령이 내리면 그들이 속한 깃발을 들고 자신들이 타던 말에 올라 그대로 전선으로 내닫는 체제여서, 국가 위기에 대처하는 기동력이 대단히 신속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8기에는 제각기 고유한 색깔이 있었다. 정황(正黃), 정홍(正紅), 정람(正藍), 정백(正白), 양황(黃), 양홍(紅), 양람(藍), 양백(白)이었다. 8기제도는 군사, 경제가 일체된 사회 체제로서, 누루하치는 8기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군정 대사는 8기 수령들이 공동으로 상의하여 결정하고 최고 통치자의 계승권도 8기에서 선거를 통해 뽑았다. 이처럼 청조(淸朝)는 항상 준전시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전국민이 모두 동원되는 국가 총동원 체제였으므로, 인구 비례상 10대 1이 넘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하고 무려 276년 동안 중국인들을 다스리며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조가 중국을 제압하고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위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세습왕제를 받들고 있었으면서도 장자가 아니라 왕자들 중 가장 훌륭한 왕자를 뽑아 황제로 추대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씨조선은 왕을 조종하려는 실세들의 첨예한 대립과 투쟁으로 나라는 서서히 힘을 잃어갔던 것이다. 청의 이 제도는 정여립이 생각했던 왕의 선출 방식이었는데 그는 못난 이연 왕을 만나 역적으로 몰려 죽고 말았던 것이다.


※ 우리 만주족이 중국 한족을 다스리면서 주인행세를 했음은 서양인들 눈에도 정확히 비췄던 듯싶다. 그것은 서양인들이 중국인을 다스리는 관리를 "만다린"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만다린-MANDARIN"의 한자는 "滿大人(만대인)"으로, 곧 만주 대인이라는 뜻인데, 중국 발음으로 大가 "다", 人이 "렌"이기 때문에 만주 대인이라는 말이 만다린으로 변하였음을 똑똑히 밝혀 둔다.


※ 만주인들의 중국인 차별 정책도 대단했었는데, 한 예로 중국인들도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머리를 변발하고 길게 따내려야 했으며, 만주 땅은 내지(內地)라 하여 중국인들은 출입을 제한당했고, 특히 성지(聖地) 백두산 100리 이내로 접근하면 죽음으로 죄를 갚아야 했을 정도였다.


※ 백산흑수록(白山黑水錄)에는, 청조(淸朝) 시조는 장백산 북쪽 돈화현(敦化縣) 액마색(額摩索) 남쪽 100리 지점인 야액다력성(野額多力城)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 본 저자가 만주의 곳곳을 헤매며 애신각라의 발자취를 추적하던 중 몇몇의 괘씸한 중국의 학자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조선족의 학자라는 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애신각라를 만주나 한국인이 아닌 중국 송(宋)나라 인으로 조작하여 탄생시키려는 공작을 한참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우선 "애신각라의 이름을 후금이나 만주의 8대 성씨들 중에서 발견할 수 없으므로 원래 만주인이 아니다. 따라서 분명히 중국의 송나라가 망한 후 김제국(金帝國)시절 만주지방으로 망명했던 교로(交魯)가문일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교로(交魯)의 북중국 발음이"Jiao-lu"여서 애신각라의 각라(覺羅)의 중국식 발음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애신각라의 애신은 이름이고 각라는 성이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중국에서 성을 이름 다음에 썼는가? 하는 질문에는 대답을 못하고, 어째서 중국학자가 한자의 뜻을 버리고 발음을 따르는가 하는 질문도 묵살한 채, 하여튼 애신각라는 만주인이 아니고 송나라 사람임으로 중국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그의 논문은 수정 없이 그대로 발표하여 당당하게 역사를 뒤집었다.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 우리의 역사는 지금도 무섭게 꼬이고 뒤틀리며 왜곡되어가고 있다.